소설리스트

1. 반쯤의 연민 (2/18)

벌써 몇 년은 된 이야기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갑갑한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목적지는 강원도 어디에 있는 별장이라고 했다. 이따금 차창 밖으로 볼 만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지만 감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머리에 뒤집어쓴 긴 가발은 제 위치에 있는지, 펄럭이는 치마가 우스꽝스럽진 않은지, 발을 꽉 옥죄는 구두를 신고 제대로 걸을 순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불안감에 애꿎은 치맛자락만 몇 번이고 끌어 내렸다.

스물두 살의 여름, 나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많았다. 학업이나 친구, 그밖에 많은 것….

키가 자랄 때마다 하나씩 포기하고 나니 성장이 끝날 즈음 내게 남은 거라곤 엄마와 동생뿐이었다. 사소하게 가난을 탓하긴 했어도 그때까진 견딜 만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 잠시간 희망을 꿈꾸기도 했다. 잃을 게 없으니 이제 모으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조차 과분했던 모양이었다.

두 아들을 홀로 건사하는 동안 엄마의 병은 이미 몸속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았다고 했다.

‘많이 늦게 오셨네요.’

피곤한 얼굴의 의사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나마 남은 방법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몇 번이나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라는 말을 꼭꼭 씹어 삼키는 것 같았다.

0%에 가까운 아주 적은 확률일지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숫자마저도 우리에겐 너무 비쌌다.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는 건우를 말리고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부족한 수면과 익숙하지 않은 노동에 혹사당한 몸이 곧 부서질 것 같다 싶을 때쯤, 말끔한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낯익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들고.

여자아이가 죽은 건 당시에도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지영이라는 이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살던 허름한 동네에서 남매처럼 지냈던 옆집 여자아이. 특별히 그 아이와 성격이 잘 맞아서 친했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가까이 지내며 자랐던 건 순전히 지영이네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에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가면, 어린 나와 건우만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어린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돌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지영이네 외할머니는 그런 우리 형제를 종일 돌봐 주고는 하셨다. 몇 년이나, 별다른 대가도 없이.

다들 고만고만하게 형편이 어려워 인심이 각박한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베푸는 걸 좋아하는 지영이네 외할머니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다.

우리 형제와 달리 지영이에겐 아버지가 있었음에도, 그 집 형편이 더 나은 건 아니었다. 지영이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인간 말종이었다. 달에 한 번이나 얼굴을 비출까 말까 했지만 그마저도 차라리 보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 개차반이 집을 다녀가는 날이면 나도 건우도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옆집에서 세간살이 깨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지영이와 할머니는 그 망나니 손에 죽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남자는 어김없이 물건들을 깨부수며 돈을 요구했고, 아무리 닦달해도 돈이 나오지 않자 제 분을 못 이기고 밤중에 집에 불을 질렀다.

좁은 길목을 한참 올라와야 하는 동네였다. 겨우 소방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모두 숨을 거둔 뒤였다.

나를 찾아온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장명수라고 소개했다. 건네받은 명함은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사람 것이었다.

‘태원그룹의 부회장’. 빳빳한 명함을 받아들고 멍하게 서 있는 내게 장명수는 이상한 부탁을 했다. 한지영이 되어 자신의 부친에게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였다.

흔하다면 흔한 사연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일찍 부모를 잃은 장명수의 부친은 어린 시절 한지영의 외가에 큰 신세를 졌다고 했다. 이제 늙어 죽음을 목전에 두니 은혜를 갚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아들에게 지영이의 외할머니를 찾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그녀가 세상에 없다면 그녀의 핏줄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장명수가 지영이의 가족을 찾았을 땐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짐짓 효자인 척 부친이 상심할 게 걱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듯한 얼굴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지영이의 일을 안타까워하거나 부친을 걱정하는 사람 같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내게 무언의 눈치를 주고 있었다. 적당히 알아듣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이.

결국 날 설득한 건 감동적인 효심이 아니라 돈이었다. 억지스러운 제안이긴 해도 나는 손해 볼 게 없는 일이었다. 장명수는 인심 좋게 넉넉한 사례를 약속했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소소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산다는 사람만 있으면 몸이라도 팔아 볼까 하던 참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얼토당토않은 일을 하겠노라 대답했다.

그즈음 나는 아주 삐쩍 마르긴 했어도 여장이 자연스러울 만큼 키가 작지는 않았다. 장명수는 부친의 눈이 침침하니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내심 다른 대역을 세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어차피 진짜 한지영이라도 그렇게 어린 시절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기억은 많지 않을 테니까. 적당히 또래의 여자를 구해 몇 가지만 가르쳐 주면 더 그럴듯한 한지영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안일한 생각은 장명수의 부친, 장철웅 회장을 만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토록 애타게 찾았다기에 나는 머릿속에 식상한 장면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백발노인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하지만 막상 만난 장 회장은 휠체어에 기대 앉아 굳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펴봤을 뿐이었다.

“네가 한지영이라고?”

추궁하듯 묻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대단했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 때문에 비틀비틀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나는 벌써 정체를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쇼에 동참했는지를 생각하면 마냥 움츠러들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네, 할아버지. 제가 지영이에요.”

기껏 말투까지 고쳐 가며 공손하게 인사해 보였지만 장 회장은 흥, 하고 코웃음까지 쳤다. 애타게 찾았다는 은인의 손녀를 별로 반가지 않는 것 같았다. 노인은 내 곁에 서 있는 장명수에게 호통치듯 말했다.

“이젠 닮은 아일 찾아 올 성의도 남아 있지 않나 보구나.”

그 말에 대강의 사정이 이해가 됐다. 이미 몇 번이나 가짜가 왔다 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굳이 여장을 시키는 억지스런 수까지 써야 했었던 것이다. 피는 안 섞였어도 지영이만큼이나 그녀의 외할머니와 가까웠던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까. 장명수는 쩔쩔매며 부친을 설득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그래?”

장 회장은 빈정거리듯 되묻고는 내게 물었다.

“네 외할머니 고향은 어디냐.”

갑작스런 시험에 나는 눈을 굴렸다. 지영이네 외할머니의 고향…. 어린 시절 지방 유지의 외동딸로 자랐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전주….”

“그럼 생일은?”

“새, 생일요?”

우리 외할머니 생신도 기억을 못 하는데 10년도 전에 돌아가신 옆집 할머니의 생신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리바리하게 말을 더듬는 사이 성격 급한 노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확인 절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상상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장명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저 한지영인 척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무슨 오디션을 보듯 한지영으로 인정받으란 소리까진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장명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 회장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을 뿐이었다.

장 회장은 나를 몇 번이나 다시 훑어보더니 휠체어를 돌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쫓아 들어가 설득을 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고작 얼굴 한 번 보이고, 말 몇 마디 한 것으로 사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건 잘 알았다. 장명수는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한 사나흘은 더 보실 거다. 들어가 봐.”

장명수의 비서는 트렁크에서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내용물이라곤 여장에 필요한 물건들이 전부일 것이다. 분위기만 봐서는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것들을 건네받았다.

내가 그렇게나 믿음직스러운 건지 아니면 아예 기대를 접은 건지, 장명수는 격려하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넓은 정원에 홀로 남았다.

***

“학생이 이해해요. 그동안 하도…. 아니, 이미 알고 있으려나. 나도 이젠 잘 못 믿겠어.”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도우미 아줌마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손님인데 넓은 식탁에 앉은 건 나 혼자였다. 장명수의 기대와는 달리 장 회장은 나를 가짜라고 확신한 듯 첫 식사조차 함께 해 주지 않았다.

“제가 몇 번째예요?”

“다섯 번째지, 아마?”

그녀는 아마 여섯 번째도 올 거라 생각하는 듯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네 명이라. 장 회장이 학을 떼도 할 말이 없을 숫자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섯 번째도 만나 볼 만큼 간절하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건 장명수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몇 번이나 실패한 일을 또 하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게 걸린 일이 틀림없었다.

사나흘은 더 볼 거라던 장명수의 말대로 사흘 동안 장 회장은 날 쫓아내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노쇠한 장 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이따금 모습을 보여도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하려면 해 볼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굳이 장 회장에게 내가 반쯤은 진짜라는 것을 피력하진 않았다. 같잖은 양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진짜임을 인정받으려 애쓰는 일 자체가 가짜임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째 밤, 나는 도우미 아줌마를 통해 다음 날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는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나는 저녁 산책을 하는 장 회장에게 다가갔다. 내가 곁에 선 걸 눈치챘음에도 장 회장은 휠체어에 앉아 조용히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는 최대한 곱상한 목소리로 장 회장을 불렀다. 이미 다녀간 네 명도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래,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 볼 참이냐?”

마지막이니 들어 보기나 하겠다는 말투였다. 이미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 버린 상대를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영이네 외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길다고는 해도, 이미 장 회장과 헤어진 지 한참이나 된 시기의 일이었다. 장 회장과 나의 기억 속에서 지영이네 외할머니가 같은 모습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뇨. 사실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10살이었거든요.”

지영이가 살아 있었더라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장명수는 지영이의 생사를 제외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부친에게 전했다고 했다. 그 사고로 지영이의 엄마와 외할머니가 죽었다는 것도, 원흉인 지영이의 아빠가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다 객사했다는 것도.

다만 한지영은 그 불길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여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구실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이곳에서 여름을 날지, 아닐지는 채 하루가 되지 않는 시간 안에 결정될 예정이었다. 장 회장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답을 가르쳐 달라는 말에 장 회장은 허허, 하고 처음으로 그럴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걱정과 달리 장 회장은 순순히 옛날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를 한지영이라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추억을 곱씹듯 드문드문 기억나는 몇 가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신기하게도 장 회장이 그리는 지영이네 외할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 내 기억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특히 장 회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씨였던 할머니에게 빛 좋은 개살구로 장난을 쳤던 이야기를 할 때쯤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도 지영이네 외할머니가 건넨 먹음직스러운 살구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 떫고 신맛이란 지금도 절로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강렬했었다.

“이미 명수한테 다 듣고 왔으면서 뭘 그리 웃어. 내가 그놈에게 괜히 그 사람 이야기를 했다. 애비 등쳐 먹는 데다 쓸 줄 알았으면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게야.”

앞서 왔던 네 명의 지영이는 장 회장이 장명수에게 들려 준 몇 가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고 했다. 그러니 나 또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일 게 틀림없다는 듯이 눈을 흘기긴 했어도, 아까보단 한결 풀어진 얼굴이었다.

나는 지영이와 옆집 형제도 그 장난의 피해자라고 이야기했다. 반쯤은 믿어 주는 척 장 회장은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 사람은 배운 건 꼭 써먹어야 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지영이네 외할머니에 대해 기억이 나는 만큼만 전했다. 가난해도 베풀기를 좋아하셔서 지영이네 엄마는 조금 고생을 했다고. 소소하게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하셨으며, 동물을 귀여워하긴 해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조금 겁이 많으신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름이어도 밤이면 쌀쌀해지는 곳이었다. 장 회장은 늦은 시간까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기침이 나기 시작하자 겨우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장 회장은 떠나라는 통보를 거두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두고 내려간 식탁에는 웬일로 장 회장이 앉아 있었다. 함께 식사까지 하면서도 장 회장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듯이, 마지막 한 끼 정도는 같이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나왔다고 말했다.

가지 말라는 소리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장 회장은 나를 향한 의심을 거의 거둔 것 같았다. 마지막 한 걸음, 그만큼만 다가서면 나는 엄마를 살릴 확률을 살 수 있었다. 그 간격을 줄일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좀처럼 식사에 집중하지 못할 때였다. 장 회장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내 젓가락질을 지적했다.

“젓가락질을 왜 그렇게 하누.”

내겐 검지를 삿대질하듯 펴고 젓가락질을 하는 잘못된 버릇이 있었다. 고쳐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밥을 먹는 시간조차도 아껴야 하는 삶을 살아온 탓에 아직 완벽히 고치지 못한 습관이었다. 젓가락을 쥔 못난 손 모양을 보다가, 문득 장 회장이 내게 문제를 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서투른 모양새로 젓가락을 다시 바르게 쥐었다.

“할머니한테 배워서 그래요. 어렸을 때 집채만 한 호랑이한테 물려서 두 번째 손가락을 못 쓰셨던 적이 있었다면서요?”

어린 여자아이였을 할머니가 어떻게 호랑이를 만나고 살아남았으며, 물린 손가락은 어떻게 잘리지 않고 멀쩡한지, 의문이 많아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였다. 희미하게나마 흉터가 남아 있었으니 다쳤다는 건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때 생긴 습관으로 지영이네 외할머니도 검지를 쓰지 않는 젓가락질을 했고, 나는 그걸 보고 배웠을 뿐이었다.

집채만 한 호랑이 이야기에 장 회장은 박장대소를 했다.

“정말 호랑이한테 물렸던 건 아니죠?”

내 물음에 장 회장은 손사래를 쳤다.

“호랑이는 무슨. 토끼였다, 토끼. 풀을 주다가 손가락까지 같이 집어넣는 바람에…. 아니, 그런 허풍을 치더냐?”

“토끼요?”

호랑이라기에 사나운 고양이쯤이나 생각했던 나는 고작 초식 동물이라는 소리에 장 회장과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랫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장 회장이 나를 붙잡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장 회장은 그의 아들이 간만에 마음에 드는 일을 해냈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

장명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자신의 부친을 훌륭하게 속여 넘긴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뒤 그는 여러 번 별장에 드나들었고, 매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의심을 푼 장 회장은 날 핏줄 이상으로 가깝게 대했으며 약속한 기한까지 내가 남자란 사실을 들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내 꼴이 생각보다는 양호했던 모양이었다. 순조로운 나날이었다. 장명수가 새로운 일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여느 때처럼 장 회장을 만나고 나온 장명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2층 구석방으로 불렀다. 듣는 귀가 있을까 걱정됐는지 문 밖에 비서까지 세워 두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정체가 들켰을까 걱정하는 내게 장명수는 곤란하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네가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반쯤은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장 회장이 생각 이상으로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돈이 넘쳐 난다는 걸 제외하면 장 회장도 그저 평범한 노인이었다. 드나드는 자식이라고는 매번 사업 얘기나 하러 오는 장명수와 그런 장명수와 동행한 차가운 인상의 손자뿐이었으니 비위를 맞추며 곁을 지키는 한지영에게 정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 장명수는 기껏 운을 띄워 놓고도 뜸을 들이다가 몇 번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처박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곧 혼담을 꺼내실 거다.”

“네?”

“애매한 태도로 시간을 끌어. 생각해 보겠다고. 딱 잘라서 거절하는 건 안 돼.”

“상대가 누군데요? 어차피 그쪽에서 거절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볼게요, 하며 시간을 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거절해 버리면 금방 끝날 이야기였다. 장명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 아들. 미국에 있는 둘째. 그놈은 첫째랑은 달라.”

별장을 오가는 장명수의 장남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큰 키에 반듯한 얼굴이었지만 잘 웃지 않는 인상이었다. 특별히 반항할 거리야 있겠냐마는, 무척이나 순종적인 태도로 장명수의 그림자 노릇을 했다. 내 정체 또한 알고 있었고 가끔은 내 사기 활동을 돕기도 했다. 앉을 때 자세를 좀 더 신경 쓰는 게 좋겠다느니 하는 조언을 던지는 식으로. 어쨌든 그런 장남과 다르다면 이 사기극에 협조적이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그놈 불러들일 일 만들지 말고 적당히, 지금처럼만 해.”

장명수는 마치 자신의 둘째 아들보다 내가 더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 역시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번거로워지는 건 마찬가지인 터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뒤 장명수가 예고한 대로 장 회장은 손자와의 혼담을 꺼냈다. 장 회장이 그런 시대를 살아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재벌가 혼인 문화인지는 몰라도, 말을 꺼내는 장 회장조차 이 결혼의 당사자인 손자의 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손자 중에 인물이 끝내주는 놈이 있어. 장윤성이라고 하는데, 네 남편감으로 어떨 것 같으냐. 명수도 좋다더구나.”

문득 궁금했다. 내가 정말 한지영이고 장명수가 진심으로 가난한 며느리를 맞을 생각이 있다면, 장윤성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이 결혼은 성사되는 걸까. 그 사람은 저와 결혼할 의향이 있답니까, 하고 물어보려다가 괜한 부스럼이 될까 그만뒀다. 혹시라도 그 의향을 묻겠다고 손자에게 연락이라도 하면 곤란했으므로.

“에이, 할아버지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생각해요?”

대뜸 생각해 보겠다고 할 수도 없어 한번은 핑계를 댔다. 장 회장은 얼굴을 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비서를 시켜 사진 몇 장을 가져오게 했다. 사진을 건네며 그는 자신의 핏줄 중에는 이놈이 생긴 게 제일 낫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두 번이나 듣고 나니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 번듯한 장명수의 장남을 제치고 제일 잘났다고 하는 걸까. 하긴, 정말 잘생기기라도 해야 했다.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려면.

“아….”

결론적으로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훌륭한 개연성을 갖고 있었다. 이 얼굴로 이런 집에서 태어나 미국의 유명 대학을 다닌다고 했던가. 한 번도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정말 잘생기긴 했네요. 성격은 어떤 편이에요?”

반쯤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나는 흔히 하는 질문을 했다.

“어, 뭐라고?”

장 회장은 갑자기 소리가 잘 안 들린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성! 격! 이 사람 성격이요.”

“이놈의 보청기가 고장이 났나. 김 비서 어디 갔나. 김 비서, 김 비서!”

급기야 존재조차 몰랐던 보청기가 고장이 났단다. 장 회장은 날 외면하며 비서를 찾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어이구, 피곤하다. 지영아, 할아비가 낮잠을 좀 자야겠구나.”

“네?”

허둥대던 장 회장은 끝내 비서가 나타나지 않자 휠체어를 돌려 침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장윤성조차 채 가지지 못한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

장 회장은 결국 장윤성의 인성을 조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결혼을 고려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할아버지는 좋은 분이니까요.”

내 가증스러운 말에도 장 회장은 의심 없이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꼬장꼬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장 회장은 선택을 재촉하지 않았다. 내 실제 나이는 스물둘이었지만, 내가 연기하는 한지영의 나이는 고작 스물이었다. 결혼 같은 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나이라는 걸 장 회장도 인정하는 듯했다. 장명수가 원하는 대로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 시간은 어영부영 흐르는 것 같았다.

별장에서의 시간은 견디기 힘들 만큼 한가했다. 나는 교복을 입고 나서는 한 번도 한가로웠던 적이 없었다. 너무 어려 그럴듯한 일을 구하지 못했던 시절에도 동네 상인에게 부탁해 전단지를 돌리러 다녔고,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더 바빴던 건 물론이었다. 이곳에서는 돈을 받고 하는 짓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할 게 없었다. 가끔 장 회장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빈둥빈둥 낯선 여유를 즐기곤 했다.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장 회장은 조금 이야기를 하다가 피곤한 얼굴로 낮잠을 자러 들어갔다. 아직 밖을 돌아다니기엔 여름 볕이 강한 시간이었고, 다행히 별장 안은 쾌적했다. 별장에 있는 쉬워 보이는 책 하나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이 시간쯤에는 일하는 사람들도 각자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들곤 했다.

거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독서란 것을 해 볼 요량이었지만 쾌적한 공기, 식사 후의 나른함 탓에 솔솔 잠이 왔다. 얼굴에 책을 얹고 가물가물 눈을 감으려 하던 차였다.

“너야?”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만나 본 적도 없는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한 게, 너냐고.”

눈을 가렸던 책이 사라지고 얼굴 하나가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장윤성. 그를 보고 나서 든 첫 감상은 아무래도 장윤성은 사진발을 별로 못 받는 타입인 것 같다는 거였다. 현실감 없는 생김새에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일했다. 미국이 어디 달나라도 아닌데 왜 오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쉽게 안심했을까. 장명수가 아무리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어도 부친의 입은 막지 못했을 텐데. 거기다 더해 “생각해 보겠다”라는 애매한 대답을, 장 회장은 이미 긍정의 뜻으로 전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먼 길을 단숨에 날아온 거겠지.

“아니, 저기….”

오해를 풀긴 풀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단칼에 거절해도 되는 걸까. 이건 장명수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할배는 어떻게 속여 넘겼는지 모르겠는데 내 눈은 못 속이지. 너도 가짜지? 어떻게 사기를 쳐도 다 늙은 노인네한테….”

장윤성은 내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다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혹여 누워 있는 동안 가발이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머리를 확인하면서 장윤성의 말을 별수 없이 듣고 있었다. 정 곤란해지면 우는 척이라도 할까 고민 중이었다. 장명수, 하다못해 장 회장이라도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장윤성!”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 윤성이냐?”

다행히 해결사는 한꺼번에 나타났다. 아들의 귀국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온 장명수의 외침과 동시에 거실 한구석의 안방 문도 벌컥 열렸다.

장윤성을 발견한 장 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 건너 날아온 손자의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듯 살폈다.

“윤성아! 정말 보러 온 게냐?”

추측한 대로 이 상황의 발단은 장 회장인 듯했다. 전화로 이 소식을 전했고, 행동력 끝내주는 손자는 그대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거겠지. 자신의 미래가 남들의 입에서 모의되어 불쾌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의외라면 장명수가 정말 둘째 아들에게 아무런 귀띔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첫째와 다르다고는 하지만, 일을 이렇게 만드는 것보다야 아들을 미리 설득해 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어차피 진짜로 결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보러 왔냐는 장 회장의 물음에 장윤성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어, 근데 이건 뭐야. 딱 봐도 가짜잖아. 할아버지는 그렇게 속고도 또 속아?”

“아니야, 이번엔 진짜라니까. 할아비가 다 확인했어.”

“어떤 정신 멀쩡한 여자가 이런 결혼을 하겠다고 해? 할아버지가 날 어떻게 설명했겠냐고. 보나마나 얼굴만 빤지르르하고 돼먹지 못한 놈이라고 했겠지. 그걸 듣고도 결혼하겠다고 하는 인간이 정상이야? 진짜 한지영이면 뭐 하러 그런 짓까지 해? 결혼 안 해도 한몫 두둑이 받아 갈 텐데.”

장식 효과만 뛰어난 건 아닌지 장윤성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냈다. 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고 눈치를 보는 척 앉아 있었다.

“그렇게까진 말 안했어. 그냥 잘생겼다고만 했지. 일단 들어와 봐. 지영이 놀라잖아.”

장 회장은 얼른 방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장윤성이 다시 나를 보기에 나는 얼른 놀란 토끼 눈을 해 보였다.

“놀라긴, 찔려서 굳은 거지.”

“장윤성!”

“가요, 가.”

장 회장의 닦달에 장윤성은 마지못해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장명수는 내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여느 때처럼 문 밖에 비서를 세워 두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엔 곤란함이 역력했다. 억울했지만 내 처신 탓으로 돌려도 나는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장명수는 아까 장윤성이 했듯 내 모습을 훑었다. 뭔가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윤성이도 속여 볼 수 있겠나?”

“지영이인 척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남자인 건 금방 들키지 않을까요.”

장 회장이야 눈이 침침하다 치고,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 아니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장윤성은 이미 나를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상한 점이 있다면 뭐든 캐내려 할 것이다.

“괜찮아. 생각보다 그럴듯해 보이니까, 그놈도 수상하다고 무작정 벗겨 볼 만큼 막돼먹은 건 아니야.”

나는 장윤성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거친 손길로 내 얼굴을 덮은 책을 거둬 가는 모습을. 내가 보기엔 장명수의 생각보다 막돼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혼담은 제대로 거절할까요?”

“아니, 그쪽은 내가 설득해 보마. 일단 진짜인 척만 제대로 하고 있어.”

말은 쉽지. 장 회장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온 이유는 내심 내가 진짜 한지영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견고해 보이는 높은 마음의 벽은 애초부터 몇 번 두드리면 무너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장윤성도 그럴지는 의문이었다.

장 회장과 독대를 하고 나온 장윤성은 장명수와도 한참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설득을 했는지 장명수와 이야기를 끝낸 장윤성은 더 이상 나를 가짜라고 몰아붙이지 않았다. 다만 의심을 품은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을 뿐이었다.

***

그렇게 버럭대며 소란을 피운 것치고는 장 회장과 그의 손자인 장윤성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장윤성은 볕이 적당할 때 장 회장과 정원에서 산책을 했고, 유학 중에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떠들었으며, 꼭 나를 끼고 셋이서 식사를 함께했다. 장윤성은 할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손자였다. 그래서 장 회장을 속이려 드는 내가 더욱 싫었던 걸지도 몰랐다.

“윤성아, 그만하고 밥 먹어.”

“먹고 있다니까.”

셋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장윤성은 내게 빤한 시선을 고정한 채 입에 밥을 퍼 넣고 있었다. 놈의 눈에서 뭐라도 나왔더라면 내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타서 재가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마주치는 걸 피하고 싶었지만 나도 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나는 내 인생, 내 가족을 지키는 것도 너무 버거워서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쓰며 살 수가 없었다. 장 회장을 속이는 게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뻔뻔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나는 장 회장의 젓가락이 가지나물을 집어 가는 걸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장윤성이 제대로 보길 바라면서.

“할아버지는 가지나물 좋아하세요? 저희 할머니는 가지나물 싫어하셨잖아요.”

“맞아, 맞아. 그랬지. 내가 가지를 무척 좋아해서, 그 사람은 일부러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나물이 먹고 싶다고 하기도 했었어. 얼마나 고맙던지.”

장 회장은 기억이 났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장윤성에게 내가 진짜 한지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벌써 여러 번 반복된 상황이었다. 지영이의 외할머니에 관한 기억은 한번 끌어내기 시작하자 꼬리에 꼬리를 문 것처럼 연이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윤성의 껄끄러운 시선도 견디고 나는 그것들을 늘어놓았다. 이쯤 하면 의심을 조금 거둘 만도 하건만, 그의 표정은 오히려 싸늘해지기만 했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나를 가짜라고 확신하는 걸까. 여장이 어색해서 남자인 걸 들킨 걸까? 혼담을 단번에 거절하지 않은 게 수상해서? 아니면…. 한지영의 죽음을 알기 때문이라는 마지막 가능성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니까.

며칠 잠잠했던 장윤성은 그 어색하고 수상한 분위기를 오래 끌지 않았다.

장윤성이 찾아왔던 때처럼 집안이 가장 조용해진 오후, 역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2층에 있는 서재에서 읽을 만한 책을 꺼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장윤성은 계단이 꺾어지는 부분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없을 때 마주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불리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놈과 마주섰다. 가끔 이렇게 날 빤히 노려보고 몸을 돌려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그러길 바라면서 볼 테면 얼른 보고 꺼지라는 듯이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해 볼 요량인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눈빛에는 경멸마저 서려 있었다.

“이번엔 정말 질 나쁜 사기꾼이 왔네.”

“무슨 소리야?”

“그동안 온 가짜들은 적어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걸 느끼는 것 같았거든. 넌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어 보여서.”

양심의 가책? 그런 건 무엇을 하든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런 걸 느꼈으니 가짜들이 가짜임을 들킨 것이다. 너같이 곱게 자란 놈이나 남의 인생까지 걱정하며 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설마 하면서도 꿋꿋하게 진짜 한지영인 척을 했다. 장윤성이 단순히 날 떠보는 거길 바라며 태연한 얼굴을 애써 유지했다. 하지만 장윤성은 유감이라는 듯이 비웃었다.

“너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뭘?”

“진짜 한지영이 어떻게 됐는지.”

설마.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아는지 물어볼까 다시 한 번 우겨야 할까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장윤성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불쌍하게 죽은 여자아이 행세를 해서 남을 등쳐먹는 짓이라고.”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장윤성은 그때 한지영이 죽었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장명수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장 회장의 주변을 철저히 통제했다고 했다. 깐깐한 부친의 비위를 맞출 좋은 패였으니까.

실제로 장명수는 이번 일을 구실로 그동안 장 회장의 허락이 나지 않았던 많은 사업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할아버진 아직 거기까진 모르셔. 알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냥 네가 가짜라고 얘기하고 돌아가.”

말을 마친 장윤성은 몸을 홱 돌렸다. 당장이라도 장 회장을 부르러 갈 것처럼.

나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주 가짜는 아니야, 나도.”

“그럼 뭐 반만 진짜인가?”

장윤성이 비꼬듯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지영이의 몫으로 뭘 생각하시는지 알아. 하지만 그거 하나도 받을 생각 없어. 나는 그저 네 아버지에게 사례를 받고, 지영이네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 드리러 온 것뿐이야.”

당연하게도 장 회장은 은인의 핏줄에게 큰 사례를 하려 했다. 장명수가 그 꼴을 보고만 있진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장 회장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윤성은 내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으나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다.

“피는 섞이진 않았지만, 지영이네와 오래 알고 지냈어. 지영이네 가족이 그렇게 돼서…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아마 내가 가장 그분을 잘 알 테니까, 그래서 온 거야. 네 말대로 그렇게 죽은 지영이인 척하는 것도, 할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야. 하지만 누구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사람을 속이는 게?”

“너도 속이고 있잖아.”

장윤성 역시 한지영의 죽음을 알면서 굳이 장 회장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가짜에게 실망을 하게 두면서도. 장윤성은 잠시간 침묵하다가 이내 결정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확실히 말해야겠다. 매번 이런 식인 것보다는 낫겠지.”

더럽게 올곧은 새끼. 소리까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몇 번이나 놈을 욕했는지 모른다.

“짐이나 미리 정리해 둬.”

그날 저녁은 장 회장과 둘이서 밥을 먹었다. 장윤성은 방에서 뭘 하는지 얼굴도 들이밀지 않았다. 어차피 들켰고 곧 끝날 일이기도 했으니 대충 넘어가도 될 시간이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나는 가짜일지 몰라도 내 이야기는 진짜였으니까. 후에 위안이라도 되도록 장 회장에게 가급적 많은 기억을 들려주고 싶었다. 긴 시간을 함께 지낸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사람인지라 내게 잘해 준 노인에게 정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 짐을 쌀 때는 처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순조롭게 여름을 보낼 줄 알고 짐을 모두 꺼내 놨던 탓이었다.

다음날 아침엔 장윤성도 식탁에 나왔다. 모래알을 씹는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으나 그는 조급하게 입을 열진 않았다. 짐을 쌀 여유를 주는 건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배려였다. 장명수의 의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최소한의 보수밖에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얼른 이곳을 나가 새 일을 찾는 편이 좋았다.

“어제 오늘 지영이가 기운이 넘치는구나. 할아비랑 이야기하는 게 지겹지도 않으냐?”

그래도 나는 장윤성이 준 시간을 알차게 썼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정원 산책을 졸라 장 회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던 참이었다. 할머니에 관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아쉬운 대로 지영이의 엄마, 혹은 지영이 이야기를 했다.

“여름이 금방 끝날 거 같아서요. 할 수 있을 때 잔뜩 해 두려고요.”

빨리 떠나는 쪽이 누구에게든 좋은 일이었지만 내가 끝을 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둘러댄 말에 장 회장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벌써 아쉽다는 듯 물었다.

“아직 한 달은 더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설마 일찍 돌아가려는 건 아니지?”

“아니요. 할아버지랑 지내는 시간이 빨리 간다는 소리예요.”

“원, 듣기 좋은 소리긴 하다만…. 이만 들어가자. 벌써 볕이 뜨겁구나.”

“네.”

손짓에 달려온 비서가 장 회장을 안으로 모셨다. 나는 휑한 정원을 한 번 둘러보았다. 잘 손질된 나무와 풀이 볕 아래에서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노인이 홀로 지내기엔 쓸쓸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상심한 노인의 뒷모습이 그려져 나는 느린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었다. 아직 열려 있는 문 옆으로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장윤성이 삐딱하게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서 있었을까.

원래도 나와 말을 잘 섞는 편은 아니었지만, 계단에서 내 정체를 술술 분 후에는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놈이 또 빤하게 보기에, 나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떠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짐 정리는 다 했어.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때 말해 줘.”

“그래.”

한숨 같은 대답이었다. 망설이는 걸까. 그래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할진 잘 아는데 나는 아직도… 아니, 아니다. 가급적 빨리 부탁해. 나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거든.”

사실 난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진실을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나를 한지영이라 믿는 장 회장은 오랜만에 비를 맞은 나무처럼 활기가 넘쳤다. 진심을 감춘다 해서 상처받을 사람도, 적어도 이 세상엔 없었다. 아마 장윤성도 갈등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며칠을 지켜보고도, 또 뜸을 들였던 거겠지. 하지만 장윤성은 이제야 결심을 굳힌 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따 오후에, 말씀드릴게.”

***

달갑지 않은 일을 예상했는지 장 회장은 점심도 거르고 오래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집이 조용해진 한낮에 나는 방문 앞에 캐리어를 세워 두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몸은 편했지만 한 번도 마음 놓고 쉬어 본 적 없었다. 단지 여장을 해서 불편하거나, 들킬까 하는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실을 잊어선 안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엄마의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병과, 나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많을 동생. 하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더라면 한 번쯤은 눈 감고 이 기회를 즐겨 볼 걸 그랬다. 나는 아쉬움 섞인 눈길로 별장을 둘러보았다.

집이라고 생각하기엔 크지만 또 그렇게 황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실내는 비교적 포근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자주 누워 지내던 푹신한 소파는 잊지 못할 것이다. 거실의 한쪽은 주방으로 통했고, 한쪽에는 장 회장의 방문이 있다. 나는 별장이 위치한 언덕 아래 저수지까지 내려다보이는 2층의 방에서 지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는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 잠깐 의문을 가졌었다. 저 커다란 피아노에서 정말 소리가 날까? 소리가 나지 않는 걸 갖다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저 풍경인 양 존재하는 물건 같았다. 문득 이곳을 떠나기 전에 소리나 한번 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딩-.

가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귀를 기울일 정도로 좋아하긴 했지만, 연주는 할 줄 몰랐다. 지영이는 아마 조금은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허름한 동네의 아이들도 종종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지영이는 며칠을 졸라 간신히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됐다며 나와 건우에게 자랑을 했었다. 좋겠다, 하고 대답해 줬지만 사실 별로 부럽지 않았다.

어린 건우는 지영이가 하도 자랑을 하니까, 그게 대단한 건 줄 알고 엄마한테 “지영이 누나는 피아노 학원 다닌대.” 하고 전했다. 그때 엄마는 날 슬쩍 보면서 “하경이도 피아노 칠래?” 하고 물어봤었다. 엄마도 아들에게 그런 거 하나쯤은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얼마나 어렵든 간에. 내가 고개를 젓자 엄마는 내가 괜히 그러는 줄 알고 “왜, 우리 하경이는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잘 칠 텐데.” 하고 한 번 더 권했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가 얼마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원을 다녀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어도, 그게 끝일 거라는 걸 그때도 알았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생길 일이 없을 테니까, 영영 써먹을 일이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가장 두려웠던 건, 피아노를 치는 게 너무나 즐거워서 그만두는 게 힘들진 않을까 하는 거였다. 우리 집 사정에 피아노 학원을 오래 다닐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 필요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은 빠르게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은 삶을 버겁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딩, 딩, 딩, 나는 건반을 하나씩 눌러 가며 소리를 들었다. 나 같은 문외한도 알아차릴 만큼 대단한 소리가 날까 싶었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연주자의 실력에 감탄했지, 악기의 좋고 나쁨은 그다지 느껴 본 적 없었다. 그쯤 생각하니 의미 없는 행위였다. 흥미가 떨어져 그만 일어설까 하던 때였다.

“피아노, 쳐 봐도 돼.”

계단 난간에 기대 날 내려다보고 있던 장윤성이 선심 쓴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놈은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재주가 있었다. 장윤성은 내가 눈치를 보느라 건반을 머뭇머뭇 눌러 보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칠 줄 몰라.”

“그럼 뭐 하러 그러고 있어?”

“그냥, 소리 궁금해서.”

이렇게 큰 피아노는 뭐가 좀 다른가 싶어서, 하고 덧붙였더니 장윤성이 피식 비웃고는 계단을 내려와 곁에 앉았다.

“쳐 줄까.”

그는 아직 건반 위에 있는 내 손을 빤히 보며 물었다. 투박한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여자의 손과는 아무래도 다를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손을 거두며 대꾸했다.

“칠 줄 알아?”

“내 거야, 이거. 이젠 별로 칠 일이 없어서 여기 갖다 놨지만.”

제 손을 피아노 위에 얹으면서도 놈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 손을 향했다. 가짜라는 걸 다 들킨 마당에도 난 손을 움츠렸다. 밑바닥까지 다 보이고 가고 싶진 않았으니까. 여기서 남자라는 것까지 들킨다면 꼴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 아마 최악의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겠지. 장윤성은 내가 펄럭이는 치마 뒤로 손을 숨기고 나서야 시선을 거뒀다.

그의 얼굴이 피아노를 향하고 나서야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윤성의 손가락이야말로 길고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그저 멋대로 건반 위를 돌아다니는 것 같은 손가락은 놀랍게도 그럴듯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맑은 음색이 귓가를 간질였다.

“정말로 그냥 가짜는 아닌가 봐?”

“어?”

그렇게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장윤성이 말을 걸어 왔다. 엉뚱한 물음이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하자 장윤성이 여전히 건반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네 전에 온 가짜들은 배우 지망생이었거든. 아무나 갖다 둘 순 없으니까 그럭저럭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데려온 거지, 아버지가. 근데 넌….”

장윤성은 잠시 머뭇거리다, 눈을 한 번 굴리고 말을 계속했다.

“손이 연예인을 준비하는 사람 같지는 않네.”

“아.”

나는 그제야 장윤성이 본 게 내 손 크기나 모양새가 아닌, 손에 남은 흉터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쯤엔 정말 닥치는 대로 일을 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다가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흔한 일이었고, 흉터야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희미해질 것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냥 가짜’를 운운하는 걸 보면 장윤성은 내가 실제로 지영이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오해를 고작 손을 보고 풀었다니. 얼굴은 뭐 연예인을 준비하는 사람 같은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가짜’가 아니면 계속 있게 해 주나 싶어서.”

이번엔 장윤성이 피식 웃었다. 어림도 없다는 듯이.

“내가 가짜긴 해도, 할아버지께 해 드린 이야기는 전부 진짜야. 나는 지영이의….”

다행히 ‘옆집 오빠’라는 말을 하기 전에 말을 멈추고 나는 잠시 단어를 골랐다. 옆집 언니, 아니 친구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장윤성이 다음 말이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그의 속눈썹이 참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귓가를 맴도는 피아노 소리가 쿵쿵, 자꾸만 심장에 닿았다.

아, 정말 좋은 피아노는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느꼈을 즈음, 갑작스레 주위가 조용해졌다. 우아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 탓이었다.

뭐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장윤성이 연주를 제대로 끝냈는지, 중간에 그만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세찬 오후의 볕이 우리가 앉아 있는 곳까지 들었다. 매번 차갑기만 했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쯤은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연민 때문일지도 몰랐다.

장윤성은 아주 조금 따스해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 진짜 이름은 뭐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