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약속 (10/18)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공기는 마치 장윤성의 태도처럼 갑작스럽게 쌀쌀해졌다.

“이렇게 산책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점심을 먹고 모처럼 볕을 쐬던 장 회장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휠체어 옆에 주저앉아 풍작이를 쓰다듬던 나는 물끄러미 장 회장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기온이 떨어짐에 따라 장 회장이 밖에 나오는 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장 회장의 중얼거림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윤성이가 뭐 잘못이라도 한 게야? 할아비가 혼을 내 줄까?”

가을이 스며든 정원을 느긋하게 보던 장 회장이 내 편을 들어 주겠다는 듯이 물었다. 서울에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도 눈치를 챌 만큼 장윤성은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억울해하면 안 되는 입장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별수 없이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내 주세요.”

지금은 기력이 쇠한 노인이지만 장 회장은 태원그룹을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장본인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으레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들 했다. 자신의 손자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주눅이 들까 봐 장윤성을 탓하듯 말해 주는 다정함은 종종 나를 떼쟁이 어린아이로 만들곤 했다.

장 회장은 서러운 아이를 달래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꾸했다.

“그래, 내가 아주 혼쭐을 내 주마. 이놈을 그냥, 아주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야 우리 지영이 말을 잘 듣지.”

장 회장에게 혼을 낼 만큼의 기운이 있는 것도, 장윤성이 혼이 날 인물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 말만으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꼭이요. 내가 맞장구를 치자 장 회장은 몇 번이나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다.

나는 풍작이를 끌어안고 보드라운 털에 볼을 댔다. 그 표정이 한결 나아 보였는지 장 회장은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놈이 생각이 많아서 그래. 그래도 네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게다. 마음 쓸 것 없어.”

결국은 장윤성을 이해해 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음을 졸인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윤성이 화가 난 이유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휘잉, 하는 소리를 내며 메마른 바람이 정원을 지나갔다. 몸을 급습하는 한기에 나는 풍작이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장 회장도 쿨럭쿨럭 기침을 뱉었다.

“안으로 모실까요.”

곁을 지키고 있던 장 회장의 비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 회장이 그러겠다고 해서 나도 풍작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날 오후에는 풍작이가 없어졌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려고 잠깐 문을 열어 둔 사이 나간 모양이었다. 아휴, 어떡해, 어떡해, 도우미 아주머니는 불안한 얼굴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윤성에겐 아직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장윤성이 고용인을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별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결국 나와 도우미 아주머니, 정원을 관리해 주는 아저씨 셋이서 풍작이를 찾아 나섰다.

가장 위험한 곳이 찻길이라 우리는 우선 도로와 호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찻길까지 나온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아저씨가 계속 그 근처를 보기로 하고 아주머니와 나는 별장으로 돌아와 정원과, 뒤쪽 산으로 이어지는 수풀을 헤집고 다녔다.

짖는 소리도 조그마한 강아지라 이 넓은 곳을 구석까지 살펴야 해서 이 넓은 곳을 다 뒤지기에 둘만으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장윤성에게 알려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찾아 보구….”

아주머니에게 장윤성은 고용주나 마찬가지였다. 실수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오래 일했고, 앞으로도 할 사람이었으니까. 반면에 나는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다. 그 언젠가가 장윤성의 기분에 따라 당장 그날 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잃어버린 셈 치기로 하고 일단 장윤성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네, 하고 목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달칵 문이 열리고 장윤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 회장의 말에 의하면 생각이 많다는 그의 손자는 아직 어떤 결론을 내지 못한 얼굴이었다.

“왜?”

용건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풍작이가 없어져서…. 아까 내가 문 닫는 걸 깜빡했는데 그때 나갔는지 안 보여.”

“…집 안은 찾아봤고?”

“아니, 아직. 혹시 찻길로 나갔을까 봐 일단 아래쪽부터 찾았는데….”

장윤성은 시계를 한 번 보고 창밖을 확인했다. 아직 밖은 밝았지만 곧 해가 저물 시간이었다. 장윤성은 옷걸이에 대충 걸어 놓은 얇은 카디건을 들고 나섰다. 제가 입으려나 싶었는데 내게 던지듯 건네며 말했다.

“넌 옷이 그런 것밖에 없어?”

옷? 맨날 입던 걸 입었을 뿐인데 새삼스럽게 트집을 잡았다. 마음에 안 드니까 가리라는 건가. 상황이 급하기도 하고 밖이 쌀쌀하기도 해서 나는 군말 없이 건네받은 카디건을 걸치고 장윤성을 따라 나섰다.

장윤성은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집 안을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고 우리는 산기슭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 강아지라 산을 오르든 찻길로 내려가든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 탓인지 내 시선은 자꾸만 깊은 산속을 향했다.

설마 이 산에 풍작이를 해칠 만한 큰 동물이 있진 않겠지, 저 아래쪽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에 빠진 건 아니겠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열심히 풍작이의 이름을 외쳤다. 슬슬 제 이름을 알아듣는지 집 안에서 부르면 어디선가 뽈뽈대며 걸어 나오곤 했었는데, 기척도 없는 걸 보면 역시 더 먼 곳으로 간 게 아닌가 싶었다.

내게 기슭이나 둘러보라고 했던 장윤성도 결국 혹시나 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꽤 깊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풍작아! 풍작….”

목이 좀 따갑다 싶더니 급기야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만큼 큰 소리도 나오지 않아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흠, 두어 번 소리를 내고 다시 풍작이를 부르려던 찰나,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낑, 끼잉, 낑.

내 목소리만큼이나 지친 기색이 다분한 소리였다. 나는 풍작이가 내는 작은 소리가 발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소리는 산기슭 아래쪽, 마른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풍작아!”

내가 부르자 답을 하듯 풍작이가 더 큰 소리로 낑낑거렸다. 나뭇가지가 무성히 쌓여 있어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작은 강아지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맨손으로 덤불처럼 얽힌 나뭇가지를 헤집는 것도 일이었다.

뾰족한 가지 끝에 긁힐 때마다 팔이 벌건 줄이 생겼다. 작은 강아지가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할 만도 했다. 제 위에 쌓인 나뭇가지가 얄팍해질수록 어린 개가 재촉하듯 낑낑거렸다.

“기다려 봐. 금방 꺼내 줄게. 여긴 또 어떻게 들어간 거야.”

내 얼굴이 보이자 풍작이는 나뭇가지 더미를 기어올랐다.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인지 꼬리를 흔들며 안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가 들어 올리자 풍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듯 축축한 혀로 내 얼굴을 몇 번이나 핥았다.

풍작이를 찾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장윤성은 아직 저편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풍작이 찾았어!’ 하고 외치려 했는데 목만 따끔거리고 바람 새는 소리만 났다. 결국 뛰어가 풍작이를 내보였더니 장윤성도 안심한 얼굴을 했다.

“어디서 찾았어?”

“저기 나뭇가지 쌓아 둔 곳 아래에서.”

침을 꼴깍 삼키고 났더니 작은 소리로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장윤성은 빤한 시선으로 내 손을 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짧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 놨다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장윤성은 날 탓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푼 것도 아니었다. 풍작이와 함께 별장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는 도로 제 방에 틀어박혔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할 때도 나는 굳게 닫힌 그 방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내게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장윤성은 매 끼니 때 맞춰 식탁에 나와 앉았다. 나 때문이라기보다는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진 장 회장과의 시간이 소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어제 내게 신세를 졌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반찬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하지만 목이 따가워 나는 그저 따듯한 국만 반복해서 입에 댔다. 공기가 건조해진 탓인지, 전날 성대를 혹사시킨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침을 삼키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영이 어디 아픈 게야?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장 회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일전에 비 좀 맞았다고 크게 앓았던 일 때문에 장 회장은 내가 작게 기침이라도 하면 어김없이 괜찮은지 물어오곤 했다.

“아뇨, 안 아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잠을 못 자서 그랬을 뿐이었고, 정말 목이 좀 따가운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럼에도 말할 때마다 새액, 새액, 바람 새는 소리가 나자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목만 좀 따가운 거예요.”

물을 한 모금 삼켜 건조한 목을 적시고 다시 대답을 했다.

“정말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도 으쓱거리며 기운이 있음을 증명했으나 두 사람은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윤성이 네가 약 좀 챙겨 줘라.”

그렇게 말하는 장 회장의 마음은 내 걱정이 반, 우리를 화해시키고 싶은 의도가 반이었을 것 같았다. 장윤성은 별 대답 없이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꼭꼭 씹었다. 장 회장은 입맛이 없다며 일찌감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나는 뭘 삼키는 게 어려워 평소보다 느리게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장윤성은 그런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마주 앉아 기다렸다.

내가 걱정돼 그러는 거라면 차라리 들어가라고 하고 싶었다. 말없이 빤한 시선을 받는 게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겨우 식사를 마친 내가 방에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장윤성이 다가와 내 손목을 살짝 쥐었다.

“왜?”

내가 올려다보자 장윤성은 뭐라 설명도 없이 제 손등을 내 뺨에 댔다. 괜찮다는 내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직접 열이 나나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손등이 떨어져 나갔나 싶더니 이번엔 이마에 손바닥이 올라왔다. 나는 얼른 장윤성의 손을 쳐 냈다.

“진짜 괜찮다니까.”

화를 내든지 다정하게 대해 주든지 하나만 하지. 잘한 건 없지만 나도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발치를 어슬렁거리는 풍작이를 안아들었다.

“올라갈게.”

기분 대로 행동하고 생각해 보니 장윤성에게는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그의 화를 더 돋울 필욘 없었다. 의미 없는 반성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금방 내 처지를 깨닫고 자리를 피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 뒤통수에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풍작이를 배에 올려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무거워진 게 실감이 났다. 하긴, 들어 올릴 때마다 읏차, 하는 소리가 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직 성견 크기의 반도 안 되는 거라던데 정말 다 크고 나서도 배에 올라오려고 하면 조금 난감할 것 같았다.

“너 그만 크면 안 되냐? 우리 집 엄청 좁은데.”

장윤성이 허락한다면 데려가고 싶긴 했다. 사람도 아니고 개 한 마리 정도는 먹여 살릴 자신도 있었다.

문제는 풍작이의 의견이었다. 우리 집은 당장 이 방보다 돌아다닐 곳이 좁았다. 이런 대형견을 그렇게 좁은 집에 키우면 동물 학대 아닌가? 풍작아, 네가 좁은 집에서 몇 년만 버텨 주면 형이 큰 집으로 꼭 이사 시켜 줄게, 하고 진지하게 고백을 하다가 다 부질없는 고민인 걸 자각하곤 남의 배를 침대 삼아 졸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나는 또 쫓겨날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이런 식으로 쫓겨난다면 풍작이를 데려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체 그날 밤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결에 내가 뭐라고 떠들었나? 장윤성이 내게 화를 낼 만한 일,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만한 일은 역시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남자인 걸 들킨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내가 남자여서 실망했다면 바로 쫓아내는 게 당연했다. 키스는 왜 하고, 열이 날까 걱정은 왜 해?

아니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내가 남자라도 괜찮은 거라면….

그래도 이상했다. 남자라도 상관없었다면 이렇게 매정하게 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내가 남자라는 걸 알아챈 반응으로는 들어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구는지 조금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기껏 이어 가던 생각이 막히자 나는 다시 억울해졌다. 나쁜 새끼. 난 첫 키스였는데. 그런다고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괜히 손등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

똑똑.

입술이 조금 쓰라리다 싶을 때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나서야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답을 했으니 누군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잠시 말도 없이 서 있다가 겨우 소리를 냈다.

“두고 갈게, 식기 전에 마셔.”

장윤성의 목소리였다. 들어올 생각까지는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떼는 소리가 들렸다. 식기 전에 마시라는 걸 보면 마실 걸 들고 왔었던 모양이었다.

배 위에서 졸고 있는 풍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풍작이는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도 쫓아와 내 발등에 주둥이를 얹었다.

“너희 형은 하여간 진짜 이상해.”

문 앞에는 따듯한 차와 강아지 간식이 놓인 쟁반, 그리고 두툼한 옷 몇 벌이 놓여 있었다. ‘넌 옷이 그런 것밖에 없어?’라는 말은 내 옷이 꼴 보기 싫다는 게 아니라 얇은 옷밖에 없냐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원래 여름만 지낼 생각이었던 터라 요즘같이 쌀쌀할 때 입을 옷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아서 나는 말없이 쟁반과 옷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싫은 향기가 나는 걸로 봐선 생강차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차를 입에 댔다. 생강 향이 가득하긴 했어도 충분히 달아서 마실 만했다. 차가 조금 흘러, 나는 다시 손등을 입술에 댔다.

오후에는 정원에 따스한 볕이 들었다. 한 번 식기 시작한 공기는 다시 달아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윤성이 준 옷을 걸치고 풍작이와 함께 나가 보기로 했다. 방에 종일 있는 것만큼 심심한 일이 없었으니까.

제법 도톰한 니트 덕에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닿지 않아 좋았다. 다른 일 없이 풍작이와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저 언덕 아래에 택시가 한 대 와서 섰다.

이곳에 택시를 타고 방문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풍작이를 들어 올리고 택시에서 누가 내리나 지켜봤다. 온갖 예상을 깨고 택시에서 폴짝 뛰어내린 손님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여길 찾아온 게 맞나? 별장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 만나러 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일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안내라도 해 줄 생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왔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통과할 쯤에는 내게도 들릴 만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풍작이를 안은 채 터틀넥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여자아이는 숨을 고르며 내 앞에서 멈춰 섰다.

“헉, 헉… 언니가… 헉….”

겨우 한마디를 뱉은 여자아이가 내 모습을 여러 번 눈으로 훑었다. 나 역시 여러 고용인 중 누구의 가족일까를 생각하며 아이의 생김새를 훑었다. 앳된 얼굴이 고등학생 같아 보이진 않았다. 조금도 줄이지 않은 품이 넉넉한 교복, 잔머리를 모아 핀을 꽂은 단정한 머리, 보는 내 눈이 핑글핑글 돌 것 같은 두꺼운 안경…. 어느 댁 딸인지 적잖이 순한 성격일거라고 판단한 순간 호흡을 고른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가, 우리 오빠 꼬신 그 여자예요?”

어디서부터 부정해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난 여자도 아니었고 누굴 꼬신 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장윤성에겐 여동생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참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진지하게 말씨름을 할 것도 아니라 눈만 껌뻑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러는 건 진짜 경우가 아니죠. 오빠랑 내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낸 줄 알아요? 오빠네 아저씨도 나… 헥, 윤성 오빠한테 시집오라고….”

날씨가 퍽 서늘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뛰어다니기엔 더웠던지 아이는 옷을 펄럭이며 부채질을 했다. 이렇게 나이 차가 나는데도 장윤성과 오래 알고 지냈고, 장명수와 그런 이야기를 했을 정도면 태원그룹과 친분이 있는 집안의 딸인 것 같았다. 재벌가와 알고 지내는 집안이면 아마 비슷한 집안이겠지. 어쩌면 장명수는 진지하게 이 아이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명수의 이익을 위해서도 막 대하면 안 됐지만, 혼자 이곳까지 온 어린아이를 마냥 세워 두고 싶지만은 않아서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갈래?”

“그럴래요.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감기 걸렸어요?”

“응, 뭐….”

생강차를 마시고도 목이 낫질 않았다. 아이여도 처음 보는 사이라 목소리를 조심스레 내었는데 오히려 그 탓에 이상하게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는 메고 온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자요, 하면서 종이에 쌓인 목캔디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며칠이나 가방 속에서 굴렀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성의를 봐서 일단 입에 넣었다. 아예 되바라지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오빠는 어디 있어요?”

“방에 있을걸.”

걸음을 옮기며 묻는 말에 나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우리 오빠’라는 말이 괜히 신경을 건드렸다.

장윤성이 안에 있다는 말에 아이는 구두를 신은 발을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한지영. 너는?”

“서혜진이요.”

당돌하기도 하고 넉살이 좋기도 한 아이는 짧게 대답하고 발을 털듯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혜진. 서울에서 통화할 때 스치듯 들었던 그 이름인가.

“오빠! 오….”

“쉿. 큰소리 내면 안 돼. 할아버지 주무셔.”

내가 풍작이를 내려놓고 속삭이듯 말하자 서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계속 조잘조잘 떠들어 댈 것 같아, 나는 거실이 아니라 장 회장의 방에서 먼 부엌으로 손님을 안내했다.

식탁에 앉자 서혜진은 뭔가를 기대하듯 동그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뭐 먹을 건 없어요?”

“배고파?”

도우미 아주머니들도 쉬는 시간이라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마실 거나 내줄까 했는데 배가 고팠던지 서혜진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줘야 하나 싶어 열어 본 냉장고에는 반찬만 몇 가지 있었을 뿐 정작 중요한 밥이 없었다. 내 뒤에서 고개를 빼고 냉장고 안을 살펴보던 서혜진은 아쉽다는 듯이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언니, 그럼 우리 짜장면 시켜 먹어요! 내가 살게요.”

“여긴 그런 거 배달 안 와.”

“피자도?”

“응.”

“에이.”

서혜진은 무척이나 실망한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음식다운 걸 만들 재주도 없어 나는 냉장고 문을 닫고 찬장을 뒤적였다. 라면이나 통조림 햄 같은, 장 회장이 먹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여기 있었다. 마침 새로 물건을 채워 뒀던지 손에 바스락거리는 봉지가 잡혔다.

“그럼 이거라도 먹을래?”

“어, 그거! 네, 네! 그거 한번 먹어 보고 싶었어요!”

먹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짜장 라면을.

쟤네 집도 보통은 아닌가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그릇과 수저를 준비하는 동안, 발을 구르며 짜장 라면을 기다리던 서혜진은 한결 유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는 몇 살이에요?”

“스물…. 너는?

“열다섯이요. 근데 언니 키 되게 크다. 모델이에요? 우리 오빠 연예인은 딱 질색하는데.”

처음엔 천년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보더니 금방 누그러지는 게 영락없이 애였다. 키가 크다고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함도 그랬다.

“아니야, 모델 같은 건.”

“그럼요? 대학생이에요?”

아니라고 하면 또 직업이 뭔지 물을 것 같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궁금한 게 많은 아이는 답을 듣기도 전에 또 질문을 쏟아냈다.

“어느 학교 다녀요? 전공은요?”

“글쎄. 어떻게 보이는데?”

나는 애매하게 질문을 회피했다. 하지만 서혜진은 쉽게 걸려들어 ‘음…’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마치 내 전공을 맞혀야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끓는 물에 면을 넣고 휘휘 저었다.

“미술? 음악?”

녀석은 한참의 생각 끝에 나와는 한참 동떨어진 우아한 분야를 읊기 시작했다.

“아, 뭔데요, 뭔데요. 궁금해 죽겠네!”

내가 스프와 면을 비비는 동안 서혜진은 아마 아는 전공을 전부 불러 보았을 것이다. 다행히 서혜진이 궁금증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나는 그릇에 면을 옮겨 담는 데 성공했다.

“일단 이거 먹고 있어 봐, 너희 오빠 불러올 테니까.”

허겁지겁 면을 입에 밀어 넣던 서혜진은 “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젓더니 겨우 입에 있는 걸 씹어 삼키고는 급히 외쳤다.

“이거 좀 먹고요! 이거 다 먹고 부르면 안 돼요?”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건지, 먹고 있을 땐 말을 빠르게 뱉을 수 없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급할 것도 없어서 나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건 별 의미 없는 합의였다.

“…서혜진? 너 왜 여기 있어?”

우리가 내는 소리가 컸던지 곧 장윤성이 부엌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서혜진은 뭔가를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면을 입에 넣다 말고 뻣뻣하게 굳었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에도 쉴 틈 없이 조잘거렸던 건 다른 사람인 양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그럼에도 장윤성은 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너 혼자 온 거야? 학교는? 너 여기 있는 거 너희 집에서 알아?”

서혜진은 대답 없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치를 봤다. 나는 얼른 컵에 물을 따라 서혜진에게 건네고 장윤성을 말렸다.

“하나씩 물어. 먹고 있는데 체하면 어떡해.”

제가 생각하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장윤성은 날 한 번 보더니 내 옆 의자를 빼서 앉았다. 서혜진은 물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일단 혼자 온 거 같아. 아까 택시에서 혼자 내리는 거 봤거든. 여긴 내가 들어오라고 했고.”

서혜진은 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 컵을 내려놓았다.

“학교는?”

장윤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물었다. 이번엔 하나씩. 서혜진은 꿀릴 거 하나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오늘 개교기념일이거든?”

“근데 교복은 왜 입었어.”

이번에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우물쭈물하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학교 갈 거라고 해 놓고 나와서….”

장윤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식탁을 툭 치며 일어섰다.

“너희 집에 연락해서 차 보내라고 할게.”

그 말에 서혜진이 벌떡 일어나 장윤성의 뒤를 쫓았다.

“오빠! 오빠! 나 택시 타고 갈게! 그러니까 엄마한테 말 안 하면 안 돼? 응?”

“혼날 게 무서우면 오질 말았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택시를 타고 와?”

“아씨, 민석이 오빠가 오빠 여자 친구 생긴 것 같다고 그랬단 말이야! 한국에 왔으면서 나한테 연락 한 번 안 하고!”

서혜진은 장윤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드러누울 기세로 버텼다.

“그리고 나 집에 가기 싫어어! 오늘 집에 고모네 온다고 했단 말이야. 가기 싫어어!”

사랑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용감한 소녀인줄 알았건만 실상은 가출 청소년인 듯했다. 나는 친척이 없어서 잘 모르는 감정이었지만, 일하는 곳 동료나 몇 안 되는 친구가 친척 방문을 꺼리는 걸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장윤성은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서혜진은 결국 불쌍한 얼굴로 내게 도움을 청했다.

“언니! 언니가 좀 말해 봐요! 나 진짜 조용히 하룻밤만 있다가 갈게!”

그렇게 애원해도 내게는 장윤성을 설득할 만한 힘이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릴….”

“언니이!”

장윤성이 또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서혜진은 다시 나를 불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번엔 내 의견을 들어 볼 차례인 모양이었다.

“일단 전화를 하고….”

전화를 하자는 말에 서혜진이 무척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허락을 받으면 자고 가도 되지 않을까.”

이번엔 장윤성이 인상을 쓰고 서혜진이 반색을 했다.

“나도 심심했으니까.”

“거봐, 거봐, 언니도 심심했다고 하잖아. 오빠아, 응?”

심심했다는 말에 장윤성의 시선이 내게 진득이 머물렀다. 아예 빈말을 한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뒤 근 일주일 동안 나는 아마 풍작이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종종 대답 없는 상대와 대화 하는 게 외로웠고 잠시나마 그 외로움을 잊게 해 준 서혜진에게 약간의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윤성은 서혜진을 떼어 내고 돌아섰다. 단호하게 서혜진을 돌려보낼 줄 알았더니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늘은 이미 시간이 꽤 됐으니 내일 차를 보내 달라고 말했다.

“네, 네, 아니에요.”

장윤성은 “네”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를 몇 번 반복해서 말하다가 서혜진에게 폰을 넘겼다. 서혜진은 폭탄이라도 건네받는 양 두려운 얼굴로 폰을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서혜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곁에 서 있는 내게도 들릴 만큼 성난 여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당장 돌아오라고 했는지 서혜진은 몇 번이나 싫다고 칭얼댔다.

“아니야. 여기 언니도 있어! 윤성 오빠 여자 친구! 진짜야!”

서혜진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남자만 있는 곳에 딸을 재우기가 걱정스러웠던 것 같았다. 우리오빠 꼬신 여자냐며 도끼눈을 뜰 땐 언제고 서혜진은 냉큼 나를 장윤성의 여자 친구로 인정했다.

폰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장윤성은 나를 흘끔 쳐다보며 증언했다.

“네, 같이 지내고 있어요. 여자 친구도….”

서혜진의 모친이 확인하러 올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뜨끔했다. 장윤성은 내 얼굴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혜진이가 잘 따르는 것 같아요. 네, 네.”

결국 서혜진은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르기로 허락받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서혜진은 장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서혜진은 장 회장을 아는 것 같았지만 장 회장은 서혜진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장윤성이 누구 동생이라고 설명하고 나서야 장 회장은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서가 놈 손주?”

서혜진은 처음부터 외박을 하기로 작정하고 온 게 틀림없었다. 다음 날이 휴일인 것도 그랬지만 가방 속에는 갈아입을 옷과 화장품 등 짐이 가득했다. 저녁 식사 후 거실 한구석에 팽개쳤던 가방을 챙기면서 서혜진은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신이 난 듯 물었다.

“그럼 난 언니랑 같이 자면 돼?”

그 말에 나는 안고 있던 풍작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손님방은 몇 개든 더 있었지만 내게 그걸 내줄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청소가 되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 어?”

“안 돼.”

내가 멍청하게 어물대는 동안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건 장윤성이었다.

“저 언니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잘 땐 특히.”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면서 장윤성은 조금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장윤성이 입꼬리를 올리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서혜진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언니 잠버릇이 그렇게 험해요? 난 그래도 괜찮은데….”

“아냐, 넌 감당 못 해.”

“오빤 언니 잠버릇을 어떻게 알아?”

“저 언니 취미가 소파에 책 펴 놓고 자는 거거든. 소파를 한 네 번은 바꿨을걸.”

“에이, 말도 안 돼.”

“진짜야. 어쨌든 넌 이쪽으로 와. 내 옆방 청소 해 놨으니까.”

서혜진은 그래도 아쉬운 듯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입술을 삐죽이며 장윤성을 쫓아갔다. 잠시 후 서혜진이 옷을 갈아입겠다며 장윤성을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나도 방으로 돌아가려 풍작이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나를 무시하고 제 방으로 휙 가 버릴 줄 알았던 장윤성이 자리에 서더니 입을 열었다.

“혜진이, 내 친한 친구 동생이야. 집안끼리 교류도 잦아서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고.”

“응.”

대충 예상했던 것들이라 짧게 대답하자 장윤성은 조금 짜증스럽게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자조하듯 말했다.

“하긴, 신경도 안 썼겠지.”

당연한 말이었다. 중학생을 상대로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로 덜떨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한숨 쉬듯 중얼거린 장윤성은 맥 빠진 목소리로 들어가, 하고는 제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혜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날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게 누군데. 굳게 닫힌 건 저 방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쫓겨날까 눈치를 보느라 말 한마디 시원하게 쏘아붙이질 못하는 내 처지도 짜증이 났다.

돈이 아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대답을 해 줄 때까지 서혜진처럼 매달려 떼라도 써 보았을 것이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하면 장윤성은 대답을 해 줄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묻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무엇에 화가 났든 나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없는 사람인 척하고 싶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종일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가발을 벗고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었다.

침대에 내려놓은 풍작이가 여기저기 킁킁대며 돌아다니다 결국 내 얼굴에 촉촉한 코를 댔다. 쓰다듬기 불편한 자세였지만 나는 팔을 잘 뻗어 부드러운 털을 매만졌다. 말도 못 하는 이 작은 짐승도 온기를 가졌다고 위로가 됐다.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었던가. 멍하게 천장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장윤성이 또 생강차를 가져왔나 해서 몸을 일으키며 “네.” 하고 대답했더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언니이.”

빼꼼 고개를 내민 건 서혜진이었다. 잠옷 바람에 커다란 베개까지 하나 들고 들어온 서혜진은 내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나 여기서 자면 안돼요? 응? 응? 언니가 코 골고 이 갈아도 꾹 참고 비밀로 할게요.”

누가 코를 골고 이를 간다고. 이래 봬도 나는 시체처럼 자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서혜진은 꾸역꾸역 이불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쏙 내밀었다.

“나 막 이렇게 수다 떨다 자 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우리 엄마는 친구 집에서도 못 자게 해요. 폐가 된다고. 친구네 가족들도 다 괜찮다고 했는데.”

그것 참 소박한 꿈이었다. 서혜진의 모친은 딸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 결백한 장윤성조차 쉽게 믿지 못해 옆에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까지 듣고서야 겨우 하룻밤을 허락한 걸 보면. 이 꼬마가 그 마음을 알기까지는 아마도 시간이 한참 더 흘러야겠지만.

“너 근데 나랑 이렇게 친하게 지내도 돼? 나 너희 오빠 꼬신 사람인데?”

우리가 같이 자기 애매한 사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려 한 말인데도 서혜진은 베개를 꼭 끌어안으며 ‘헤헤,’ 하고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어차피 윤성 오빠는 미성년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내가 스무 살이 되려면 아직 5년이나 남았으니까, 그사이에 잠깐 여자 친구 정도는 사귈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로 했어요.”

“보기보다 너그럽네?”

“제가 좀 쿨해요. 요즘엔 다들 그렇잖아요. 어떤 언니 오빠들은 애인이 두셋씩 있기도 한 걸요. 하나면 양호한 거지.”

서혜진은 어느새 제가 오르막길 아래에서부터 뛰어와 쏘아붙였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나와 장윤성의 관계를 눈감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게 어떻게 쿨한 거야. 5년도 못 기다려 주는 남자를 버려야 쿨한 거지.”

“에이, 언니라면 기다릴 수 있어요? 5년이면 내 인생 1/3인데?”

“그건 그러네.”

어린 서혜진이 아니라 나에게도 긴 시간이었다. 5년 전에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학교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건 기억이 났지만 어떤 기분이었는지, 심지어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5년 뒤에 장윤성을 떠올려 보면 또 그렇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서혜진은 화제를 바꿔 고모와 사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서혜진은 고모가 동갑내기 사촌이 무슨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 걸 자랑하러 오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워 서혜진이 떠드는 것을 전부 들어 주었다. 열다섯 살, 그것도 여자아이의 사연에는 내가 공감해 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은 것도 아니라, 그저 ‘그랬어? 그랬구나, 그랬겠네.’ 이런 대답만 했을 뿐인데도 서혜진은 나처럼 목소리가 잠길 때까지 한참 말을 하고 나서야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었다.

여장을 하고 있어도 같은 침대에 누워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멋대로 몸에 손을 대어 옮길 수도 없어서 나는 서혜진이 확실히 잠든 걸 확인하고 풍작이를 안아 든 채 방을 나왔다. 잠이 들자마자 큰 대(大) 자로 팔다리를 뻗는 게, 아무래도 자다가 풍작이를 깔아뭉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우선은 소파에 누웠다. 어차피 서혜진의 방에서 자든 소파에서 자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근처에서 멈췄다.

눈을 뜨지 않아도 그게 장윤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어날까 하다가 마주쳐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자는 척을 했다.

남이 자는 걸 구경하려는지 장윤성은 내 머리맡에 앉았다. 그 후로는 한참 움직임도, 말도 없었다.

자는 척을 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크게 숨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볼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낮에 열을 잴 때처럼.

하지만 그렇게 산뜻하게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손은 턱 선을 따라 목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움츠리자, 손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대신 장윤성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혜진이 방에 가서 자.”

내가 자지 않는 것도, 누군가에게 침대를 빼앗긴 것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

다음날 오전 일찍부터 서혜진을 데리러 올 차가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다. 서혜진은 정말로 돌아가기 싫었던지 입술을 몇 번이고 삐죽대다가 그래도 아쉽다는 듯이 짜장 라면을 한 번만 더 끓여 달라고 했다. 집에서는 절대 못 먹는다면서.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 나는 또 찬장을 열어 라면을 끓여 주었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신나게 면을 입에 넣던 아이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언니는 여기 언제까지 있어요?”

“나?”

그사이에 또 입 안 가득 면을 집어넣은 서혜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지, 언제 쫓겨날지.”

쫓겨난다는 소리에 서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면을 급히 삼켰다.

“쫓겨나요?”

“응.”

“왜요?”

“그냥, 좀, 그럴 것 같아.”

그렇게 얼버무리고 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애를 앞에 두고 이런 소리까지 할 정도로 몰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잔뜩 쉰 목소리마저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서혜진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요? 오빠가 언니한테 그만 만나자고 그래요?”

애초에 그런 관계로 만난 적도 없었다. 나는 그저 입꼬리를 조금 들어 웃는 척을 해 보였다.

“언니, 언니, 그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 무슨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건지 서혜진이 들뜬 표정을 지었다.

“쫓겨나면 우리 집에 와요. 내가 우리 오빠 소개해 줄게요. 지금 미국에 있긴 한데 부르면 금방 올걸요? 윤성 오빠만큼은 못해도 우리 오빠도 나름대로 잘생겼….”

서혜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가 내 귀를 덥석 막았다.

“누가 누굴 쫓아낸다고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장윤성도 그걸 잘 알고 있다는 듯 타박하는 말은 서혜진이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왜애. 지영 언니가 우리 오빠랑 사귀면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좋잖아.”

“누굴 어디다 갖다 대? 너희 오빠는 동생이 자길 그렇게 팔고 다니는 거 알고 있대?”

“우리 오빠도 좋아할걸? 지영 언니 키 크니까. 완전 우리 오빠 이상형이잖아.”

“얘가 뭐가 커. 완전 땅에 붙어 다니는데. 하여간 이 언니는 내가 데리고 살 테니까 넌 얼른 그거나 먹고 가.”

아주 큰 키는 아니어도 대한민국 평균 정도야 가뿐히 넘었고, 여자로 치자면 흔치 않을 정도였건만 장윤성은 끝내 서혜진의 말을 부정했다.

“으씨.”

서혜진은 얼굴을 한 번 찡그려 보이긴 했지만 차가 와 있다는 소리에 고분고분하게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야, 귀, 귀 좀.”

안간힘을 써도 내 귀를 막고 있는 손을 뜯어낼 수가 없어 결국 끙끙거리는 소릴 내자 장윤성은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어차피 다 들리는데 왜 막는 거야.”

그사이 먹먹해진 귀를 뚫으려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다 투덜댔더니 장윤성이 옆자리에 털썩 앉아 말했다.

“들려도 저런 소린 귀에 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장윤성의 표정도 목소리도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화가 좀 풀렸나? 내 빤한 시선을 눈치챈 장윤성이 서혜진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이거 봐, 이 언니가 내 얼굴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너희 오빠 얼굴이 눈에 차기나 하겠어?”

서혜진은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열심히 면을 먹으면서도 치, 치, 그런 소리를 몇 번이나 내다가 접시를 비우자마자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장윤성과 나는 차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서혜진은 불만스러운 몸짓으로 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내게 폰을 내밀었다. 폰 번호를 교환하자는 거였다.

“연락해도 되죠?”

“너무 자주는 말고.”

어차피 한지영의 역할이 끝나면 사라질 번호였지만.

장윤성이 문틈으로 따라 나온 풍작이를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는 동안 서혜진은 나만 들릴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언니도 쫓겨나면 꼭 연락해요. 우리 오빠 소개해 줄게요.”

“그래.”

“혼난다, 서혜진.”

어느 틈엔가 다가온 장윤성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서혜진은 또 뭐라고 구시렁대며 차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 서혜진은 창문을 열고 붕붕 팔을 휘둘렀다.

“언니 안녀엉!”

나도 그 손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손님이 떠나고 또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나는 어색하게 팔을 거두고 장윤성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 보였던 태도가 화가 풀렸기 때문인지, 서혜진이 있었기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장윤성의 얼굴은 다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긴, 화가 난 이유가 있다면 아무 이유 없이 풀릴 턱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발치만 보다 먼저 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장윤성이 내 팔을 붙잡았다.

“반지는 어디 있어?”

“어?”

“300원짜리 반지. 어디다 두고 빈손으로 다니느냐고.”

“아냐, 어디 둔 게 아니고….”

나는 얼른 주머니에 넣어 둔 반지를 꺼내 보였다. 어쩐지 장윤성이 더 이상 이 반지를 끼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저 가지고만 다니던 중이었다. 장윤성은 반지를 다시 내 손가락에 끼우며 말했다.

“끼고 다녀. 피치 못할 때만 빼고.”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이미 높고 두꺼운 벽이 장윤성과 나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쓰게 웃었다.

“내가 졌어. 인정해야 할 것 같아.”

일방적으로 화를 낸 주제에 언제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패배 선언을 했다. 장윤성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내가 어지럽게 눈을 굴리자 장윤성의 손은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시선이 맞잡은 손을 향하고 나서야 나는 장윤성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말하기를 망설이듯 잠시 꾹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다시 열렸다.

“너를 좋아해. 생각보다 많이.”

이상한 고백이었다. 담담한 말 속에는 일견 체념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그래도 장윤성은 무언가가 흘러넘쳐 더 이상 담아 둘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너는 나한테 무엇 하나 말을 해 주지 않는데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네가 좋아져.”

마치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을 고백하듯, 장윤성은 계절만큼이나 쓸쓸한 목소리를 냈다.

왜 하필 가을이었을까. 그다음에는 사무치는 추위밖에 없는데. 그가 뱉은 낱말이 내 목에도 가슴에도 따끔따끔하게 박혔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윤성은 그런 침묵 또한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기다릴게. 이번 계절에 안 되면 다음 계절에, 올해가 아니라면 내년에라도, 그보다 더 먼 훗날이라도 괜찮아. 네 마음이 내키면 말해 줘. 네가 누군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내 눈을 빤히 보면서 장윤성은 주문을 걸듯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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