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내게 이름을 물었던 날, 장윤성은 결국 장 회장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조부를 향한 걱정이어도 좋았고, 나를 향한 동정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 보면 유리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장 회장과 내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윤성이 진실을 말하기 어려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쉽게 안심하지 않았다.
이 쇼를 끝낼 생각은 미뤘는지 몰라도 장윤성은 곧 죽어도 나를 한지영이라 부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이름을 묻고 답을 듣지 못하자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나를 ‘가짜’라고 불렀다. 당장 쫓아내지 않는다고 해서 네게 협조할 마음은 없다는 듯이, 장 회장의 앞에서도 서슴없이 가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다행히 장 회장은 그저 의심 많은 손자가 무고한 한지영을 괴롭히는 거라 여겼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나만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뿐이었다.
내게 장윤성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장에서의 일상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친구도 원수도 되지 못한 채 애매하게 공존했다. 여전히 내 하루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웠고, 장윤성은 그 나름대로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마주치면 가짜 운운하며 깐죽거리긴 했어도 굳이 심심하다며 서로를 찾는 일은 없었다.
그쯤 나는 그곳 생활에 꽤 익숙해진 참이었다. 별장에는 오래전에 일하던 사람이 두고 갔다는 낡은 자전거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조금 떨어진 마을까지 내려갔다 올 수 있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논과 밭이었고 군데군데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이었지만, 그런대로 구색을 갖춘 구멍가게도 하나 있었다. 오며 가며 시간을 넉넉히 보낼 수 있는 데다 별장에선 구경하기 힘든 저렴한 맛의 군것질을 할 수 있었으므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아랫동네까지 내려가곤 했다.
그날도 오전 내 심심한 시간을 견디다 오후쯤 자전거를 꺼내 나오던 중이었다. 어지간히 할 일이 없긴 했던지 장윤성도 나와 정원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래도 장윤성은 나보단 사정이 나았다. 차를 몰고 종종 나갔다 오곤 했으니까. 나는 장명수가 만들어 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설정 때문에 도시까지 나다닐 핑계가 없었다. 어차피 긴 기간도 아니니 못 참을 것도 없긴 했지만. 낡은 자전거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던지 장윤성이 날 돌아봤다.
“어디가?”
“저기, 아랫동네에.”
“그거 타고?”
군데군데 녹이 슬긴 했지만 아예 못 탈 물건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장윤성은 날 위아래로 훑으며 다시 물었다.
“그 차림으로?”
내 옷에 문제가 있나. 나는 내 차림을 한번 살폈다. 평소에 입던 스타일이랑 비슷한 긴 원피스와 카디건일 뿐인데.
“그런데?”
“무슨 이온 음료 CF 찍냐. 위험하게.”
확실히 긴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가져온 옷이라고는 모조리 이런 모양새의 치마였으므로. 이미 다 큰 성인이라 긴 머리 가발 하나 씌운다고 여자처럼 보일 리가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바지는 역시, 아무래도….
“그동안 잘 타고 다녔어. 신경 꺼.”
“기다려 봐.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장윤성은 차 키를 가지러 갈 기세로 말했다. 걷기엔 먼 거리, 차로 가기엔 짧은 거리, 자전거를 타면 적당한 거리였다. 게다가 차를 탈 거라면 굳이 나가는 의미도 없었다.
“번거로워. 그냥 이거 타고 갈래.”
나는 보란 듯이 자전거를 끌고 장윤성을 지나쳤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장윤성이 다시 쫓아와 자전거를 붙잡았다.
“아, 거 오지랖 한번….”
“아니, 같이 가자고.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다, 따분하다. 그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거절할 구실이 없어 허락하자 장윤성이 냉큼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는 짐을 싣는 데나 쓸 것 같은 뒷자리에 앉아 녀석의 허리를 붙들었다. 다 큰 사내 둘이 탄 자전거는 비틀비틀 별장을 나서 이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장윤성은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물었다.
“아랫동네에는 뭐 하러 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별장에도 있잖아.”
“그런 거 말고.”
별장에도 아이스크림이 있긴 했다. 우유 맛이 진한, 평소엔 비싸서 사 먹지도 못하는 그런 아이스크림이. 처음엔 맛있게 먹었지만 더운 여름엔 얼음이 사각사각 씹히는 쪽이 생각나기 마련이었다. 마침 그 작은 구멍가게에서는 그런 걸 팔았으므로 나는 천 원짜리 몇 개를 찔러 넣고 나오곤 했던 것이다.
이미 나온 길, 목적이 뭐든 상관없다는 듯이 장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쌩쌩, 얼굴을 스치는 바람 사이로 느껴지는 씁쓰름한 풀 냄새가 좋았다.
아마 장윤성도 나도 따분함에 지쳐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모양이었다. 내리막길은 반드시 오르막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잊었던 걸 보면.
“뭐 먹을래?”
가게에 도착해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뒤적이며 묻자 장윤성이 “뭐가 맛있는데?” 하고 물어 왔다.
“혹시 귀하게 자라서….”
이런 건 입에 대 본 적도 없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더니 장윤성이 무슨 말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그럴 리가 있냐. 아이스크림 안 좋아해서 원래 잘 안 먹어.”
“그럼 다른 거 먹든가. 안에 음료수도 있을걸?”
그렇게 말하며 나는 초코 맛 쭈쭈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윤성은 내가 하는 양을 빤히 보더니 음료는 됐다며 같은 걸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친 우리는 커다란 나무 밑 평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어설픈 손길로 날 따라 하는 걸 보면 이 도련님은 평생 쭈쭈바를 입에 대 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달고 밍밍하네.”
장윤성이 묘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 껍데기에 적힌 성분 표를 살폈다.
“그게 매력이란다.”
내가 가르치듯 말하자 장윤성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가짜 씨, 몇 살이야?”
“스무 살.”
나는 능청스럽게 한지영의 나이를 읊었다. 내 대답이 못마땅했던지 장윤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한 살 더 많은 건 알지?”
사실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오빠 노릇이라도 해 볼 셈인 듯했다.
“나 미국에서 살았다는 설정이라.”
“영어는 좀 하시고?”
“그냥 한국식으로 내외하는 건 어때.”
장윤성은 대꾸를 하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그건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페달을 열심히 밟은 탓에 땀에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표현이 우습지만 하얗고 예쁘게 생겼다.
내 시선이 그의 하얀 피부와 여름 볕에 그을린 내 팔을 번갈아 향했다. 새삼스럽게.
***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우리는 한참이나 그곳에 앉아 있었다.
많은 얘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감상이나 별장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짧게 오갔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장윤성은 틈틈이 나를 ‘가짜’라고 칭하며 진짜 이름이나 나이 같은 것을 캐내려 들었다.
나는 내가 가짜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진짜 한지영이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가짜가 아닌 진짜 누군가이길 바라는 건 장윤성 같았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눈치챈 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이곳의 해는 눈 깜빡할 새 넘어가곤 했다.
밤이 되면 길이 컴컴해지므로 우리는 부랴부랴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내리막을 달릴 때와 달리 무거운 자전거는 버겁게 굴러갔다. 그 와중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하자 결국 우리는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굵은 빗줄기가 되었다. 별장까진 한참이었고 마을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곳이었다. 차를 부르는 게 좋겠다며 장윤성은 품을 뒤적였다.
“아, 핸드폰 두고 왔지.”
핸드폰은커녕 지갑도 들고 오지 않은 놈이었다. 그날 나는 재벌 3세에게 아이스크림을 쏜 드문 경험을 한 상태였다.
“나 있어.”
준비성 없는 이에게 보란 듯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장명수가 이곳에 내 흔적을 남기지 말라며 주었던 새 폰이었다. 장 회장에게 내 진짜 번호를 가르쳐 줄 순 없었으므로.
“배터리 없는 것 같은데.”
버튼을 달칵거린 장윤성은 반응 없는 폰을 도로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충전을 언제 했더라. 저장된 번호가 장 회장과 장명수를 비롯한 태원그룹 사람밖에 없었던 터라 별로 쓸 일이 없는 폰이었다. 사적인 연락은 방에 숨겨 둔 낡은 폰으로 했으니까.
빗줄기가 굵어 잎이 무성한 나무도 우산이 되어 주진 못했다. 우리는 별장과 마을 사이 어딘가에 있는 지붕 있는 버스 정류장을 떠올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류장의 지붕이 무색하게 도착했을 쯤엔 이미 쫄딱 젖어 있었지만.
비가 좀 그치기를 기다리며 급한 대로 젖은 치맛자락의 물기를 짜냈다. 젖은 가발이 어떤 모양새일지 걱정이었지만 주변이 컴컴해져 장윤성의 얼굴조차 잘 분간이 안 될 정도였으므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젖은 옷이 차가운 밤공기와 닿자 금방 한기가 들었다. 체온을 유지하려 몸을 움츠렸더니 마찬가지로 머리카락과 옷의 물기를 털던 장윤성이 말을 꺼냈다.
“그거, 벗는 게 낫지 않아? 더 추울 텐데.”
장윤성이 턱짓으로 가리킨 건 내 카디건이었다. 이미 젖어서 실루엣이 다 드러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벗을 순 없었다. 안에 입은 옷은 민소매에 천도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어둠에 모든 걸 맡기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아니, 별로 안 추워.”
웬만한 거짓말쯤은 태연하게 하는 나도 등을 타고 엄습하는 한기까지 감출 순 없었다.
불쑥 다가온 장윤성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비에 젖은 그 손마저 따듯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추위에 떨고 있다는 걸 확신한 장윤성은 손을 거뒀다.
“안 춥기는, 덜덜 떨면서. 좀 기다려. 뛰어가서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제가 뛸 수 있는 만큼 나도 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하지 않을 소리였다. 그냥 같이 뛰겠다고 할까. 젖어서 미끄러운 샌들을 신고 평소처럼 달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발에 묻은 흙 알갱이마저 거슬려 바닥을 물끄러미 보다가 치맛자락이 젖어 다리에 들러붙는 걸 깨달았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꼴로 불빛 아래에 서고 차를 타도 괜찮을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빗줄기를 확인했다. 그러길 바래선지는 모르겠지만 미세하게 빗줄기가 가늘어진 것 같기도 했다. 울창한 숲이 우는 것처럼 소란스럽던 소리도 조금은 잠잠해진 것처럼 들려왔다.
장윤성은 당장이라도 뛰기 시작할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쥐었다. 스치는 살갗에 온기가 있었다.
“그냥 조금 기다리자.”
온기에 홀린 듯 고개가 기울었다.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기대 본 게 언제더라. 그저 장윤성의 어깨에 볼을 댔을 뿐인데 한결 따듯해진 것 같았다. 얄팍한 샌들 바닥을 딛고 선 발도 꽤 편해졌다. 이런 효과가 있는 줄 알았으면 몇 번쯤은 남의 어깨를 빌려 볼 걸 그랬다. 속에서 비보다 세찬 무언가가 내리는 것 같았다.
“금방 그치겠지.”
장윤성은 이미 뛰기를 포기한 듯 가만히 서 있었지만, 나는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
비는 느긋하게 지나갔다. 구름이 걷히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별장에 도착한 건 그렇게 긴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른 뒤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별장은 이미 깊은 밤처럼 조용했다. 장 회장이야 원래 일찍 잠드는 편이었고, 일하는 사람도 대부분 퇴근하거나 방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어둑한 실내에는 불빛이 약한 작은 조명 몇 개만이 켜져 있었다. 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른 씻고 내려와.”
장윤성은 작게 속삭이며 내 등을 떠밀었다. 길을 올라오면서 우리는 배고프다는 소리를 못 해도 수십 번쯤 했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고 저녁 내 고생을 했으니 허기지지 않을 리 없었다.
젖은 걸음을 힘겹게 옮기면서도 우리는 별장의 냉장고에 뭐가 있었던가를 떠올리며 장황한 식사 계획을 세웠다. 몇 시간 함께 고생하는 사이 퍽 가까워진 사이가 된 것처럼 나는 녀석에게 “오케이” 하며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장윤성의 방은 1층에 있었으므로, 나는 혼자 계단을 올라갔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확인한 내 모습은 엉망이었다. 빛이 드문 동네라 정말 다행이었다. 무언가 숨기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게 많았다. 밝은 빛, 쉽게 흘러나오는 말, 그 외에 장윤성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약속한 대로 빨리 씻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장윤성의 말마따나 가짜인 터라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챙겨 입을 게 많기도 했지만 긴 머리 가발이 빨리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에서는 천둥이 치는데 드라이어의 찬바람으로 긴 가발을 말리고 있으려니 사소한 욕심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차피 가짜인 것도 들켰는데 남자인 거 말하면 어때.
조금 친해지기도 했으니까…. 짧더라도 함께 고생을 하면 조금이나마 애틋해지기 마련이었다. 돌아오는 길의 장윤성은 확실히 그랬다.
내가 미끄러운 샌들 때문에 쓸린 발이 아파 쩔뚝거리자 장윤성은 끌고 오던 자전거를 툭 내려놓고 등을 보이고 앉았다. 업히라는 뜻이었다. 고용주 아드님의 허리와 내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거절했지만.
그러고 보면 착하다고 해야 할지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할지, 첫인상과 달리 친절한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식일까, 아니면….
어느새 꽤 마른 긴 가발 끝에 시선이 닿았다.
“라면 괜찮지?”
뒤늦게 부랴부랴 내려간 주방에서는 장윤성이 물을 끓이고 있었다. 라면이라는 소리에 어색하게 아이스크림 꼭지를 입에 물던 얼굴이 떠올라 잠시 머뭇거렸더니, 금방 내 생각을 눈치챈 장윤성이 툴툴댔다.
“왜, 라면도 안 끓여 봤을까 봐? 이번 가짜는 편견이 참 심해.”
확실히 편견 같은 게 있기는 했다. 이런 집에서 자란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아마도 영어를 잘하고 쭈쭈바 같은 건 입에 물어 본 적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성격은 장명수 같지 않다면 장윤성 같지 않을까. 부친마저 속이고 이득을 꾀할 정도로 매몰차거나, 아니면 쉽게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정도로 물렁하거나. 그 얄팍한 동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면서.
라면이야 글자만 읽을 줄 알면 초등학생도 끓일 수 있었다. 장윤성이야말로 내 편견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한지영이라는 애가 올 때마다 가짜라고 불렀어?”
굳이 끓여 주겠다는 걸 사양하진 않기로 했다. 식탁 의자에 앉으며 문득 생각난 걸 묻자, 장윤성이 익숙한 손길로 라면 봉지를 뜯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라면을 끓여 본 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뭐. 근데 넌 아예 가짜는 아니라며. 걔랑 무슨 사이랬지?”
“같은 동네 살던 친구.”
옆집 친구보다는 조금 더 특정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설명했다. 나에 관한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는 건 장명수가 건 조건이자, 사기꾼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였다. 한지영이 죽었다는 걸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옆집에 살았던 또래 아이 또한 알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장윤성이 굳이 내 뒤를 좇을 일은 없었지만 이왕 하는 거 철저히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실제로 장명수도 나도 안일했던 탓에 이역만리에서 쫓아온 놈이 장윤성이었으니까.
“친했어?”
“응.”
“친한 친구 이름 팔아 사기를 칠 수 있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장윤성이 새삼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오래된 일이잖아.”
게다가 그런 염치보다는 내 가족 일이 우선이었다. 항상 바르게 살아도 아쉬울 게 없었던 도련님은 이해 못 할 일일 게 분명했다.
장윤성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면을 뒤적이며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달걀 넣는다?”
“응. 근데 풀지는 마.”
“당연하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장윤성은 조심스레 달걀을 깨 넣었다. 끓여 온 모양새가 건우가 만든 것만큼은 됐다. 냄비째 식탁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평범한 친구처럼 함께 라면을 먹었다. 배가 고팠던 데다 조금 추웠기 때문에 따듯한 국물이 잘도 들어갔다.
몹시 허기가 졌던 두 청년은 밥까지 말아먹고 부른 배를 두드렸다. 가물가물 졸음도 쏟아졌다. 노곤한 기분에 미끄러지듯 의자에 기대앉자 장윤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시시한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눈 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래도 건너뛸 수 없는 일과가 있었다.
침대 옆 서랍에 잘 넣어 둔 낡은 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학교생활 대부분을 꿈나라에서 했기 때문에 시시껄렁한 안부를 주고받을 친구는 별로 없었다. 건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엄마랑 병원 다녀왔어.」
짧은 한마디에 덧붙은 다른 설명은 없었다. 희소식이 있다면 숨길 이유가 없을 터였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고 건우는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모범생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건우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형이야. 병원에서 뭐래.”
- 응…. 그냥.
머뭇거리며 말을 끄는 동생의 목소리 뒤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경이니? 잘 지낸대?
- 어. 바꿔 줄까?
- 그냥 네가 물어봐.
장명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집을 나설 때 나는 그저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일을 하러 간다고 말했다. 엄마는 괜히 병에 걸려 아들을 타지까지 보낸다고 미안해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더 미안한 건 나였다. 몸 하나는 끝내주게 편한 곳에 있었으니까.
“엄마한테 나 잘 지낸다고 전해 줘. 여기 정말 좋아. 일도 훨씬 편해.”
- 으응. 집에는 언제 오는데?
건우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지금은 엄마가 듣고 있어서 못 하는 모양이었다.
“곧 가. 생각보다 빨리 갈 수도 있고.”
방 한구석에 놓인 두 개의 캐리어를 보면서 대답했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 둔 상태였다. 장윤성이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몰랐으니까. 또다시 짐을 풀었다 싸면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반복되는 희망과 절망에 심적으로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 …….
건우는 알았다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왜, 엄마가 약 안 먹겠다고 해?”
- 응….
얼마 전 통화에서 건우가 걱정스럽게 꺼냈던 말이 떠올라 물었더니, 정답이었던지 재깍 대답이 돌아왔다. 병원에서 권한 약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여기저기 알아봐서 지원을 받고 어떻게 해도 우리 형편에는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그렇다고 그걸 먹는다고 해서 낫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반쯤 포기한 얼굴이었다고 했다.
이미 우리는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아빠가 사고로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그동안 쌓인 병원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가끔 엄마는, 차라리 빨리 가기라도 했으면 애들 고생이나 덜했지, 하고 아빠를 원망하곤 했다. 그러니 엄마는 또 자신이 가고 난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건우야,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병원 가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달라고 해. 형 괜히 여기 와 있는 거 아니야. 돈 마련할 수 있어.”
- 미안해, 형.
“뭐가 미안해. 너 잘하고 있어.”
건우도 엄마도 항상 잘해 왔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나는 시계를 보며 공부 적당히 하고 자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가발을 벗어 던지고 베개에 머리를 댔다.
나는 이 편안함에 젖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보수 좋은 일을 알아보는 편이 현명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은 길지 못했다. 당장 고민해야 할 일이 많았음에도 그만 잠에 들고 말았다. 다음 날엔 죄책감처럼 열병이 몰려왔다.
***
어떻게 누워도 몸이 아팠다. 겨우 비 좀 맞았다고 앓아누울 줄은 몰랐다. 이럴 땐 미련하게 견디는 것보다 병원 가서 주사 한 번 맞는 게 효과적이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친절해서 아파 죽어 가는 손님이 혼자 병원에 가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자에겐 곧 죽어도 잘해 줘야 하는 도련님께서. 그 이후엔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침을 먹으라며 나를 부르러 온 도우미 아줌마에게 피곤해서 오후까지 자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두었다. 한숨 자고 약이라도 찾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 간신히 잠에 들어도 몇 분마다 깰 정도였다. 식은땀이 흘러 눈이 따가웠다. 대충 손으로 땀을 닦고 다시 잠들려 애쓰는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답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겠거니 해서 두었더니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냐? 밥도 안 먹고.”
두 끼를 내리 굶으니 이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같이 고생 좀 하고 라면 좀 먹었다고 친한 척이라도 할 셈인가. 대충 돌아가길 바라면서 나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 덮고 뜨거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야, 가짜. 문 좀 열어 봐.”
장윤성은 다시 노크하며 재촉했다. 가발을 쓸 기운도 없어 문을 잠가 놓고 누워 있던 중이었다. 귀찮으니 그냥 가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마른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뻐끔거리다 그냥 대답하길 포기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적당히 돌아가라, 좀.
똑똑.
“너 괜찮은 거야? 한마디만 대답해 봐. 그럼 갈 테니까.”
한마디만 하면 돌아가 준다는 소리에 애써 소리를 냈다.
“괜찮… 아.”
안 내느니만 못 한 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다 죽어가는 소리였다. 아차 싶었다. 철컥철컥, 급기야 장윤성이 문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문 좀 열어 봐. 상태 봐야겠으니까.”
문고리를 얼마나 세게 돌리는지 나무로 된 방문이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문이 열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발, 가발이 어디 갔지. 정신없는 와중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 더미를 발견했다. 손만 뻗어 잡아 보려 했는데 무리였던지 몸이 쿵 굴러 떨어졌다.
그 소리에 문 밖의 참견쟁이가 더욱 놀란 건 당연했다. 문 밖에서 다급하게 열쇠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나는 더듬더듬 기어가 가발을 주워 썼다. 문 밖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겨우 가발을 고정시키고 바닥에 엎어졌을 쯤, 장윤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장윤성이 달려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닿는 게 덜컥 겁이나 그 손을 쳐 냈다.
“만지지 마!”
열이 나 식은땀마저 흐르는데 가발까지 뒤집어써야 하는 처지가 야속했다. 병원도 못 가고 누워 있는 것도 서러운데 바닥까지 기어 머리에 가발을 얹게 만드는 장윤성이 싫었다. 그만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장명수에게 돈 얘기를 꺼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만이라도 미리 받을 수 없겠냐고. 나도 엄마와 건우처럼 잘하고 있었으니까.
장윤성이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병원 가자.”
그러면서 그는 함께 들어온 도우미 아줌마에게 제 방에서 차 키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 손을 쳐 내고 고집을 부리듯이 몸을 웅크렸다.
“안 가. 안 간다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꾸 괴롭히고 난리야.”
열이 올라 정신이 없었다. 말을 거를 생각도 못한 채 속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녀석에게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장윤성은 억울한 듯이 되물으려다가, 이내 입을 한번 다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병원 갔다 와서 얘기하자.”
“안 갈 거라니까. 가면 진짜 평생….”
원망하겠다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장윤성이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장윤성은 물끄러미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다가 차 키를 들고 온 도우미에게 누구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때 장윤성이 나를 뭐라고 달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순순히 침대에 올라가서 이불을 덮고,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오른 열에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그런데도 잠이 들면 누군가 내 몸을 볼까 봐 나는 하염없이 중얼거리며 깨어 있으려 애썼다.
장윤성이 팔 하나만 양보하면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고 나서야 나는 겨우 의식을 놓을 수 있었다. 장윤성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양보한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다른 한 팔은 잠들기 전처럼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가발도 그대로였다. 기분은 한결 괜찮아졌다. 시간이 꽤 지났던지 붉은빛이 어둑한 방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장윤성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갖다 두고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방 한구석을 향해 있었다. 캐리어 두 개가 놓여 있는 곳에. 보지도 않고 내가 눈을 뜬 걸 알아챘는지 장윤성이 입을 열었다.
“짐 아직 안 풀었네.”
이참에 나가라고 하려나. 별꼴을 다 보였으니 그러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오히려 산뜻하게 이 일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사지 멀쩡하고 배 속에 있는 것들도 멀쩡하니 빚이라도 내고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장윤성의 얼굴이 천천히 내 쪽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까.”
그 뒤로 장윤성은 나를 가짜라고 부르지 않았다.
***
“이젠 괜찮은 게냐?”
“네. 다 나았어요.”
저녁쯤 장윤성이 가져다준 죽을 먹고 약을 먹었더니 다음 날 아침에는 신기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조금 기운이 없긴 해도 이 정도면 일이든 뭐든 하러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해 2층에 올라올 수 없었던 장 회장은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식사 후 거실에 앉아 과일을 나눠 먹으면서도 장 회장은 계속 안쓰럽다는 듯이 내 걱정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화살은 장윤성에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욘석아, 네가 잘 챙겼어야지.”
“내리는 비를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나도 같이 맞았거든?”
장윤성은 심드렁하게 과일을 입에 넣으면서 대꾸했다. 말은 삐딱하게 해도 그날 나를 위해 제일 애쓴 건 누가 뭐래도 장윤성이었다.
“네놈이랑 지영이가 같아? 지영이는 여자애 아니냐.”
콜록.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나를 여자애로 칭하는 장 회장의 말에 사레가 들렸다. 장윤성이 혀를 차며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장 회장은 아직 다 낫지 않은 게 아니냐며 또다시 걱정을 했다.
장윤성은 부친이 아니라 조부를 닮은 것 같았다. 장 회장이 손자의 성격을 묻는 말에 대답을 회피했던 이유는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신을 똑같이 닮은 손자의 성격을 칭찬하기가 머쓱해서.
“결혼은 어떻게 할 거냐. 이러다가 지영이가 그냥 미국 가 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장 회장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다시 혼담을 꺼냈다.
“뭐가 문제야? 할아버지 손자도 미국 학교 다니는데.”
“이놈아, 내가 얼마나 살 줄 알고. 약혼이라도 하는 걸 봐야 편하게 갈 것 같아서 그래.”
“아, 몰라. 그냥 할아버지가 한 오십 년쯤 더 살면 되잖아. 그럼 손자의 손자도 보고 좋겠구만.”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를 저렇게 얄밉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장윤성은 툴툴대며 어느새 빈 내 접시를 가져가 과일 탑을 쌓기 시작했다. 노오란 파인애플 탑을. 그 탑이 내 앞에 놓이고 나서야 내가 파인애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 과일이란 골라 먹는 게 아니라 있는 대로 먹는 거였기 때문에 미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별장에서 먹는 과일은 전부 평소에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파인애플이었는데, 설탕물에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과즙이 가득하고 달콤했다. 그렇다고 마냥 그것만 집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름대로 골고루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장윤성이 그걸 알아챘던 걸 보면.
***
열병이든 뭐든 한 번 쯤은 앓아 볼 만했다. 가진 것만큼 동정심도 넉넉했던 도련님은 결국 불쌍한 소녀에게 방 한 칸을 내주었다. 옷은 옷장에 넣고, 화장품은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다. 여장에 필요한 도구들도 꺼내 깊숙이 숨겼다.
그러고도 방은 휑했다. 굳이 재 보지 않아도 얼추 우리 집만한 넓은 방이었다. 옷장과 서랍장, 침대와 테이블 등 필요한 가구는 모두 있었지만 채워 넣을 물건이 많지 않았다.
하긴, 우리 집이라고 해서 물건이 많은 건 아니었다. 집이란 고작해야 잠이나 자고 가끔 시간이 나면 밥이나 먹는 곳이었으므로 뭔가를 사다 채워 넣을 이유가 없었다. 건우와 내가 같이 쓰는 방에는 학생이 쓸 만한 학용품들이나 좀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별로 쓸데는 없겠지만 펜과 노트라도 좀 가져다 놓을까. 몇 번 서재에서 장윤성이 공부를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말하면 한두 개 정도는 내줄지도 몰랐다.
그런 궁리를 하고 있을 쯤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바퀴가 자잘한 자갈길 위를 구르는 소리가. 누가 오가나 싶어 창밖을 봤더니 장윤성의 차가 별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장윤성이 차를 타고 나가는 외출은 대개 하루 이틀은 걸렸다. 그가 이 근처를 배회할 일은 없을 테니, 서울이라도 간 김에 이것저것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걸까, 아니면 뭐 다른 볼일이 있나. 언제부터 장윤성이 내게 보고를 하고 다녔다고, 말없이 나간 게 왜 섭섭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는 홀로 산책을 나섰다. 두리번거리며 낡은 자전거를 찾았으나 어쩐 일인지 늘 정원 구석을 지키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직접 걸어 언덕을 내려왔다. 좁은 도로 하나만 건너면 내 방에서 보이는 저수지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사람 허리 높이까지 자란 잡초 사이로 물비린내가 훅 끼쳤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걷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익숙한 차가 보였다.
장윤성이 타고 나갔던 그 차였다. 정확히 스물세 시간 만이었다. 휘휘 손을 젓자 차가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장윤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 나와 있어?”
“심심해서.”
“잘됐다. 잠깐 이것 좀 받아 봐.”
안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장윤성이 초코 맛 아이스크림 두 개가 든 봉지를 내밀었다. 아직 녹지 않은 걸 보면 아랫동네 구멍가게에서 사 온 모양이었다.
“달고 밍밍하다며.”
“그게 매력이라며.”
공부를 잘했다더니 매력도 주입식으로 잘 배우는 모양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내게 건넨 장윤성은 길가에서 벗어난 곳에 차를 댔다. 풀숲을 조금 헤치고 들어간 곳에 앉을 만한 그늘이 있어, 우리는 호수를 보며 나란히 앉았다. 한 번 해 봤다고 장윤성은 능숙하게 아이스크림 꼭지를 따서 입에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서울에.”
뭐 하러 갔다 왔냐고 물어도 되나, 머뭇거리는 사이 장윤성은 이번엔 제 차례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병원은 왜 안 가려고 한 거야?”
며칠 전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무서워서.”
사정을 밝힐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달리 댈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장윤성은 ‘퍽이나’ 하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섭섭한 기색이었다. 내 나이가 스무 살이라고 대답했던 때처럼 그냥 능청스럽게 넘어가면 되는 일인데 어쩐지 나는 그를 설득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정말인데.”
변명처럼 덧붙인 말도 별로 소용은 없었다. 장윤성이 내게 서운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열이 내릴 무렵 장윤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와줄까.’
‘뭐를?’
‘뭐든.’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상대가 좀처럼 사정을 설명해 주지 않으니 답답할 법도 했다. 내가 남자란 건 못 밝혀도 엄마의 병쯤은 말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나를 한층 더 불쌍하게 여긴 장윤성이 돈다발을 내놓든 뭘 하든 해결책을 만들어 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뭐 때문인지 장윤성에게 한지영이 아닌 이하경을 드러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나 양심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 때문이 아니었다. 실체가 뭔지 모를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장윤성은 내게서 어떤 사연 듣기를 포기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오는 길이야.”
“뭘?”
휘잉, 작은 바람에 나무들이 술렁였다. 서울에 갔다더니 장명수를 만나고 왔던 걸까.
나는 아직 장명수에게 내가 가짜임을 들켰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쫓겨나면 자연스레 알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윤성이 그걸 말하고 왔을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도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뭐든 도와주겠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네가 진짜 한지영인 것 같다고, 이번엔 믿는다고 했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정 원하시면 약혼하는 척이라도 하겠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했다. 장윤성은 물끄러미 내 반응을 기다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넌 걱정도 안 돼? 우리 할아버지 진짜 한 오십 년 더 살면 어쩌려고. 할아버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약혼 못 깨.”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장 회장은 아직 손에 쥔 게 많았고, 장명수는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은 걸 차지하기 위해 아들을 걸 정도로 악착같았으니까.
“한 오십 년 네 약혼녀 하지 뭐.”
차마 장윤성 앞에선 말할 수 없었지만, 장명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친의 삶이 그다지 오래 남지 않았다는 걸.
장명수는 내게 여름이 끝나 미국에 돌아간 척을 하더라도 한동안 장 회장과 연락을 유지해 달라고 했었다. 기간은 어차피 길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그쯤 나이를 먹으면 부모의 죽음을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나는 열을 앓으면서, 엄마가 죽을 거라면 차라리 내가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사람 속이야 모르는 일이니, 장명수도 그저 티를 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 가짜 결혼도 한다고 하겠다?”
“내가 손해 볼 거 있나. 상대가 재벌 3세에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장 회장이 오십 년이나 더 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혼할 일은 없었다. 그냥 고마운 김에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말일 텐데도 장윤성은 놀란 척하며 되물었다.
“네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이긴 해?”
“나도 눈 있어.”
장식인 줄 알았다며 장윤성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잔잔한 물 위로 흩어진 빛의 파편이 일렁였다.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장윤성이 무슨 기분으로 이 사기극에 동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기꺼이 날 돕겠다고 하면서도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렇게 궁금해하던 내 이름을 대가로 받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또 한 번 바람이 부는지 귓가가 간지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빛을 만난 것 같았다.
눈이 부셔서 그만 주저앉고 싶은, 그런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