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가 느껴지는 이른 아침이었다.
“하경아.”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좁은 시야 사이로 눈이 마주치자 곁에 앉아 있던 장윤성이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일어나야지.”
하고 속삭이면서.
몸이 찌뿌듯하고 피곤한, 상쾌하지 못한 아침이었지만 별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장윤성의 얼굴이 반가운 것과 별개로 아직은 따듯한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으음… 5분만….”
“벌써 5분씩 세 번 더 잤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10분씩 부를 걸 그랬다. 도무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더니 결국 장윤성이 억지로 나를 일으켰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통증에 으…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샜다.
“힘들어도 오늘은 어쩔 수 없어. 일어나야 해.”
장윤성은 내가 다시 눕지 못하도록 팔을 단단히 붙들고 말했다. 그 단호한 어조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러니까 내가 어제 싫다고 했잖아아….”
나는 항의하듯 눈을 뜨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차피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았지만.
“이상하네. 어제 분명 이하경 씨가 먼저 하자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이, 그래서 나는 딱 한 번만 하자고 했는데…….”
“나는 한 번으로 못 끝낸다고 미리 말했고.”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했다. 결국 실눈을 뜨고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게으른 겨울 해는 이제 막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아직 시간 많은데….”
“사진 찍어서 크게 걸어 놓을 거라며. 그럼 옷이랑 머리도 좀 신경 쓰고 가야….”
장윤성은 말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퍽 너그러워진 얼굴로 웃었다.
“…할 것 같았는데 이대로도 예쁘긴 하네. 그럼 더 자고 이렇게 갈까?”
결국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더 자도 되는 시간이었지만 장윤성의 헛소리 때문에 결국 잠이 깨 버렸다.
“됐어. 네가 아침부터 정신을 못 차리는데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래. 그럼, 씻으러 가자.”
장윤성은 내 말을 부정하는 대신 안기라는 듯이 팔을 뻗었다. 굳이 데려다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도 없어 나는 얼른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겨울에도 한결같이 따듯한 품이었다.
어느새 이 집에서 처음 맞는 겨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2월이 며칠 남지 않은 오늘은 건우가 졸업 하는 날이었다. 내 졸업식도 아니건만 나도 모르게 들떴었는지, 얼마 전 장윤성과 술을 마시면서 그런 소릴 했었다.
‘건우 졸업식 사진 아주아주 크게 뽑아서 걸어 놓을 거니까 벽 하나 비워 둬.’
학사모를 쓴 건우와 사진을 찍어서 아주아주 크게 뽑아 걸어 놓을 거니까 벽 하나 비워 두라고. 장윤성은 한술 더 떠 빈 방 하나를 이건우 졸업 기념관으로 내어주겠다고 했었다.
반쯤은 취기에, 반쯤은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장윤성은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씻고 나와서는 한참 동안 머리를 만져 주고, 또 그다음엔 한참 동안 패션쇼가 진행됐다.
“내 폰 어디 있지? 건우 일어났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장윤성이 골라 준 옷을 입고 건우가 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보니 폰이 보이질 않았다. 워낙 부지런한 녀석이라 딱히 걱정하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장윤성이 알고 있을까 싶어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프라이팬을 지켜보고 서 있던 장윤성이 몸을 돌려 고갯짓으로 식탁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폰은 식탁 위에, 건우는 일어났대.”
그 말대로 폰은 식탁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거실에 두고 들어간 것 같은데 장윤성이 챙겨 둔 모양이었다.
“건우랑 통화했어? 언제?”
“이하경 씨가 두 번째 5분만 했을 때?”
“누가 보면 네가 건우 형인 줄 알겠다. 나란히 부지런해서.”
“건우가 너보단 날 좀 더 닮긴 했지.”
“뭐래. 나랑 완전 판박인데.”
아침 준비를 도우려 옆에 서며 그렇게 말했더니 장윤성이 대꾸도 앉고 피식 웃었다. 제 눈에는 내가 건우랑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건우랑 나랑은 외적으로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둘 다 엄마 아빠의 얼굴을 섞은 얼굴이긴 했다. 사진으로 우리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본 장윤성도 그건 인정했었으니까.
“커피 어느 게 네 거야?”
“아무거나. 오늘은 같은 거야.”
장윤성이 타 놓은 커피 두 잔은 같은 색이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장윤성의 커피는 점점 연해지고 내 커피는 점점 진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같아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장윤성의 불면증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없는 날엔 잠을 자지 못하고, 내가 침대를 빠져나오면 금방 깨곤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저 악몽을 꾸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내 커피가 더 진해질 것 같아.”
“평소에는 안 깨우잖아.”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더니.”
탓하듯 말했지만 사실 장윤성의 잘못은 아니었다. 쾌감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내 탓이었지.
커피가 진해지는 건 몸을 섞은 다음 날 아침마다 내가 점점 더 힘들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윤성은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날이 아니면 아침에 날 깨우지 않았다. 체력이 없는 것도,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장윤성 말고 다른 사람과 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장윤성은 내가 잘 느껴서 힘든 거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힘들 것만 같았다. 몸이 맞닿는 기분에 조금도 무뎌질 수가 없었으니까.
“설탕 넣을래?”
심란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게 신경 쓰였던지 장윤성이 설탕을 넣어 줄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쪽 컵에만 설탕을 넣었다. 크게 두 스푼.
눈치껏 커피와 식기를 세팅하고 먼저 식탁에 앉았다. 곧 장윤성도 아침이 담긴 접시를 가져와 나란히 앉았다.
오늘 아침 메뉴는 슈가 파우더를 듬뿍 뿌린 프렌치토스트였다. 장윤성은 노오란 식빵을 한 입 크기로 잘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이프질도 요령이라고, 나는 잘린 건지 찢긴 건지 모를 모양의 식빵을 보답으로 먹여 주었다.
“이따 건우랑 뭐 먹지?”
“건우가 한식이 좋다고 해서 괜찮은데 예약해 놨어.”
“이건우 성 바꿔야겠네. 장건우로.”
정말 누구 동생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내 동생 소식을 요즘은 주로 내 동거인에게서 듣곤 했다. 장윤성은 동생이 생기는 게 싫지 않은 듯 웃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는데.”
장명수가 태원병원에서 건우를 만났다고 해서 장윤성의 가족과 나 사이에 대단한 관계가 형성된 건 아니었다.
그 뒤로 장명수도 장현성도 그저 잠잠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장윤성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와 가족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가끔 본가에 가서 밥을 먹고 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싸 주셨다는 음식을 잔뜩 안고 돌아오곤 했다. 여기에도 가사 일을 봐 주는 사람이 있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꼭 챙겨 주는 걸 보면 돈이 많으나 적으나 자식 입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걱정하는 건 누구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크리스마스가 지날 때까지 장명수와 다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안감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사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새해를 약 35시간 즈음 앞두고 있었을 때, 장윤성이 아닌 내게 장명수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곧 새해인데 떡국이나 먹으러 와. 건우인가, 하는 네 동생 데리고. 가족 없이 둘만 있는 게 불쌍해서 그러는 거니까 괜한 생각은 말고.’
장윤성은 불편하면 안 가도 된다고 했지만, 직접 전화까지 하셨는데 거절하기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그냥 가 보기로 했다. 건우를 데리고.
그리고 정말 떡국… 아니 떡만둣국만 먹었다. 식탁엔 대화가 오가지 않았고, 나를 환영하거나 적대하는 눈빛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건 그들이 건우에게는 정중하게 손님 대접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건우는 장명수와 거실에서 체스를 두었다. 다른 가족들은 그걸 구경했고, 그동안 장윤성은 내게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그곳을 집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성처럼 복잡하고 넓은 곳이었다. 장윤성의 방에 따로 거실이 딸려 있을 만큼.
창밖에는 노리와 풍작이가 눈 덮인 넓은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은 넓었지만 휑하거나 쓸쓸한 느낌은 아니었다.
방을 한참 구경하다가 다시 내려갔을 때 건우와 장명수는 게임을 끝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듣기로는 건우가 졌다고 하는데 표정은 반대였다. 아무래도 장명수는 건우가 져 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도 그렇긴 했다. 건우가 공부 빼고 유일하게 열을 올리는 게 체스였는데 지는 걸 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그날 건우는 용돈이랍시고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다.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은 얼른 받으라는 장윤성의 재촉에 결국 그걸 받아들었다. 집에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열어 본 봉투 안에는 오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장명수의 부친이 서울에 놀러 가던 한지영에게 주었던 용돈과 같은 액수였다. 돈보다 더 귀한 걸 차지한 탓인지 내 몫은 없었다.
그리고 설에 혼자 본가에 다녀온 장윤성이 건우에 대해 그런 말을 했다.
‘딸 있으면 사위 삼았을 거래, 아버지가.’
나는 정색하며 대꾸했다.
‘누가 허락한대?’
‘안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온 참이야. 하경이는 싫어할 거라고.’
그랬더니 장명수도 꼭 전하라는 듯이 이렇게 받아쳤다고 했다.
‘누군 좋아서 아들이 사내놈하고 사는 걸 보고만 있는 줄 알아?’
보고만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이 빠져서 뭐라 대꾸하는 걸 잊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장명수가 태원병원에서 건우를 만났을 때부터 더 이상 내 동생의 안위를 걸고 날 위협하진 않으리라는 걸. 그가 건우에게 보여 주는 호감이 실은 내게 보내는 어떤 신호였다는 것도.
그럼에도 나는 겁이 많아서 쉽게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건우를 건드리지 않고서라도 장명수가 내게서 장윤성을 떨어뜨려 놓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까.
장윤성의 가족들은 장윤성을 사랑한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설령 날 그에게서 떼어 놓더라도, 그들은 언제든 사랑하는 아들이, 동생이 이왕이면 더 안전한 길을 가길 원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들도 장윤성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건우를 사위 삼고 싶다는 장명수의 말에 대한 대답은 보류하기로 했다. 장윤성에게 진짜 여동생이 생길 때까지.
딩동.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벨이 울렸다.
“내가 나가 볼게.”
장윤성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벨이 울리는 건 드문 일이라 나는 현관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봤자 현관과 부엌이 꽤 멀어서 들리지 않았지만. 장윤성이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반듯하게 잘린 토스트를 구경했다. 내가 토스트를 난도질하듯 썰어 대자 보다 못한 장윤성이 대신 썰어 준 거였다.
매번 해 주니까 늘질 않지. 몇 번이나 그렇게 투덜댔어도 장윤성은 여전했다. 노란 식빵의 단면을 구경하다 결국 입에 넣었을 즈음 장윤성이 꽃다발을 안고 돌아왔다. 장명수가 건우의 졸업을 축하한다며 보낸 거라고 했다.
***
건우는 누구보다 큰 꽃다발을 안고 졸업 사진을 찍었다. 원래대로라면 건우와 나뿐이었을 사진에 한 명이 더 생겼다고 그림이 퍽 그럴듯했다. 셋이어도 이런데 넷이었으면 북적북적한 사진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다섯이었으면 더….
“형, 졸업식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맛있는 것도 사 주시고.”
졸업식이 끝나고 실컷 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장윤성이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영부영 점심을 건너뛴 탓에 허기가 졌던지 건우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열심히 먹다가 겨우 배가 찬 듯 잊었던 인사를 건넸다.
“맛있게 먹어 줘서 내가 더 고맙지. 졸업 축하해.”
식사에 방해가 될까 말을 아끼고 있던 장윤성도 그제야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아직 배가 남았는지 건우가 다시 젓가락을 들려 할 때였다. 이제 좀 잠잠해졌다 싶더니 건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
“또야?”
장윤성의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연락이 그렇게 많이 오는지 건우의 폰이 계속 울렸다. 졸업하는 날이니까 축하 연락이 많이 오나 보다 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건우가 한다는 소리가, 우리 셋이 사진을 찍는 걸 본 친구들이 자꾸만 장윤성이 누군지 물어본다는 거였다. 본인, 혹은 축하해 주러 온 가족이나 지인의 관심을 표하면서.
“아니, 동기들. 벌써 슬슬 모이고 있다고 일찍 올 수 있으면 일찍 오라고.”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일인 듯했다.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실 거라고 해서 지금도 술 없이 식사만 하는 중이었다.
“그만 일어날까?”
건우야 어차피 또 먹으러 갈 테고, 장윤성도 좀 전부터 젓가락을 내려 둔 채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친구들과 그렇게 모이기도 어려울 테니 오늘은 내가 양보해야 할 것 같았다.
“아냐. 형은 거의 못 먹었잖아.”
건우가 신경이 쓰이는 듯 거의 줄지 않은 내 밥을 보며 말했다. 다른 생각을 하다 젓가락질을 게을리한 결과일 뿐인데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럼 먼저 가. 나는 마저 먹고 갈게.”
괜한 걱정을 할까 봐 나는 다시 젓가락을 쥐었다. 건우는 장윤성을 쳐다봤다. 녀석은 요즘 제 형보다 장윤성을 더 믿는 것 같았다.
“그래, 하경이 먹는 거 내가 볼 테니까 먼저 가.”
“형 좀 잘 부탁드려요.”
장윤성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건우는 안심하는 기색으로 제 짐을 챙겨 들었다.
그사이에 장윤성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우에게 내밀었다. 평소라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을 녀석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이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그걸 받아들었다.
“저희 오늘은 좀 비싼 거 마실 건데 괜찮아요?”
“얼마든지.”
답지 않게 크게 긁어 보겠다는 소리에 장윤성이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 대꾸했다. 건우는 잘됐다는 듯이 웃었다.
“저 진짜 크게 쓸 거니까 형도 제 첫 월급 턱 받아 주셔야 돼요.”
그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섰다. 장윤성은 잠깐 문 쪽을 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뭐 할까?”
건우와 했던 약속과 달리 장윤성은 밥을 더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더 먹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듯이.
기분이 나쁜 것도,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 두고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파인애플 먹으러 가자.”
***
갑자기 조용해진 기분이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차 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장윤성과… 아마도 여기까지 운전을 해 준 사람.
장윤성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넸다. 액수가 넉넉했던지 남자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출구 쪽으로 향했다. 지갑을 품에 넣고 장윤성이 내 좌석 쪽 문을 열었다.
“깼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걸 본 장윤성이 반가운 듯 웃으며 팔을 뻗었다.
“응….”
막 잠에서 깨 정신도 없고 몸을 가눌 기운도 없어서 장윤성에게 매달린 채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많이 취하진 않은 건지, 아니면 오는 동안 좀 깬 건지 막상 차에서 내리자 두 발로 서는 게 어렵진 않았다. 지하 주차장이라 바람은 없지만 차가운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춥지. 얼른 들어가자.”
장윤성이 등에 팔을 두르며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닿는 찬 공기가 마냥 싫지는 않은 탓이었다. 메슥거리는 속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고 조금 지끈거리던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나 좀 걷다 들어갈래. 속이 좀….”
“그래, 그럼. 산책하다 들어가자.”
우리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향해 걸었다. 추운 데다 늦은 시간이라 어차피 인적이 드물긴 했지만. 장윤성이 팔짱을 끼자는 듯이 팔을 내밀기에 나는 술김이라며 기분 좋게 팔을 끼웠다.
평소라면 조금은 망설였을 것이다. 술이 덜 깼는지 헤실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보니 우리 사이에서 파인애플을 먹자는 말은 술을 마시자는 뜻이 됐다. 장윤성이 안주로 꼭 파인애플을 시켜 대서.
모든 술집에 파인애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돈은 가끔 메뉴판에 없는 메뉴도 만들어 내곤 했다. 오늘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주로 뭘 먹든 우리끼린 그렇게 알아듣기로 했다.
“아.”
파인애플 생각을 하며 걷다가 발을 헛디뎌 몸이 휘청거렸다. 장윤성이 재빨리 잡지 않았더라면 바닥을 구를 뻔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탓에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업힐래?”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걷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그에게 의지해서 걷다 방심했을 뿐이었다.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잠깐 뭐 좀 생각하다가….”
그래도 놀란 건 사실이라 눈을 좀 굴리다가 장윤성의 팔을 놓은 채 걸었다. 다리에 똑바로 힘을 주고.
원래 나는 술에 취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장윤성과 술을 마시면 쉽게 취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하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술에 취해서 부주의하고 무방비해진 나를 아무도 지켜 줄 것 같지가 않아서. 내가 잘못되면 내 동생이 혼자가 되거나, 혼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큰 짐을 짊어질까 봐.
하지만 지금은 장윤성이 날 지켜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쉽게 취해 버리고, 그에게 기대어 걸을 땐 다리에 힘을 주는 걸 종종 잊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
“그냥…. 이런 거 저런 거?”
종일 멍해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마 엄마 생각을 제일 많이 했을 것이다. 건우가 결국 꿈을 이루는 순간을 엄마가 봤어야 했는데. 엄마는 아들 둘을 키우며 한 고생을 조금도 보상받지 못하고 떠났으니까.
“내 동생, 기특하지.”
타박타박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장윤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응. 그리고 너도.”
한 걸음 느리게 따라오던 장윤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멈춘 그가 정말 기특한 듯이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졸업 축하해.”
“내가 졸업했냐. 건우가 했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축하 인사가 싫지는 않았다.
“오늘부로 이하경 씨도 대학생 보호자 졸업한 셈이잖아. 장해. 혼자서 동생 대학 졸업도 시키고.”
내심 그런 칭찬을 바랐던 것처럼 괜히 울컥했지만 우는 걸 보이고 싶진 않았다. 정말 당연한 일을 했던 거니까.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걸 희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처럼 대답하고 싶었는데 잘되지 않았다. 벌써 눈가에 고인 눈물이 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정말 지나간 시간이 싫지 않았는데 왜 서러워 보이게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장윤성은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이렇게 추운 날에도 여전히 따듯했다.
“그게 왜 당연해. 네 고생이 왜 당연해. 잘했어. 우리 하경이, 너무 잘했어.”
한 번도 건우가 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건우는 엄마 아빠가 내게 남겨 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칭찬받고 싶었다. 잘했다고. 건우처럼 대단한 꿈을 꾸고, 이루진 못했지만 내 인생도 정말 값지다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이제는 없을 줄 알았다. 나중에 죽고 나서 엄마를 만나면 그제야 들을 수 있는 말일 줄 알았다.
속절없이 울음이 터졌다. 생각보다 빨리 상을 받아서. 장윤성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 몸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아니, 그러고도 한참을 더.
“집에 갈래. 추워.”
실컷 장윤성의 옷을 적신 뒤 겨우 숨을 고르고 꺼낸 말이 그거였다.
“속은?”
“괜찮아졌어.”
장윤성은 그제야 팔을 풀고 나를 놓아주었다. 별로 소용없을 건 알지만 나는 얼른 손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따듯한 품에 한참 안겨 있었던 탓인지 갑작스런 한기에 몸이 덜덜 떨렸다. 장윤성은 제 코트를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 주고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내 손끝은 벌써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한데 신기할 정도로 따듯한 손이었다.
“이하경 씨 손 따듯한 애인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오랜만에 내는 생색에 웃음이 터졌다. 정말 어떡할 뻔했지.
“얼어 죽을 뻔했지, 뭐. 아주 큰일 날 뻔했어.”
모처럼 맞장구를 쳐 주자 장윤성은 기분이 좋은 듯 옷깃을 여며 주며 쪽 하고 입술을 맞댔다 뗐다.
“다행이네. 얼어 죽기 전에 찾아서.”
이렇게 장윤성의 사랑을 느낄 때마다 나는 온 세상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장윤성 같은 사람이 온전히 내 것일 리 없었으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한때는 세상이 날 쉽게 버릴까 봐 술에 취하는 것조차 두려웠는데.
“가자, 집에.”
“응.”
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따듯한 손이 내 손을 쥐었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 여태까지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었다. 봄이 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봄이 시작하는 3월은 장윤성이 태어난 달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맞이할 모든 3월이 벌써 좋았다.
“윤성아.”
대답 대신 다정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순간. 나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 그냥 웃고 말았다. 나를 보는 장윤성의 얼굴에도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온 세상이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마침내 마주한, 나만의 계절이었다.
<끝, 외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