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틈(2) (12/18)

생각보다 빠르게 끝을 내게 됐을 뿐이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약속한 기간을 다 채운 뒤에는 어떻게 끝을 낼 생각이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아파트 현관에서 장윤성의 집 호수를 누르고 있었다. 넋을 놓고 누른 숫자가 맞지 않았던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멍하게 서서 비밀번호를 다시 떠올리는 사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몇 개의 숫자를 빠르게 눌렀다. 내가 떠올려야 할 그 숫자들이었다.

겨우 문이 열리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재촉하듯 운을 뗐다.

“뭐 해, 안 들어가고.”

고개를 돌려 잠깐 시선을 맞추고 걸음을 뗐다. 가벼운 옷차림인 걸 보면 이제 막 퇴근하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밖에서 뭘 했는지 알려 주듯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손에는 몇 번인가 본 담배 케이스를 쥐고 있었다.

“끊은 거 아니었어?”

장윤성이 담배를 피운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회사에서야 어땠을지 몰라도 집에선 담배를 피우겠다고 나가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 물음을 듣고도 대답 없이 몇 걸음을 더 걸어간 장윤성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내가 그 옆에 나란히 서고 나서야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뻔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나가셨다는 분이 소식이 없으셔서 말이야. 전화도 안 받고.”

“전화?”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고 무음으로 바꿔 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참 만에 들여다본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와 확인 못 한 메시지가 여럿 쌓여 있었다. 화면 상단 구석의 시계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다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더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안, 무음으로 해 놔서 몰랐어.”

“무슨 일이었는데 폰을 한번 안 봐?”

“그냥, 좀….”

돌아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더라. 여기까지 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장윤성에게 둘러댈 말 한마디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도와주기라도 하려는 듯 때마침 엘리베이터 소리가 울렸다. 마치 그 때문에 말이 끊긴 양 나는 입을 닫고 먼저 발을 내디뎠다.

“연락이 안 돼서 밖에서 기다린 거야? 애도 아니고 때 되면 알아서 올 텐데.”

“그래?”

무심한 손길로 맨 위층 버튼을 누르던 장윤성은 신빙성 없는 말을 들은 양 가볍게 대꾸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보며 한쪽에 기대선 그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정말 때 되면 알아서 와?”

가시처럼 어딘가를 따갑게 찌르는 말이었다. ‘정말’이라는 소리를 붙여 물으니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장윤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연락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던지 담배 케이스를 반복해서 열었다 닫는 의미 없는 손동작을 계속했다. 원래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케이스 안에 남은 건 한 개비뿐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왔잖아.”

대충 대답을 하고 또 곤란한 물음을 해 올까 얼른 턱짓으로 빈 케이스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 하나 남았네.”

내 말에 장윤성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다시 케이스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그러네.”

문득 몇 년 전 그의 부친이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잘 손대지 않던 물건을, 심기가 불편할 때면 한 번씩 꺼내 물던 건조하고 매서운 얼굴을 한 남자의 모습이. 큰 키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제외하면 별로 닮은 게 없는 부자가 이런 사소한 습관을 공유한다는 건 퍽 신기한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번엔 장윤성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반나절 연락이 두절된 게 그렇게 심기가 불편할 일인가. 이제 이렇게 기다릴 일도 없을 거라고 하면 케이스에 남겨진 나머지 하나도 전부 태우려나. 남은 게 하나뿐이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장윤성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쥐고 있던 담배를 케이스째 휴지통에 처박았다. 앞으로는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듯이.

“저녁은 먹었어?”

“어? 어…. 시간이 몇 신데, 먹었지.”

거짓말이었지만 속에 뭘 집어넣을 기분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하던 장윤성은 내 대답에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누구랑?”

“친구랑.”

쉽게 나오는 대답에 장윤성은 입을 다문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거짓말을 참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나는 얼른 덧붙였다.

“나 씻고 올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지친 얼굴을 해 보이자 장윤성은 일단 말을 삼키는 것 같았다. 빤한 시선이 내 걸음마다 따라붙었다.

“맞다. 나 내일 집에 갈 거야.”

방문을 열다 말고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씻은 뒤엔 거실로 다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던 터라 나는 문고리를 쥔 채 통보하듯 말을 꺼냈다.

“모레 다녀온다며.”

“건우가 그날은 바쁘대서.”

“그래, 그럼. 언제 올 건데? 차 안 가져갈 거면 데리러 갈게.”

고작 하루 먼저 간다는 말에 장윤성은 섭섭한 기색을 했지만 말리는 소릴 하진 못했다. 건우가 내게 하나뿐인 가족이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지 말라는 소리보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는 말이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

“잘 모르겠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

모호한 대답에 장윤성이 성큼성큼 다가와 시선을 맞췄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손목을 감싸왔다. 달래려는 것 같기도 했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도 같았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낮에 했던 이상한 통화 이후, 장윤성도 꺼림칙한 무언가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꼭 그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장윤성이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니고 나도 아무것도 들키지 않았다. 사랑을 속삭인 것도 몸을 섞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재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괜히 기다리지 말라는 소리야.”

장윤성이 담배를 버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걸 들고 밖에 서 있겠다고 하면 나는 기어이 ‘내가 알아서 돌아올 테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였을지도 몰랐다.

잡힌 팔을 거두려 하자 장윤성의 손이 더욱 세게 얽매었다.

“하경아.”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쩔 줄 모르고 주변만 배회하던 시선이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격양된 목소리를 억누르며 장윤성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낭패감에 입술을 씹었다. 어떤 말로 둘러대도 장윤성은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와서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도, 그 이후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으니까.

“어제 성욱 형이 불렀는데 안 갔잖아. 그래서 급히 알바를 구했는데 걔가 일을 그렇게 잘한대. 그러니까 갑자기 조바심이 들더라. 이러고 있다가 내 자리 없어질까 봐.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싫고.”

장윤성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믿지 않을 줄 알았다. 설령 내 말이 진실이어도 장윤성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작 그런 일자리에 목매는 심정을. 그래서 일부러 그런 핑계를 댔다. 너와 나의 세계가 이만큼이나 다르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런 걸 왜 걱정해. 내가….”

“내가 왜 그걸 받아야 하는데?”

책임지겠다는 말을 쉽게도 하려 하기에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입을 다문 장윤성의 눈매가 조금씩 사나워졌다.

“네 말마따나 너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준다고 쳐. 그럼 나는? 나는 왜 받아야 하는데? 나한테는 그거 그냥 빚이야. 나 빚지는 거 정말 싫어해. 잊었나 본데 여기도 그래서 온 거잖아. 목숨 값 갚으러. 근데 나 더는 못 하겠어.”

“이….”

장윤성이 다시 이름을 부르려 하기에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말을 마저 해야 하는데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목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아파서 차마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입만 벙긋거리다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

이렇게만 말해도 장윤성은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기어이 잡힌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굳이 한마디를 덧붙이며.

“그게 뭐든.”

화를 낼 것처럼 매서워졌던 눈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별수 없이 당장이라도 벗을 것처럼 셔츠를 걷어 올렸다.

“억울하면 차라리 한번 하든가.”

이런 소릴 듣고도 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야 말로 빚을 갚은 셈이니 인연을 끊는 데 이보다 좋은 빌미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작 옷자락을 쥔 손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가슴께에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이쯤 하면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그저 빤한 시선으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동작을 멈춘 채 올려다보자 장윤성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해.”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짧은 말에 내가 눈을 한번 깜빡이자 장윤성이 다시 소리를 냈다.

“더 해 봐, 이하경.”

옷자락을 쥔 손이 툭 떨어졌다. 더 이상 화를 돋울 엄두도 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장윤성은 팔을 뻗어 방문을 열었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움직여 방 안과 장윤성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다음번엔 안 참아.”

그 소리에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내가 돌아보자 장윤성은 짧은 인사를 하고는 문고리 안쪽의 핀을 눌러 문을 잠갔다. 천천히 좁아지는 문틈으로 장윤성이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철컥.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무거운 소리가 났다.

더럽게 착해 빠진 새끼.

나한테 티끌만 한 해도 못 끼칠 거면서 문은 뭐 하러 잠가 주냐? 잠긴 문은 내가 열기 전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멀거니 서서 반듯하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좀처럼 걸음을 떼는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괜히 잘못했다고 빌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처받은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

똑똑.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밤새 여러 생각을 곱씹었을 뿐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밖은 환해져 있었다. 대답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경아, 나 지금 나가. 아침 차려 놨으니까 먹고 가.”

한 번 더 대답을 시도해 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는 척을 할까 궁리하는 사이 문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다녀와.”

마치 부탁 같은 인사였다.

“…응.”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아 소리를 냈다. 하지만 지키지 못할 말이라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대답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문 밖에서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결국 잠들 수 없었다.

장윤성이 부탁한 대로 아침을 먹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온전히 내 것인 것만 챙겨 들었다. 입고 왔던 옷을 찾으러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쇼핑백을 발견했다. 그제 인테리어 소품이랍시고 장윤성이 샀던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말 인테리어 소품이 될 처지였다.

장윤성은 저것들을 어떻게 할까? 사이즈 때문에 입진 않을 것 같고 역시 버릴까. 그랬으면 좋겠다.

짐은 단출했다. 지갑과 핸드폰, 건우에게 줄 선물. 핸드폰은 별수 없이 챙겼지만 한동안 차고 다닌 시계는 두고 나왔다. 그냥 시계 하나쯤 챙겨 나올 걸 그랬나. 한가한 시간, 텅텅 빈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을 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화창한 날이었다.

정류장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향했다. 사 온 것을 왼손에 몰아 쥐고 열쇠를 찾으려 품을 뒤적이고 있자니 열쇠를 챙겨야 한다는 일이 새삼스럽게 번거로웠다. 우리 집도 번호 키로 바꿀까. 그럼 얼마나 쓸 수 있으려나.

몇 년 사이 이 동네 풍경은 꽤 많이 변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던 낡은 주택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네모반듯한 빌라가 들어선 탓이었다. 당장 몇 개월 뒤엔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집도 그렇게 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고작 현관문 문고리 하나 바꾸는 일의 효율성을 따지고 있는 걸 보니 신데렐라 놀이가 끝난 게 실감이 났다. 열쇠를 대체 어디다 넣었더라. 왼손에 몰아 쥔 짐이 무거워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올 즈음 겨우 바지 뒷주머니 깊은 곳에서 열쇠를 찾아냈다.

급한 손길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억보다 어수선한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집에 있었던 게 아닌 상자들이 몇 개나 쌓여 있었으니까.

고기와 과일, 전복…. 7년 전 내가 집에 간다고 했을 때, 택시에 함께 실어 준 것들이었다. 이것도 그 호텔에서의 데이트 코스처럼 습관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맨 위의 상자는 케이크였다.

“건우가 바빴나. 이걸 냉장고에도 안 넣고 그냥 갔….”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내일 올 거라고 알고 있는 녀석이 날 믿고 이걸 그냥 두고 갔을 리도 없거니와 내게 확인도 없이 낯선 사람에게서 뭘 받을 성격도 아니었다.

인연을 끊어야 할 판에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폰을 꺼내 들고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길게 가지 않았다.

- 어, 하경아.

이미 전화를 걸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너 우리 집 문 땄냐?”

- 다시 잘 잠가 두라고 했는데, 왜, 열려 있었어?

“장난해? 네가 딴 게 문제라고.”

- 내가 뭘 훔쳐 갈 것도 아닌데 그게 왜 문제야. 아, 혹시 집에 내가 보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어?

“그런 게 있을….”

무신경하게 대꾸하다 문득 생각이 났다. 장윤성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 눈동자가 빠르게 집 안을 훑는 동안 장윤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정말 있나 봐?

“없어. 없고, 한 번만 더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면 경찰서에서 볼 줄 알아.”

정말이지 사람 낚는 데는 도가 텄다. 단정적으로 없다고 말하면서도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기껏 마음을 잡았는데 이제 와서 일이 꼬이는 건 곤란했다.

남의 속도 모르는 장윤성은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보탰다.

-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어때.

경고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건만 오히려 장윤성의 경고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드러운 음색으로 농담처럼 건넨 말이 그렇게만 들렸다. 고작 이 부질없는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고.

“변호사 보낼 테니까 잘해 보시든지. 끊는다.”

장윤성이 뭐라고 대꾸를 하는 것 같았지만 듣지도 않고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팽개치듯 폰을 내려놓고 TV 아래 서랍장을 전부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건우의 책상까지 엎을 필요는 없었다. 별장에서 찾았던 필름과 그걸 인화한 사진이 든 봉투는 열렸던 흔적 없이 TV 아래 서랍 속에 얌전히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자괴감이 몰려왔다. 또 당했어. 신이 장윤성을 과하게 아낀 게 틀림없었다. 낚시를 해도 억만장자가 될 놈이 재벌가에서 태어난 걸 보면.

바닥에 털썩 앉아 짜증을 좀 내다가 결국 상자에 든 물건을 냉장고에 옮겨 넣었다. 어젯밤에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라고 투덜거리면서.

하긴,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말이었다. 공짜로 주면 뭐가 싫겠어. 갚을 길이 막막한 게 싫은 거지. 우습게도 이 정도는 조금 무리하면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고기는 무척 땡큐, 과일도 뭐 좋았다. 전복…. 여전히 장윤성은 우리가 해 먹을 줄 안다고 생각해서 꼬박 이런 걸 넣는 걸까. 줄줄이 엮인 굴비와 버섯, 뭐 명절에 오간다는 식품은 다 본 것 같았다. 그때와 달리 술도 몇 병 있었다.

하나하나 냉장고에 예쁘게 넣는 것도 슬슬 피곤해 아무렇게나 욱여넣는데 마지막으로 연 상자에는 파인애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과일을 보냈으니 한 상자쯤 파인애플이 들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상하다고 느껴야 할 타이밍일지도 몰랐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의미 없는 걱정일 테니까.

잠을 못 잔 탓에 이불을 펼 기운도 없이 피곤했다. 대충 바닥에 누워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던가 생각에 잠겼던가.

귓가가 웅웅거리고 아득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어지럽게 배회했다.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장면을 계속 보다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 현관문 앞에서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끼익, 낡아서 소리가 유난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건우였다.

“형?”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건우가 반갑게 물었다.

“어. 왔어?”

“내일 온다더니.”

“그냥. 시간이 돼서.”

“으응.”

찬 바닥에 누워 있던 탓인지 몸을 일으키고 부스스해졌을 머리카락을 털기까지의 동작 하나하나가 버거웠다. 목소리가 잠긴 걸 보면 잠을 자긴 한 것 같은데 오히려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빈 상자를 눈으로 살폈다.

“좋은 사람?”

“어?”

뜬금없는 소리에 의아하게 되묻자 건우는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그 사람이 준 거 아니야? 전에 엄마 아플 때 저런 거 보내 줬던 사람. 그… 형 일했던 곳 사장 아들이라고 했나?”

“그게 기억이 나냐?”

“나지, 그럼.”

건우는 냉장고를 열어 상자의 내용물을 구경하며 덧붙였다.

“엄마가 전복 좋아하는 거 그때 처음 알았잖아. 계속 입맛 없다고 했었는데 모처럼 많이 드셨거든.”

“전복? 그걸 해 먹었어? 어떻게?”

“인터넷 보면 다 나오니까. 어, 케이크도 있네. 이것도 그 사람이 준 거야?”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여간 가볍게 한 불평마저 머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건우의 생일은 내일이었지만 케이크가 벌써 생긴 탓에 우리는 하루 일찍 초에 불을 붙이기로 했다. 늘 하던 대로 케이크와 치킨 한 마리를 차린 상에, 장윤성이 보낸 것 중 요리하기 만만해 보이는 것을 조금 더 보탰더니 퍽 호화로운 차림이 됐다. 맥주 캔을 내 앞에 놓던 건우가 부엌 쪽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저거 따도 돼?”

싱크대 옆에 대충 올려둔 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허락하자 건우는 신나서 술을 골랐다. 특별히 술에 취미가 없어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와인이었다. 별로 쓸 일이 없어 어딘가에 처박아 둔 오프너까지 챙겨 온 건우는 어설픈 동작으로 코르크 마개를 따냈다.

“그 사람하고 계속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는 듯이 건우가 잔을 채우며 물었다.

“아니, 얼마 전에 다시 만났어. 일하다가. 가게에서.”

“정말? 신기하다. 인연이네.”

“인연은 무슨….”

건우가 별 뜻 없이 뱉었을 말을 나는 괜히 부정하듯 중얼거렸다. 적당히 채운 잔을 내 앞에 놓아주던 건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뭐, 서울 땅 좁으니까. 오다가다 만나는 거 흔하잖아.”

굳이 둘러대고 나니 모양새가 더 이상했다. 나는 눈을 굴리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저거 다 네 거야. 지나가는 말로 동생 생일이라고 했더니 굳이 보냈더라고.”

“나랑 본 적도 없는데?”

“퍼 주는 게 취미래. 술은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마셔.”

내내 납득이 안 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건우가 그 말에 겨우 반색을 했다.

“그래도 돼? 형은 저거 안 궁금해?”

“당연하지. 형 일하는 데가 어딘데.”

“하긴.”

건우는 그제야 내 직업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다 식겠다, 자, 부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생일 축하합니다아.”

나는 서둘러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빠른 속도로 독창했다. 숨도 쉬지 않고 부른 열정적인 노래가 끝나자마자 건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촛불을 불었다. 조촐하게 건배까지 하고 나서야 우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형 그럼 내일 가?”

한입 크기로 잘라 구운 고기를 입에 넣으며 건우가 물었다. 나도 고기를 입에 넣고 씹는 척 우물거리며 건우한테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아니. 집 주인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와서 이제 안 가.”

“그럼 또 멀리 다니느라 고생하겠네. 그러니까 이사 가재도.”

언젠가 했던 말을 덧붙이며 건우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을 옮긴다고 장윤성이 못 알아낼 것도 아니었지만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말보다 효과적일 테니까.

“그래, 생각해 볼게.”

내 대답에 건우는 웃으며 TV를 켰다. 특별히 챙겨 보는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간간이 오가는 우리의 목소리 사이를 채워 주는 게 좋았다.

아마 건우도 그랬을 것이다. TV를 켜 놓고 건우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식사하는 시간은 내가 가장 마음에 위안을 얻는 때였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달랐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귓가에 닿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

특별히 그러길 바란 것도 아닌데 시간은 꼬박꼬박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금방 며칠이나 지나갔다.

장윤성에게 연락이 온 건 마지막 통화를 하고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언제쯤 데리러 갈까.」

기껏 이런 메시지를 보냈으면 답장을 재촉할 만도 하건만 그 이후로는 또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 그 짧은 메시지를 다시 곱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끝낼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라고.

“…형!”

“어?”

“뭐 해, 그거 탄 거 아냐?”

탔다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프라이팬 위를 쳐다봤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달걀이 과하게 익고 있었다. 모처럼 학교 가는 동생 아침이나 챙겨 주려 했더니 아까운 달걀만 하나 태워 먹을 뻔했다. 뒤집어 보니 그래도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 얼른 접시에 내려놓고 새 달걀을 꺼내들었다.

“다시 해 줄게. 잠깐만, 금방 돼. 저건 내가 먹지 뭐.”

“그건 상관없는데….”

이미 새 달걀을 깨 넣은 뒤라 건우는 말끝을 흐렸다. 또 탈까 봐 조금 일찍 팬에서 꺼냈더니 이번에는 줄줄 흐르는 달걀 프라이가 되었다, 건우는 불만 없이 내가 내미는 접시를 받아들었다.

“형 무슨 일 있어?”

조촐한 식탁 앞에서 건우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그럼 어디 아파?”

“무슨 소리야, 갑자기.”

건우가 턱짓으로 내 밥그릇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밥도 잘 못 먹고, 안색도 안 좋은 거 같아서, 형 요즘 잠도 잘 못 자지?”

내가 그랬나. 뭐, 같이 사는 건우가 그렇다면 그렇겠거니 했다.

“원래 가끔 그러잖아. 신경 쓰지 마.”

꼭 장윤성과의 일이 아니더라도 사람 컨디션이 언제나 한결같을 순 없는 법이었다. 장윤성과 재회하기 전에도 종종 그랬다. 그러니까 별로 특별할 거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건우가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얼굴이기에 나는 보란 듯이 밥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맨밥만 씹고 있다가 뒤늦게 반찬도 하나 입에 넣고 삼켜 보이자 건우는 마지못해 제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형 가게는 언제 다시 나가? 이렇게 오래 쉬어도 돼?”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며칠째 빈둥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휴가를 냈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길게 쉬고 있기는 했다.

“응. 그래도 돼. 형은 유능하니까.”

자만이 과했는지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뻔뻔하게 대꾸하긴 했어도 사실 결정을 미루는 사이 시간이 흐른 것뿐이었다.

“웃을 시간 있냐?”

“아, 맞다.”

내가 시계를 가리키며 한마디 하자 건우는 그제야 바쁘게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금세 그릇을 비운 녀석은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었다.

그때까지 젓가락으로 밥을 깨작이고 있던 나는 배웅을 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은 장윤성의 집처럼 문이 자동으로 잠기지 않아서 사람이 나갈 때면 누군가는 문단속을 해야 했다.

“밥 먹어. 내가 잠그고 갈게.”

신발 뒤축을 정리하며 건우가 나올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야. 형이 잠글 테니까 얼른 가.”

건우는 결국 허리를 펴며 짧게 웃으며 동의했다.

“갔다 올게.”

“오냐.”

시간이 빠듯하긴 했던지 녀석은 좁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더니 곧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멍하게 서 있다가 문을 닫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내 자리에서 맞는 아침이.

***

출근을 하면서 머리를 다듬었다. 목덜미의 자국이 쉽게 지워지지 않아 집에 돌아오고도 며칠을 미뤄 두었던 일이었다. 가게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윤성과의 약속을 깬 이상 다시 가게에서 일을 하는 게 맞았지만, 그와의 연결고리가 많이 있는 곳인 탓에 망설여졌다. 이은조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에만 처박혀 있던 나를 가게로 불러낸 건 대단한 마음의 준비가 아니라 뜻밖의 연락 한 통이었다.

종민이가 며칠만 저 대신 가게에 나가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다. 할머니가 입원을 하셨는데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없다고. 종민이가 할머니 품에서 자란 건 가게 식구들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성욱 형이 가게 걱정은 말라고 했다지만 내가 없는데 저마저 자리를 비우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가게도 가게지만 아픈 가족을 두고 녀석이 마음에 짐을 얹는 게 싫어서 그러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도 미뤄 왔던 일을 두 가지나 해낸 셈이 됐다.

하지만 막상 성욱 형의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나는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장윤성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깼다는 것도, 가게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게 성욱 형에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성욱 형은 장윤성에게도 아무런 말을 듣지 못했는지 나를 종민이의 대타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형, 들었어요? 종민이네 할머니 오늘 퇴원하셨대요. 다행히 큰일은 아니었나 봐요.”

정호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모처럼 장난기 없는 얼굴로 웃었다. 홀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성욱 형은 중요한 일이 있는지 일찌감치 가게를 나섰다. 손님 없으면 너희들도 일찍 들어가, 라는 감격스러운 말을 남기고.

평일이라 그런지 오늘은 손님들의 발이 일찍 끊긴 편이었다. 마감 때면 녹초가 되어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레질을 하던 녀석도 잇따른 희소식 덕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나는 마른행주로 컵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형 오늘까지만 해요?”

“아니. 종민이한테 내일까지 쉬고 나오라고 했어.”

“크으, 종민이한테만 친절한 하경이 형.”

“말은 바로 해야지. 너 빼고 모두한테 친절해, 나는.”

“하긴, 사람들이 저만 특별 취급하고 그러더라고요.”

정호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깐죽거리길 좋아하는 정호의 성격 탓에 매번 이런 식으로 농담을 주고받긴 했지만, 그런 것도 특별 취급이라면 내게 특별 취급을 받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내게 가장 친절했지만, 결국 내가 가장 매정하게 대했어야 하는 사람. 뽀득뽀득 닦은 컵 안에서 웃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 멀었어요?”

대강대강 청소를 마친 정호가 가방을 둘러멘 채 팔을 걷었다. 일찍 끝난 김에 얼른 가고 싶은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일을 거들려 들었다. 얼핏 보기엔 홀도 다시 손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도.

“됐어, 너 먼저 가. 내가 마저 하고 갈게.”

정호도 염치가 없는 놈은 아니라 평소라면 한 번쯤 예의상 거절을 했을 텐데, 오늘은 정말 일찍 가고 싶었는지 딴에는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들러붙었다.

“혀엉, 정말 그래도 돼요오?”

“어, 징그러우니까 제발 꺼져 줘.”

“네엥! 형 내일 봐요! 사랑해여!”

냉큼 문 앞까지 튀어나간 정호는 팔을 휘휘 흔들어 보이고는 신나게 뛰어나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나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종민이 대신 일한 며칠도 생각보다 별일 없이 지나갔다. 중간에 서기준과 한 번 마주치긴 했지만, 역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이은조는 내가 가게에 다시 나오는 걸 알고 있을까. 요 이삼 일 간에는 이따금 장윤성에게 전화가 왔었다. 받지 않았더니 오늘은 다시 메시지가 왔다.

「언제쯤 데리러 갈까.」

따라 치기라도 한 듯 그 전의 메시지와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혹여 뭐라도 달라진 게 있을까 멍하게 보고 있는 동안 한 줄의 메시지가 새로 올라왔다.

「보고 싶어.」

우습게도 나는 그 말에 도망치듯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 성격에 바로 찾아오지 않는 점은 이상했지만 덕분에 더 멀리 도망갈 궁리까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컵을 마저 닦고 정호가 설렁설렁 해 둔 청소도 꼼꼼하게 마무리했음에도 가게를 나서는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일렀다. 마지막으로 주방까지 한 번 더 살펴보고 난 뒤 가게 문을 잠그고 건물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계단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싶더니 여자 구두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이….”

무의식적으로 양해를 구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혼자 찾아온 손님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쯤 상대가 대답을 했다.

“일 끝난 거예요? 마침 잘됐네요.”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밤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옅은 빛에 비추어 봐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계단 위쪽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서혜진이었다.

“네, 오늘은 조금 일찍 닫기로 해서요. 죄송하지만 다음번에….”

‘마침 잘됐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나는 다시 영업이 끝났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도 서혜진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눈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태원그룹 사람을 다시 마주쳤을 때처럼 숨 막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은연중에 서혜진이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뚜벅뚜벅 다가온 서혜진은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혹시….”

예전과 달리 두꺼운 안경도 없었고, 싹싹하게 하나로 묶었던 머리도 길게 풀고 있었지만 눈을 흘기며 운을 떼는 표정만큼은 영락없이 그때와 같았다.

“한지영이라고 알아요?”

나는 태연하게 궁리하는 척을 했다.

“한… 지영? 글쎄요. 아는 사람 중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본인이거나.”

확신하는 게 아니라 떠보는 말투였다.

하긴, 아무리 한지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7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 단번에 알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서혜진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자세히 뜯어보면 젖살이 조금 빠진 거 외에는 변한 게 없는 얼굴인데도.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저는….”

그다음엔 어떤 말을 붙여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며 말을 끄는 사이 서혜진이 덥석 내 팔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서혜진은 꼭 확인을 해야겠다는 듯이 손에 힘을 꽉 주고 내 키를 가늠하듯 눈동자를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예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아요. 키도 그렇고…. 흔치 않잖아요, 그쪽 같은 얼굴.”

서혜진은 제 추측이 틀림없다는 듯이 자신에 찬 얼굴로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흔한지는 모르겠지만 서기준 씨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장윤성 씨의 전 여자 친구와 닮았다고.”

얼떨결에 듣었던 장윤성의 연애사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서혜진도 장윤성의 전 여자 친구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지 말문이 막힌 듯 인상을 썼다.

장윤성에게도 없는 증거가 서혜진에게라고 있을 리 없었다. 얼굴이 닮았다고 우기는 건 이쪽도 우기면 그만이었다. 나는 괜히 바쁜 척 핸드폰 화면의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죄송한데, 제가 집에 급히 들어가 봐야 해서요. 가게에 일이 있으신 거라면 내일 다시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일부러 내일 다시 와 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서혜진은 대꾸도 없이 언뜻 원망스러운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고개를 꾸벅이며 먼저 걸음을 뗐다.

아, 근데 시간이 정말….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겁 없는 것도 여전했다. 결국 계단을 오르려던 걸음을 돌렸다.

“차 앞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차 어디에 두셨어요?”

서혜진은 내가 순순히 정체를 털어놓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볼을 씰룩이고는 앞장섰다. 일부러 성난 발걸음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던 서혜진이 결국 우뚝 멈춰서 제 분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아니에요?”

“네? 아, 네.”

내가 다시 한 번 부정하자 서혜진은 답답한 속을 식히듯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맞는데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윤성 오빠가 너무 나쁜 사람을 좋아한 거니까.”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과 상관없이 장윤성에게 나는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쯤 짧은 계단이 끝났다. 차는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서혜진은 차에 올라타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교복을 입고 언덕을 달려오던 꼬마가 벌써 다 커서 우리 집 보증금보다 비싼 차를 모는 게 새삼스러웠다.

“밤이라고 너무 세게 달리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세요.”

그래서 한마디 더 참견했을 뿐인데 서혜진이 열린 창문 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그쪽이 나쁜 사람이더라도 한지영인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네?”

“갈게요.”

쌀쌀맞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전에도 정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고작 하루짜리 인연에 답장도 드문 연락을 계속했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오빠의 친구를 짝사랑하는 중학생이 아님에도 한지영의 정체가 중요할까?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서혜진이 하고 간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내가 한지영인 편이 좋겠다고? 누구에게?

***

“형 오늘 늦게 들어와?”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건우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침을 차려 주는 것도 놀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새벽쯤에나 들어와서는 건우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려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베개를 끌고 이불 위를 꿈질꿈질 기어 현관 쪽으로 고개만 내민 채 대꾸했다.

“아니, 형 이제 또 당분간 쉬어.”

종민이의 대타를 뛰는 것도 어제부로 끝났다. 남은 건 성욱 형에게 내 사정을 말하고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제 늦은 시간에 찾아왔던 서혜진은 다음 날 다시 오라는 빈말을 진담으로 알아들었는지 어제도 가게를 방문했다. 제 친구들을 이끌고.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서 자백하라는 듯이 나를 노려보는 통에 결국 떠밀리듯 미뤘던 결정을 내렸다. 당장 장윤성이 가게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서기준이나 서혜진이 드나드는 곳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그럼 형 오늘 안 나가?”

“응, 왜?”

“새벽에 비 온다고 해서. 혹시 형 늦게 퇴근하면 우산 가져가라고.”

“아…. 비 오면 더욱 나갈 일 없지. 너야말로 늦게 올 거면 챙겨 가.”

“나도 그렇게 늦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건우는 신발장 위에 놓인 우산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결국 제일 가벼워 보이는 걸 하나 골라 가방에 챙겨 넣었다. 한번 책상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를 해 대는 집중력의 소유자인지라 저도 독서실에서 일찍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갔다 올게.”

“어. 잘 갔다 와.”

나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붙인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특별히 이유도 없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릴 들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오래 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핸드폰 벨소리가 다시 내 의식을 깨웠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의 이름이 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받지 않을 생각이면서도 나는 다시 이불 위를 기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뜻밖에도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장윤성이 아니라 송민혁이었다.

“여보세요.”

받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이름이었다. 장윤성과 함께 백화점에 간 날 우연히 마주쳤던 이후 몇 번인가 연락이 왔었다. 그때그때 답장을 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히 요즘 얼이 빠져 있긴 한 모양이었다.

-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너 시간 되면 애들이랑 한번 보자. 불금이잖냐.

불금이라니. 민혁이나 나나 주말에 더 바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앞으로는 녀석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너 내일 쉬어?”

- 어, 모처럼 주말에 쉰다. 너는?

어차피 다른 놈들 스케줄까지 생각하면 오늘 봐야 할 테지만, 굳이 해 본 물음에 다행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쉬긴 하는데….”

- 그럼 나와. 애들 부른다?

“그래.”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곰곰이 생각을 했다. 오늘 할 일이 있었던가. 분명 없었던 것 같은데 뭐가 이렇게 마음에 걸리지. 종일 잘 수 있을 것 같았던 졸음도 전화 한 통에 싹 달아났다.

그럼에도 이불을 끌어안고 오랫동안 게으름을 피웠다.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저녁에 보자던 말과 달리 우리가 모인 건 늦은 밤이라고 할 만한 시간이었다. 민혁이가 멋대로 정한 약속 장소는 어릴 적 우리가 함께 놀던 그 동네였다. 지영이가 짧은 생을 살다 갔던 곳. 이 동네에는 친구들만큼이나 익숙한 오래된 식당도 있었다. 식당이라고 부르고는 있었지만 실은 새벽 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종민이 얼굴이나 보려고 잠깐 가게에 들렀다 오는 바람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음에도 네 명이 앉아 있어야 할 테이블에는 세 명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를 여기에 불러 모은 놈의 얼굴만 보이질 않았다.

“민혁이는?”

“송민혁 늦는 게 하루 이틀이냐.”

주한이가 빈 잔과 수저를 놓아 주면서 오히려 내 물음이 별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근데 너 오랜만이다. 뭐 하고 지내? 아직 거기서 일해?”

주한이가 놓은 빈 잔에 냉큼 소주를 채우면서 이번에는 기태가 내 근황을 물었다.

“나야 뭐… 똑같지. 너는?”

의자를 끌어 앉으며 나는 같은 물음을 떠넘기는 것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우리도 여전해. 연락 좀 자주 하고 살아.”

“미안.”

다들 일을 하며 사는데 나 혼자만 바빴다는 핑계를 대기도 어려웠다. 먼저 온 녀석들은 내게 무심하다며 한마디씩 던지고 곧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별일 없이 살았는지 아니면 나처럼 말 못 할 일이 있었던 건지 화제는 주로 이 동네에서 지냈던 시절을 맴돌았다. 누군가 스치듯 지영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쯤, 송민혁이 가게 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뭐 하러 왔냐? 우리 이제 가려던 참인데.”

“헉… 헉, 아, 뛰어왔으니까 좀 봐줘라.”

기태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민혁이는 땀을 닦는 척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계산할 거면 앉고.”

“제일 많이 버는 새끼가 야박하게.”

송민혁은 김주한이 보탠 한마디도 가볍게 쳐 내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주한이와 기태는 내가 왔을 때처럼 빈 잔을 옮겨 술을 채워 주었다. 드디어 다 모인 기념으로 건배 하고 다들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빈속에 술부터 들이켠 민혁이는 얼른 젓가락을 찾아 안주를 입에 넣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너 저번에 백화점에 같이 온 그 친구, 장윤성이랬나? 태원 둘째라며?”

태원이라는 소리에 제각기 잔을 비우고 젓가락을 움직이던 녀석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소리야? 태원?”

기태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내자 민혁이는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하경이랑 백화점에서 만났다고 했잖아. 그때 옆에 일행이 한 명 있었는데, 키도 크고 잘생겨서 난 이하경이 요즘 연예인 매니저 하나 했단 말이야?”

“이하경이 매니저로 보일 정도야?”

“어, 이렇게 생긴 이하경도 매니저나 해야 할 정도.”

기태가 흥미롭다는 듯이 묻자 민혁이는 또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자기가 하경이 친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얘기 도는 거 들어 보니까 태원그룹 둘째라고 그러더라? 너 진짜 걔랑 친구야?”

잠시 민혁이를 향했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친구까진 아니고, 그냥 우리 가게 손님.”

가게 손님이라는 소리에 다들 납득하는 것 같았다. 다만 민혁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캐묻듯 물었다.

“그냥 가게 손님 치고는 되게 가까워 보이던데.”

“가벼운 호기심이겠지.”

내가 뭐라고 얼버무리기도 전에 삐딱한 대답이 날아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주한이었다.

“알잖아. 그런 것들 우리 사람 취급도 안 해.”

주한이의 자조적인 말에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한이는 내 동생 건우와 함께 이 동네의 자랑으로 꼽히는 수재였다. 우리가 일을 할 때 공부에 몰두했던 주한이는 명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꽤 부유한 친구와 가까워졌다. 몇 번은 우리들이 모이는 자리까지 따라올 정도로 주한이와 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관계도 주한이가 그 친구의 여동생과 오랫동안 사귀어 왔다는 사실을 들키자마자 끝이 났다.

‘감히 너 따위가 내 가족이 될 생각을 해?’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친구에게. 온 집안이 반대를 해도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던 친구는 가장 앞장서서 주한이를 밀쳐 내고 짓밟았다.

“그러니까 너도 선 잘 긋고 대하라고.”

주한이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억지로 웃으며 마무리를 했다. 장윤성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거 같아, 나는 다시 술잔을 훌쩍 비우고 대꾸했다.

“알아, 나도.”

장윤성은 그렇지 않아도 그의 가족 중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거.

“맞아, 하경이가 알아서 하겠지. 난 늬들 걱정은 다 해도 이하경 걱정은 안한다. 걱정 아까워서.”

동연이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두둔하며 다시 잔을 채웠다. 작은 잔이 다시 쨍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오랜만에 만난 덕에 재벌이나 돈 얘기를 빼더라도 할 이야기는 많았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왁자지껄하게 이어졌다. 별로 술이 세지 않은 주한이는 일찌감치 고꾸라졌고, 민혁이는 시뻘게진 얼굴로 자꾸 잔을 채워 달라고 졸랐다. 슬슬 눈이 풀리던 기태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담뱃갑을 들고 사라졌다.

“한 잔만 더! 딱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하 선생님….”

민혁이가 빈 잔을 들고 애원하듯 어깨를 옹그렸다. 내가 옛다, 하고 잔을 채워 주자 녀석은 몇 번이고 굽실거리며 잔을 소중하게 들었다.

“흐흐…. 감사합니다…. 정말로….”

생명의 은인이라도 만난 양 민혁이는 흐느끼는 소리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아껴 마셔.”

“예에, 예에.”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아껴 마시라고 했더니 녀석은 고분고분하게 소주 한 잔을 아껴 마시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던 동연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제 잔과 내 잔을 마저 채웠다.

조촐하게 둘이 건배를 하고 다시 잔을 비웠다. 동연이는 애매하게 웃음 띤 얼굴로 빈 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엎드려 있는 주한이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경아, 그 재벌 친구, 정말 가게 손님 맞아?”

“어, 왜?”

“예전에… 꽤 됐어, 몇 년 됐는데, 지영이를 찾는 사람들이 찾아왔었거든.”

술기운에 몽롱해져 가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동연이는 우리 집과 지영이네 집이 있는 길 초입에 살았다. 다른 친구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살던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사고로 난리 났다는 것만 알지 뭐, 동네 사람들은 그 집 사정 자세히는 모르잖아. 아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사 갔고. 그래서 난처해 보였는지 오지랖 넓은 우리 엄마가 네 이름을 말했나봐.”

나는 잠자코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 일의 시작에 동연이네가 있는 줄은 몰랐다. 동연이는 아직 고백할 말이 더 있다는 듯이 손을 꿈지럭댔다.

“근데 그 사람들이 태원그룹 사람들이었더라고. …별일 없었지?”

별일 없었지? 라는 말을 덧붙이며 동연이가 아직도 숨기는 게 있는 듯 눈치를 봤다. 동연이가 이후의 일을 안다면 곤란했지만 장명수가 그런 일이 퍼져 나가도록 두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오래된 일이라 가물가물한 척 미간을 좁혔다.

“아, 기억난다. 그 사람들이 태원에서 나왔던 거래? 별일 있을 게 뭐 있어. 나도 그냥 물어보는 거에 답해 준 게 다야.”

그제야 동연이는 한시름 놓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아니, 그놈들이 나중에 다시 와서 그러더라고. 네가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다른 누가 찾아오면 절대 한지영이랑 가까웠다는 거 말해 주지 말라고. 엄청 무게 잡고 말하니까 나는 또….”

예상이 가는 바였다. 아마 가짜 한지영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장명수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장 회장의 사후에는 더더욱 조심했을 터였다. 장 회장이 손자에게 남긴, 막대한 유산의 정체를 궁금해할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까.

“그래서 누가 또 찾아왔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내 걱정은 아깝다는 말과 달리 동연이는 진심이라는 듯이 고백했다.

“그랬으면 진작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했지. 하려고 했는데 그때 네가 워낙 정신이 없어 보여서….”

우리 엄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는지 동연이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말을 돌렸다.

“나도 마냥 남 생각만 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까 타이밍 놓친 거지.”

장난스레 한 말에 긴 변명이 따라 붙었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인 데다, 오히려 나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내게는 기회였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 태원 둘째? 그 친구는 그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거지?”

동연이는 자신의 무죄를 인정받고 싶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니….”

“선!”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더니 갑자기 엎어져 있던 주한이가 퍼뜩 고개를 들고 외쳤다.

“선을 그으라고 선을….”

“쟤 또 시작이다. 밤새 선 그으라고 하기 전에 슬슬 일어나자.”

동연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한이의 술버릇을 떠올리고는 몸서리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가게?”

마침 담배를 다 태웠는지 기태도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라도 몸 가눌 수 있을 때 가야지. 내가 송민혁 끌고 간다?”

동연이가 몇 방울 남지 않은 술을 애처롭게 털어 넣고 있던 민혁이를 일으켰다. 동연이가 지탱하기엔 민혁이의 덩치가 좀 컸다. 기태가 얼른 동연이를 돕자 자연스레 주한이는 내 차지가 되었다. 기태와 민혁이는 동연이네서 자기로 하고, 나는 일단 주한이네로 가기로 했다.

주한이도 역시 동연이처럼 이 동네에 살고 있었다. 이사를 다니긴 했는데 익숙한 동네가 좋다는 부모님 때문에 매번 이 근처에서 평수만 늘려서 옮겼다고 했다.

그런 얘길 떠올리면서도 취기 때문인지, 나는 멍청하게 내가 기억하는 주한이네로 향했다. 그사이 이사를 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덕분에 벽돌도 채 쌓지 않은 공사 터 앞에서 허무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 집 어디라고?”

그때까지도 선을 그으라고 백번쯤 중얼거리고 있던 김주한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대꾸했다.

“우리 집? 어디 보자… 아, 보람 슈퍼 2층.”

“씨, 길이 틀리면 말을 하든가. 보람 슈퍼…. 보람 슈퍼가 어디였더라?”

보람 슈퍼는 없어진 지 십 년도 더 된 곳이었다. 하지만 보람 슈퍼가 없어지기도 전에 우리 중 몇이 이 동네를 떠났고, 그 뒤에는 어떤 가게가 들어왔는지 몰라서 그곳을 여전히 보람 슈퍼 건물이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내가 살던 곳과는 좀 떨어진 옆 동네였던 터라 오랜만에 가려고 보니 위치가 잘 기억나질 않았다. 대충 저쪽 골목이던가. 습해진 공기에 불안감을 느끼며 나는 비틀비틀 김주한을 끌고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하경아….”

내가 이끄는 대로 마지못해 걸음을 따라 옮기던 김주한이 모처럼 정신이 든 것처럼 멀쩡한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한번만 더 선 얘기 하면 너랑 선 긋는 수가 있다.”

취한 사람 상대하는 게 일이라지만 성인 남성 하나를 끌고 이렇게 긴 거리를 걸으면 아무래도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으름장을 놨지만 김주한은 농담으로만 들린다는 듯이 웃었다. 평지도 아닌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끙끙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올 거 같았다. 낑낑대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걷고 있을 때였다. 김주한이 느릿한 소리로 말을 뱉었다.

“나 말이야, 전에는 평생 그 새끼 용서 못 할 것 같았거든.”

그 새끼. 굳이 이름이 아니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근데 얼마 전에 우리 누나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사람 보니까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

“너희 누나 결혼해?”

“그렇대.”

김주한은 남일 말하듯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뭐가 문젠데?”

“사람도 좋고, 인물도 좋고, 다 좋은데….”

사람 좋고 거기다 인물까지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김주한의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속으로만 대꾸하며 계속 걸었다.

“다 좋은데… 능력이 없어. 가난해.”

김주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나머지 말을 털어놓았다. 매형 될 사람을 비웃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았다.

“웃긴 게, 누나는 가난한 게 지긋지긋하지도 않은가? 왜 꼭 그 사람이어야 하지? 그런 생각 들더라. 내가 그런 이유로 무시당했으면서. 근데 화가 나더라고. 누나가 또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복잡한 감정이 얽혀 들었지만 알 것 같았다. 주한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싫더라. 너무 싫어서 잠깐 그 새끼를 이해할 뻔했지 뭐냐.”

“이해하지 마. 생각만 하는 거랑 행동하는 거는 다르니까.”

그 새끼는 돈으로 사람을 얼마나 괴롭힐 수 있는지 보여 주려는 듯 주한이뿐 아니라 주한이네 가족에게까지 갖은 행패를 부렸었다.

“모르지. 나도 돈 있었으면 그랬을지.”

김주한은 씁쓸하게 웃고는 다시 취한 척 내 쪽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하경아, 선! 선을 잘 그어야 한다고. 사람은 끼리끼리가 최고야.”

“…씨발, 진짜. 야, 너희 집 다 왔지? 나 갈래.”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골목, 아는 건물 앞이었다. 나는 김주한을 팽개치듯 밀쳐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야, 차 끊겼어. 자고 가.”

술이 좀 깼는지 주한이가 미안한 듯 외쳤다.

“너랑 자느니 택시비 내고 만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만 휘휘 흔들어 보였다. “그래, 그럼 잘 가라.” 벌써 거리가 꽤 벌어졌는지 멀찍이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다 잘 시간이라 더 크게 대답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우가 새벽에 비 온다고 했는데.

간신히 비탈길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택시를 잡으려면 더 바깥쪽 대로변으로 나가야 했다. 문제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 바람에 성급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발목을 좀 삐었다는 점이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당장 뛰기엔 무리가 있었다.

문을 닫은 상점의 천막 아래로 들어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무심코 건우의 번호를 찾아 누르려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는 어디가 고장 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김주한 그 새끼가 괜한 소리를 해서.

김주한이 같은 소리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윤성을 떠올려야 했다.

선을 그어야 하는 거 누가 모른대? 그 선을 어디다 어떻게 그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실제로 겨우 장윤성의 집을 나왔을 뿐, 나는 이사도 이직도 심지어 연락처를 바꾸는 것조차 해내지 못했다.

차라리 이은조가 내밀었던 봉투를 받았다면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두고 나온 흰 봉투를 잠깐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돈에 목숨을 걸 정도로 간절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사실 장윤성을 완전히 끊어 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내가 버틸 수 있도록 여지를 두고 있는 것뿐이었다. 스스로를 모진 새끼, 나쁜 새끼라고 몰아붙여도 한번 얽힌 관계를 단칼에 베어 내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7년 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떠난 뒤에는, 잠들지 못하고 삼키지 못하고 이따금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날이 숱하게 이어졌다.

그때는 지금보다 내가 버텨야 할 이유가 많았다. 이제 와서 같은 시간을 반복하게 되면 그때처럼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조금의 여지는 남겨 두고 싶었다.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딱 한 번은 보고 싶어서. 그게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날이더라도.

이제는 발목이 좀 나았을까 싶어 바닥을 툭툭 차 봤지만 여전히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폰을 쥔 손은 제멋대로 움직여 기어이 장윤성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 창을 켰다.

「언제쯤 데리러 갈까.」

「보고 싶어.」

이미 며칠이나 지나서, 이제는 유효하지 않을 메시지 아래 술기운을 빌려 짧은 답장을 썼다.

「지금.」

전송 버튼을 누를 용기는 없었다. 우유부단한 손가락이 화면 위를 한참 맴돌았다.

그러고 있는 사이 문득 빗방울이 어딘가에서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가까워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시야에 누군가의 발이 들어왔다.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깜빡인 순간 생생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확인한 얼굴은 나를 보고 싶어 했던,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이의 것이었다. 할 일 없는 신이 내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장윤성이 눈앞에 서 있었다.

“뭐야, 너 왜 여기….”

“비가 오길래.”

장윤성이 손에 든 우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너도 내가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을까. 하필 오늘이라는 걸. 비 오는 날 키스를 해서? 아니면….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장윤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데리러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네가 여기 서 있더라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굳이 이곳을 지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장윤성은 아주 뻔뻔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말을 이었다.

“이래도 우리가 인연이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척하더니 신경이 쓰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곳이 길거리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장윤성에게 어딜 붙들린 것도 아닌데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기울어진 우산 속에서 우리는 입술을 맞댔다. 짧고 가벼운 키스였지만 따듯했다.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떼던 장윤성이 속눈썹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웃었다.

“머리 잘랐네.”

“그냥, 조금….”

티가 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장윤성은 내 앞머리를 손으로 쓸더니 드러난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뗐다.

“예뻐, 얼굴이 잘 보여서.”

칭찬하는 게 얼굴인지 머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머리카락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늦은 시간인데다 비 때문에 시계가 좋지 않아 의미 없는 짓 같긴 했어도.

장윤성은 내가 그러고 있는 걸 재미있다는 듯 보다가 쥐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내가 우산을 받아들자 이번에는 안기라는 듯이 팔을 벌려 품을 열어 보였다.

“뭐야?”

장윤성은 턱짓으로 내 발목을 가리켰다.

“못 걷잖아, 너.”

“아니야, 이제 걸을 수 있….”

보란 듯이 발을 디디려 했지만 아직 통증이 있었다. 다친 발목이 버티지 못해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지는 걸 장윤성의 팔을 잡고 버텼다.

아, 그러고 보니….

“근데 발목 다친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웃어 보였다.

“인연은 개뿔, 야, 너 나한테 사람 붙였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찾아와.

“뭐면 어때. 내가 널 놓을 생각이 없으면 그게 인연이지.”

장윤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하고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나를 안아들었다. 나는 발이 땅에서 멀어지자 겁이 나 얼결에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놓칠 뻔한 우산까지 제대로 챙겨 들자 장윤성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장윤성의 집까지 가게 되면 이은조는 어떻게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장윤성의 품에서 쉽게 뛰어내리지 못했다.

“야.”

앞일을 걱정하며 내가 한 말이라고는 고작해야 이렇게 장윤성을 부른 것뿐이었다.

“응.”

그렇게 불러주는 것조차 기분이 좋다는 듯 그는 다정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기억… 그냥 안 찾으면 안 돼?”

망설임 없이 제 차를 향해 걷던 장윤성이 자리에 우뚝 섰다. 쏴아, 하는 빗소리만 어딘가에 먹먹하게 들어찼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장윤성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가 떠올리면 안 될 일이라도 있어?”

이은조는 장윤성이 그때 기억을 잊고 사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이제는 떠올린다고 다른 일이 생길 것도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했다. 아픈 기억은 없을수록 좋았으니까.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 말을 할 수도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표정이 들키지 않도록 나는 장윤성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럼 우리,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처음 장윤성과 약속했던 시간은 이제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 욕심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많은 눈들이 조금만 더 나를 관대하게 봐 준다면 같이 있고 싶었다.

남은 시간을 부여잡듯 나는 욕심껏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장윤성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야, 우산, 우….”

뭐가 그렇게 급한지 장윤성은 날 조수석에 앉히자마자 우산을 접을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닫으려 들었다. 내가 다급하게 외치자 장윤성은 걸리적거린다는 듯이 우산을 뺏어 길바닥에 버렸다.

내가 한 말을 무슨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차는 미친 속도로 새벽의 휑한 도로를 내달렸다.

***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장윤성은 나를 짐처럼 안아들고는 바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는 길에 발목을 만져 보며 이제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여러 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세에 눌려 나는 내려 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짐짝처럼 얌전히 들려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올라가면 그… 하는 거… 야?”

내가 한 말이긴 하지만 정말 얼빠진 질문이었다. 장윤성은 참을성 없는 시선으로 하나씩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럴 생각도 없이 사람을 홀렸어?”

내가 한 말이 어쨌다고 사람을 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윤성이 말하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번쯤은 정말 할 거냐고, 무를 기회를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무를 기회는커녕 그런 말이라도 꺼냈다가는 짐짝이 아니라 더한 꼴로 끌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발이 땅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했는지 장윤성은 현관에서조차 날 내려놓지 않은 채 제 손으로 신발만 벗겨 냈다. 오랜만에 이 집에 왔건만 내 방에 먼지가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나는 눈 깜짝할 사이 장윤성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나를 담는 시선이, 맞대는 입술이 사나웠다. 평범하게 굿 나이트 키스로 끝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물어뜯을 듯이 거친 키스에 기꺼이 입을 열었다.

쪽, 쪽,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날뛰었다. 옷 안으로 들어와 서슴없이 남의 속살을 만지고 돌아다니던 손이 그걸 알아챘는지 심장 위를 가만히 덮었다.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내가 긴장했다는 걸, 혹은 벌써 조금은 흥분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숨을 꾹 참았더니 슬그머니 입술을 뗀 장윤성이 그마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지 마.”

“왜, 정들까 봐?”

그렇다면 웃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웃었다.

이런 건 반칙이었다. 장윤성이 웃을 때마다 나는 가끔 현기증을 느꼈다. 아득한 어지러움에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릴수록 마주한 남자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졌다. 두어 번 쪽쪽 거리고 나더니 그 다음엔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심장을 덮었던 손은 다시 제 할 일을 찾아 분주히 살갗을 더듬었다. 체온 때문인가, 손이 닿는 곳마다 벌겋게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데일 것 같은 열기라도 좋아서 나도 장윤성의 셔츠 안으로 더듬더듬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기껏 손을 넣어 놓고도 허리 부근에서 머뭇거리자 장윤성은 직접 내 손을 쥐어 제 셔츠 단추에 갖다 댔다.

혀를 얽느라 정신이 없어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미끄러질 때마다 장윤성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주듯 내 손을 이끌었다. 어설픈 손길로 겨우 세 번째 단추를 풀었을 즈음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오는지 기분이 몽롱하게 들떴다.

“하경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장윤성이 이름을 불렀다.

“응.”

얌전히 대답을 했더니 볼과 턱, 귀 아래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하경아.”

하고 확인했다.

“으응.”

그냥 내가 대꾸하는 걸 듣고 싶었던 건지 장윤성은 다른 말을 잇지 않고 다시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묻었다. 이를 세우기도 하고 멍을 새기기도 하면서.

좀처럼 열을 낼 줄 모르던 몸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가슴께를 지분거리던 손이 작은 돌기를 발견하고는 어루만지듯 맴돌다가 꼬집듯 꽉 쥐었다.

“읏.”

갑작스런 통증에 나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뱉었다. 쇄골을 씹던 장윤성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내 셔츠를 가슴 위까지 밀어 올렸다. 아주 똑같진 않아도 저랑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몸을 신기한 듯 매만져 보더니 다시 입술을 댔다. 몸 아무데나 몇 번인가 꾹꾹 입술을 찍어 대고는 어느 샌가 딱딱하게 솟은 유두에 혀를 댔다. 조금 간지러운가 싶게 핥다가 또 여지없이 이를 세워 깨물었다.

이상했다. 그런 기분이 들 리 없는 곳인데 허벅지가 바짝 조여들고 발가락이 제멋대로 꿈질거렸다.

“으… 시, 싫어.”

낯선 기분이 싫어 손으로 밀어냈더니 장윤성은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장윤성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어쩐지 허전하고 직접 손을 대고 싶을 만큼 간질거렸다. 내가 떼어 놓고도 슬쩍 애가 달아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래?”

장윤성이 심드렁하게 되묻고는 빳빳하게 선 돌기를 손끝으로 누른 채 세게 문질렀다. 읏,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놀리듯 말을 마저 뱉고는 다시 가슴께에 입술을 댔다. 살을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나는 이따금 어깨를 움츠리며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손은 착실하게 아래로 내려가 내 바지 버클을 풀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골반을 타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다시 앞으로 돌아와 내 것을 쥐었다.

“흣….”

아래를 쥔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랫도리에서 시작된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긴장한 몸이 뻣뻣하게 굳자 가슴 아래쪽에 자국을 새기던 장윤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내 등에 팔을 두르고 다시 입을 맞춰 왔다.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과 밭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시 혀를 얽는 사이에도 장윤성은 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렸다. 엉덩이를 들고 다리를 조금 움직이자 달아오른 몸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장윤성의 손이 발목부터 맨 다리와 허벅지를 쓸며 회음부로 들어갔다. 굴곡진 곳마다 깊게 만져 대던 손가락이 페니스의 윗부분까지 올라왔다. 선단을 살살 문지르나 싶더니 다시 성기를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짓은 점점 빨라졌다. 긴 손가락이 페니스 아래의 살덩이까지 꾹꾹 눌러 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다리가 저들끼리 비비적거리다가 들썩거리다가 난리였다.

“으… 읏, 아… 자, 잠깐, 나… 읏.”

아직 장윤성은 바지 버클도 풀지 않았는데 혼자 절정을 맞을 것만 같았다. 성기를 쥔 손 위로 급히 손을 덮었지만 소용없이 계속되는 손짓에 나는 허리를 뒤틀었다.

“나, 나, 할 것 같….”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손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귀두 끝을 감싸 왔다.

“해.”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귀두 끝을 감싸 왔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는 내 아랫도리를 쥔 제 손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장윤성의 시선을 따라 나도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피아노를 치던 예쁜 손가락 사이로 사정의 흔적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액이 묻은 손은 그대로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다시 한 번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열중하는 얼굴을 올려다보자, 장윤성이 곧 내 시선을 눈치채고 이마에 키스해 주며 웃었다. 내가 제 손에 사정한 게 퍽 대견하다는 듯이.

젖은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여러 번 오다가 다물린 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낯선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고 장윤성의 옷깃을 꽉 쥐었다.

“싫어?”

다정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내가 싫다고 대답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꼭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고개를 저어 보였더니 살살 달래듯 맴돌던 손가락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나는 가만히 입술을 씹었다. 손가락 하나가 내 안에서 꼼질거리는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살살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던 장윤성은 유감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생각보다 좁네, 어쩌지.”

“…어? 그럼 어, 어떻… 읏.”

그럼 어떻게 되는데?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내 예상이 틀리길 바라며 다시 물으려던 찰나,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와 아래쪽이 빠듯해져 왔다.

늘어난 손가락이 내벽을 문지르며 점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장윤성이 점점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손장난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던지 장윤성이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아까 풀지 못한 셔츠 단추를 마저 풀어 벗고, 내 다리를 끌어 제 양 옆구리에 바짝 붙였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나고 내가 뭘 해 주기도 전에 열 오른 살덩이가 엉덩이에 닿았다.

그래도 몸에 뭐가 들어오는지는 봐야 할 것 같아 흘끔 고개를 들었는데….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비명이 새어 나갔다. 나도 모르게 물러나려 버둥대는 걸 장윤성이 발목을 잡아 다시 끌었다.

“너, 지, 진짜 할 거야?”

질질 끌려가 아랫도리를 맞대면서도 나는 이미 먹은 겁을 숨기지 못했다. 허리가 들리고 허벅지 안쪽이 장윤성의 살에 닿을 때까지 바짝 끌어당겨졌다.

엉덩이에 닿는 흉흉한 물건에 나는 다시 한 번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장윤성은 가볍게 키스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이제 와서 멈추긴 그른 모양이었다. 다시 엉덩이 사이로 단단히 선 페니스의 끝이 닿았다. 천천히, 그리고 빠듯하게 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팽팽하게 벌어진 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울먹이는 소리를 뱉고 말았다. 아파서 억울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젖히고 앓는 소리를 터트리자 장윤성이 다시 몸을 숙이고 내 이마며 볼이며 코에 입술을 댔다. 무슨 수를 썼는지 입술이 닿는 순간만은 고통이 사라졌다가, 떨어져 나가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씨, 너 나 좋아한다며. 좋아, 읏,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흣!”

“좋아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지. 아… 하경아… 힘을 좀 빼 봐.”

버거워서 투정을 하자 장윤성은 어르듯 내 등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훅 끼치는 숨이 뜨거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힘을 빼는데? 어느새 꽉 감긴 눈을 겨우 떠 아래를 흘긋 봤지만 아직 다 들어가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나라면 안 그럴… 으….”

결국 장윤성의 몸을 밀쳐 내며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뜨겁고 단단한 몸은 벽처럼 버텼다. 장윤성은 사정 이후 한풀 수그러든 내 페니스를 다시 쥐고 대꾸했다. 타인의 손을 타 예민해져있던 성기는 손짓 몇 번에 금방 다시 발기했다.

“그래, 다행이지? 그럴 일 없어서.”

“뭐? …야!”

제 것보다 작다고 빈정대나 싶어 발을 버둥거리는 순간 장윤성이 내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다른 상대하고 할 일 없을 거란 소리야.”

그러더니 손을 바짝 끌어당겨 단번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윽, 아….”

버겁고 빠듯한 감각에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눈물까지 찔끔 샜는지 장윤성이 눈가에 키스를 했다.

“흣….”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괜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픈데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고통 뒤에 뒤따르는 이상한 감각에 연신 허벅지가 조여들었다.

기껏 삽입을 해 놓고도 장윤성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나를 꽉 끌어안고 기다렸다. 맞닿은 살의 열기에 굳은 몸이 천천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배 안쪽의 감각이 이상해서 허리를 들썩이자 장윤성이 천천히 움직였다. 굳이 아프단 말을 쏟아내지 않았지만 장윤성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그제야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숨이 터져 나왔다.

“하경아.”

장윤성이 몸을 조금 일으켜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숨을 몰아쉬느라 가쁘게 들썩거리는 내 가슴을 매만지면서 그는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운을 뗐다.

“저번에, 소파에서 착각했던 그놈이랑은 왜 안 했어?”

내가 처음이라는 걸 알아챈 듯한 말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입을 벙긋할 생각도 못 하고 눈만 크게 떴다. 멍하게 그를 응시하는 동안 장윤성은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내가 아픔에만 집중하지 않게 하려 던진 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팽팽하게 벌어진 곳이, 배 안쪽이, 허리가 저려 왔다.

“읏….”

조금씩 커지는 움직임에 몸이 밀려나자 그는 내 팔목을 꽉 쥐었다. 덕분인지 배 안쪽 깊은 곳까지 뭔가가 울컥울컥 치대기 시작했다. 또 울먹이는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이렇게 남자 몸도 좋다고 안을 수 있는 놈인 줄 알았으면 고생고생 해 가며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쓸 필요도 없었는데. 슬쩍 물러났다가 다시 아랫도리를 채우는 빠듯한 감각에 몸을 비틀면서도 나는 떠듬떠듬 대답을 했다.

“그 새끼, 성… 격이, 흣, 개 같… 아서, 윽!”

아프게 하는 게 괘씸해서 험담 좀 하려 했더니 제 욕하는 걸 눈치라도 챈 것처럼 갑작스레 깊은 곳까지 훅 밀려들어 왔다. 하던 말도 못 마치고 다시 입술을 깨물자 녀석은 다시 몸을 숙여 대꾸했다,

“아아, 그랬어?”

묘하게 천연덕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뒤이어 생각할 틈도 없이 녀석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윤성이 몸에서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마다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내달렸다. 허공에서 버둥대던 손이 장윤성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러자 그는 내 몸을 바짝 안으며 제 어깨에 팔을 두르라고 재촉했다. 장윤성이 시키는 대로 두른 팔을 꽉 조였더니 장윤성의 몸짓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흣, 으읏, 아…!”

차라리 아프기만 하면 나았을 텐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이상한 감각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무리 꽉 끌어안고 있어도 세게 쳐올리면 여지없이 몸이 들썩거렸다.

“읏… 흡…!”

매달려 버티려 해도 쾌감이 울컥 치솟을 때마다 팔에 힘이 풀려 미끄러져 내렸다. 몸이 크게 들썩거리는 게 싫어 아등바등 매달리다 손톱을 세우고 말았다. 놀라서 팔을 풀려 하자 장윤성이 귓가에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으응, 읏, 아… 아, 하읏.”

치덕치덕 젖은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으려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이를 대기만 해도 아팠다. 결국 벌어진 입술에서는 속절없는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바짝 선 내 것이 몸이 흔들릴 때마다 내 배에, 장윤성의 배에 닿았다. 미칠 것 같았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다시 사정할 것만 같았다.

“아, 아, 으… 으… 읏!”

참지 못하고 뱉어 내던 신음이 일순간 멈췄다. 내 몸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장윤성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고 나는 굳은 것처럼 숨을 멈췄다.

내가 이상한 걸 눈치챈 장윤성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 나는 결국 아… 하고 멈췄던 숨을 뱉었다. 동시에 아래에서 터져 나온 걸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없어 장윤성에게 바짝 매달려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뒤의 자극으로만 사정했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 장윤성이 손으로 배에 흩뿌려진 액체를 문질렀다. 남자랑 몸을 섞고으면서 뒤로만 간 게 수치스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열이 올랐다.

“하경….”

“…아무 말도, 흣, 하지 마.”

사정감에 달뜬 몸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장윤성이 뭐라고 놀릴 것 같아 한 말조차 열감에 젖어 있어 우스웠다.

장윤성이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품에서 숙였던 몸을 조금 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손으로 가렸더니 간신히 드러난 귓가와 손등에 아무렇게나 키스를 퍼부었다. 아무래도 평생 할 키스를 오늘 다 할 모양이었다.

“좋아, 하경아.”

내 손을 떼어 내려 손목을 쥔 녀석이 놀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뭐가 좋은데? 눈을 가린 손가락만 살짝 펴서 확인한 녀석의 얼굴도 평소답지 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손으로 다시 젖은 배를 문지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몸에 반응해서 좋아. 예쁘고. 사랑스러워.”

어느 샌가 젖어 버린 내 머리카락을 쓸어 준 장윤성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감해져 있던 몸이 다시 제멋대로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더, 더 할 거야?”

몸에 힘이 풀려서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 아직 한 번도 못 했는데?”

장윤성이 조금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주먹을 쥘 힘도 없고 소리를 참을 때마다 깨물 입술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장윤성이 천천히, 살살 움직이는 것만으로 몸 여기저기가 경련하듯 튀었다. 장윤성의 움직임을 익힌 허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썩거렸다.

“그, 그만… 나, 나, 못, 읏, 하겠… 어.”

하지만 장윤성이 또 몸을 숙여 오기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 어깨에 팔을 둘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장윤성이 쳐올릴 때마다 미끄러져 내렸다. 그때마다 장윤성은 내 몸을 바짝 끌어안고 버텼다. 낯선 쾌감이 자꾸만 내 몸을, 의식을 흔들었다.

“읏, 윽, 으읏, 나, 나, 그, 그마… 안… 모, 못 해.”

숨을 뱉을 때마다, 신음을 뱉을 때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할퀴고 때려도 단단한 몸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이 버텼다.

이제는 고통이 심한 것도 아닌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눈물을 더 쏟아내라는 듯이 장윤성은 더욱 세게 몰아쳐 왔다.

아, 아,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우는 소리로 못 한다고 다시 소리를 지르자 순간 장윤성이 움직임을 멈췄다. 뜨거운 손이 다시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나는 장윤성의 품 안에서 몸을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내 말을 들어주려는지 내 안에 들어온 게 천천히 빠져나갔다. 나는 가만히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장윤성의 것이 전부 빠져나가기도 전에 엉덩이 골을 타고 뜨겁고 진득한 액체가 흘렀다.

“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내가 입술을 연 채 당황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제 끝난… 건가. 희뿌옇던 시야가 천천히 맑아지는 게 이상하리만큼 허전했다.

하지만 곧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흐르는 액체를 쓸어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사정 이후에도 여전히 뜨겁게 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아무래도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으… 나, 나는… 못… 더는 못….”

기운 없는 손짓으로 장윤성의 몸을 밀어내면서 다시 한 번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조금 식은 몸을 달구듯, 장윤성의 손이 퉁퉁 부은 유두를 꼬집고 들썩이는 배를 매만졌다. 허리를 잡고 제 살과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끌어당기며 장윤성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그래. 정말 못 하겠을 때까지만 하자.”

“…아니, 나는.”

나는 지금도 못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할 말을 다 안다는 듯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넌 거짓말만 하니까.”

***

천둥소리에 새벽 내내 잠을 설치다 결국엔 눈을 떴다.

이미 한참 전에 해가 떴을 시간인데도 날씨가 흐려서인지 불 꺼진 방은 어둑했다.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눈알을 굴리다가 곁을 확인했다.

곱게 눈을 감은 장윤성이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덜컥 걱정 될 만큼 얌전하게.

나는 어쩐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더듬더듬 장윤성의 볼을 매만졌다. 다행히 따듯했다. 호흡을 따라 몸이 작게 들썩이는 것도 느껴졌다. 보드랍고 따듯한 살결이 좋아서 가만히 만지고 있었더니 조금 더 큰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졌다.

곧 긴 속눈썹 아래로 아직 졸음을 떨치지 못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 때문에 깬 티가 역력했음에도 그는 반가운 듯이 웃었다.

“왜 더 안 자고. 피곤할 텐데.”

“아냐, 더 잘 거야. 잠깐 깼어.”

“비 와서?”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방금보단 조금 더 또렷해져 있었다.

“응….”

비 오는 날이 싫다고 했던, 언젠가 그치듯 한 말을 기억하고 한 소린지, 그저 빗소리가 시끄러워 물어본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장윤성은 나를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많이 불편해?”

“어?”

“새벽 내내 끙끙 앓던데.”

뒤척일 때마다 거슬리는 통증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자면서 앓는 소리를 낼 만큼 아픈 건 아니었다. 앓는 소리를 냈다면 아마도 꿈자리가 사나운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애원했음에도 몰아붙인 게 괘씸하기도 해서 엄살을 좀 부려 보기로 했다.

“죽는 줄 알았어.”

장윤성은 대꾸 없이 다시 한 번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미안하긴 하지만 반성을 하진 않겠다는 뜻인가. 하지만 일부러 괴롭힌 것도 아니고 상호 합의하에 벌인 일에 마냥 남 탓만 할 수 는 없어서, 나는 장윤성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관대한 척 말했다.

“미안하면 이따 아이스크림 사 와.”

“아이스크림?”

“응. 손에 들고 먹는 거 말고 떠먹는 거로. 영화 보면서 느긋하게 먹을 거야.”

“그래.”

장윤성은 선뜻 대답하고는 이불을 내 턱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포근하고 따듯한 기분에 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는 그나마 잦아든 것 같았지만 빗소리는 여전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장윤성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무서운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경아.”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득한 어둠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경아.”

다시 생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결국 부스스 눈을 떴다. 이번엔 말끔하게 옷을 챙겨 입은 장윤성이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 아직 비 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묻자 장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 잘래?”

몸이 찌뿌듯하고 피곤했지만 더 잘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일어날게.”

하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불 밖으로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는 게 고작이었다. 별거 아닌 그 일에도 등이며 허리 근육이 뻐근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래, 마침 손님도 왔어.”

손님? 손님이라고? 막 깬 정신이 아주 또렷하진 않아도 이 상황에 손님이라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은 알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장윤성의 옆구리쯤에서 노란색 털 뭉치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

“인사해, 풍작아. 형 애인이야.”

말을 알아들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진 골든레트리버가 침대에 앞발을 올렸다. 얼굴이 꼭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가움에 손을 뻗었더니 녀석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장윤성과 같은 냄새가 나서 그런가, 풍작이는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내 손에 제 얼굴을 비비다가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핥았다. 마치 날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얘가 풍작이라고? 그보다 누가 네 애인이야?”

헤어질 무렵에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풍작이를 쓰다듬는 와중에도 거슬리는 말을 지적하자 장윤성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았다.

“밤새 몸을 섞어 놓고 눈 뜨자마자 그런 소릴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이하경 씨 나 가지고 논 거야?”

빈정거리는 투였지만 진지하게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럼 어쩔 건데?”

그래서 뻔뻔하게 한 대꾸에 장윤성이 다시 웃었다.

“좋지, 뭐. 나쁜 사람 매력 있거든.”

“뭐…?”

호구 짓이 체질인가.

“가자. 아이스크림 먹기 전에 아침부터 먹어야지.”

아침이라는 소리에 시계를 흘끗 봤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아침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사 온 걸까. 지난밤의 여파인지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 엎드린 채 다리부터 내려놓고 서려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어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양, 나는 침대 시트를 쥔 채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마치 익숙하지 않은 일을 처음 했을 때처럼 몸 여기저기가 후들거렸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 거 같아.”

장윤성이 급히 다가오기에 멍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새벽 내내 앓는 소리를 냈다더니 꿈 탓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나려 애를 쓰자 장윤성은 어제 이 방에 들어올 때처럼 나를 안아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풍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우리의 뒤를 쫓았다.

“뭐야, 살 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장윤성이 나를 내려놓은 식탁에는 고봉으로 담은 쌀밥과 고깃국… 그 와중에도 내 취향을 반영했다는 듯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갈비탕이 놓여 있었다. 딱 봐도 맞은편에 놓인 것보다 두 배쯤은 커 보이는 그릇에 담겨서.

“저녁엔 장어 구워 오는 거 아냐?”

“먹어 준다고 하면 잘하는 데서 구해 올게.”

제 체력을 쫓아가지 못하는 내가 어지간히 못 미더웠는지 장윤성은 숟가락까지 직접 쥐여 주고 나서야 자리에 마주앉았다. 의도야 어쨌든 따듯한 국물은 달게 넘어갔다. 고깃국 냄새를 맡았는지 풍작이는 타닥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식탁 주변을 맴돌았다.

“얘 배고픈가 봐.”

“걱정 말고 너나 많이 드시죠. 걔는 이하경 씨 잘 때 많이 먹었으니까.”

“근데 어쩐 일이야?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아니. 주말이라 조카들 놀러갔다기에 심심해할까 봐 데려왔어.”

장윤성이 성의껏 자른 깍두기를 내 앞에 놓아 주며 대꾸했다. 아이스크림, 갈비탕 포장에 풍작이 픽업까지, 내가 잠든 사이 퍽 바쁜 아침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있는 건데?”

“일단 내일까지만. 조카들이 워낙 찾아서 오래는 못 있어.”

풍작이는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좋아서, 혹은 나를 기억해서라기보다는 고깃덩이를 얻어먹기에는 내가 장윤성보다 만만해 보인 탓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지. 나도 네 주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주는데.

유감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풍작이는 털 결이 깨끗하고 반지르르한 게 누가 봐도 관리가 잘 된 개였다. 우리 집 개가 되었다면 좁은 집에서 마음껏 뛰지도 못하고 이따금 외로워하며 지냈을 텐데. 그때 그렇게 헤어진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욕심을 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원하면 며칠 더 데리고 있어도 돼.”

“아니야. 조카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벌써 아쉬워서 풍작이를 끌어안았다. 머릿속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세면서. 언젠가는 이번에도 욕심을 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거실 소파에 풍작이와 드러누웠을 때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엌 정리를 얼추 마친 장윤성이 영화를 틀어놓고 아침에 사 왔다던 아이스크림을 꺼내 왔다. 그냥 슈퍼에서 파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사 오라는 뜻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훨씬 큰 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걸 조그마한 스푼으로 낑낑대며 떠먹자니 금세 싫증이 났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고 장윤성의 허벅지를 벤 채 누웠다.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풍작이가 꾸물꾸물 품을 파고들었다.

“초코 맛?”

보다 못한 장윤성이 직접 떠 줄 기세로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벌렸다. 곧 초코 맛 아이스크림이 입에 들어왔다. 남이 고생해서 먹여 주니 또 먹을 만했다. 입에 들어온 걸 녹여 삼키고 다시 아, 하고 입을 벌렸더니 또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다. 맞장구를 쳐 주고도 어이가 없긴 했던지 장윤성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하경 씨는 정말 나랑 살아야겠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입을 열기도 귀찮아서 왜, 하고 눈짓으로 대꾸했더니 퍽 겸손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스크림 떠먹여 줄 애인 필요하지 않아?”

이번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은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7년 전에 까였던 말로 다시 수작을 거는 걸 보면.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장윤성은 재촉하지 않았다. 종종 입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스크림은 차가웠고 품에 안은 노란 털 뭉치는 따듯했다. 그리고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소리를 내면서.

***

비는 일요일 오후까지 계속 내렸다. 날이 좋았으면 풍작이랑 산책이라도 나갔을 텐데.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두 사람과 한 마리는 주말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비가 와서인지 처음 하는 일을 너무 과하게 해서인지 컨디션이 쉽게 회복되질 않았다. 장윤성과 함께 침대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안해서 내 방으로 돌아가려 했더니 집주인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왔다.

“하경아, 네 방 이제 없어.”

아, 정확히 말하면 침대가. 장윤성이 덧붙인 소리에 방문을 열었더니 정말 침대만 사라진 방이 나를 반겼다.

하긴, 그렇게 나가면서 전과 같은 형태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별수 없이 장윤성의 침대로 돌아가 함께 잤다. 다행히 장윤성도 잠이 모자랐는지 깊게 잠을 잤다. 신기할 정도로 오랫동안.

낑, 끼잉….

침대 위에 두 발을 올린 풍작이가 조심스레 내 손등을 핥았다. 사람이 종일 기절해 있으니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형 안 죽었어.”

내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자 낑낑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금방 친해졌네.”

자는 줄 알았던 장윤성이 언제 깼는지 내 허리에 두른 팔을 당기며 소리를 냈다.

“원래 개들은 사람 좋아하잖아.”

개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지만 풍작이 같은 골든레트리버는 사람들에게 특히 친화적이라고 들었다.

장윤성은 긍정하는 대신 내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뭐 좀 마실래?”

“커피. 달게 타 줘.”

“그래.”

장윤성이 방을 나가는 걸 보면서도 풍작이는 눈길만 힐끔 줄 뿐 가만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처럼 데려와 놓고 손님 취급이 영 엉망이었다.

“너 이제 ‘물어 와’도 할 줄 안다며?”

얼핏 들었던 말을 했을 뿐인데 풍작이가 ‘물어 와’를 알아들었는지 바쁜 걸음으로 방문을 빠져나갔다. 처음엔 거실로 향하더니 찾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듯 두리번거리는 모양새로 방문 앞을 여러 번 오갔다. 뭘 찾는데 저렇게 바빠?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개가 하는 생각이 궁금해서 풍작이의 뒤를 쫓았다. 코를 킁킁거리며 문마다 냄새를 맡고 다니던 녀석이 문이 열려 있던 서재로 쏙 들어갔다.

곧 서재에서 우당탕하며 잡동사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서재에서 저러면 안 되는데.

서재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단순한 인쇄물 외에 장윤성이 직접 필기한 종이나 노트가 많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얼른 서재 문을 열고 쫓아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종이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심지어 휴지통도 쓰러져 있었다.

“어휴, 이 사고뭉치야.”

장윤성 말로는 천재견이 따로 없다더니 덤불 속에 갇혀서 낑낑댈 때랑 별반 다른 게 없어 보였다. 내가 타박하는 걸 알아챘는지 풍작이는 주눅 든 얼굴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나는 얼른 주저앉아 큰 종이부터 주워 들었다. 대충 책상 위에 있었을 법한 것을 챙겨 놓고 엎어진 쓰레기통을 세웠다. 구겨진 종이 뭉치 몇 개 아래로 낯익은 물건이 드러났다. 내가 별장에서 챙겨왔던 그 다이어리였다.

낡은 밴드가 결국 끊어진 듯 빽빽하게 끼워 놓았던 메모지가 아무렇게나 쏟아져 나와 있었다. 중요한 물건일까 봐 조심스레 다뤘건만 결국 휴지통행인 모양이었다.

다이어리와 메모지 낱장을 그대로 통에 넣으려는데 툭, 하고 작은 물건 하나가 종이 사이에서 먼저 떨어졌다.

어…?

나는 굳은 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이게 왜….”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번 생각해 봐도 여기 있을 리 없는 물건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소란을 눈치챈 장윤성이 서재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는 물건을 손에 쥔 채 장윤성을 돌아봤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열었다가 급히 다물었다. 경솔하게도 물어볼 뻔했다.

내 반지가 왜 여기 있는지.

굳이 자세하게 확인할 필요도 없이 손에 쥔 반지는 얼핏 봐도 300원짜리 장난감 반지는 아니었다.

이건 분명 7년 전, 내가 장윤성에게 받았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형에게 건네고 왔던 반지였다.

“풍작이가 이런 거야?”

아직 정리가 덜 된 바닥을 둘러보며 장윤성이 물었다.

“어? 아…. 내가 ‘물어 와’ 할 줄 아냐고 했더니 갑자기….”

‘물어 와’라는 소리에 풍작이가 또 바닥에 붙였던 엉덩이를 떼고 몸을 들썩거렸다. 장윤성은 그런 풍작이를 다독여 다시 앉히고는 정리를 도우려는 듯이 팔을 걷고 나섰다.

“공 찾으러 왔었나 보네.”

“공?”

“조카들이 갖고 놀다 던져 놓은 거, 찾아서 물고 오는 것도 풍작이 일이거든.”

그래서 여기저기를 뒤적였던 걸까.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장윤성은 부지런한 손길로 바닥에 흩어진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운 것은 대부분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주워 든 다이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망설이다 꺼낸 말에 휴지통으로 향하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장윤성은 그 안에 반지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다이어리와 함께 그걸 버리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반지라는 건 기억에 없다는 이유로 쉽게 버릴 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별장에서 가져온 거 같은데.”

“맞아.”

내가 다이어리를 가리키자 장윤성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명쾌한 대답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반지의 존재를 몰랐던 걸까. 몰랐다면 반지를 숨기는 편이 낫겠지만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수상한 일이었다.

반지를 돌려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장윤성은 내 얼굴과 제 손의 물건을 번갈아 보더니 다이어리 안쪽을 가볍게 훑었다. 뭔가를 찾는 것 같은 눈치라 얼른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이거, 그 안에서 나왔어.”

모르는 물건인 것처럼 건네자 장윤성은 별말 없이 받아들었다. 반지의 존재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장윤성은 뜻 모를 손길로 작은 금붙이를 매만지다가 결국 다이어리와 함께 휴지통에 넣었다. 반지에 관한 기억을 조금도 찾지 못한 양 무심한 동작이었다.

“그냥 버려도 돼? 비싼 거 아니야?”

“비싸도 주인이 없으면 소용없는 물건이잖아, 반지는.”

주인 잃은 반지라는 걸 알고 있는 말투였지만 나를 비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떠보듯 한 번 더 묻고 말았다.

“누구 거였는데?”

장윤성은 나를 흘끔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누구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건 아닌 것 같네.”

모양새가 제가 쓸 물건은 아니라는 듯이 장윤성은 단정하게 생긴 손을 펴 보였다. 나는 납득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그머니 손을 감췄다. 그 반지는 내 손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크기만은 꼭 맞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주인이 있었으면 한번쯤 찾으러 왔겠지.”

섭섭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반지를 다이어리 사이에 넣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장현성이 내게서 반지를 받아 간 이유는 내가 장윤성과 인연을 완전히 끊길 바라서였다. 그런데 기억도 없이 깨어난 장윤성에게 굳이 그 반지를 돌려줬다고? 그리고 장윤성은 기억에도 없는 반지를 받아서…. 잘 들어맞지 않는 일을 속으로 정리해 보는 사이 장윤성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 치웠으면 가자. 커피 얼음 다 녹겠다.”

내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장윤성은 재촉하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휴지통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

새벽녘, 풍작이의 발소리에 잠이 깼다. 거실 한구석에 푹신한 담요 몇 장으로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사람이 없어서 불안했는지, 집 안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던 녀석은 결국 우리가 누워 있는 방까지 들어왔다. 뭘 할지 궁금해서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더니 침대 주변을 서성이다 그 아래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렸다.

아무래도 녀석에게 침대는 허락 없이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이 밝으면 출근길에 일찍 데려다줄 거라고 했던가. 나는 장윤성이 자는 걸 확인하고는 풍작이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형이랑 소파에서 자자.”

장윤성이 좁다고 했던 소파는 사람 하나와 큰 개 한 마리가 겹치듯 눕기에는 적당했다. 풍작이는 체온이 높고 북실북실해서 함께 눕자 담요가 없어도 괜찮았다. 어둑한 곳에서 내게 몸을 바짝 붙이고 잠을 청하는 풍작이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녀석이 날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의 기억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나를 알아보긴 하는지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보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나도 다시 잠을 청했다. 괜히 풍작이와 옛 이야기를 하다 장윤성이 듣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꼭 예전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 시간에 말 못 하는 짐승을 붙들고 혼자 중얼대는 꼴을 들키는 것도 역시 좋진 않을 것 같았다.

의미 없는 생각을 이어 가다 어느 순간엔가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나를 보고 있는 장윤성의 얼굴이었다.

눈을 떠 보니 장윤성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졸음이 가득한 눈동자. 마치 자다가 급히 뛰쳐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소파 아래에 주저앉아 무척이나 심기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건드리지만 않았다 뿐이지 처음부터 나를 깨울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불을 이렇게 환하게 켜 둔 걸 보면. 곁눈질로 본 창밖은 아직도 컴컴했다.

눈을 비비는 척 시간을 끌며 장윤성이 이 시간에 이러고 있어야 할 이유를 고민했다. 아직 잠 이 덜 깬 멍청한 머리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도저히 모르겠다는 뜻으로 눈을 껌뻑여 보였더니 장윤성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네 방의 침대, 거실의 소파, 또 뭘 치워야 얌전히 내 옆에서 잘까.”

“…뭐?”

졸린 눈으로 저런 소리를 해 대는 게 영락없이 잠투정 하는 어린애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짧게 헛웃음마저 튀어나왔다. 까칠한 말투나 표정 하나 숨길 정신도 없을 정도면서 기어이 거실까지 쫓아 나온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나는 네가 침대에 풍작이 올려놓는 거 싫어할까 봐….”

그래도 소파를 치운다는 소리에 냉큼 억울한 척 변명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침대, 소파, 뭘 치우든 장윤성의 옆에서 잘지, 바닥에서 잘지는 내 맘대로 할 테지만, 그래도 소파가 없어지는 건 싫었다.

내 대답에 장윤성은 풍작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사람 말소리에 깼는지 풍작이도 졸음에 젖은 눈을 힘겹게 뜬 채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뭘 더 싫어할지 알면서.”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른 척하고 싶은 거겠지.”

기껏 저를 생각해서 풍작이를 데리고 나왔건만 여전히 심술이 난 말투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침대에 털이 날리든 어쩌든 나 편한 대로 할 걸 그랬다.

장윤성은 내 말은 하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툴툴거리면서도 안기라는 것처럼 팔을 뻗었다.

“이리 와. 풍작이랑 들어와서 자.”

“소파 안 치울 거지?”

“봐서.”

그 말에 나는 순순히 장윤성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는 나를 안아들고 나서야 누그러진 목소리로 풍작이를 불렀다.

셋이 침대에 나란히 눕고 나니 어쩐지 코끝에 마른 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엔 별장 정원에서 누워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는데.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스치던 바람 대신 장윤성의 손길이 이마를 매만졌다. 이런 사소한 해프닝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도시의 새벽은 짧은데도, 남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짓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당장 몇 시간 뒤엔 출근을 해야 하면서. 내내 머리맡을 맴돌던 졸음은 기회를 틈타 다시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하경아.”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포근하게 녹아드는 기분이 좋아서 눈을 뜨진 않았지만 으응, 하고 느릿하게나마 대꾸를 해 주자 장윤성이 잘 자라는 인사를 이상하게도 속삭였다.

“잘 자. 나보다 먼저 깨지 말고.”

반쯤은 잠결인데도 영 의아한 말이라 미간을 좁혔더니, 어둠 속에서도 그걸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장윤성이 제 사정을 덧붙였다.

“내가 눈을 뜰 때마다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기억이 없으니 별 의미 없는 소리일 텐데도 그 말에 결국 잠이 깨 버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눈을 떴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윤성의 얼굴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실내가 어두운 것을 확인하고 다시 감았다. 결국 가볍게 한 투정일 테지만 들어주기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고개를 조금 기울여 장윤성의 품에 머리를 댔다. 닿아 있으면 눈을 떠 확인할 필요도 없이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모두에게 기분 좋은 밤이었으면 했다. 나는 장윤성의 바람대로 제일 늦게 일어났다. 그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풍작이를 데려다주려면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탓에 평소보다 서둘렀다고 했다.

“며칠 더 데리고 있을까?”

못내 아쉬워 계속 풍작이를 쓰다듬고 있었더니 결국 장윤성이 그런 소릴 했다.

“아니야.”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더 정을 붙여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사람은 보고 싶다 말이라도 하지 풍작이는 그런 것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장윤성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풍작이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내가 저를 따라 나오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끝내 신발을 신지 않는 나를 보고는 결국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집을 나섰다.

잘 가. 잘 지내.

나는 닫힌 문 앞에 서서 뒤늦은 작별 인사를 했다.

***

소파 틈에서 또 풍작이의 털이 나왔다. 개가 있을 때야 어디든 날아다니는 털이 당연했지만 없는데도 털이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풍작이가 돌아가고 이틀, 그동안 청소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집 안 곳곳에서 노랗고 희끗한 털이 튀어나왔다. 집이 넓어서 꼼꼼하게 하지 못했다지만, 이쯤 되니 장윤성이 왜 풍작이가 침대에 못 올라오도록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여기 있는 털 다 모으면 풍작이 한 마리 만들겠다.”

방금 발견한 풍작이 털을 주우며 투덜댄 말에 부엌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던 장윤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고 껴안고 뒹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니 우스운 모양이었다.

“오후에 청소할 사람 오라고 할게.”

간만에 반가운 소리였다. 전 같으면 내가 하고 말겠다고 속으로나마 투덜댔을 테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굳이 풍작이 털이 아니더라도 집 안 곳곳이 어수선한 상태였다. 마치 한동안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장윤성과 관계를 갖고 깨어난 날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 뭘 먹고 살았는지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세탁실에 빨래도 꽤 쌓여 있었다. 어제 장윤성이 출근한 사이 내가 정리를 하려고 애를 써 봤지만 익숙하지 않은 남의 집 살림을 수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추측컨대 본가 도우미가 마지막으로 온 지 꽤 된 것 같았다.

“몇 시에?”

오늘 온다면 아마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길게 자리를 피해 줄 요량으로 시간을 물었더니 장윤성이 뜻 모를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봤다.

“안 숨어도 돼. 집에서 오는 사람 아니니까.”

“일하는 사람을 바꿨다고? 갑자기 왜?”

“전에 오던 사람이 허리를 다쳤다나 봐. 다른 사람 보내 준다고 하길래, 어차피 낯선 사람이면 우리 집하고 관련 없는 새 사람인 게 나을 것 같아서. 괜히 도망 나가지 않아도 되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설명한 장윤성은 이제 조금 식었을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도망이라는 소리에 나는 괜히 찔려 눈을 굴렸다. 실제로 내가 그와 일말의 접점도 없었다면 굳이 매번 피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낯선 사람하고 둘이 집에 있는 것도 불편할 거 같은데….”

그래서 괜히 핑계를 하나 더 붙였다. 꼭 그의 가족에게 내 존재를 숨기려는 이유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도 처음 오는 사람이니까, 뭐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 줘야지.”

장윤성은 별다른 뜻은 없는 양 달래듯 말했다. 하긴, 벌써 이 집에서 꽤 생활한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살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첫날부터 혼자라면 역시 당황스러울 터였다. 불편해 봤자 반나절이고 말 일이었다.

“그러지, 뭐.”

결국 그렇게 대꾸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장윤성은 퍽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할 말을 마친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웬일인지 연한 색의 커피였다. 이젠 좀 덜 죽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약에 물을 많이 탄 걸 보면.

오후쯤 장윤성이 예고한 대로 한 사람이 집을 찾아왔다. 별장에서 만났던 도우미 아주머니처럼 넉살이 좋거나 살가운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장윤성의 생각과 달리 가벼운 인사와 통성명, 아주 필수적인 이야기를 빼고는 달리 내게 묻는 것도 없었다. 집안 구조와 물건 위치를 파악하느라 머뭇거린 것도 잠시뿐 처음 온 사람답지 않게 금방 할 일을 찾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에 들어가 있다가 하품이 날 때쯤 커피를 가지러 다시 나왔다. 그사이 거실 청소를 끝낸 도우미 아주머니는 각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윤성이 있었다면 조금 더 번거로운 과정으로 마셨겠지만, 혼자 마시는 커피로는 믹스 커피면 충분했다. 찬장 구석에서 믹스 커피를 찾아 한 봉지 꺼내 들다가 부스럭부스럭 바쁜 소리가 나는 방 쪽을 한 번 보고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방에서는 별 대답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듣지 못했거나. 대답은 못 들었지만 우선 컵을 두 개 꺼내 뜨거운 물을 채웠다. 가루를 털어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을 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거 서재 휴지통인데 비워도 될까요? 혹시 버리면 안 되는 게 있나 해서….”

돌아보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서재 휴지통을 잘 보이게 들고 서 있었다. 풍작이가 엎었던, 다이어리와 반지가 들어 있었던 휴지통. 척 봐도 뭐가 적힌 종이뿐이라 버리기 꺼림칙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중요한 건지 아닌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장윤성이 실수로 중요한 걸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나는 몸을 돌려 아주머니 몫으로 타 둔 커피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비워도 될 거예요. 커피 괜찮으시면 이거 드시고 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방으로 향하면서 나는 두 번이나 버려진 물건을 생각했다.

***

종일 쓸고 닦아야 할 것 같던 청소는 의외로 금방 끝났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돌아간 뒤 나는 서재의 휴지통을 다시 확인했다.

휴지통은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반지는 왜 다이어리 속에 있었을까. 장윤성이 넣어 둔 거라면, 장현성은 왜 동생에게 기억하지도 못할 물건을 돌려주었을까. 누구보다 나와 장윤성의 인연이 끊어지길 바라는 사람이었을 텐데.

어떤 가정을 해 봐도 그럴듯하게 들어맞는 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반지가 오랫동안 다이어리 속에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이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장윤성도 반지를 버렸겠지.

어차피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궁리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올려 두었던 폰이 때마침 화면을 밝혔다 꺼졌다. 장윤성이 메시지라도 보낸 건가 싶어 봤더니 뜬금없이 부재중 전화만 여럿 쌓여 있었다. 내 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 한두 번이라면 광고, 혹은 잘못 걸린 전화로 여기겠지만 횟수로 보나 전화 간격으로 보나 분명 중요하고 다급한 일 같았다. 그리고 대개 이런 식의 급박한 연락은 안 좋은 소식을 전하곤 했다.

마음은 벌써 겁을 먹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손가락을 붙들었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손에 쥔 폰이 짧게 진동하더니 긴 메시지를 띄웠다.

「저 건우 친구 진영인데요,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 남겨요. 건우가 좀 다쳐서 지금 응급실에 있어요. 저희 학교 병원이에요.」

다쳐서 응급실에 있다는 소리에 나는 허둥지둥 통화 버튼을 찾아 눌렀다.

- 형!

다행히 길지 않은 신호음 끝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진영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건우 동기 중에 하나였다. 얼굴도 본 적이 있었다. 제 집이 멀다고 종종 술을 마시고 건우랑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곤 했으니까.

“어, 진영아, 오랜만이다. 건우가 어딜 어떻게 다쳤는데?”

거추장스러운 인사가 오가는 동안 내 마음이 더 초조해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대답하기 어려운 듯 뜸을 들였다.

- 그게….

“어쩌다가 다쳤는데? 크게 다쳤어?”

“같이 있던 후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걔도 당황했는지 건우가 뭐에 치였다고 횡설수설하기만 해서…. 저도 지금 가는 중이라 자세한 상황은 도착해 봐야 알 것 같아요.”

후배가 많이 당황했다고 하는 걸 보면 가벼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너희 학교 병원이라고?”

- 네, 형. 미리 너무 크게 걱정은 마시고요.

“나 지금 바로 갈 테니까….”

- 네, 저도 도착하면 연락드릴 테니까 조심히 오세요.

“그래, 고맙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러 인사한 뒤 전화를 끊고 나니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뭘 해야 하더라. 병원. 병원을 가야지. 병원을 어떻게 가더라. 차…. 맞아, 병원에 가려면 차가 필요하지. 몇 개나 되는 차 키를 대충 움켜쥐고 신발에 아무렇게나 발을 집어넣던 때였다.

삐삐삐삐…. 키패드를 터치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장윤성이 퇴근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현관에 사람이 있어 놀랐던지 그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내 꼴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어딜….”

발끝까지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하던 말을 멈춘 장윤성은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며 말을 바꿔 물었다.

“하경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게 묻는 얼굴이 잠시 희뿌옇게 일렁였다. 언젠가 그와 술을 마셨을 때처럼 눈에서 뭐가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울 때가 아니었다. 아니, 울 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말만 하면 무슨 일이든 제가 해결해 줄 것만 같은 시선을 외면한 채 얼굴에 닿은 손을 떼어 냈다.

“건우가 좀 다쳤나 봐. 그래서 병원에 가야… 가려고 하는데….”

의연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말은 두서없이 쏟아졌다.

“…아, 그렇지, 나 차, 차 좀 빌릴게.”

말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도 떠올리지 못해 우물쭈물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손에 쥔 차키를 내보이며 그렇게 얼버무렸다.

내 말이 못 알아들을 정도였는지 장윤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윤성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고 있을 수도 없어서 다녀오겠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장윤성이 뒤늦게 내 손목을 쥐고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운전 못 해.”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내가 쥐고 있던 차 키를 뺏어 갔다. 거둬 간 것을 현관에 대충 던져 놓고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이번엔 내 발목을 쥐었다. 그제야 본 오른쪽 발에는 아직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가 걸려 있었다. 중간에 장윤성이 들어오는 바람에 마저 갈아 신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한쪽 발이 신고 있는 것과 짝이 맞는 것을 찾아 다른 발에 신겨 주며 말을 이었다.

“침착해야지, 하경아. 네가 건우 보호자잖아.”

딴에는 정신을 차리라고 한 말인 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주저앉고 싶었다.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나 대신 건우 형이라도 되어 줄 것 같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 봤자….

내 발이 제대로 땅을 딛고 서는 걸 확인한 장윤성은 몸을 일으켰다.

“가자. 병원이 어디야.”

***

“혀엉….”

급히 병실에 들어서자 멋쩍은 듯이 앉아 있던 건우가 앓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병실에 들어오기 전 친절한 의사에게 후유증이 남을 만한 큰 상처는 없다는 소릴 들었음에도 몇 번이나 두 눈으로 건우의 상태를 살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많이 놀랐지.”

건우는 민망한 듯 웃으며 사과를 했다.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크게 다치지 않아서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소리를 내면 아직 잦아들지 않은 떨림을 들킬 것 같아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저기 까져서 많이 다친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크게 다친 건 없대. 그냥 시간이 좀 지나면 다 나을 거래. 내가 봐도 그렇고.”

그럼에도 건우는 여전히 나를 안심시키려 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중에도 통증이 있긴 했던지 몇 번이나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무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만 설명해도 돼. 오면서 다 들었어.”

겨우 목소리를 조금 냈을 뿐인데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장윤성의 팔을 붙잡으며 기댔더니 건우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옮겨 갔다.

“형 친구?”

건우는 내내 신경이 쓰였던 듯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어?”

그제야 장윤성을 여기까지 들여놓고도 소개할 말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되도록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르는 사람이니 가라고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수 없이 장윤성을 친구라고 소개하려던 차였다.

“형, 오셨어요?”

때마침 병실 문을 열고 건우의 친구, 진영이가 들어왔다.

“친구분도 같이 오셨나 봐요.”

붙임성 좋은 녀석은 내 뒤에 선 장윤성에게도 어정쩡하게나마 고개를 꾸벅였다. 장윤성도 짧게 웃으며 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형, 놀라셨죠. 죄송해요. 다행히 스치면서 넘어진 거라 크게 다치진 않았대요. 같이 있던 후배가 너무 놀라서 저도 큰일인 줄 알고….”

“아니야. 나는 그냥 고맙지. 후배는 어디 있어?”

“너무 놀란 것 같아서 먼저 보냈어요.”

“아…. 다음에 내가 꼭 사례할게. 후배한테도.”

“아니에요. 그건 건우한테 이자 쳐서 받을게요.”

녀석은 건우를 흘끔거리며 농담 섞인 대답을 했다.

“치사하게 이자까지 받냐?”

침대에 앉아 있던 건우가 불만스럽게 투덜대자 진영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너스레를 떨었다.

“치사하긴. 당연히 받아야지. 내가 늘 말했잖냐.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야 우정도 오래가는 거라고. 나한테 빚지고 내 얼굴 어떻게 볼 거야, 어?”

건우는 잘 볼 수 있다고, 원금만 갚겠다고 우기다가 마침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근데 병실은 확인하고 왔어? 뭐래?”

“아, 그거. 착오 아니라고 하던데? 여기 맞대.”

“맞다고?”

“뭐 선배나 교수님이 알고 힘써 주신 거 아니야? 수납도 됐다는데.”

건우와 진영이가 의아하게 쑥덕거리는 소리에 나는 병실을 둘러보고 장윤성을 쳐다봤다. 하룻밤에 얼마나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넓고 호화로운 1인실이었다. 오는 길에 내게 자초지종을 듣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그 덕분인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제 우리 형 왔으니까 너도 가서 쉬어. 어제 밤새웠다며.”

“놀라서 잠 다 깼다, 인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진영은 결국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제가 피곤한 것보다는 건우를 쉬게 해 주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오지 말라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웅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녀석을 따라나섰다.

“오늘 고마웠어. 후배한테도 인사 전해 주고.”

“에이,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러 두고 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거듭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고가 났을 때 건우가 혼자가 아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진영이는 손사래를 치다가 조금 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건우가 그래도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라 주변을 잘 살피고 다니는데, 후배 말로는 그 미친 오토바이가 작정한 것처럼 달려들었대요.”

“…어?”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어쩌다 사고가 났는지도 물어보질 못했다.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머리가 멍해 되물었다.

“그래서 후배가 많이 놀랐나 봐요. 건우 말로는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넘어졌다고 하는데 후배 말로는 꼼짝없이 치인 줄 알았다고…. 길 가장자리로 걷고 있었는데 그 넓은 도로를 두고 왜 자기들 쪽으로 달려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식은 지금 어디 있는데? 그 오토바이….”

“그 나쁜 새끼가 건우가 넘어졌는데도 그냥 갔다고 하더라고요. 신고했으니까 금방 잡힐 거예요.”

다급하게 진영이의 팔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하필… 하필이면 교통사고. 기억과 어쩔 수 없이 겹쳐지는 장면에 하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로의 동생을 운운하던 장현성의 목소리가.

“형 괜찮아요?”

쨍하게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땐 김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 괜찮아. 얼른 가.”

“정말 괜찮겠어요?”

붙잡고 있던 진영이의 팔을 놓아주고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다니까. 오늘 고생 많았어. 가. 다음에 보자.”

괜찮다는 말이 영 믿기지 않았는지 녀석은 몇 번이나 다시 묻고 마지못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엘리베이터 위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걸 멍하니 올려 보다가 몸을 돌려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꺼지는 것처럼 아득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할 리가.

건우의 사고와 태원그룹 사람을 엮는 게 합리적 추론인지 불안감의 말로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른 손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문질러도 한 번 열이 오른 머리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으니까.

“우리 형한테 형 같은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리는 없다, 두 생각을 의미 없이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다시 건우가 있는 병실 앞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건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통성명을 마쳤는지 둘은 퍽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 같은?”

“아, 나쁜 뜻은 아니고요. 제가 아는 형 친구들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요. 학교 때 친구는 아니죠? 형 학교 친구들은 거의 다 아는데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저희 형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건우가 괜한 소리를 듣을까 봐 문고리를 꽉 쥐었지만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장윤성이 퍽 괜찮은 대답을 했다.

“하경이가 일하는 가게에 자주 가.”

내 앞에선 정신이 나간 양 굴면서도 막상 밖에서 하고 다니는 걸 보면 확실히 아주 얼빠진 놈은 아니었다.

“아아, 가게 손님이셨구나.”

건우는 납득한 듯 후련한 목소리를 냈다. 생김새는 둘째 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 냄새가 나는 남자가 어떻게 제 형의 친구가 되었는지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어? 그럼 가게에 계시다 형 데리고 오신 거예요?”

“하경이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건우의 물음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설명하려면 복잡해지는 탓에 장윤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형한테 가족이라고는 저뿐이라…. 그래도 형이 좀 유난하죠?”

유난하기는 건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온전히 ‘나의’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다면. 장윤성이 내 절박함을 비웃기 전에 대화를 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문을 열려던 차였다.

“나는 좋더라고. 그런 성격도.”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좋다는 말끝에 맺힌 약간의 웃음이. 정말이지 호구라도 저런 상호구는 또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가족에게 유난하지 않았더라면 장윤성의 한철 연애는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왜 내가 다 억울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장윤성이 더 불쌍해지기 전에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의도한 대로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진영이는 잘 갔어?”

“응.”

비어 있는 보조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건우는 안심한 듯 그제야 자리에 누웠다. 생명의 지장이 없다뿐이지 여기저기 다치기도 했고 내내 검사를 받은 터라 녀석도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하고서도 건우는 아직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형, 근데 나 아무래도 병실 옮겨야 할 거 같은데.”

“응? 왜?”

“여기 VIP 병동이거든.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 아까 진영이가 확인해 보니까 맞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진영이와 머리를 맞대고 선배나 교수님의 도움일 거라고 추측하더니 결국 납득하지 못했는지 건우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거….”

말을 얼버무리며 나는 장윤성을 흘끔거렸다. 건우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 금방 내 눈길의 뜻을 알아챘다.

“여기 진짜 비쌀 텐데….”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별거 아니라는 장윤성의 말에 건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정말 여기 있어도 괜찮겠냐는 얼굴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장윤성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는 피곤한지 곧 잠이 들었다.

나는 자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볼과 이마도 군데군데 상처가 있었다.

이런 정도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깨끗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크게 다쳤던 장윤성도 저렇게 말끔하게 나은 걸 보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병실은 고요했고 건우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장윤성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장윤성을 끌고 병실을 나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원래 별로 사람이 없는 건지 병실 밖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진영이를 보낼 때처럼 엘리베이터 앞에 배웅하듯 섰다.

“이만 돌아가. 내일 출근해야지.”

“나는….”

장윤성은 뭐라고 고집을 피우려다가 역시 그럴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입을 다물었다. 고작해야 가게 직원과 손님으로 만난 사이에 함께 병실을 밤새워 지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함께 있는 걸 포기했으면서도 장윤성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사실 머뭇거리고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아니면 또다시 한 번 더 만나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마지막의 마지막을 한 번 더 남기려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건우의 사고가 태원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말을 해도 늦지 않다는 간사한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 사고가 관련이 없어도 건우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나약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장윤성이 신발을 신겨 줄 때 들었던 충동처럼 결국 그가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주저앉아 우는 일밖엔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말 그를 잃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다시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며칠이나 남았더라?”

이렇다니까. 겨우 며칠이 더 지났을 뿐인데 전보다 더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다. 멘 목소리를 숨기느라 덜덜 떨리는 턱을 숨기느라 고개를 숙였다.

내 가상한 노력을 눈치챘는지 장윤성은 여느 때보다 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또 그 빌어먹을 약속 얘기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화는 나지만 굳이 화를 내진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지난번처럼 제 스스로 분을 삭이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봐줄 여유가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마치 내가 어떻게 나와도 결국엔 제 뜻대로 될 것처럼.

“너를 데리러 간 날 밤, 기억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었지. 네가 싫다고 하면 나는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어. 이제 그런 게 상관없어졌거든. 네가 누구였든, 누구도 아니었든.”

담담하게 꺼낸 말은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에 넘어오지 않을 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다시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날 떠날 핑계로 그 따위 약속을 들먹일 거라면, 인정해, 하경아. 네가 졌어.”

장윤성은 제 승리를 확신하듯 웃었다. 그럼에도 기뻐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기억이 돌아왔냐고 물을 순 없었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기억이 곧 증거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기억해 냈다고 해서 장윤성이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지영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오히려 끝을 앞당기는 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내겐 확신이 있었다. 장윤성이 기억을 떠올렸다면 반지를 그렇게 버릴 리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장윤성이 무슨 말을 할지 오히려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주한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기억을 못 해도 너는 기억을 하겠지.”

저에게는 기억이 없지만 내게는 있을 거란 소리였다. 기억을 하고 있더라도 내 입으로 털어놓을 리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일그러지고 있을 내 표정을 보며 장윤성은 친절하게 답을 가르쳐 주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가져간 거잖아, 반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이를 악물고 삼켰다. 장윤성의 말대로 이번엔 내가 진 게 맞았다. 처음부터 반지를 챙길 속셈은 아니었다. 장윤성이 정말 반지를 버릴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기 전에 풍작이가 엎었던 휴지통을 다시 엎었고, 반지가 여전히 그 안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장윤성이 버렸으니까 내가 간직하겠다는, 그런 가상한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그 불쌍한 물건을 다시 버릴 수 없었을 뿐이지.

아주머니가 내게 휴지통을 내밀었을 때 어쩌면 장윤성이 날 떠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아주머니가 내게 휴지통을 내밀었다는 건 그 안에 반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뜻도 되는 터라, 거기에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행동이 치밀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장윤성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네가 먼저 약속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나도 그냥 묻었을 이야기니까.”

내 표정이 퍽 억울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억울한지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반지는….”

변명하려 운을 떼자 장윤성은 무심한 눈길로 내 입술을 응시했다. 무슨 말이 나오든 거짓임을 아는 듯이. 그럼에도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중요한 물건 같아서. 혹시라도 나중에 네가 후회할까 봐….”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고 한 주제에 비싼 물건 같아서 챙겼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뱉고 보니 그따위 말보다는 차라리 이 말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윤성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형편없다는 듯이 삐딱하게 웃었다.

“틈만 나면 도망갈 생각만 하면서, 나중에 내게 주려고 그걸 가져갔다고?”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냉정했다.

“그건….”

“변명할 필요 없어. 어차피 믿지 않을 거니까.”

기껏 내가 반지를 챙겼다는 걸 알아내고서도 그뿐이었다. 장윤성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왜 그걸 가져갔는지,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 함정에 빠진 건 난데 장윤성은 제 마음이 더 아픈 양 쓰게 웃었다.

“한 번이면 되는데, 하경아.”

장윤성이 그런 얼굴을 하는 게 싫어서 발치를 내려다보다 뜬금없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장윤성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뭘 못 해 줄 것 같아서, 뭘 그렇게 무서워해.”

겨울도 녹일 듯이 다정한 음색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얼어붙었다. 내 기억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다 아는 것 같아서.

하지만 여전히 하나는 모르는 것 같았다. 네가 나를 위해 어떤 것까지 버릴 수 있는지 알아서, 내가 더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장윤성은 빤히 내 눈을 보면서, 내가 단 한 번의 용기를 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술이 끝내 열리지 않을 걸 알았는지 그는 결국 건우의 병실을 흘긋 보고 내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많이 놀랐을 테니까 오늘은 그만하자. 들어가.”

얼굴에서 떨어진 손은 내 어깨, 팔을 스치듯 건드리며 내려갔다.

“그리고.”

그러더니 역시 아쉬운 듯 내 손을 쥐고는 아무렇게나 제 입술에 댔다.

“이번엔 내가 데리러 오기 전에 돌아와.”

뭐든 다 할 수 있다더니 마냥 기다리는 건 더는 못 해 먹을 짓 같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스스로 돌아가든 아니든 맘대로 끝내게 두진 않을 거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장윤성이 그나마 더 큰 기대를 하지 않도록.

들어가라고 해 놓고서도 장윤성은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보다가 때마침 올라온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내리자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나는 자리에 서서 장윤성이 돌아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금쯤은 주차장에 도착했을까. 지금쯤은 차를 타고 병원을 빠져나가고 있으려나. 지금쯤은….

그렇게 장윤성의 걸음이 닿고 있을 곳을 상상하면서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억, 아직 못 찾았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원망 한마디 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단순히 무릎이 까진 정도인 건 아니라 건우는 며칠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건우는 사지 멀쩡하고 거동도 문제없으니 내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굳이 병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건우가 불편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여기가 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형, 가게 안 나가도 돼?”

벌써 꽤 늦은 시간이었다. 뼛속까지 모범생인 녀석은 침대에서도 책을 펼치고 앉아 공부하다가 소파에 멍하게 늘어져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응. 사장님이 너 나을 때까지 오지 말래.”

시큰둥한 대답에 건우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기울였다.

“수상한데… 형 사실 잘린 거 아냐?”

지난번에 집에 갔을 때도 그렇고, 요 며칠도 제가 괜찮다는데 굳이 빈둥대고 있는 게 이상했던지 건우는 솔직하게 말해 보라며 대답을 재촉했다.

“눈치챘어? 나 사실 이제 백수야. 우리 이제 굶어 죽을지도 몰라.”

“정말? 정말 잘린 거야? 그만둔 거 아니고? 왜?”

내가 장난스럽게 대꾸했음에도 건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지하게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다.

건우는 내가 성욱 형의 가게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이전 직장에서 고생했던 것도, 그에 비해 성욱 형의 가게는 즐겁게 다니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더 놀렸다가는 침대에서 뛰쳐나올 기세라 나는 웃음기를 지운 채 다시 말했다.

“잘린 거 아냐, 그냥 고민이 있어서 시간 좀 달라고 했어. 나중에 말해 줄게. 아직은 더 생각해봐야 해서.”

건우는 내가 혼자 앓는 걸 싫어했다. 나도 녀석이 혼자 앓는 걸 싫어하긴 마찬가지라 나중에 꼭 말해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걱정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결국 건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의 시선이 다시 펼쳐 놓은 책으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 나도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고민이라고 해 봤자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장윤성이 없던 것처럼 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그도 나도 상처받지 않고 헤어질 수 있을까. 끝의 끝까지 욕심 한번 크다, 이하경.

어제 건우 또래의 여자가 고등학생쯤이나 됐을 법한 남동생의 멱살을 끌고 찾아왔다. 자신의 동생이 건우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범이라고 했다. 태원그룹의 사주를 받았냐고 묻기도 우스울 만큼 앳된 얼굴이었다.

그 남매는 우리처럼 부모님이 안 계시는 데다, 밑으로 그보다 어린 동생이 둘 더 있다고 했다. 남매의 둘째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려 서툰 실력으로 연습을 하다 건우를 치고 도망갔다고 고백했다. 순간적으로 누나한테 혼날까 봐 겁나서 그랬는데, 또 생각해 보니 나중에 들키면 더 혼날 테니 자수를 결심했다는 솔직한 말도 덧붙였다.

여자는 내 앞에서 동생의 등짝과 뒤통수를 몇 번이나 더 후려치다가 병실을 둘러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병원비와 합의금을 마련할 테니 선처를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건우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나 역시 그들이 안쓰럽긴 했지만 괘씸한 건 또 별개라 뭐 하러 봐주냐고 투덜댔더니 건우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대답했다.

‘남 일 같지가 않아서. 내가 사고 치면 형도 저렇게 하겠지?’

‘나는 뺑소니범 동생으로 둔 적 없거든?’

‘그건 형 동생이 잘나서 그런 거고.’

내가 고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녀석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리 형은 저쪽 누나보다 훨씬 더 잘났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제야 맥이 풀려 헛웃음을 뱉었다. 태원그룹과 관련 없는 일인 것 같아 다행이기도 했고, 건우 놈이 제 형이 아니라 어떤 호구를 닮은 것처럼 착해 빠진 게 어이없어서.

“…형, 형!”

어제의 일을 곱씹으며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건우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응?”

퍼뜩 건우를 보며 대꾸하자 녀석은 뭐 하냐는 듯이 턱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형 전화 온 거 아냐?”

“어? 아….”

그제야 보니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성욱 형이었다.

“네, 형.”

- 어, 나다 야, 좀 곤란한 일이 생긴 거 같은데….

“무슨 일인데요?”

- 기준이 동생 있잖아, 자꾸 너 찾아오는 걔.

“네, 혜진… 서혜진이요.”

좀 곤란한 게 아니라 난처하다 못해 다급하기까지 한 기색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서혜진이 또 찾아온 모양이었다.

- 어, 걔. 걔가 지금 엄청 취해 가지고 한지영인지 뭔지를 내놓으라고 난리인데.

갑작스럽게 한지영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나는 건우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공부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녀석은 이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성욱 형의 말까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는지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왜 저한테…. 서기준 씨한테 연락해야죠.”

- 기준이 놈이 연락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너 기준이 친구 잘 알잖아.

성욱 형은 여전히 장윤성에게 직접 연락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지영을 찾는 서혜진과 장윤성이 마주치는 건 내가 달갑지 않았다. 그냥 서기준의 연락을 기다리라 하고 매정하게 끊으려는데 성욱 형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 지금 걔가 취한 게 문제가 아니고!

성욱 형의 말은 동석한 사내놈 둘이 일행이라며 서혜진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쩍다는 거였다. 종민이의 말에 의하면 가게에 들어올 때만 해도 서혜진은 여느 때처럼 혼자였고, 정호의 말에 의하면 그놈들이 딱 봐도 질 나쁜 놈팡이 같단다. 직원들이 말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아는 사람이 와서 말려야 할 것 같다는 소리였다.

내가 알기론 그동안 여러 번 가게를 드나들면서도 서혜진이 인사불성이 되어 한지영의 이름을 외친 적은 없었다. 그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잠깐만 붙잡아 두세요. 지금 갈 테니까. 서기준 씨한테도 계속 연락해 보시고요.”

- 그래, 알았다.

급히 전화를 끊고 지갑을 찾아 들고 보니 건우가 궁금한 게 많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형 나가려고? 지금?”

“어, 가게 좀 갔다 올게. 먼저 자.”

가게라는 소리에 건우는 쉽게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병원 앞에 택시가 서 있어 생각보다 빨리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질 나쁜 놈들이 붙었다기에 실랑이라도 벌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가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주방 쪽에서 젖은 손을 털며 나오던 성욱 형은 나를 발견하고는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아, 기준이랑 연락 됐어. 안 그래도 오는 길이었다고 금방 온다고 하네. 그 못된 놈들이 쟤 오빠 온다고 하니까 줄행랑을 치더라고. 그러면서 테이블까지 엎는 바람에 치운다고 정신이 없어서 너한테 연락하는 걸 깜빡했다.”

성욱 형은 미안한 듯 구구절절한 사정을 털어놨다. 헛걸음을 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생긴 것 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그럼 상황 끝난 거예요?”

“끝난 건 아니고….”

성욱 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갯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낯익은 취객 한 명이 종민이에게 주정을 부리고 있었다.

“한지영 데려오라고오!”

“그러니까 한지영이 누군데요, 여긴 그런 사람 없다니까. 아, 미치겠네.”

종민이는 이따금 머리채까지 잡히며 주정을 받아 주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가 보라고 눈짓을 하자 녀석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감격에 겨운 얼굴로 도망을 갔다.

서혜진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나를 알아봤는지 비틀비틀 다가오기 시작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금방 다리를 휘청거리며 넘어지려 하기에 나는 얼른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동자가 내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 애썼다. 한지영이랑 뭘 얼마나 알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서혜진. 서혜진 씨.”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지 항상 가게 사람들이 서혜진을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혼자 이곳을 계속 드나들다 보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부르자 물색없이 기대감에 찬 눈이 나를 향했다.

“네가 찾는 사람 여기 없으니까 그만 와. 너 오늘 큰일 날 뻔한 건 알아?”

취한 사람에게 조곤조곤 일러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더 사나운 음색으로 화를 냈더니 서혜진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왜 화를 내? 화 낼 사람이 누군데.”

“뭐?”

취한 사람에게 반성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적반하장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아 바로 세워 주려 애를 써도 서혜진은 자꾸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정신 차리고 일단 좀 앉아 봐.”

말없이 사라져 연락 한번 하지 않은 게 그렇게 한이 맺힐 일인가. 장윤성만 얽혀 있지 않다면 차라리 죄송합니다, 사죄하고 이제 그만 잊어 달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소파에 앉히려 하자 서혜진은 더듬더듬 내 옷자락을 쥐었다. 안기려 한다거나 애처롭게 붙잡는 모양새가 아니라 멱살을 쥐려던 것처럼.

“이봐요, 서혜진 씨.”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의자에 앉혔건만 서혜진이 셔츠를 꽉 쥔 탓에 허리를 펼 수 없는 이상한 꼴이 되었다.

“맞다고 해, 빨리.”

이젠 내가 한지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떼라도 쓸 기세였다.

“맞긴 뭐가 맞아.”

“얼른 윤성 오빠한테 미안하다고 해애.”

뭐라 대꾸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장윤성은 기억도 못 한다고,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 사실을 나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서혜진은 멱살을 쥔 손을 보채듯 흔들었다. 내가 그 손을 떼어 내려 애를 쓰는 사이에도 서혜진은 우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알긴 하냐고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절절하고 서러웠다. 그저 술주정일 뿐인데 왜 하필 그 순간 등골이 싸한 불안감이 엄습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빠는 언니가….”

그리고 또 왜 하필 그 순간 그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고 서혜진의 말을 들어볼 용기가 생겼는지도.

“언니가 죽은 줄 알고….”

서혜진을 떼려고 애쓰던 손에 힘이 풀렸다. 손이 맥없이 떨어지는 순간이 아득하게 긴 것 같았다.

“야, 서혜진!”

머리를 세계 얻어맞은 양 먹먹해진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 쪽에서 서기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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