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풀 꺾일 때쯤 건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치료를 위해 병원에 며칠 입원한다는 소식이었다. 입원이라는 소리에 엄마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병을 실감했다. 그건 엄마와 건우도 마찬가지였는지 오랜만에 한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금세 끊어지고 말았다. 그 대단하다는 태원 병원의 의사들도 엄마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릴 적, 뭘 잘못 먹었는지 새벽에 속을 게워 내며 쓰러진 적이 있었다. 어리다곤 해도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그때도 나는 이미 엄마보다 손가락 하나만큼은 컸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기꺼이 자기보다 큰아들을 둘러업고 길고 가파른 내리막을 단숨에 달렸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와, 역시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해.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내게 엄마는 대단한 사람인데, 당장 몇 개월 후의 삶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롭다는 의사의 말을.
나는 허전한 품에 풍작이를 끌어안고 소파에 누워 다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어 달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엄마의 얼굴은 역시 여전히 날 업고 뛰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실금 같은, 별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제외하면.
“걔 자꾸 배에 올리지 마. 버릇되면 나중에 커서도 그런다. 되게 무거워.”
오전 내내 방에 틀어박혀 하던 일이 일단락됐는지, 부엌에서 컵 두 개를 들고 나오던 장윤성이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 마치 내가 나중에도 풍작이와 이러고 있을 것처럼. 무겁기야 지금도 무거웠다. 말이 강아지지 무게는 다 큰 소형견 못지않았다.
장윤성은 들고 왔던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가 일어나기 편하도록 풍작이를 들어 올렸다. 덩치만 큰 강아지는 얌전히 끌려가 품에 안겼다.
“풍작이는 엄마 안 보고 싶을까?”
“엄마? 노리?”
뜬금없는 물음에 장윤성은 풍작이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그러고선 풍작이의 표정을 읽으려는 듯이 한참을 살펴보더니,
“글쎄, 견생 두 달 반이면 독립할 때 아닌가. 그치, 풍작아?”
하고 물었다. 풍작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작은 혀를 내밀어 장윤성의 코끝을 날름 핥았다.
“두 달 반 산 애가 무슨 말을 알아듣겠냐.”
“두 달 반 산 애한테 ‘물어 와’ 시킨 게 누구더라.”
그때만 해도 모든 개는 태어날 때부터 던져 준 공을 물어 올 수 있는 줄 알았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장윤성이 가져온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쓰러지듯 소파에 다시 누웠다.
“아, 엄마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한숨처럼 내쉬면서. 말을 뱉은 나도 놀랐지만 장윤성 역시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집에 간 지 오래됐잖아, 그래서….”
요구하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이자, 장윤성은 잠깐 뭔가를 계산하듯 눈을 굴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다녀와, 그럼.”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그 무신경함에 내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더니 장윤성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집이 멀어?”
“답답아, 핑계가 없잖아. 미국에서 10년을 살다 온 고아가 서울에 갈 일이 뭐가 있어.”
장윤성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아아, 하더니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발로 툭툭 치며 왜 웃냐고 툴툴대도 좀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데?”
“아니, 그 설정 아직도 미는 건가 싶어서. 의외로 맡은 역할에 충실한 편인가 봐?”
아무렴,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장윤성은 흥미롭다는 듯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집이 서울이야?”
이쯤 하면 저 집요함도 인정해야 했다. 하나를 안 놓치네, 진짜. 그래도 서울에 사는 사람이 한둘인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들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말하길 잘했다 싶었다.
“내가 도와줄게. 다녀와.”
장윤성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으니까.
***
「형 진짜 오늘 와?」
「나 학교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갈 건데 형 찾아올 수 있어?」
「아니다. 가지러 갈 것도 있으니까 나도 집으로 갈게. 몇 시에 와?」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건우에게서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전날 집에 간다고 연락을 넣어 두었는데도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려 들었다. 수업 중일 것 같아 점심때쯤 답장을 보내기로 하고 모처럼의 외출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 나 지영이랑 서울에 며칠 다녀올게.”
무심결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날 저녁, 장윤성은 장 회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게 연유를 묻는 장 회장에게 장윤성은 넉살 좋게 “데이트하러”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설명을 마쳤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도움을 요청했으면 들어줄 사람이었는데.
빈 몸으로 온 터라 챙길 건 없었지만 옷이 문제였다. 두 눈 멀쩡한 장윤성이 왜 속고 있는지는 몰라도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동네를 지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돌아갈 때를 대비해 가져온 옷이 한 벌 있었지만 어떻게 봐도 남자일 게 티가 날 옷이라 고민이 됐다.
결국 바지만 내 것을 입고 장윤성의 옷장에서 품이 넉넉한 후드티를 하나 꺼내 입었다. 키 차이가 꽤 나는 데다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말랐던 덕에 그런대로 애매한 구석을 가릴 만큼은 됐다.
창밖이 부산스러워 보니 장윤성이 벌써 차를 빼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가방에 휴대폰 두 개와 얄팍한 지갑을 챙겨 넣은 나는 얼른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장 회장이 거실에 나와 있기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다가가 고개를 꾸벅였다.
“할아버지, 다녀올게요.”
“그래, 그래. 우리 지영이가 모처럼 놀러 간다는데 할아비가 용돈이라도 줘야지.”
용돈이라는 귀여운 단어가 무색하게 장 회장은 허연 수표를 몇 장이나 건넸다. 십만 원짜리인가 했는데 ‘금일 백만 원 정’이라고 박혀 있는 글씨에 헉, 하고 놀란 소릴 내고 말았다.
“이걸로는 맛있는 거 사 먹고, 비싼 건 윤성이한테 사 달라고 해.”
“괜찮아요, 할아버지. 저 뭐 사 먹을 돈은 있어요.”
몇백이든 몇천이든 장 씨들에겐 있으나 마나 한 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뜻 받기가 어려웠다. 사정이 어찌 됐든 그를 속이고 있는 주제에 이런 것까지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장 회장은 굳이 내 손에 수표를 쥐여 주면서, 자기가 꼭 챙겨 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결국 나는 그 돈을 손에 쥐고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차 앞에서 보조석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장윤성은 내 꼴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더니 피식 웃었다.
“왜 남의 옷을 입고 그래, 설레게.”
차림이 달라져 장윤성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던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평소처럼 대꾸했다.
“너 너무 쉬운 거 아니냐.”
“왜, 쉬운 남자는 별로야?”
내가 차에 올라타자 장윤성은 직접 벨트를 매 주며 능청스레 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윤성은 쉬운 게 아니라 제 위치를 알고 한 수 접어주는 편에 가까웠다. 그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장윤성이 보여 주는 호의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다 별로지.”
“넌 좀 어렵고.”
장윤성은 아쉬운 척 대꾸를 하며 보조석 문을 닫아 주었다. 어디까지나 아쉬운 척, 척일뿐이었다. 그에게는 묘한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어떤 일에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사람의 확신 같은 게.
내가 부러움을 느끼는 동안 차는 천천히 별장을 빠져나갔다.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 주셨어.”
한창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나는 쭈뼛쭈뼛 부당 이득을 챙겼음을 고백했다. 오백만 원이나.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이 나는 수표를 꺼내 보였다. 사실 내 마음이나 편하자고 한 짓으로, 어차피 장윤성은 아무렇지 않게 가지라고 대답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
언제부터 할아버지 말씀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장윤성은 꼭 그래야겠다고 강조했다.
“돌아가는 날 밥이나 같이 먹자. 서울에서 뭐 했는지 할아버지한테 보고하려면 그런 거라도 하고 가야지.”
“그래. 그건 내가 살게. 너희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장윤성은 대답을 하는 대신 가볍게 웃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내게 주어진 휴가는 이틀뿐이었지만 더 욕심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장윤성은 나와 함께 있는 척을 하기 위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를 배회해야 했으니까. 고마운 일이었지만 차 안이 너무나 조용해 어쩐지 그 한마디를 꺼내기가 어색했다. 손가락에 끼운, 기어코 300원이라고 우기던 반지를 가만히 구경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이 동네 살아?”
내가 미리 부탁한 대로 강남 대로변에 차를 세운 장윤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내려서 버스 타려고. 여기서 타면 한 번에 가거든.”
“집 어딘데. 데려다줄게.”
나는 대답 없이 빤한 시선만 보냈다. 새삼 말하기도 식상한 탓이었다. 장윤성은 헛웃음처럼 한숨을 내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숨기는지 모르겠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조금의 여지도 두고 싶지 않아, 장윤성이 서운해하는 걸 알면서도 미안하단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장명수의 비위를 거스르기 싫었다. 장 회장을 속이고 장윤성을 외면해 받는 대가가 내게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장윤성과의 실낱같은 연결 고리에 주렁주렁 매달릴 헛된 욕심이.
나는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내릴 생각으로 벨트를 풀며 말했다.
“갈게. 모레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잠깐만” 하는 목소리에 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알았으니까 택시라도 타고 가.”
뒤따라 내린 장윤성은 더 조를 생각은 없다는 듯이 택시를 잡아 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트렁크에서 커다란 상자 몇 개를 꺼내 택시에 옮겨 실었다. 가족들이랑 먹으라고 말하는 걸 보니 선물을 산 모양이었다. 집에 요리를 해 먹을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저 잘 먹겠다고만 했다.
장윤성은 마지막으로 택시 기사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네며 짐을 옮겨 주기를 당부하고는 찻길에서 물러났다. 택시가 출발하자 섭섭해하는 얼굴이 천천히 멀어졌다.
웃돈을 넉넉히 받은 기사는 현관 안쪽까지 기꺼이 짐을 옮겨 주었다. 넓고 호화로운 곳에서 지내다 와서 그런지 안 그래도 좁다고 생각했던 집은 한층 더 초라해 보였다. 입구에 쌓아 둔 상자 몇 개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로. 사는 사람이 모두 정신이 없어 집 안 꼴은 엉망이었다. 빨래나 청소까지 하는 건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부엌 휴지통에 쌓여 있는 빈 라면 봉지를 발견한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고작 고등학생인 동생이 집에서 홀로 끼니삼아 먹었을 것들. 내가 있을 때라고 크게 달랐던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그게 눈에 박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건우가 학교에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걸레질을 하다가 문득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내가 아직 가발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옅게나마 얼굴에 뭔가를 발랐다는 것도. 나는 얼른 가발을 벗어 가방에 집어넣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에 끼워 뒀던 반지는 어느 모로 보나 남자가 낄 물건이 아니라 주머니에 넣어 두기로 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뒤 거울에 내 모습을 꼼꼼하게 비추어 보는 동안 밖에서 덜컹덜컹, 쾅, 하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낡아 잘 열리지 않는 탓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나곤 했다. 고쳐 보려면 고칠 수 있겠지만 서로가 오가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그냥 두고 있었다.
“형! 형 왔어?”
화장실의 나무 문 너머에서 기대감에 찬 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한 번 거울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그래, 형 왔다.”
“와, 진짜 왔네! 근데 이게 다 뭐야?”
건우가 장윤성이 준 상자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뭐가 들었는지 아직 확인도 하지 않았다.
“뭐랬더라, 먹을 거라던데.”
“먹을 거? 열어 봐도 돼?”
열어 봐, 했더니 건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포장을 풀었다. 무슨 보냉제가 나오나 했더니 명절에 아르바이트하러 간 백화점에서나 봤던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소고기, 송이버섯, 전복…. 이런 거 줘도 해 먹을 줄 모르는데.
“이런 건 어떻게 먹는 거래?”
건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난감한 기색이었다. 엄마의 곁을 지키며 병원에서 통학을 한다는 게 사실인지, 건우는 책가방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버섯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라면 봉지가 마음에 걸렸던 참인데 장윤성이 이런 때마저 나를 돕고야 마는 모양이었다.
“건우야, 일단 가방 내려놔. 병원은 밥 먹고 가자.”
“밥? 엄마가 형 기다릴 텐데.”
“금방 먹고 가면 되지. 어차피 병원 가도 저녁 먹어야 하잖아.”
혼자 두면 절대 챙겨 먹지 않을 성격이었다. 나는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소고기의 포장을 뜯으며 건우에게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다. 한참을 설득하고 나서야 건우는 머뭇거리며 상을 펴고 냉동실에 보관했던 밥을 꺼냈다.
“그거 언제 넣어 놓은 거야?”
“모르겠는데, 죽진 않겠지, 뭐.”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건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대충 고기를 구워 프라이팬째로 상에 올려놓고 먹었다.
“근데 이거 형이 산 건 아니지? 누가 준 거야?”
바쁘게 젓가락질을 하던 건우가 늦어도 한참 늦은 질문을 했다.
“어… 그러니까….”
나는 눈을 굴리며 뜸을 들였다. 장윤성을 설명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정말 궁금했던지 건우가 답을 재촉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
“아니, 친구는 아닌데….”
의미 없이 한 말일 텐데도 나는 괜히 젓가락을 든 손까지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럼?”
“사장님 아들이 줬어.”
사장은 아니고 부회장이긴 했지만 따지자면 고용주의 아들이니 굳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명확한 소개라고 생각했는데 건우는 더 이상하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사장님 아들? 사장님 아들이 왜?”
“어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다.
“친구도 아닌데 사장님 아들이 왜 이런 걸 줬냐고.”
건우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입에 넣었다. 듣고 보니 영 이상하게 들릴 법도 했다. 친구도 아니고, 상사도 아닌 그저 사장님의 아들일 뿐인 사람이 왜 이런 걸 줬을까.
“아니, 걔가 좀… 쉽고, 음… 오지랖도 넓고….”
떠듬떠듬 이어지는 내 구차한 설명에 건우는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네?”
역시 똑똑한 내 동생. 명쾌하기도 하지.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좋은 사람.”
씁쓸한 어감이었다. 좋은 사람.
***
엄마는 태원병원의 VIP 층에 입원해 있었다. 병실로 향하는 동안 건우는 엄마가 무슨 연구 동의서에 사인을 한 대가로 여러 가지 지원을 받게 됐다고 기쁜 듯이 설명했다.
“잘됐지, 형?”
“그러게.”
어차피 구실일 뿐일 테니 연구 내용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장명수 혹은 그의 측근에게 조금 감탄했다. 내가 엄마와 건우에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게 일처리를 마친 세심함에. 그게 나를 배려하기 위해선지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인지는 몰라도.
“하경이 왔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 있던 엄마가 새삼스럽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 애쓰면서 우리를 맞았다.
엄마는 늘 그런 편이었다. 우리가 부담을 가질까 봐 반가워도 반갑다고 하지 않고,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그런 엄마의 속을 읽는 데는 도가 터서, 얼른 침대에 걸터앉아 너스레를 떨었다.
“응, 엄마 큰아들 왔어.”
“밥은 잘 먹고 다니고?”
“내 얼굴 보고도 그런 걱정이 들어? 여기, 빤질빤질해진 거 봐.”
나는 조금 살이 오른 볼을 들이대며 잘 지낸다고 덧붙였다. 티가 날 듯 말 듯한 정도긴 했지만 어쨌든 혈색이 좋아지긴 해서 엄마는 그제야 마음 놓고 웃었다. 내가 오는 길에 사 온 과일을 깎는 동안 건우는 엄마에게 ‘좋은 사람’ 이야기를 했다.
“형네 사장님 아들이 진짜 좋은 사람인가 봐. 형 집에 간다고 하니까 먹을 것도 많이 챙겨 주고….”
가만히 건우 이야기를 듣던 엄마가 내게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러니?”
“응, 거기 사람들 다 좋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과일을 건넸다.
셋뿐인 가족이라도 다 모여서 좋았던지 건우는 평소와 달리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호기심이 많을 때라 그런지 주제도 일관적이지 않았다. 학교생활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동네에 사는 고양이 가족, 이 병원에 대한 감상, 형의 생활에 대한 궁금증으로 차례로 옮겨 갔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등하굣길에 있었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한참 말을 쏟아낸 건우는 결국 목이 말랐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맞다, 모의고사 봤다며. 잘 봤어?”
“평소랑 똑같지, 뭐.”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렇거든요?”
건우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평소랑 다름없이 무척 잘 봤다는 소리였다. 늘 안쓰러울 정도로 의젓한 녀석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딱 귀여울 정도로 건방진 구석도 있었다.
엄마도 나도 건우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나 역시 얼른 돈을 벌고 싶어 학업을 포기한 주제에 건우가 참을성 있게 공부를 하길 바라지 못했다.
하지만 건우는 그게 제 일인 양 늘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단단해 보여, 나는 이따금 마음에 불안한 바람이 불면 건우의 우직함에 기대어 버티곤 했다.
‘잘했어,’ 하고 나는 결국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건우는 마다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 넌 집에 가서 자.”
오랜만에 묵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엄마는 피곤한지 일찍 누워 가물가물한 눈으로 TV를 보다 자겠다고 했다. VIP실이라곤 해도 집이 편하겠지 싶어 한 말에 건우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도 여기서 잘래.”
“뭐 하러. 집에 가서 편하게 자고 학교 갔다 내일 또 와.”
“집에 가는 게 더 귀찮아. 저기서 같이 자면 되잖아, 응?”
건우가 ‘ㄱ’자로 붙어 있는 긴 소파를 가리키며 졸랐다. 저 편하라고 한 말인데 싫다니 별수 없었다.
우리는 머리를 모서리 쪽으로 붙이고 누웠다. 건우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졸린 목소리로 계속 뭐라고 말을 하다가 결국 잠결에 헛소리까지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다.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끼우다가 아직 가방 속에 있는 업무용 핸드폰을 떠올랐다. 울릴 일이 별로 없는 폰이지만 일단 멀리 나와 있으니 충전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가방에서 꺼내 무심코 켠 화면에는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설마 내 휴가에 대해 장명수가 뭐라고 한 건 아니겠지,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 메시지 함 상단에는 장윤성이라는 이름 석 자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전화해.」
애도 아니고 집도 못 찾아갔을까 봐.
곁에는 엄마와 동생이 자고 있고, 복도는 너무 조용해서 장윤성과 통화를 하기 꺼려졌다. 잘 들어갔다고 대충 문자로 답할까 하다가, 이렇게까지 도와준 사람에게 너무 성의가 없나 싶어 결국 병실을 나섰다.
1층보단 옥상이 가까워 옥상까지 올라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다 끊기고 조금 소란스러운 곳에서 장윤성이 전화를 받았다.
- 어.
퍽 반가운 음색이었지만 짧은 인사와 급히 받았는지 흐트러진 숨소리에 나는 당황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야.”
그러고도 조금 머뭇거리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지영이’라고 덧붙였다. 휴대폰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알아. 그러니까 받았지.
전화를 가려 받는다는 소린가. 거기까진 알 바 아니라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나 잘 들어왔다고, 집에….”
- 그래.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다기에 기껏 전화까지 걸어 줬건만 어쩐지 김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하더니 끊긴 목소리 뒤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주 시끄럽진 않은 음악소리와 사람 웅성거리는 소리.
“너는 밖이야? 주변이 시끄럽네.”
- 친구들 만나러 나왔어.
“아.”
장윤성에게 친구가 없을 이유가 없는데 왜 그게 그렇게 어색하게 들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내가 장윤성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궁금증이 내 의식을 불편하게 콕콕 찔러 댔다. 그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얼마나 많이 친한지, 그들에게도 나에게 하는 것만큼 잘해 주는지, 그들과 있는 시간이 즐거운지, 나랑 있을 때보다 더…. 하지만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말만 했다.
“맞다, 선물 고마워. 가족들이랑 맛있게 먹었어.”
- 집 주소 가르쳐 주면 맨날 보내 줄게.
“그럴 필요까진 없고.”
- 네 의견 말고 가족들의 의견도….
장윤성이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운을 띄우고 있을 때였다. 그 목소리 뒤로, ‘야, 장윤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격 없는 말투였다.
장윤성이 하던 말을 멈추자, 같은 목소리가 ‘뭐 해, 네 차례야!’하고 멀찍이서 이어졌다. 장윤성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 나 빼고 해. 통화 중이야.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거기엔 분명한 온도차가 있어, 몇 도쯤이나 차이가 날까 가늠하면서.
- 누군데 다 이긴 판을 빠져? 여자?
다 함께 게임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건우에게 장윤성을 소개할 때 그랬듯이, 장윤성도 쉽게 날 소개하지 못했다. 장윤성이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친구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 진짜?
- 신경 끄고 먼저 가 있어. 곧 갈 테니까.
그제야 장윤성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친구는 이쪽이 더 흥미로운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놀려 댔다.
- 야야, 너 혜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오매불망 너만 보고 사는데.
혜진이? 혜진이란 이름이 나오자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가 먹먹해졌다. 장윤성이 마이크를 손으로 막은 모양이었다. 스피커에 귀를 바짝 붙였지만 더 이상 대화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야, 나도 궁금한데.
별장 주변은 이제 밤이면 선선했는데, 서울은 아직 밤공기도 조금 뜨듯했다. 같은 하늘일 텐데도 별이 자취를 감춘 새카만 허공을 보며 나는 다시 말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 미안, 친구가 귀찮게 해서.
다행히 실랑이가 길지 않았는지 금방 장윤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혜진이가 누군데 그래?”
급히 마이크까지 막은 걸 보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놀리려고 떠본 것뿐인데, 장윤성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 신경 쓰여?
“아니, 전혀. 왜, 내가 신경 써야 해?”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아차 싶었다. 지나치게 정색하는 말투였다. 다행히 장윤성은 비웃는 대신 다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건데, 너는 신경 썼으면 좋겠어.
진지하게는 말고, 자기 전에 잠깐. 친절하게 가이드라인까지 덧붙이는 목소리 끝에 나지막한 웃음이 뒤따랐다. 그렇게 밑천 다 보여 주면서 말하면 신경 쓸 것도 안 쓰겠다. 흔히들 말하는 밀당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연애경력이 변변찮은 나도 아는 거였다.
- 생각해 보고. 정 심심하면 노력해 볼게. 나 들어가야겠다. 너도 들어가.
“그래. 시간 되면 내일도 전화해.”
- 그것도 생각해 보고.
결국 잘 자라는 인사만 서로 몇 번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쩐지 멍한 기분으로 병실로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조용한 실내에는 엄마와 건우의 숨소리만 작게 울렸다. 실내가 어둑해서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이름이 그 파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
짧은 휴가는 금방 지나갔다. 돌아가기 전 담당의와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병실에 들러 엄마와도 인사를 했다.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엄마의 얼굴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원래 마른 사람이라 기분 탓으로 여기고 싶었지만 결국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엄마는 전보다 많이 야위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나서도 좀처럼 병실을 나서지 못한 채 침대 옆에 서서 머뭇거렸다.
“다녀와, 하경아. 엄마 건우랑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치료받는데 뭐가 걱정이야. 엄마 아직 일도 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해.”
“그래도 일하지 마. 퇴원하고 나서도. 나 돈 많이 벌어올 거니까.”
“그래, 알았어. 아들이 호강시켜 준다는데 얼마든 기다려야지. 건우 오기 전에 얼른 가. 건우 오면 너 발도 못 떼겠다.”
“응.”
“얼른.”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도 움직이질 못하자 엄마가 등을 툭툭 치며 재촉했다. 그제야 마법이라도 풀린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병원을 나서기 전 화장실에 들러 장윤성의 옷을 입고 다시 가발을 눌러썼다.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기분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티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장윤성을 만나기로 한 곳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해 봤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가끔 장 회장도 보고 장윤성도 보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
아주, 아주 오랫동안, 내가 장 회장만큼 늙을 때까지.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할 때, 뭐가 먹고 싶은지 묻는 말에 나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했다. 같은 대답을 세 번쯤 듣고 나서야 장윤성은 서울 도심에 있는 호텔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대로 호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장윤성은 멀리서 나를 보고 뛰는 듯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휴가는 어땠어?”
“그냥….”
설명하기엔 복잡한 감상이었다. 엄마와 건우를 본 건 좋았지만, 마냥 좋기만 할 순 없었던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뱉고 보니 내 휴가를 위해 애써 준 사람에게 하기에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좋았어.”
그래서 나는 짧은 말을 덧붙이며 입꼬리를 당겨 보였다.
호텔 고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전망 좋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장윤성이 묻는 것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복잡한 주문이 끝났다. 직원이 테이블을 뜨자 장윤성이 영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저기압이실까. 혹시 별장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그래?”
나는 선뜻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별장에 가고 싶기도 했고 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대하던 장윤성의 표정이 조금 다른 기색을 띠었다.
“그런 거면….”
“아니야, 그런 거.”
장윤성이 또 오지랖을 부릴까 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 그보다 나은 건 없었다. 아니라는 소리에 장윤성은 빤한 시선을 보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주문한 요리가 나올 때까지 긴 침묵이 이어졌다. 기껏 함께 밥을 먹기로 해 놓고 내내 죽상을 하는 상대가 싫을 법도 한데 장윤성은 딱히 캐묻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말도 못 하면서 가라앉은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나는 첫 접시로 나온 요리를 싹싹 비우고 부러 들뜬 목소리를 내어 소감을 말했다.
“이거 맛있다.”
턱을 괴고 내가 먹는 걸 구경만 하고 있던 장윤성이 제 접시도 들이밀었다.
“이것도 먹어, 그럼.”
남의 것까지 뺏어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수습하고 싶었던 나는 그것도 마저 먹었다.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다행히 장윤성은 금방 평소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틀 동안 무얼 했는지 이야기해 주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제 무사히 별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분간은 싱숭생숭하겠지만 또 금방 그 평화로움에 젖어들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스스로를 세뇌하는 말은 성공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는 나 역시 평소 같은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맞다. 밥 내가 사기로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내가 계산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얼마 나왔어? 내가….”
돈을 줄 생각으로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지갑에 현금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닫곤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장 회장이 준 돈은 그대로 들고 있기엔 겁이 날 정도의 액수라 진작 통장에 넣었고, 평소 내가 들고 다니는 현금으로는 이런 곳의 밥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러고 있는 걸 삐딱한 자세로 구경하던 장윤성은 귀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건 됐고, 여기까지 온 김에 술 한잔할래?”
“술?”
갑작스러운 소리에 그렇게만 물었을 뿐인데 장윤성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여기 괜찮은 바가 있거든.”
“너 운전은?”
“뭐가 문제야. 여기 호텔인데 자고 가면 되지.”
호텔에서 자고 간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절로 피어나는 상상의 나래를 막을 길이 없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떠듬떠듬 물었다.
“그… 방은 각자 쓰는 거지?”
술을 마시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는 내 말에 장윤성의 한쪽 입매가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쨍한 소리를 내며 도착을 알렸다. 장윤성은 은근슬쩍 내 등을 손으로 떠밀며 대답했다.
“네 정신이 멀쩡하면.”
그런 소릴 듣고도 술을 마시러 간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장윤성이 그 말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약간의 믿음과 내가 먼저 고꾸라지진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에 기대 조금 심술을 부려 보고 싶기도 했다. 늘 여유롭고 고상한 눈앞의 남자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한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항상 그 앞에서 우스운 꼴을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구석에 있는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사람이 많아 시선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다행히 실내가 어두워서 아무도 내 긴 머리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후드 티를 제대로 뒤집어쓰고 장윤성이 뭔가를 주문해 주길 기다렸다.
“뭐 마실래? 술 잘 못 하면….”
“나 잘 마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했던 말과는 달리, 도수가 약한 칵테일을 찾아 리스트를 훑던 장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괜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던지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작게 웃으며 메뉴판을 건넸다.
“그럼 마시고 싶은 걸로 골라.”
그래, 하며 받아들긴 했지만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곳에서 만난 영어로만 쓰인 메뉴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겨우 이름과 설명을 읽는 데 성공해도 좀처럼 맛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결국 고르지 못하고 페이지를 넘기자 드문드문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칵테일 이름은 잘 몰라도 어디서 주워들은 술 이름은 있어서, ‘이거…’ 하며 가리키다가 옆에 쓰인 가격을 보고는 손을 화들짝 뗐다.
장윤성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결국 내가 가리킨 걸 주문하는 것 같았다.
술을 찾아 마실 만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일을 전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끼어야 할 때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술에 꽤 세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마주앉은 허연 얼굴의 도련님은 퍽 만만해 보이는 상대였다.
나는 장윤성의 술버릇을 상상하며 첫 잔을 비웠다. 곱게 자란 도련님도 잔을 감질나게 채운 술 정도는 몇 번이나 쉽게 비워 냈다. 오히려 내 쪽이 익숙하지 않은 술에 금방 알딸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세상이 기우뚱하는 것 같더니 팔에 힘이 빠졌는지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말았다.
“어지러워?”
아직 멀쩡해 보이는 장윤성이 물었다.
“아니, 아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조금 어지러웠는데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장윤성은 내 옆 의자로 자리를 옮겨 물 컵을 내밀었다.
“자, 물 좀 마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얌전히 받아 마셨더니 안주로 나온 과일도 하나 입에 넣어 주기에 그것도 받아먹었다. 별장에서 먹었던 것만큼 과즙이 풍부하고 달콤한 파인애플이었다.
“하나 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벌린 채 기다렸더니 편리하게도 파인애플이 쏙 들어왔다. 술김에 인생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실없이 웃었다.
“기분이 좀 풀려?”
술을 마셔서 잊을 수 있는 고민은 아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헤벌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윤성은 파인애플을 하나 더 꽂아 들고 내게 물었다.
“하나 더 줄 테니까 집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봐.”
“집….”
술이 허문 건 고민이 아니라 경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장윤성의 물음에 순순히 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 집….”
뒷말도 잇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을 뿐인데 후드득 따듯한 물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뜨거워진 눈시울이 욱신거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짜증이 났다.
나는 우는 게 싫었다. 엄마의 병을 알게 된 뒤에도 울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눈물을 흘리면 나약해질 것만 같았다. 나를 버티게 해 주는 오기나 힘 같은 게 그 작은 눈물방울에 섞여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어이 내게서 눈물을 뽑아낸 장윤성을 원망스럽게 쏘아봤다. 장윤성은 당황한 얼굴로 얼른 파인애플을 내려놓고 내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으니 차곡차곡 눈물이 쌓이기만 한 눈물샘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우는 걸 걱정스럽게 보고만 있던 장윤성은 결국 졌다는 듯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안 물을게. 미안해.”
그는 울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신기하게도 눈물이 뚝 그쳤다.
나는 순간 이게 눈물을 그치게 하는 민간요법이라도 되나 싶어서 잠깐 굳어 있었다. 하지만 곧 부작용처럼, 딸꾹,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내가 딸꾹질을 하며 몸을 들썩이자 미안한 얼굴로 나를 보던 장윤성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
딸꾹. ‘웃지 마’라는 짧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딸꾹, 딸꾹. 내가 딸꾹질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장윤성도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딸꾹질은 눈물보다 멈추기 힘들었다.
몸을 들썩이는 게 불편하다 못해 고통스러워질 때쯤 겨우 딸꾹질이 멈췄다.
“고생했어.”
장윤성은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는 접시에 남은 마지막 파인애플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또 생각 없이 그걸 받아먹었다. 파인애플을 씹는 동안에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장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하면….”
“죽여 버린다.”
뭘 한 번 더 할 건지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사납게 대꾸했다. 처음이었다. 장윤성의 눈빛이 그렇게 선명하게 읽힌 건. 내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지만 그는 더 조르지 않았다.
거의 비어 가는 술병을 확인한 장윤성은 “그만 마실까?” 하고 물었다. 술김에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길 바랐지만 우는 걸 보고 결국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장윤성의 손에서 병을 뺏어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술을 우리의 잔에 공평하게 채우며 대꾸했다.
“아니, 한 병 더 시켜.”
나는 눈물 값을 받지 않으면 못 잘 것 같으니까. 술값으로 장윤성의 지갑을 거덜 내든, 취해서 고꾸라지는 걸 구경하든 둘 중에 하나는 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정말 괜찮겠어?”
장윤성은 걱정스럽게 물어보면서도 웨이터를 불렀다. 나는 주문을 하는 그의 등을 툭툭 치며 강조하듯 속삭였다.
“더 비싼 거로.”
내 요구가 어이없었는지 장윤성의 눈이 조금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럼 이거 말고….”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그는 결국 웨이터에게 다른 술과, 파인애플만 담긴 과일 접시를 부탁했다.
그렇게 전투적으로 술을 마셨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장윤성이 내 안의 뭘 건드린 건지, 나는 혀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무거워져 가는 걸 느끼면서도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내가 그렇게 한 잔을 비우면, 장윤성도 따라서 한 잔을 비웠다.
거의 비슷하게 마신 거나 다름없었는데도 장윤성은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혹시 몰래 버리나 싶어 마시는 걸 빤히 지켜봤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술병이 비어 갈수록 지구가 점점 더 빨리 도는 것 같았다. 이제는 술잔을 쥐려고 해도 눈을 몇 번이나 다시 떠서 초점을 잡고, 헛손질을 두어 번 해야 했다.
나는 곁에 앉은 장윤성을 다시 살폈다. 드디어 장윤성의 몸이 기우는 것 같아 쾌재를 불렀다가 곧 내 시야가 흔들리고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실망했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허황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야, 너 그거 물 아냐?”
“뭐?”
장윤성은 나를 완전 취한 사람처럼 보며 짧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아니야. 그렇지 않고선 이럴 수 없어.”
증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장윤성이 손에 든 잔을 뺏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봐, 물이잖….”
자신만만한 목소리도 거기까지였다. 뒤늦게 올라오는 싸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걸 느끼며, 나는 장윤성의 품으로 고꾸라졌다.
***
드문드문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장윤성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호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장윤성은 내 허리를 단단히 잡은 채로 어떤 문 앞에 섰다. 나는 장윤성의 손에 들린 카드 키가 몇 개인지 계속 확인하려 애썼다. 시야가 흔들려 한참 만에야 겨우 한 장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툴툴거렸다.
“방 각자 쓴다며어.”
“너 안 멀쩡하잖아.”
“나? 나 완전 멀쩡한데?”
“이거 몇 개?”
장윤성이 손가락을 펴 보이며 물었다. 나는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손가락을 셌다. 아니 뭐 손가락이 이렇게 많아, 하면서. 결국 내 손으로 더듬더듬 손가락을 셌더니 고작 두 개였다.
“네… 아니 두 개.”
“내 이름은?”
“장윤성!”
나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내가 답을 맞혀서 실망할 줄 알았던 장윤성은 묘한 얼굴로 웃더니 또 문제를 냈다.
“그럼 네 이름은?”
“하….”
장윤성은 눈을 크게 뜨고 “하…?”하며 다음 글자를 재촉했다. 나는 뭉개진 발음으로 순순히 말을 이었다.
“하… 한지영.”
장윤성의 낯빛이 실망으로 물드는 걸 보며 나는 놀리듯 웃었다. 바보, 나 안 취했다니까.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거 보면 취한 거 맞지.”
장윤성은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아 못 들어가겠다고 버텼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고집을 부렸다. 결국 장윤성이 안에 방이 두 개 있다고 설명하고 나서야 고분고분하게 그를 쫓아 들어갔다.
“자, 여기서 자.”
그는 새하얀 침대에 나를 앉혔다. 나는 실랑이를 하는 사이 흘러내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당겨 꼭꼭 묶었다. 두 번, 세 번.
“나 잘 때 건드리면 안 돼.”
“왜? 왜 안 되는데?”
그럴 생각도 없었을 거면서 장윤성은 장난스럽게 왜 안 되냐고 물었다. 쏟아지는 졸음에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팔을 휘휘 저으며 대충 대답했다.
“큰일 나. 나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잘 땐 특히….”
아주, 아주 무섭다고. 먹히지도 않을 으름장을 늘어놓으며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곧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비싼 술이라 그런지 다행히 숙취는 심하지 않았지만 회의감이 드는 아침이었다. 나는 낯선 천장을 멍하니 보며 스스로의 경솔함을 탓하고 있었다.
장윤성 앞에서 그렇게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아직 깨지 않은 척을 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장윤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더 불안했다. 장윤성이 얼른 평소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길 바랐다. 나를 얼마나 더 불안하게 만들 셈인지 한참이 지나도 장윤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더 버틸 수 없어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내 꼴은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꽉 죄어 놓은 후드 덕분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디를 살펴봐도 장윤성이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장윤성이 그 정도는 된다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구겨진 옷이나 가발까지 당장 어떻게 할 순 없어도 얼굴과 몸을 씻고 나니 그런대로 개운했다. 거울을 보며 한참 동안 겉모습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침실 밖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장윤성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저기….”
열심히 어젯밤 기억을 떠올린 결과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결론을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건 아니었다. 지레 겁을 먹은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멍하게 있던 장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
장윤성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물었다. 목소리에도 피곤함이 역력했다.
“응.”
“속은?”
“괜찮아.”
취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숙취가 있는 건지 정작 장윤성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 걸음 멀어진 것 같은. 룸서비스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 로비를 지날 때까지 나는 내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너야말로 괜찮아? 운전할 수 있어?”
호텔을 나서면서 나는 불안감에 장윤성의 팔에 손을 대며 물었다. 장윤성은 내 손을 제 팔에서 떼어 내며 짧게 말했다.
“괜찮아.”
기분 탓이 아니었다. 하룻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장윤성의 태도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조금 차가워진 표정, 날을 세우는 태도. 동시에 내 안에서도 낯선 감정이 피어올랐다. 섭섭했다.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윤성은 서울에 갈 때와 달리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만 혼자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애를 썼을 뿐이었다.
오늘 날씨 되게 좋다, 그치? 하늘 봐, 엄청 파래. 맞다, 거기 호텔 되게 좋더라. 밥도 맛있고, 술도 맛있고…. 술 엄청 비쌌지? 아,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했던가? 덕분에 집에도 다녀오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는데…. 내가 다음엔 정말 맛있는 거 사 줄게.
정작 “왜 그러는데?”라는 말 한마디를 못 하고, 나는 내내 겉도는 이야기만 주절대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계속 주절거리는 게 나았을까. 가만히 있자니 심장이 자꾸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러지, 들킨 걸까. 들킨 거라면 왜 다시 별장으로 데려가는 걸까. 할아버지한테 전부 말 하려고?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나는 목을 쓸었다. 그래도, 들킨 것 치고는 여전히 다정한 것 같은데. 내 속이 괜찮은지도 물어봐 주고, 함께 아침도 먹고.
운전을 하는 장윤성의 얼굴을 한 번 흘끔거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술이 센 여자는 싫어하나? 아니면 내가 영 못 볼꼴을 보였나? 두 번째 입맞춤을 거절해서?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대체 뭐가 문젠데?
처음부터 모든 잘못이 내게 있었음에도 괜히 억울했다. 이런 식으로 돌아설 거면 처음부터 잘해 주지나 말지. 좋은 사람 같은 소리하네. 얼어 죽을 놈의 좋은 사람.
속으로 그를 원망하는 사이 우리는 별장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출발할 때는 문도 열어 주고 안전벨트도 채워 주던 사람이 혼자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장윤성이 저렇게 별장에 들어가는 게 어쩐지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폭탄 같아서.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장윤성을 불렀다.
“야!”
분명 들렸을 텐데도 그는 듣지 못한 것처럼 돌아보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화났어?”
오는 내내 곱씹다가 겨우 뱉어 낸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윤성은 그제야 뒤를 보더니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보다 높은 눈높이가 그렇게 위압적이었던 건 처음이었다.
그는 허리를 조금 숙여 시선을 마주해 왔다. 본 적 없이 화난 눈빛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 눈에 내 죄가 고스란히 적혀 있을까 무서워서 시선을 외면한 채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니, 뭐에 화가 났는지 말을… 읍.”
하지만 제대로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장윤성의 입술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서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입술을 비집고 혀가 들어왔다. 어제 입술을 맞댈 때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침범한 혀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내 입 안을 휘저었다. 가쁘게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더욱 거칠게 몰아붙여 왔다. 밀어 내려고 장윤성의 몸에 손을 댔다가 문득 겁이 나서 그저 옷자락만 꽉 쥐었다. 이대로 키스를 하면, 그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든 봐줄지도 모른다는 간사한 생각을 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겨우 “왜?”라는 물음이 떠오를 때쯤 장윤성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제야 가슴을 들썩이며 부족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왜….”
내가 하려던 말이 장윤성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내가 손등으로 입술에 남은 타액을 닦아 내는 동안 장윤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안 밀어내?”
“뭐?”
동의도 없이 다짜고짜 입을 맞춰 온 게 누군데. 그런 주제에 장윤성은 여전히 살벌한 눈빛,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것도 네 역할 중 하나인가 봐?”
빈정대는 말투였다. 교활한 속내를 꿰뚫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장윤성은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다시 떴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다시 드러난 눈동자에는 상흔이 남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차례더라, 할 말이 쉽게 떠오르질 않았다.
장윤성은 내가 말을 고르기를 기다려 주지도 않고 몸을 돌려 별장으로 향했다. 나는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휑한 정원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마른 풀이 스치는 소리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쓸쓸하고 또 씁쓸한.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