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인 진짜배기들은 늦은 시간까지 거하게 마셔 댔다. 성욱 형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는 아직 영업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이만 문을 닫아도 되겠다고 웃었다. 물론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으므로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밤이 깊어 갈수록 방문객이 뜸해 나는 바 구석에 가만히 앉아 손님 대접을 받았다.
“뭐라도 마실래?”
“커피요.”
기분 같아서는 가볍게 술을 한잔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장윤성의 대리 기사를 자처할 예정이라 카페인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직 정호와 종민이가 홀을 누비고 있어 딱히 시킬 사람이 없었던지 성욱 형은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성욱 형을 기다리면서 나는 진짜배기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서혜진이 잠깐씩 나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본 적 있죠?”
그렇게 말하며 인사를 건네는 서혜진에게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번이요?”
장윤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봤었잖아요. 저번에, 학교에서요. 제 친구가 번호 좀 달라고 했었는데,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기억 못 하시나 봐요?”
서혜진은 내 기억력을 타박하듯이 다시 말했다. 농담인 척했지만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7년 만에 재회한 장윤성이 그랬듯이 서혜진도 많이 변했나 싶었다.
“야, 왜 그래.”
하지만 옆에서 당황스러워 하는 서기준을 보면 평소 같은 행동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 친구를 거절했기 때문일까, 서혜진은 내게 묘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아니에요.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분이 맞는지 긴가민가해서요.”
나는 어디까지나 손님을 대하는 얼굴로 웃으며 대꾸했다. 서혜진은 잠깐 날 빤히 보다가 조금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하긴, 그럴 수 있죠.”
그러고선 내게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서기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서혜진의 태도가 조금 까칠한 건 사실이었지만 사과를 받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빈 쟁반을 챙겨 자리를 떴다.
“야, 쟤 너 엄청 쳐다본다. 하여간 이하경 인기는 알아줘야 돼.”
양손에 아이스커피를 들고 나오던 성욱 형이 서혜진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커피는 내 앞에 한 잔, 형 앞에 한 잔씩 놓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야?”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서혜진이 한지영을 기억한다 한들 나를 보고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바로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이렇게 티가 날 정도로 몇 번이고 나를 쳐다봤다는 건 적어도 확신하지는 못했다는 소리였다.
“어쨌든 아니에요.”
나는 강조하듯 말하고 차가운 커피에 입을 댔다. 어차피 장윤성이 기억을 찾아도 아니라고 우길 셈이었다.
장윤성에 비하면 서혜진은 차라리 쉬운 상대였다. 거기다 따지고 보면 서혜진이 굳이 내 정체를 파헤칠 이유도 없었다. 서혜진이 지금도 장윤성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장윤성의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진짜배기 테이블에서 다시 한 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술자리가 끝난 건 자정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그전에 이미 한 명은 업혀 나갔고, 두엇은 기어 나갔다. 다른 이들은 비틀거리며 가게를 나섰고 남은 건 장윤성과 서기준 남매, 그리고 차연주였다. 나머지 셋은 멀쩡했지만 서기준이 만취 상태인지라 그들은 이만 자리를 파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차연주는 갖은 욕을 다 하며 서기준을 포대자루 끌고 가듯 질질 끌고 나갔다. 차연주는 깐깐하고 냉소적인 인상과 다르게 소탈한 데가 있었다.
서혜진은 차연주가 채 못 챙긴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고 서서 그들에게 안녕히 가세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서혜진은 그런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빤히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를 나섰다. 나 역시 그 뒷모습을 빤히 봤다. 교복을 입고 촐랑거리며 차에 올라타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이제는 짜장 라면 정도는 자유롭게 먹으려나, 하고 우스운 생각이나 하던 차에 불쑥, 뭐가 끼어들어 시야를 가렸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봐?”
계산을 하고 오던 중이었는지 장윤성이 내 앞에 들이댔던 카드를 거둬 지갑에 꽂아 넣었다. 혼자 술 대신 물을 마신 건지 여전히 멀끔한 얼굴이었다. 왜 서혜진을 그렇게 보고 있냐는 물음에 둘러댈 말이 없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그냥.”
“관심 갖지 마. 쟤 임자 있어.”
“아, 정말?”
열다섯, 어린 날의 순정이었으니 그사이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 입에서는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장윤성은 또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미간을 슬쩍 좁혔지만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다.
***
째깍, 째깍, 째깍. 나는 소파에 늘어진 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상상했다. 장윤성의 집 거실 벽에 걸린 시계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얇은 바늘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걸 구경하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째깍’거리는 소리를 상상했을까. 배꼽시계가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듯이 꼬르륵 소리를 냈다. 토요일의 늦은 아침, 평소라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일 시간인데도 장윤성은 오늘따라 늦잠을 자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냉장고를 뒤적여 떠먹는 요거트를 하나 해치운 뒤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아직도 납작한 배를 부여잡고 생각을 했다. 먼저 아침을 먹을까, 귀찮은데 좀 더 기다려 볼까.
이게 뭐라고 몇 십 분째 생각만 하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고민이었다. 이 야속한 몸뚱이는 어려운 일에 적응하는 건 오래 걸리면서 나태함에는 금방 길들여지곤 했다. 3개월이나 이렇게 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나는 괜히 몸을 뒤척였다. 그래도 일어나는 데 실패해서 그저 자세를 바꿔 누운 것밖엔 되지 않았지만.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역시 3개월은 너무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한 달 동안 나는 벌써 장윤성의 형과, 형수, 거기에 서혜진까지 만났다. 이러다 두 달째에는 나 여사를, 세 달째에는 새로운 장 회장을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자세를 바꾸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없었던 구경꾼이 소파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장윤성이 구경 잘 했다는 듯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깜짝이야. 왜 기척도 없이 다녀, 사람 놀라게.”
“글쎄. 네가 못 들은 건 아니고?”
발걸음 소리는 물론 문을 여닫는 소리까지 못 들었던 것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어났으면 부르지 왜 혼자 그러고 있어.”
“그냥. 주말이니까 푹 자라고.”
“고맙긴 한데….”
한데?
장윤성은 쓸데없는 배려였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리며 웃었다.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는 게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었지만, 졸린 게 아니라 피곤에 젖은 목소리였다. 취하지는 않지만 숙취가 있는 타입인가, 하며 안색을 살피는 동안 장윤성은 부엌 쪽을 살짝 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침은 나가서 먹을까? 요 아래 카페에서.”
“뭐든 좋으니까 얼른 좀 먹자.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죽으면 안 되지. 내려가자.”
장윤성은 지갑을 챙겨들며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 갈 때처럼 머리를 단정히 하지 않았을 뿐 말끔하게 씻었고 옷도 잠옷 차림이 아니었다. 방금 일어난 게 아닌가? 무언가 껄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장윤성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일단 신발에 발을 끼워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집 근처에는 장윤성이 혼자 지낼 때 자주 아침을 먹으러 들렀다는 카페가 있었다. 넓고 한적한 편이라 나도 종종 도우미 아주머니를 피해 들르곤 했던 곳이었다. 대충 샌드위치와 샐러드, 음료를 시켜 두고 우리는 넓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샌드위치를 입에 넣는 동안 샐러드를 깨작거리던 장윤성이 입을 열었다.
“혜진이랑은 언제 본 거야?”
“저번에 건우네 학교 갔을 때, 잠깐.”
처음엔 그때 본 사람인지도 몰랐어,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덧붙이고 나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간 김에 번호도 따이시고?”
“안 줬어.”
안 줬다는 말에 장윤성도 가볍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샷을 추가했는지 집에서 제멋대로 만들어 먹는 것만큼이나 시커먼 커피였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장윤성은 기특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잘했어. 억울할 뻔했잖아. 나는 팔 하나 걸고 받은 건데.”
하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팔 하나라고 가볍게 말할 게 아니었다. 그때 장윤성은 목숨을 걸었고 다행히 팔 부상으로 끝났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또다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날 구하지 말라고 할 용기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건우가 어엿한 의사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장윤성의 왼팔을 보며 묻어 뒀던 걱정을 꺼냈다.
“팔은 이제 괜찮아?”
“다 나은 지가 언젠데.”
장윤성은 일찍도 묻는다는 듯이 대꾸했다.
“저번에 보니까 아직 불편한 것 같던데. 별장에 가면서 운전할 때도….”
불편한 듯 여러 번 팔을 털었던 걸 떠올리며 한 말에 장윤성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아니, 다 나았는데. 팔이 불편하면 잠자는 이하경을 어떻게 옮겼겠어.”
그건 그랬다. 마른 편이긴 해도 성인 남자를 들어 옮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에 내가 괜히 신경을 쓴 건가. 아니, 그것보다 잠자는 사람을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옮기지 말라고. 나 잘 때 건드리면….”
“큰일 나?”
“그… 어?”
이미 맨정신에도 입을 맞춘 마당에 키스가 뭐 큰일인가 싶지만, 그래도 잠결에 끌어안고 우는 추태는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을 하려다가 장윤성의 묘한 말투를 깨닫고는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하경 씨도 잘 때 건드리면 무서운 사람인가?”
장윤성이 다시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낯익은 말이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만 껌뻑거렸다. 뭐지? 기억이….
“음…. 누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장윤성은 제가 뱉은 말의 출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능청을 떨거나 나를 떠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나는… 그런 적 없어.”
“그래, 그럼 다른 사람이 했겠지.”
장윤성은 내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투였다.
그는 다시 포크를 들어 샐러드 접시를 뒤적거렸다. 나는 어물거리다가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3개월은 너무 길다. 게을러지는 것 외에도 몇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이 생활이 되찾아 주는 건 장윤성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희미해져 가던 내 기억이나 감정 역시 종종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선명해지곤 했다. 나는 그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중에는 일부러 깊숙이 묻어 둔 것도 있었으니까.
두 조각으로 나뉘어 나온 샌드위치의 반을 입에 마저 넣고 나머지 반을 집어 드는 중에 얼마 줄지 않은 샐러드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먹을래?”
집어 들던 걸 슬며시 내밀자 장윤성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 많이 먹어, 배고프다며.”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것도 아니고 안 먹을 만해서 안 먹는 건데 괜히 신경이 쓰였다. 장윤성은 내가 먹는 걸 구경하다가 가끔씩 새카만 액체를 입에 댔다. 풀 쪼가리 몇 장 들어간 게 전부인 속에 저런 걸 잘도 부어 댄다. 하긴 전날 술까지 마신 주제에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올 생각을 한 것부터가 남다르긴 했다.
“빈속에 커피 마시면 속 안 아파?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걸.”
“속은 안 쓰린데.”
장윤성은 말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잠을 좀 자고 싶어.”
“못 잤어? 왜?”
“그냥. 잠이 안 와서.”
“술 마셔서?”
7년 전, 처음 함께 술을 마셨던 날에도 장윤성은 별로 자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막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종민이도 그런 타입이었다. 술을 마시면 잠이 잘 오지 않아 싫다고 했었다.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쉽게 감기지 않는 눈을 깜빡이면서 장윤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따금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오래 전의 장윤성을 떠올려 보곤 했다. 그래서 오래전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장윤성이 무엇을 떠올렸을지 궁금했다.
별장에서 간신히 떠올린 그 한 장면을 장윤성은 몇 번이나 곱씹어 봤을까? 얄궂은 마음이었다. 한지영을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건 이다지도 싫다니. 입을 열면 헛소리가 튀어나갈까 나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거실 소파를 좀 더 넓은 걸로 바꿀까.”
내가 그렇게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장윤성이 뜬금없는 화제를 꺼냈다.
“갑자기 왜?”
굳이 더 넓은 걸 찾을 만큼 좁은 소파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윤성은 진지하게 문제라는 듯이 대답했다.
“좁잖아. 남자 둘이 뒹굴기엔.”
“거기서 남자 둘이 뒹굴 일이 뭐 있어.”
“있을걸.”
“없어.”
딱 잘라 대답했음에도 장윤성은 끈질기게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우겼다.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대꾸했다.
주문한 걸 다 먹고도 우리는 영양가 없는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좀 더 보냈다. 그러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즈음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뛰면 집까지야 갈 수 있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온 김에 사진관 들르려고 했는데.”
“우산 사서 갔다 올까?”
장윤성이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가리키며 묻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집에 가자. 집에 우산도 많은데 또 늘리기 싫어.”
사실은 장윤성과 함께 사진을 찾으러 가는 게 불안했다. 그 카메라를 본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 찍혀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장윤성을 먼저 보내고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당연하게 같이 갈 생각을 하기에 차라리 비가 와서 잘됐다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바깥을 내다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 사진관 들렀으면 귀찮을 뻔했다.”
그냥 돌아오길 잘했다고 괜한 생색을 내자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게.”
“짐 정리나 할까?”
그저 쌓아 두기만 한 상자가 일주일 내내 거슬렸다. 머리카락과 어깨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털어내던 장윤성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좀 자고.”
아무래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어차피 내 짐도 아니고, 그게 차지하고 있는 공간도 내 것이 아니었다.
장윤성이 제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도 거실을 서성거리다 방에서 책을 가져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일전에 장윤성의 카드로 샀던 책이었다. 그 뒤로 좀처럼 읽을 기회가 없어 며칠째 방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기만 했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데 뒤에서 방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아침과 달리 이번엔 확실히 기척이 났다.
“잔다더니?”
장윤성은 옆구리에 담요를 끼고 터덜터덜 소파까지 와서 털썩 앉았다.
“아까 너 여기 누워 있는 거 보니까 편해 보여서.”
확실히 소파에 눕는 건 침대에 눕는 것과 다른 아늑함이 있었다.
“그럼 비켜 줄까?”
“아니, 다리를 좀 빌려주면 좋겠는데.”
장윤성은 저번에 영화를 볼 때처럼 내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 다리를 내주려다가 문득 너무 순순히 굴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공짜로는 안 돼.”
장윤성이 슬쩍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졸린 듯 반쯤 뜬 눈에도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내가 대가를 바라는 게 신기했는지 장윤성은 들어나 보자는 듯이 가물가물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 해 주면 되는데?”
나는 급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돈이나 물건을 달라고 하는 건 장윤성에겐 너무 쉬운 일이라 괜한 심술을 부리며 번거로운 일을 찾았다.
“피아노, 피아노 쳐 줘.”
거실 한구석에 가만히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며 한 말에 장윤성이 졸음을 떨치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피아노?”
후불로 받을 생각이었는데 굳이 말을 하지 않았더니 장윤성이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오랜만인데 괜찮을까, 하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장윤성은 피아노 의자를 꺼내 앉았다. 소리만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 예쁜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도 보고 싶었다. 방해가 될까 피아노 옆에 섰더니 장윤성은 자리를 조금 옮겨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듣고 싶은 곡 있어?”
“아니, 그런 건 잘 몰라.”
내가 제목까지 외우는 곡들은 가게의 플레이 리스트 정도였다. 그나마도 너무 자주 들어 굳이 지금 듣지 않아도 될 곡들이었다.
장윤성은 듣고 싶은 것도 없이 피아노 앞에 앉혔냐고 나를 타박하는 대신 창밖을 휙 돌아봤다. 넓게 난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도시가 훤하게 보였다.
“그럼 비가 오니까….”
장윤성이 속으로 선곡을 마친 듯 손을 움직였다. 나도 따라서 한 번 창밖을 보고 장윤성의 손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기다렸다. 하늘이 잿빛이라 나는 장윤성이 우울한 곡을 연주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장윤성은 경쾌한 빗방울을 연주했다. 시원한 빗방울이 톡톡 건반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이 홀린 듯 장윤성의 손가락을 쫓았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생각도 많아지는 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날엔 어김없이 비가 왔다.
장윤성도 같은 경험을 했던 날이 있었다. 그 기억을 잃은 장윤성에게 비 오는 날은 이런 느낌일까. 처음 내게 피아노를 쳐 줬던 날의 볕처럼 눈부신 연주였다.
특별히 긴 곡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동안 몇 개의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빗소리가 섞인 탓인지 건반이 내는 소리는 맑았음에도 음울한 날만의 기억만 계속해서.
연주는 한껏 고조되었다가 천천히 엔딩을 향해 흘렀다. 손을 높이 튕기며 연주를 마무리한 장윤성이 뿌듯한 얼굴로 하나뿐인 관객의 반응을 살폈다.
“별로였어?”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지 장윤성이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어쩐지 뻑뻑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아니, 좋았어.”
장윤성은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맞춰 왔다. 눈을 마주친다고 장윤성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면 괜히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자 장윤성의 손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못난 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렇게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조하듯 우리의 차이에 대해 덧붙였다.
“…나한테 비 오는 날은 이런 느낌이 아니라서.”
“그럼 어떤 느낌인데?”
복잡한 그 느낌을 표현할 좋은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흘끔 올려다본 장윤성은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냥, 싫은 날.”
한참 고르고 고른 말이 고작 이거였다. 장윤성은 의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비 오는 날이 싫어?”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끄덕이자 장윤성의 손이 이마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가락이 예쁘게 생겨서일까, 장윤성의 손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더 이상 가발을 쓰지 않아서 좋은 점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장윤성이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만져도 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
방금까지 빗방울을 연주하던 손은 살며시 귀 뒤로 넘어갔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럼….”
그런 소리를 만들며 달싹이던 입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졸음을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라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좋은 기억을 하나 만들까.”
성의 없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결에, 혹은 기억을 찾겠다는 이유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닿아 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키스는 여느 때와 달리 천천히, 부드럽게 이어졌다. 성급하게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길도 없었다. 그렇게 오래 입을 맞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손을 맞잡고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장윤성의 하는 대로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혀를 얽었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손길도, 느릿하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하는 키스도 유난히 달았다. 타액에 젖은 살덩이가 떨어지는 소리마저.
그렇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장윤성은 내 이마에, 볼에, 그리고 다시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댔다가 뗐다. 얼떨떨하게 그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다가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 어…. 나는 떠듬떠듬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뒷걸음질 치듯 물러났다. 사고가 정지한 머리를 억지로 굴려 당장 생각을 해야 했다.
“하경아.”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방으로 향했다. 장윤성의 목소리가 잠깐 발목에 감겼지만 나는 꿋꿋이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어쩌다 이런 사달이 났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키스를 한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 됐다. 첫 키스도 아니고 새로운 상대도 아닌데 뭐가 궁금하다고 혀를 얽었을까.
익숙해서? 그래, 나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려 해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낯설어서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하경 씨, 약속한 대가는 치러 주셔야죠.”
얄밉게 놀려 대는 말에도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이 일을 핑계로 내 속을 들춰내려 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 할 때 방어할 말이 필요했다. 피아노를 치라고 한 것도 나라서 장윤성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미를 수도 없었다. 뒤늦게 밀려온 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하경아, 안 놀릴게. 나와서 저녁 먹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문을 두드린 장윤성이 간신히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안 먹을래.”
걱정할까 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장윤성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럼 냉장고에 넣어 둘 테니까, 배고플 때 꺼내 먹어.”
그리고 조금 뒤, 그는 혼자 저녁을 먹었는지 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쌓아 둔 짐을 혼자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쯤엔 나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긴 입맞춤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 수 있는 말을.
새벽쯤 나는 몇 가지 단어를 떠올렸고,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는 그중에 하나를 골라 명명했다. 이건 ‘사고’라고.
아침이라고 할 시간은 아니었다. 늦은 새벽까지 괜한 고민을 한 탓에 정오가 다 된 시간에 눈을 떠서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분위기를 살폈다. 장윤성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어쩐지 집 안이 조용했다.
맞은편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자는 걸까. 어제 거의 못 잤으니 아직까지 잔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냉장고를 뒤적여 장윤성이 어제 만들어 놨을 것들을 먹고 커피를 한 잔 타서 방으로 향했다.
불현듯 어느 날엔가 느꼈던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제는 쫓겨날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데 괜히 닫힌 문 안이 궁금했다. 나는 그 앞에 다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무슨 일이냐고 하면 손에 든 커피를 내밀 생각이었다. 커피 마실래? 하면서. 하지만 아직 자는 건지 대답은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오후쯤에 다시 문을 두드렸을 때에도 장윤성은 대답이 없었다.
방에 있는 게 아니라 나갔나? 어제 혼자 짐을 정리하고 쓰러졌나? 아니면 내 태도가 기분이 나빴나?
“야, 아픈 건 아니지?”
별 생각을 다하며 세 번째 노크를 했을 때, 장윤성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오늘은 방에서 좀 쉴게.”
괜찮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선을 긋는 태도라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주말은 그렇게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장윤성은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바쁜 척을 했다. 새벽부터 방문을 두드리며 식탁에 아침을 차려 뒀으니 먹으라는 소리를 하고는 곧장 출근을 했다.
잠결에 문 밖의 남자가 건우인 줄 알고 “으응, 형이 알아서 먹는다니까.” 하고 웅얼거렸다가 또 비웃음을 샀다. 정신 차려요, 11월생 이하경 씨. 태어난 날이 얼마 차이나지 않아서 형 취급을 못하겠다는 소리였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나는 억울해하며 잠에서 깼다.
이 나라에선 칼같이 생년으로 따지는 거 모르냐.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뒤늦게 현관까지 따라 나간 나는 멀거니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간밤에 장윤성은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별장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장윤성의 기억이 계속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디까지 기억해 냈을까? 내가 건 조건 때문에 장윤성이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자신이 있었다. 장윤성은 쉬운 사람이니까, 어떤 변화든 내가 다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오만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씻고 소파에 쪼그려 앉아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관이 문을 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보면 별장에서 사진을 찍을 뻔한 적이 있었다. 볼이 시릴 정도로 추워지던 어느 날 장 회장은 비서에게 사진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장 회장과 장윤성, 나, 그리고 풍작이까지 해서 가족사진을 한 장 찍자고 했었다. 크게 인화해서 벽에 걸자고. 사진을 남기는 게 꺼림칙했지만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장 회장이 점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건강한 모습일 때 사진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장 그날 밤 장 회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사진은 남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사진쯤은 남겨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차피 장명수가 알아서 숨겨 줬을 텐데.
겨우겨우 시간을 보내고 외출을 하려 옷을 입는 중에 장윤성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침은 잘 챙겨 먹었어?」
하루 이틀 빼먹는다고 내가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꼬박 차려 놓고 나가는 이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주워 들던 지갑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아서 미리 문자를 보냈다.
「잘 먹었어.」
「기특하네.」
아무래도 장윤성은 종종 내가 연상인 걸 잊는 모양이었다.
「11월생이어도 내가 형이야, 윤성아.」
기껏 상기해 준 사실에 저도 할 말이 없었던지 한참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 심심한데. 반응 없는 메시지 창을 보면서 밥을 마저 먹고 다시 길을 나서려 지갑을 주워 들던 차에 장윤성에게 전화가 왔다.
“왜.”
- 말로 해 봐.
“뭘?”
- 아까 메시지 보냈던 거.
“내가 뭐라고 했는데?”
신발을 신으며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부쩍 쇠약해진 기억력을 괴롭히는 대신 메시지 창을 열어 마지막 말을 확인했다.
“아, 11월생이어도 내가 형이라고?”
- 그다음에.
“윤….”
그깟 이름 두 글자가 뭐라고 혓바닥이 간지러워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겨우 한 글자를 뱉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이하경 씨? 하경아?
장윤성이 놀리듯 재촉했다. 괜히 의식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시끄럽고, 내가 11월생인 건 어떻게 안 거야?”
- 이름 불러 주면 가르쳐 줄게.
“됐네요, 3월생 장윤성 씨. 보나마나 뒷조사하셨겠지.”
- 이하경 씨는 내가 3월생인 거 어떻게 알아?
“나도 뒷조사 좀 했어.”
별장에서 지낼 때 들었던 거지만, 굳이 과거에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생일 정도는 알아볼 방법이 많았다. 가게에서도 고객 관리를 위해 VIP의 기념일 정보쯤은 모으고 있었으므로 여차하면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 고맙네, 그 정도 관심이라도.
장윤성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서 시작된 통화는 내가 현상소 앞 횡단보도를 건널 즈음에 끝이 났다.
- 오늘 늦을 거 같으니까 먼저 자.
장윤성은 그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 같았다.
바쁜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당장은 신호가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열중해야 했다.
길을 건너 바로 있는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딸랑, 하고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직원이 안경을 슬쩍 올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진 찾으러 왔는데요. 지난주에 맡긴 거요.”
“성함이?”
“이하경이요.”
“이하경, 이하경….”
조그맣게 내 이름을 중얼거리며 안쪽에서 상자를 뒤적이던 직원은 척 봐도 묵직한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필름 여러 개를 맡긴 덕에 생각보다 무거운 짐이 생긴 듯했다.
직원은 건조한 음색으로 계산을 해 주고 내가 가게를 나서기도 전에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나는 벌써 멀찍이 앉은 직원에게 들릴 만큼 목에 힘을 주어 물었다.
“저기, 필름 한 통에 사진이 몇 장 정도 나와요?”
직원은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 쉬듯 대답했다.
“필름마다 다른데… 거기 필름 넣어 드렸으니까 세어 보시면 될 거에요.”
“아아, 네. 안녕히 계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사진관을 나서서 슬쩍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걸 직접 세 보라고? 지난주에 필름을 맡길 때 만났던, 오래된 필름의 인화 과정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던 직원이 갑작스레 그리웠다.
나는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확인했다. 굳이 빼돌릴 사진이 없기만을 바라면서.
제일 위쪽의 몇 개는 장윤성이 말한 대로 별장과 그 주변을 찍은 사진이었다. 신록이 우거진 화창한 날의 사진이었지만 어쩐지 황량해 보이는 그림이었다.
장윤성이 찍은 걸까? 재주가 넘치다 못해 사진 찍는 데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크기순으로 놓여 있는 돌, 하얗고 노란 꽃, 호수와 하늘이 보이는 풍경….
잘 찍는다, 하고 한 장씩 넘겨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었구나, 이곳에.
별장 내부를 찍은 것도 있었다. 볕이 드는 거실의 피아노, 소파, 벽시계, 그 다음엔 아무렇게나 셔터를 누른 듯이 구도도 초점도 없는 사진이 몇 장인가 이어졌다. 카메라가 작동하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다음엔 다시 바깥을 찍은 사진이었다. 실내에서 찍은 듯이 창틀 안에 푸른 잔디가 있었다. 이후의 사진은 이상하게 잘 찍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몇 장을 더 넘겨 보고 나서야 이쪽은 장윤성이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고, 심하게 기울어져 있고, 피사체가 다른 곳을 보는 사진들. 눈이 침침하고 손이 떨렸던 노인이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사랑하는 손자와, 은인의 손녀라 믿었던 누군가의 찬란한 한때를 기록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흔들려서 멀리 있는 인물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기껏 초점을 맞췄다 싶으면 뒷모습이었다. 그러다 깨끗하게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이 세 장 정도 있었는데, 우연히 찍힌 건지 곁에 있던 다른 사람이 도와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걸 제외하고 그나마 멀쩡하게 찍힌 건 카메라를 보며 웃는 것처럼 혀를 내민 풍작이 사진뿐이었다.
흐릿하게 기록된 나와 장윤성의 과거를 한참 넘기고 나자 그보다 더 오래전을 기록한 사진도 나왔다. 교복을 입은 장윤성, 앳된 모습의 장현성,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얼굴들.
흐릿하게라도 내가 나온 사진을 늘어놓고 고민을 했다. 전부 빼자니 티가 날 만큼 많은 숫자였다. 일단 내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 세 장의 사진과 그 필름을 찾아 뺐다. 한 줄의 필름에 같이 담겨 있는 사진도 찾아 뺐다. 장윤성이 쓸데없이 필름과 사진의 수를 맞춰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머지는 아니라고 우길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했다. 빼낸 사진과 필름을 우편 봉투에 담아 집으로 보낸 뒤, 건우에게 뜯어 보지 말고 챙겨 두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장윤성과 함께 사진을 찾으러 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장윤성이 바쁘다는 핑계 덕에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운 며칠이 지나갔다.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함께하고, 시시껄렁하게 잡담을 나누다가 가끔씩 신경전을 벌이고, 자기 전엔 친한 척 인사를 하는 그동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날.
아무런 일도 없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리해지는 건 이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편치 않은 마음으로 날짜가 바뀌는 걸 보고 있었다. 삑삑삑삑, 해가 완전히 져 캄캄해졌을 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나는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왔어?”
“응.”
신발을 벗고 들어선 장윤성은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이건 요 며칠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처음엔 뭐야, 하면서 밀어냈지만 “그냥, 반가워서”라는 말에 밀어낼 핑계도 잊고 말았다. 쪽쪽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가움의 포옹이라는데 굳이 피하는 것도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장윤성의 등에 팔을 두르고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나도 반가워, 하면서.
“아, 사진 볼래? 월요일에 찾아왔는데 깜빡했다.”
사실은 장윤성이 사진을 보고 할 예상 질문 몇 개에 만전을 기하느라 보여 주는 걸 미루었을 뿐이었다. 장윤성은 그런 내 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잠깐 웃었다.
“씻고 와서 볼게.”
어쨌든 보겠다는 소리였다. 방에서 사진을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소파에 엎드려 핸드폰을 열었다. 딱히 할 게 없어 이것저것 눌러만 보던 중에 화면 위에 성욱 형의 이름이 뜨며 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 어, 바쁘냐?
“제가 바쁠 일이 뭐 있어요. 형은 안 바빠요? 아, 바빠서 전화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흘끔 시간을 확인했다. 바쁠 시간은 거의 지나갈 무렵이었고, 설령 지금까지 바쁘다고 해도 여기서 출발해서 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의미 없는 전화였다.
- 아니, 한가하니까 걸었지.
“심심해서요? 종민이랑 정호는 뭐 하고?”
- 복 터진 이하경아, 지금 걔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네가.
성욱 형은 마치 정호가 하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인데요?”
- 기준이 여동생 말이야. 저번에 너 엄청 쳐다보던. 걔 그 뒤로 맨날 출석 도장 찍는다.
“…네?”
서혜진이?
- 우리도 너 때문인가 긴가민가했는데, 오늘은 물어보더라고. 너 언제 나오냐고. 이름도 막 두 번 세 번 물어보고.
성욱 형은 마치 내가 재벌가의 사위라도 될 것처럼 감탄하며 소식을 전했다. 아무래도 서혜진이 고작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걸 모르는 것 같았다.
“형, 그건 그래서가 아니라….”
막상 부정은 했는데 뭐라고 둘러댈 말이 또 없었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장윤성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방에서 나왔다.
“알았어요. 다음에 한 번 들릴게요. 나중에 통화해요.”
급히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게 티가 났는지 장윤성이 손짓을 멈추고 나를 빤히 봤다. 성욱 형은 오냐, 언제 오는지 말하면 내가 전해 주고, 하며 남 속도 모른 채 흥미로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누구야?”
“어, 사장님. 심심했나 봐.”
성욱 형이 사장님의 눈치를 보던 게 떠올라서 나는 장윤성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대답했다. 역시나 성욱 형이 과민했던 게 맞았던지 장윤성은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장윤성은 내 곁에 앉아 수건을 저쪽 소파에 던져 놓고 또 질문을 했다.
“많이 친한가 봐?”
“그런 편일걸?”
“거기서 얼마나 일했는데?”
“3년 좀 안 되게? 그 전에는 진짜 개떡 같은 곳에서 일했는데, 성욱 형이 거기 단골이었거든.”
장윤성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이블 위에 얹어 둔 사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 손길을 신경 쓰며 계속 말을 이었다.
“돈을 다른 곳보다 티끌만큼 더 준다고 사장이 유세가 대단했어. 나는 그 티끌 때문에 개 같은 것도 참고 다니던 중이었고. 우리 가게 정호 알아? 정호가 거기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였는데….”
정호라는 소리에 장윤성이 눈을 가볍게 흘겼다. 서기준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성욱 형이 가게를 새로 연다고 명함을 주더라고. 그래서 정호랑 같이 옮긴 거야. 오픈 때부터 같이 일했으니까 정호까지 셋이 꽤 친한 편이지.”
그사이에는 구질구질한 사연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다 자르고 짧게 말했다. 그에겐 푼돈일 액수에 목을 매며 살았다는 걸 자세하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장윤성은 이 이야기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무슨 말을 꺼낼 줄 알았건만 그는 입을 다물고 두꺼운 사진 뭉치를 꺼내들었다.
사진이 몇 장인지, 그게 필름 통의 개수와 맞는지, 혹은 모든 필름이 돌아왔는지까지 확인해 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른침이 꼴깍 소리를 내며 목으로 넘어갔다. 장윤성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나를 보더니 웃었다.
“기대되는데.”
웬만하면 모르는 척해 줄 법도 한데 꼭 티를 냈다.
처음 사진관에서 받았던 순서대로 정리해 두었던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별장과 그 주변 풍경 사진을 보며 장윤성은 이걸 찍었던 때가 기억난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올 때마다 별장에 들렀거든. 이젠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뭐라도 생각이 날까 싶어서 꼭 가곤 했어. 근데 막상 떠오르는 것도 없고 심심해서 카메라를 꺼냈던 거 같아. 찍을 걸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했어.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윤성은 잠깐 말을 멈추고 가만히 사진을 응시했다. 한 장, 한 장, 사진 몇 장을 또 넘기고 나서야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뒤론 잘 안 갔던 것 같아. 그게 언제더라. 어쨌든 꽤 됐어.”
그는 뒷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았는지 결국 이야기를 대충 매듭지었다. 그러고는 사진 뭉치의 두께를 가늠하듯 이리저리 보았다.
“이렇게 많이 찍었었나?”
나는 그걸 보면서 뒤쪽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은 것 같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사이 여러 장의 사진을 넘긴 장윤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도 금방 알아챘다.
“이쪽은 할아버지가 찍은 건가 봐.”
흔들려서 좀처럼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을 보며 장윤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정작 할아버지의 사진이 없어서 아쉬웠을 것이다.
천천히 사진을 넘기던 손길은 잔디 위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멈췄다. 얼굴이 보일 리 없는데도 장윤성은 그 사진을 뚫어지게 살폈다.
“이 사람이 네가 떠올린 그 사람인가 보다. 그치?”
지레 겁을 먹은 내가 손가락으로 ‘한지영’을 가리키자 장윤성은 흐음, 하고 뭔가를 궁리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더 넘겨 보라고 재촉하자 장윤성은 마지못해 사진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진이 몇 장 이어졌다.
“얼굴이 제대로 나온 건 없나 봐?”
뒷모습, 혹은 흔들려서 얼굴이 파악되지 않는 사진이 이어지자 그는 답답한 듯이 물었다. 나는 연습한 대로 아쉬운 척하며 대꾸했다.
“어, 나도 진짜 나랑 닮았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없더라.”
“그래? 네가 미리 빼놓은 건 아니고?”
오늘따라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내가 “어?” 하며 준비한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으려 하자 장윤성이 됐다는 듯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농담인데 뭘 그렇게 놀라? 정말 몇 장 뺐어?”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장윤성은 잘못한 게 없었다. 할 만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방금은 정말 뒤통수를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나는 주먹을 쥐는 대신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몇 장 빼긴 했거든. 건물이 잘 나온 거로. 내가 별장 사진 갖고 싶다고 했었잖아.”
장윤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만 대충 끄덕거렸다. 사진은 다시 넘어갔다. 한 장, 한 장 애틋하게 살필 줄 알았더니 그 이후는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뒤쪽의 훨씬 더 오래된 사진을 살피면서 장윤성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짧게 설명했다. 이쪽은 사촌형, 이쪽은 사촌동생, 이건 우리 형 어릴 때네, 하면서.
구경을 마친 장윤성은 사진들을 봉투에 집어넣는 대신 중간쯤에 있는 몇 장을 다시 넘겨보더니 그나마 뚜렷하게 나온 걸 하나 빼들었다.
아장아장 걷는 풍작이를 따라 걷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따라 걷는 장윤성이 나란히 나온 사진이었다. 머리카락 덕분에 코끝 정도나 간신히 나온 사진을 높이 들고 장윤성은 소파에 폭삭 기댄 채 빤히 올려다봤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살짝 벌어진 입술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했을까?”
스산한 바람이 정원을 스치던 날 내게 했던 고백도 잊은 것처럼 장윤성이 물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내가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 해도 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네가 했던 게 사랑이라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대답해도 장윤성이 기억을 찾으면 사실은 아니었다고 할 것만 같았다.
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자 장윤성이 궁금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이 사람이 나를….”
제 기억이 아니라 내 기억을 묻는 소리였다. 나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응” 혹은 “아니”라는 짧은 대답이면 충분했음에도, 그때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장윤성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다시 소리를 냈다.
“어떨 것 같아?”
이번엔 기필코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하경아, 하고 나직하게 이름까지 불러 왔다.
“나는… 모르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인 양 무심한 목소리가 잘도 나왔다. 장윤성은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만약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나는 뭘 찾고 있었던 걸까, 하고.
불 꺼진 방에 누워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밖에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손을 비추어 보며 그 말을 할 때 장윤성의 표정, 목소리를 떠올려보려 애썼다. 말끝에 꼬리처럼 따라 붙던 감정은 후회였을까. 한지영에게 마음을 줬던 걸 후회하는 걸까. 그럼 그 고백 또한 기억난 걸까. 생각은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틈엔가 잠에 들었다.
아득한 꿈에서 장윤성은 눈 덮인 산을, 풀 한 줌 없는 사막을, 컴컴한 동굴을 끊임없이 걸었다.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매번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서면서도 그는 묵묵히 발을 옮겼다.
나는 그의 긴 여행을 말 한마디 없이 지켜보았다. 동이 터 의식이 수면을 벗어날 때쯤 지난 번 별장에서 장윤성이 해 주었던 여행 이야기를 떠올랐다. 사람을 부리고 돈을 뿌리면서 얼마든지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장윤성을 그런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은 건, 지난 밤 내가 그에게서 본 상실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녁으로 먹을 피자를 주문해 두고 소파에 엎드려서 핸드폰 화면에 인터넷 창을 띄우던 참이었다. 짧은 진동과 함께 성욱 형이 보낸 메시지가 연달아 화면에 떴다.
「내일 가게 잠깐 나올 수 있냐?」
「아, 그리고 오늘도 걔 왔다. 기준이 동생. 지금 가게에 있어.」
매일까진 아니어도 최근 서혜진은 서기준보다 자주 가게에 들르고 있었다. 가게 일을 돕는 거야 별일 아니었지만 서혜진을 다시 만나는 건 껄끄러웠다. 괜히 가게를 그만뒀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마주치는 것도 곤란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또요? 집안 사정 때문에 당분간 쉰다고 해 주세요. 아예 안 나올 거라고.」
그렇게 답장을 하고 나는 다시 폰 화면에 인터넷 창을 띄웠다. 어제 실컷 찍어 둔 정장을 다시 보려다가 역시 아니다 싶어 지우고 다른 검색어를 넣었다.
20대 남성 지갑.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뭐가 적당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또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엔 지갑이야?”
피자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테이블 위에 맥주와 접시를 내려놓던 장윤성이 애쓴다는 듯이 물었다. 곧 건우 생일이라고 종일 선물을 검색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응. 정장은 졸업 선물로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지갑이나 괜찮은 걸로 사 줄까 하고. 근데 뭐가 괜찮은지 모르겠어.”
돈을 벌기 시작한 뒤 가족들의 생일 선물을 꼬박꼬박 챙기는 건 내 소소한 보람이자 낙이었다. 특별히 비싼 걸 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만한 형편도 못 됐고, 엄마나 건우는 그런 걸 받아 쓸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건우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더 이상은 생일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학생도 학생이라고 우겨서 몇 년간 간신히 선물을 떠안기고 있었지만 그것도 올해가 마지막인 셈이었다. 이왕 마지막이니 오래 쓸 만한 걸 해 주고 싶어서 내내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좀 봐 줄까.”
어제 내게 그런 사연을 들었기 때문인지 장윤성은 저도 성의를 보태겠다며 곁에 걸터앉았다. 대학 입학 선물로 형에게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를 받았다던 장윤성이 나나 건우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장현성 같은 남자에게도 핏줄에 대한 애착이 있나. 그들의 부친은 형제에 대한 애착은커녕 그들 몫까지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장윤성은 좁은 화면을 보기가 버거웠던지 내 등 위로 몸을 기대 왔다.
“무거워.”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앓는 소리를 냈더니 장윤성이 장난스럽게 힘을 더해 내 등을 짓눌렀다.
“거봐, 소파 좁다니까.”
마치 소파가 좁아서 날 깔아뭉갤 수밖에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네가 머리를 좀 쓰면 안 좁을 거 같은데.”
나는 고갯짓으로 비어 있는 옆쪽 소파와 머리맡 공간을 가리키며 툴툴거렸다. 그럼에도 장윤성은 내 등에 엎드리듯 몸을 붙여 오면서 뻔뻔하게 대꾸했다.
“충분히 유용하게 쓰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죠. 그래서 어떤 거 봐 뒀는데?”
바짝, 숨이 닿을 만큼 고개를 붙여 온 장윤성이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특별히 봐 둔 건 없는데 저번에 정호가 여기 거 괜찮다고 했거든.”
평생 브랜드니 뭐니 하는 것과 인연이 없이 살아 온 탓에 나는 그나마 들은 적 있는 이름의 지갑을 하나 짚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가게에 있다 보면 종종 명품이라는 것의 존재를 배우곤 했지만 그쪽은 애초에 내 소비 대상이 아니었다.
“디자인은 무난한데….”
작은 화면에 뜬 더욱 작은 이미지를 유심히 살핀 장윤성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운을 뗄 때였다. 짧게 진동이 울리더니 화면 위쪽에서 메시지 창이 내려왔다.
「네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연락처 남기고 가더라. 어쨌든 내일 올 수 있어?」
성욱 형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폰을 기울이는 사이 벨이 울렸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피자가, 아니 사람이 이렇게 반가운 것도 처음이었다. 장윤성은 인터폰 쪽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봤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서기준이나 서혜진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은 걸 확인하고 나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리고 장윤성이 피자를 들고 들어왔다. 피자 박스를 펼치는 걸 기웃거리며 보다가 바짝 마른 손을 깨닫고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손 씻고 올게.”
“잠깐, 하경아.”
“왜? 뭐 가져와?”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막상 피자 냄새를 맡았더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킬 게 있으면 얼른 시키라는 듯이 고개만 돌려 대꾸하자 장윤성이 턱짓으로 내 핸드폰을 가리켰다.
“손 씻기 전에 답장 보내야지.”
“어?”
마치 아이에게 일의 순서를 가르쳐 주는 어른처럼 장윤성은 다정한 목소리로 일렀다. 받아쓸 내용까지 친절하게.
“내일 데이트 있어서 못 간다고 해.”
하긴 내가 본 걸 똑같이 눈 두 개 달린 장윤성이 못 봤을 리 없지. 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은 못 갈 것 같…’까지 쓰다가 불만스럽게 말을 뱉었다.
“데이트? 나 내일 그런 거 할 예정 없는데.”
“있으니까 얼른 쓰기나 해.”
장윤성은 내 답안지를 감시하듯 재촉했다.
“없을 거 같은데.”
서혜진 때문에 껄끄러워서라도 내일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장윤성의 말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모양새라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으음…. 나는 영 납득 못 하겠다는 듯이 심란한 소리를 내면서도 어쨌든 못 가겠다고 답장을 써서 보냈다. 장윤성은 잘했다는 듯이 내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웃었다.
“내일 회사 끝날 시간에 맞춰서 나와. 건우 생일 선물 고르러 가자.”
머리를 그따위로 쓸 거면 풍작이나 주지. 하여간 거절할 수 없는 핑계를 만드는 덴 도가 튼 것 같았다. 혼자 고르는 것보다야 안목 있는 사람과 가는 게 낫긴 할 테니까. 피자를 먹으면서 장윤성은 이번엔 또 어떤 손님이 팔을 걸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몰라. 얼굴도 모르는 손님이야.’ 나는 성의 없이 대답하고 가장 큰 조각을 들어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깟 짜장 라면 두 번 끓여 준 게 그렇게 매일 바에 들러 만나려 할 정도로 대단한 인연이었나?
***
퇴근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지만 종일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시곗바늘 돌아가는 걸 보고만 있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차라리 사람 구경이나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평일이라도 저녁 시간이라 백화점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벽 없는 카페에 앉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사람 구경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마다 들고 가는 쇼핑백 속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지갑을 살 거라고 결정했으면서도 더 좋은 게 없을까 하는 괜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큰 지출을 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신중해지는 건 별수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깐 덧없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장윤성이나 그의 형만큼 부자였다면 건우에게 뭘 해 줬을까? 장현성이 장윤성에게 비싼 차를 사 줬다고 했으니까 나는 아마 집 정도는 사 줬겠지? 그렇게 결론까지 내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나는 혼자 웃었다.
“이하경 씨,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내가 혼자 히죽거리는 걸 봤는지 장윤성이 놀리듯 인사를 건넸다. 카페에 들어서면서 위치를 메시지로 보내 뒀더니 잘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 왔어?”
요 며칠 하도 바쁜 티를 내기에 늦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제 시간에 나타났다. 그래도 백화점 마감 시간까지 여유가 있는 건 아니라 나는 핸드폰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러는 동안 장윤성은 곁에 서서 내가 마시다 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못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을 툭 던졌다.
“지나가는 사람 보면서 웃지 마. 오해해.”
“누가 그런 걸 보고 오해를 해.”
“내가.”
“그쪽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장윤성은 샐쭉한 표정을 한 번 짓고 컵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하면서 장윤성은 내 예산과 동생의 취향을 물었다.
“건우는 깔끔한 거 좋아해. 옷도 화려한 색은 잘 안 입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그는 마치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목 좋은 백화점 VIP까지 모신 게 무색하게 쇼핑은 금방 끝이 났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처음 들렀던 매장에서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발견했는데 그 뒤로 몇 군데 더 둘러보아도 눈에 차는 물건이 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처음 본 게 제일 괜찮은 거 같아.”
“내 생각에도 그래.”
장윤성의 의견을 확인한 뒤에야 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넌 내가 고르는 것마다 괜찮다고 했잖아.”
“생각보다 이하경 씨 취향이 괜찮더라고.”
입에 발린 말은. 어차피 내가 고른 것 중엔 취향을 탈 만큼 개성 있는 디자인도 없었다. 처음 들렀던 매장으로 돌아가 포장을 부탁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장윤성은 손목시계를 흘끔 보더니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모처럼 나왔는데 다른 것도 좀 볼까.”
“그러지 뭐. 살 거 있어?”
“글쎄, 봐서.”
때마침 직원이 작은 쇼핑백을 들고 돌아와서 장윤성은 제가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그걸 받아들었다. 우리는 지갑을 하나 산 것 치고는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
“생일 파티는 둘이 해?”
“파티 같은 건 제 친구들이랑 밖에서 하겠지. 나랑은 그냥 케이크나 자르고 맛있는 거 먹는 게 다야.”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걷던 장윤성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나도 초대해 주면 케이크랑 맛있는 거 쏠 용의가 있는데.”
건우는 호들갑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이 변했든 간에 장윤성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소개해 준다면 아마 잘 지내겠지. 상상만으로 즐거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한 욕심이었다. 나는 장윤성의 팔을 당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냥 우리끼리 오붓하게 할게.”
“그래, 이번엔 그렇게 해.”
내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장윤성은 마치 내년엔 저를 초대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듯이 ‘이번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장윤성을 올려다봤다.
“내가 건 조건, 잊은 건 아니지?”
그러자 이번엔 장윤성이 내 어깨를 감싸며 걸음을 재촉했다.
“당연하지.”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증거라도 찾은 걸까? 내가 놓친 게 있었는지 곱씹어 봐도 쉽게 짚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사진까지 나온 이상 어딘가 또 뭐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태연한 척 걸으려고 해도 눈이 자꾸만 장윤성의 표정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아직 못 찾았으니까.”
나를 긴장시킬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장윤성은 친절하게 제 상황을 보고했다. 제가 떠 볼 때 마다 내 심장이 얼마나 펄떡이는지 알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없는 걸 무슨 수로 찾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장윤성은 또 뭐가 우스운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이하경 씨 방금 엄청 안심한 거 같았는데?”
“눈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봐.”
“그럴 리가. 아, 여기 들어가자.”
유치한 말씨름을 하던 중에 장윤성이 날 어느 매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손님이 등장하자 부지런한 직원이 마중 나와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아, 네, 안녕하세요.”
얼결에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꾸벅이자 장윤성은 그제야 내 어깨에 두른 팔을 풀었다. 보고 싶은 게 있었는지 장윤성은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위압감이 드는 매장 분위기에 나는 멀거니 서 있다가, 내가 움직이길 기다리는 직원이 곁에 서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장윤성의 뒤를 쫓았다.
옷을 볼 생각이었는지 장윤성은 행거 앞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은 나를 흘끔 보더니 행거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옷을 위아래로 훑어 본 장윤성은 아니나 다를까 하경아, 하고 나를 불렀다. 마지못해 다가가자 직원은 장윤성에게 선보이듯 내 앞에 옷을 대 보였다.
“미리 말하지만 나 옷 필요 없어.”
“네 옷 아냐. 우리 집 인테리어 소품이지.”
“근데 왜 나한테 대 보는데?”
내가 투덜거리는 동안에도 장윤성은 눈짓으로 다른 옷을 가리켰다. 직원은 우리 대화가 조금 우스웠는지 간신히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다른 옷을 내놓았다.
“너 내 옷장에서 옷 가져갔잖아. 필요해서 그런 거 아냐?”
“아니, 그건 집에서 막 입을 걸레 조각 같은 옷이 필요해서…. 내 방에 있는 건 다 새 옷이니까.”
내 방에 준비된 옷 중에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도 몇 벌 있었지만, 굳이 새 옷을 그렇게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좀 빌렸을 뿐이었다. 제일 저렴하고 잘 입지 않을 것 같은 걸로. 장윤성은 직원이 꺼낸 옷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제 네가 핫 소스 흘린 걸레 조각하고 똑같이 생겼네.”
그런 용도인 줄은 몰랐다는 투였다. 그제야 나는 그 옷을 유심히 봤다. 분명 어제 내가 피자를 먹다가 핫 소스를 흘렸던 그 옷이 맞았다. 대충 물티슈로 두어 번 문지르고서 입고 잤다가 오늘 아침 빨래 통에 던져 둔 거였다. 홈웨어로 막 입고 뒹굴 법한 그 셔츠 한 장을 직원은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패션의 세계란 실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분야였다.
“미안, 나 진짜 몰랐어.”
“사과하라는 거 아니야. 자주 입길래 마음에 든 건가 해서.”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편해서 입은 건데.”
그러고 보니 어쩐지 감촉이 남다르게 좋았다. 비싼 거라 그랬나.
“그럼 또 편하게 입어.”
그렇게 말하고 장윤성은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슬쩍 물러나 다른 직원에게 저 셔츠가 얼마쯤 하냐고 물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올 시즌 신상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긴 숫자를 읊었다.
나는 조금 아연해져서 매장을 휘휘 둘러보았다. 유리관 덮인 테이블에 전시된 작은 잡화조차도 내가 살 만한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뭐로 만들었기에 손수건 한 장이….
아직 직원과 대화 중인 장윤성을 한 번 보고 나는 유리 안쪽의 손수건을 한 번 더 봤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지금도 받기만 하는 중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태원그룹의 핏줄이래도 내가 너무 인색했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걸 선물한다 한들 장윤성에게 쓸모가 있기나 할까. 하긴 사람이 저쯤 관대하면 선물의 가치는 값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는 말을 위로처럼 건넬지도 몰랐다.
“뭘 그렇게 봐?”
“어?”
장윤성이 볼일을 끝냈는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손수건 필요해?”
내가 필요해서 보는 줄 알았는지 그렇게 묻기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씁쓸하게 물었다.
“너는 손수건도 이런 것만 쓰지?”
장윤성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쇼 케이스 안의 물건으로 향했다.
“이런 거? 손수건이 뭐 다른 게 있어?”
“가격 말이야, 가격.”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일러 주자 장윤성은 그제야 아, 하면서 싱겁게 웃었다.
“누가 그런 걸 생각하면 써.”
나는 저렇게 비싼 손수건을 쓰면 신경이 쓰일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아까 장윤성의 쇼핑을 돕던 직원이 양손에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나타났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장윤성은 또 능청을 떨었다.
“우리 집 인테리어 소품이라니까.”
지갑을 사고 나설 때처럼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나서자니 그림이 이상했다. 조선시대 머슴과 도련님도 아니고, 빈손으로 걷는 나와 주렁주렁 쇼핑백을 든 장윤성. 몇 개 이리 줘, 하고 손을 내밀었지만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냥 몇 걸음 더 걷다가 역시 아니다 싶어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런 거 들어 보고 싶었어.”
장윤성은 그제야 쇼핑백 두 개를 양보했다.
“그럼 내가 너한테 싸구려… 아니, 싸구려는 아닌데 네가 평소에 쓰는 것보다는 저렴한 거 선물하면 너 쓸 거야?”
선물하기 전에 이런 걸 묻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식상한 허락 한마디가 필요했다. 잠잠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으며 걷던 장윤성은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갑자기 선물은 왜?”
“그냥, 맨날 나만 받는 것 같아서.”
“나는 네가 날 돕고 있기 때문에 해 주는 건데?”
“알아. 근데 내가 하는 것보다 과하게 받은 것 같으니까.”
“거스름돈 같은 건가?”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조금 차가운 말투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그냥 고마우니까 작게나마….”
“그래,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하지 마.”
장윤성은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주는 건 필요 없다는 소리 같았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음에도 장윤성은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거 받아서 뭐 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발치로 향했다. 지금의 장윤성이 바라는 관계는 뭘까. 우습게도 난 그걸 들어줄 생각조차 없으면서, 그 관계가 과거의 장윤성이 바랐던 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망한 것 같았다. 적어도 7년 전의 장윤성이었다면 나를 이렇게 무안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나도 모르게 그 작은 선물에 벌써 마음을 담은 것까지 들키고 싶진 않았다. 실없이 꺼내 본 말인 양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돌릴 궁리를 했다. 하지만 장윤성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툭 던지면 그만일 만큼 작은 건 안 받을 거야. 내가 만약 네게 뭘 받는다면….”
뭘 받을 생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뭐 얼마나 큰 걸 바라는지 들어나 보자 싶어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장윤성이 말을 기다렸다. 이제 와서 나를 달라느니 하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면 등짝을 후려쳐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등짝을 맞은 건 내 쪽이었다.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내 등을 탁 쳤다.
“야, 이하경!”
하고 살가운 목소리를 내면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는 남자가 나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 너…!”
내 초, 중, 고 동창이자 오래된 친구 송민혁이었다. 지영이네가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우리 가족은 그 동네에서 꽤 오래 살았다. 가난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은 만큼 그 동네를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온통 가난한 동네라 다른 집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민혁이도 그런 집 아이 중 하나였다. 최근엔 사는 곳이 멀어져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오래 알아 온 만큼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할 게 없는 친구였다. 놈도 내가 적잖이 반가웠던지 연신 어깨를 툭툭 치며 진짜 오랜만이다, 하고 몇 번이나 감탄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곧 건우 생일이라 선물 사러.”
“건우 생일? 아, 그러네. 오래 안 챙기니까 건우 생일도 다 까먹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민혁이는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내 차림을 살피다가 손에 든 쇼핑백을 얼른 뒤로 감췄다. 창피한 일도 아닌데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게 영 어색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민혁이의 얼굴에 서린 웃음기가 천천히 옅어졌다. 나는 얼른 다시 말을 꺼냈다.
“너는? 집 여기서 멀지 않아? 웬일이야?”
“어, 나 여기서 일하잖아.”
보안 팀, 하면서 민혁이는 가슴에 달린 명찰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유니폼 차림에 귓가에도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민혁이는 다시 한 번 내 손에 들린 걸 살펴보더니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근데 뒤에 계신 분은….”
눈치를 보듯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장윤성이 살벌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식은땀이라도 날 것 같았다. 친구라고 했다가 저번처럼 아니라고 우기면 어떡하지. 그냥 가게 손님이라고 해 버릴까. 그렇게 잠깐 고민하는 사이 장윤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장윤성입니다. 하경이 친구예요.”
어디서 나이를 한 살 주워 왔는지 장윤성은 당당히 저를 내 친구라고 소개했다. 아는 동생이에요, 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어쨌든 통과 수준의 답안이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저는 송민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네, 네, 저도요.”
장윤성 만큼은 못 돼도 송민혁 역시 눈치가 꽤 좋은 편이었다. 아마 장윤성이 우리와 다른 부류라는 걸 은연중에 눈치챘을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땐 서기준만큼이나 넉살이 좋은 녀석이 답지 않게 조심스런 태도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장윤성과 짧게 대화를 나눈 송민혁은 손목시계를 보며 바쁜 척을 했다.
“하경아, 나 근무 중이라 가 봐야겠다. 다음에 한 번 애들이랑 보자.”
“어, 그래. 가 봐.”
“응. 잘 가. 친구 분도 안녕히 가세요.”
송민혁은 다시 한 번 장윤성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장윤성 역시 가볍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했다. 빠른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서 있다가 우리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웬일로 친구래? 저번엔 죽어도 아니라고 우기더니.”
“그땐 한 번 볼 사람이었으니까. 네가 다른 사람 앞에서 곤란해하는 건 싫어.”
묘하게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를 제일 곤란하게 하는 장본인이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라는 말을 덧붙인 걸 보면 스스로도 그걸 모르진 않는 모양이었다.
길이 보이는 대로 따라 걸으며 장윤성은 쇼핑백을 들고 남은 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딴에는 남들 눈에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스킨십을 하려 애쓴 것 같았지만 나는 그걸 툭 쳐 버렸다. 그렇게 오갈 곳 없어진 손을 마저 채우고 싶었는지 장윤성은 불만스럽게 다른 매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도 들어가 볼까?”
“너희 집은 너 혼자 채우면 안 될까? 난 내 배부터 채워야겠는데.”
장윤성이 제 돈으로 뭘 하든 상관없었지만 나는 슬슬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게다가 장윤성의 옷을 함께 고르는 거라면 모를까 내 옷을 사는 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내 방 옷장에도 입어 보지 않은 옷이 잔뜩 있었고, 거기에 몇 벌 추가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윤성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럴 만한 때라고 생각했던지 내 의견을 수긍했다.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배고프니까 아무거나 괜찮아.”
“초밥 좋아해?”
갈 만한 곳이 떠올랐는지 장윤성이 내 의견을 물어 왔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찾아 먹어 본 적은 없다. 제대로 먹으려면 비싼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생선도 고기나 달걀처럼 잘 익힌 편이 좋았다. 하지만 장윤성이 괜찮은 곳이 떠오른 얼굴을 했으므로, 굳이 초를 치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나온 힘겨운 대답에 장윤성이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닌 거 같은데. 싫으면 다른 데 가도 돼.”
“아냐. 가자.”
장윤성의 팔을 잡아끌며 나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까다로운 입맛의 도련님이 맛있게 먹는 걸 얼른 보고 싶기도 했다.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해 도착한 곳은 벌써 세 번째 와 보는 그 호텔이었다. 일식당은 처음인 셈이었지만.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카운터 석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슬쩍 말을 꺼냈다.
“이 호텔 되게 좋아하나 봐. 지난번에도 여기였지? 깁스 풀고 왔을 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나는 장윤성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보냈던 밤을 기억할까 봐. 장윤성은 내내 그랬듯이 가벼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좋아하기도 하고, 이왕이면, 이기도 하고.”
“이왕이면?”
“사돈댁 사업이니까.”
“어?”
그 순간 나는 분명 눈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장윤성의 시선은 카운터 너머의 조리대를 살피는 중이었다. 사돈? 사촌의 사돈까지 챙기는 게 아니라면 장윤성에게 사돈댁이라고 할 만한 곳은 이은조의 친정밖에 없었다. 굳이 사돈댁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직접적으로 이은조가 관여하지는 않는 걸까.
내가 “사돈댁?” 하고 다시 묻자 장윤성은 별거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형수네 작은 형님이 맡고 있을걸.”
그러면서 장윤성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이 덧붙였다.
“내가 누구랑 여길 왔는지까지 참견하진 않으니까 걱정 마.”
“누가 그런 걱정을 했다고.”
“그럼 왜 놀라셨을까.”
“그냥. 역시 끼리끼리구나 싶어서 그런 거지.”
둘러대려고 한 말이었지만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태원그룹의 아들 하나를 가지려면 이런 호텔쯤은 자식한테 맡기는 집안에서 태어나야 하는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뭘 가진 집안의 사람을 만나게 될까. 나는 괜히 주변을 흘금거리면서 감탄하는 척을 했다. 장윤성은 잠깐 불만스럽게 날 흘겨봤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짧은 잡담이 오가는 동안 우리 앞에는 금방 음식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하는 식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모든 음식이 입에 맞았던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그랬다. 사실 두어 가지는 삼키기 조금 거북했지만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그래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옆에 앉은 입 까다로운 도련님이 모처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러고 있을 즈음 디저트를 딱 두 번 떠먹고 스푼을 내려놓은 장윤성이 뭔가를 세듯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운을 뗐다.
“쇼핑했고, 밥 먹었으니까, 다음은 술?”
새삼 우리가 데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강조하는 것 같았다. 문득 7년 전의 앳된 장윤성이 나를 바에 데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을 꼬시는 일종의 레퍼토리였을까. 이곳에 데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게. 그럼 그다음은…? 나는 턱을 괴고 조금 비웃듯이 물었다.
“여기서 너랑 그 코스를 경험한 사람이 몇 명쯤 돼?”
장윤성은 민망해하거나 억울해하는 기색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질투해 주려고 묻는 거면 좀 세게 불러 보고.”
“아니면?”
“네가 처음이라고 해야지.”
당연한 걸 뭘 묻느냐는 듯이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퍽이나 처음이겠다. 기억이 거기까지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윤성은 7년 전에도…. 아니, 순진하게 7년 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사이에도 몇 번은 이런 식으로 여길 왔을 것이다.
“처음 아닌 것 같은데….”
“능숙해 보여?”
“응.”
“그건 그거대로 내 자존심에 다행이네.”
방금까지 사람을 낚으려다 실패한 사람치고는 긍정적인 말투였다. 제 얕은 수작이 들켰다는데 이 상황의 뭐가 그 알량한 자존심에 다행인 일이라는 걸까.
내가 설명을 기다린다는 듯이 가만히 보고 있자, 지금까지 실컷 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던 장윤성이 조심스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지금 엄청 초조하거든.”
“뭐?”
다시 조금 물러난 장윤성은 전혀 초조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하경 씨가 재미없으니까 집에 가자고 할까 봐.”
그러고 보니까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장윤성이 이 시간을 얼마나 즐겁게 느끼고 있었는지. 몇 명과 여기서 데이트를 했는지는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계속 보내고 싶어 꺼낸 말이었을 텐데 속 좁은 내가 괜히 그를 꼬아 본 것뿐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근데 그렇게 말하면 다행이고 뭐고 소용없잖아.”
기껏 챙긴 자존심을 왜 버리느냐는 물음에 욕심 없는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존심보단 네가 알아주는 게 더 좋아서.”
그럴 생각도 없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집에 가자는 소리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갈 거지?”
제 속을 보여 주는 것까지 계획에 포함된 거였을까. 내가 잠시간 혼란을 느끼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 앞까지 와 있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한 잔만 할 거야.”
호텔과 술이라는 조합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묘한 분위기도 부담스러웠지만, 내겐 이곳에서 술을 마신 다음 날 겪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좋을 대로 해.”
장윤성은 순순하고 나는 고집을 부리는데 왜 내가 말리는 것 같지. 동그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우리는 약속했던 대로 칵테일을 한 잔씩 주문했다. 가게에서 본 적 없는 낯선 메뉴가 있기에 일의 연장으로 맛을 봤는데 꽤 맛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거 맛있다. 가게에선 먹어 본 적 없는 건데….”
“아, 그거랑 이게 여기 바텐더 오리지널 칵테일이야.”
장윤성은 아직 펼쳐 둔 메뉴판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럼 그것도 먹어 볼… 까.”
말을 뱉고 잠깐 망설이는 사이 장윤성은 얼른 직원을 불러 추가 주문을 했다. 묘하게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지만 칵테일 몇 잔쯤이야 장윤성이나 내겐 뇌에 연락도 가지 않을 정도라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맞다, 아까 나한테 뭘 받고 싶다고 했지?”
두 번째 칵테일과 함께 나온 청포도와 치즈를 연달아 콕콕 찍으며 마치지 못한 대화를 다시 꺼냈다. 장윤성은 의자에 기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언젠가 성욱 형이 보던 잡지에서 저런 느낌의 화보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슬쩍 꼰 다리가 필요 이상 길어서 더럽게 부럽다는 생각을 할 쯤 장윤성이 겨우 말을 꺼냈다.
“말하면 줄 생각은 있고?”
“내가 줄 수 있는 거야?”
“응.”
청포도와 치즈를 씹으며 나는 궁리하듯 눈을 굴렸다. 뭐를 바라기에 저렇게 확정적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고 하지. 줄 수 있는 거라면 주고 싶었다. 많이 받았으니까 다소 부담되는 거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를 해 주겠노라고 장담을 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장윤성이 다시 운을 뗐다.
“근데 하경아.”
“응?”
“나는 받을 거면 전부 받을 거야. 네가 선심 쓰듯 손톱만큼 떼어 주고 간 걸로 평생 전전긍긍 살고 싶진 않아. 네가 내게 준 게 눈에 밟혀서 떠날 수 없을 만큼 크게, 아니 전부 받아야겠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드물게 날이 선 목소리로 긴 말을 한 장윤성이 조금 심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내 입으로 달라고 하기 전에 네가 먼저 줬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하면 어때? 네가 그걸 알아내서 내게 주면, 나도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내 소원? 내 소원이라고 해 봐야 입 밖으로 꺼내기도 부끄러울 만큼 하잘것없는 것뿐이었다. 그런 소원을 위해 뭔가를 전부 줘야 한다니 영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였다.
“관둬. 안 주면 나만 편하지.”
나는 집어치우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의자에 기댔다. 장윤성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골려 먹는 걸 좋아했다. 좀 쉽게 가르쳐 주면 어디 덧나나. 말은 그렇게 뱉어 놓고서도 나는 벌써 궁금해 타는 속에 연신 칵테일을 부어 댔다. 두 번째 잔은 첫 번째 잔보다 금방 비었다. 나는 아쉬운 손길로 빈 잔을 문지르며 말했다.
“뭐 좀 더 시켜 봐.”
“더 마시게? 한 잔만 한다며.”
장윤성은 그제야 만류하는 척을 했다.
“이미 두 잔 마셨잖아. 모 아니면 도지.”
나는 되는 대로 내뱉으며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주문을 했다. 우리는 원래 그러기로 했던 것처럼 병째로 주문한 술을 비우기 시작했다. 경쟁하듯 잔을 비워 내고는 있었지만 장윤성을 술로 이겨 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가 취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질없는 환상을 손에 쥔 것 같은 이 시간이. 그런 건 대개 후유증이 길기 마련이었으니까.
“근데….”
나는 정신보다 몸이 먼저 취하곤 했다. 건우는 매번 그게 착각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무거워진 고개를 들고 내 귀에도 이상하게 들리는 발음으로 운을 떼자 물만 마신 듯한 얼굴의 장윤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너느은, 취하지도 않으면서… 술을 왜 마셔?”
장윤성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안 취해도 너는 취하잖아.”
“아닌… 데.”
술에 취하면 머리가 무거워지긴 하지만 정신은 멀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너무 무거워진 머리가 테이블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다행히 내 몸뚱이가 기우는 것보다 장윤성의 손이 빨랐던 모양이었다.
“아니긴. 이미 취했는데. 졸리면 여기서 잘래?”
장윤성은 내 몸에 팔을 감은 채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간다는 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니 고개가 더 무거워져 나는 장윤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장윤성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코끝을 스치던, 한번쯤 붙들어 보고 싶던 좋은 향기가 났다.
장윤성은 내가 고개를 저은 걸 보지 못했는지 다시 “응?” 하고 물어 왔다.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며 혓바닥을 놀리는 게 꽤 힘든 일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여기서 자고 가는 건 싫었으므로 나는 겨우 쥐어짜듯 소리를 냈다.
“싫어. 여기서 자고 가면 네가….”
또 화를 낼 것 같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면 장윤성은 화를 낼까, 아니면 괜찮다고 할까. 나는 장윤성이 화를 내길 바라고 있다. 장윤성이 모든 걸 끝내 주면 이 어리석은 욕심도 사그라질 것만 같아서.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결국 숨처럼 흩어진 소리는 너무나 희미해서 내 귀에도 닿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다행인 걸 보면 나는 역시 취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
꿈자리가 사나웠던 탓에 눈을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앞이 분간되지도 않을 만큼 살짝 눈을 떴더니 어슴푸레한 빛이 시야로 새어 들었다.
몇 시지. 눈꺼풀을 마저 들어 시계를 볼까 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시곗바늘이 어디에 있든 아직 침대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한 걸 보면 아직 이른 시간일 게 틀림없었다.
기온이 부쩍 올라가는 시기였음에도 아직 새벽녘엔 쌀쌀했다. 이불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다가 결국 실패하고 온기를 찾아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 이마에 닿은, 침구라고 하기엔 단단한 무언가의 정체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저절로 몸을 감싸 왔다. 원하던 바였지만 어쩐지 의식은 점점 몽롱한 잠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망설이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누군가의 품이었다. 누군지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굳이 고개를 든 건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잠잠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예쁜 갈색 눈동자와 곱게 생긴 얼굴이 눈에 달았다. 이런 상황의 첫 감상이 이따위인 걸 보면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 낯익은 실내. 어느 모로 보나 이곳은 내 방이었다. 종종 잠든 나를 침대까지 데려다준 적은 있었지만 장윤성이 곁에 누웠던 적이 있던가. 적어도 별장이 아닌 이곳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하게 받을 법한 질문에 장윤성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싸움이라도 하려는지 나를 빤히 보며 침묵을 지키던 장윤성은 결국 조금 늦다 싶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난다는 사람 기다렸지.”
영문 모를 소리였다. 조금만 자? 기다려? 장윤성은 어쩐지 자조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좋은 거 가르쳐 준다며.”
좋은 거? 어렴풋이 머리맡을 맴돌던 졸음이 아예 달아났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장윤성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술이 덜 깼거나 농담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장윤성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궁금해서 잠도 안 오더라고.”
묘하게 까칠해 보이는 얼굴은 잠을 못 잔 탓인가. 하지만 궁금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지는 말한 사람이 더 잘 알지 않겠어?”
“내가 그런 소릴 했다고?”
장윤성은 잘 생각해 보라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속까지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라도 해 줄까.’
어렴풋하게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이, 설마. 나는 미간을 좁히고 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드물게 많이 마시긴 했지만 정신을 완전히 놓은 것도 아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호텔에서 자지 않겠다고 버텼고, 장윤성도 순순히 운전을 해 줄 사람을 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뒷좌석에서 안도감과 함께 잠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기억은 그뿐이었다.
“정말?”
재차 묻는 말에 장윤성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귀찮다는 듯이 빤한 시선으로 답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은 어느새 목덜미까지 내려와 맨살에 닿았다. 나는 그 손을 툭 쳐 내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억이 안 나는데. 필름이 끊겼나 봐.”
퍽이나 그렇겠다는 듯이 장윤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제 많이 마시긴 했잖아.”
변명하듯 덧붙인 말이 오히려 궁색했는지 결국 장윤성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이하경 거짓말 참 잘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장윤성에게 듣기엔 과분한 칭찬이었다. 매번 속아 주는 척만 할 뿐 제대로 속은 적도 없으면서.
“거짓말 아니니까 그렇지. 나 씻는다. 너도 씻어.”
다행히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몸에 엉킨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정작 장윤성은 아직 내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개만 움직여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뭐 해, 출근 준비 하라니까.”
천연덕스럽게 재촉하고는 욕실로 몸을 돌리던 때였다.
“하경아.”
못 들은 척하고 싶은데 소리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몸이 멈칫했다.
“솔직해질 땐 얼마나 서투르게 말하는지 모르지, 너.”
이번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돌아보자 장윤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같이 씻을래?”
“꺼져.”
일부러 길게 씻을 요량으로 아침부터 욕조에 물을 받았다. 장윤성이 확신한 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어젯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몽롱한 꿈을 꿨었다. 장윤성에게 키스를 조르는 꿈이었다.
어둠속을 헤매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장윤성이 있었다. 아마 장윤성이 날 침대에 눕히던 때였을 것이다. 주변이 어두웠음에도 그 얼굴이 너무나 선명해서 틀림없이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넘칠 때까지 눈에 담고 다 닳아서 사라질 때까지 만져도 될 거라고.
홀린 듯이 손을 들어 그 얼굴에 댔다. 가지런한 눈썹, 긴 선을 그리는 눈매, 매끈한 볼과 부드러운 입술. 속으로 예쁘다는 소리를 삼킬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그러다 마음도 새어 나가고야 말았는지 장윤성이 칭찬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굿 나이트 키스라도 해 줄까.’
마치 혀로 사탕이라도 건네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도 장윤성이 보지 못했을까 풀린 혀로 “그래.” 하고 소리도 냈다. 굿 나이트 키스의 의미조차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했으면서도, 장윤성과의 키스가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입술까지 슬며시 벌리고 기다렸는데 어쩐 일인지 쪽, 하는 소리가 먼저 귓가를 울렸다. 잠깐 이마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았던 것도 같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다가 못내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울컥 올라오는 불만을 혓바닥에 차곡차곡 쌓는 동안, 장윤성은 제 할 일을 끝낸 양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잘 자.” 하는 인사까지 마치고는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다급히 손을 뻗어 장윤성의 멱살을 움켜쥐고 잔뜩 꼬부라진 발음으로 소리를 뱉었다.
‘야.’
‘왜.’
장윤성은 그런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이 반쯤, 아니 거의 나간 지난밤의 나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키스라며. 뽀뽀 아니고 키스라며.’
‘방금 해 줬잖아. 굿 나이트 키스.’
‘아니야, 그거. 틀렸으니까 다시 해.’
‘어떻게 틀렸는데?’
장윤성은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말로 조곤조곤 답할 정신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헛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물우물 말을 고르다가 결국 장윤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입술부터 댔다. 답지 않게 뻣뻣하게 버티던 장윤성은 짧게 내 입술을 맛보듯 스치고 물러났다.
‘어쩌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장윤성이 나직이 유감을 표했다. 대답을 한답시고 소리를 냈지만 “으응…?” 하고 잠꼬대 같은 소리만 튀어나왔다. 닿지 않으려는 듯이 버티던 장윤성이 결국 내 등 뒤로 팔을 둘렀다.
‘내가 지금 취한 사람 사정까지 봐줘 가면서 키스만 하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장윤성이 뭐라고 제 사정을 길게 설명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급해 얼굴을 더 바짝 맞대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장윤성은 이번에도 감질나게 조금 어울려 주다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럼 그다음도 해. 그깟 키스 한 번 하는 거 뭐 어렵다고 되게 재네. 하면 되잖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이자 이번엔 장윤성이 이마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왔다.
‘이하경 씨,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는 알아?’
‘알아, 알아.’
그쯤엔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머리가 무겁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는 다시 어둠속을 헤맬 것 같아 초조했다. 단순한 주사였는지 오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엔 온통 의식을 잃기 전에 굿 나이트 키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다고 답했음에도 장윤성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 좋은 것도 많이 알아.’
그래서 아무렇게나 뱉은 소리였을 것이다.
‘…좋은 거? 그런 걸 누구한테 배웠는데?’
장윤성은 제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글쎄, 어디서 배웠더라. 아무리 미간을 좁히고 고민을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결국 다시 매달리듯 팔을 두르며 막무가내로 재촉을 했다.
‘너도 가르쳐 줄 테니까, 얼른….’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장윤성도 거부하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몰캉한 살덩이가 맞닿았다. 그저 그뿐인 행위인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를 노릇이었다. 팔에 힘을 주어 장윤성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고작 혀가 닿는 기분이 이런데 몸이 닿으면 어떨까 해서.
만족감이 온기처럼 몸에 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이 몰려왔다. 천천히 팔에 힘을 풀며 슬며시 떨어져 나오자 청개구리 같은 놈이 쫓아와 다시 한 번 입술을 쪽, 하고 댔다가 뗐다. 청개구리라도 이쯤 잘생겼으면 뭐든 한번 해 볼 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또 웃음을 흘렸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자꾸만 깜빡깜빡 어둠이 내렸다. 따듯한 손이 내 볼을 감싸 왔다.
‘자려고? 키스 다음도 한다며.’
따지는 게 아니라 놀리는 소리였다.
‘응… 할 거야….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좋은 거….’
감긴 눈이 떠지질 않았다. 따듯한 손에 볼을 부비며 중얼거렸더니 장윤성이 다시 한 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럼 나 여기서 기다린다?’
‘응, 응… 그래….’
아득하게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몇 번인가 짧은 키스를 받았다.
찬찬히 곱씹어 보니 이런 호화로운 집 욕조에 빠져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것 같았다. 아무리 술에 취해 벌인 일이라도 저런 밤을 기억한다고 말할 순 없었다.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장윤성의 말대로 나는 거짓말을 잘하니까 3개월쯤은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만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래 걸렸네.”
자책의 시간이 길었던지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왔을 쯤 장윤성은 이미 출근 준비를 거의 마친 모습이었다.
“식탁에 아침 차려 놨으니까 먹어.”
“너는?”
“출근해야지.”
확실히 여유를 부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출근을 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목에 매려던 넥타이를 도로 풀었다.
“난 아침 수업도 괜찮을 것 같은데.”
술김에 가르쳐 준다고 했던 ‘좋은 거’에 관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괜찮아, 내가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장윤성은 내가 한 말을 다시 읊기라도 하려는 듯이 “네가 어제 뭐라고 했냐면…” 하고 운을 띄웠다. 나는 잽싸게 그 입을 틀어막고 짜증을 냈다.
“미친 거 아냐? 술 취한 사람이 헛소리 좀 한 거 가지고 거기서 밤을 새워?”
입은 다물었지만 장윤성은 눈빛만으로도 정확하게 의사를 전했다. 거 봐, 다 기억하면서, 하고. 가볍게 눈을 굴린 장윤성이 제 입을 틀어막은 내 손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말이야. 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술을 그렇게 마셨으면 실수 좀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
“어, 실수. 나 원래 취하면 아무한테나 그….”
“아무한테나?”
방금 한 말이 무척이나 거슬린다는 듯이 장윤성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아, 이거야말로 실수였다.
장윤성은 내가 말을 얼버무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당황해서 막 던지는 거야, 아니면 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침부터 미친놈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냐?”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장윤성이 들고 있던 넥타이를 뺏어 쥐었다. 얼른 출근을 시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마음은 조급한데 막상 손은 허둥대다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떻게 하는 거더라? 내 목에 맬 일도 없었던 걸 남의 목에 매려니 영 수월치가 않았다.
대충 해 두면 제가 알아서 다시 매겠지 싶어 엉성하게 묶던 중이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장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 봐, 하경아. 좋은 걸 누구한테 배웠는데? 정말 좋았어?”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더라니 그게 못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짧은 말 한마디면 장윤성의 기분이 좋아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티끌만큼 남은 마지막 경계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지.”
대충 매듭을 마무리하고 소파에 걸쳐 놓은 재킷을 들어 건넸다.
“얼른 가.”
장윤성은 부쩍 차가워진 표정으로 재킷을 걸치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웅이라도 살갑게 해 주려 뒤를 쫓았지만 장윤성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도 없이 현관을 나섰다.
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네.
“야, 인사도 안 하고 가냐? 그게 뭐 화낼 일이라고.”
하여간 그 호텔에서 술을 마시면 뒤끝이 안 좋다니까.
나는 괜히 억울한 마음에 닫히는 문 사이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날렸다. 꼭 장윤성의 다리에 명중하라고 날린 건 아니었지만. 제 다리에 맞은 물건을 잠깐 내려다본 장윤성이 닫히는 문을 잡고 다시 현관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딱 한 대 칠 기세라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팔을 붙들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신경을 안 쓰려는 게 아니라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결국 화를 내지는 않고 천천히 입술을 겹쳐 왔다. 이해가 되지 않는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깊어지는 키스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엉겁결에 장윤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몸이 훌쩍 들리더니 등에 벽이 닿았다. 몸이 갑자기 들린 탓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장윤성이 짧게 말을 이었다.
“몇 놈이나 돼?”
“뭐가?”
“네가 그렇게 키스를 조른 상대가.”
원래 이렇게 질투가 심한 성격이었던가. 하긴, 원래라는 말을 쓰는 것도 우스웠다. 장윤성에게 낯선 부분은 그 외에도 많았고, 어떤 변화라도 충분히 납득될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까.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장윤성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오래 세야 할 정도야?”
잠깐 어느 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을 뿐인데 그새 또 뭔가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반박하려 입을 열려 했는데 제가 묻고도 답은 듣고 싶지 않았던지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억울했다.
저는 나 닮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했다던가. 안타깝게도 나는 장윤성을 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눈을 굴려 가며 세어 볼 것도 없었다.
순정이나 의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재회를 기대하는 사람이나 지키는 거니까. 그저 내가 간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그런 애정을 받고 나니 장윤성보다 더 잘나고, 더 날 사랑해 줄 사람이 아니면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대를 탓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네가 조금만 덜 좋은 사람이었으면 나도 마음껏 다른 사람을 만나며 살았을 텐데, 하고.
하지만 그런 마음마저 끌어안은 남자의 온기에 금세 녹아 버리고 나는 밀어낼 이유도 찾지 못한 채 혀를 얽고 질투를 받아 삼켰다. 체온이 오르는지 살갗이 화끈거릴 즈음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야, 잠….”
손길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괜히 조마조마해졌다. 여장을 들킬까 걱정했던 것처럼 내가 숨기고 있는 게 그 손에 닿을까 봐.
하지만 장윤성은 잠깐, 하고 말을 하려는 순간마저 제 혀를 밀어 넣을 기회인 양 굴었다. 초조하게 그러쥔 손에 옷깃만 휘감겼다. 부쩍 격해진 키스에 숨이 부족해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볼과 목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입술을 대기 시작했다.
“잠… 야, 잠깐만…!”
고개가 목덜미로 옮겨 간 틈을 타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옆구리를 더듬던 손이 아랫도리 안쪽까지 순식간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생경한 감각에 얼른 몸을 낮췄지만 그마저도 저지하려는 듯이 장윤성이 내 다리 사이로 무릎을 세웠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놈의 등을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옷을 당겨 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의 살을 쪽쪽 빠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기어이 이까지 세워 물어뜯었다. 목 다음에는 어깨를, 어깨 다음에는 그 아래 있는 뼈 주위를. 몸을 뒤틀고 발버둥을 치는 정도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장윤성의 손이, 입술이 닿는 곳마다 시뻘겋게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발로 차는 것보다는 덜 다치겠지 싶어 손에 잡히는 대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더니 그제야 장윤성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내 엉덩이를 쥐고 남은 손으로 슬쩍 셔츠를 올리면서,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나 지금 맨정신이거든?”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는지 시큰둥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집에 술 많아.”
“술로 목욕을 시켜 줘도 할 생각 없다고.”
방금까지 남의 몸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리던 사람답지 않게 잠잠해진 시선이 몸을 훑고 내려갔다. 슬리퍼 한 짝은 화를 자초하느라, 나머지 한 짝은 발버둥 치다 날려먹은 탓에 시리게 드러난 맨발에 시선이 멈췄다.
짧게 한숨을 쉬나 했던 장윤성은 다시 나를 들어 러그 위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럽게 긴장이 풀린 탓인지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장윤성은 내가 아프지 않게,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도록 천천히 팔을 풀었다. 내가 바닥을 짚고 앉는 걸 확인하고는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슬리퍼 두 짝을 찾아 돌아왔다.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발바닥을 털어 주던 장윤성이 또 영문 모를 소릴 했다. 소리를 낼 기운도 없어 나는 눈짓으로만 되물었다.
“누가 너랑 스치기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 말을 그렇게 침착하게 말하면 누가 믿냐?
고운 손이 몇 번 스치고 간 발에는 얌전히 슬리퍼가 돌아왔다. 그러고도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장윤성은 내 발목과 뒤꿈치를 만지작거리며 발이 차갑다고 웃었다. 제 온기를 나눠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장윤성의 손은 추운 날에도 따듯한 편이었다. 내가 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장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겨울이 되면 조금은 더 나를 좋아하게 될까.”
잊고 있었던 오래된 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그랬듯이 우리는 이번 겨울도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다리를 툭툭 털어 따듯한 손을 뿌리쳤다.
“얌전히 집에 있을 테니까 빨리 가. 괜히 늦지 말고.”
“지키지도 않을 거면서, 말은.”
빈말인 걸 눈치챘으면서도 장윤성은 웃으며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 씁쓸한 목소리에 나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아냐, 지킬게.”
하루쯤 얌전히 집에 있는 게 뭐가 어렵다고. 까짓 거 선심 한번 쓰지 뭐. 그런 생각으로 뱉은 말에 장윤성은 기특하다는 듯이 날 한 번 보고 다시 몸을 굽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대할게. 저녁에 봐.”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더니 장윤성은 조금 뜸을 들이다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야, 너….”
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보다 겨우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뒤통수는 쑥대밭에 옷 꼴이 저런데 설마 그냥 출근하진 않겠지. 가만히 앉아 남 걱정을 하다 저 알아서 하겠지 싶어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등에 닿는 바닥이 차가워 헛웃음이 났다. 방금 나간 남자의 따듯한 손이 생각나서.
***
오전 나절을 잠으로 보내고 볕이 따사롭게 내리쬘 즈음 눈을 떴다. 시간을 때운다는 핑계로 낮잠을 선택했지만 장윤성의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조금 더 잘까 하다가 밤에 못 잘 것 같아 세수나 할 생각으로 욕실로 향했다. 씻고 장윤성이 차려 놓은 밥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셔야지. 그런 것도 계획이랍시고 순서를 정해 두고 세수를 하다 보니 머리카락이 부쩍 걸리적거렸다.
자를 때가 됐나. 거울에 이리저리 머리카락을 비쳐 보다가 셔츠 안쪽으로 흘깃 보이는 불긋한 흔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워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 묻은 손으로 그걸 몇 번이고 문지르다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손을 멈췄다.
어쩌지, 모레에는 집에 가야 하는데. 그 전에는 없어지려나. 그나마 훤히 보이는 곳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미용실에 들러도 될 테니까. 물이 묻어 축축한 머리카락을 끝을 매만지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거울 속의 한심한 얼굴을 쳐다봤다.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고 몸에는 장윤성이 입술로 새긴 멍울을 단 채 태평하게 머리를 다듬을 생각이나 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반성하는 데 써야 할 것 같았다. 갈 곳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계획대로 장윤성이 차려 놓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 뒤 식탁을 정리하고 커피를 한잔 들고 나왔을 때였다. 거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약속대로 집을 잘 지키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까지 걸었나. 익숙한 석 자를 기대하며 확인한 화면에는 이름 없이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별로 화려한 인생을 산 것 같진 않은데 뇌리를 스치는 얼굴이 몇이나 됐다.
“여보세요.”
내가 떠올린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중 하나라도 어차피 받아야 할 형편이긴 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서라도 끌고 갈 사람들이었으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상대는 내가 다시 한 번 “여보세요?”라고 한 뒤에야 목소리를 냈다.
- 나 이은조예요. 기억하죠? 윤성이 형수.
전화를 받기 전에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상대는 말을 이었다.
- 사람을 보냈어요. 지금 만났으면 하는데.
기억과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였다. 자리를 피할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사람을 보냈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꿈에서 깰 시간을 알리는 알람 같았다.
***
들키지 않기를 바랐던 것뿐이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 건 아니었다. 장윤성을 속이면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굴기도 어려웠으니까. 종종 집안일을 봐 주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 장윤성에게 동거인이 있다는 것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다 큰 가족과 잠시 생활을 공유하는 이의 정체를.
하긴, 쉽게 ‘잠시’라고 생각할 만큼 장윤성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 가족의 호기심을 사기엔 충분한 존재였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이은조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와 장윤성의 관계를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으니까. 사람을 쉽게 만날 줄 모르는 시동생의 상대가 궁금했을 것이다.
이은조가 보낸 남자는 넓은 정원이 있는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돌아갈 때도 차를 태워 줄 생각이 아니라면 꽤나 불친절한 위치였다.
남자는 나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지은 죄가 있어 크게 심호흡까지 했건만 이은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방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빈 잔에 물을 채워 주며 자신의 상사가 곧 도착할 거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의미 없이 좁은 공간의 이곳저곳을 눈에 담고 있는 동안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화면 가운데에 반가운 이름이 떴다.
“어….”
나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는지 입술이 덜덜 떨렸다. 여보세요, 라는 말조차 쥐어짜기 힘들어 겨우 낸 소리가 고작 그거였다.
- 궁금해서. 어디야?
조금만 더 빨리 전화를 했다면 몇 시간이나마 더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입이 바싹바싹 말라서 남자가 따라 주고 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니 바짝 말라붙었던 목소리가 겨우겨우 흘러나왔다.
“밖에 나왔어.”
- 밖에? 집에 있는다더니.
섭섭한 기색이긴 했지만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지 화를 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 하필, 오늘?
“그러게.”
생각해 보니 정말 ‘하필’이었다. 모처럼 내가 장윤성의 부탁을 들어주고 생색을 낼 수 있는 날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랑 내가 인연은 아닌가 봐.”
곱씹어 보니 이 상황이 우스워서 농담처럼 뱉은 말이었는데 그렇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무는 동안에도 장윤성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주 긴 찰나였다. 장윤성이 대꾸할 말을 떠올렸는지 뭐라 소리를 내려던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다급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 나 전화 끊어야 할 것 같아. 끊을게.”
의아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못 들은 척 그냥 끊어 버렸다. 다시 연락이 올까 봐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꾸고 화면을 끄는 사이 문이 달칵 열렸다.
그사이에 인상이 변한 건 장윤성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가라앉은 표정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는 웃음기가 많은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인사를 하려 일어서자 이은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꾸벅이자 이은조는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막상 마주 앉으니 차라리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이 오갈지,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초조해 보이는 건 이은조 쪽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몇 번 심호흡을 한 이은조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윤성이가…, 기억을 찾았나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내가 예상한 질문은 아니어서 나는 잠시 이은조의 눈을 마주 봤다. 찾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장윤성이 정확히 어디까지 떠올렸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그래서 윤성이가 그쪽을 찾아간 건가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같이 지내게 됐죠?”
다시 한 번 장윤성이 내 목숨을 구했다는 소릴 할까 말까 하다가 결국 짧게 사실을 털어 놨다. 도움을 받았고, 보답으로 기억을 찾는 걸 돕기로 했다고. 이은조는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미간을 좁히고 들었다. 이 가족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장윤성이 그저 빈 기억에 누군가 있는 걸 눈치챈 게 다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찬찬히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이은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윤성이가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했을 땐 좋은 사람인 줄 알았고, 돈을 받고 떠났을 땐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아니었나 보네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 걸 보면.”
좋은 사람일 것도, 똑똑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돈을 바라고 했던 일이고, 일이 끝나 예정된 대로 떠났을 뿐이었으니까.
“정말 기억을 찾도록 도울 생각이었나요? 왜? 기억을 찾으면 윤성이가 다시 그쪽을 원할 것 같아서?”
“아니요.”
이은조는 기억을 잃은 장윤성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까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미련을 버릴 것 같아서요.”
장윤성은 빈 기억 속 누군가를, 나는 일말의 희망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장윤성을 밀어낼 수 없다. 이대로라면 그깟 실낱같은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남은 삶도 지난 7년처럼 보낼 게 틀림없었다.
이런 역할까지 떠넘기는 게 비겁한 건 알아서 고개가 절로 아래를 향했다. 그러다 손에 쥔 핸드폰에 문득 시선이 닿았을 때, 소리 없이 밝아진 화면에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괜찮아.」
하고.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숨을 뱉듯 짧은 웃음이 터졌다.
뭐가 괜찮은데?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아. 오늘 아침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낼 걸 알면서도 굳이 널 돕겠다고 나선 것도. 그밖에도 괜찮지 않은 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은조는 미간을 좁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성이가 기억을 찾고 당신을 원망이라도 하길 바란다는 건가요?”
모호한 말을 정확하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은조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조금 들었다.
“그러면 윤성이가 후련해할 것 같던가요? 내가 생각하기엔 아닐 것 같은데.”
후련해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배신당한 기분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기억을 찾는 것과 찾지 못하는 것. 어느 게 장윤성에게 더 나은 일인지. 장윤성이 기억을 찾든 말든 3개월을 버텨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윤성이가 기억을 찾아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은조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추억으로 간직하기에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요. 만약 윤성이가 그쪽을 용서한다고 해도….”
말은 거기서 끊겼지만 이어질 말은 나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안 될 일이라고. 그렇게 들어보니 맞는 말 같았다. 장윤성이 기억을 찾아서 좋을 일은 조부의 마지막 몇 개월을 되돌아보는 것밖엔 없었다. 심지어 그 몇 개월을 어떤 사기꾼에게 홀려 기만으로 보냈던 걸 생각하면 그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이은조의 말대로 혹여 나를 용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을 걸고 그의 가족과 맞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이라면 더더욱. 마음의 저울은 언제나 핏줄이라는 확실한 실체가 있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었다. 장윤성도 결국엔 그렇지 않을까.
“아버님께서 섭섭하게 대하진 않으셨던 걸로 알아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서로를 위해서 여기까지만 하죠. 그럼 나도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장윤성의 가족들은 영리하게 인정을 베풀 줄 알았고 나는 어쭙잖은 양심을 가졌다. 그들이 몰인정했거나 내가 염치라는 걸 아예 몰랐다면 장윤성의 짧은 문자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 처신해 줄 거라 믿어요. 그때처럼.”
똑똑하다느니 잘 처신했다느니 하는 말로 종용하는 척했지만 실상 비난에 가까운 말투였다. 달리 거부할 명분도 용기도 없으면서 나는 좀처럼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은조는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하경 씨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돌아가신 전 회장님께도 필요 이상으로 잘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윤성이에겐 좋은 사람이지 못했잖아요. 한 번쯤은 윤성이를 위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나는 또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쩐지 이은조는 내 성별이나 처지가 아니라, 내가 그런 식으로 떠난 걸 탓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더더욱 잘한 일이었다.
기억을 잃고 깨어난 장윤성이 그때의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까? 장윤성의 곁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살아오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이은조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내 선택을 칭찬할수록 내게 장윤성의 곁에 남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 모로 봐도 내가 장윤성에게 좋은 사람이 될 날은 오지 않을 게 뻔했다.
“대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겠죠.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로 정리해 줘요. 다른 가족이 눈치채기 전에.”
내 입에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자 결국 이은조는 침묵을 동의로 둔갑시켰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작은 가방을 다시 챙겨 들면서 그녀는 다시 내 얼굴을 살폈다. 무기력하게 눈짓을 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이은조는 이런 상황에서 으레 보일 법한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갈 것 같더니 잊은 게 있었던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혜진이가 찾아왔었어요.”
서혜진? 이 자리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한지영의 정체를 묻더라고요. 아주 닮은 사람을 봤다면서요. 알아서 잘하겠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 주세요.”
당부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인연이라고는 별장에서의 만남과 그 뒤에 주고받은 몇 번의 연락뿐이었는데 이제 와 그렇게 정체를 확인하려 한다는 게.
긴 시간 침묵을 지킨 탓인지 바싹 말라붙은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은조는 뜻 모를 표정으로 작은 공간을 나섰다.
나는 굳은 것처럼 자리를 지켰다. 아마도, 내가 느꼈던 것보다 긴 시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