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탐색 (5/18)

당장 새벽에라도 연락 할 것처럼 말하더니 병원에서 헤어진 이후 며칠간 장윤성은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장윤성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편했다.

병원에서는 후유증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했지만 순조롭게 낫고 있는지,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걱정이 됐다. 나도 일을 하다 손에 붕대를 감아 봐서 그게 얼마나 답답한지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다못해 병원비라도 냈어야 했다. 서기준이 이미 처리했다며 떠미는 바람에 어영부영 빚만 잔뜩 지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며칠 만에 서기준과 진짜배기 몇이 가게에 들렀다. 장윤성은 없었다. 팔이 그 모양인데 술을 마시러 여기까지 오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한참 눈치를 보다가 서기준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뒤를 쫓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붙잡고 장윤성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불편하긴 한가 봐요. 받기 귀찮으니까 전화도 하지 말라던데.”

“다친 곳은 잘 낫고 있고요?”

“글쎄요. 그쪽은 별 얘기 없었어요. 괜찮겠죠, 뭐.”

“네, 고맙습니다.”

장윤성은 친한 친구에게도 뭔가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는 타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런 편이었다. 얼핏 아무 말이나 뱉어 대는 것 같아 보였어도 장윤성은 정말 궁금한 것만 묻고 정말 해야 할 말만 했다. 그 사이에 생략된 소리 없는 말의 존재를 깨달았던 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뭔가 더 물어볼까 하다가 어차피 듣는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고개를 까닥이고 돌아섰다. 차라리 은혜를 모르는 척 뻔뻔하게 굴어 다시는 상종 못 할 인간이 되어 주는 게 장윤성의 인생에 보탬이 되는 길일지도 몰랐다.

“아, 하경 씨. 잠깐만요.”

“네?”

서기준이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는 듯 나를 불렀다. 내가 돌아보자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내밀었다. 차 키였다.

“윤성이 차 키인데, 차가 여기 있으니까 맡겨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혹시 윤성이가 찾아오라고 사람 보낼지도 모르니까.”

“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를 받아들었다. 사고가 있던 날은 서기준의 차를 썼던 터라 장윤성의 차는 아직 가게 주차장에 서 있었다. 그런 이유로 키를 받았다고 설명하며, 혹시 내가 없을 때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 금고 아래에 넣어 두겠다고 하자 성욱 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가 갖다 줘. 안 그래도 가게 주차장 자리 없는데 저런 게 버티고 있으니까 다른 손님들이 차를 못 대잖아.”

가게가 있는 건물의 주차장은 협소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런 바에 드나든다고 모두가 재벌인 것도 아니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러 왔다가 비싼 차를 긁는 경험은 주머니가 어지간히 넉넉해도 싫을 것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손님들은 섣불리 장윤성의 차 옆에 주차를 하지 못했다.

“사장님! 제가 저 차를 몰아 보고 싶습니다!”

김정호가 물색없이 손을 들며 나섰다. 나는 조금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요. 정호가 가면 되겠네.”

내가 그렇게 한번 미뤄 보자, 성욱 형은 아직 뜯지 않은 위스키 패키지를 내밀며 말했다.

“너 장윤성 덕에 살았다며. 네 사정에 변변찮은 사례도 못 했을 거고. 이거라도 갖다 주면서 고맙다고 해.”

비싼 건 아니어도 한정이라 더는 못 구하는 물건이었다. 비싸지 않다고 해도 성욱 형이나 장윤성 같은 이들에게나 그렇지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됐어요. 사례를 왜 형 돈으로 해요?”

“내가 고마워서 그런다. 우리 가게 얼굴 살려 줘서. 너 없으면 여자 손님 반은 끊길걸?”

옆에서 정호가 반은 제 지분이라며 깐죽댔다. 성욱 형은 내게 위스키를 던지듯 떠안기고 정호를 패는 시늉을 했다. 결국 차 키는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통화 목록을 뒤적였다. 저장을 해 놓진 않았지만 병원에서 장윤성이 확인차 걸었던 전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의 차를 허락도 없이 함부로 몰 순 없는 노릇이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한참 울렸다.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자나 싶었던 순간 장윤성이 전화를 받았다.

- 웬일이야.

마치 친구를 대하는 말투에 나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상대를 확인했다. 뭔데 전화를 이렇게 받아?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내 소개를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하경입니다.”

- 알아, 이하경.

별걸 다 말한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저번에 차를 두고 가셔서요. 오늘 가져다드리려고 하는데요.”

- 차?

장윤성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묻다가 이내 기억이 났는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집 주차장에 차가 색깔별로 몇 대나 있을 남자였다. 뭐가 비었는지도 몰랐겠지. 차라리 주차장 자리를 점령당한 성욱 형이 더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가게 영업 끝나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차만 세워 두고 오려고 하는데 혹시 키를 맡길 곳이 있을까 해서요. 없으면 내일 퀵으로….”

성욱 형은 지금 당장 다녀와도 좋다고 했지만 내가 껄끄러웠다. 장윤성이 기억을 잃었다고 나까지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고 하기에는 장윤성의 태도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퀵 서비스로 키를 보내 주겠다는 소리에 장윤성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 그냥 와. 안 자고 있을 테니까.

***

되도록 늦게 찾아가고 싶었지만, 성욱 형이 얼른 차를 갖다 주라며 일찌감치 퇴근을 시켰다. 일부러 먼 길을 골랐지만 그래도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도로가 뻥 뚫려 있었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윤성의 소식이 궁금한 한편 지금까지처럼 아예 마주치지 않은 채로 살고 싶기도 했다. 팔이 낫는 것만 보고 어떻게든 인연을 끊자, 그런 식으로 욕심과 조금씩 타협하다 보면 끝내 어떤 꼴이 나는지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장윤성이 산다는 동네에 도착하고 말았다.

장윤성이 불러 준 주소는 이 동네에서 유명한 고급 빌라였다. 누구와 사는지는 모르지만, 장명수나 그의 장남과 마주치는 일은 피해야 했다. 관리인이 안내해 준 대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딱 한 번만 전화를 걸고 받지 않으면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키야 관리인이나 서기준에게 맡겨 버리면 그만이었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자나? 쾌재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 왔어?

졸음이 묻지 않은 목소리였다. 내가 지하 주차장이라고 말하자 장윤성은 곧 내려오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결국 성욱 형이 챙겨 준 선물과 함께 차 앞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얼굴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기다란 체구와 다친 팔 모양새가 장윤성이었다.

설마 키가 조금 더 컸을까, 아니면 어깨가 조금 더 다부져진 걸까. 그때는 팔랑팔랑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헌칠한 사내의 느낌이었다.

장윤성이 다가오자 나는 당연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이거, 저희 사장님께서 감사하다고….”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장윤성은 삐딱하게 서서 고맙다는 말도 없이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마시고 가.”

“아뇨, 시간이 많이 늦어서.”

“오래 안 잡을게.”

그러면서 장윤성은 자랑처럼 깁스한 팔을 내밀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거절하기 어려웠다. 차 한잔 마시고 가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집에 누가 있다면 곤란했다. 장윤성의 부친이나, 형과 마주친다면 그저 단순한 조우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가족분께 폐가 되지 않을까요.”

가족과 살고 있지 않는지 떠보는 말에 장윤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 사니까 걱정 마.”

그걸로 내가 동의했다고 여겼는지 장윤성은 성큼성큼 앞장섰다. 다행히 다리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높은 층까지 올랐다. 잠깐이었지만 까마득한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는 잘 몰랐는데 층고가 높은 집이었다. 집 안은 깔끔하다 못해 추울 정도로 휑했다. 가구는 대충 있었지만 사소한 물건 같은 게 별로 없었다.

아,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하나, 둘, 속으로 햇수를 셌다. 어쩌면 얼마 전에 졸업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어쩔 수 없이 궁금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거실 한쪽에는 언젠가 만져 봤던 것 같은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는 그 별장은 어떻게 됐을까.

“앉아, 아무데나.”

내가 거실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장윤성이 부엌에 들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다 다시 나왔다. 물을 올려 둔 모양이었다. 내가 소파에 앉자 장윤성은 테이블에 걸터앉아 나를 마주했다. 빤한 시선이 따가웠다. 켕기는 게 많은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려 애썼다.

얼핏 본 장윤성의 눈길은 별다른 감정 없이 의문만 가득해 보였다. 백번 양보해서 기억을 잃었다는 게 사실이어도 문제였다. 기억이라는 게 어디 몸에서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던가.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떠오를 수 있는 거였다.

물이 얼른 끓었으면 하고 바라는 동안 장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누나나 여동생 있어? 얼굴 똑같이 생긴.”

순간 서기준을 데려와 따져 묻고 싶었다. 장윤성이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게 맞냐고.

“아뇨. 남동생만 하나 있습니다. 저랑 별로 안 닮았고요.”

이로써 조금은 장윤성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며 대답했다. 장윤성은 별 뜻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아쉽네.”

그러면서 물이 끓는지 보려는 듯이 부엌 쪽을 흘끔거렸다.

“저번에 기준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나? 내 기억에 공백이 있는 거.”

“네, 뭐, 들었던 것도 같네요.”

나는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는 듯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물이 끓는지 주전자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장윤성은 불 위에 올려 둔 물을 확인하러 갈 것처럼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팔도 불편한 사람이 왜 굳이 뜨거운 차를 내오겠다고 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불편해 보여 내가 가겠다고 하자 장윤성은 만류하며 앉아 있으라고만 했다.

부엌에 들어가면서도 장윤성은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뒤로 취향이 이상해져서 말이야. 꼭 너같이 생긴 사람만 보면….”

취향이 변한 거면 변한 거지, 이상해졌다고 표현할 거까지야. 객관적으로 이상한 취향은 맞았지만 그래도 장윤성의 입으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속으로 실컷 툴툴대고 있을 쯤 부엌에서 와장창, 뭐가 엎어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물이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까지 나기에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게 내가 한다니까. 야, 괜찮….”

급히 뛰어 들어간 부엌 바닥은 엉망이었다. 엎질러진 채 아직 김을 뿜고 있는 주전자, 깨진 유리잔, 흩어진 티스푼….

하지만 장윤성은 그런 난장판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내가 뛰어오길 기다린 것처럼.

“이하경 씨는 말이 짧았다, 길었다 그러네. 그날도 그렇고.”

내가 또 방심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격 없이 지낸 날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7년이나 지났어도 장윤성이 어렵지 않을 만큼 나는 그 시간을 수없이 돌이켜보며 지냈다. 그래서 위험 앞에서까지 초연하게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 반응을 살피던 장윤성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물었다.

“너, 나 알지?”

사실대로 대답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잠깐 호기심이 일었으나 실행할 정도로 분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별로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알죠. S그룹 서기준 씨의 절친한 친구이자, 태원그룹의 차남이시라고. 저 말고 다른 직원들도 다 알 겁니다. 말이 자꾸 짧아지는 건, 솔직히 말해서 속으로 욕 좀 했거든요. 나이도 안 묻고 대뜸 말부터 놓으시길래. 아니꼽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반말이 막 툭툭 나오더라고.”

나는 일부러 다시 반말을 해 보였다. 장윤성은 믿는 척도 하지 않고 날 비웃었다.

“잘 둘러대네. 연습한 것처럼.”

“…….”

말을 하면 해서 의심스럽다, 피하면 피해서 의심스럽다 하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장윤성은 몸을 돌려 멀쩡한 컵을 두 개 꺼냈다. 나는 바닥에 엎질러진 물을 빤히 봤다. 처음부터 날 떠볼 작정으로 굳이 물을 불에 올렸고 엎은 거였다. 우리가 마실 따듯한 물은 전기 포트에 있었다.

“녹차 괜찮지?”

티백을 꺼내들며 장윤성이 물었다.

“손님 대접이 형편없네요.”

“다음에 또 와. 팔이 나으면 잘해 줄게.”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곱씹는 사이 장윤성이 컵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마지못해 건네받자 그는 나머지 하나를 들고 거실로 앞장섰다. 나는 소파에, 장윤성은 테이블에. 우리는 아까처럼 다시 마주 앉았다. 기묘한 그림이었다. 기억을 잃은 남자는 과거를 들추려 들었고, 기억이 있는 남자는 과거를 덮고 싶어 했다.

“자, 다시 말해 봐. 나 어떻게 알아?”

“아까 말한 거 외엔 모릅니다. 그쪽이야말로 기억이 없다면서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알면서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요.”

“나한테 잘못한 게 있나 보지. 지금 말하면 뭐든 용서할게.”

장윤성은 진심이라는 듯이 사뭇 관대하게 웃어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뭐든 용서하겠다는 말이 순간 달콤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장윤성의 용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용서 한다는 것, 용서 받는다는 것, 그런 건 관계가 꾸준히 이어질 때나 의미 있는 행위였다. 나는 앞으로도 지난 7년처럼, 장윤성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갈 생각이었다.

“기억이란 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거 아닌가요. 잃고도 멀쩡하게 살아 왔다면 별로 의미 없었던 일이었겠죠. 정 기억을 찾고 싶으면 애먼 사람 몰아붙이지 말고 병원이나 가 보는 게….”

“안 멀쩡해서 그래.”

조용히 컵을 입에 댔다 뗀 장윤성이 내 말을 잘랐다. 나는 그의 얼굴, 몸, 다리를 다시 훑었다. 얼마 전에 다친 팔 외에는 어딜 봐도 멀쩡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장윤성은 컵을 옆에 내려놓고 빈손을 쥐었다 폈다. 잡히지 않는 것을 그러쥐려 애쓰는 것처럼 간절한 손짓이었다.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초조해져.”

속이 답답했다. 그까짓 게 뭐라고. 7년간 어떤 시간을 붙잡고 있는 건 기억이 멀쩡한 사람도 힘든 일이었다. 감정은 향기처럼 모두 날아가고 빛바랜 장면만 말라 버린 꽃처럼 남기 마련이었다. 장윤성 역시 차라리 기억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제는 덤덤해졌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했든 간에. 장윤성은 조금 건조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차에 치일 뻔한 너를 안고 구르면서 뭔가를 본 것 같아.”

눈동자와 손가락, 나뭇잎, 햇빛, 호수…. 장윤성은 더듬더듬 기억나는 것을 나열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내 눈앞엔 7년 전의 풍경이 펼쳐졌다. 눈을 꼭 감고 잔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기억이 나는 건 그 정도였는지 장윤성의 목소리가 멈췄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줘, 기억을 찾고 싶어.”

너무나 간절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내 처지도 잊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내가 그 기억의 한 부분이 아니었더라면 마주 앉은 남자를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겨 무엇이든 해 주려 했을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내 얼굴에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남지 않았길 바라면서 입을 열었다.

“장윤성 씨를 돕는 방법이 그때 말한, ‘한번 해 보는 거’인가요?”

장윤성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렇게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길게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고르신 거 같네요.”

***

집에 돌아왔을 땐 한밤중이었다. 건우는 이미 자는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마침 나를 닮았다는 그의 전 여자 친구가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그녀를 보고도 무언가 떠올랐으니 사귀었겠지. 잃어버린 기억을 운운한 상대가 내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와 달라는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기억을 잃은 장윤성의 삶보다 기억을 잃지 않은 내 삶이 더 버겁다는 사실이었다.

‘유감이네.’

내 말에 장윤성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그렇게만 대답했다. 이쪽도 유감이었다. 이왕 잃을 거라면 깨끗이 좀 잊어버리지. 애매하게 남은 흔적에 신경 쓸 일 없게.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스럭, 이불 스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건우가 두리번두리번 내 이부자리를 확인하더니 결국 스탠드를 켰다. 나는 건우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내 모습을 발견한 건우가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아, 형, 뭐야, 놀랬잖아. 왜 그러고 있어.”

내가 그냥, 하고 대답하자 건우는 눈을 비비며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들어온 거야?”

“어.”

“고생이네….”

그렇게 말하며 건우는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겐 졸린 시간이었다. 바로 잠들 것 같은 얼굴로 건우는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얼른 씻고 자. 냉장고에 어묵 볶아 놨으니까 내일 꼭 밥 먹고 가고….”

언제부터인가 건우는 잔소리가 부쩍 늘었다. 그게 언제쯤이더라.

“맨날 만들어 놔도 안 먹고… 형 그러다 엄마한테 혼나지….”

덧붙이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잠꼬대 같은 헛소리로 변했다. 날 혼낼 엄마가 어디 있다고.

그래, 아마 엄마가 떠났을 때쯤이었다. 그때 건우는 고등학생이었다. 형 앞에서 펑펑 울 법도 했는데 건우는 그러지 않았다. 어디서 숨어 울었는지 시뻘게진 눈을 하고 와서는, “형, 내가 더 잘할게. 둘이서도 괜찮을 만큼. 엄마가 걱정 안 하게….” 하고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우린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건우가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너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그럭저럭 동생을 아끼는 형이거든.’

장윤성의 형, 장현성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입으로 건우를 운운하면서. 장명수나 장현성을 불편하게 생각하긴 했어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 무리의 손님이 나가기에 허리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톡톡, 누군가 가벼운 손길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방금 나간 사람의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가질 않고 서 있었다. 최근 자주 와서 얼굴이 눈에 익은 손님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하고 눈짓하자 남자는 명함을 하나 건넸다.

“기분 나쁠 거 압니다만, 그래도 혹시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

남자의 말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얼마 전에 혼자 와서 술김에 커밍아웃을 하고는 기분이 나쁘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쪽에 편견 없다고 했더니 괜한 용기를 낸 모양이었다.

“아, 저기….”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고 애매하게 웃어넘기자, 남자는 짧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습관처럼 허리를 꾸벅이며 “안녕히 가세요.”를 외쳤다. 연락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름이나 보자 하고 받은 명함을 들었다. 하지만 이름 석 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손에서 명함이 쑥 빠져나갔다.

“이하경 씨 인기 많나 봐. 근데 왜 누구는 개새끼고 누구는 끝까지 손님이야?”

들어오면서 봤는지 장윤성은 명함을 뺏어들고 빈정거렸다. 빳빳한 종이는 곧 그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한번 할래’와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의 차이겠죠.”

나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홀을 흘끔거렸다.

오늘은 서기준이 오지 않았다. 팔이 저 모양인데 혼자 술을 마시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말본새가 다르지 않느냐는 내 대답에도 장윤성은 일말의 반성도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서기준 씨 안 오셨는데요.”

“알아. 다른 용건 있어서 온 거야.”

장윤성은 가게 입구를 돌아보고 잠깐 자리를 지켰다. 일행이 있나 했더니 곧 가게 문이 열리고 손에 종이 가방을 든 남자가 들어와 장윤성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단정하게 맨 넥타이, 점잖은 옷차림, 태원그룹의 핏줄에게 정중한 태도. 오래 전에도 저런 인상의 남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장 회장이나 장명수를 따라 다니던, 태원그룹의 비서실에서 일한다는 사람들을.

“아, 오셨어요?”

때마침 성욱 형이 가식적인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장윤성 역시 답지 않게 정중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가 눈짓을 하자 비서로 보이는 남자는 들고 왔던 것들을 성욱 형에게 내밀었다. 슬쩍 내용물을 본 성욱 형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저번에 보내 주신 선물의 답례입니다.”

모처럼 정중한 태도였지만 나뿐 아니라 성욱 형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는 것 같았다. 성욱 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보기 드물게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저희가 고마워서 드린 건데. 어쨌든 들어오세요.”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건지 성욱 형은 장윤성을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선물을 들고 온 남자는 내게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곰곰이 되새겼다. 혹시 예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을까. 오래된 일이라 비서들의 얼굴까지 일일이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을지 몰랐다. 아니면 아예 그 당시에는 태원그룹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그 남자가 나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내 시선은 그제야 성욱 형과 장윤성이 들어간 룸으로 향했다.

장윤성이 성욱 형과 달리 할 이야기가 있을까. 불길함이 뒷목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챙겨 종민이에게 들려 보냈다. “안에서 무슨 얘기 하는지 좀 듣고 와 봐.” 하면서.

돌아온 종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별 얘기 못 들었다고 대답했다. 둘은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석연치 않아 보이는 성욱 형과 달리 장윤성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또 봐.”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가게를 나섰다. 마치 우리가 자주 만나야 할 사이라도 된 것처럼 가볍고 다정한 말투였다. 성욱 형은 장윤성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내게 손짓을 했다.

“하경아, 잠깐 나와 봐.”

건물 뒤쪽, 담벼락과 가까운 벽에 기대어 서서 성욱 형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뭐가 그렇게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한 번 흘리고 내게 물었다.

“너 장윤성이랑 예전부터 아는 사이야?”

“아뇨.”

성욱 형이 믿을 만한 사람이긴 해도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부정했다.

“근데 걔는 왜 굳이 네가 필요하대?”

“뭐라고 하는데요?”

“널 빌려 달란다.”

“미친.”

내가 나지막이 욕을 뱉자 성욱 형이 동감한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성욱 형은 다시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고민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빌려 달라는 소리는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한 사연이나 조건, 혹은 협박 같은 게 필요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놈이 그런 소릴 해?”

“몰라요, 저도.”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까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성욱 형은 이런 두루뭉술한 제안을 깊게 고민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인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쯤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태원그룹 회장의 핏줄만 아니라면 이렇게 담배를 태워 가며 사정 청취를 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내가 너 그쪽으로 출근시키면 어떻게 할래?”

“사표 쓸래요.”

“에라이, 매정한 놈. 일하다 보면 파견도 갈 수 있는 거지.”

“그 자식이 협박이라도 해요? 부탁 안 들어주면 치사하게 나오겠대요?”

“아니, 뭐….”

성욱 형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억지스러운 방식이었다. 물론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장윤성이 협박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을 거라는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이쪽도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긴 했다. 장윤성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 기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었다. 간신히 찾아낸 실마리는 더욱 더.

***

Rrrrr….

전화벨이 한참 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불이 꺼진 방에도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대낮이었다. 오늘은 가게도 나가지 않는 휴일이었고 나는 오랜만에 밀린 잠을 자고 있던 중이었다. 내 인생에서 퇴장한 줄 알았던 한 남자의 귀환에 최근 잠을 푹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어떤 자식이야. 입으로 짜증을 내면서도 전화를 받기보다는 이불을 뒤집어쓰는 쪽을 택했다. 그럼에도 벨소리가 끊이질 않아 결국 엉금엉금 기어가 충전 중인 핸드폰을 빼들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이름 없이 11개의 숫자가 떠 있었다.

장윤성이었다.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건만, 우습게도 그 때문에 오히려 번호를 외웠다.

“네, 이하경입니다.”

- 오늘 쉰다며. 좀 볼까.

“쉬는 날엔 좀 푹 쉬고 싶은데요. 나중에 가게로 오시죠.”

가게의 손님이다, 내 고용주의 갑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대뜸 용건부터 내뱉는 상대에겐 어쩔 수 없이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갔다.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막 대해도 장윤성이 화를 내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예상처럼 장윤성은 뭐라고 협박하는 대신 조금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 나 사례 받고 처음 써 보는 건데, 번호.

그 말대로 장윤성이 직접 전화를 걸기는 처음이었다.

- 목소리만 듣자고 번호 받은 거 아니야.

상대가 경우 없이 나오긴 했어도 목숨을 빚졌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순 없었다. 그리고 슬슬 이 어정쩡한 줄다리기를 끝낼 궁리를 해야 했다.

의외로 장윤성은 서두르지 않았다. 혼자서 바에 왔던 그날 이후 성욱 형이나 내게 선택을 재촉하는 일도 없었다. 그 잠잠함에 더 신경 쓰였다.

“…어디서 볼까요.”

급히 씻고 옷을 걸쳤다. 장윤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장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 번화가의 카페였다. 장윤성이 집 근처에 있는 게 우연일 리 없었다. 이미 주소든, 내 동생이든 대강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무슨 이유로 조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에도 어떻게든 나를 통해 기억을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지.

나는 장윤성이 앉아 있다는 카페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동안 왜 그가 연락도 없이 두문불출했는지 깨달았다. 팔이 낫기를 기다렸던 거였다. 깁스를 푼 그의 왼쪽 팔은 다행히 온전한 모양새로 움직이고 있었다.

“왔어?”

“팔은 다 나았나 봐요?”

“그런가 봐.”

장윤성은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돈이 많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한쪽 팔을 못 쓰는 게 불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장윤성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어떤 부담도 지우지 않았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기꺼이 몸을 던져 나를 구한 남자와, 오만하게 나를 휘두르려 하는 남자가 하나로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커피를 주문해 마시면서 얼음이 녹을 때까지 나는 한참 뜸을 들였다. 장윤성은 느긋하게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바쁘지 않은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다시 내 고민으로 돌아왔다. 이미 며칠 전부터 결심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사장님께 한 제안의 대답을 들으러 온 거겠죠. 장윤성 씨는 여전히 내가 그 기억을 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괜한 걸 묻는다는 듯이 장윤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그 기억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기억도 없는 주제에 감만 믿고 하는 대답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7년 전 그때, 나는 장윤성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들키지도 않았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헤어지기 전 마지막 날에도 장윤성은 내 이름을 물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생명의 은인인데 번호 하나로 퉁 치는 건 역시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긴 해서요. 장윤성 씨가 기억을 찾는 일을 도울까 합니다.”

내 말에 단박에 기뻐할 줄 알았던 남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순순해지니 오히려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말해.”

장윤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라도 들어줄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잃은 기억이 무엇이든 간에, 기억을 되찾으면.”

과연 장윤성이 조건을 수락할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장윤성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 기억에 네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나는 의연한 척 웃어 보였다. 장윤성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그쪽 같은 부류와 얽히는 게 싫습니다. 내 처지를 원망하게 되죠. 누구는 하루하루가 버거운데 누구는 없어도 살 수 있는 기억을 찾으려고 어마어마한 돈을 쓰면서 사람을 휘두르려 하니까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장윤성 씨가 정말 기억을 찾으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장윤성은 굳이 다른 꿍꿍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 보라는 듯이 날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장윤성 씨는 그 기억이 중요한 거라고 여기고 있지만 막상 되찾으면 허무할 정도로 별거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건 조건을 수락한 게 후회될 정도로. 그러니까 그 기억이 무엇이든 간에 약속을 지켜 달라는 소리입니다.”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장윤성은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퍽 길게 늘어놓은 얘기가 조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나 너 마음에 들어. 까칠하게 구는 것까지 예뻐 보일 만큼. 지금 같아서는 네가 과거에 내 목을 졸랐다고 해도 복수 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 같아. 뭐든 용서하겠다고 해도 그 조건 꼭 걸어야겠어? 다른 사례라면 얼마든지 할게.”

나도 조그맣게 실소를 터트렸다. 껍데기야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알맹이는 한결같이 물러 터졌다. 복수와 용서. 어느 쪽이든 두렵긴 매한가지였다.

“그쪽과 길게 얽히기 싫어서 돕겠다고 하는 건데요. 그게 아니라면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그럼 이건 어때.”

적당한 단계에서 제안을 수락할 줄 알았던 장윤성은 의외로 끈질기게 조건을 물고 늘어졌다.

“네가 내 기억에 없을 거라고 했지?”

“네.”

“그 말이 맞으면 네 말대로 할게. 하지만 그 말이 틀렸으면 그다음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이 정도까지는 예상했었다. 나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납득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좋아.”

반쯤은 도박이었지만 자신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가짜 한지영과 내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나조차도 말로 주장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장명수가 증인으로 나서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었다.

“그리고 저도 마냥 그쪽을 도와줄 수도 없으니 기간을 정하죠. 그쪽이 기억을 떠올리든, 떠올리지 못하든 약속한 기간이 끝나면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걸로요.”

사나운 눈빛이 내 얼굴을 훑었다. 내가 건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시간을 확인하듯 제 손목에 걸린 시계를 봤다.

“밥 먹으러 안 갈래?”

“네?”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인상을 쓰자 그는 태평한 척 말을 이었다.

“나머진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아무래도 머릿속으로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가급적 긴 시간을 확보할 방법을 찾고 있거나. 이쪽은 마지노선을 정해 둔 터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움을 주기로 결심한 처지에 밥 한 끼 못 먹겠다고 할 것도 없어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해?”

카페 근처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타면서 장윤성은 그렇게 물었다.

“별로 안 가리는데.”

“음….”

안 가린다는 소리가 더 어렵다는 듯이 장윤성은 조금 뜸을 들였다. 차에 시동을 걸어 놓고도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가리는 게 없으면 자기 취향대로 고르겠다며 겨우 출발했다. 팔이 다 낫지 않은 건지 긴장한 듯 쥐었다 펴는 손에 눈길이 갔다.

7년 전, 딱 한 번 장윤성과 서울에서 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번과 비슷하게 내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묻고는, 딱히 없다고 하자 제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갔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취향은 한결같았는지 우리는 또다시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많은 직원이 장윤성을 기억하고 깍듯하게 대했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서로 생각이 많기 때문인지 식사를 하는 동안 많은 말이 오가진 않았다. 하지만 테이블 위가 조용하다고 해서 분위기가 삭막하거나 어색한 건 아니었다. 상대를 챙기는 장윤성의 습관은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여전했다. 과거에는 내가 여자라 그렇게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때 성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단연코 잘한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내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궁금했다. 그때 내가 남자인 걸 밝혔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는 거지만 기억이 있는 쪽은 없는 쪽보다 불리했다. 추억을 마주치는 순간마다 매정한 결심이 흔들릴 게 뻔했다. 마음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어렵게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장윤성은 가르쳐 주지 않은 우리 집 앞까지 차를 몰아 나를 바래다줬다.

이건 그때와 다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장윤성이 인사를 길게 하려는지 따라 내리려 하기에 그럴 필요 없다고 잘랐더니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건네려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나도 깜빡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일은 내가 그쪽을 돕는 거니까, 더는 손님 대접 안 해도 되죠?”

애초에 대접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장윤성은 오히려 환영이라는 듯이 웃었다.

“좋을 대로 해.”

“그럼 그렇게 할게. 어서 가.”

혹여 건우가 보기라도 할까 봐 나는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또 봐.”

또 봐. 언제부터 헤어질 때 저런 인사를 했을까. 저번처럼 장윤성은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금방 자리를 떠났다.

***

-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강남에 있는 빌딩 한 채. 그런 것도 돼?”

- 그래. 또.

“괜히 설레게 하지 말고 되는 거 안 되는 거 확실히 말해.”

강남에 빌딩 한 채를 무슨 밥 한 끼 살 것처럼 간단히 말하기에 한마디 했더니 핸드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이하경 씨는 그런 거에 설레?

“응.”

이렇게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차피 끝이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하니 종종 마음이 허물어졌다. 한지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이하경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들뜰 때가 있었다. 걸음을 멈췄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 그런 사람이 왜 사례는 안 받는다고 해?

그래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 그 외에 나는 아무런 사례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돈을 받는 순간 내가 얼마나 비굴해지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전적으로 내가 도움을 주는 관계는 실제로 유용했다. 세부적인 조건을 타협할 때 장윤성은 별수 없이 상당 부분을 양보해야 했다.

타박타박 이어지는 걸음 끝으로 가게 입구가 보였다.

“나 곧 가게 도착해. 일단 끊어.”

- 그래.

기억을 어떻게 찾을 거냐는 물음에, 장윤성은 함께 시간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기억은 문득문득 내 행동과 겹쳐 떠오른다고 했다. 같이 생활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에휴.”

성욱 형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어도 막상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못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당장은 힘이 없어 널 보낸다만 정 못 참겠으면 그냥 도망 나와.”

“정말요?”

“그래. 그냥 너랑 나랑 애들이랑 한강 다리 밑에 텐트 치고 그러고 살면 되지 않겠냐.”

“나오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거지.”

그러면서 성욱 형은 들고 있던 마른행주를 짜증스럽게 집어던졌다. 성욱 형도 누군가에게 굽실거리는 게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다른 직원들에겐 당분간 자주 못 나온다는 정도로 설명해 두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장윤성이 충분히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받을 사례는 마다했지만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가게에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생할 이들에게 보상은 있어야 했다. 정호도 있었고, 막내 종민이도 일을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큰 걱정은 않았다.

저녁 7시가 넘었을 즈음, 장윤성에게 문자가 왔다.

「데리러 왔어.」

나는 성욱 형과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마지막으로 마주하고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장윤성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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