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쯤, 우리는 호숫가를 거닐다가 마침 지나가는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행선지는 물론 아랫동네였다.
2인석에 나와 나란히 앉은 장윤성은 이렇게 덜컹거리는 차는 처음 타 본다며 웃었다. 정이라도 들 것 같은 웃음이라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활짝 열어 둔 창문으로 후끈한 바람이 들어왔다. 역시 옆에 앉은 남자에게 정을 주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이 열기가 식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으니까.
우리는 아랫동네의 구멍가게 건너편에서 내렸다. 몇 번 들러 봤다고 장윤성은 익숙한 걸음으로 가게 앞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섰다. 긴 팔을 쑤욱 집어넣더니 초코 맛 쭈쭈바 두 개를 꺼내 들고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먹어 본 게 그것뿐이라 매번 그걸 집는 건가.
“지겹지도 않냐. 난 이거.”
배 맛 쭈쭈바를 집어 들며 “너도 이거 먹어 볼래?” 하고 물었더니 장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난 원래 한번 마음에 들면 잘 안 바꿔.”
“아이스크림한테 의리 지키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굳이 아이스크림이 아니더라도.”
가끔 장윤성의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하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도.
“난 안 그래.”
그렇게 하나하나 소중하게 마음에 넣다가는 삶이 너무 무거워지고 말 것이다. 나는 내가 그의 마음에 큰 무게를 더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건 장윤성의 호의 덕에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데에 대한 나의 보답이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한지영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장윤성은 별다른 대꾸 없이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들어가 계산을 하고 나왔다.
전에 앉았던 나무 아래 평상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바둑판을 벌여 놓았기에, 우리는 가게 앞에 있는 작은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덜걱거리긴 해도 가게 앞으로 길게 펼쳐진 천막 덕에 뜨거운 볕을 피할 그늘이 있어서 괜찮았다.
장윤성은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일 나랑 서울 갈래?”
“서울? 뭐 하러?”
“반지 고르러. 가짜 약혼반지라도 이왕이면 마음에 드는 게 좋잖아.”
장윤성이 기꺼이 거짓 약혼에 협조하겠다고 선언한 뒤, 장명수는 더욱 자주 별장에 드나들었다. 약혼을 빌미로 부친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것 같았다. 부친의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 된 장명수는 급기야 식탁에도 함께 둘러앉아, 꽤나 귀여운 예비 며느리를 대하는 양 내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확실히 낯가죽 두께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장명수의 말로는 최근 컨디션이 좋아 보이긴 해도 장 회장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당신도 그걸 잘 아는지 장 회장은 조바심을 내며 약혼식이라도 보고 싶다고 여러 번 재촉했다.
그의 불안을 알 것도 같았다. 장 회장이 죽은 뒤에도 장명수가 한지영을 어여삐 여기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공개적인 약혼식으로 가급적 많은 증인을 확보하려는 것일 터였다. 내가 진짜 한지영이었다면 장 회장에게 고맙지 않을 수 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장윤성이 협조하겠다 했음에도 실제로 TV에서나 봤을 법한 성대한 약혼식을 하기는 힘들었다. 눈이 침침하다는 장 회장은 둘째 치고 장윤성은 눈에 뭐가 껴서 여전히 날 여자라 믿는지 모르겠지만, 보는 눈이 많아질수록 이 허술한 여장이 들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명수도 앞날이 창창한 아들에게 공개적 파혼이라는 흠을 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능글맞은 장명수는 잘도 핑계를 댔다. 미국에 있는 한지영의 양부모가 당장 한국에 들어올 여건이 안 된다는 사정을 들어 일단 가족 앞에서 반지를 끼워 주는 정도로 해 두자고 했다. 장 회장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 장명수의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장윤성까지 설득하기 시작하자 결국 마지못해 수긍하는 척을 했다. 아들은 못 믿어도 손자는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덕분에 며칠 뒤엔 장윤성의 가족과 식사를 하고 반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장명수까지 함께 앉은 식탁에서 그 얘기를 하면서도 반지를 직접 고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장명수가 어련히 알아서 준비하겠거니 했다. 여장에 필요한 내 모든 짐을 준비해 주었듯이.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그 정돈 내가 사 줄 수 있어.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해 놨고.”
“그럼 나 주먹만 한 금 두꺼비 달린 거로….”
금 시세가 어떻게 되더라.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기는 척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반지를 사 주는 거야 고마운 일이지만 이 꼴로 서울까지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남자 손을 내밀고 여자 반지를 고를 걸 생각하니 상상만으로 허공에 발길질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옆에 앉아 내 말을 듣던 장윤성은 드물게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반지 팔려고?”
“그럼 그걸 가지고 있으라고?”
“당연히….”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갖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가짜라지만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인데.”
“팔아 버리는 쪽이 더 이상하거든?”
불만스런 대꾸에 나는 말을 잃고 누가 맞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상한 관계라 뭐가 더 이상한 일인지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장윤성은 조금 삐진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름도 안 가르쳐 주고, 반지는 팔아 버리겠다고 하고. 사람이 진실성이 눈곱만치도 없어요. 이름 안 쓸 거면 우리 집 개 새끼 낳았는데 걔나 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게 못내 섭섭했던지 장윤성은 또 그 이야길 꺼냈다.
“개 이름이 없어? 풍작이라고 지으면 되겠네. 주인이 뭐가 아주 풍작이신데.”
이름이 가짜면 어때서. 장윤성이 이름 석 자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정말로 몇 번이고 이름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름 석 자면 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탓에, 나는 그저 까칠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터라 지랄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반지 진짜 팔 거야?”
장윤성은 그깟 욕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회유라도 하려는 듯이 부드러워진 음색이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고민 했다. 글쎄, 비싼 반지를 받는다면 앞으로도 숱하게 닥칠 금전적 위기 앞에서 팔지 않고 지킬 자신이 없는데. 장윤성은 날 빤히 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 무던한 덕에 나도 모르게 틱틱댈 때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눈치를 보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짜 이름을 쓰는 주제에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윤성이 의아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기다려 봐.”
나는 장윤성을 평상 위에 앉혀 놓고 구멍가게 앞 뽑기 기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주머니에 있던 동전 몇 개를 찾아 넣고 레버를 돌렸더니 동그란 플라스틱 캡슐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장윤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지켜보고 있었다.
캡슐 안에는 어린아이나 끼고 놀 법한 장난감 반지가 들어 있었다. 플라스틱 큐빅 세 개가 일렬로 박혀 있는, 꽃반지나 캐릭터가 붙은 것보다야 덜 유치한 디자인이었지만 손에 끼우는 순간 망가질 것 같은 조잡한 물건이었다.
어렸을 때 지영이가 문방구 앞에서 이런 것을 뽑는 걸 몇 번 봤었다. 이런 반지는 으레 사이즈가 조절되기 마련이어서 성인인 내 손가락에도 어떻게든 끼워 볼 수 있었다.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빼서 건네자 장윤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와 반지를 번갈아 봤다.
“가짜 약혼인데 가짜 반지면 어때. 어차피 할아버지는 눈도 침침하시고, 가족들은 신경도 안 쓸 텐데. 이런 건 어디다 팔지도 못하고.”
장난이라고 생각하면 간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장난 같은 약혼과 장난감 반지. 그 정도면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오래 간직할 필요도 없이 금방 부스러질 것이다.
장윤성은 내 손바닥 위의 반지를 빤히 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장난감 반지가 장윤성의 주머니에 무사히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 평상에 앉았다.
“풍작이 말이야.”
반지 이야기는 이제 포기했는지 장윤성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풍작이?”
“네가 풍작이라고 하라며.”
“새끼 낳은 거 진짜야?”
내 이름 개나 주라는 뜻으로 한 욕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던지 장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진짜 귀여워.”
장윤성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열어 내게 내밀었다. 순하다 못해 다소 억울해 보이는 인상의 골든레트리버 새끼가 카메라 가까이에 코를 들이대고 있었다. 귀엽다는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장윤성이 슬쩍 말을 이었다.
“데려가서 키울래?”
“얘 엄청 커지는 종 아니야? 우리 집엔 사람 누울 자리도 없어.”
“집이 좁아? 가족이 몇 명인데?”
“엄마랑….”
나도 모르게 술술 가족 관계를 털어 놓을 뻔했다. 가족 관계를 말한다고 내 진짜 신상을 캘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무엇이든 숨기고 보는 게 나았다. 무심코 흘린 정보의 조각이 나를 특정 지을지도 몰랐으니까.
내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자 장윤성은 아쉽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쉽지가 않네.”
***
약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얼마 후, 별장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장윤성의 어머니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일찍부터 장명수가 연락을 했었다. 명색이 예비 시어머니인데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약혼하면 모양새가 영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약혼식이 허울뿐인 절차라는 걸 장 회장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는 성의쯤은 보이겠다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인도 이 가짜 약혼 쇼에 동의를 한 상태니 특별히 곤란할 건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장윤성과 그의 형의 터울을 생각해 보면 몇 살이라도 우리 엄마보다 더 먹었을 텐데, 현관으로 들어선 여인은 우아한 스타일 때문인지 화려한 얼굴 때문인지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갑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어느 모로 봐도 미인이었다. 장윤성의 속은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얼굴은 어디서 왔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 냉랭한 표정은 장 회장에게 인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들에게만은 예외였다.
“나 여사!”
장윤성이 장난스럽게 ‘나 여사’라고 칭하며 달려 나오자 여인은 한결 화사해진 얼굴로 품을 열었다.
“아들! 잘 지냈니?”
나 여사의 이름은 나희수라고 했다. 그녀는 음색을 높이며 장윤성을 얼싸안았다. 두 사람만 보자면 평범한 모자지간이었지만 장 회장과 내가 함께 있는 탓에 기묘한 그림이 되었다. 옆에서 장 회장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여인은 내게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가 지영이구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녀는 ‘고생한 한지영’을 위로하듯 등을 툭툭 다독였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다. 불쾌해하거나 거리낌이 있을 법도 한데 신기할 정도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연기쯤은 아무렇지 않게 잘하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 호들갑스럽게 장 회장에게 소감을 전했다.
“아버님,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제라도 지영이를 찾고, 또 이렇게 식구가 돼서. 저는 이 아이가 마음에 쏙 드네요.”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어쩐지 ‘퍽이나 그렇겠다’고 하는 장 회장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 회장은 표면적으로나마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불편하게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장 회장의 눈에는 장윤성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웠을까? 당신이 타계한 후 이렇듯 기세가 대단한 부모의 반대가 있더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바꿔 말하자면 장윤성은 그 정도로 쌓아 둔 신뢰를 나를 위해 건 셈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희수는 별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불편한 장 회장을 안에 두고, 나와 장윤성은 밖까지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 식사를 할 때 몇 번 시선을 준 것을 제외하면 장윤성의 모친은 내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 집에 자주 오라는 당부를 한참 하고 나서야 그녀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 떠날 예정이라고 했죠?”
마침 생각난 것처럼 물었지만, 장 회장의 앞에선 그래도 살가웠던 말투가 생전 모르는 남을 대하듯 단호했다.
“말일 전에는 나설 것 같아요.”
어쨌든 이달 내로 떠나겠다는 소리에 나희수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윤성이는 벌써 정이 많이 든 것 같은데, 섭섭하겠네.”
그러면서 그녀는 장윤성의 얼굴을 살폈다. 장윤성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분 탓일까, 장윤성은 묘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다,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파인애플 탑도 그의 어머니 앞에선 볼 수 없었으니까.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끝까지 잘 부탁해요.”
끝을 강조하는 말투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얼른 가요. 차 막히면 고생하니까.”
장윤성이 재촉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탔다. 까만 세단은 금방 별장을 빠져나갔다. 장윤성과 나는 그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서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날. 내가 그렇게나 바랐던 날이었다. 이 불편하고 심심한 시간을 견딘 대가로 돈을 받는 날.
하지만 남은 시간은 조금 더디게 흘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덥다. 들어가자.”
장윤성이 손바닥으로 내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며 고갯짓을 했다.
***
달그락.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다 또 졸았던 모양이었다. 부스스 일어나서 얼굴 위로 쏟아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테이블 위에 아이스티를 내려놓던 장윤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씨, 침이나 좀 닦으시죠.”
“씁…. 나 침 안 흘려.”
그래도 혹시 몰라 손 등으로 쓱쓱 입가를 문질렀다.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그냥 베개를 들고 나오는 게 어때.”
장윤성은 놀리듯 말하며 아이스티 한 잔을 내게 건넸다. 책을 읽다 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변명할 여지가 없어 나는 그저 컵을 입에 댔다. 시원하고 달콤한 게 목으로 넘어가니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서로가 조금 편해진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며 빈둥거리면 장윤성도 곁에 앉아 책을 보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럼 나는 방해가 될까봐 TV를 끄고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그게 독서… 가 아닌 수면이었을 뿐이었다.
“심심해? 나갈까?”
장윤성은 자기 몫 아이스티를 들고 옆에 앉아 물었다. 하던 일을 얼추 마무리했는지 테이블 한구석에 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아니, 오늘 너무 더워.”
기운이 넘치는 날이야 아랫동네까지 싸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더위를 버티기 힘든 날도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장윤성은 ‘음…’ 하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굳이 내 따분함을 해소해줘야 할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피아노 쳐 볼래? 가르쳐 줄게.”
뜬금없지만 솔깃한 이야기였다. 가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건반을 하나씩 누르고 있으면 장윤성이 와서 연주를 해 주곤 했다. 눈을 감고 듣는 것도 좋았지만 나도 손가락을 놀려 가며 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있었다.
“배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아?”
내가 여기 머무를 수 있는 날은 길어도 보름 남짓이었다. 그 안에 죽도 밥도 안 될 거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곡이 몇 개 있지.”
장윤성은 자신이 마치 대단한 노하우를 지닌 선생이라도 된 양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아이스티를 꿀꺽꿀꺽 한 번에 넘기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하자, 얼른.”
우리는 나란히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장윤성은 악보는 펼 생각도 안 하고 대신 제 양손의 검지를 펴 보였다. 따라하라는 듯이.
“자, 손가락 두 개 내놔 봐.”
“손가락?”
손은 여전히 내가 장윤성에게 내보이기 싫어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체형은 옷으로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었지만 손은 아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머뭇거리자 장윤성은 억지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네 손 하루 이틀 본 거 아니니까 그냥 내놔. 신경 안 써.”
장윤성은 아직도 내가 상처 때문에 손을 숨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손 모양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나? 나는 눈치를 보며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펴 보였다. 손가락에 힘을 꽉 주라고 말한 장윤성은 내 손목을 직접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윤성이 연주하던 화려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두 개의 음이 어울려 귓가에 울렸다.
딴딴딴 딴딴딴…. 어렸을 적 교실 앞 풍금에 앉아 여자애들이 한 번씩 연주해 보던 곡이었다. 젓가락 행진곡. 소리야 그럴 듯했지만 실로폰 채라도 된 것처럼 장윤성의 손에 잡혀 이러고 있는 꼴이 우스워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말고 제대로 외워 봐.”
그렇게 말하는 장윤성도 이미 웃음이 터진 얼굴이었다. 장윤성의 말대로 금방 외울 수 있을 만큼 쉬운 곡이었다. 하지만 이 곡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잘 알고 있는 탓에 나는 손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의아한 시선이 뒤따랐다.
“이거 말고 다른 거 가르쳐 줘.”
“왜?”
“이건 둘이 쳐야 하는 거잖아.”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칠 수 없는 곡이다. 그런 건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았다. 반복할 수 없는 것은 이미 버거울 만큼 많이 생겨 버렸으니까.
“혼자 칠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장윤성의 빤한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장윤성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다른 곡을 연주해 보였다. 웬일로 집요한 물음도 하지 않고.
“이런 건 어때?”
“좋아.”
“그럼 손가락을 여기에 놓고….”
말 그대로 끝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장윤성도 이제는 포기한 것 같았다. 어차피 그 역시 여름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묵묵히 건반만을 두드렸다. 내가 어설프게나마 가르쳐 준 대로 따라할 수 있게 되었을 쯤, 장윤성이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말도 해 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는 의미 없는 손짓으로 피아노 건반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하기로 했어. 너도 그렇게 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윤성은 평소와 달리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마음대로 할 건데? 묻고 싶지만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장윤성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
며칠 뒤, 장 회장은 갑작스레 몸이 좋지 않다며 입원을 했다. 아픈 가족이 있기 때문인지, 그사이 장 회장에게 생각보다 많은 정을 주었기 때문인지 나는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검진도 받을 겸 입원하신 거야. 별일 아닐 테니까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장윤성은 오히려 침착하게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인 양 씁쓸한 목소리였다. 한동안 활기가 넘쳤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장 회장은 나흘 만에 별장으로 돌아왔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우리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현관 앞까지 뛰어나왔다. 기운 없는 표정으로 막 휠체어에 앉은 장 회장이 우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허이구, 녀석들. 애들도 아니고. 이렇게 반겨 줄 줄 알았으면 사탕이라도 사 올 걸 그랬지.”
그래도 열렬한 환영이 나쁘진 않았던지 장 회장은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웃었다.
“할아버지,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그래, 우리 지영이가 걱정을 해 줘서 그런지 괜찮다. 들어가자.”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장 회장의 안색은 이전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장윤성은 잠잠한 얼굴로 나와 장 회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별장에 들어선 장 회장은 비서에게 장명수를 불러 달라 부탁하고 내게 손짓을 했다. 잠깐 할 말이 있다면서.
나는 버석해진 장 회장의 손을 마주 잡고 무릎을 조금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장윤성은 말없이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장 회장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놈이 정말 네 짝으로 마음에 차긴 한 게야?”
장윤성이 자리에 없었다면 대답하기 조금 쉬웠을 것이다. 나는 장윤성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대답은 ‘그렇다’고 해야겠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낯부끄럽긴 해도 내가 여자였다면 장윤성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럼요.”
장 회장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미안한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지영아.”
“네.”
“아무래도 내가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구나.”
체념 섞인 목소리에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몸에 그런 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내게 말하며 ‘엄만 괜찮아’ 하던 그때의 목소리가.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에 힘을 주고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라고, 더 오래 사실 수 있을 거라고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장 회장은 괜찮다는 듯이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여기서 지내 줄 순 없겠느냐.”
조금만 더 여기서…. 이것저것 다 잊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짜 한지영이 아닌 탓에 그런 것조차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섣부르게 대답했다가 그러지 못하면 장 회장이 느낄 실망감만 커질 뿐이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장 회장의 손을 꽉 쥐었다. 마음이 전해진 건지 장 회장은 대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그는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쉬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장윤성은 제가 모시겠다며 비서의 도움도 만류하고 장 회장을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챙겨 드릴 게 많았던 건지 할 얘기가 많았던 건지 장윤성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오후쯤 연락을 받았을 장명수는 해가 지기 무섭게 별장에 도착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서둘러 온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부친을 속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는 있어도 병원에 다녀온 아버지가 걱정스럽긴 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자 장명수는 됐다는 듯이 손짓을 하고 장 회장의 방으로 향했다.
장 회장이 내가 여기에 머무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장명수는 뭐라고 대답할까. 내 신경은 온통 방 쪽으로 곤두서 있었지만, 장윤성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대화는 그리 길지 않게 끝맺음된 듯했다. 장 회장의 방에서 나온 장명수는 나를 보며 턱짓을 했다.
“지영이 잠깐 나 좀 보자.”
제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데도 장윤성은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2층의 구석방까지 가서 장명수는 늘 하던 대로 비서를 문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엉뚱한 혼담을 꺼낼 때처럼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골초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말없이 담배를 뻐끔거리던 남자는 재를 한 번 털어 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투병 중이시라고.”
“네.”
처음 나를 찾아와 한지영이 되어 달라는 소리를 할 때도 그는 그 말부터 꺼냈었다. 돈이 필요한 내 처지를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치료는 잘 받고 계시고?”
치료라고 해 봐야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장윤성이 가짜 약혼에 협력하겠다고 했을 때, 장명수는 약속한 돈에서 일부를 미리 건넸다. 덕분에 그 비싸다는 약을 사는 데까지는 일단 성공했지만 당장 몸이 여기 있으니 엄마와 건우가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장명수는 담배를 조금 더 태우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네가 여기 더 머무르면 좋겠다고 하시더구나.”
“들었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오래 머무를수록 정체를 들킬 확률은 더 커질 테고, 장명수가 져야 할 책임도 커질 것이다. 장 회장의 건강이 더 안 좋아진 지금은 더더욱. 정체를 들켜 장 회장이 충격에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장명수는 물론 나 역시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내 얼굴을 살핀 장명수가 피식 웃었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편하다고 하면서.
“제안을 하나 하지. 네가 끝까지 들키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여기서 더 머무른다면 돈을 세 배로 주겠다. 하지만 실패하면 잔금은 없는 걸로. 어때, 자신 없으면 그냥 이번 달까지만 해도 좋아.”
장명수가 주는 돈은 그대로 엄마의 병원비가 될 예정이었다. 엄마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하라니. 내가 눈을 사납게 뜨자 장명수는 깜빡한 게 있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여기 머무르는 동안 네 어머니의 치료는 우리 병원에서 맡아 줄 거야. 최고의 대우와, 실력 있는 의료진을 보장하지. 별로 어려울 것도 없잖아. 지금까지처럼 안 들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면 돼.”
장명수 같은 인물이 고작 내게 줄 돈이 아까워서 그런 조건을 건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이 일이 그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든, 부친을 위해서든. 그러니 나에게도 그만큼의 각오를 요구하는 것일 터였다.
장 회장은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장윤성은 내가 가짜라는 걸 알지만 협조적이다. 게다가 방학이 끝나면 장윤성은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장명수의 말대로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계속해야 하는 탓인지 뭔가 자꾸 걸렸다. 걸리적거리는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의도한 답을 했음에도 장명수는 웃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부모를 성심껏 모시기로 약속한 셈이었다.
“그럼, 그런 걸로 알겠다.”
장명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먼저 방을 나가려는 듯 문고리를 쥐었다. 달칵, 문을 열다 말고 장명수가 멈칫했다.
“그런데 윤성이는…. 아니, 아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을 털어 내려는 듯 그는 고개를 젓고 방을 나섰다.
***
약혼식이라기보다는 장윤성의 가족에게 인사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거추장스러운 파티 같은 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화려한 식탁에서 여럿이 저녁을 함께 먹는 정도라고 했다. 장 회장이 넌지시 섭섭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자리는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좋았고, 사람은 없을수록 좋았다.
가족들이 저녁쯤 도착할 거라고 해서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정원 파라솔에 앉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장윤성의 부모도, 형도 이미 아는 사이였지만 그들을 한 번에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잔잔히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며 나는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는 사이 부웅, 하고 차 한 대가 별장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드나드는 여느 차와 마찬가지로 얼핏 봐도 비싸 보였지만 처음 보는 차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부지런하게 걸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내린 사람은 강아지를 안은 젊은 여자였다.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강아지는 낯이 익었다. 장윤성이 그렇게 자랑하던 새끼 골든레트리버. 여자는 선글라스를 살짝 올리고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지영이가 너니?”
장윤성에게 형제는 형 하나뿐이라고 들었으니 그녀는 장현성의 부인일 확률이 높았다. 설마 사촌이라거나 하진 않겠지. 나는 인사를 하려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느긋한 성격은 아니었던지, “나 윤성이 형수.” 하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한지영… 입니다.”
장명수는 내게 장윤성과 장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그녀도 이미 내 정체를 다 알고 있을 테지만 달리 소개할 말이 없어 한지영이라 했더니, 대답 대신 민망할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혹여 장윤성이 그 소릴 들었을까봐 별장 쪽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손님이 온 걸 눈치챈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 하하, 미안. 재미있는 동서가 생겨서 그만.”
별로 미안하지 않은 눈치였다. 여자가 차를 몰고 온 남자에게 턱짓을 하자, 남자는 차에서 큰 쇼핑백을 꺼내 내게 건넸다.
“최 실장이 보내는 선물.”
최 실장은 이곳에 오기 전 내게 여장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필요한 도구도, 옷도 모두 그녀가 고르고 챙겨 준 것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 속에는 새 옷이 들어 있었다. 한 벌뿐인데 부피가 꽤 되는 걸 보니 길거나 화려한 옷 같았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강아지를 안은 여자는 날 관찰하듯 내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좀 더 우스운 꼴을 생각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볼 만하네. 그래도 그렇지, 정말 윤성이가 몰라? 걔가 감이 장난이 아닌데 말이야. 그치, 풍작아?”
“풍….”
여자가 안고 있던 강아지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개 이름을 정말 풍작이로 지었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누나!”
장윤성이 반가운 목소리로 ‘누나’를 외치며 나왔다. 형수라더니 생각보다 격 없이 지내는 사이인 것 같았다. 장윤성은 강아지를 받아들며 웃었다.
“정말 데려왔네. 아, 지영아, 이쪽은….”
“우리 이미 인사했어.”
장윤성이 형수를 소개하려는 듯 운을 떼자 여자는 이미 잘 안다며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저 여자는 성미가 조금 급한 편이었다. 장윤성은 그럼 됐다는 듯이 제 형수를 별장으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말한 건?”
“찾아왔으니까 걱정 마.”
여자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이 장윤성의 등을 찰싹 두드렸다. 두 사람은 꽤 친해 보였다. 이은조라는 이름의 여자는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긴 했지만 나희수보다는 상대하기 편했다. 장윤성과는 형수와 시동생 관계가 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고 했다. 장윤성이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형수님이 아닌 누나인 것만 봐도 알 만했다.
“자, 부탁했던 거.”
대동하고 온 남자가 선물로 보이는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들어오자, 이은조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장윤성에게 건넸다.
“땡큐.”
장윤성은 가볍게 인사를 하며 물건을 받아들고는 확인을 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뭐길래 혼자만 보려고 하는 거지. 궁금함을 못 이기고 내가 고개를 쭉 빼며 기웃거리자 이은조가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궁금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은조는 뭔가를 쉽게 가르쳐 줄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속내를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 돌아왔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이은조는 내 모습을 다시 천천히 살폈다.
“정말, 우리 윤성이 어쩌니….”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장명수 부부와 장현성이 도착했다. 저녁 식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정말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될 것도 아닌데 뚫어져라 나를 보는 눈이 몇 쌍이나 됐다. 가발이 삐뚤어졌나? 옷을 거꾸로 입었나?
나는 내 모습에 문제가 있나 싶어 몇 번이나 장 회장과 장윤성의 얼굴을 살폈다. 장 회장은 문제가 있어도 못 알아볼 만큼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장윤성은 눈이 마주치자 ‘괜찮아’ 하고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 같았지만, 어쨌든 문제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조금이나마 음식을 삼킬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모두 거실 소파에 둘러앉았다. 장윤성이 내 손가락에 장난감 반지를 끼워 주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핏 단란해 보이기는 했지만 역시 이상한 자리였다. 장명수는 부친의 비위를 맞추느라 바빴고, 그의 부인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장현성은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지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다만 장윤성의 형수, 이은조만이 흥미로운 얼굴로 우리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장현성의 재촉에 따라 장윤성과 나는 장 회장의 곁에 나란히 섰다. 장윤성은 품에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반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어디서 그럴듯한 것을 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에서 나온 것 또한 내가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분명 같은 디자인이었지만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탁한 플라스틱 보석 자리에는 훨씬 투명하고 반짝이는 게 붙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박이 벗겨질 것 같은 조잡한 링도 광택 나는 백금색이 되어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을까. 의아한 듯 눈짓을 했지만 장윤성은 못 본 척 가족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아까 이은조가 가져왔던 게 이 반지였던 모양이었다.
장 회장과 이은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른 가족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것으로 약혼식은 끝이었다.
오랜만에 별장을 찾아온 네 명의 손님은 약혼식이 끝난 후 차 두 대를 나눠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한 마리 손님은 당분간 별장에서 지내기로 했다. 장윤성이 미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심심할까 봐 풍작이를 데려다 놓은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다정한 눈길로 가족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장윤성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 역시 이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게 될까.
“너는… 미국 언제 가?”
먼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장윤성은 조금 곤란한 듯이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안 가. 나 휴학했어.”
“아, 그래? 어… 왜? 아니, 그보다 이 반지.”
휴학의 이유를 묻다가 얼른 말을 돌렸다. 어쩐지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다. 당연히 장 회장의 건강 때문일 텐데도, 장윤성의 입에서 감당하지 못할 말이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났다. 허둥대며 반지 이야기를 꺼내자 장윤성이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팔을 들었다. 캄캄한 밤, 드문 빛이 스칠 때마다 반짝거리는 반지였다.
“300원짜리야.”
내가 뭘 물어볼 지 아는 것처럼 그는 대뜸 내가 뽑기 기계에 넣었던 액수부터 불렀다. 이게 얼마짜리인지는 몰라도 장난감과 아닌 것까지 구분 못 할 정도로 막눈은 아니었다. 이런 게 300원일 리 없었다. 하지만 장윤성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팔지 마.”
장윤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반지에 입을 맞추듯, 내 손을 제 입술에 댔다. 반지가 작은 탓에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손에 닿았다.
장윤성의 얼굴이 시원한 밤바람 같았다. 새카만 하늘의 별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쏟아졌다. 얼른 손을 빼야 한다는 생각도 팔랑팔랑 날아간 것 같았다. 뒤늦게 손을 빼내려 하자 장윤성은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로 놓아주었다.
어쩐지 손가락이 무거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쉽게 망가져 버릴 장난감인줄 알고 건넸으나 돌아온 건 오랫동안 부서지지 않을 견고한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