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진의 말을 듣고 새하얘진 머릿속에는 같은 물음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내가 죽은 줄 알고 슬퍼했다고? 기억을 잃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서기준을 보면서 뒤늦게 서혜진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서혜진의 손을 털어 내고 허리를 폈다.
“미안해요, 하경 씨. 이 녀석이 사고 칠 뻔했다면서요.”
동생이 걱정돼서 급히 달려왔을 거면서 그는 혼을 내는 척 서혜진의 등을 툭 쳤다. 서혜진은 서기준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이번엔 내 팔에 매달려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서기준에게 의례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별일 없어서 다행이죠.”
“다음에 내가 진짜 술 살게요.”
서기준은 민망한 듯 내 팔에서 서혜진을 떼어 내려 애썼다. 그는 동생이 나 때문에 여길 혼자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서혜진이 나 때문에 혼자 바에 드나들었다는 걸 안다면 저렇게 고마워하지는 않을 테니까.
“야, 야, 서혜진, 집에 가자.”
서기준의 재촉에도 서혜진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 내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고집을 피웠다.
“집에 가자니까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그제야 서기준도 취한 동생이 하는 말이 궁금한지 허리를 숙여 서혜진의 얼굴에 귀를 바짝 댔다.
“저기, 서기준 씨….”
서기준이 괜한 말을 듣게 들을까 걱정스러워 말리려던 차였다. 가만히 서혜진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서기준이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는 거야, 누가 죽으려고 했다고?”
***
겨우 이성을 찾은 건 멀리 장윤성이 사는 건물이 보일 때였다. 택시 기사에게 차를 돌려 건우가 있는 병원으로 가 달라 말하고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봐야 있는지도 몰랐던 상처를 들쑤시는 골이었으니까. 아니면 그저 서혜진이 취해서 부린 주정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렇길 바랐다.
어차피 그때도 지금도 나는 장윤성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는 같았다. 이렇게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생각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있으면 결국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사자인 장윤성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통화 목록에서 낯선 번호 하나를 찾고 있었다.
‘결국 받았구나.’
장현성과 이야기를 끝내고 나왔을 때 이은조는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망과 동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화를 내진 못해도 못내 섭섭한 얼굴이었다. 장 회장은 나를 진심으로 아꼈지만 내가 한지영이 아니었다면 장윤성의 짝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은조야말로 그 집안에서 이하경을 생각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말이 더 아팠고 그럼에도 작은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신호음이 길게 갔다.
- …네.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많이 늦은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죄송해요, 저….”
그리고 기껏 늦은 시간이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나서야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서 입을 닫고 숨을 삼키는 사이 이은조가 먼저 대답을 했다.
- 알았어요. 내일 확인해 볼게요. 그럼.
사무적 용건인 양 이은조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변에 다른 가족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은조는 아직 다른 가족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을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내일 저녁에,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봐요.」
약혼식 날 장윤성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이은조에게 반지를 부탁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는 동안 택시는 어느새 병원 앞에 서 있었다. 건우는 먼저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병실에 누워 떨리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바늘이 목구멍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벌써 오래전에 끝난 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문득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잠을 잤던 건지 생각에 잠겼던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건우는 내 어두운 얼굴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제 형 같은 거짓말쟁이는 또 없을 텐데도. 녀석은 묵묵히 나를 지켜보다가 내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하자 그저 웃는 얼굴로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신경이 온통 그 일에만 곤두서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약속 장소에 도착해 앉아 있었다. 이따금 그다지 울릴 일 없는 핸드폰을 켜서 시계를 보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어쩐 일인지 어제 오늘 장윤성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며칠 전까지는 건우가 괜찮은지, 나는 어떤지 묻고는 했는데.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도 결국 장윤성의 연락을 기다린다. 자꾸만 기울어지는 마음이 내게, 그에게 얼마나 지독한 독이 되는지 알면서.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이은조는 느긋하게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내 얼굴이 엉망이긴 했던지 조금 의아한 눈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마주한 이의 표정은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익숙한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저번에 두고 갔던데. 혹시 용건이 이쪽인가요.”
아무래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서혜진의 말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내가 장현성에게 봉투를 받고 나왔을 때만 해도 저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었다. 그러니 내가 간 뒤에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닙니다.”
“그럼? 이제 우리한테 아쉬울 게 없으니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건가요? 아, 윤성이가 이젠 그쪽 동생한테까지 신경을 쓰던데….”
“어제 혜진이가 왔었어요.”
서혜진의 이름이 나오자 이은조는 줄곧 계속될 것만 같던 빈정거림을 멈췄다. 중간에 건우의 얘기가 나와서 설마 했지만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이은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혜진이가 왜 자꾸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한지영이냐고 묻던가요?”
“아니요. 저한테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서혜진이 한 말을 직감한 듯 이은조가 인상을 썼다.
“제가 죽은 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장윤성이….”
이은조는 잠깐 눈을 굴리더니 체념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젠 더 잘 알겠죠. 내가 왜 윤성이가 기억을 되찾지 않길 바라는지.”
손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모든 퍼즐을 맞추고 왔어도 틀렸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왜… 왜요, 왜, 그렇게까지…. 그냥 돈 받고 갔다고 하지, 아니면 그냥 남자라고….”
장윤성이 운전하던 차였다.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상대는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내게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은조에게도 힘든 기억이었던지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리도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윤성이를 단념시킬 필요는 있었지. 아버님의 입장에서 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대인데, 윤성이가 목숨까지 걸고 있었으니까.”
이은조는 어느새 전과 비슷해진 말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네 성별을 밝히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어. 남자인 걸 밝히면 알아서 포기할 거라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공중전화로 의미 없는 연락을 여러 번 하면서 사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내가 남자인 걸 알아서 전화를 받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장현성은 장윤성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었지만 죽음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은조는 애초에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남자인 걸 알고도 윤성이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알고 있었다고요?”
이은조는 떠오르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이가 깨어난 날, 그날은 하필 유산 문제 때문에 가족들이 다들 자리를 비운 상태였어. 드디어 윤성이가 깨어났다고 연락을 하면서 간호사가 그러더라고. 깨어나자마자 동승했던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고.”
아… 아마도 오래 묻어 두었던 감정이 탄식이 되어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 순간에도 그럴 수가 있지.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윤성이를 포기시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네 존재를 없애 버리기로 한 거지. 그저 윤성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작 윤성이가 느낄 죄책감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또다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올까 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툭, 툭, 손등 위로 무겁게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대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은조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보였지만 추스르는 것 같았어. 전처럼 웃지도 않았고, 말수도 줄었지만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재활도 의욕적으로 했으니까. 그래서 아버님 어머님은 여전히 그 일마저 사고일거라고 믿고 싶어 하시지.”
장윤성이 기억을 잃게 된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너와 함께 사고가 났던 커브 길에서 윤성이가 핸들을 꺾지 않고 그대로 호수에 차를 처박았어. 다행히 주변에서 낚시하던 사람이 많아 금방 구할 수 있었지. 그래서 경찰은 아주 충동적인 시도였거나, 아니면 그 순간에 뭔가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더라고. 뭐,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 윤성이가 기억을 다 버리고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난 시부모님과 생각이 달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처럼 이은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그날, 현성 씨가 윤성이에게 네 반지를 돌려줬거든.”
그 장난감처럼 생긴 반지, 이은조는 그렇게 덧붙였다.
***
‘그 장난감처럼 생긴 반지도 두고 가.’
봉투를 집어 든 내 손에서 반짝이는 물건이 거슬렸던지 장현성이 그렇게 말했었다. 네가 일말의 미련도 없이 갔다고 전할 테니까, 하면서.
어차피 내게 선택지가 없는 이상 그의 말을 따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반지를 그에게 넘기고, 제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동생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를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장현성이 가져온 옷은 비싸 보였지만 얄팍한 것뿐이었다. 얇은 셔츠에 점잖은 코트 하나를 걸치고 나선 바깥세상은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어디도 춥지 않은 따듯한 세상. 그런 건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속에나 있는 거지.
꽁꽁 얼어붙는 몸을 잔뜩 움츠렸던 나는 그래도 현실을 향해 걸었다. 그날, 내가 운전을 할 걸 그랬다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내가 핸들을 어느 쪽으로 돌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내 주머니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돌고 돌아 다시 내게 온 반지가. 장윤성은 그걸 돌려받기 전까지는 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비밀스럽게 지시를 받은 비서들이 몇 번이나 조작된 죽음의 증거를 들고 가도 장윤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겉으로는 고개를 저어도 아마 속부터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했겠지.
내가 엄마를 보낸 날, 결국 장윤성의 죽음을 인정하기로 했던 것처럼.
다만 우리가 서로의 죽음을 인정하려 했을 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는 내가 버리고 간 반지를 받았을 뿐이었다.
이은조는 태도를 바꿔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장윤성이 기억을 찾도록 흔들지 말아달라고.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을 때도 윤성이가 널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니 윤성이가 기억을 찾아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결국 엄마와 건우를 선택했으니까. 약혼식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가족을 배웅하던 장윤성의 그 다정한 시선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어느새 장윤성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거짓말이 지긋지긋해서.
얼마나 더 거짓말을 해야 우리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나를 속이고 그를 속여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러고 나면 누가 행복해지는데?
장윤성은 무섭게 쌓인 거짓말에 짓눌려 웃음을 잃고, 지독한 불면을 앓고, 정체 모를 상실감에 허우적대며 살고 있었다. 장윤성을 그런 지옥에 가둬 놓고 누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데.
어쩌면 한마디면 풀릴 저주일지도 몰랐다. 내가 한지영이라고. 네 덕분에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그 한마디면 죄책감이 옭아맨 그의 삶을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기억이 돌아와도 내가 사랑일 것 같냐고?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뒷일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지옥에서 꺼내주고만 싶었다. 그 때문에 장윤성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끔찍한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나는 기꺼이 할 생각이었다.
그 역시 나에게 사랑이었으므로.
내가 두려운 건 장윤성이 다시 받을 상처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려는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키가 큰 남자가 복도로 나왔다. 나를 발견한 남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장현성은 나를 금방 기억해 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마주쳤다는 사실도.
“너… 너, 그날, 역시 너였지. 기준이네 기념식에서.”
그는 무척 화가 난 듯 손에 들고 있던 것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따라와.”
장윤성이 볼까 걱정이 되었는지 그는 닫힌 문을 한 번 보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항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를 따라 내 발로 걸음을 옮겨도 억센 손아귀에 잡힌 팔이 아팠다.
“잠, 잠… 이거 놓… 아…!”
“그 손 놔, 형.”
장현성이 기어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를 끌고 갔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장현성과 나는 움직임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왔는지 장윤성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 형이 여전히 내 팔을 잡고 있는 게 거슬렸던지 장윤성은 뚜벅뚜벅 다가와 장현성의 손을 쳐 냈다.
“윤성아.”
자신의 손을 떼어 내는 동생이 낯설었던지 장현성이 인상을 썼다.
“하경이가 아프다잖아.”
장윤성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내가 제 형을 두려워하는 걸 아는 것처럼 나를 제 등 뒤로 숨겼다. 장현성이 조금 더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네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저 자식 때문에 네가….”
장현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입으로 밝힐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뭐?”
그렇게 대꾸하는 장윤성의 눈매가 매서웠다. 장현성이 자신의 입으로 장윤성의 기억이 없다고 실토한 이상 나도 더 이상 하려던 말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둘의 사이를 가로막듯 섰다.
“내가 말할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결심하자 이은조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장윤성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도 내가 그에게 사랑일 수 있을 것 같냐고 했었다.
장윤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제 형에게로 향했다.
“그게 왜 하경이 잘못이야?”
그래도 그에게 나는 사랑일 것 같았다.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내가 저를 버리고 갔다는 걸 깨달아도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장윤성은 제 형을 노려보면서도 내 손을 꽉 잡았다.
“너 그걸 어떻게….”
장현성은 당황한 듯 한걸음 물러섰다.
“기억이 돌아왔으니까.”
그렇게 되찾고 싶어 했던 기억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씁쓸했던지 장윤성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장현성은 자리에 굳은 채 장윤성의 얼굴을 살폈다. 입으로는 내 탓을 하더라도 스스로는 알고 있을 터였다. 장윤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윤성아, 그때는….”
“형.”
장현성이 뒤늦게 변명을 하려 하자, 장윤성이 말을 잘랐다.
“나 기억 찾은 지 얼마 안 됐어. 그래서 아직, 형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다른 가족도.”
그 말에 장현성은 입을 다물었다. 장윤성은 내 손을 쥔 채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 하경아.”
내 걸음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너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장윤성의 손은 집 안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풀렸다. 손을 놓자마자 나는 고장 난 것처럼 그 자리에 섰다.
“정말, …을 생각이었어?”
먼저 거실로 향하던 장윤성이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할 생각조차 없는 듯이 눈만 깜빡여 보이기에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다시 물었다.
“정말 죽을 생각이었냐고!”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탓하듯 외쳤다. 그제야 소름이 끼쳤다. 그날, 장윤성이 호수에 빠졌던 날,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끝내 장윤성을 구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마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그런대로 나는 안도하며 너를 묻은 채 살아갔을까. 네가 어떤 생각으로 호수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른 채.
“처음부터 다 거짓뿐인 거 알았잖아.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인 거 너도 알았잖아. 그런데 왜… 읍.”
팔이 잡혀 훅 끌려가나 싶더니 거칠게 입술이 맞닿았다. 몸이 뱅글 돌아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다 벽에 닿았다. 밀어내거나 피하지 않았는데도 장윤성은 굳이 버틸 수 없을 만큼 몰아붙였다. 내가 그의 옷을 꽉 쥐고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장윤성은 내 등에 팔을 받친 채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이를 세워 내 입술을 깨물고 짓이기듯 키스를 해 왔다. 몸이 자꾸 미끄러져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에는 그의 팔 사이에 누워 있었다.
“정말 죽을 생각이었냐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웠던 말을 장윤성은 담담하게도 해냈다. 빤히 마주한 눈동자는 젖어 들긴커녕 너무나 메말라서 스치기만 해도 타 버릴 것 같았다. 오히려 나만 꼴사납게 가슴을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생각할 정신이 있었으면 정말 죽었겠지.”
자조하듯 장윤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제 손으로 내 눈물을 훔쳐 주더니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까보다는 다정하고 애절한 키스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혀를 얽는 동안 옷 안으로 여느 때보다 성급한 손이 들어왔다. 지난번에 얼마든지 만져 봤을 거면서 그는 지겹지도 않은 듯이 내 몸의 구석구석을 만지고 이따금 꼬집었다. 그의 손길을 기억하듯 몸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척추골을 따라 미끄러진 손길은 쉽게 바지 안쪽까지 들어갔다.
“흣.”
엉덩이 사이로 들어간 손가락이 깊은 곳 어딘가까지 닿았다. 울음 섞인 딸꾹질인지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인지 모를 게 맞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움푹한 곳을 지분거리던 손이 바지가 거슬렀는지 버클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허리를 들고 그가 옷을 벗기는 걸 도왔다. 아랫도리가 알몸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윤성은 기특하다는 듯이 볼이며 이마에도 키스를 퍼부었다. 다시 마주한 얼굴은 섧게 웃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로, 호수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등에 닿는 바닥이 몸서리칠 만큼 차가웠다.
나는 물에 빠지기라도 한 양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기꺼이 나를 일으켜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쪽쪽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조급한 손길이 다시 꼬리뼈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전처럼 다정한 전희는 없었다. 준비라고는 그저 숨 막히는 키스와 여유 없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손가락 한마디조차 쉽지 않았지만 더한 아픔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얼른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내가 그의 바지 버클을 푸는 동안 손가락이 하나 더 빠듯한 곳을 비집고 들어왔다. 고작 두 개인데도 몸을 뒤트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벌어진 것 같았다.
“으… 읏.”
손가락이 조금 더 깊게 들어온 것 같았다. 안쪽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벌어진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어 그의 것을 쥐었다. 벌써 반쯤 서 있던 물건은 손으로 만져 주는 것만으로 금방 단단해졌다. 그에 맞춰 장윤성도 제 손가락을 사납게 놀리기 시작했다.
“…아!”
뒤가 아니라 머릿속 어딘가를 세게 긁힌 느낌에 맞대고 있던 입술을 뗐다. 전혀 만져 주지 않았던 내 것이 어느새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장윤성은 여전히 내 뒤에 넣은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남은 손으로 바짝 올라붙은 내 앞섶을 주무르다가 들썩거리는 배와 가슴을 쓸며 내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는 걷어 올린 셔츠를 내 입에 물리고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자유로워진 그의 나머지 손이 한쪽 엉덩이를 단단히 쥐고 잡아 벌렸다. 팽팽하게 벌어진 곳으로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든 순간 가슴의 작은 돌기에 이가 박혔다. 앞뒤로 쏟아지는 이상한 감각에 나는 장윤성의 머리를 끌어안고 끙끙거렸다.
“응… 응, 흡….”
눈을 감아도 아찔했다. 자꾸만 힘이 풀려 더 이상 허리를 세우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으… 아, 그, 그만.”
결국 물고 있던 것도 놓치고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우는 소리를 했다. 장윤성이 나를 옥죄고 있던 팔을 풀자 나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미끄러져 앉았다.
그사이 땀이 났는지 장윤성이 얼굴에 붙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를 빤히 보는 그 얼굴을 보다가 이마를 만지는 가벼운 손길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장윤성이 내 등을 받치고 천천히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머리를 찧었을 것 같았다. 그는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아랫도리를 바짝 끌어 당겼다.
“그런데 하경아.”
방금까지 손가락이 드나들었던 곳에 뜨겁고 단단한 살이 닿았다. 그게 처음 몸에 들어올 때의 느낌이 떠올라 몸이 굳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하지만 거부하고 싶진 않았다. 대신 그에게 매달리며 스스로를 달래자 장윤성이 다정하게 웃었다.
“네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여느 때와 같았지만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의 것이 조금씩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네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손가락 두 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속에 버겁게 들어찼다. 힘을 풀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뿌옇게 번지는 시야 속에서 장윤성이 말을 이었다.
“너를 떠올리지 못할 때가 더 끔찍하더라.”
푹, 하고 어딘가가 꿰뚫린 것 같았다. 놀란 몸이 파득 튀었다. 그렇게 움직인 것조차 후회될 만큼 아팠다.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 넘쳐서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왜 울어. 이하경 씨는 내가 고백만 하면 눈물이 나?”
장난스럽게 묻는 말 속엔 어느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들어 있었다.
“아파… 아파… 서.”
나는 두 손으로 젖은 얼굴을 가렸다. 장윤성은 내 이마의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 주고, 얼굴을 가린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그런 뒤엔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직 아픔에 적응도 못 했는데 벌써 움직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캄캄한 시야에서 짓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런. 그건 어쩔 수 없겠는데.”
둔부 아래로 바짝 닿아 있던 타인의 살이 잠깐 멀어졌다가 다시 철썩 올라붙었다. 윽, 하고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입술을 꽉 물고 버텼다. 다시 눈물이 찔끔 흘렀다.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 다리 근육이 빳빳하게 굳었다.
장윤성은 내가 긴장했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몇 번 움직여 보더니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그는 행위를 멈추고 내 몸 여기저기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하경아. 잠깐 봐.”
장윤성은 기어이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내고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내 꼴이 엉망이었는지 장윤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이렇게 울면 어떡해.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그는 젖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손길이 쓰라린 걸 보니 벌써 눈가가 벌겋게 짓물렀을 것 같았다.
“그, 그냥 해. 신경 쓰지 말고.”
흉해져서 보기 싫을까 봐 얼른 그 손을 밀쳐 내고 다시 얼굴을 가렸다. 장윤성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맞닿을 만큼 깊게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하경아, 무리하는 거면….”
“…니야.”
기껏 가린 얼굴이 다 드러날 테지만 그럼에도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소매를 붙잡고 얼른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도, 나도 하고… 싶어, 하고 싶어서, 그… 읍.”
다시 얼굴을 가릴 틈도 없이 손이 붙들린 순간 다시 입술이 겹쳤다. 진득하게 입술을 댔다 떼는 얼굴이 내가 아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좋았다.
장윤성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벌어진 입술에서 눈물보다 많은 소리가 쏟아졌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별장으로 돌아오던 날, 장윤성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사고가 나기 전, 내가 남자인 걸 알았다면 아마 그날 안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의 서러움은 결국 장윤성이 후, 하고 불어 준 바람에 쉽게 흩어졌지만 오늘의 서러움은 아닐 것 같았다. 오래 울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현관 앞에서 시작한 행위는 거실을 지나 침대 위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장윤성에게 안겨 어영부영 몸을 씻고 가운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웠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는데 장윤성이 건넨 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나니 그럭저럭 눈을 뜨고 있을 정도는 됐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야 기억을 찾으려던 때의 장윤성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묻고 싶은 게 많았을까. 장윤성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눈치를 보다가 그의 손끝을 슬쩍 잡고 물었다.
“자?”
내가 잡은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내 손바닥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대답은 그다음이었다.
“아니.”
“언제 알아봤어. 내가 한지영인 거. 반지 가져갔을 때?”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 위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널 왜 못 알아봐. 기억이 없을 때도 알아봤는데. 반지는 네가 끝까지 발뺌할까 봐 그런 거지.”
발뺌이라는 말에 발끈해서 벌떡 일어나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장윤성의 몸 위로 엎어졌다. 기억을 찾았음에도 증거가 필요했던 건 결국 장윤성도 내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그동안의 일을 솔직히 털어놨다면 증거가 없어도 나는 부정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가 기억을 찾은 사실과 내가 떠난 뒤의 일을 숨기려 했던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내게 티끌만 한 죄책감도 씌우기 싫었을 것이다. 장윤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기억은 언제 돌아왔는데?”
“글쎄….”
단번에 모든 게 기억났던 건 아닌지 장윤성은 꽤 많은 기억을 되짚듯 뜸을 들였다.
“그런 걸 떠올려 놓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원망도 안 해.”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길 바랐다. 말 한마디, 연락 한 통이라도 남겨 줬다면, 아니, 반지라도 끝까지 손에 끼고 갔다면 제가 그렇게까지 했겠느냐고. 하지만 장윤성은 벌써 희미해진 일인 양 덤덤하게 말을 일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 눈을 떴을 때 나 여사가 아버지를 탓하는 걸 들었거든. ‘차라리 그 앨 데려와, 내 새끼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하고.”
두 번째 사고 이후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장윤성의 모친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인상도 아들을 대할 땐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으니까. 별장에도 음식은 넘쳐나는데 장윤성이 좋아하는 것을 굳이 챙겨 보낼 정도로 자식을 아끼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내가 기억을 잃었단 걸 눈치채자마자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닫았어. 내가 왜 한국에 있는 건지 물었더니 여름부터 별장에서 지냈다는 거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크게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데…. 뭘 물어보고 싶어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어.”
장윤성은 조금 우스운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 상황이 당황스러웠거든. 눈을 떠 보니 지구 반대편이라는 게.”
하나도 우습지 않아서 얼굴을 찡그렸더니 장윤성은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 웃었다.
“다행히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금방 퇴원했어. 그렇게 집에 돌아갔는데….”
담담하게 나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기분이 이상한 거야. 고작 몇 달 간의 기억이 비고, 할아버지가 더 이상 안 계시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어. 가족들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도 웃을 수 없고….”
장윤성은 한숨처럼 흩어지는 목소리로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내가 울먹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이 슬퍼할까 봐.
그래서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잠도 못 자고?”
그의 불면증이 심각한 상태라는 건 사실 알고 있었다. 바닥을 보이던 약 통이 다시 채워져 있는 걸 몇 번이나 봤었으니까. 그래도 그 일 때문은 아닐 줄 알았다. 가진 게, 지킬 게 많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건 줄 알았다. 내가 그의 불면증을 짚어 내자 장윤성은 별 수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겨우 잠이 들면 꿈을 꿔. 내가 손을 놓쳐서 누군가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꿈….”
장윤성이 빈손을 내게 내밀어 보였다. 내가 위로하듯 손을 잡자 그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때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잠에서 깨. 가족들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이상한 이름의 낯선 개는 항상 우울한 얼굴로 대문 앞에 앉아 있어.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데 나는 뭔가 아주 큰 걸 잃어버린 것 같아. 하지만 내가 뭔가를 가졌다는 흔적조차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채로 시간이 계속 갔어. 결국 더 이상 그러고 있기 싫어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지. 그리고….”
장윤성은 뭔가를 생각하듯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웃었다.
“아마 그날이었을 거야. 이상한 전화가 왔던 날이.”
전화라는 소리에 나는 단 한 번 연결되었던 그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친구들이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자고 해서, 하필이면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에 그렇게 모여 있었어. 원래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데 그날은 어쩐지 받고 싶단 기분이 들더라. 미처 그 자리에 오지 못해서 전화로 인사를 전하려는 친구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잊을 수가 없었지.”
그 짧은 통화를 기억하는 게 자신의 의사는 아니었다는 말투였다.
“처음엔 정말 잘못 건 전화인 줄 알았어. 상대가 남자인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예정대로 미국에 돌아갔어. 그런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나중에야 발신자를 알아보려고 했더니 시간이 너무 지난 데다 공중전화라 추적이 어렵다는 소리만 들었어. 그래도 설마 남자랑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싶었어. 그날, 가게 계단에서 널 마주치기 전까지는.”
장윤성의 손이 다시 내 얼굴을 만졌다.
“널 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찾던 게 남자일 수도 있겠다고.”
진작 눈치채지 못한 걸 자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쁘더라, 네가.”
의외였다. 기억을 잃고 날 처음 봤을 때 소감이 생각보다 단순해서. 계단에서 7년 만에 재회했을 때 다짜고짜 저를 아냐고 묻기에 그때 뭔가 눈치챈 줄 알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살갑지 않은 성격도 마음에 들었어. 내가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해서 이 지경이 된 거라면, 네가 그 사람을 잊도록 해 줄 것 같았어. 그만큼 강렬했거든.”
나는 장윤성의 눈동자를 빤히 살폈다. 분명 뭐가 씐 게 틀림없는데 갈색 홍채와 새카만 동공만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다 차에 치일 뻔한 너를 안고 굴렀는데 머릿속에서 내가 모르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어. 충격 때문일 거라 치부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꿈을 꿀 때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치지 않게 됐어. 여전히 쉽게 잠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널 옆에 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나도 숨을 좀 쉬고 싶었으니까. 상상이 돼? 네가 이 집에 들어오던 날, 내 기분이 어땠을지.”
그는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몇 마디 말로 생략된 이야기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네 반응 때문에 네가 어떻게든 내가 잊은 과거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떤 식으로 엮인 건지는 사실 확신할 수 없었어. 내가 놓친 사람이 네가 아닐까 봐 걱정하기도 했고. 이미 그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났고, 나 혼자 살자고 엉뚱한 사람에게 위로받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별장을 다녀오던 날, 네가 그랬잖아. 그 사람이 연락을 했을 수도 있지 않냐고.”
내가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인정하는 걸 확인하고 장윤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그렇게 잊을 수 없었던, 잘못 걸렸던 전화가 다시 떠올랐어. 아마 그제야 확신했을 거야. 내가 잃은 기억엔 너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깐 눈을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재촉하는 대신 그가 내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조금씩 넘겨 주었다. 장윤성은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랑 짐을 가지러 별장에 다녀왔을 때부터 기억이 빠르게 돌아왔어. 그곳에서의 네 행동 하나하나에 낡은 장면이 겹쳐졌어. 뒤죽박죽 떠올라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강은 알았지. 7년 전에 내가 왜 별장에 갔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기 진짜 이상한 여자가 있었더라고.”
장윤성의 이야기는 어느새 7년 전의 여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게 퍽 즐거운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 주제에 막상 그 남자를 꼬실 생각도 없고, 누구보다 뻔뻔한 척 거짓말을 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도 못해서 할아버지한테 필요 이상으로 애를 쓰고, 호기심도 욕심도 많으면서 거기에 있는 무엇에도 관심 갖지 않으려고 버티는 모습이 신경 쓰이는 그런 사람.”
내가 그랬었나.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가 들려주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궁금해졌어. 그렇게까지 하면서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뭘까. 돈? 그 전에 왔던 가짜들도 어쨌든 돈을 보고 왔을 텐데, 대부분은 가짜인 걸 들키면 도망치듯 떠났거든. 그런데 이번엔 가짜인 걸 들키고도 숨을 죽이고 버티고 있는 거야. 내가 할아버지께 말하면 더 험한 꼴로 쫓겨날 수 있을 텐데도. 그래서 다른 가짜들보다는 조금 더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가짜인가 했지.”
가짜 한지영에 대한 장윤성의 평가가 너무 냉정해서 결국 나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점점 더 궁금한 거야. 그 돈은 왜 필요한 걸까. 할아버지와 내가 홀딱 빠져 있으니 그걸로 한몫 챙겨 볼 법도 한데 그 가짜는 굳이 아버지가 주는 돈만 받으려고 했어.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욕심이 없는 건지. 어쨌든 그런 사람인데도 누군가를 속이며 거기에 있으려는 이유는 뭐, 뻔하지. 그 돈이 없으면 뭔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경우.”
제 추측이 맞느냐는 듯 장윤성이 눈짓으로 물어 오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7년 전의 그에게 내 사정을 말한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게, 얻을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걸 둘러볼 여유조차 없어 보였어. 그게 안쓰럽고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아. 불쌍하니까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지. 근데 그럴수록 마음이 초조해지는 거야. 왜 고맙다는 말이 없지? 잘해 주는데 왜 감동받질 않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하는 것처럼 살갑게 굴지 않지?”
스물한 살의 장윤성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 흘렀다. 그냥 호구인 줄만 알았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내가 제 이야기에 웃는 게 좋았던지 장윤성은 조금 더 씩씩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냥 좋기만 한 기억은 아닐 텐데도.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질투가 났어. 대체 뭐에 그렇게 매달리는 걸까. 그다음엔 욕심이 났어. 네가 나한테도 그렇게 매달렸으면 하고. 사실 그렇게 만들 자신도 있었어.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었으니까. 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네가 웃을 때마다 조금은 더 가까워졌을까, 네 마음이 조금은 더 열렸을까 기대했어. 그렇게 한참 설레고 있을 때 너와 호텔에 갔지.”
호텔에서의 일은 영영 듣지 못할 줄 알았던 얘기였다. 고백을 받고 왜 화를 냈던 건지 물었을 때 장윤성은 그렇게 대답했으니까. 내가 저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는 날 이유를 말해 주겠다고. 결국 내가 그에게 직접 이름을 가르쳐 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어. 네가 이름과 나이뿐 아니라 성별까지 속였을지도 모르겠다고. 근데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네가 좋았나 봐. 그때까지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거든.”
예상과 달리 더 일찍 알아챘다는 소리였지만 이젠 놀랄 일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알아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붙어 있던 시간이 길었던 데다 신체적 접촉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눈치가 귀신같은 이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술에 취한 너를 침대에 눕혀 놓고 낯선 충동을 억누르며 네 얼굴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웅얼웅얼 누군가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건우였겠지만, 하여간 잘 들리지 않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그러는 거야.”
‘형 물 좀 갖다줘, 라고.’
그는 그날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해낸 듯 덧붙였다.
“별로 놀라지 않았어. 예상했었거든. 내가 놀란 건….”
장윤성의 손이 내 볼부터 턱, 목을 지나 쇄골께의 어딘가를 지그시 눌렀다. 잇자국이 난 곳인지 얕은 통증이 일었다.
“남자인 네 몸이 궁금해졌을 때였어. 그리고 그제야 중요한 문제 하나가 생각난 거지. 나는 네가 남자여도 괜찮지만, 너는 어떨까. 너는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닐 것 같았어. 내가 네 손을 잡고 있어도 너는 언제나 뿌리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니까. 애초에 연애 상대로 볼 수 없다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마 그게 무서워서 화를 낸 걸 거야. 너랑 들어가려고 파 놓은 구덩이에 나만 혼자 남겨질까 봐. 보답 받지 못할 사랑 같은 거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어, 나는.”
스물한 살의 장윤성이 투덜거렸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 건방진 투정은 따지고 보면 오히려 겸손이었다. 결국 스물두 살의 이하경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네가 보이지 않아도 계속 마음이 쓰여. 밤새 그렇게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다 잠이 들어도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네 얼굴이 궁금해. 네가 날 무심하게 볼 때보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서는 게 더 싫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더라, 네게 향한 마음을 돌리는 게. 차라리 혼자라도 사랑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다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말했으면….”
“말했으면?”
장윤성이 내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말했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제야 쉽게 꺼냈던 말에 내 입이 막혔다. 답할 수가 없었다. 장윤성이 알고 있다고 말했더라도 나는 아마….
“말했으면 네가 나를 더 쉽게 거절했겠지. 좋은 핑계잖아.”
정곡을 찔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널 잘 알아.”
그런 것 같았다. 가끔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어, 그때는. 이름도 모르면서.”
하지만 장윤성은 그렇게 확신한 스스로를 비웃듯 덧붙였다. 그의 손이 다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 모든 게 궁금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거든. 어느새 내게로 기우는 네 마음이 훤히 보였어. 처음엔 날 쉽게 거절할까 봐 네가 남자인 걸 안다고 말하지 않았던 게 맞아. 하지만 나중엔 기대하게 됐어. 네가 내게 모든 걸 거는 순간을. 그리고 마지막 날 밤에, 너는 정말 그러려고 했잖아.”
진눈깨비가 날리던 날 밤, 장윤성은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미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내 입으로 밝힐 기회를 놓쳐 버린 터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반지를 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나 봐.”
내가 두고 간 반지를 받았던 날 장윤성이 스스로 호수에 뛰어들었다는 걸 떠올리자 심장이 무겁게 저려 왔다. 그걸 눈치챈 듯 장윤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내가 자만했던 거지.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부쩍 씁쓸해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목숨까지 걸고 날 지키려고 했는데.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가까이 맞댔다. 장윤성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조금씩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좋았다.
“가족들이 날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 오래 누워있었던 탓에 몸을 가누긴 어려웠고 별수 없이 사람을 보내 알아봤지만 번번이 네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증거만 가져왔지.”
장윤성이 받아 본 증거에 기재된 이름은 이하경이 아니라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나를 찾아다녔다고도 했다.
문득 전에 친구들과 술을 마셨을 때 동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원그룹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해 줬는데 이후에 또 찾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단순히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다른 친척들이 찾지 못하도록 나를 숨기려는 건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장윤성의 인생이 걸린 문젠데 그들이 쉽게 처리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던 것 같아.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고 다니니까 보다 못한 형이 반지를 줬어. 이제 그만 인정하라고. 그래도 인정할 수가 없었어. 별장에 가면 여전히 네가 있을 것 같아. 의사가 한동안 운전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별장에 찾아갔어. 물론 아무도 없었지.”
우리는 서로에게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서로를 놓쳤던 날을 떠올리면서.
“죽으려고 그 자리를 찾아간 건 아니야. 네가 남긴 티끌만 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던 것뿐이지. 그런데 그 커브 길에서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손이 움직이질 않았어. 그냥, 그래서 난 사고야. 의사 말 안 들은 벌이지 뭐.”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목소리 사이에 떨리는 숨결을 느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에 내내 거슬렸던 게 떠올랐다. 깁스를 풀고 다 나았다는 팔을 운전할 때마다 불편한 듯이 의식했던 그의 모습이.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사람 하나를 번쩍번쩍 들고 다녔으니까.
장윤성의 팔이 불편해 보일 때는 운전할 때뿐이었다.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고. 어쩌면 그건 사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예 감정이 배제된 사고는 아닐 것 같았다. 결국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으니까.
“그 사고 기억은 언제 떠올랐는데?”
운전할 때 팔을 털던 습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드디어 팔이 다 나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아 있으니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서.
“다이어리 사이에서 반지를 발견했을 때.”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혔던 그날?”
유독 이상했던 날이 있다고 한다면 그날뿐이었다. 그쯤 장윤성은 유난히 피곤해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쏟아지는 기억 때문이었을까. 핑계 없는 키스에 당황해서 내가 방으로 숨어 버린 사이 그는 혼자 짐을 정리했었다.
그때 봤구나, 반지.
낡은 카메라와 그 안의 필름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쯤, 그는 다이어리에서 다른 걸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내 추측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말도 안 하고…. 차라리 화라도 내지.”
나는 또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장윤성이 그럴 사람이 못 되는 걸 알면서. 그는 한결 덤덤해진, 아니 더욱 다정해진 음색으로 대답했다.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았는데 어떻게 그래.”
나를 잘 안다고 했던 그의 생각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장윤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마디 화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쉽게 상처받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도망치려 하니까.
“하경아.”
다정한 부름에 나는 그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 어느 가을의 언덕이 있었다.
“아직도 겁이 나? 아직도 날 사랑하는 게 무서워? 그러면 나는 또 기다릴 수 있어. 네가 다시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목소리에 섞인 게 체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다. 그건 아마 각오 같은 거였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기다림에 대한 하염없는 각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그래도 저번처럼은 싫었던지 조심스레 운을 떼는 목소리에 상흔이 역력했다. 듣는 내가 목이 조여 올 만큼 고통스러운.
“이번엔 곁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 너 잘 사는 거 보면서.”
그런데도 장윤성은 아파도 울 줄 모르는 사람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해.”
눈물 대신 마음을 쏟으면서.
***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장윤성의 몫까지 울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옷이 축축하게 젖은 걸 보고는 그제야 손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 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시 젖어 버렸으니까. 불을 켜지 않아도 밖이 환해졌을 때쯤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서 좁아진 시야로는 장윤성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내 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를 놀리는 웃음이었지만 웃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웃어 줘서 좋았다.
눈물이 말라 까칠해진 얼굴에 안쓰러운 손길이 닿았다.
“건우가 놀라겠다.”
아직 그의 마음에 답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일단 병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건우가 괜찮아지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장윤성은 그걸로 됐다는 듯이 굳이 잡지 않았다.
“슬픈 영화 봤다고 하면 돼.”
나는 여전히 눈을 가물가물하게 뜨고 대꾸했다. 장윤성이 그런 핑계로 넘어갈 정도가 아닌 것 같다고 또 놀렸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먹힐 수도 있는 핑계였다. 생사가 가르는 이별을 잇달아 경험한 뒤로는 죽음에 민감해졌다. 현실이든 가상의 이야기든 그런 주제가 나오면 쉽게 울었다. 건우도 그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너야말로 출근할 수 있겠어? 한숨도 못 잤잖아.”
“좀 졸지 뭐. 내가 존다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너희 아버지랑 형….”
웬일로 회장님의 아들 티를 내며 건방을 떨기에 나는 농담에 대꾸하는 양 신경 쓰이는 두 사람을 입에 올렸다. 그들이 두려워서 지켜 달라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장윤성이 소중한 이들과 틀어지는 게 싫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또 사랑받는 막내거든.”
그렇게 말한다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믿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장윤성은 핸드폰을 들고 뭘 열심히 검색하더니 냉동실에 숟가락 두 개를 넣어 두고 출근을 했다. 차가운 숟가락을 눈에 대고 있으면 붓기가 좀 가라앉는다나 뭐라나. 눈이 너무 부은 상태라 효과가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장윤성의 침대 위에 멍하게 누워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쯤 겨우 병원에 돌아갔더니 건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밤에 슬픈 영화를 봤다고 대충 둘러댔지만 장윤성의 예상대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나는 담요를 끌어 덮고 소파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잘 거야?”
등 뒤에서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조금만 잘게.”
웅얼웅얼 대답을 하다가 잊은 일이 떠올랐다. 폰을 꺼내 잘 들어왔다고,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많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
내가 건우의 병실을 지키는 동안 장윤성은 먹을 걸 사 들고 몇 번인가 들렀다. 귀찮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장윤성은 사실 매일 오고 싶은데 건우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참는 거라고 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건우는 생각보다 그를 좋아했고, 잦은 방문도 별로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드디어 퇴원해도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방보다 큰 호화로운 병실이었지만 그래도 집만은 못했다. 우리는 들떠서 어느새 하나 둘 늘어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집안일을 담당했던 건우는 쌓인 빨랫감을 보며 세탁기부터 돌려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쉬었다가 하래도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고개를 저으며 병원에서 가져온 것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현관을 두드렸다. 누구지. 성질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내가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똑똑똑, 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나가요.”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게 성질이 급할 뿐 아니라 더럽기까지 할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대꾸하며 뛰어나갔다. 우리 집 문은 누가 발로 차거나 하면 금방 부서질 정도로 낡았으니까.
허겁지겁 잠긴 문을 열자 키가 큰 방문자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보다는 꽤나 크지만 장윤성보다는 조금 작은 것 같은 그의 형, 장현성이.
“여긴 어떻게….”
“나와.”
장현성은 턱짓으로 대문 쪽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용건을 말했다. 내가 싫다고 하면 강제로 끌어내려나. 그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어쨌든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게 뻔했다.
나는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을 흘끔 봤다. 물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건지 건우는 현관의 사정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시만요. 나간다고 동생한테 말 좀 하고 올게요.”
장현성은 오래 기다리진 못한다는 듯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급한 볼일이 생겨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건우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대문 밖에는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현성과 내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자 차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장현성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을 생각도 없긴 했다. 대낮에도 막히는 길을 지나 들어선 곳은 높다란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찬 빌딩 숲이었으니까. 내 예상대로 차는 태원이라는 이름이 크게 붙은 높은 건물 앞에 섰다.
장현성이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몇 사람이 달려 나와 고개를 숙였다. 이따금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장현성은 표정 없이 고개를 숙이는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태원가가 갖고 있는 것, 그저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도 달라붙는 많은 시선,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보다 훨씬 초라한 내 모습. 지하로 조용히 들어갈 수도 있었을 걸 굳이 로비를 지나간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허하게 웃었다. 장윤성이 어떤 표정으로 내게 마음을 털어놨는지 안다면 이런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내가 그다지 주눅 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장현성은 조금 인상을 썼다. 장윤성은 나의 형제와 죽이 잘 맞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의 형제와 그렇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장현성과 나는 아득하게 높은 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복도를 걸어, 두 개의 문을 지나 넓은 공간에 들어섰다.
“데려왔습니다.”
장현성이 그렇게 보고하자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장 회장은 이전의 장 회장보다는 조금 더 말랐고 조금 더 건조한 인상이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테지만 7년 전과는 묘하게 달랐다. 그토록 원하던 태원그룹을 손에 쥐었기 때문일까, 맹목적인 열정과 서슬 같은 욕망으로 날카롭던 눈빛이 조금 무뎌진 것 같았다.
그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시선으로 내 머리부터 말끝까지를 훑었다. 인사를 받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여전히 마뜩찮은 눈길로 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심기가 불편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차피 용건은 하나일 텐데도 그는 앉으라는 소리 없이 뜸을 들였다.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다가 그다음에는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7년 전에 나를 불러놓고 담배에 불을 붙이던 표정으로. 벌은 세우는 건가 싶을 만큼 긴 침묵을 견디고 나서야 장명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끔 네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 깐깐한 노인네 마음에 들 정도니, 데려다 키우면 쓸 만할 것 같았거든.”
딱히 내게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양 말을 하면서도 그는 골치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게다.”
장윤성과 그런 식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날 찾았을 거라는 소리였다. 정말 그랬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 자식이 널 지키려다 사경을 헤맸을 때도 네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밉지는 않았지. 그래서 네 어머니 치료도 계속 도와줬던 거고. …결국 그렇게 되신 건 안타깝다만.”
그의 이야기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치료를 끝까지 책임져 준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장례와 그 이후의 일도.
거절하지 못하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궁금하긴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지. 장명수가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더 악랄하게 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치료는커녕, 장윤성의 희생을 핑계로 나를 빈손으로 내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가시처럼 내 죄책감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알량한 양심이 무거워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네게 베푼 게 적다고는 생각지 않아.”
맞는 말이었다. 부자라고 해서 가난한 이를 무조건 도와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고작 몇 달 그의 부친의 곁을 지킨 것 치고는 과분한 대가였다. 장명수는 아까보다 매서워진 눈매로 물었다.
“나는 네게 그만큼을 해 줬는데, 너는 내 아들에게 뭘 해 줄 수 있지?”
쉬운 질문이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대답하지 못할 걸 안다는 듯이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그놈 인생에 큰 오점이나 남기겠지. 네가 조금이라도 내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그놈을 잘 달래서….”
“제가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내가 무릎을 꿇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장명수도, 장현성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적어도 흠이 되진 않게 할게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숨죽이고 살게요.”
고마운 마음이 있으면 장윤성을 잘 달래 보라고? 아무래도 장명수는 나를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배은망덕하고, 누굴 달래서 설득할 만한 재주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목숨을 건 사람을 버렸고, 이런 순간에도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정말 아드님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살게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할 수 있는 말도 그것밖엔 없었다. 장윤성처럼 말을 잘했으면 좋을 텐데. 언변까지 초라한 게 서러워서 무릎 위에 올린 손이 덜덜 떨렸다.
“괜찮다고 하면… 윤성이가 이제 됐다고 하면, 그러면 사라질게요. 그냥 그때까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옆에 있게 해 주세요.”
그런 걱정을 했던 때가 있었다. 이런 사랑을 잃으면 어떻게 살지, 하는. 그 이후를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시작조차 꿈꾸지 못했다. 그래서 겁이 많은 내게 장윤성이 먼저 보여 준 걸지도 몰랐다. 사랑을 잃으면 죽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다고. 그래도 제 사랑이 끝나지 않아 버티게 되더라고. 물속에 들어간 장윤성이 마음 대신 기억을 버리고 돌아와 7년을 견딘 것처럼.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저는….”
결국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 번은 못 하겠어요.”
두 번이나 물속에, 죽음 같은 어둠 속에 장윤성을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다음에 또 누군가 시커먼 호수에 빠져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건 내 각오인 동시에 협박이었다. 당신들은 두 번이나 장윤성에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이…!”
그 뜻을 알아챈 장명수가 노기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 때였다.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가시면….”
비서의 난처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선 건 장윤성이었다. 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그는 제 아버지와 형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나부터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일어나. 가자.”
내가 장명수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자 장윤성은 답지 않게 무서운 얼굴을 했다. 일어서지 않으면 들고 나갈 기세라 나는 별수 없이 일어섰다. 채 무릎을 제대로 펴기도 전에 나를 잡아끈 장윤성이 그사이 닫힌 문을 열려 손을 댈 때였다.
“애비 대화 중이다.”
간신히 분을 억누른 장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목덜미를 잡힌 것처럼 장윤성이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대화는 저랑 먼저 하셨어야죠.”
하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 형의 부름을 뒤로하고 장윤성은 내 손을 꽉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잡힌 손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풀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몸을 굽혀 내 무릎을 털어 주었다.
“안 털어 줘도 돼. 거기 바닥 되게 깨끗하던데, 뭐.”
나는 무릎을 빼며 그를 말렸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정말로 무릎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장윤성은 제 성에 찰 때까지 내 무릎을 털어 주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네가 왜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어.”
정작 그의 가족들에겐 티끌만 한 감흥도 주지 못한 일인데 괜한 사람 속만 썩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내가 장명수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결국 그 은혜를 저버리게 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장명수가 받아 주든 말든 한 번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장윤성이 여전히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네가 나보다 좀 덜 살아서 모르나 본데, 원래 남의 집 귀한 자식 날로 먹을 때는 무릎 정돈 꿇는 거야. 넌 안 그랬을 것 같아? 우리 엄마 아빠 살아 있었으면 넌 지금쯤 무릎 다 닳았을걸?”
제 생각에도 그랬을 것 같았는지 녀석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난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엄마는 장윤성의 무릎이 닳기 전에 허락했을 것 같았다.
…아닐까. 우리 엄마도 장명수처럼 몇 번은 장윤성과 나를 떼어 놓으려 애를 썼을까.
이제는 답을 구할 수 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따듯한 손이 내 볼을 감쌌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겁먹은 얼굴이었을까. 장윤성은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달래듯 말했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가 땡, 하는 도착음과 함께 멈췄다. 누가 볼까 볼에 닿은 손을 떼어 내고 확인해 보니 어느새 지하까지 내려와 있었다. 주차장이 있는 층인 걸 깨닫자마자 분명 업무 중이었을 장윤성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들었다.
“너 어디 가려고?”
“데려다줄게.”
“가서 일이나 해. 애도 아니고 집 정도는 알아서 가.”
집도 혼자 못 찾아갈 머저리로 보였는지 장윤성이 여전히 못미더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하지만 내가 정말 집을 찾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 도망가.”
아마 내가 겁을 먹고 숨어 버릴까 봐, 그래서 불안한 거겠지. 하지만 장윤성은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조차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의연하게 덧붙였지만 역시 장윤성은 속이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 뭐… 사실 조금 무서운데….”
빤한 시선에 결국 속내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장윤성이 그렇게까지 한 이상 장명수가 내 동생을 건드리진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아들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는 아버지라면. 그래서 무릎 꿇고 빌어 보기라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장명수를 잘못 판단한 거라면, 내 헛된 희망이 시야를 가려서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한 거라면 어떡하지.
“그래도 네가 건우만 지켜 주면….”
망설이다가 결국 그런 말까지 뱉고 말았다. 그의 가족을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 같아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힘든 시간을 홀로 견뎠을 사람에게 짐이 될까 봐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도 너무나 불안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만 해 주면 나도 버텨 볼게.”
말해 놓고 보니 상상 이상으로 초라했다.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버티는 것뿐이라니. 동생의 안위까지 떠안겨 놓고.
“미안해. 이런 부탁까지 해서.”
겨우 미안하다는 말을 뱉고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릎까지 꿇었으면 조금 더 그가 듣기 좋은 말을 해 줄 법도 했는데, 끝까지 내 것만 지키려 열심이었다.
“하경아.”
날 부르는 목소리는 여지없이 다정했다. 장윤성의 손이 꽉 깨문 내 입술에 닿았다.
“내가 말 안 했었나?”
달래듯 문지르는 손길에 결국 입술이 벌어졌다. 깨물었던 곳에서 통증이 일었다.
“네 그런 성격도 좋아한다고.”
내게 직접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소릴 하는 걸 본 적은 있었다. 제 형이 하나뿐인 가족에게 좀 유난하지 않냐고 건우가 물었을 때. 문밖에서 대화를 엿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장윤성은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을까. 눈앞의 그는 거짓 없이 웃고 있었다.
“네가 네 것들을 지키려 할수록 기대가 돼.”
기대가 된다고? 의아한 말을 뱉은 장윤성은 비밀스러운 말을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날 완전히 가지는 날이.”
“무… 뭐….”
입술을 스친 것도 아닌데 뭐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이렇게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일 말인가. 장윤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조금 굽혔던 몸을 폈다.
“걱정 말고 가.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제 가족을 그렇게 믿는 건지, 아니면 제가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는 건지 장윤성은 확신에 찬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수가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뺏을 수가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장윤성이 잡아 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더니 건우가 맨바닥에 뻗어 있었다. 장현성을 따라나설 때 돌리기 시작했던 빨래는 건조대에 널려 있었고 방도 어딘지 모르게 더 깨끗해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기운을 다 뺀 것 같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내가 한다고 했는데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깐깐하기는.
“으음….”
눈을 감고 자던 녀석이 내가 속으로 흉본 걸 들은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어… 형 왔네.”
“이불 깔고 자지. 왜 바닥에서 이러고 있어.”
내가 이불을 깔아 주려 하자 건우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잠깐 눈만 붙이려고 했던 거야. 지금 많이 자면 밤에 못 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잠이 덜 깼는지 건우는 멍하게 앉아 있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결국 시계를 흘끔 보고는 생각보다 덜 잤다며 도로 누웠다.
“이불 깔고 자라니까.”
“으응….”
이미 잠들기 직전 같아서 나는 얼른 한쪽 구석에 이불을 폈다.
“야, 야, 굴러.”
내가 누구처럼 사람을 번쩍 들어 옮길 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라 누워 있는 놈을 굴리듯 밀었더니 녀석이 힘겹게 굴러 이불 위로 들어갔다. 길기도 긴 게 그러고 구르는 꼴이 우스워서 웃음소리를 냈더니 건우가 잠이 달아난 듯 눈을 말똥 떴다.
“형 그렇게 웃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본다.”
“그래?”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원래 크게 웃는 일이 드문 편이니까. 하지만 건우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허리를 펴고 앉았다.
“응. 형 요즘 되게 이상했잖아.”
“되게 이상할 것까지야….”
“막 엄청 큰일이 생긴 건 아니지?”
그렇게 묻는 얼굴이 어느새 의젓해져 있었다. 7년 전 장윤성을 두고 돌아왔을 때, 나라고 멀쩡히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를 위해 더 씩씩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제 형이 속절없이 앓는 걸 보면서 어린 건우도 아마 짐작했을 것이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는 걸.
그때 건우는 결국 내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도 못했다. 저는 어려서 도움도 되지 못할 텐데 괜히 상처를 건드렸다가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 녀석은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저도 뭐든 해 볼 자신이 생긴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야. 나중에 말해 줄게.”
“됐어. 말 안 해 줄 거 알아.”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대꾸하면서 건우는 내 팔이며 얼굴이며 진찰하듯 살폈다.
“그때처럼 아프지만 마. 그땐 진짜 무서웠으니까.”
엄마도 형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어린 건우에게 큰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처가 꽤 아문 듯 건우는 쉽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윽.”
나는 배를 움켜쥐고 녀석의 몸 위로 풀썩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속은 건지 속다 만 건지 건우가 뭐야, 하고 내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나는 계속 몸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윽, 건우야, 건우야, 배, 배가….”
“뭐, 배가 왜.”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내 얼굴을 살피는 게 아무래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아직 멀었네.
“배가 너무 고파…. 저녁에 김치찌개 먹으면 나을 것 같아.”
찰나의 걱정조차 후회스러웠던지 건우는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밥에 콩 넣어 버릴 거야.”
“야, 미쳤냐?”
콩이라는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건우는 형이 먼저 시작한 싸움이라며 콩을 찾을 기세로 부엌으로 나갔다. 따로 콩을 사다 놓은 적은 없지만 인심 좋은 이웃들이 가끔 나눠 준 콩 같은 게 집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있을 경우 먼저 찾아서 숨기거나 밥에 넣는 쪽이 이기는 승부였으므로 우리는 정신없이 집 안 여기저기를 뒤적였다. 내가 다용도실을 뒤적이는 사이 건우는 싱크대 아래에서 콩을 찾아 쌀에 섞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게 남았다는 듯이 건우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형, 큰일 났어. 참치가 없어.”
“어떻게 콩이 있는데 참치가 없을 수가 있어?”
“형이 안 사다 놨으니까 없지. 콩 얘기 그만하고 빨리 가서 사 와. 두부도.”
슬슬 배가 고팠던지 건우가 지갑과 핸드폰을 쥐여 주며 재촉했다. 별수 없이 슬리퍼를 대충 신고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장바구니에 참치와 두부를 넣고 건우가 입원해 있는 동안 상해 못 먹을 것들이 많을 것 같아서 그밖에도 몇 가지 식재료를 더 샀다.
기다란 영수증을 보며 집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낯익은 차가 한 대 눈에 들어왔다. 이 동네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비싼 차가. 심지어 차에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의 실루엣 또한 눈에 익었다. 내가 손에 든 봉지를 바스락거리면서 다가가자 장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눈매가 기쁘게 휘었다.
“하경아.”
장윤성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가 든 봉지를 가로챘다. 받아 든 게 생각보다 무거웠던지 그는 내용물을 슬쩍 들여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이건?”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장 좀 봤어. 그보다 무슨 일 있었어? 여기까지 다 오고….”
실은 혼자 돌아오면서 걱정스럽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 성격에 얌전히 돌아가서 일만 했을 리도 없었으니까.
“무슨 일은…. 건우 퇴원했다고 하니까 저녁이라도 사 주려고 온 거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 소릴 해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장님…, 아니, 너희 아버지랑 얘기 좀 했어?”
오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부자간의 대화는 언제고 한 번은 거쳐야 할 수순이었다. 하지만 무슨 대화를 했을지는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장윤성은 홀로 견뎌야 했던 날을 부친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장명수는 아들의 상처를 다 볼 수 있었을까. 내가 궁금해할 걸 알면서도 장윤성은 짧게 대답했다.
“응.”
그게 다였다. 더 덧붙일 말이 없는 걸 보면 별 진전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예상 밖의 일도 아니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장 와서 집을 뒤엎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그래도 어디 맞지는 않았나 봐. 얼굴 멀쩡한 거 보면.”
“아, 생각보다 금방 가라앉더라고.”
최악은 아닌 것 같아서 우스갯소리랍시고 던진 말이었는데 장윤성이 제 왼쪽 뺨을 보란 듯이 들이댔다. 기분 탓인지 살짝 부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맞았어? 진짜?”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양새가 능청스럽기까지 해서 농담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맞기만 했을 것 같아?”
“그럼?”
“쫓겨나기까지 했지.”
하도 의기양양한 목소리라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뭐 대단한 상이라도 받고 온 줄 알았을 것 같았다.
“정말?”
내가 그렇게 물었음에도 녀석은 우리 집 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른 소리를 했다.
“건우 데리고 내려와. 밥 먹으러 가자.”
“정말 쫓겨났어?”
정말 쫓겨났다고 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답이 듣고 싶었다.
“응. 그래서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
내가 재차 묻자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척하는 말이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쫓겨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봤자 서로 애정이 있는 부모 자식 간의 싸움에서 ‘나가’라는 소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그런 일을 겪어 본 적 없는 나도 아는 거였다. 그래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아서 나는 잠시 장윤성의 얼굴을 보고 멀거니 섰다.
“나 배고픈데, 하경아. 뭐 먹으러 갈까.”
하지만 장윤성은 그런 작은 걱정도 필요 없다는 듯이 다시 말을 돌렸다.
해가 길어지는 계절임에도 벌써 골목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는 말도 영 거짓말은 아닐 것 같았다.
“가긴 어딜 가. 그게 우리 저녁인데.”
“이거?”
내 말에 장윤성이 제가 뺏어 든 봉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윤성은 봉지를 들고 남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대문까지 몇 걸음이나 된다고.
그래도 우리는 그 잠깐이나마 잡은 손을 신나게 흔들며 걸었다. 대문을 지나 좁은 계단에 들어서자 장윤성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이 좁다고 미리 말을 해 둘까 하다가 그게 더 구차한 것 같아서 그냥 묵묵히 앞장을 섰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장윤성을 한 계단 아래 세워 두고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예고 없이 친구를 데려오는 건 항상 건우였기 때문에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손님부터 들이밀 순 없었다. 안쪽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렸다. 짐을 받아 주려 내 손부터 살핀 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참치는? 마트 문 닫았어?”
“어? 아니, 사 왔어. 사 왔는데, 손님이 와서.”
그제야 짐이 아직 장윤성의 손에 있는 게 기억이 났다. 기껏 찾아온 손님이 짐까지 들어 주는 모양새가 이상한 것 같아서 허둥대는 사이 건우가 궁금한 듯 현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윤성이 형!”
“안녕.”
건우가 금방 알아보자 장윤성이 웃으며 인사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미안해.”
방금 전까지 아버지와 다투다 어딜 맞았다느니, 쫓겨났다느니 하던 사람답지 않게 퍽 점잖은 얼굴로 사과를 하며 장윤성이 남은 한 계단을 마저 올랐다.
“아니에요! 형은 언제나 환영이죠. 어서 들어오세요.”
건우는 호들갑을 떨며 장윤성을 맞이하다가 그 손에 들린 마트 봉지를 발견하고는 내게 눈을 흘겼다.
“어떻게 손님한테 짐을 들라고 하냐?”
“야,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자처한 거거든?”
물론 호의를 거절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내가 변명을 하든 말든 녀석은 이미 짐을 받아 들고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형,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건우의 안내에 따라 장윤성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큰 게 둘이나 서 있으니 원래도 좁은 현관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좁아 보였다.
집을 한 번 둘러본 장윤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우리를 의식한 듯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신기한 걸 보듯이 빛나고 있었다. 자고 가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이었다고 해도 지금쯤은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을까.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식사 전이면 저희랑 같이 먹어요. 마침 저녁 하려던 중이었거든요. 김치찌개 좋아하세요? 저희는 참치 넣는데….”
“엄청 좋아하지. 도와줄까?”
“괜찮아요. 어차피 부엌도 좁아서 혼자 하는 게 편해요.”
다행히 건우는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이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들뜬 듯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장 봐 온 것 중에서 필요한 걸 꺼냈다.
나는 당장 쓸 것을 뺀 나머지를 정리해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참치김치찌개를 엄청 좋아했는지 모를 장윤성은 앉을 생각도 않고 우리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한번 슥 둘러보면 끝인 좁은 집구석을 뭐 그렇게 꼼꼼히 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집 안 무너지니까 앉아.”
내가 상을 펴며 재촉하자 장윤성은 바닥을 두리번거리다가 어색하게 앉았다. 그제야 방석 같은 게 필요했나 싶었지만 앞으로 이 집에 한두 번 올 게 아니라면 맨바닥이라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장윤성도 많이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해 놔서 조금 기다려야 돼.”
“괜찮아.”
배고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장윤성은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원래 요리는 건우가 하곤 했지만 막 퇴원한 몸으로 혼자 준비하는 게 신경 쓰여 나는 분주히 부엌과 방을 오갔다.
사실 장윤성과 둘이 마주 앉아 대화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방에 누워서 부엌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집이었으니까. 건우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텐데 괜한 말이라도 흘려 관계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제 친구들은 자주 왔는데, 형 친구가 온 건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런 침묵이 불편했던 듯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김치를 볶던 건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장윤성은 제가 내 첫 손님이라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던지 진지하게 되물었다.
“네. 형이 좀 매정하거든요. 저는 친구들이 취하면 꼭 챙겨서 데려오는데, 형은 술을 마시러 나가도 그러는 법이 없어요.”
“야.”
모함이었다. 건우야 학교 친구들이랑 근처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으니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오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내가 술을 마시는 곳은 가게 근처 아니면 옛날에 살던 동네 근처 정도였다. 그 정도 거리면 취한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게 오히려 매정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우스워 짧게 눈치를 줬지만 건우는 내 험담을 하느라 신이 난 양 제 할 말만 덧붙였다.
“술도 세서 잘 취하지도 않으면서…. 하여간 취한 친구 다 버리고 오기로 유명하다니까요. 형도 저희 형이랑 술 마실 때 조심하세요.”
장윤성을 웃게 만들려 내 흉을 본 거라면 건우의 작전은 제대로 성공한 것 같았다. 건우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장윤성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웃음이 크게 터질 것 같았던지 엄지와 검지로 입매를 누기까지 하며 웃음을 참았다.
웃자고 하는 소린 걸 알아도 억울했다. 술에 취해 호된 꼴을 당한 건 매번 내 쪽이었으니까. 한 번이라도 장윤성이 먼저 고꾸라지는 걸 봤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맞아. 하경이랑 술 마실 땐 조심해야겠더라.”
겨우 웃음을 삼킨 장윤성은 건우의 말에 동감하듯 대답했다. 배알이 뒤틀려서 방 안에 앉아 있는 놈과 술을 마신 이야기를 폭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먼저 취한 것도 나였지만 무슨 짓을 한 것도 늘 나였기 때문이었다. 죽이 잘 맞는 둘이 수다를 떠는 동안 슬슬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건 윤성이 형 거, 이건 형 거.”
건우가 하나씩 떠 준 밥을 상에 내려놓았더니 장윤성이 놀란 눈으로 나와 내 자리에 놓인 밥을 번갈아 봤다. 이건 밥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쌀보다 콩이 더 많아 보였으니까. 장윤성은 내가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다고 동생한테 장난을 쳤다가 복수를 당했다고 설명할 순 없는 일이라 나는 그냥 서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몇 안 되는 반찬을 마저 나르는 사이 콩이 수북하게 얹어진 밥은 어느새 장윤성의 것과 바뀌어 있었다. 대강의 식사 준비가 끝나고 건우가 마지막으로 찌개 냄비를 들고 들어오다 콩밥인지 밥이 좀 묻은 콩 더미인지 모를 게 장윤성의 앞에 있는 걸 보고 어, 하는 소릴 냈다.
“내가 콩을 좋아해서.”
장윤성이 머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건우는 결국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장윤성은 오늘부터 좋아하게 된 콩밥과 참치김치찌개가 입에 잘 맞는 듯 평소보다 열심히 그릇을 비웠다. 몇 번 만난 게 다였음에도 건우는 장윤성에게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테니까.
밥을 먹는 내내 고마웠다는 말을 반복하던 녀석은 숟가락을 내려놓을 즈음 아쉬운 듯이 운을 뗐다.
“형, 맥주 한잔하실래요?”
“야, 너는 오늘 퇴원한 놈이 무슨….”
“난 조금만 마시면 되지. 밤인데 커피를 대접할 순 없잖아.”
건우는 장윤성의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장윤성이 좋다고 짧게 대답하자 녀석은 신이 나서 냉장고를 뒤적이러 나갔다.
상을 대강 정리하고 과자를 몇 개 까놓고 맥주 캔을 땄다. 대접이라고 하기엔 조촐했지만 장윤성도 건우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인사치레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끝냈는지 이제는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것도 곧잘 오갔다. 마치 오늘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
“맞다, 그거 꺼낼걸.”
조금만 마신다던 놈이 첫 캔을 금방 비우고 두 번째 캔을 따면서 마침 생각난 듯 말했다.
“그거?”
“술 말이야. 전에 선물 받은 거.”
아마 녀석의 생일 즈음 장윤성이 보내 줬던 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직도 있어?”
“아껴 뒀지.”
분명 제 친구들과 마시라고 줬던 것 같은데 아직 뜯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틈도 없긴 했지만. 장윤성이 무슨 이야긴지 궁금해하자 건우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형이 비싼 술을 선물 받았거든요. 둘이 마시긴 아까워서 아껴 뒀는데….”
허름한 집에 있는 비싼 을 설명하던 건우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그거 혹시 형이 준 거예요? 과일이랑 전복이랑 같이….”
장윤성은 조금 생각해 보는 척하더니 웃음으로 긍정했다. 건우는 눈동자를 굴리며 또 뭔가를 계산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형이랑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거네요? 왜, 예전에도 한 번 그렇게 보내 주셨잖아요.”
처음 마주쳤던 날에 장윤성이 스스로를 가게 손님이라고 소개해 둔 탓에 건우가 의문을 갖는 것 같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윤성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직 별장에서의 일도 장윤성과의 관계도 건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앞으로도.
“예전에? 그랬었나? 내가 계속 미국에서 지내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서 다시 만난 건 얼마 안 됐어.”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양 장윤성은 의연하게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다행히 건우도 쉽게 납득하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이번에도 그랬지만 그때 저희 진짜 잘 먹었거든요, 엄마도…. 그래서 저희는 형을 좋은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좋은 사람?”
“네. 그때 형이 뭐라고 했지? 그때 형이 윤성이 형 얘기해 주면서….”
7년 전에, 그것도 스치듯 했던 이야기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한데 건우는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때 했던 이야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쉽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
“하경이가 뭐라고 했는데?”
장윤성은 내가 저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한 듯 건우를 채근했다. 건우는 미간을 좁히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마지못해 결론을 냈다.
“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튼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래?”
건우가 좋은 말만 골라 전했음에도 장윤성은 별로 기쁘지 않은지 적당한 웃음으로 넘겼다. 건우는 다시 술 이야기로 돌아가 물었다.
“그거 가져올까요?”
“맥주로도 괜찮아.”
그렇게 우리는 꽤 늦게까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빈 캔이 꽤 쌓였을 즈음 건우는 피곤했던지 벽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방 한쪽에 이불을 펴서 녀석을 눕혀 주고 뜯어 놓은 캔이나 마저 비울 요량으로 다시 장윤성과 마주 앉았다.
“건우는 붙임성이 좋네.”
장윤성은 건우가 제게 살갑게 굴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건우는 원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그랬다. 단순히 장윤성이 도움을 줬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꺼림칙했으면 도움을 받지도 않았을 성격이었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내 말에 장윤성은 안도하는 얼굴을 하고서도 자조하듯 물었다.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싫어?”
“이하경 씨한테 좋은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거 같아서.”
맞는 말이었다. 나도 그를 좋은 사람으로 뭉뚱그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라고 안 했어.”
그럼? 하고 묻는 눈길이 나를 향했다.
“호구 같다고 했을걸?”
내 주변에 저만한 호구가 없다는 걸 알긴 했던지 장윤성은 피식 웃었다. 호구라는 소리에도 그렇게 웃는 게 우스워서 어느새 나도 따라 웃고 있었다.
손에 든 캔에 맥주가 얼마 남지 않았던지 장윤성은 한입에 털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응, 슬슬 가야지.”
자고 가겠다는 말은 역시 농담이었던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실컷 밀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그를 옆에 붙들어 놓고 싶다니. 사실은 이런 점이 무서웠던 것 같기도 했다. 욕심이란 건 한번 풀어놓으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어떻게 가려고? 대리 불러 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술은 마시지 않는 건데. 늦은 시간이라 잡지도 못하고 배웅이나 해 주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고 나서야 겨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골목은 벌써 잠든 것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택시 타면 돼.”
“차는?”
“핑계 삼아 내일도 이하경 씨 보러 오려고. 그래도 되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손에 차 키를 쥐여 주었다. 이젠 그런 핑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가자, 택시 잡아 줄게. 이 시간에 택시 잡으려면 좀 나가야 돼.”
“그래.”
장윤성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늦은 시간과 어둠을 믿고 손을 잡은 채 걸었다. 대로변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했음에도 타박타박 느리게 걸음을 옮기면서.
“그냥 자고 가도 되는데. 너만 괜찮으면.”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오늘은? 왜?”
건우의 친구들처럼 아무 데서나 넙죽 누워 자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장윤성은 아마 후자일 것 같았다.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든, 아직 완전히 친해지지 못한 건우가 있기 때문이든. 하지만 ‘오늘은’이라는 말이 묘했다.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다음에 얘기해 줄게.”
어울리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던 장윤성이 결국 말을 돌렸다.
“알았어. 그럼 얼른 가자. 지금 가도 너 얼마 못 자.”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는다고 핑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라 나는 더 캐묻는 대신 서둘러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장윤성은 여전히 느릿하게 걸으며 속도를 내려는 나를 말리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천천히 가자. 언제 들어가든 똑같으니까.”
옅게 웃으며 말했지만 씁쓸한 목소리까지 감출 순 없었다.
“요즘도 잘 못 자?”
“잘 자. 네가 옆에 있으면.”
불면증이 여전한 모양이었다. 오래 앓아 왔으니 한순간에 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럼 그동안….”
“괜찮아. 요즘은 밤에 잠이 안 와도 좋아. 네가 날 밀어내지 않아서.”
장윤성은 내가 보기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걸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 보였다. 제가 괜찮을 때가 아니라 나를 위로할 때의 얼굴이었다.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잘까?”
물끄러미 그 얼굴을 보다가 결국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건우가 퇴원 후에도 아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은 괜찮았지만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라 며칠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건우는 자고 있고, 아침까지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별로 놀랄 만한 이야기도 아닌데 장윤성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기분 좋을 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분간은 여기 있어. 건우가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서 한동안은 몸을 사려야 할 것 같거든. 그리고 이사도 해야 하고.”
“이사? 갑자기?”
다친 건우가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하다 쳐도 이사는 갑작스러웠다. 최근 자리를 좀 많이 비우긴 했지만 그래도 나도 반쯤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인데.
장윤성은 내가 놀라는 게 더 놀랍다는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쫓겨났다고.”
“…어?”
“그 집 내 거 아니거든.”
쫓겨났다는 말이 진짜였을까. 궁금한 게 한번에 너무나 많이 떠올라 오히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동안, 장윤성은 내 손을 고쳐 잡고 어느새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이사하고 데리러 올게.”
태평하게 그런 소릴 하면서. 마지못해 끌려가고는 있었지만 나는 장윤성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조차 할 수 없었다.
“전에, 네가 그랬지. 네가 갖고 싶은 걸 알아내서 다 주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기억나?”
가만히 앞을 보고 걷던 장윤성이 내 말에 시선을 맞춰 왔다.
“기억나.”
“뭐 갖고 싶은지 가르쳐 주면 안 돼?”
뜬금없는 물음이긴 했던지 장윤성이 잠깐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곧 내 생각을 알아챈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소원이라도 생겼어?”
“응. 그러니까 말해 봐. 내가 뭐든….”
“싫은데.”
“…어?”
애초에 내가 먼저 알아내서 줘야 한다고 했으니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반칙인 건 알았다. 당연히 싫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의 매정한 대답이 왜 그렇게 놀라웠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내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장윤성이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래도 내심 장윤성도 흔쾌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나한테 받고 싶다는 게 간절하다면. 하지만 그렇게 간절하진 않았던 걸까.
“이하경 씨처럼 자기 거에 애착이 많은 사람이 뭐든 주겠다고 할 땐, 그만큼 어려운 소원을 빌겠다는 거거든.”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나 때문에 몇 번이나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 어려워하는 소원이 뭔지 오히려 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쩌면 장윤성이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소중히 하는 만큼 들어주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 줄게. 내가 가진 거, 다 너 줄게.”
퍽 비장하게 말했지만 억지인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나. 내가 가진 전부라고 해 봐야 장윤성에겐 티끌만 할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주겠다고 말하는 게 생각만큼 어렵지도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은 여전히 소중했으나 신기하게도 그에게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그게 뭐든 간에.
“그러니까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줘.”
무엇이든 많이 가진 장윤성도 티끌만 한 내 모든 게 탐이 나긴 했던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이제야 조금 흥미가 생긴 얼굴로 물었다.
“뭔데, 소원이.”
***
내가 소원을 말한 뒤에도 장윤성은 들어줄지 말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앞으론 저를 호구라 부르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했다. 좀 호구 같은 부탁이긴 했으나 여태껏 장윤성이 해 온 것만큼은 아니었다.
하여간 우리는 그런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하면서 같은 길을 몇 번이나 걸었다. 결국 장윤성은 우리 동네 골목골목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외우고 나서야 다시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 뒤로 며칠간 장윤성은 차를 가지러 온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 집 앞으로 왔다. 핑계는 핑계일 뿐이라는 듯이 매번 다른 차를 끌고 온 덕에 차 키 하나는 늘 내게 있었다.
물론 집 앞까지 왔다고 해서 항상 집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동네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은 건우와 셋이서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오늘은 모처럼 동네를 벗어난 곳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일찌감치 나갈 준비를 해 두고 장윤성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던 오후, 이은조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내가 일하던 가게에서.
달밤에 긴 산책을 하던 날 장윤성이 그런 소릴 했었다. 형수가 사과를 하러 찾아왔었다고.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목소리에 앙금은 없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장윤성의 분노는 주로 그의 아버지와 형을 향해 있었다. 이은조가 그를 더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장윤성은 비록 할아버지를 속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가족을 사랑했으니까.
오히려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던 게 아니었을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하던 자신을 외면한 것에 대해.
이은조는 내게도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글쎄, 나는 사과를 받을 것도 없었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녀를 만나러 가게에 간 이유는 그들의 상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장명수가 정말 장윤성을 쫓아내려 했는지, 장윤성은 무슨 생각인 건지. 장윤성은 확실하지 않거나, 내가 걱정할 만한 말은 쉽게 해 주지 않았지만 이은조라면 대답해 줄 것 같았다.
“요즘 윤성이랑 기준이 애들이 여기 자주 온다기에. 나도 궁금해서.”
아직 오픈 준비도 끝나지 않은 홀 한가운데 앉아 이은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굳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멀리서 정호와 종민이가 대걸레 자루를 끌어안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럴 게 뻔해서 가게에서 만나는 건 싫다고 했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굳이 한 번은 보고 싶었다고 하는 데다 이전에 만났던 외진 곳까지 갔다가는 장윤성과의 약속 시간에 늦을 게 뻔했고,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장소를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뭐 마실래? 내가 살게.”
눈으로만 구경하는 게 아니라 술까지 마실 생각이었던지 칵테일 리스트를 구경하던 이은조는 자기 걸 하나 고르고 내게도 권했다.
“전 괜찮아요. 이따 약속이 있어서.”
“윤성이랑?”
“…네.”
이은조는 재미있는 걸 본 듯 웃고는 더 권하지 않았다. 주문 하고 나서도 눈으로 실내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이은조는 칵테일이 나오고 나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했다.
“미안해. 전부 네 탓인 것처럼 말해서. 사실 정말 지독한 일은 우리가 했는데.”
“저는 괜찮아요. 사과를 받으려고 나온 것도 아니고요.”
사과를 받으려고 나온 게 아니라는 말에 이은조가 ‘그럼?’ 하고 묻듯이 나를 봤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자니 쉽지 않았다. 장윤성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내가 그들의 가족되는 것도 아닌데 주제넘게 참견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걱정이 돼서요. 윤성이가 갑자기 이사 한다고 해서.”
“이사하는 게 걱정돼? 왜?”
“윤성이가 가족들과… 너무 많이 어긋날까 봐서요.”
지금 사는 곳이 장윤성의 집이 아니라면 그의 가족의 집일 게 뻔했다. 장윤성이 그곳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거든, 정말로 쫓겨나는 거든 어쨌든 최소 한쪽은 선을 긋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애틋하기 때문일까, 나는 장윤성이 그의 가족들과 멀어지는 게 싫었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은조는 잠잠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한결 온화해진 얼굴로 물었다.
“윤성이한테도 그렇게 말했니?”
“네.”
‘뭔데, 소원이.’
그렇게 물었던 장윤성에게 나는 아무것도 잃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목숨이든, 기억이든 나 때문에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앞으론 내가 위험해도 구하지 말고, 설령 그래서 내가 잘못돼도 너를 버리지 말라고. 나를 지키지 말라는 부탁을 내 전부를 걸고 하고 있는 게 우습긴 했지만.
장윤성은 별로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아무것도’에 네가 누릴 수 있는 것과, 네 가족도 포함된다고 했을 때는 그나마 생각해 보는 척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이은조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번엔 내가 궁금한 얼굴로 보자 그녀는 누구와 달리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그이에게 듣기론 그날, 네가 아버님을 만났던 날엔 윤성이가 정말 제 뿌리까지 뽑아 나갈 기세였다고 했거든. 이사 하는 것도 독립의 의미일 테니까. 그런데 또 요 며칠은 생각이 바뀌었는지 잠잠하더라고.”
이은조는 내내 보고만 있던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윤성이가 정말 아버님과 연을 끊을 생각이라면 회사부터 관뒀을 거야. 나중에 상속 문제에서 아쉬울 순 있겠지만 그래도 걔가 생각보다 가진 게 많거든. 할아버님이 쥐여 준 씨앗이 벌써 자라 가지를 뻗기 시작했으니까.”
씨앗이라는 말을 할 때 이은조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 씨앗이라는 걸 장윤성만 받은 것처럼.
“윤성이가 다른 손주보다 많이 받을 건 예상했었어. 거기다 뒷배 없는 고아와 짝을 지어 줬으니 불안하셨겠지. 그래서 장손인 내 남편보다 조금 많이 받았어도 이해하려고 했었고. 현성 씨한테는 내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에 보니까 조금이 아니더라고. 아주 알짜배기란 알짜배기는 다 골라 주셨던데?”
섭섭한 척 툴툴거리듯 말은 해도 진심으로 미운 기색은 아니었다.
“아버님의 눈 밖에 났다고 해서 못 먹고 살 것도 아닌데 회사에 붙어 있으니 윤성이도 아주 인연을 끊을 생각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아버님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윤성이 못 이길 거.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셨을 뿐이지.”
이은조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오렌지색 칵테일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잖아. 윤성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뭘 더 말려 볼 수 있겠어. 사실은 우리도 다 알고 있었어. 너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윤성이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살았는지 몰라. 윤성이가 말도 없이 사라지거나 다 죽어가는 꼴로 나타날 때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가. 그래서 우리를 떠나려고 한 건 아닌가 하고.”
한숨 같은 목소리였다. 긴 숨을 뱉은 탓인지 그녀는 다시 크게 숨을 삼켰다 뱉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차라리 후련하다고 하셔. 기억을 잃고도 그렇게 사느니 남자랑 살든 외계인이랑 살든 저 좋은 대로 사는 게 낫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님도, 현성 씨도 결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마 내가 안심하도록 일부러 더 긍정적으로 말해 준 거겠지만 그들이 서로 밀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걸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대화가 끝나고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나는 굳이 밖까지 따라 나가 배웅을 했다. 장윤성을 위해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게 고마워서.
이은조는 차에 타기 전 자신의 남편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입으로는 사납게 말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못할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말이었지만 해치지 못한다는 말은 내 동생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은조가 탄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다시 내려왔더니 누구냐, 무슨 관계냐 하며 정호와 종민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들러붙었다. 신경 끄고 테이블이나 치우라고 했지만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저녁까지 시간이나 조금 때우다 갈까 했는데 아무래도 서둘러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문으로 향하고 있을 때, 막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어, 하경 씨!”
서기준은 여전히 내가 반가운 듯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서혜진이 왜 가게에 혼자 왔었는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자 그는 일행을 먼저 들여보내고 미안한 얼굴로 나와 마주 섰다.
“네, 안 그래도 한번 얘기하고 싶었는데. 저번에 혜진이가 너무 큰 폐를 끼친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필름이 끊겨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더라고요.”
“아…. 기억을 못 해요?”
“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혼냈으니까, 또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서혜진을 다시 마주쳐도 일단은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지만 막상 이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서기준에게 그런 마음을 밝혔다가는 오해 사기 좋을 일이라 적당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투적인 말로 대강의 인사를 마치고 나는 예정대로 가게를 나섰다.
정호와 종민이가 귀찮게 하는 바람에 일찍 나섰다고 생각했는데 퇴근 시간대였던 터라 상영 시간에 거의 딱 맞게 도착했다, 오히려 회사에서 아슬아슬한 시간에 나왔다던 장윤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상영관으로 들어섰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인기작이라더니 사람이 꽉 차 있었다. 겨우 우리 자리를 찾아 앉고 한숨 돌리고 났더니 별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어깨를 좀 들썩이긴 했어도 숨죽여 웃었는데도 눈치를 챘던지 장윤성이 궁금한 얼굴로 날 봤다.
“나 그때 정말 믿었는데….”
“뭘?”
이미 광고가 시작돼 스피커에서는 커다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혹여 누가 들을까 장윤성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둘만 있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
약간의 배신감을 담아 한 말에 장윤성도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7년 전, 영화관과 레스토랑을 빌렸던 그날 눈치를 챘어야 했다. 장윤성이 내가 남자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다 알고도 장윤성은 가발을 쓴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도록 그렇게까지 했던 거였다.
“꼭 아닌 것도 아니지. 네가 나 아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게 싫기도 했으니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따져 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 분하지도 않았다. 장윤성이 내 비밀을 알고도 모르는 척했던 것처럼 나 역시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게 많았으니까.
몇 편의 광고가 지나가고 곧 영화가 시작됐다.
***
장윤성의 차를 타고 집 앞까지 돌아왔을 땐 다시 늦은 시간이었다. 고작 영화를 한 편 보고, 밥을 먹고, 또 차를 한 잔씩 마셨을 뿐인데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몇 시간은 모처럼 본 재미있었던 영화 이야기를 끝마치기엔 너무 짧았다.
담벼락 앞에 차를 세워 놓고도 한동안 그 영화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나는 마지못해 안전벨트를 풀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내일 출근하지? 조심히….”
집에 들렀다 가라는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 겨우 꺼낸 인사를 끊고 장윤성이 입술을 겹쳐 왔다. 잘 자라는 인사인가 싶어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나자 장윤성이 얼핏 아쉬운 얼굴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보내려고?”
“아니, 너 내일 출근하니까.”
섭섭해할까 봐 내가 허둥대며 속내를 설명하자 장윤성이 사실은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뒷말을 덧붙이는 대신 따라 웃고 말았다. 장윤성은 그런 내 얼굴을 이상할 정도로 빤하게 보더니 손으로 내 볼을 매만졌다.
“왜?”
뭐가 묻었나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신기한 걸 보듯 한참이나 내 얼굴을 뜯어보다가 뒤늦게 대답을 했다.
“예뻐서.”
“뭐?”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정색 했음에도 그는 다시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가 뗐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 주지 마. 정말 오해하니까. 잘 웃게 된 건 좋지만 걱정돼.”
내가 그랬던가. 그러고 보면 부쩍 많이 웃는 것 같았다. 특히 장윤성과 있을 때는. 아마 더 이상 무언가를 들킬까 봐 걱정하지 않고, 무언가를 숨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닐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더 좋아질 때마다 웃을 수 있어서.
“대체 누가 날 그렇게 본다고.”
“그런 점도 걱정이고.”
저번에도 들었던 적이 있는 소리 같아 투덜대듯 말했더니 장윤성은 그마저도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눈치가 그렇게 귀신같아도 사람 속까지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내 마음을 훤히 안다면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장윤성이 또 웃었다. 나는 그가 내 앞에서만 이런 얼굴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제 친구들과 가게에 와 있을 때도 이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혜진이 말이야.”
가게에서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 기억 찾은 거 알아?”
“아니, 왜?”
“아까 너희 형수님이랑 얘기하고 나오는 길에 서기준 씨 만났거든. 저번에 그 일로 혜진이를 많이 혼냈나 봐.”
술에 취한 서혜진이 그런 말을 한 덕에 내가 그동안의 일을 알았다는 걸 장윤성도 알고 있었다. 혜진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그동안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정이 많은 아이였다.
이은조가 한 말에 의하면 첫 번째 사고 후 장윤성이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무렵 서혜진이 병문안을 왔었다고 했다. 그때 내가 죽은 줄 알고 충격에 빠져 있던 장윤성을 만났고, 서혜진 역시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그리고 결국 장윤성이 기억을 잃었을 때 서혜진에게 입단속을 시킨 것도 이은조라고 했다. 한지영이라는 사람을 떠올려 봤자 힘들기만 할 테니까 꼭 비밀로 해 달라면서.
그때 겨우 중학생이었던 아이가 장윤성을 위해 지금까지 그 일을 실수로라도 흘리지 않고 꼭꼭 묻어 둔 셈이었다. 그리고 내 정체를 밝히려 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장윤성이 기억을 찾아도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한지영이 살아 있으면 장윤성도 괴로워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가게에 혼자 와서 위험할 뻔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계속 널 걱정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말을 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전에도 여러 번 찾아왔었거든.”
“그래, 너만 괜찮으면 기억 찾았다고 말할게.”
“어? 나… 는 빼고 말하면….”
내가 한지영이라는 사실은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발뺌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한지영을 찾지 못한 채 장윤성이 기억을 찾았다고 해 봤자 서혜진이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짜장 라면이라도 끓여 준다고 전해 줘.”
남의 일이라고 장윤성은 웃으며 그렇게 전하겠다고 했다. 어릴 때야 좀 이상해도 그런가 보다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겠지. 하지만 창피하다고 말하는 것도 창피해서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불만을 털어 냈다.
“반가워할 거야, 혜진이도.”
“응….”
“누나랑은 무슨 얘기 했어?”
위로하듯 건넨 말에도 내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장윤성은 화제를 돌렸다.
“그냥. 뭐, 다 괜찮을 거라고….”
나는 이은조의 말을 믿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한 마음이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장윤성은 내가 이은조에게 괜한 소리를 듣거나 하진 않았을지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장윤성 씨 끝내주는 부자라는 소리도 들었지.”
그래서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장윤성이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럼 이제 내가 좀 탐이 나겠네?”
“뭐래. 다 할아버지 덕분이면서.”
물려받은 걸 지키고 늘리는 건 제 능력이었겠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도 장윤성은 반박하는 대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할아버지가 너 지키라고 주신 거야.”
“내가 아니라….”
한지영을 지키라고 주신 거 아닐까. 물론 한지영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장 회장은 가장 사랑하는 손자였던 장윤성에게 많은 걸 남겼을 것이다. 그래도 장 회장이 한지영을 얼마나 아꼈는지 새삼 깨달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음 한구석이 따끔따끔했다.
“할아버지, 지금은 다 아셨겠지?”
창밖의 새카만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 말에 장윤성의 빤한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사후 세계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은 나는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다면 아마 지금쯤은 모든 걸 알고 속상해하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경아.”
나지막한 부름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장윤성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보여 줄 게 있어.”
보여 줄 거? 뭘 보여 주려는지 그는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찾으며 말을 이었다.
“오래전에, 아마 내가 너한테 고백한 이후였을 거야. 내가 널 잡으려면 네 마음도 중요했지만, 내가 힘을 갖는 것도 중요했거든.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았으니까.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떼를 좀 썼어. 내가 지영이랑 살려면 할아버지가 나한테 많은 걸 줘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가을쯤, 장윤성이 장 회장의 방에 자주 틀어박혔던 게.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으시더라고. 정말 지영이가 좋으냐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할아버지가, 나중에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네 아버지와 문제가 생기거든 김 비서를 찾으라고 하시더라고. 도움이 될 만한 걸 맡겨 두겠다 하시면서. 그 말이 얼마 전에야 생각이 났어.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원하던 걸 찾았는지 장윤성은 손짓을 멈추고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재생 버튼이 표시되는 걸 보면 영상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저께 김 비서님을 만났어. 이게 그때 받은 거야.”
이게 할아버지가 말한 ‘도움이 될 만한 거’라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어두웠던 화면은 곧 익숙한 공간을 비췄다.
별장의 1층 서재였다. 약간의 잡음과 뭐라고 하는 사람 목소리가 들린 뒤 화면 안으로 휠체어를 탄 노인이 들어왔다. 오래된 영상인 듯 화질이 깨끗하진 않았지만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 회장이었다. 그는 카메라 너머에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묻듯 눈짓을 했다. 화면 밖의 누군가가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하고 대답하자 장 회장은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도 조금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애비를 이겨 먹으니 좋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