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그늘 (7/18)

장윤성은 내게 자신의 침실 맞은편에 있는 방을 내주었다. 넓고 휑한 집은 지난번에 와서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방에는 그런대로 물건들이 들어차 있었다. 필요한 가구는 물론 노트북과 옷가지까지. 눈썰미가 좋은 편인지 눈대중으로 골랐다는 옷은 몸에 얼추 맞았다. 맞지 않는 건 가격표에 붙은 숫자뿐이었다. 예전에 별장에서도 느꼈지만 태원그룹 사람들은 확실히 금전 감각이 달랐다.

“하경아.”

내가 정리를 하는 동안 저녁을 준비하겠다던 장윤성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벌써 우리가 퍽 친한 사이라도 된 양 다정한 음색이었다. 내가 돌아보자 장윤성이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저녁 나가서 먹자.”

“왜? 방금까지 뭐 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래도 첫날인데 맛있는 거 대접해야 할 것 같아서.”

분명 아까 제 입으로 맛있는 걸 해 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 굳이 장윤성이 한 음식을 고집할 필요도 없어 정리를 대충 마무리 짓고 일어섰다.

나서면서 흘긋 보니 부엌이 엉망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요리를 하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몰라도 내가 알던 장윤성은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라면, 파스타, 볶음밥 정도는 먹을 만하게 하는 편이라 그가 부엌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저녁은 파스타일 줄 알았다. 하지만 부엌 꼴을 보아하니 파스타 정도의 간단한 음식을 만들려 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뭐든 잘할 것 같은 사람의 빈틈을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신발에 발을 집어넣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하려고 했던 건데? 그냥 할 줄 아는 거 하지.”

저를 놀리는 소리에도 장윤성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뭔 줄 알고?”

“라면 정도는 끓일 줄 알겠지, 뭐.”

장윤성은 작은 위화감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의 과거를 아는 것 같아 보이면 어김없이 틈을 찾아내려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지만 철저하게 틈을 피해 대답을 하고 먼저 현관을 나섰다.

장윤성의 집에서 조금 걸어 나오니 식당이 즐비한 골목이 있었다. 우리는 그다지 붐비지 않는 한적한 고깃집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내 앞에 물컵을 놓아 주며 장윤성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레시피만 알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실패가 충격이었던지 그는 여러 번 곱씹었다. 불판 위에는 빨간 고기가 올라갔다. 장윤성은 그걸 보면서 익히는 게 어려웠다고 중얼거렸다. 태웠다는 소리네.

“평소에는 뭐 먹고 사는데?”

“밖에서 먹거나, 사다 먹거나?”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 아무거나 잘 먹어.”

아직 요리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장윤성은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이 어색해 나는 젓가락을 들고 먼저 나온 밑반찬을 이것저것 입에 넣었다. 장윤성은 젓가락을 들지도 않고 빤한 눈길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좀 떠오른 건 있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장윤성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7년이나 묻혀 있었던 기억이었다. 차에 뛰어들 때는 아마 충격 때문에 조금이나마 떠올랐던 거겠지.

이대로 기억이 떠오른다면 장윤성은 한지영을 찾아 나설까, 아니면 내가 한지영인 걸 밝혀내려 할까. 뒤끝 없는 성격이라면 그냥 기억을 찾은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지만, 없는 기억에도 이만큼이나 집요한 사람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3개월은 짧아.”

장윤성이 새삼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도와주기로 했지만 언제까지고 장윤성의 기억이 떠오르길 기다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달이라는 기간을 조건으로 걸었다. 장윤성은 반년 정도는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찾은 합의점이 3개월이었다. 장윤성의 기억이 어찌되든 3개월 후면 이 지난한 인연은 끝을 맺을 예정이었다. 그때 제대로 끝맺지 못한 탓에 7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기억을 찾으면 좋을 것 같아?”

장윤성이 잃은 기억에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꺼낸 말이었다. 누누이 강조했듯 별거 아닌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하지만 장윤성은 덤덤한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아니.”

아닐 걸 알면서도 장윤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조하는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 태도만 봐도 알아, 별로 좋은 일 아닌 거.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더라고.”

그러면서 그는 어깨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도, 곧은 어깨도, 단정한 손 모양도 여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 같았다. 마냥 여름 같았던 남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보다 엉망이야, 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겉보기로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랬다. 몇 달 남짓한 기억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이 있어서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내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는지, 장윤성은 섭섭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밥이나 먹자며 화제를 돌렸다.

밥을 먹고 가게를 나설 때쯤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근처라고는 해도 이대로 걸어갔다가는 쫄딱 젖은 채로 집에 들어설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이곳은 인적 드문 시골이 아니었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쓰고 돌아가기로 했다. 편의점에 들어선 장윤성은 우산을 고르다 말고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흘끔거렸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럴까.”

“이거 먹어 봤어?”

장윤성이 꺼내든 건 우리가 여러 번 함께 먹었던 초코 맛 쭈쭈바였다. 여전히 나오는 걸 보면 그 밍밍하고 단맛을 사랑했던 사람이 장윤성과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안 먹어 본 사람도 있냐.”

“그래? 난 얼마 전에 처음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

그러면서 장윤성은 원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두 개와 큰 우산 하나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날씨가 조금 쌀쌀했다. 장윤성은 아이스크림을 뜯으려다 말고 다시 봉지 속으로 넣었다.

“아직 쌀쌀하네. 이건 들어가서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윤성은 큰 우산을 펼치고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추우면 바짝 붙어도 돼.”

“안 추워.”

“내가 추워서 그래.”

장윤성이 어깨를 바짝 붙여 왔다. 우산이 크다고는 하지만 둘이 쓰려면 어차피 꼭 붙어 걸어야 했다.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윤성의 손에 들린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기억을 꼭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너는 이미 그리운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데.

***

오후에는 외출을 할 예정이었다. 잠깐 집에 들렀다가 건우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장윤성이 자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뭘 해도 상관없다고 한 데다, 도우미가 오기로 했으므로 피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혹여 내가 장윤성과 알고 지내는 걸 그의 가족이 알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듣자 하니 집안일을 봐 주는 사람은 본가에서 일하다가 주에 두어 번 이곳으로 출근하는 사람이라는 듯했다. 내 얼굴까지야 모르겠지만 마주친다면 통성명 정도는 하게 될 테고, 그게 어떻게 흘러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장윤성에게 그런 사연을 전부 털어놓을 순 없었으므로 그저 집에 모르는 사람과 둘이 있는 게 싫다고 둘러댔다. 다행히 그는 그런 사정 또한 이해한다는 듯이, 도우미가 언제 방문할지 미리 가르쳐 주기로 했다.

- 집에 쓰레기봉투 다 떨어졌는데 내가 자꾸 깜빡한다.

“알았어, 내가 사 갈게. 더 있어?”

- 그리고 또….

집에 가기 전에 필요한 게 있을까 물어보려 메시지를 보냈더니 마침 시간이 비었는지 건우가 전화를 해 왔다. 필요한 거, 먹고 싶은 거…. 목록이 길어지기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필기도구를 찾았다.

“잠깐만, 적어야겠다. 메모지가….”

저번에 청소기를 돌리다 장윤성의 방에서 얼핏 봤던 메모지와 펜이 떠올랐다. 맞은편 침실에 들어갔더니 역시 침대 옆 협탁 위에 필요했던 게 있었다.

“찾았다, 다시 불러 봐.”

펜을 쥐고 건우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다가 스탠드 뒤에 있는 작은 물건에 눈이 갔다. 하얀 플라스틱 약통. 나도 아는 종류였다. 수면제. 뚜껑을 열어 보니 이미 많이 먹었는지 몇 알 남지 않은 상태였다.

- …하고, …형?

“어?”

- 듣고 있어?

“어, 응.”

엉망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건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장윤성의 불면증이 꼭 나 때문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겉으로는 여유 넘치게 보여도 자신의 태생에 부담이 있을 수도 있었고, 다른 고민거리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저 조금은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집에 들러 건우가 부탁했던 물건을 내려놓고 금방 다시 나왔다. 건우의 빽빽한 시간표에는 빈 시간이 별로 없어서 서둘러야 했다.

나는 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건우가 남보다 길게 다녀 준 덕에 캠퍼스 구경은 벌써 몇 번이나 했었다. 익숙한 길을 걸어 의과대 건물 근처 벤치에 앉아 건우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잠깐 고개를 들었다.

벚꽃이 화려하게 핀 봄이었다. 하늘과 꽃, 분주히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기.”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수줍은 얼굴의 여학생이 핸드폰을 내밀며 물었다.

“어느 과 다니세요?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너무 잘생기셔서.”

여러 번 이곳을 오가는 동안 이런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캠퍼스라서 그런지 대개 내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학생일 거라고 예상한 채 다가오곤 했다. 그런 상대에게는 구구절절 내 나이와, 짧은 가방끈을 설명 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다.

“여자 친구 있어서요, 번호는 못 드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 정말요? 아뇨, 저야말로.”

여학생은 실례했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저만치서 기다리던 친구에게로 돌아갔다. 그 친구는 처음부터 내가 별로였다는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 누군지 떠올리려는 노력에 가까웠다. 문득 나도 여자의 얼굴이 낯익다고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가게 손님?

‘어떡해, 여자 친구 있대. 완전 민망해.’

내게 말을 걸었던 학생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가 어서 가자고 여러 번 재촉하자 날 쏘아보던 친구는 시선을 거두고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정말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형!”

마침 강의가 끝났는지 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지?”

건우는 미안한 듯 웃으며 눈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내게 말을 거는 걸 봤던 모양이었다. 또 놀릴 기세라 나는 얼른 길을 재촉했다.

“별로 안 기다렸어. 시간 없다며, 얼른 가자.”

내 말에 바쁜 제 일과를 깨달았는지 건우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기 시작했다. 멀리까지 나갈 시간도 없고, 형제가 나란히 입맛이 무던해서 우리는 교내 카페테리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건우가 추천해 주는 것마다 무작정 집다 보니 쟁반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며칠 안 됐는데 형 얼굴 되게 좋아졌다. 가게 가까우니까 확실히 편하지?”

쟁반 끝에 위태롭게 걸쳐 있던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건우가 물었다. 장윤성과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터라 건우에게는 그저 가게 근처에 사는 친구네 집이 비어 잠깐 그곳에서 지낼 거라고 둘러댔었다. 내가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먼 거리를 오가는 걸 싫어했던 건우는 잘됐다며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었다.

“응, 뭐.”

가게가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아예 일을 쉬고 있으니 낯빛이 좋아질 법도 했다. 하지만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는 해도 건우를 속이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짧게 대답하고 밥을 입에 넣는 것으로 대화를 끊으려 했지만 건우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도 그쪽으로 이사 가면 어때?”

우리 집은 건우의 학교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건우는 종종 내가 먼 거리를 다니는 걸 미안해했지만 딱히 희생이나 양보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이왕이면 건우의 학교나 내 일터, 둘 중에 한쪽과 가까우면 좋을 것 같았고 그나마 월세가 싼 게 이 근처였을 뿐이었다. 학교 근처라고는 해도 이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였다.

“강남에 우리 누울 자리가 어디 있다고. 신경 쓰지 마.”

“뭐 어때. 나도 졸업하면 돈 벌 건데. 그리고 나 그 근처 병원으로 갈 거야.”

“어디?”

“태원병원이나….”

기껏 집어올린 반찬이 도로 떨어졌다. 건우에게 태원병원은 좋은 곳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우리 가족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준 곳이었으니까. 건우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장명수는 끝까지 약속을 지켰고 거기에 더해 넓은 아량도 보였다. 그 일이 끝난 뒤에도 엄마는 계속 태원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병을 고치진 못했지만 엄마는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우리 곁에 있었고, 가능한 모든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나는 빚을 진 셈이었다. 장명수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은 약속을 지켰으니 나 역시 그렇게 하기를 기대한다고.

“태원병원….”

건우의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말릴 핑계도 별로 없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굳힌 것도 아닌데 괜히 나서서 다른 곳을 추천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건우는 벌써 의사라도 된 양 뿌듯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졸업하면 이번엔 형 차례야. 내가 뒷바라지 다 해 줄 테니까 형도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놔.”

“국시나 통과하고 말하시지?”

아직 졸업도 못 한 놈이 하는 소리가 가소로워 웃었더니 건우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진지하게 하는 소린데…. 형은 하고 싶은 거 없어?”

건우가 이렇게 물을 때면 문득 나는 그릇이 작아 부끄러운 형이 되곤 했다. 꿈이란 건 평온한 대지 위에서나 자라는 건 줄 알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마치 파도가 치는 바다 위의 뗏목 같아서, 나는 언제나 품 안의 것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했었다. 먼 곳을 볼 여유도 없이 몸을 웅크리고 내 것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건우가 형보다 나은 아우라 다행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꿈을 꾼다는 건, 건우만큼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없긴, 나도 하고 싶은 거 있어.”

“건물주 말고.”

이미 익숙한 레퍼토리라는 듯이 건우가 선수를 쳤다. 공부를 그렇게 잘해서 명문대 의대를 다녀도 건물주는 요원한 꿈인 모양이었다.

“왜, 건물주가 어때서. 꼭 건물 사서 너한테 월세 받고 살 거야. 위에는 네 병원, 1층에는 약국.”

옆에는 빵집, 편의점… 줄줄 읊는 구체적인 계획에 결국 건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려면 로또 1등을 서너 번은 맞아야 하는 거 아냐? 근데 형은 오만 원짜리도 당첨돼 본 적 없잖아.”

가끔 한두 장 해 본 걸 가지고 건우는 종종 형은 운이 없다고 놀리곤 했다. 운이 없는 건지, 이미 써 버린 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가장 절실했던 순간에 돈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직 줄지 않은 건우의 접시 위의 음식을 보면서 테이블을 툭툭 쳤다.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얼른 먹어. 시간 다 돼 간다.”

“알았어.”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쁘게 음식을 입에 넣었다. 넉넉하게 담겨 있던 밥이 금세 줄었다. 나나 건우나 식탐이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건우가 이렇게 빨리 먹는 건 나름대로 바쁜 삶을 살았다는 증거였다.

밥을 다 먹은 뒤엔 졸지 말라는 뜻으로 커피까지 한 잔 쥐여 주고 건우를 강의실로 들여보냈다. 장도 보고 집에도 들렀고, 건우를 만나서 밥도 먹었다. 벌써 꽤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쨍한 낮이었다.

***

- 집이야?

그게 전화까지 할 정도로 궁금한 일인가. 마침 들어가는 중이라 핸드폰을 왼손으로 옮기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눌렀다. 눈치 빠른 상대가 삑삑 소리를 들었는지 먼저 말을 이었다.

- 아니었나 보네.

“이제 들어왔어. 넌 어딘데?”

- 아직 회사. 왜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지하철에서 시달려서 그래. 오늘따라 사람이 많더라고.”

녹초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장윤성에게 하나하나 보고하고 싶지는 않아 대충 둘러댔다. 문을 열고 신발을 툭툭 벗어 던지고 나니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눕고 싶었다. 통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우선 소파에 드러누웠다.

- 차 쓰라니까.

“운전하기 귀찮아서.”

오늘 동생을 만나러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장윤성은 기꺼이 차 키 몇 개를 내주었다. 나갈 때만 해도 출근 시간을 지나 한가한 시간이었고, 직접 운전을 하는 것보다 지하철에 앉아 폰을 보며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 이런 시간에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장윤성의 차를 빌리는 걸 조금 더 고려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 기사도 붙여 줄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좋겠다. 돈 있으면 다 쉬워서.”

- 꼭 그렇지도 않아. 누구 하나가 안 쉬워서.

나는 다시 짧게 웃었다. 나야말로 돈 앞에서 가장 무기력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장명수에게 돈을 받았던 적이 없다면, 내가 그 한지영이 아니었더라면, 기꺼이 장윤성에게 돈을 받고 뭐라도 하겠다고 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멍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가물가물 졸음이 내려오는 것도 같았다. 내가 소리를 내지 않자 장윤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동생은 잘 만났어?

“어….”

하루가 길다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건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장윤성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늦을 것 같으니 저녁 먼저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회장의 아들이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인지 집에 일찍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진짜배기들과 가게를 드나들 때도 매번 느지막이 등장하곤 했었다.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 나는 오랜만에 성욱 형의 가게에 들러 일을 도왔다. 넓고 휑한 집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 잡생각을 떨쳐 내기에 좋았으니까.

- 잘 지낸대?

내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던지 장윤성은 동생의 안부를 다시 물었다.

“그런가 봐.”

다행이네, 하는 장윤성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응, 하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 고단함이 오랜만에 일을 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태원병원에 가겠다고 하면 나는 무슨 핑계를 대서 건우의 마음을 돌려야 할까. 장명수와 장현성이 일개 의사에게까지 관심을 갖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만에 하나라도 건우의 약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 하경아?

내가 또 한참 말이 없자 장윤성이 이름을 불렀다. 간신히 으응, 하고 뭉개진 소리로 대답을 했더니 또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 피곤하면 자. 이만 끊을게.

“아니, 나….”

흐릿해지는 의식의 경계에서 나는 잠꼬대처럼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게 우스웠는지 장윤성은 작게 웃고 혼자서 말을 이었다. 까마득하게 잠이 들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장윤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즈음, 오랜만에 익숙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늘 별장에서 시작해서 엄마의 죽음으로 끝이 나곤 했다. 꿈은 꿈일 뿐이라 기억과 똑같이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대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이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시작과 끝은 항상 같았다. 울면서 깨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꿈을 꾸는 게 싫지 않았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한마디 말이라도 나눠 볼 수 있었으니까.

재회하기 전까지는 장윤성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별장 정원에 발을 딛자마자 나는 마중 나온 장 회장을 끌어안았다. 이제 꿈속의 장 회장은 내가 진짜 지영이인지 시험하지 않았다.

장 회장과 이야기 하면서 나는 장윤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장윤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꿈속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별장에서 보이는 나무들의 싱그러운 녹색 잎이 말라 갈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낙엽이 떨어지고 비가 내리면 꿈은 끝이었다.

불안 속에서 여러 장면을 지켜보다가, 결국 눈을 감은 여인과 마주했다. 아주 어려진 모습의 건우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별수 없이 또 눈물이 났다. 내가 눈물을 쏟기 시작하자,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내 얼굴을 쓸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별장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꿈의 중간으로 돌아온 것처럼.

‘너야? 만나 본 적도 없는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한 게.’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것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덥석 장윤성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당황한 듯 잠깐 멈칫하던 남자가 익숙하게 혀를 얽어 왔다. 촉촉하고 말랑한 혀와 더듬더듬 옷 안으로 들어오려는 손길이 너무 생생해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둑한 걸 보면 아직 꿈일까. 분명 불을 환하게 켜고 잠이 들었는데.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 모를 흐린 불빛으로 나는 상대를 가늠했다.

내 몸이 뻣뻣해진 걸 눈치챈 듯 상대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꿈속에서 봤던 앳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화들짝 물러났다. 그래 봤자 소파 위라 여전히 가까웠지만.

“미, 미, 미안. 언제 왔어?”

장윤성은 대답 없이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었다. 신경질적인 손짓이었다.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저도 옷 속으로 손까지 넣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더한 걸 해 보자고 할 땐 언제고 막상 남자랑 살을 맞대 보려니 키스만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떤 새끼야?”

“…뭐?”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더니 장윤성이 마다 않고 다시 물었다.

“어떤 새끼로 착각했길래 눈물까지 흘려 가며 매달린 건지, 묻잖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을 뿐이지 상대를 착각한 건 아니었다. 장윤성의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소매로 볼과 입술을 문질러 닦고 나니 멍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잠결에 실수한 거야. 미안해. 나 먼저 들어간다.”

일어나려면 다리를 내려야 하는데 나를 가로막고 앉은 장윤성이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장윤성과 닿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소파에서 빠져나왔다. 건드리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장윤성은 삐딱하게 기대앉아 내가 움직이는 꼴을 말없이 지켜봤다.

제대로 바닥을 딛고 일어서고 나서야 장윤성이 아직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방금 들어왔나, 지금 몇 시지….

“피곤할 텐데 너도 얼른 들어가.”

듣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끝까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럼에도 사나운 시선이 내 뒤통수를 좇고 있는 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경아.”

한참 말이 없던 장윤성은 내가 문고리를 쥘 때가 되어서야 나를 다시 불렀다. 딴에는 다정하게 부르려 애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살벌할 정도로 가라앉은 음색이었다.

내가 돌아보자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매 단추를 푸는 일에 열중하는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나를 다른 새끼로 착각하면….”

나랑 닮은 여자 친구까지 사귀었다는 남자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았다. 얼마나 대단한 협박을 하려는지 들어보기나 하려고 잠자코 서 있었더니 장윤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땐 그 새끼랑 어디까지 했는지 직접 확인해 볼 거야.”

확인?

나는 멍하게 서서 장윤성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어차피 저와 한 일이니 굳이 확인을 할 필요도, 더 확인해 볼 것도 없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나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짧게 대답했다.

“그럴 일 없도록 할게.”

쾅. 나는 일부러 문을 세게 닫으며 방에 들어왔다. 문득 궁금했다. 장윤성은 언제부터 남자를 상대로 저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자마자 소파에서 잠이 들었던 터라 나는 그제야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몸은 말끔해졌어도 머릿속은 좀처럼 비워지지가 않았다.

겨우 침대에 누웠을 때 시계는 벌써 깊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어도 자정 전에는 들어왔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남의 자는 얼굴을 보니 봉변을 당하지.

나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곱씹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들려오는 소리는 없건만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

내게 아침이란,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에 일어나 먹는 첫 끼였다. 하지만 장윤성의 집에 들어온 뒤로는 가급적 제 시간에 챙겨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장윤성이 밥을 먹으라고 아침부터 날 깨워 대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일어나든 말든 정성껏 내 몫의 식사까지 준비하는 걸 보고 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간밤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별로 못 잤나 봐?”

장윤성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양 웃으며 물었다. 소파에서 잔 것까지 치자면 아예 못 잔 것도 아니었건만 눈이 뻑뻑하고 피곤했다. 나는 뭐라고 대꾸를 하는 대신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식탁에 앉았다.

“커피 마실래?”

“응.”

팬에 달걀을 깨 넣는 바쁜 와중에도 장윤성은 식탁에 앉아 있는 게으름뱅이를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뻔뻔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대답하자 장윤성은 뭘 또 덜그럭거리더니 금방 커피를 가져왔다.

“뜨거워.”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는 그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차림이었다. 장윤성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 걸까. 넓은 컵에 가득 담긴 진한 커피가 마치 사약 같은 모양새였다. 까만 액체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의 방에서 봤던 새하얀 약통이 떠올랐다.

“너는?”

뜬금없는 물음에 장윤성이 시선을 맞춰 왔다.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나는 다시 물었다.

“너는 잘 잤어?”

뱉고 나니 이상한 말이었다. 타이밍이 어긋난 아침 인사 같기도 했고, 나는 잘 못 잤는데 너는 잘 잤냐는 불평 같기도 했다. 장윤성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대꾸를 했다.

“아니.”

장윤성의 손가락이 식탁 위의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아마도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보다는 살살.

“내가 새벽에 무슨 일을 당했는데. 잘 잤을 리가 있겠어?”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으므로, 불쾌했다는 건지 아니었다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당했다’는 표현이 조금 고까워 나는 손을 빼냈다. 장윤성은 천천히 손을 거두고 달걀이 익고 있는 팬 앞으로 돌아갔다.

아침은 금방 차렸다. 구운 식빵과 달걀 프라이, 잼과 과일, 그리고 사약 같은 커피 두 잔이 놓인 식탁에 장윤성은 미안한 얼굴로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확인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배가 고팠다는 듯이 빵을 입에 물었다. 장윤성도 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고 태블릿 속의 글자를 읽어 나갔다. 나는 빵을 삼키면서 그 얼굴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제 일에 성실한 건 여전했다. 결국엔 다정한 본성도 여전한 것 같았다. 그 동안 몇 명의 사람과 몇 번이나 이런 아침을 맞았을까? 색소가 옅은 갈색 눈동자도 변함없이 예뻤다. 하얀 얼굴도, 단정한 손동작도 여전한데 마주 앉은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낯선 데가 있었다. 사약 같은 진한 커피를 마셔서? 조금 더 벌어진 어깨 때문에?

“하경아.”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샅샅이 훑어보는 사이 장윤성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

나를 지영이가 아니라 하경이라고 부르기 때문인가. 나는 여전히 내 의문에 매몰된 채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장윤성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신경이 쓰이는데.”

그제야 내 시선이 노골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신경이 쓰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많이.”

***

장윤성의 집에서 맞는 두 번째 금요일의 오후, 성욱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금이니 뭐니 해서 안 그래도 바쁜 날인데다 단체 예약 손님도 있는데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이 문자 한 통을 남기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다급한 도움을 청해 왔다.

- 잠깐만 와서 도와줘. 일찍 보내 줄게.

곤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욱 형은 못내 신경 쓰이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 웬만하면 그놈한테는 말하지 말고.

급히 나와 달라는 부탁이 벌써 여러 번이라 장윤성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성욱 형은 그래야 할지 몰라도 나는 장윤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도와주는 입장이라는 건 이럴 때 확실히 편리했다.

기간 한정으로 얻은 휴가가 달콤하긴 했지만 일개 직원인 내게도 가게에 애착이라고 할 게 있긴 했다. 거기다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장윤성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가게에서 월급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반쯤은 그런 책임감으로, 장윤성이 언제든 쓰라고 했던 차 중에 하나를 끌고 가게로 나갔다.

마음 한구석으로 내 빈자리가 티가 나길 바랐건만 가게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 없이 성업 중이었다. 종민이와 정호는 형 없으니까 죽겠다며, 역시 가게엔 형이 있어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댔다. 정말 약아빠진 놈들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실력 발휘를 해 보여야 했으니까.

성욱 형이 예고한 대로,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는 금세 붐비기 시작했다. 반가운 인사도 잠시, 바쁘게 서빙을 하고 테이블을 치우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뭐 좀 마실래?”

무리 지어 왔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덕에 잠깐 숨을 돌릴 틈이 생기자 성욱 형이 어색하게 손님 취급을 했다. 기껏 장윤성에게 보내 놓고 다시 불러 일을 시키는 게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커피요. 차가운 거로.”

“넌 술집에 와서 뭔 커피를 찾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욱 형은 종민이를 불러 차가운 커피 두 잔을 타 오라고 시켰다. 귀 밝은 정호는 저 멀리서도 제 것도 부탁한다며 말을 얹었다. 내가 바 끝자리에 걸터앉자 성욱 형은 가까이 와서 바에 기대섰다.

“별일은 없고?”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지만 못내 신경 쓰이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짜고짜 직원을 빌려 달라는 남자에게 영문도 모른 채 그러겠노라 했으니까. 하는 일 없이 지낸다고 했어도 별로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부를 때마다 나오는 걸 보면 어디 갇혀 살진 않는구나, 하는 것 같았다.

“없어요.”

별일이 있다 한들 누구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을 수 있는 일도 아니라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성욱 형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금방 커피를 가져온 종민이 덕에 추궁을 면할 수 있었다.

“아, 오늘 손님 진짜 많다. 이번 주에는 거의 파리 날렸거든요. 형 안 나온다는 소문 쫙 나서.”

커피가 나오자 냉큼 끼어든 정호가 능청스럽게 아부를 떨었다. 며칠 전에 잠깐 들렀을 때도 사람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어차피 거짓말일 테지만. 정호는 목이 탔던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형 로또라도 됐어요?”

“웬 로또?”

영문 모를 소리에 내가 되물었다. 성욱 형과 종민이의 눈도 정호를 향했다. 정호는 저야말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형 타고 온 차요. 나 아까 봤는데.”

“내 거 아니야. 빌린 거.”

“누가 그런 차를 빌려 줘요?”

“있어. 그런 차밖에 없는 놈.”

“로또네, 로또야.”

정호는 제 생각이 틀림없다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덥석 내 손을 쥐며 애절한 척 목소리를 쥐어짰다.

“형 내가 형 진짜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 알죠?”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아니야, 형은 내 마음 알 거야. 진짜 그래야 돼.”

“야, 야, 떨어져.”

나는 징그럽게 들러붙는 녀석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정호는 끈질기게 달라붙다가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겨우 떨어져 나갔다. 마침 들어서는 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진짜배기 무리였다. 정호는 손님을 맞으러 가면서도 끝내 팔로 하트를 그리는 걸 잊지 않았다.

“어휴, 저놈 저거.”

정호가 촐싹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성욱 형은 또 한숨을 쉬었다.

“저도 가 볼게요.”

인원수가 꽤 되는 VIP들인지라 종민이도 얼른 정호를 따라 나섰다.

“어서 오세요.”

정호가 인사를 하자 서기준은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고개를 꾸벅이자 그는 테이블로 향하는 일행과 떨어져 성욱 형과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와, 오랜만이네요. 맞죠?”

그는 성욱형과 가볍게 인사하고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런 거 같네요. 안녕하세요.”

나는 적당히 웃으며 대꾸했다. 장윤성의 전 여자 친구를 닮았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서기준은 내게 별반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도 오늘은 꽤나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인사만 나누고 끝낼 요량은 아니었는지 서기준은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잘됐다. 덕분에 귀한 얼굴 좀 보겠네. 그동안 왜 안 나왔어요? 요즘 하경 씨 없어서 그런지 장윤성 그 자식이 코빼기도 안 비쳤거든요. 맨날 그놈의 집, 집, 뭐 있지도 않은 집에 가야 한다고.”

서기준은 당장 전화라도 걸 셈인지 폰을 꺼내 들었다. 하는 말로 봐서는 장윤성이 나와 지낸다는 소릴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걸 굳이 말하는 것도 우스운가.

“그… 뭐, 여자라도 모셔 뒀나 보지. 굳이 방해할 필요 있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성욱 형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겨우 생각해 낸 듯한 핑곗거리는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연락처에서 장윤성의 번호를 찾던 서기준이 그 말에 눈을 굴렸다.

“여자요? 에이, 장윤성이 그럴 위인이었으면 차이고 다니지도 않았죠. 걔 절대 자기 집에 여자 안 들여요.”

자기 영역에 누구 흔적 남는 거 싫어해서. 묻지도 않은 설명까지 덧붙여 가면서 서기준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결국 장윤성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성욱 형은 낭패라는 듯이 내게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곤란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줬겠지만 사실 성욱 형의 걱정은 기우에 가까웠다. 둘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장윤성이 이런 일까지 일일이 투덜거릴 인물은 아니었다. 전화를 거는 서기준을 보면서 나는 내 폰을 슬쩍 확인했다.

「오늘 늦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늦을 수도 있어.」

성욱 형의 부탁대로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내 메시지가 끝이었다. 장윤성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많이 늦진 않을 거야. 영화 보자. 맥주 마시면서.’

그런 핑계를 대면서 너무 늦지 말라는 소리도 했었다. 그랬던 사람이 벌써 9시가 넘었는데 언제 오냐는 메시지 한 통 없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아직 퇴근 안 했나? 이제야 궁금한 장윤성의 행적에 나는 서기준을 빤히 봤다. 아직 신호음만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서기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뭐 하냐? 안 나올래? 오랜만에 하경 씨도 있는데.”

서기준은 네가 오지 않고는 못 버틸 거라는 듯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곧 기가 죽은 목소리로 “그래? 그럼 별수 없지.” 하고 대꾸했다.

통화는 무척이나 싱겁게 끝난 듯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서기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성욱 형이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묻자, 서기준은 조금 민망한 듯이 운을 뗐다.

“아니, 그게… 형 말대로 정말 여자 있나 봐요. 손님 있어서 못 나온다는데, 여자 목소리가… 별일이네.”

서기준은 앞서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이, 이건 정말 드문 일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굳이 서기준을 믿지 않더라도, 나는 한동안 그 집에서 지냈으므로 장윤성이 여자를 집에 들인 게 흔치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가게에 나와서 다행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장윤성의 손님과 마주치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은 텄나 봐요. 아, 하경 씨. 윤성이 깁스 풀었어요. 몇 주 됐는데.”

볼일 다 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던 서기준은 나를 제 친구 놀려먹는 데에만 쓰고 가기는 미안했던지 케케묵은 뉴스 하나를 선심 쓰듯 전했다.

장윤성이 서기준에게 내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그걸 안다고 대답해야 할지, 가르쳐 줘서 고맙다고 대답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또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은 통증이 조금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잘 아물었다고 하더라고요.”

“네,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저 대신 병원 쪽도 신경 써 주시고….”

“뭘요. 그럼 전 친구들한테 가 볼게요. 하경 씨, 자주 봐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서기준은 진짜배기 테이블로 돌아갔다. 나는 그 테이블을 유심히 살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남자 몇만이 들렀을 뿐이었다. 장윤성의 손님은 진짜배기 무리 중 하나일까. 가끔 서기준에게 장윤성의 안부를 묻곤 했던, 차연주라고 했던가, 하는 그 여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성욱 형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무슨 연락이라도 받았는지 한 손에는 폰을 들고.

“야, 얼른 가 봐.”

내 시선이 폰으로 향하자 성욱 형은 흠, 흠, 헛기침을 하며 얼른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왜요? 아직 붐비는데.”

“아니, 서기준이 말해 버렸잖아. 너 여기 있는 거. 얼른 가 보라고.”

“그쪽도 손님 있다잖아요. 왜요? 무슨 연락 받았어요?”

“그건 아니고….”

내가 집요하게 휴대폰이 들어간 주머니를 보며 묻자 성욱 형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답을 회피했다.

연락을 해도 내게 하는 게 맞았다. 이런 방식은 장윤성답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미 장윤성답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그 집에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성욱 형은 바쁜 가게를 보며 나를 보내는 것도, 보내지 않는 것도 곤란하다는 듯이 쩔쩔맸다.

“그렇게 곤란하면 그냥 때려친다고 해요. 다시 회수해 간다고.”

“안 돼.”

농담조로 해 본 말인데 의외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큰 거 받았어.”

성욱 형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곱씹었다.

“큰 거? 0이 몇 갠데요?”

성욱 형도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큰 거라고 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냉정하게 말해 장윤성이 나와 지내는 시간을 사기 위해 돈을 쓴다는 건 길바닥에 돈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런 일에 장윤성은 얼마나 걸어 볼 생각이었을까.

내가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자 성욱 형은 그제야 곤란한 표정을 지우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고. 하여간 나중에 너한테도 보답할 테니까 얼른 가 봐.”

보답이라. 돈이 아니면 성욱 형의 집안 사업을 도와준 걸까. 하여간 성욱 형이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붐비는 홀을 뒤로하고 다시 장윤성의 차에 올라탔다.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잠시 고민을 했다. 집에 들렀다는 손님 때문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마주쳐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내게 특별히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금방 돌아갈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손님이 돌아갔는지 메시지로 물어볼까 싶어 폰을 꺼내 들던 때였다. 건물로 들어서는 출입문이 열리고 장윤성과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몸을 낮추고 손님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곧 내게 등을 보이는 바람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장윤성이 웃고 있어 그 얼굴을 멍하니 봤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윤성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웃어 주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장윤성은 제 친구들과 있을 때도 잘 웃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놈도 친구라고 매번 챙기는 서기준이 보살처럼 보일 정도로.

내가 핸들을 쥔 채로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는 동안 여자는 어느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 주차장에 서 있는 여느 차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엠블럼이 달린 차였다. 장윤성은 성의껏 배웅했고, 기사가 있었는지 차는 금방 출발했다.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그림이었다. 기억을 헤집으며 언제 봤더라, 하고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다가왔는지 장윤성이 차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해. 왔으면 들어오지.”

“어? 아니, 방금 왔어.”

일부러 훔쳐 본 것도 아니건만 나는 어쩐지 허둥대고 있었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던 그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몸이 휘청거렸다.

장윤성은 재빠르게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나는 찰나의 실수인 양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왔다고?”

장윤성은 내 말이 별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으며 나를 쫓아왔다.

“어어… 차, 차가 좋아서. 아니, 네 차 좋더라. 좋아서 좀 앉아 있었어.”

스스로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나는 그냥 나오는 대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차가?”

“어, 어. 저 차가.”

장윤성이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묻기에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가져, 그럼.”

“어… 어?”

유지비만 비싼 중고차를 떠넘기겠다기에 나는 비척비척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보폭을 맞춰 걷던 장윤성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좀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

장윤성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열이라도 있나 확인해 보려는 줄 알았는데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뭐가 보이는 것처럼 내 눈을 빤히 마주했다. 나는 홀린 듯 갈색 눈동자에 맺힌 것을 보다가 그 손을 퍼뜩 쳐 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그래. 올라가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건지 장윤성은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는 척을 했다. 그래 놓고선 부축하듯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니, 부축하는 게 아니라 마치 거리를 함께 걷는 연인 같은 자세였다.

“나 정신 차렸으니까 손 떼라.”

“하여간 뭐 하나도 양보를 안 해.”

장윤성은 결국 오갈 곳 없어진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양보라. 내가 장윤성 같은 사람에게 그런 걸 해 줄 주제나 될까.

나는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가장 끝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영화는 골라 뒀어?”

“응.”

“뭐 골랐는데?”

“보고 싶었던 거.”

엘리베이터가 위로 향하는 동안 그런 얘기를 나눴다. 영화관에서 보려고 했는데 바빠서 잊은 사이 상영이 끝나 버린 작품이라고 했다. 장윤성이 내게 좋아하는 장르가 뭐냐고 물어볼 때 쯤, 엘리베이터는 땡, 하고 도착했다는 소리를 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거실에는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 역력했다. 테이블 위에는 두 개의 찻잔과 서류 봉투, 그리고 단정한 모습으로 찍은 여자 사진이 널려 있었다. 그제야 나는 중요한 절차를 빼먹을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 왔다 갔어?”

내가 집에 다녀간 여자를 알고, 그 여자의 방문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는 걸 알면 장윤성은 또 귀신같이 어떤 연관성을 떠올리려 할 것이다.

“일찍도 묻네. 이하경 씨는 정말 나한테 관심 없어? 여자랑 있는 거 봤으면서.”

테이블을 정리하려는지 찻잔을 챙겨 들던 장윤성이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몰랐더라도 오해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정하게 웃고는 있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이성을 대하는 표정은 아니었으니까.

“우리 형수야.”

장윤성은 나를 떠보는 게 부질없다고 느꼈는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고서는 찻잔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나왔다.

내 생각이 맞았다. 그녀는 이은조였다. 왜 이곳이 그 가족들과 단절된 공간이라고 여겼을까. 이은조를 떠올리던 그 순간 나는 이곳에 들어온 걸 후회했다. 모두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형수? 자주 와?”

“아니. 보통은 내가 본가로 가는 편이지.”

내가 오늘 가게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혹은 장윤성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 더 일찍 들어왔더라면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윤성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가 누구랑 지내는지까지 간섭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누구랑 지내는지는 상관없어도 나랑 지내는 건 상관있는 일일 것이다. 장윤성은 정말이지 모든 걸 깨끗하게 잊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의 가족과 마주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내게는 그만큼 껄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래도 네 가족들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찾든 찾지 못하든 영영 마주치지 않을 사이니까. 그렇게 둘러대려던 걸 눈치챘는지 장윤성은 조금 인상을 썼다.

“알았어. 신경 쓰지 마. 또 올 일 없게 할 테니까.”

그러고선 테이블 위에 널린 종이들을 주워 담았다. 흘끔 보니 누군가의 신상에 관한 서류였다.

나는 종이 사이에서 튀어나온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화장기가 옅고 인상이 고운 여자의 사진이었다. 장윤성 같은 남자에게 이런 사진의 용도는 대개 하나뿐일 거라 짐작했다.

“선 봐?”

“안 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칼 같은 대답이었다.

“왜? 이렇게 예쁜데.”

“글쎄. 그런 식으로 누굴 만날 생각은 없어서.”

여전히 정략결혼이니 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할아버지가 마음대로 정한 결혼을 깨러 단숨에 태평양까지 건넜던 사람인데 어련할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됐더라. 심지어 상대는 지금 이 사진 속의 여자 같은 미인도 아니었다.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

중얼거리듯 한 말에 손에 있던 사진이 쑥 뽑혀 나갔다. 장윤성은 이제야 확인한다는 듯이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모르긴, 이쪽을 더 모르겠는데. 키스는 남자랑 하시는 분이 왜 여자 사진을 보면서 웃으실까. 이런 얼굴이 취향이야?”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난 남자랑….”

아직 말도 다 안 했는데 날 보는 시선이 또 삐딱해졌다. 나는 그가 또 당황스러운 말이라도 꺼낼까 봐 얼른 말을 이었다.

“안 해, 그런 거. 너랑은 사고였고.”

목소리는 제대로 나왔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장윤성의 기억에는 없는 그 숱한 입맞춤을 모조리 사고라고 뭉뚱그리고 있자니 스스로가 우스운 탓이었다. 허리를 숙여 불쑥 시선을 맞춰 온 장윤성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하경 씨는 여자랑 키스를 그렇게 해? 여자 친구 키가 나만큼 컸나 봐?”

“무슨….”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가 금방 그 뜻을 깨닫고 말았다. 제 목에 매달리듯 입을 맞춰 오는 남자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별장을 떠날 때 많은 걸 두고 왔건만, 정작 돈 한 푼 되지 못할 습관 따위를 버리지 못했다니.

“내가 누구랑 뭘 어떻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궁금해서.”

솔직한 사람은 언제나 솔직하지 못한 사람을 당황시킨다. 너무나 담백한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얼어붙었다.

장윤성은 뺏어 든 사진을 누군가의 신상이 인쇄된 다른 종이들과 대충 포개 구겨 접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그러고선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서류 봉투에 집어넣었다. 다시는 꺼내 볼 일이 없을 것처럼. 장윤성은 내게 그런 말을 하고도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씻고 오라며 돌아섰다.

씻고 나왔을 때, 결국 그 서류 봉투는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바보 같긴. 내게 쓸 관심을 저기다 쏟았으면 인생이 열 배쯤 쉬워졌을 텐데. 가진 게 많아서 인생이 따분한가. 없어도 그만일 기억을 찾으려 애를 쓰는 것도, 고작 그런 시시한 이유로 나를 집에 모셔 두는 것도 모두 오만한 유희 같았다.

그런 부분에서 내게도 장윤성보다 나은 부분 한 개쯤은 있었다. 적어도 그때 나는 매정할지언정 미련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버려진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맞다, 나 내일….”

냉장고에서 꺼내 온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뭐라 말을 꺼내던 장윤성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다, 같이 갈래?”

“어딜?”

“강원도.”

“강원도?”

자세한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나는 장윤성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없을 곳 아닌가. 장윤성은 리모컨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뒤 내 옆에 와 앉았다.

“강원도에 별장이 하나 있거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한참 비워 뒀는데 리모델링할 거라고, 아까 형수가 그러더라고.”

“아….”

별장은 그 뒤로 내내 비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맥주 캔을 따서 내게 건넸다.

“거기 두고 온 게 많은데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게 싫어서. 아무래도 가지러 가야 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치즈가 올라간 크래커를 건네며 장윤성이 다시 물었다.

“갈 거지?”

“맛있는 거 사 주면.”

선심 쓰듯 가볍게 내건 조건에 장윤성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맥주를 입에 댔다. 설마 맛없는 걸 먹이겠냐는 얼굴이었다.

곧 영화가 시작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스크린을 응시했다. 보고 싶었던 영화라는 게 영 핑계였던 건 아니었는지 장윤성은 진지한 얼굴로 영화를 봤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간간이 맥주와 안주를 향하던 손길이 멈출 때쯤이었다. 덤덤하게 영화를 보던 장윤성이 허락도 없이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무거워.”

내가 불평하며 다리를 조금 들썩이자, 장윤성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머리를 찰싹 붙여 왔다.

“잠깐만.”

사실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딱 기분 좋을 만큼의 무게감이었다. 고작 두 시간 남짓한 영화를 보는 그 잠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 대꾸하는 걸 그만두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집중력은 금세 흐트러지곤 했다. 영화가 재미없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내 다리 위를 흘끔거리려 하는 눈동자를 제어하는 데 더욱 집중해야 했다.

시간이 조금 더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고개를 숙였다가 눈이 마주쳐도 어쩌다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장면이 몇 번이나 바뀐 뒤에야 나는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장윤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숱한 고민이 무색하게 장윤성은 잠들어 있었다.

미동도 없이 곱게 눈을 감은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스피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소리 때문에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 그랬다. 나는 잠든 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자냐?”

퉁명스럽게 말도 붙여 보고. 그래도 깨어나지 않기에 나는 장윤성의 볼에 조심스럽게 손등을 댔다. 따듯한 걸 보면 살아 있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아무데서나 잘 자면서 뭐 하러 방에 수면제를 갖다 놨을까?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얼굴을 아무리 주물러 대도 깨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야, 영화 끝났어. 들어가서 자.”

이번에는 조금 세게 힘을 주어 장윤성의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장윤성은 제 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으음…’ 소리를 내며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잠깐만이라더니.

***

우습게도 늦잠을 잤다. 기대감에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는 또 별개인 모양이었다. 느지막이 출발한 덕에 우리는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가는 길 중간에 있는 휴게소에 들를 수 있었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렇게 허기가 진 것도 아니었다. 잠깐 쉬어 가자고 운을 뗀 이유는 그저 장윤성의 얼굴이 드물게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 억울했다. 곤히 잠든 것 같아 영화가 끝나고도 다리를 더 빌려 주었는데, 장윤성은 별로 잔 것 같지도 않다는 표정을 했다.

“어제 영화는 어떻게 끝났어?”

테이블에 차가운 커피 두 잔을 내려놓으며 장윤성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 어떻게 끝났더라.

“모르겠네. 나도 중간에 자 버려서.”

차마 네 얼굴을 만지작대느라 결말을 보지 못했다는 소린 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댄 말이었다. 다행히 장윤성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갔다 왔다더니 피곤했나 봐?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자던데.”

하긴,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나를 업어 간 당사자였으니까. 착한 척을 하겠답시고 다리를 빌려 준 채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침대였다. 제 힘을 아끼지 않는 마음은 갸륵했지만 내 잠꼬대가 해괴해질 수도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언짢은 얼굴을 해 보였다.

“깨워서 안 일어나면 그냥 두지 뭐 하러 옮겨 놔? 또 저번 같은 일 당하면 어쩌려고.”

‘당하면’이라는 부분에 힘을 주어 말했더니 장윤성이 피식 웃었다. 제 입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걸 잊었는지 어쨌는지.

“나야 나쁠 거 없지, 뭐.”

툭하면 그 일을 끄집어내며 피해자인 척하던 사람치고는 산뜻한 대답이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들썩여 보인 뒤 핫도그를 입에 물었다. 테이블 위에는 장윤성이 사 온 커피 외에도 통감자, 포장된 호두과자가 놓여 있었다. 배가 고프니 휴게소에 들르자는 말의 앞뒤를 맞추기 위해 고른 거였지만, 슬슬 배 속에 뭔가 넣어 줘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장윤성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며 고르기를 마다했지만, 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휴게소 음식을 입에 대는 게 싫은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핫도그를 삼키는 걸 빤히 구경하던 장윤성은 못내 궁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맛있어?”

문득 또 바보 같은 궁금증이 돋았다. 장윤성은 이런 핫도그 맛을 알까? 온장고에 보관한 덕에 간신히 온기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튀긴 지 오래되어 질기고 눅눅한, 기름에 전 튀김 맛을.

“먹어 볼래?”

“그래.”

내가 핫도그를 내밀자 장윤성은 몸을 숙여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질겅이듯 몇 번 볼을 우물거리더니 웃음 띤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맛을 느끼기를 포기한 듯 꿀꺽 삼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별로야?”

“이건 몇 년이 지나도 똑같은 맛이네.”

이미 아는 맛이라는 투였다.

“먹어 본 적 있어?”

“예전에 몇 번. 할아버지 살아 계셨을 땐 별장에 자주 갔거든. 지나다니다 보면 궁금해서라도 한 번은 먹어 보게 되더라고. 이것도.”

장윤성은 포크 대신 받은 이쑤시개로 작은 감자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다행히 이쪽은 입에 맞는 모양인지 장윤성은 입에 넣은 걸 천천히 씹어 삼켰다. 맛있다, 맛없다 어떤 감상이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내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천천히 먼 곳으로 옮겨 갔다. 뭔가 떠오른 것처럼.

“이상하지. 어떻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잊었을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갑작스레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바보 같긴. 나는 왜 장윤성이 잃은 게 나에 관한 기억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잊어도 그만이라고 여긴 기억 속에는 나 말고도 중요한 게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장 회장에 관한 건….

지금 장윤성의 기억 속에 남은 장 회장은 여전히 아들을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찬 외로운 노인일 것이다. 나는 남은 핫도그를 한 번에 입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얼른. 별장에 가면 뭐라도 기억이 날지 모르잖아.”

냉큼 따라나설 줄 알았던 장윤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테이블에 남은 음식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배고프다며. 마저 먹고 가.”

그러고는 내 손까지 잡아끌며 덧붙였다.

“별장은 이미 여러 번 가 봤으니까.”

여러 번 가 봤지만 소용없었다는 소리였다. 그 말에 나는 별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윤성은 먹는 데나 집중하라는 듯이 감자를 하나 찍어 내게 내밀었다. 그걸 꾸역꾸역 삼키고 있자니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바람은 선선하고 볕은 좋은 날씨였다. 그래도 별장의 봄은 어쩐지 화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배를 채우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길을 나섰다.

장 회장이 떠난 뒤 별장은 내내 비어 있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부부가 관리하고 있지만 금방 낡아 버렸다고도 했다. 하루 이틀은 괜찮지만 오래 머무르려면 손볼 곳이 많아서 이번에 공사 하는 거라고.

“그럼 그 뒤에는 누가 쓰는데?”

“글쎄.”

장윤성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저 고칠 게 있어서 고치는 것뿐이라는 듯이. 아무도 쓰지 않을 거라면 열심히 수리한들 소용없는 일 같았다.

어릴 적 나는 그런 집을 본 적이 있었다. 단둘이 살던 노부부가 나란히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변해 버린 폐가를. 그 뒤 그 집은 사람이 수없이 딛고 다녔을 자리까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 집을 보면서 엄마가 그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허물어진다고. 그러니 별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으로 지었건 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또 금방 낡아 버릴 것이다. 장윤성이 소중했던 사람들을 잃고 그 기억을 허물어 버린 것처럼.

“하룻밤 정돈 지낼 수 있게 준비해 놓겠다고 했는데, 먹을 건 없대. 장 봐서 들어가야 할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장윤성은 왼쪽 손목을 툭툭 털었다. 서기준은 잘 아물었다고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나았다고 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내가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출발할 땐 먼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실제로 이 나라 땅덩이가 그다지 넓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별장에 뭘 사 들고 갈지 주절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내까지 들어와 있었다.

번화가라고 하기는 허름할지 몰라도 꽤 큰 마트도 있어 우리는 그곳에서 장을 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용물은 물론 오는 길에 숱하게 주절댔던 그것들이었다.

“빠짐없이 다 샀지? 그 근처엔 정말 아무것도 없어.”

운전하던 장윤성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기에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우리가 산 것을 읊었다.

“다 샀을걸? 고기, 맥주, 과자….”

그쯤 말하며 작은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갈 때였다. 열린 문틈으로 파릇한 채소가 보이는 걸로 봐선 실상 야채 가게 같기도 한 곳이었는데, 그제야 우리가 고기와 먹을 채소를 전혀 사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가게 앞을 기웃거리자 안에서 주인인 듯한 중년의 여성이 나와 ‘뭐 줄까’ 하고 물었다.

“쌈 채소 좀 사려고요. 상추랑 깻잎….”

고기랑 먹을 만한 풀떼기가 또 뭐 있더라. 더듬더듬 치커리까지 부르자 주인은 넉살좋게 덧붙였다.

“비트랑 겨자 잎도 좀 넣을까? 쌈 싸 먹으면 맛있어.”

“네, 조금씩만요. 둘이 먹을 거라서.”

내가 덧붙인 말에 주인은 적당히 섞어 주겠다며 안으로 들어가 채소를 담기 시작했다.

“과일도 좀 살까?”

가판대에 널린 과일을 구경하던 장윤성이 물었다. 요즘 과일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철이 애매하긴 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파인애플을 살까 하다가, 만약을 위해 그만두기로 했다. 한지영과 공통점이 너무 많으면 장윤성이 기억을 되찾았을 때 곤란할 테니까.

그사이 나는 조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장윤성이 기억을 찾도록 도와주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했다.

나는 가판대를 다시 둘러보며 상자에 담겨 있는 딸기를 가리켰다. 이제 끝물일 텐데도 새빨갛게 반짝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딸기 어때? 너 딸기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지.”

장윤성이 궁금한 듯 묻기에 나는 모처럼 우쭐대며 대답했다. 내가 별장에 지내던 때는 철이 아니었음에도 딸기가 끊임없이 들어왔었다. 나는 장윤성처럼 사람을 관찰하는 취미는 없어서 그 이유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언젠가 도우미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설명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장윤성이 딸기를 좋아해서 그의 모친이 꼬박 챙겨 보내 주는 거라고.

마침 채소를 가지러 들어갔던 주인이 다시 나오고 있기에 우리는 딸기도 한 박스 사겠다고 했다.

“응, 이거? 이게 제일 괜찮지?”

어차피 다 비슷해 보이는 박스였건만 주인은 성의껏 골라 주는 척 상자 하나를 빼들면서 우리 얼굴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아휴, 친구 둘이 어쩜 이렇게 나란히 훤하게 생겼어?”

뜬금없는 칭찬에 나는 장윤성과 얼굴을 마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장윤성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을 말에 일말의 감흥도 없는지 덤덤한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인사치레일 게 빤한 소리였지만 말하는 사람 민망하지 않도록 대꾸한 것뿐인데, 장윤성이 내 옆구리를 가볍게 툭 쳤다.

“네가 왜 내 친구야?”

농담을 하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어쩐지 이쪽이야말로 아예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꼬우면 형이라고 부르시든가.”

“형은 무슨.”

노끈으로 딸기 상자를 묶으며 우리가 서로에게 툴툴거리던 걸 보던 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이 형제야? 닮진 않았는데.”

“형제도 친구도 아니에요.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장윤성은 자기 말이 맞다는 듯 나서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친구 맞아요.”

왜 거기서 그런 말을 굳이 덧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주인이 오해할까 걱정한 것도, 특별히 장윤성과 우정을 쌓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는 관계는 얼마나 편리한가. 또 얼마나 평온한가. 내가 장윤성에게 행한 배신은 친구 관계라면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

주인은 카드를 받아들며 다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퍽이나 장난기가 많은 아이들을 대하듯 웃으며 말했다.

“으응, 그래, 뭐가 됐든 난 계산하는 사람 편이야. 키 큰 총각 마음대로 해.”

기실 우리가 어떤 관계든 별로 관심 없을 사람이었다. 빈말 몇 마디로 물건이나 더 팔면 좋고 못 팔아도 밑지지 않는 영업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상대를 잘 고른 셈이었다. 그깟 말로 편 좀 들어 줬다고 장윤성은 딸기 두 박스를 더 샀다. 별장 관리인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지만 기분 값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정에 없던 딸기 박스까지 차에 싣고서 우리는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아무리 해가 길어졌다지만 이러다간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짐이나 싸서 도로 서울로 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핸들을 잡는 장윤성의 표정이 퍽 만족스러워 보여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왜?”

장윤성은 뭐가 그렇게 우습냐고 굳이 물었다.

애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과일 가게 주인이 편 좀 들어준 게 그렇게 좋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나는 꾹 참았다. 결국 나 역시 그 의미 없는 입씨름에 놀아난 꼴이었으니까.

“아냐. 너 호구 같다고.”

그런 말에도 장윤성은 싫은 기색 없이 웃었다. 아니, 묘하게 비웃는 것 같아서 이번엔 내가,

“왜?”

하고 물었더니,

“이제 알았나 해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알긴, 벌써 몇 년째 감탄 중인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우리는 오르막길에 진입했다.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

정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은 다행히 모르는 얼굴이었다. 염색하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자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우리를 반겼다. 무슨 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이런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시골 개였다.

“어이구,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남자는 굽실거리며 장윤성을 맞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그렇게 나오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장윤성은 그저 고개를 가볍게 까닥여 인사를 했다. 관리인이 나를 ‘친구분’이라 지칭하며 같은 대접을 하려 하기에 나는 그들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어쩐지 장윤성을 제외한 태원그룹 사람은 내 방문을 환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지자 관리인의 곁에 서 있던 개가 넉살 좋게 발치에 다가와 앉았다. 조금 만져 보려 손을 뻗었더니 개는 쉽게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다.

내가 개를 쓰다듬는 동안 장윤성은 기분 값으로 사온 딸기 상자를 건네고 관리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엌에 무엇을 갖다 두었고, 침실은 어디를 쓰면 된다든가 하는 이야기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시고요.”

이야기를 마쳤는지 관리인은 다시 굽실거리며 인사를 했다. 장윤성도 다시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네, 조심히 가세요.”

“예, 예, 덕구야, 가자.”

관리인의 부르자 개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를 꼿꼿이 땅에 붙인 채 서서 ‘월! 월!’ 하고 두 번 짖었을 뿐이었다.

“뭐, 여기서 더 논다고?”

말이 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관리인은 개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웡!’ 하고 한 번 짖자 관리인은 난처한 기색으로 장윤성을 쳐다보았다. 장윤성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듯이 나와 개를 번갈아 보고 대꾸했다.

“괜찮으니까 두고 가세요. 오늘은 저희가 데리고 있을게요.”

관리인은 덕구에게 놀다 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전거를 끌고 별장 앞 돌길을 내려갔다. 자전거로 왔으면 아주 가까이 사는 건 아닌가. 하긴 아랫동네라면 몰라도 이쪽은 호수 주변으로 집 몇 채가 띄엄띄엄 있을 뿐이라 살기엔 불편했다. 장윤성도 개를 쓰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개 좋아해?”

“응, 뭐…. 너는?”

“나도 좋아해.”

어떤 질문을 해야 풍작이의 근황을 들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장윤성은 마치 그런 내 속을 읽은 듯이 말을 이었다.

“본가에 가면 레트리버 두 마리가 있어.”

“두 마리?”

“응. 노리랑 풍작이.”

노리는 풍작이의 어미 개였다. 두 마리의 이름을 대고 장윤성은 내게 무슨 반응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마주하고 뜸을 들였다. 하지만 뭘 기대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눈만 껌뻑거렸더니 장윤성은 아주 조금 김이 샌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 귀엽지 않아? 풍작이.”

장윤성은 풍작이라는 이름을 제가 짓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차마 웃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 이름이 어쩌다 나온 건지 알아도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하긴, 애초에 저를 놀리려 한 말을 냉큼 개 이름으로 붙여 버린 장본인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은 없는데 내가 지었다고 하더라고.”

기억이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 귀엽네.”

그 이름을 뿌듯해하는 주인이.

나는 덕구를 쓰다듬으며 풍작이가 얼마나 컸을까 상상했다. 덕구는 그렇게 큰 개는 아니었다. 길 가다 가끔 마주친 레트리버는 무척 컸던 게 기억났다. 이제는 강아지라고 하기에도 뭣하게 컸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와중에도 누군가는 풍작이를 챙겨서 데려갔구나. 누워 있던 덕구는 슬슬 우리의 손길이 지겨운지 몸을 뒤틀며 일어났다. 장윤성도 숙였던 허리를 펴고 들고 왔던 것을 챙겼다.

“이제 들어가자.”

“얘는 어떻게 해?”

“문 열어 두면 앞에서 놀겠지.”

“안 묶어 놔도 돼?”

“괜찮아.”

나는 불안한 눈길로 덕구를 한 번 쳐다보고, 장윤성이 채 다 챙기지 못한 작은 짐을 안으로 옮겼다. 피아노를 제외한 가구는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별장 내부는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그저 오랜만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물건은 많이 없어졌고 커튼이나 카펫 같은 것이 전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사람이 항상 있을 때와는 달랐다. 가장 큰 변화는 장 회장의 부재겠지만….

“좀 휑하지?”

부엌에서 장 봐 온 것을 정리하고 나오던 장윤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장윤성이 짐을 담아가기 위해 가져온 빈 상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그럼 내 방 책상하고 서랍에 있는 것 좀 담아 줄래? 거기 있는 건 거의 다 가져가서 몇 개 없을 테니까 고를 거 없이 다 담으면 돼.”

빈 상자 하나를 집어 들며 나는 잊지 않고 물었다.

“네 방은 어딘데?”

장윤성은 고갯짓으로 제 방을 가리켰다.

“이거 다 하면 나 여기 좀 구경해도 되지?”

“그래. 난 저쪽 서재에 있을게.”

“응.”

그렇게 우리는 각자 맡은 곳으로 향했다.

장윤성의 방은 예전에도 몇 번 들어와 보긴 했지만 정말 그뿐이었다. 책상 의자나 침대에 걸터앉아 본 일도 별로 없었다. 내가 찾으러 올 필요도 없이 장윤성이 항상 곁에 있었으니까.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했던 남의 서랍을 본다는 건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에이.”

거의 다 가져갔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서랍 속은 허전했다. 메모지와 펜 몇 자루가 굴러다닐 뿐이었다.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지만, 그런 건 내가 판단할 게 아니라 전부 박스에 넣었다.

두 번째 서랍은 조금 복잡했다. 물건들이 잡다하게 쌓여 여는 순간 뒤로 뭐가 툭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 서랍 높이에 꼭 맞는 상자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상자 속에는 클래식하게 생긴 큰 카메라와 필름 통이 굴러다녔다. 이런 게 있었나. 작동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물건 같았지만 일단 카메라가 든 상자도 조심스레 챙겼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서랍을 열자 아까 뒤로 넘어간 게 떨어졌는지 또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랍 한 칸을 통째로 빼내 내용물을 챙기고, 떨어진 물건을 찾기 위해 팔을 뻗었다.

손에 닿은 건 두꺼운 가죽 다이어리였다. 아니, 원래는 이렇게 두껍지 않았을 것 같았다. 종이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끼워 둔 메모지 때문에 부피가 두세 배쯤 늘어난 모양새였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고무 밴드를 푸는 순간 낱장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아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짝 틈을 벌려 확인한 메모 몇 장의 내용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휘갈겨 쓴 영문과 숫자 몇 줄이 전부였다. 미국에서 쓰던 거였을까. 어쨌든 이곳 생활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노트 같아 이것도 상자에 마저 넣었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장윤성은 아직도 한창 정리 중이었다. 나는 맡은 일이 끝났음을 알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지냈던 방은 잡동사니 창고가 되어 있었다. 그때와 같은 건 하늘과 숲, 그리고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창문뿐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지영이네 가족을 기억하는 게 나밖에 없었듯이,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도 이제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홀로 떠안은 기억이 문득 무거웠다. 한참 멍하게 하늘을 보다가, 덕구가 짖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정원에서 혼자 놀다가 나를 본 모양이었다.

“오래 걸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물었을 때 장윤성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오래 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책과 노트는 많이 가져갈 수 없어 가져갈 걸 골라내야 했는데, 이미 장윤성의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책 탑이 여럿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저녁 준비해 놓을까.”

장윤성도 나도 요리를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오늘 저녁은 정원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었고 그 정도는 나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럴래? 미안, 내일은 정말 맛있는 거 사 먹자.”

‘정말 맛있는 거’라는 소리에 나는 잠깐 눈을 굴렸다. 우리가 사 온 1++ 한우는 정말 맛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더 맛있는 게 있다면 좋지 뭐, 하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야채를 씻고, 고기와 곁들여 구울 것을 손질해 접시에 담아 밖으로 날랐다. 외롭게 밖을 지키던 덕구가 나를 발견하고는 관심이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맴돌았다.

“기다려 봐, 고기 구우면 너도 줄 테니까.”

말을 알아듣는 건지 어쩐 건지 덕구는 혀를 내밀고 헥헥 소리를 냈다. 그냥 사 온 대로 씻어 날랐을 뿐인데 테이블이 금세 가득 찼다. 그러다 겨우 내려놓은 쌈 채소 바구니가 너무 컸는지 결국 테이블 끝에 있던 접시가 밀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버섯과 양파, 소시지를 담아 놓은 접시였다.

아.

정말 아, 하는 순간이었다. 떨어진 걸 줍기 위해 쪼그려 앉기도 전에 빛과 같은 속도의 무언가가 곁을 지나갔다.

“뭐… 어?”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덕구가 소시지를 입에 물고 멀어진 뒤였다. 골든레트리버 모자를 키우는 애견인 장윤성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먹는 건 대부분 개에게 좋지 않다고 했다. 짠 가공식품은 특히. 그래서 덕구의 뒤를 쫓은 게 화근이었을까.

“야, 그거 안 돼!”

그 말을 하며 내가 뒤를 쫓자 덕구는 이내 산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 망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덕구를 따라 달렸다. 풍작이가 산에 들어가 길을 잃는 바람에 장윤성과 온 산을 뒤졌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덕구야, 소시지 너 줄게! 이리 와! 준다니까!”

그나마 풍작이는 어렸고 달리는 것도 아장거리는 수준이었기에 산기슭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덕구는 아닐 것 같았다.

내가 주인이 아닌 탓인지, 몇 번이나 이름을 부르고 외쳐도 덕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쫓아 산을 얼마나 올랐을까. 날이 덥지 않았음에도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덕구랑 거리가 많이 벌어졌는지 결국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콧등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퍼뜩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아, 진짜 망했다.

“덕구야. 덕구야아. 맛있는 거 줄 테니까 가자아.”

혹시 혼이 날 게 무서워 멀리 갔나 싶어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다시 불렀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투둑, 투둑,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는 소리가 났다.

“덕….”

쏴아아.

다음 소리는 결국 빗소리에 묻혀 버렸다.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빗줄기가 후드득 쏟아졌다.

이제는 정말 내려가야 할 때였다. 비 오는 날 맨몸으로 컴컴한 산을 헤매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하다못해 우산과 손전등이라도 가져와야 했다. 결국 나는 결심을 굳히고 돌아섰다.

빛이 드문 동네. 전부터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암담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깔린 어둠 탓에 어느 쪽이 별장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하긴, 장윤성이 있는 서재에만 켜져 있을 작은 불빛이 나무가 빼곡한 숲에서 보일 리가 없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아, 테이블 위에 올려놨었지.

별수 없이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별장이든 찻길이든 일단 닿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빗방울에 흙이 무르기 시작했는지 길이 미끄러워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의 비는 언제나 내게 가혹했다.

세찬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올라왔던가, 하고 의문을 가질 때쯤 멀리서 뭔가가 반짝였다. 부옇게 번지는 빛을 따라 나는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갔다.

하나, 둘, 셋, 넷…. 불빛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훔쳐 내고 나는 빛의 정체를 유심히 살폈다. 멀리서 별장의 창문이 하나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윤성이 나를 찾아 방이란 방을 다 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장윤성의 헛된 노력을 멍하니 봤다.

바본가. 컴컴한 방에서 사람을 찾게.

엉뚱하게 별장을 뒤지고 있는 장윤성을 욕하면서 나는 잠시 쪼그려 앉았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다리의 긴장이 갑자기 풀린 탓이었다. 평소 그렇게나 똑똑해 보였던 장윤성은 나만큼이나 미련하게 결국 별장의 모든 창문을 다 밝히고야 말았다.

아니, 아닌가.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컴컴한 곳에서 길을 잃었을까 봐 빛을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결국 주변의 실외 등까지 모조리 켜져 별장은 폭우에 이는 물안개 속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나는 비에 젖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찾는 이가 밝혀 준 빛을 향해서.

풍작이가 겨우겨우 올랐던 기슭까지 내려왔을 쯤 멀리서 우산과 손전등을 들고 주변을 살피고 있는 장윤성이 보였다. 얼마나 가까이 가야 이 빗소리를 뚫고 내 목소리가 닿을까. 이미 기운이 많이 빠져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도 여러 번 하기 힘들 것 같았다. 겨우겨우 몇 걸음을 더 옮겼을 때, 희미하게 내 이름이 들렸다. 그제야 나도 대답을 했다.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다고! 손을 휘적거리며 겨우겨우 외친 소리에 장윤성이 든 손전등 불빛이 나를 향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도 장윤성은 금방 나를 향해 달려왔다.

“너 말도 없이….”

장윤성은 말도 끝까지 뱉지 못한 채 다짜고짜 들고 있던 우산과 손전등을 내밀었다.

“나 이미 다 젖었는데.”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들면서도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한 말이었다. 장윤성은 설명도 없이 제가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내 젖은 얼굴에 댔다.

“괜찮아, 별장 가서 씻을게.”

“일단 얼굴만이라도 닦아.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덕구가 산으로 들어가서 찾으려고….”

산이라는 소리에 제 옷으로 여기저기 흐르는 물기를 닦아 주던 장윤성이 손을 멈췄다.

“산? 여기 개들은 원래 그러고 다녀. 이 밤에 비까지 오는데 위험하게 거길 왜 쫓아가?”

“여기 개들이 그러고 다니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타박하는 소리에 대꾸할 말은 많았다. 내 개도 아닌데 어떻게 태평하게 돌아오길 기다려? 그렇게 멀리 갈 줄도 몰랐고, 산에 들어갈 때는 비도 오지 않았고, 이렇게 어둡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끝날 입씨름이었지만 차마 다 쏟아낼 수가 없었다. 내게 닿는 손길도, 빗소리에 섞인 목소리도 묘하게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내 순순한 사과에 장윤성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훨씬 침착해진 손길로 카디건을 내 머리까지 뒤집어씌웠을 뿐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화를 삭이는 중인지, 장윤성은 카디건 자락을 잡은 채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전등은 먼 곳을 비추고 있어 서로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데도.

“미안하다니까.”

나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장윤성은 괜찮다고 대답하는 대신 내 손에서 우산과 손전등을 거둬 갔다.

“미끄러우니까 잘 붙어서 따라와.”

“알았어.”

화가 좀 누그러질까 싶어 나는 장윤성의 등에 장난스럽게 달라붙었다. 장윤성이 떨어지라는 소릴 죽어도 하지 않아 나는 계속 그의 옷자락을 꽉 쥔 우스운 꼴로 산을 내려와야 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다행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근데 정말 덕구는 어떡해? 비도 오는데….”

“일단 씻고 와. 아저씨한테 전화해 볼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나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놓인 건 아니었다. 장윤성은 덕구가 산을 잘 안다고 했지만 비가 올 때도 유효한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얼른 몸을 씻고 대충 물기를 훔쳤다. 욕실 안에는 드라이어도 있었지만 느긋하게 젖은 머리를 말릴 때도 아니라 마른 수건 하나를 머리에 덮고 급히 나왔다.

아직 통화 중인지 장윤성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서 있었다.

“…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괜찮다고 해 봐야…. 덕구 주인과 통화를 하는 게 맞긴 한가 싶어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네, 쉬세요.”

장윤성이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끊은 뒤에야 나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관리인 아저씨야? 뭐라고 하셔? 덕구는 괜찮을 거래?”

“자기 집에 들어와 있대.”

장윤성은 거 보라는 듯이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

“휴, 다행이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하필 산속으로 도망간 덕구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예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장윤성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하경아.”

“왜 또.”

나는 네가 이름 부르면 괜히 불안하더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장윤성의 손이 내 머리를 덮고 있던 수건에 닿았다. 장윤성은 아까 내게 제 카디건을 뒤집어씌웠던 것처럼 얼굴을 감싸듯 수건 자락을 끌어 내렸다.

단순히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입술이 천천히 들썩였다.

“하경아, 내가….”

장윤성은 어지러운 시선으로 다시 내 얼굴을 훑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시선을 피했다.

“왜?”

내가 말로 재촉하자 장윤성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얼굴을 한 여자애를 아는 것 같은데.”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들고 말았다.

마주한 눈동자에 서서히 이채가 서리고 있었다. 그늘에 빛이 스며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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