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목이 탔다.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마시기 좋을 만큼 식어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기껏 나를 여기까지 불러 놓고도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여전히 닫혀 있는 문을 봤다. 장윤성은 내가 여기 불려 온 걸 알고 있을까.
오늘은 모처럼 장윤성과 점심을 함께한 날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이 근처에 큰 서점이 있어서 가볍게 외출을 하고 싶을 때 종종 그와 점심을 먹고 혼자 책 구경을 하다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윤성을 회사로 들여보내고 돌아섰을 때, 한 남자가 길을 막아섰다.
통성명을 한 건 아니지만 언뜻언뜻 마주친 게 벌써 서너 번쯤 돼서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장현성의 비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잠깐 들렀다 가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기까지 끌려와 혼자 앉아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장현성이 나를 부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장명수가 나와 장윤성을 떼어 놓길 포기한 뒤로는 장현성도 잠잠해진 상태였다. 워낙 인상이 차가워서 마주치기 껄끄럽긴 해도 막상 싫은 소리 한마디 들은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를 왜… 혹시 회사 근처에서 만난 것 때문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밖이 조금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장윤성의 하나뿐인 형, 그것도 나이차가 꽤 나는 형이라 나는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들어서던 장현성은 눈짓으로만 내 인사를 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며 따라 앉자 그는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장현성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채 심술부리듯 뜸을 들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궁금해하시던데.”
흔한 인사치레도 없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꺼냈다. 아버지? 장명수? 아무래도 내가 이 근처에 온 걸 혼내려 부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빈 내 찻잔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회사 일 배워 볼 생각 없느냐고.”
“제가요?”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멍청하게 대답하자 장현성은 여기 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 인상을 썼다.
“예전에 네가 별장에 있었을 때부터 가끔 그런 소릴 하셨거든. ‘저거 나중에 내가 데려다가 키워 봐야겠다’고.”
그러고 보니 작년에 장명수의 앞에 끌려갔을 때 그런 소릴 들었던 것도 같았다. 어차피 오래전에 의미 없어진 이야기인 줄로만 알아서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그때는 윤성이와 너를 떨어뜨려 놔야 해서 생각을 접으셨는데, 이렇게 되니까 또 그런 생각이 드시는 모양이야.”
장현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그의 부친과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내가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만 있자 그는 나를 못미더운 얼굴로 보며 물었다.
“지금 무슨 일 한다고 했지?”
“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장현성은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꼭 강요할 생각은 없는 듯 덧붙였다.
“그럼 생각해 봐.”
그리고 그다음 말은 조금 의외였다.
“내 생각에도 나쁠 건 없을 거 같으니까.”
장현성이라면 어떻게든 내가 태원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 문득 나는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이런 곳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여기에서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장현성은 턱을 괴고 처음으로 내게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주제 파악 잘하는 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회장님 생각은 다른가 보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장현성은 슬슬 일을 해야 한다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형제라고 책상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얼핏 장윤성과 닮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넓은 책상에 앉아 안경을 쓰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
카운터 앞을 멍하니 지키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탁상용 달력을 발견했다. 3월이 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이 달력은 여전히 2월이었다. 잘 쓰지 않는 거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빳빳한 종이를 한 장 넘겼더니 눈이 절로 13이라는 숫자로 향했다. 여기에는 아무런 메모도 없지만 집에 있는 달력에는 특별한 날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장윤성 생일’이라고.
“하경아, 이거. 기준이네.”
슬슬 선물을 고민해야 할 때라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성욱 형이 주방에서 쟁반을 내밀며 턱짓을 했다. 진짜배기 테이블에 갖다 주라며. 나는 달력을 제자리에 돌려 두고 얼른 쟁반을 받아 들었다. 1년쯤 그렇게 드나들었으면 그의 인맥을 다 봤을 법도 한데 서기준은 또 새로운 친구들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아, 하경 씨.”
“네?”
접시를 내려놓는 걸 보던 서기준이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불렀다.
“그… 아니, 지금은 좀 그렇고, 이따가 얘기 좀 해요.”
그는 뭐라고 운을 떼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미뤘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새 친구들과 꽤 길게 술자리를 이어 가는 것 같았다.
한창 붐비는 시간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홀이 좀 한가해진 틈을 타 나는 쓰레기 봉지를 들고 뒷문을 나섰다. 뭐가 들었는지 오늘따라 무거워서 낑낑대며 계단을 오를 때,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어, 서기준 따라와서 비위나 맞추고 있다.”
가만히 들어보니 서기준의 일행인 것 같았다. 성격 좋아 보이는 서기준의 주변에도 종종 저런 사람이 있긴 했다. 서기준이나 다른 진짜배기에게 연줄을 만들고 싶어 가식을 떠는 사람. 아마 저 사람도 친구라기보다는 그런 부류였던 모양이었다.
“여기? 존나 따분해. 서기준 취향 뻔하지 뭐.”
목소리가 하나인 걸 보면 통화중인가. 하필 서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올라가기가 껄끄러웠다. 내가 들은 걸 알게 되면 괜히 귀찮아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응, 아니, 그때 그 새끼가…”
계단 구석에 서서 잠시 기다리자 겨우 화제가 넘어간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애써 낸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내가 건물을 나오자 그는 놀란 듯 아, 씨, 하고 욕을 지껄였다. 왜 넓은 건물 앞을 놔두고 좁은 뒤편에서 이러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건물과 담 사이가 넓지 않아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그를 지나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그렇게 양해를 구했어도 남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길목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나갈 테면 알아서 지나가라는 듯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기분 나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명히 통화 중이었을 텐데도 그의 시선은 한동안 내 뒤를 따라붙었다. 내가 모퉁이를 돌아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그는 다시 통화를 계속하는 것 같았다.
가게로 돌아와 나는 괜히 서기준의 얼굴을 살폈다. 밖의 남자에 대해 말을 할까 하다가 지나친 오지랖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뭐, 서기준도 저에게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사람 정도는 가릴 수 있을 테니까. 묵묵히 일이나 하기로 결심했을 때 마침 서기준이 내게 다가왔다.
“하경 씨.”
“네.”
“혹시 최근에 윤성이 봤어요?”
“…네? 어, 아, 네.”
서기준이 나에게 장윤성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나는 눈을 굴리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서기준은 여전히 나와 장윤성이 어떤 사이인지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쪽으론 눈치가 둔한 서기준은 장윤성과 내가 차에 치일 뻔한 사고 이후 조금씩 친해진 걸로 알고 있었다.
“아, 혼자 술 마시러 왔어요?”
“…네.”
정확히는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나를 데리러 온 거였지만, 가끔 종민이나 정호와도 마주쳤기 때문에 일단은 왔었다고 대답했다. 서기준은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슨 일 있나….”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왜요?”
내가 이유를 묻자 서기준은 좀 고민하더니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갖고 싶었던 그림이 있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윤성이가 그걸 갑자기 구했다고 선물을 하더라고요.”
아, 그 그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장윤성이 서기준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서기준이 아니었으면 장윤성이 이곳에 와 나를 다시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 선물이 서기준이 애타게 구하던 그림이라는 것도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 선물을 받고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경 씨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막 그런 걸 주고받고 그러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친구인 건 맞았지만 이렇게 애틋한 방법으로 서로를 챙기는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불안해서…. 전에 몇 번,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거든요. 연락도 안 되고…. 또 그럴까 봐. 하여간 혹시 또 혼자 와서 술 마시면 연락 좀 부탁할게요.”
장윤성이 선물을 한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하긴 그 그림은 평범하게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샀어’라며 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무려 장윤성 입에서 ‘구하느라 고생했다’, ‘만만치 않은 값을 치렀다’는 소리까지 나온 걸 보면.
“이젠 좀 괜찮나 했더니.”
멋쩍은 얼굴로 내게 부탁을 하고도 그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선물 줄 만한 이유가 있던 거겠죠.”
“뜬금없이 고마워서 주고 싶었다는데, 내가 고마울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서기준 입장에서야 이상할 법한 일이었다. 뭐가 고마운지는 말도 않고 그런 선물을 안겼을 테니까. 별수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 만났던 서기준의 일행이 어느새 테이블로 돌아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하경 씨 그 녀석 혼자 오면 연락 좀 부탁해요.”
“네.”
서기준은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기억을 잃었던 장윤성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오곤 했지만 이따금 다행스럽기도 했다. 장윤성의 주변에 서기준이나 서혜진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장윤성이 종종 서기준에게 우리의 관계를 털어놓고 싶다고 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 손님이 일찍 나가 준 덕에 오늘은 조금 이르게 가게 문을 닫았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가게 문을 닫고 나서서 하나 둘 흩어지고 나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았다. 3월이 돼도, 또 며칠이나 지났어도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거북이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시계를 확인했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마자 연락을 했으니 슬슬 도착할 시간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차 한 대가 가게 앞에 섰다.
“하경아.”
운전석에서 내린 장윤성이 날 부르며 반가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른 달려가 덥석 안겼다.
“오늘따라 환영이 격하네.”
“응, 오늘따라 반가워서.”
“오래 기다렸어? 엄청 추웠나 봐.”
그는 내 등에 팔을 두르면서도 놀리듯 말했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추울 때 애정표현이 격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거든?”
그래도 나는 꼭 한번은 부정했다. 춥다고 아무에게나 안기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긴. 얼른 타. 집에 가자.”
“응.”
장윤성의 재촉에 나는 아쉽게 팔을 풀었다. 차 안은 훈훈하지만 그의 품만큼 포근하진 않았다. 그래도 차 안에 앉아 손끝을 조금 문질렀더니 금방 온기가 돌았다. 장윤성은 그걸 구경하듯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차를 몰기 시작했다.
“너 생일 얼마 안 남았더라.”
움직이는 차 안에서 나는 멍하게 창밖을 보다가 막 떠올린 것처럼 운을 뗐다. 사실 요즘 내내 선물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힌트라도 얻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게.”
정작 장윤성은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지 날짜를 세듯 뜸을 들이다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원래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파티 같은 것도 번거로울 뿐이라고. 그런 사람이 작년 내 생일은 어떻게 챙겼더라.
“선물 뭐 해 줄까?”
나는 그가 내 생일에 해줬던 고가의 선물을 떠올리며 물었다.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케이크였지만.
언젠가 내가 그런 소릴 한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생일에도 케이크 한 조각 먹기 어려웠을 때,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2단 케이크를 마음껏 먹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고.
정말 지나가듯 했던 말인데 장윤성은 그걸 또 잊지 않고 화려한 2단 케이크를 준비했다. 이제 케이크 같은 건 언제든 먹을 수 있는데도 너무나 좋았다. 그가 아주 사소한 순간조차 놓치지 않는 게.
그래서 나도 그런 선물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장윤성이 느끼는 아쉬움은 대개 돈이나 내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선물?”
내 물음에 그는 뜻밖이라는 듯이 묻더니 의아한 척 말을 이었다.
“이상하네. 이하경 씨 가진 게 몸뿐인 걸로 아는데.”
내가 받을 거야 뻔하지, 하고 놀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우리 사이에 내 거라고는 몸 하나가 유일한 신세였다. 원래도 그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전부 주기로 했었지만, 무를 수 없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하나 더 있었다.
건우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이사를 계획했었다. 원래 살던 집은 장윤성의 집이나 내가 일하는 가게에서도 멀었고, 건우가 졸업까지 하면 굳이 그 동네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쯤에도 나는 거의 장윤성의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건우와도 가깝게 살고 싶었다. 건우가 지망하는 태원병원도 가게나 장윤성의 집에서 더 가까운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장윤성의 집이나 태원병원에서 가까운 곳은 집값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였다. 원래 살던 집 보증금에 모아 놓은 돈을 더해도 살 만한 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건우와 상의해서 위치를 조금 타협하기로 했을 때쯤, 장윤성이 느닷없이 카드처럼 생긴 키를 하나 건넸다.
덕분에 건우는 지금 태원병원에서 멀지 않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살 집이었다면 그냥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동생이 살 집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꼭 갚겠다고 했더니 의외로 장윤성은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난 듯 내 모든 걸 저당 잡았는데 그래도 몸 하나는 내 걸로 인정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 신세를 일깨워 준 장윤성이 능청스레 덧붙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받아야겠네. 크리스마스 때처럼.”
크리스마스라는 소리에 나는 얼른 대꾸했다.
“아, 아냐, 물건으로 할 거야!”
어차피 그가 내 소원을 들어줬을 때 전부 주기로 한 거라 뭐든 아깝진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뭘 주든 어차피 나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장윤성은 언제나 더 크게 돌려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모든 소비를 그의 카드로 한다는 점에 함정이 있었는데, 그걸 지난 크리스마스에야 깨달았다. 그때도 아마 지금 같은 패턴이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뭐 해 줄까?’
‘선물? 글쎄….’
퍽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더니 그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근데 네 거는 다 내 거잖아. 내 돈으로 내 선물을 사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 그래도 뭐 해 주고 싶은데….’
‘선물이라는 게 꼭 물건일 필요는 없지.’
그때만 해도 장윤성과 지극히 상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었던 나는 쉽게 수긍했다. 크리스마스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애를 쓰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걸 3박 4일이나 앓아누운 채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여간 사채업자든 애인이든 누구에게도 내 몸을 함부로 넘겨선 안 된다는 걸 그날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주 비싼 걸로 골라. 네 카드로 긁어 버릴 거니까.”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의 교훈을 떠올리며 이를 갈 듯 말했다. 제 카드로 긁는다는데도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장윤성은 계속 웃었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그는 조금 궁리하다가 대꾸했다.
“그럼 이번엔 시간으로 받을게.”
“시간?”
“휴가 내고 며칠 별장에서 놀다 오자. 풍작이랑.”
“좋아, 그런 거라면.”
별장에 다녀온 지 꽤 된 것 같아 흔쾌히 대답하고 보니 선물에 관한 이야기는 또 원점이었다. 시간 같은 건 언제든 줄 수 있는 거였으니까. 아무래도 선물은 내가 골라야 할 것 같았다.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움직였다. 늦은 시간이라 대화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금방 집 근처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리는 살금살금 걸어 문 앞에 나란히 섰다. 내가 키패드에 손을 올리고 문에 귀를 붙이자 장윤성이 나를 따라 문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삑, 소리가 나고 잠깐 눈을 굴리자 안에서 타다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자나 봐.”
“자다 깬 걸 거야. 아까 자는 거 보고 나왔거든.”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발소리마저 귀여운 생물이 또 있을까. 나는 얼른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마저 입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풍작이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를 맞았다. 반가움에 주저앉아 덥석 끌어안았더니 풍작이가 얼굴 여기저기를 핥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반가워.”
“풍작아, 형이 선 넘지 말라고 했지. 하경이 입술은 형만 되는 거야.”
장윤성은 엄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하며 풍작이를 쓱쓱 쓰다듬고는 내 외투를 받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현관에서 풍작이가 진정될 때까지 끌어안고 있다가 겨우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거실로 향하자 녀석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게 또 귀여워서 나는 바닥에 앉아 풍작이를 다시 부둥켜안았다.
“아, 오늘 형 만났다며. 낮에.”
옷을 걸고 나오던 장윤성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응.”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실제로 별 얘기가 오간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안 될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곁에 있겠다고 한 건 나인데 이제 와서 태원에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장명수가 어떤 생각으로 장현성에게 그런 말을 전하라고 한 건지는 몰라도.
“그냥, 풍작이 잘 지내냐고.”
나는 풍작이를 쓰다듬는 일에 열중하는 척 열심히 손을 놀렸다. 손이 몇 번 오가기만 했을 뿐인데 또 털이 한 움큼 빠졌다. 이 큰 개는 다 좋은데 털이 너무 많이 날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풍작이 안부를 물었다고? 형이? 널 불러서?”
“어? 어어…. 그리고 뭐, 네 안부도 묻고.”
빠진 털이 아무렇게나 흩날리지 않도록 뭉치는 사이 장윤성이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내 안부도?”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보는 사이일 텐데 굳이 안부를 묻는 것도 이상한가.
“그냥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한 거야. 진짜 별거 없었어. 헤어지라는 협박 같은 것도 안 했으니까 걱정 마.”
장윤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빤히 봤다. 그렇게 궁금하면 제 형한테 물어보면 될걸.
“나 씻고 올게.”
나는 뭉친 풍작이 털을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고 몸을 일으켰다.
“하경아.”
그렇게 욕실로 향하려는데 장윤성이 날 부르며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땐 저와 붙어 있질 못하는 것을 잘 아는 장윤성이 요즘 종종 써먹는 방법이었다. 어휴,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그 위로 올라가 그를 끌어안았다.
“진짜라니까.”
장현성의 제안은 어차피 거절하면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라, 장윤성이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결백한 척 그를 꼭 끌어안고 내친 김에 볼과 입술에 키스도 몇 번 해 주고 말했다.
“나 욕실까지 데려다줘.”
가만히 날 보던 장윤성이 화제를 돌리는 게 못마땅한 척 대답했다.
“요금이 부족한데.”
“그럼 내릴게요.”
내가 미련 없이 그의 다리 위에서 내려오려 하자 장윤성이 내 팔을 잡고 입술을 맞대 왔다. 짧은 키스가 끝난 뒤에야 그는 나를 안은 채 일어섰다. 장윤성에게 안겨 욕실로 향하는 동안 나는 낮에 봤던 장현성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넓은 책상으로 향하던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을.
***
희미하게 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멍! 멍멍! 풍작이가 짖는 소리도 들렸다. 잠깐 벨 소리가 멈췄나 싶더니 다시 울리기에 결국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오늘은 가게에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장윤성이 출근하는 걸 보고 풍작이와 놀다가 점심을 먹고 잠깐 소파에서 눈을 붙이던 참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흘끔 시계를 보니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벨 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풍작이는 벌써 현관까지 나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짖고 있었다.
“풍작아, 짖으면 안 돼. 쉿.”
나는 풍작이에게 의미 없는 주의를 주며 현관으로 향했다. 벨이 한참 전부터 울린 것 같아 인터폰으로 누군지 확인하는 것도 잊은 채 벌컥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낯익은 얼굴이 셋이나 있었다. 이은조와 그녀의 어린 두 아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여섯 살 난 첫째가 배꼽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꾸벅였다. 어리바리하게 서 있던 둘째도 어영부영 고개를 꾸벅였다. 곁에 서 있던 이은조는 아이들이 인사를 마치자 들고 있던 상자를 첫째에게 건넸다.
“선물….”
첫째인 지안이는 제가 받아 든 걸 다시 내게 건넸다. 얼핏 보기에 롤 케이크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 고마워, 지안아.”
얼결에 상자를 받은 나는 이은조를 쳐다봤다. 이은조는 어쩔 수 없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애들이 풍작이를 너무 보고 싶어 해서.”
그 말대로 장윤성의 조카들은 내 다리 뒤쪽을 기웃거리며 혀 짧은 소리로 풍작이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네. 들어오세요. 너희도 들어와.”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몸을 틀어 그들을 맞이했다.
풍작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원래는 데려올 생각도 없었다. 물론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동안 풍작이를 돌본 건 내가 아니라 장윤성의 가족이었으니까. 특히 조카들이 풍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장윤성이 데려오면 며칠 정도 보는 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풍작이에게는 오히려 그게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며칠씩 이곳에 있다 간 일이 몇 번 반복된 이후 풍작이는 예전처럼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낮에는 장윤성의 조카들과 신나게 뛰어놀다가도 조용한 밤이 오면 꼭 정원을 서성이곤 했다고. 정말 날 기억해서 그러는 건지, 여기 오면 밤에도 사람과 잘 수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풍작이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풍작이를 데려올 수 있으리란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말로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시도는 했고, 장윤성은 조카들 수준에 맞춰 내가 풍작이의 아빠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조카들은 아빠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풍작이를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풍작이와 헤어져도 괜찮냐는 질문에는 도리질을 쳤다.
그래서 결국 장윤성은 풍작이를 데려가게 해 주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둘째는 아직 소원을 빌 만큼 크지도 못한 터라 첫째인 지안이가 대표로 소원을 빌었다.
‘전에 봤던 큰 공룡 사주면….’
외국 어느 테마파크에서 봤다던 커다란 공룡 모형이 갖고 싶다는 거였다. 그 공룡 모형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장윤성은 결국 풍작이를 데리고 왔다. 정원 구석에 처박힌 그 모형은 높이가 2미터를 훌쩍 넘었는데 그 집 어른들에겐 ‘흉물’로 불렸다. 솔직히 나도 속으로 거친 감탄사를 뱉을 정도였다. 미쳤다고. 장윤성은 가끔 그렇게 맹목적일 때가 있었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풍작이를 데려올 때 장윤성은 조카들에게 약속을 하나 했다. 언제든지 원하면 풍작이를 보여 주겠다고.
그렇게 순조롭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오늘, 아이들이 새로 생긴 거대 장난감보다 풍작이가 더 보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실례 좀 할게.”
이은조는 조심스레 들어왔지만 아이들은 신발을 던지듯 벗고 풍작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풍작이도 아이들이 반가운지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렀다.
“갑자기 미안해. 연락하고 오려고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그냥 무턱대고 왔어.”
그러면서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 알겠다는 듯이 그녀는 내 머리를 흘끔거리며 조금 웃었다. 나는 그제야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앉으세요. 뭐 마실 거 드릴까요?”
“따듯한 걸로 줄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올려 두고 냉장고에서 애들이 마실 만한 걸 꺼냈다. 이은조가 가져온 상자 안에는 역시나 롤 케이크가 들어 있었기에 그것도 잘라 접시에 덜었다.
혼자서 손님을 맞는 건 건우를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금 소란스러울 뿐 어렵진 않은 상대라 다행이었다. 먹을 것을 쟁반에 담아 내갔을 때 아이들은 벌써 털투성이였다.
“아버님이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다며?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가 내준 차를 마시며 이은조는 궁금했다는 듯 물었다. 장윤성은 결국 장현성에게 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을까.
“아직 대답은 안 했는데, 어차피 안 될 일이잖아요.”
“어머, 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가까이 있다 보면… 아무래도….”
“들킬까 봐?”
“그렇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자니 어쩐지 장윤성 탓을 하는 모양새라 나는 얼른 덧붙였다.
“제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회사는 아니니까요.”
이은조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그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내가 대단한 인재인 것도 아닌데 이쯤 하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은조는 목을 축이듯 찻잔을 잠깐 입에 댔다 내려놓았다.
“아버님이 하경 씨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윤성이가 걱정스럽기 때문일 거야.”
“걱정이요?”
“가진 게 많으면 적도 많은 법이잖아. 아버님도 하경 씨 덕에 상속 경쟁에서 승리하셨지만 아직도 호시탐탐 경영권을 노리는 숙부님들 덕에 늘 긴장하고 계실 정도니까. 현성 씨와 윤성이의 사촌들도 마찬가지고. 이럴 때 ‘내 편’이라는 게 꽤 중요하거든.”
알고 있었지만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그의 일과 멀어지는 게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안다한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알다시피 난 가진 게 많아. 현성 씨가 어렵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하경 씨는 다르잖아. 아버님이 하경 씨를 가르쳐 보고 싶다고 한 건 그런 의미야. 윤성이에게 힘이 될 사람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거지.”
내가 그의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힘이 될지 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장윤성 역시 이 일에 동의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윤성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이은조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멈추더니 옆에 두었던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가 온 듯 지잉지잉 울리고 있었다.
“잠깐, 나 전화 좀 받을게.”
이은조는 핸드폰을 들고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장현성의 유능한 파트너답게 그녀는 친정 쪽 계열사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중요한 일인 듯 통화는 길어지는 것 같았다. 애들은 잘 노나 싶어 고개를 돌렸을 때 둘째가 화분 쪽으로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어, 야…!”
다행히 몸을 날려 화분이 넘어지는 참사만은 막았다. 아이들은 내가 다급히 달려든 게 우스웠던지 남의 속도 모르고 까르르 웃어 댔다.
“얘들아, 화분 깨지면 다쳐. 조심히 놀아.”
놀란 마음에 나는 울먹이는 소리로 호소했다.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아이들은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화분을 등지고 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애들이 사고 쳤어?”
그사이 통화가 끝났는지 이은조가 돌아와 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이은조는 주변을 둘러본 뒤에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서둘러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얘들아 오늘은 그만 놀고 다음에 다시 오자. 엄마 회사에 급한 일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러자 첫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 아직 다 못 놀았단 말이에요.”
둘째도 눈치껏 형을 따라 도리질을 쳤다.
“엄마 급한 일 생겨서 그래. 다음에, 주말에 또 오자, 응?”
두 아이들은 합심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급한 일이긴 했던지 이은조는 시계를 보며 재촉했다. 고집 센 녀석들은 이내 풍작이를 끌어안고 버티기 시작했다.
“엄마 정말 급하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몸집이 작은 둘째를 안아 들고 첫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첫째는 안 가려 버텼고 둘째는 울음까지 터트리기 시작했다. 정말 보고 있기 곤란한 광경이었다.
“제가 좀 데리고 있을까요?”
부리지 않아도 좋을 오지랖이었지만 어쨌든 풍작이와 생이별을 하게 만든 것도 나라서 결국 그런 말을 꺼냈다. 이은조와 두 아이가 놀란 얼굴로 잠깐 나를 봤다.
“여기서 놀다가 윤성이 오면 데려다주라고 하면 되니까요. 지안이랑 지율이가 좋다고 하면….”
“그럼 그렇게 해 줄래? 내가 지금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어린 아이들을 육아 경험이 없는 내게 맡기는 게 불안했을 텐데도 이은조는 순순히 둘째를 내려놨다. 정말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엄마 없이도 여기에 있겠다고 해서 이은조는 먼저 집을 나섰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보호자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덩달아 흥분한 풍작이가 멍멍 짖으며 그 뒤를 쫓아다녔다.
뛰지 말라고 말해도 그때뿐이었다.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두 아이는 온 집안을 신나게 누볐다. 나는 아래층 주민이 모두 외출했기를 바라며 뒤치다꺼리를 위해 그들을 쫓아다녔다. 둘째는 이따금 맨바닥에서도 넘어졌고 첫째는 풍작이의 장난감을 온갖 곳으로 던져 댔기 때문이었다.
신나게 저희끼리 뛰어놀던 녀석들은 곧 그러고 노는 것에도 싫증이 났는지 내게 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했다. 비행기가 뭔가 했는데 그냥 이리저리 들어 올려 주면 되는 놀이인 모양이었다. 뛰어다니며 사고를 치는 것보다야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한참 해 주었다.
그러고 났더니 아이들도 어느 정도 기운이 빠졌는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한참 전부터 방치되던 간식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내가 편해진 듯 간식을 먹으며 저희가 좋아하는 공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삼촌이 커다란 공룡을 사 줬다는 말도 했다.
신나게 놀고 배를 채운 뒤에는 둘째가 졸리다고 칭얼댔다. 그래서 두꺼운 이불을 찾아 나왔을 때는 두 녀석과 한 마리 모두 잠들어 있었다.
***
“…경아. 하경아.”
피곤해서 잠깐 옆에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아예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장윤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왔어?”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그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인사였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장윤성의 조카들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내가 팔을 풀고 몸을 떼자 장윤성은 옆에 잠든 아이들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안쓰러운 얼굴로 웃었다.
“고생했겠네.”
장윤성에게는 이은조가 나갈 때 쯤 상황 설명만 해 둔 상태였다. 그 이후에는 정신이 없어서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했는데, 그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지 대강 짐작하는 눈치였다. 하긴 삼촌 앞이라고 얌전히 굴 녀석들은 아닌 것 같긴 했다.
“장난 아니었어. 너희 형수 나가고 5분 만에 후회했다니까.”
내가 투덜대자 장윤성은 달래듯 내 이마를 쓸어 주곤 물었다.
“방에 들어가서 좀 더 쉴래?”
“응.”
장윤성이 안아서 데려다줄 것처럼 팔을 뻗기에 나도 얼른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나를 안아 든 장윤성이 걸음을 떼는데 문득 우리를 멀뚱멀뚱 보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을 비빈 지안이는 이상한 걸 보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경이 삼촌은 어른인데 왜 안아서 데려다줘요?”
내려 줘, 내려 줘, 나는 장윤성의 등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장윤성은 몸을 돌려 눈을 뜬 지안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나를 내려 주며 대답했다.
“지안이 깼어?”
“네.”
지안이는 여전히 왜 제 삼촌이 나를 안고 있었는지가 궁금한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우리를 번갈아 봤다. 장윤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경이 삼촌이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안아 준 거야.”
나는 말을 맞추기 위해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고, 다리야!’ 하며 아픈 척을 했다.
“하경이 삼촌 다리 아파요? 그럼 병원 가야 돼요?”
내 연기가 과했는지 어린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 그건 아니고, 이따가 윤성이 삼촌이 호, 불어 주면 나을 거야.”
내 대답에 지안이의 시선이 장윤성을 향했다. 대단한 걸 보는 얼굴이었다.
“정말이에요? 윤성이 삼촌이 낫게 할 수 있어?”
장윤성은 나와 지안이의 대화가 우스웠던지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이따 호, 불어서 낫게 해 줄 거니까 걱정 마.”
굳이 그 부분을 따라하는 걸 보면 내가 제 조카 수준에 맞춰 준 게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이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병원 안 가도 윤성이 삼촌은 다 낫게 할 수 있어?”
아무래도 아프면 병원이 아니라 여기로 달려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니. 나는 하경이 삼촌만 낫게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안 돼.”
장윤성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지안이는 무척 실망한 얼굴로 치, 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시간이 애매해서 조카들은 저녁을 먹여 보내기로 했다. 장윤성이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 다리 아픈 환자 역할에 열중했다. 장윤성이 바로 호, 불어서 낫게 해 준다고 했지만 애들 앞에서 차마 그 꼴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지안이는 뒤늦게 일어난 동생과 함께 풍작이를 주물럭거렸다.
다행히 장윤성이 온 뒤로는 애들이 있어도 그다지 어려운 게 없었다. 낮에 기운을 다 뺀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진짜 삼촌인 장윤성이 나보다 아이들을 잘 다뤘으니까. 애들 입맛을 따랐다는 토마토 스파게티는 내 입에도 꽤 괜찮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풍작이와 절절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풍작이가 아이들을 따라가려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녀석은 배웅하는 자세로 내 옆에 앉아있었다. 안심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다음에 또 놀러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장윤성이 신겨 주는 신발을 신던 지안이는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요, 윤성이 삼촌이 호, 해 줬어요?”
아, 그러고 보니 어느 틈엔가 잊은 설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다리가 아픈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장윤성이 먼저 대답을 했다.
“어, 해 줬어, 아까 지안이가 못 봤을 때.”
정말 믿는 건지 아이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장윤성과 나를 번갈아 봤다.
“정말 다 나았어요?”
이번에는 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응. 이것 봐. 이제 잘 걷잖아.”
제자리걸음을 걸어 보였더니 지안이는 완전히 믿는 양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있잖아요, 그럼요… 윤성이 삼촌은 하경이 삼촌 그만 아프게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는지 아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하경이 삼촌은 윤성이 삼촌한테 뭘 해 줄 수 있어요?”
어차피 장윤성이 날 낫게 해 준다는 것도 모두 지어 낸 이야기일 뿐인데 왜 그 말이 뇌리에 콱 박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장윤성에게 뭘 해줄 수 있더라.
“하경이 삼촌은….”
아무렇게나 둘러댈 말도 미처 떠올리지 못했을 때 장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윤성은 뭐라고 할 생각일까. 나도 궁금했는데 그는 제 조카에게 귓속말로 짧은 말을 속삭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지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윤성이 날 아프지 않게 해 준다고 했을 때보다 더.
***
“형, 이거 진짜예요?”
잠시 한가한 틈을 타 건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정호가 옆에 와서 왼쪽 손목을 덥석 쥐었다.
“어? 뭐가?”
“이거요.”
정호는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어떤 손님이 그러던데요? 이거 엄청 비싼 거라고. 형 되게 부자 같다고 하던데.”
그제야 나는 내 손목을 흘끔 봤다. 장윤성이 준 거니까 얼만지는 몰라도 비싼 물건은 맞을 것이다. 평소에는 뭘 걸치고 오든 신경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웬일로 눈썰미 좋은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믿냐? 그냥 지나가다 길에서 산 거야.”
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대충 둘러댔다. 아니라고 했는데도 정호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 팔을 끌어안은 채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수상한데….”
“뭐가.”
“요즘 형한테 알 수 없는 그런 냄새가 나요. 부내라고 할까. 옷도 좀… 비싼 거 같고.”
그러면서 정호는 옷 촉감을 확인하려는 듯 내 팔이며 등이며 쓱쓱 문질렀다.
“뭐야, 들러붙지 마.”
나는 홀 쪽을 의식하며 정호를 밀어냈다. 오늘은 장윤성이 와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장윤성은 표정 없는 얼굴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봐. 만져 보지도 못하게 하는 거 보면 틀림없이 비싼 거….”
정호는 굴하지 않고 다시 내 옷을 만져 보려 들었다. 마침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고 있기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만하고 저거나 갖다 줘.”
내 말에 정호는 마지못해 쟁반을 하나 챙겨 들었다. 메뉴를 보니 여럿이 앉아 있는 진짜배기 테이블로 가는 것 같기에 나는 식기를 챙겨 정호의 뒤를 쫓았다.
발 넓은 서기준은 오늘도 모르는 얼굴을 두엇 데려왔다. 하지만 나만 처음 보았는지 정호나 종민이는 본 적이 있는 손님이라고 했다.
덕분에 오늘따라 인원이 많은 진짜배기 테이블은 평소보다 더 떠들썩했다.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갈 때였다. 음악 소리와 섞여 대화 내용까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서기준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장윤성은 미간을 조금 좁히며 ‘싫어’ 하고 짧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럼 보여 달라니까?”
몇 걸음 더 다가가자 답답해하는 서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보여 달라는 거지?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정호의 등장에 테이블 위로 오가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정호가 요리 접시를 내려놓는 동안 나는 식기를 세팅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장윤성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포함해서 평소랑 크게 다를 건 없어보였다.
“하경 씨, 혹시 윤성이가 여기에 여자 데리고 온 적 있어요?”
서기준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마침 잘 왔다는 듯이 물었다. 장윤성과 여자 손님. 그렇게 낯선 조합도 드물 것 같았다.
“아니요. 못 봤어요.”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서기준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거봐, 하경 씨도 못 봤다고 하잖아.”
장윤성은 조금 귀찮아진 듯이 인상을 썼다. 원하던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요?”
내가 묻자 서기준은 들어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이 녀석이 저한테 큰 선물을 줬다고 했잖아요.”
아, 그 그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윤성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림을 받고 서기준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걱정을 하더라고 전했더니 모처럼 진짜배기 무리와 어울릴 생각이 든 것 같았다.
“큰 선물이라 고맙기도 해서 제가 윤성이 생일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서기준은 내가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한 듯, 며칠 뒤가 장윤성의 생일이라고 덧붙이고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이 파티고 뭐고 싫다고 하잖아요. 자기 애인이랑 있을 거라고. 근데 아무도 윤성이 여자 친구를 본 적이 없거든요. 하경 씨도 본 적 없는 거죠?”
서기준은 퍽 중요한 일인 양 내게 다시 물었다.
“아….”
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장윤성을 봤다. 여차했다간 장윤성 생일에 별장에서 파티를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집을 지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잘 됐네. 그럼 이참에 여자 친구도 보여 주면 되겠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뜻밖의 제안을 한 건 차연주였다. 뭐 그런 걸로 실랑이를 벌이냐는 듯이 그녀는 앞에 놓인 술잔을 한 번에 비우고 말했다. 하지만 장윤성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이라는 듯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만 있고 싶다니까.”
“그럼 여자 친구 데려와. 보여 주면 내가 책임지고 빨리 보내 줄 테니까. 아니면 밤새 우리랑 노는 걸로 하면 되지.”
장윤성의 반박에도 차연주는 그럴듯한 절충안을 내놓았다. 방금 전까지 시큰둥하게 장윤성과 서기준을 보고만 있더니 슬슬 이 일에 흥미가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네. 차연주 천재네.”
서기준은 박수를 치며 차연주의 의견에 찬성했다.
“안 돼.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라.”
장윤성은 여전히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가 뭐 잡아먹냐? 그냥 인사만 하고 보내 준다니까?”
아무래도 차연주는 정말 장윤성의 여자 친구 얼굴이 정말 궁금해진 듯 했다.
“싫어. 누구 보여 주기 아까워.”
“있긴 하고? 수상한데…. 서기준처럼 남자 사귀는 거 아니면 왜 못 보여 주는데?”
서기준이 남자를 사귄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기준을 봤다. 마침 술을 들이켜고 있던 서기준은 콜록콜록 기침을 해 댔다.
“야, 차연주! 아니라니까!”
서기준이 부정했지만 테이블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인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형 남자 사귀어요?”
서빙을 마치고 내 뒤에 선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호가 끼어들어 물었다. 서기준이 워낙 자주 오는 단골이라 요즘에는 정호나 종민이도 가끔 말을 섞곤 했다. 서기준은 억울한 얼굴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호의 호기심을 해결해 준 건 차연주였다.
“그런 소문이 났거든요. 서기준이 여기 자주 오는 이유가 직원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서라고요.”
“근데 지금 여기 남자 직원밖에 없다면서요.”
옆에 있던 다른 진짜배기가 웃으며 차연주의 설명을 거들었다. 서기준이나 차연주만큼 자주 오진 않지만 얼굴이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기준이 이곳을 들락거릴 무렵부터는 남자들만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정작 서기준이 왜 우리 가게 단골이 됐는지 이유를 아는 우리에겐 그저 우스운 소리였지만.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마음에 든 것도 한몫하겠지만, 주된 이유는 다니기 편한 곳에 있다는 위치적 장점과 성욱 형이 VIP에게만 내주는 구하기 어려운 술 때문이었다.
“이런 소문 청학동 삼촌한테 들어가면 너 끝인 거 알지?”
차연주는 겁을 주듯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떤 새끼가 낸 소문인지 걸리기만 해.”
서기준은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처럼 뚜둑 소리를 내며 손을 푸는 시늉을 했다. 화제가 넘어간 것 같아 슬슬 자리를 뜰 생각으로 테이블 위의 빈 병과 쓰레기를 챙겨 정호에게 건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무리 그 사이에 장윤성이 있어도, 그들과 꽤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어도 손님은 손님이라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서기준이 내 팔을 붙잡았다.
“하경 씨도 올래요?”
“어딜요?”
“윤성이 생일 파티요. 와요, 하경 씨도.”
서기준이 나를 붙잡은 손을 조금 흔들며 조르듯 말했다.
“안 할 거라니까.”
장윤성이 그만두라는 듯이 내 팔을 잡은 서기준의 손을 쳐 냈다.
“왜. 모처럼 북적북적하게 놀면 좋잖아. 기분 전환도 되고. 안 그래요, 하경 씨?”
서기준은 내게 도움을 청하듯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그는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친구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 대화를 생각하면 마냥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요. 생일인데 친구들하고 보내면 좋죠…. 북적북적하고.”
나는 장윤성을 흘끔 보면서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차연주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는 장소는 어디가 좋겠다느니, 누굴 부를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굳이 말을 거들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진행됐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장윤성은 섭섭한 얼굴을 했다.
***
“난 정말…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서기준이 미리 말해 준 어느 호텔 별관 앞까지 끌려와 놓고서도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안 된다고 했어야지.”
장윤성은 자업자득이라는 듯 매정하게 대답했다.
분명 나는 안 오겠다고 했었다. 서기준에게도 장윤성에게도. 하지만 장윤성은 저를 떠넘긴 죄라며 굳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어떻게 말리냐, 거기서.”
나는 툴툴대며 걸음을 옮겼다. 나라고 좋아서 장윤성을 양보한 건 아니었다. 서기준이 그림을 받고 그런 걱정만 하지 않았어도 조금은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기준 같은 사람이 장윤성의 친구인 게 좋았다. 그래서 모처럼의 시간을 조금은 양보할 생각도 들었던 거였다. 따지고 보면 다 저를 위한 일인데도 장윤성은 내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둘만 있을 수 있잖아.”
친구를 생각하는 서기준의 갸륵한 마음 덕분에 별장엔 내일 가기로 한 참이었다. 어차피 주말까지 쉬기로 한 터라 하루를 빼도 꽤 긴 휴가였다. 내가 목소리를 바꿔 달래듯 말하자 장윤성은 그제야 별수 없다는 얼굴로 시계를 봤다.
“길게 있지 않을 거야.”
“알았어.”
건물에 들어선 뒤에도 약속장소 까지는 긴 복도를 걸어야 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장윤성은 몇 번이나 일찍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서기준과 차연주가 순순히 보내줄 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 왜 둘이 같이 와요?”
복도 끝으로 커다란 입구가 보일 즈음 근처를 서성이고 있던 서기준과 마주쳤다. 그는 우리가 같이 오는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같이….”
“저 입구에서 만났어요. 우연히.”
장윤성이 같이 왔다고 순순히 말할 것 같아서 내가 얼른 말을 막았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구나. 하경 씨 저녁 아직 안 먹었죠? 이쪽으로 와요.”
사실 그렇게 궁금한 이야기도 아니었던 듯 서기준은 쉽게 납득하고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넓고 화려한 홀이었다. 서기준 정도의 재력가가 여는 파티니 호화로울 건 예상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부 장윤성 혹은 서기준의 친구일까. 우리 가게가 한창 붐빌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다 네 친구야?”
서기준의 뒤를 쫓으며 작은 소리로 묻는 말에 장윤성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서기준 씨 친구?”
“글쎄. 친구도 있고, 오늘 친구가 될 사람도 있겠지.”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진짜배기들은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을 늘리는 모양이었다. 서기준이 인심 좋게 날 초대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한 명쯤 구석에서 쭈뼛거리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분위기였다.
서기준이 나를 끌고 케이터링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누군가 기준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막 온 손님인 듯 서기준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우리 눈치를 살폈다.
“가 봐. 하경이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그럼 부탁 좀 할게. 하경 씨, 이따 봐요.”
누가 파티의 주인공인 건지, 서기준은 장윤성에게 뒤를 맡기고 바쁜 걸음으로 제 친구에게 향했다.
“뭐 좀 먹을래?”
익숙한 일인 듯 장윤성은 태연하게 빈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럼 이거….”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럴듯하게 생긴 걸 가리켰을 때였다.
“왔냐?”
누가 장윤성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차연주였다. 옆에는 종종 보던 진짜배기도 있었다. 그들은 내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나도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어색한 인사를 마친 차연주는 다시 장윤성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왜 혼자야? 여자 친구는?”
나는 장윤성의 일행으로 치지 않는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늦는대? 설마 안 오는 건 아니지? 얼굴 안 보여 주면 오늘 너 못 가.”
“야, 얘 오늘 단단히 별렀어. 안 불렀으면 지금이라도 연락해.”
차연주가 깐죽거리듯 말하자 옆에 있던 진짜배기가 바람 잡듯 말을 보탰다. 서기준이 장윤성에게 애인이 없을 거라고 단정한 반면 이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냐. 왔어. 나랑 같이.”
일이 있어서 못 데려왔다, 아니면 늦게 올 거다, 정도로 둘러댈 줄 알았던 장윤성은 생각보다 대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같이 왔다고? 그럼 지금 어디 있는데?”
“여기 어디에 있겠지, 뭐.”
장윤성은 오히려 차연주를 놀리듯 빙글빙글 말을 돌렸다.
“여기 있어? 뭐야, 누군데?”
차연주는 다시 주변을 살피다 급기야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장윤성이랑 같이 들어오는 사람 봤어?”
서로 꽤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 갑작스레 붙잡힌 사람은 “아니, 왜?” 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차연주가 장윤성의 애인을 찾는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또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이냐며 끼어들었다. 덕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파티 주인공이 온 걸 알아챈 몇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 내가 방해가 될 것 같아 몇 걸음 물러섰을 때였다.
“뭐야.”
뒤를 확인하지 않은 탓에 누군가와 부딪힌 것 같았다. 나는 급히 돌아서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짜증나게. 똑바로….”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던 사람이 나를 위아래로 훑고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는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그… 맞죠? 기준이가 자주 간다는 술집, 르… 아니 레…? 이름이 뭐였더라.”
“레가토요.”
“아, 맞다, 레가토.”
그제야 나도 기억이 났다. 가게 건물 뒤편에서 서기준 험담을 하던 남자.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아, 기준이가 초대했구나?”
“네? 아, 네….”
그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조금도 길을 비켜 주지 않던 때를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살가운 태도였다. 괜히 반가운 척을 한 남자는 할 말이 떨어졌는지 눈을 굴리다 결국 손을 내밀었다.
“하여간 진짜 반갑다. 이런 데서 다 보고.”
그렇게 반가울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가게 손님이 청한 악수를 거절할 처지는 못 돼서 나도 결국 손을 내밀었다.
“근데 지금 일할 시간 아니에요? 아, 하긴 일보다는….”
뭘 그렇게 아는 척을 하는 건지 그는 혼자 납득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도 잡혀 있는 손을 비틀어 뺐다.
“마침 오늘 쉬는 날이어서요. 그럼.”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피했다. 척 봐도 섞이지 않는 게 좋은 부류였다. 나는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장윤성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덕분에 대화 상대를 잃은 나는 턱을 괴고 눈으로 홀 안을 훑었다.
나를 빼곤 다들 아는 사람이 많은지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혼자 서성이던 사람도 누군가와 마주치면 적당히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좀 상황이 달랐다.
‘친구도 있고, 오늘 친구가 될 사람도 있겠지.’
그들이 사귀길 기대하는 친구가 나 같은 사람은 아닐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정말 못 올 곳을 왔구나 싶었다. 그냥 집에서 기다릴걸.
홀짝홀짝 마신 샴페인 잔이 거의 비어 갈 쯤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아까 그 남자였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그는 홀을 보며 안 됐다는 듯이 말했다.
“심심한가 봐요. 기준이가 바빠서.”
서기준이 바쁜 거랑 내가 심심한 게 무슨 상관이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남자는 계속 서기준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서기준을 의식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시계 저번에도 하고 있었죠. 저번부터 계속 눈에 밟혀서. 그거 나도 갖고 싶었는데 한정이라 못 구했거든요. 비싸기도 꽤 비쌌던 것 같은데. 얼마더라….”
남자는 뜬금없이 내 시계를 가리키며 기억을 되짚는 듯 고민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선물 받은 거라 모르시나?”
나는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었다. 남자의 의도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서기준이 우리 가게 직원을 좋아한다는 소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소문을 낸 건지, 아니면 소문을 확인하려는 것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걸 확인해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도.
남자는 거의 빈 샴페인 잔을 보면서 궁금한 듯 물었다.
“술 잘해요?”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굳이 내 주량을 자랑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겸손을 떤 말을 그는 쉽게 믿는 것 같았다.
남자는 마침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데 와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술도 못하면 정말 심심할 텐데. 저쪽에 내 친구들이 있거든요. 같이 게임이라도 할래요?”
모로 보나 꿍꿍이가 있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아니요, 하고 거절하려 했다.
“하경아.”
그 순간 장윤성이 날 부르지만 않았다면. 겨우 인사치레를 끝냈는지 장윤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아, 네, 해요, 게임.”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대꾸하며 일어섰다. 내 이름을 모르는 남자는 장윤성이 날 부르며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는 반색하며 일어섰다. 장윤성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기에 나는 남자의 팔을 잡아끌며 그가 가리켰던 곳으로 향했다. 흘끔 돌아보니 장윤성이 인상을 쓴 채 서 있다가 곧 날 쫓아오려는 듯이 걸음을 떼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장윤성이 날 붙잡는 일은 없었다.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다른 사람이 먼저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장윤성이 누군가에 붙잡혀 있는 동안 나는 다시 남자를 재촉했다.
홀 한쪽 벽으로는 작은 방이 여럿 있었는데 남자는 나를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방으로 데리고 갔다. 문은 없고 훤히 뚫려 있는 아치형 입구를 커튼 한 장으로 가리는 구조였다.
거기엔 남자의 친구라는 사람 둘이 더 앉아 있었다. 낯이 익은 걸 보면 이들도 한 번쯤은 가게에 들렀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서기준이 요즘 부쩍 더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더라니, 의도적으로 들러붙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괜히 호들갑을 떨며 나를 환영했다.
자리에 앉아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남자의 이름은 김영후라고 했다. 테이블 위에는 트럼프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제야 무슨 게임인지도 묻지 않고 쫓아온 게 떠올랐다.
“포커 괜찮죠? 간단한 걸로.”
“저 포커는 전혀 모르는데.”
“괜찮아요. 돈 걸고 할 것도 아니고. 배우면서 천천히 하면 되죠.”
김영후는 퍽 친절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다행히 룰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요령까지 간단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돈이 걸린 건 아니라 매 판마다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벌주를 한 잔씩 마시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들은 나를 취하게 하는 게 목적인 모양이었다.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술을 잘 못 마신다고 운을 띄워 놨으니 적당히 마시다 취한 척 화장실로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가급적 장윤성이 날 다시 찾기 전에. 내가 이쪽으로 들어온 것까진 못 봤는지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던 장윤성은 소식이 없었다. 다행히도.
장윤성이 불렀을 때 무시했던 건 순전히 그를 위해서였다. 김영후는 아마 가게 건물 뒤편에서 만났을 때부터 내가 걸친 것에 대해 의심했을 것이다. 고작 바에서 일하는 사람이 걸치기엔 지나치게 비싼 것이었을 테니까.
‘서기준이 자주 드나드는 바에 월급보다 비싼 셔츠를 입고 일하는 직원이 있다.’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볼 이야기였다. 그밖에 다른 연관성은 찾지 못하겠지만. 서기준과 나는 가게에서 마주치는 걸 제외하면 단 하나의 접점도 없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장윤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쪽은 진짜였으니까. 누군가 작정하고 덤비면 증거는 무수하게 나올 터였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약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르는 벌주가 목으로 넘어갔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은 종종 내게 떠보듯 서기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서기준의 평소 성격이나 취향 같은 사적인 부분으로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관심도 없었고.
급기야 그들은 비밀스러운 정보를 푸는 척, 서기준이 청학동 삼촌 눈 밖에 나서 후계 구도에서 불리하다느니, 바람기가 있다느니 하는 험담까지 털어놓았다. 서기준의 연인이라면 분명 신경 쓰일 만한 말이겠지만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래요?’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일이 반복되자 그들은 조금씩 김이 샌 얼굴을 했다.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그리고 마침내 내가 취한 척 일어서자 그들은 다녀오라며 길을 비켜 줬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오다가, 안에서 새어 나오는 낭패감 가득한 목소리에 멈춰 섰다. 김영후의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완전 잘못 짚은 거 아냐? 저거 진짜 서기준 그거 맞아?”
“생긴 건 뭐 그렇게 생겼던데.”
“서기준 얘기 나올 때 긴장하는 기색도 없고,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
“그럼 그 시계랑 옷은 뭐야.”
“거기 원래 그런 놈들 다니는 데라며. 다른 물주 잡은 거겠지. 야, 김영후 말 좀 해 봐. 서기현한테 뭐라고 할 건데. 네가 건수 잡았다고 실컷 떠들어 놨잖아.”
서기현? 이름이 두 글자나 겹치는 거 보면 서기준과 관련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서기준에게 서혜진을 제외한 남자 형제는 없다고 했으니 사촌쯤 되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건수라는 걸 보면 단순히 흥미로 이런 일을 캐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닥쳐 봐, 새끼들아, 내가 좋은 거 챙겼으니까.”
김영후가 뭘 챙겼는지 다들 보려는 듯 의자를 드르륵 미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는 소란스러워져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 누가 나오면 곤란하므로 나는 그만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만 서기준에게 전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홀을 빠져나와 로비를 지나 건물 밖까지 나왔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차연주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남자랑 사귄다는 소문이 청학동 삼촌 귀에 들어가면 서기준은 끝이라고.
그땐 단순히 혼난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까 김영후와 그의 친구들이 날 떠보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청학동 삼촌이 후계 구도에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오점이 될 수 있다는 게.
그걸 깨닫고 나니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문득 회사 일을 해 보지 않겠냐고 하던 장현성의 제안이 떠올랐다. 장윤성의 힘이 될 기회라고 했던 이은조의 말도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책상을 향하던 장현성의 뒷모습이 또 떠올랐다.
찬바람을 쐬니 기분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몇 시나 됐지.’
시간을 보니 장윤성의 생일이 두 시간 남짓 남은 것 같았다. 우리가 계획했던 ‘최대한 빨리 나오기’는 실패했다고 봐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멀거니 서서 뒤를 돌아봤다. 건물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윤성은 친구들에게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건물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를 데리고 나오기도 어려울 테니 먼저 집에 돌아가 조촐한 둘만의 파티나 준비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별로 비싼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선물도 준비해 놓은 참이었다. 그래도 먼저 간다고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핸드폰을 꺼내려던 때였다.
“어…?”
나는 자리에 멈춰서 당황한 손길로 품을 뒤적였다. 주머니 어디에도 핸드폰이 없었다. 어디다 놨지. 여기 와서 특별히 핸드폰을 만진 적이 없었는데…. 기억을 되짚다 문득 김영후의 말이 떠올랐다.
‘닥쳐 봐, 새끼들아. 내가 좋은 거 챙겼으니까.’
아, 설마. 잠금을 걸어 둬서 당장은 못 열겠지만 암호야 풀려면 얼마든지 풀 수 있었다. 폰에는 장윤성과 주고받은 메시지,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 같은 게 많았다. 어물거릴 틈이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건물을 향해 뛰었다. 그들이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길 바라면서.
다시 홀로 돌아와 숨을 고르고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커튼이 가려져 있는 걸 보면 아직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커튼을 들추자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경 씨, 왔어요? 오래 걸렸네요?”
김영후는 퍽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김영후와 그의 친구 둘, 그리고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어?”
내가 놀란 듯 소리를 내자 김영후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 친구는 장윤성이라고 하는데… 아니다, 기준이 친구니까 알죠? 태원그룹.”
제가 장윤성과 아는 사이라는 걸 자랑하는 말투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데서 다 보고. 반갑네, 이하경 씨.”
장윤성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이었다.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은 그의 눈매는 여느 때보다 사나워보였다. 장윤성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영후는 제 옆자리로 나를 끌어당기며 동의를 구하는 척 물었다.
“재미있어 보인다고 끼워 달라고 해서요. 괜찮죠?”
“아, 네….”
굳이 거절할 이유도 구실도 없어서 나는 눈만 굴리다 자리에 앉았다.
“그럼 하던 거 계속하자고.”
김영후의 친구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보다 들뜬 분위기였다. 김영후의 승리로 한 판이 끝나고 곧 새 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미 많이 마셨다는 핑계를 대고 게임에서 빠진 채 주변을 흘끔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그사이 장윤성은 몇 판을 내리 졌다. 여전히 특별히 걸린 게 없는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김영후와 그의 일행은 그저 장윤성을 이긴 게 기쁜 양 시시덕대고 있었다.
“혹시 제 폰 못 봤어요?”
망설이다 겨우 물었을 때 김영후는 기분이 좋아서인지 의외로 쉽게 내 폰을 돌려주었다.
“아까 떨어트리셨더라고요.”
“고맙습니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폰도 찾았고 해서 그만 나가자고 눈짓을 했지만 장윤성은 알아채지 못한 듯 게임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열중한 보람도 없이 그는 또 졌다. 어차피 승자는 한 명이라지만 장윤성이 그 한 명이 되는 일은 이상할 정도로 드물었다.
다시 벌주를 마신 장윤성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걸린 게 없어서 그런가, 집중이 잘 안 되네.”
장윤성이 하기엔 지나치게 옹졸한 변명이었다.
“그렇다고 진짜를 걸 순 없잖아. 기준이가 알면 난리나.”
서기준이 주최한 파티에서 돈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기준의 약점을 잡으려 하면서도 철저하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장윤성은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시해진 얼굴을 했다.
“그럼 벌주 양을 좀 늘릴까?”
김영후의 친구가 온 더 록 글라스에 얼음 없이 위스키만을 가득 채우며 제안했다. 장윤성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장윤성이 바라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내내 장윤성이 이겼으니까.
진 사람이 모두 큰 잔에 벌주를 마셔 대는 바람에 술병은 금방 비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김영후와 친구들의 눈이 흐릿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는 곧 장윤성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위스키 병이 비자 그는 술이 너무 셌던 것 같다며 와인을 가져왔다. 저런 식으로 술을 섞어 마시면 어지간히 축복받은 체질이 아닌 이상 다음날 지옥을 경험하기 마련이었다. 김영후와 나머지 둘도 어느 순간부터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것 같았지만 그땐 이미 빠져나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결국 김영후는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고 그제야 그의 두 친구들은 기다시피 몸을 굽힌 채 도망쳤다.
“가자.”
장윤성은 여전히 멀끔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따라 일어서자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야, 야, 손.”
누가 볼까 손을 빼려 했지만 애초에 힘으로 그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그사이 홀은 한산해져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간 장윤성은 입구에 서 있던 직원에게 카드를 하나 받았다. 통로로 연결된 호텔 룸 키인 것 같았다.
“화났어?”
내 물음에도 그는 성큼성큼 걸음만 옮겼다.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그는 날 돌아봤다.
“아니, 아까 그런 건 이유가….”
“응, 하경아.”
다정한 척 웃는 낯이 내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지금 얼마큼 화가 난 것 같으냐고. 그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기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등이 벽에 닿아 내가 더 물러나지 못하자 장윤성이 입술을 겹쳐 왔다.
“야…, 읍, 미쳤… 여기….”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장윤성이 내 팔을 단단히 잡은 채 내 입술을 깨물고 빨았다. 목적지가 얼마나 높은 곳인지 엘리베이터는 까마득하게 올라가기만 했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다행히 쨍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자 그는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진한 위스키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뭐야 너 취했어?”
오래 함께 지내며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장윤성도 취한다는 거였다. 주사라곤 자제력을 조금 잃는 정도였지만.
“기준이랑 연주 떼어 내느라. 조금.”
어쩐지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없더라니. 제 친구들을 술로 재우고 온 모양이었다. 서기준이나 차연주도 어지간한 주당이라 평소보다 좀 넘치게 마셨을 것이다. 장윤성은 아주 곱게 웃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핑계 댈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내 인내심이 약간 부족한 상태거든.”
장윤성이 다시 내 손을 꽉 쥐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손을 잡힌 채 그대로 끌려갔다. 아무래도 아까 일이 단단히 화난 모양이었다.
성급한 손길로 문을 연 그는 날 벽으로 몰아붙였다. 내가 준비가 됐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는 입술을 다시 맞댔다. 혀끝이 닿고 입술이 깊게 겹쳐졌다. 그러는 동안 조급한 손길은 벌써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으, 야, 잠… 먼저 말부터, 읏, 듣고.”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얼른 말을 꺼내려고 했더니 이를 세워 목덜미를 깨물었다.
“응, 해.”
들을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는 한쪽 팔로 내 등을 받친 채 하의를 벗기는 데 열중했다. 집도 아니고 호텔이라 어차피 다시 입고 가야 할 것들이었다.
비협조적으로 굴다가 괜히 옷이라도 망가지면 괜히 곤란해지는 건 나였다. 그의 손길대로 순순히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그를 끌어안았다.
“아니….”
내가 웅얼웅얼 말을 꺼낼 때도 장윤성은 내 몸을 만져 대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열을 올리려는 듯 셔츠 안의 맨살을 문지르던 손이 등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살 없는 엉덩이를 힘껏 쥐었다 놓은 손은 이제 익숙해진 길을 지나가듯 당연하게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도무지 그 이상한 느낌이 익숙해지질 않아서 몸을 뒤틀며 다급하게 외쳤다.
“아, 으, 서기준 씨 있잖아, 서기준 씨, 그 소문…!”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드러나는 살마다 입을 맞추던 장윤성이 제 절친한 친구의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서기준?”
“으응, 그 소문, 그거 그 사람들이 캐고 다니더라고.”
“그래서?”
“어?”
“서기준 때문에 내 앞에서 그 새끼 팔을 끌어안고 쫓아갔다고?”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생각보다 매정했다. 굳이 따지자면 서기준을 위해서 쫓아간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언제 끌어안았다고. 나는….”
억울해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 때였다. 장윤성은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를 안아 들어 안쪽의 테이블 위에 앉혔다.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네가 오해, 아니 의심받을까 봐 그런 거야. 서기준 씨 때문이 아니라.”
침착하게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장윤성의 얼굴은 여전했다. 화가 난 이유가 이게 아닌가? 나는 눈을 굴리다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신경 쓸 일 아니라고….”
“나는 그런 게 신경이 쓰여, 하경아.”
장윤성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서운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는 내 볼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너를 만지는 것도, 네가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고 말을 섞는 것도, 다른 사람을 입에 올리는 것도, 그리고….”
그가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몸을 기울였다.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나는 신경이 쓰이고, 싫어.”
아무래도 그가 화가 난 이유가 아까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함께 맞는 첫 생일을 제 친구들에게 양보했을 때부터, 혹은 그보다 전부터였을까.
싫어하는 걸 말하는 중에도 그는 입술을 겹쳐 왔다. 그런 것이 신경 쓰이고 거슬려도 나는 조금도 싫어지지 않는 것처럼.
짧게 입을 맞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지 마. 누구 앞이든, 단 한순간도.”
그는 내게 대답을 요구하듯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 때문에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만약 오늘 도마 위에 오른 사람이 서기준이 아니라 장윤성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주저하는 나와 달리 장윤성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
뒷일 따윈 안중에 없는 태평한 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난 싫어.”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말을 하면서도 장윤성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하경 씨 나랑 얼마나 같이 살 거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거야….”
‘너만 괜찮다면, 계속…’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부담을 주는 말인 것 같아 망설이는 사이 장윤성이 먼저 말을 이었다.
“대답 안 해도 돼. 싫어도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할 테니까.”
그는 내 손목 안쪽에 키스하고 셔츠를 마저 벗기려는 듯 남은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경아, 우리가 그렇게 길게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알아채.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네가 아무리 조심해도. 이미 한 번 그랬었잖아.”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가족 앞에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조심했지만 결국 확실한 방법으로 들켰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너무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처럼 되지 않으려고 나는 나름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겁 많은 이하경 씨도 각오를 좀 해야 돼.”
마지막 단추를 풀어지면서 셔츠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가 띵한 기분이었다. 뒷일을 생각하지 못한 건 내 쪽인 모양이었다. 장윤성과 나의 관계가 밝혀지면 모든 게 끝인 줄로만 알았다. 그 때문에 장윤성이 다치면 그의 가족들은 나를 또 떼어 놓으려 할 거고, 나는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당연히 그 뒤는 없을 거라고만…. 장윤성의 옷자락을 쥔 손이 조금 떨렸다.
장윤성이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안 될 일에 애쓰지 말고 애인을 좀 더 신경 써 주는 게 어때?”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평생 장윤성에게 형 소리는 듣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
나는 그의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말로 애정을 전하기가 늘 어려워서 나는 벅찬 마음을 이렇게 전하곤 했다. 장윤성은 내 키스를 달게 삼켰다. 입술을 뗀 그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혀가, 입술이 내 살을 머금는 것을 가만히 봤다. 입술이 닿았던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피었다. 장윤성은 몸을 낮춘 채 내 얼굴을 빤히 보며 가슴께 돌기를 혀로 핥아 올렸다.
“으….”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기분 탓인지 요즘 가슴 부근이 좀 예민해진 것 같았다. 장윤성은 혀로 핥던 곳에 입술을 묻고 이를 박았다. 매번 이렇게 씹어 대는데 예민해지지 않는 게 이상할 것도 같았다. 싫지만은 않은 통증에 내가 몸을 조금 숙이자 큰 손이 허벅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엉덩이 사이까지 들어갔던 손은 다시 회음을 타고 올라와 열이 오르기 시작한 성기를 쥐었다.
“…읏.”
유두를 괴롭히는 입술에 비해 손은 다정한 편이었다. 달래듯 오가는 손길에 페니스는 금방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쯤 가슴께에는 피멍울이 맺힌 것 같았다.
내가 흐읏, 하고 우는 소리를 내자 장윤성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다른 쪽과 비교하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내가 원망스러운 듯이 보는데도 그는 그저 웃고는 내 다리를 열고 허벅지며 그 안쪽까지 입술을 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페니스를 쥔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아… 흡.”
그가 깊은 곳을 깨물고 빨아 댈수록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오므라들었다. 그게 번거로웠던지 장윤성은 내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그는 발기한 기둥 아래를 혀로 훑으며 조금씩 축축해지는 선단을 둥글게 만졌다.
“흣….”
입술을 깨물었지만 신음이 샜다. 장윤성은 페니스를 매만지던 손이 맑은 액체에 젖고 나서야 아랫도리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젖은 손가락은 고스란히 회음을 따라 굳게 닫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을 적시듯 맴돌던 손가락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기분에 나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손가락은 탐색이라도 하듯 천천히 안쪽을 더듬었다.
“으….”
그러다 이윽고 민감한 부분 근처에 닿은 것 같았다. 익숙한 쾌감을 기대하듯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손가락은 감질나게 주변만 문지르다 쑥 빠져나갔다. 장윤성은 몸을 일으켜 내 옆에 비스듬히 섰다. 내가 그의 몸에 머리를 기대자 다시 다리 사이를 비집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응….”
두개의 손가락이 깊은 곳과 얕은 곳을 오가며 문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놀리듯 내가 느끼는 곳 주변만 감질나게 만져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몸에는 자꾸 열이 올랐다. 숨이 조금씩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바지 버클을 풀고 안에 있는 것을 쥐었다. 그에게 배운 손짓으로 문질러 주자 곧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장윤성은 대견하다는 듯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칭찬받은 아이처럼 더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의 손가락이 일부러 애매한 곳을 꾹꾹 누를 때마다 나는 조급하게 허리를 떨었다.
“지, 지금… 해.”
손에 쥔 게 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을 쯤 나는 애타는 목소리로 졸랐다.
“벌써?”
놀란 듯 묻긴 했어도 몸이 달아오른 건 마찬가지라 그는 제 것이 들어갈 수 있는지 가늠하듯 내 뒤에 넣었던 손가락 두 개를 조심스레 벌렸다.
“읏.”
“아직 힘들 것 같은데?”
빠듯한 기분에 소리를 내자 장윤성은 애매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그냥 해, 빨리.”
나는 조금 울먹이며 말했다. 빨리 뭐라도 거기에 닿았으면 했다. 아주 안 될 것 같진 않았던지, 장윤성은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섰다. 나는 장윤성의 어깨를 쥔 채 몸을 조금 젖혔다. 급할 땐 멋대로 조르다가도 막상 이 때가 되면 긴장이 됐다.
내가 숨을 조금 고르자 장윤성이 천천히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처음엔 생각보다 괜찮다 싶었는데 점점 더 빠듯해지는데도 여전히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잠… 읏.”
더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를 바짝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냈다.
“괜찮, 아, 하경아, 힘 조금만 빼 봐.”
장윤성은 달래듯 내 등을 문지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힘을 빼 보려고 해도 자세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잘되지 않았다. 결국 이도저도 못하고 눈을 꾹 감고 있는 동안 장윤성이 괜찮다며 몇 번의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대로 호흡을 고르고 나니 겨우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지 삽입만으로 이미 둘 다 땀에 젖어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이 마주치자 장윤성이 웃었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몸이지만 내가 볼 수는 없는 곳이었으니까.
“…뭐.”
“얼마나 다행이야. 이하경 씨, 후, 이런 모습 보는 게, 나뿐이라서.”
하긴 이런 꼴을 보이고 헤어진 놈이 있다면 사는 게 좀 더 불안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속으론 동감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장윤성은 내 다리를 제 팔에 걸치게 하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안쪽이 불안한 듯 움찔거렸다.
“아으….”
장윤성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게 두어 번, 길게 한 번. 그러고는 조금씩 속도를 붙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짝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장윤성이 움직일 때마다 몸이 들썩거렸다.
“아, 잠, 잠깐, 아, 아파…!”
아프다는 말에 장윤성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파?”
“테이블에… 부딪혀서 불편해.”
몸이 덜걱거릴 때마다 딱딱한 테이블에 뼈가 부딪혀서 아팠다. 그렇다고 드러눕기에는 불편한 높이였다.
“침대로 갈까?”
장윤성이 그렇게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날 놓아주는 대신 더 바짝 안아 들었다.
“이, 일단 내… 내려 줘, 읏.”
꿰뚫린 채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이상했다.
“몇 걸음 안 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세였다. 장윤성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배 속에서 움직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읏, 읏….”
입술을 꽉 물고도 어쩔 수 없이 작게 소리가 새어 나갔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눈치챈 장윤성이 일부러 나를 추슬러 안듯 크게 들썩였다.
“…흐윽!”
무게가 실렸기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도 세게 안쪽을 찔러 오는 탓에 삼킬 새도 없이 커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싫… 내, 내려… 내려… 줘… 흐읏.”
나는 그의 팔에 힘을 주어 허리를 들었다. 하지만 장윤성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별수 없이 원위치로 내려가는 바람에 오히려 더 세게 그의 것을 삼키고 뱉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의 것이 안쪽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벅지를 떨었다. 몇 걸음이라던 침대는 한참 멀게 느껴졌다.
“응, 으응, 응.”
내가 안간힘을 써 몸을 비틀수록 여기저기 자극만 더 세질 뿐이었다. 잘 느끼는 그곳이 짓눌려 아랫도리에 바짝 열이 올랐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허리를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장윤성은 나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장윤성을 밀쳐 눕히고 그의 배를 짚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 흣… 아.”
여느 때보다 깊게 들어간 장윤성의 것이 배 속을 깊이 찔러 왔다. 한 번씩 허리를 크게 들었다 앉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런데도 움직임을 멈추기 어려웠다. 곧 절정에 다다를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내 것을 손에 쥐려 했을 때 장윤성이 돌연 몸을 틀어 다시 나를 눕혔다.
“하, 으읏, 응….”
그는 바짝 선 내 페니스를 쥐고 엄지로 끝을 틀어막은 채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으, 아, 싫, 나… 읏, 흐읏.”
“후, 하경, 아, 같이, 해야지.”
사정을 저지당하자 내보내지 못한 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어찬 것 같았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팔다리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장윤성은 아직 부족한 듯 뒤가 얼얼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읏… 하, 유, 윤성아….”
“응, 하경… 아….”
내 부름에 장윤성이 기꺼이 몸을 숙여 왔다. 나는 그를 바짝 끌어안고 가쁜 숨과 울음을 토해 냈다. 장윤성이 입술을 맞대도 키스로 돌려줄 정신조차 없었다. 배 속을 쾅쾅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흣, 아… 아…!”
다시 한 번 깊게 꿰뚫리는 기분에 고개를 젖히고 허리를 크게 들었을 때, 장윤성이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고 내 페니스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배 위로 왈칵왈칵 하얀 액체가 흩어졌다. 사정감에 턱이 덜덜 떨렸다.
장윤성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내 손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는 아직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흘끔 본 시계가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일이 약 2분쯤 남은 장윤성은 아무래도 오늘 내로 집에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집에 선물을 사다 둔 줄도 모르고.
“생일… 축하해.”
사실은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함께 촛불도 끄고 선물도 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선물은 며칠 전에 사서 장윤성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두었고, 오늘 낮에는 예약해 둔 케이크를 찾으러 갔었다. 장윤성이 좋아하는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를 받아서 나오는 길에 작은 꽃집이 있기에 예쁜 꽃다발도 하나 사다 놓은 참이었다.
나도 내가 그런 걸 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꽃다발 같은 건 먹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홀린 듯이 그걸 사 버렸다. 노랗고 하얀 꽃다발을. 너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걸 샀는지 알까.
내가 긴 생각을 곱씹는 동안 장윤성은 고맙다는 말도 않고 웃기만 했다. 그래서 나도 그냥 웃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
호텔에서 한참을 뒹굴다가 집 앞에 돌아왔을 땐 새벽 세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현관문에 귀를 바짝 붙인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전 같으면 그냥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온다?”
“온다.”
내가 묻자 장윤성은 똑같이 대답했다.
“그럼 내기가 안 되잖아.”
나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삑 소리가 났는데도 문 너머는 고요했다. 설마 안 나오나? 잠깐 눈을 굴렸더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타다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웃으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풍작이가 엉덩이를 흔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구, 안 자고 기다렸어?”
반가움에 주저앉아 덥석 끌어안았더니 풍작이가 얼굴 여기저기를 핥기 시작했다.
“풍작아, 형이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장윤성은 또 엄한 목소리로 풍작이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했다.
옷을 대강 갈아입고 우리 셋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내 자리는 항상 가운데였다. 풍작이는 우리를 기다리는 게 피곤했던지 침대에 올라오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하경아, 선물 지금 안 줄 거야?”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선물을 사 놨다고 얘기했더니 몰래 기대하고 있었는지, 장윤성이 모로 누워 물었다. 나도 얼른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그와 관계를 오래 한 뒤에는 바로 기절하듯 잠들곤 했는데, 오늘은 집까지 돌아오느라 모든 에너지를 써 버린 것 같았다.
“내일. 내일 줄래,”
“궁금한데. 네가 나한테 뭘 해 주고 싶었는지.”
선물은 궁금해할 것도 없이 시시한 거였다. 똑같은 디자인의 잠옷 두 벌. 해 주고 싶었다기보다 그냥 내가 같이 입고 싶어서 샀을 뿐이었다.
“너무 기대하진 마. 그냥 흔한 거야.”
장윤성은 내가 뭘 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실망할까 봐 미리 별거 아니라고 말해 두고 보니 문득 궁금했던 게 하나 떠올랐다.
“근데 저번에 지안이 왔을 때 뭐라고 했어?”
“지안이?”
“그때 지안이가 물어봤잖아. ‘하경이 삼촌은 윤성이 삼촌한테 뭘 해 줄 수 있어요?’ 하고.”
내가 그렇게 설명하고 나서야 장윤성은 겨우 기억해 낸 듯 아아, 했다.
“네가 나한테 뭘 해 주냐면….”
침대에 제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나뿐인데도 장윤성은 굳이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노란 털 짐승도 못 들을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응.”
내가 정말 그렇게 대답했냐고 묻자 장윤성은 물론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단순한 답에 나는 웃으며 이불을 끌어 덮었다. 다시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눈을 감은 채 웅얼웅얼 말했다.
“내일 나 일찍 깨워 줘.”
“별장은 천천히 가도 되잖아. 푹 자.”
“아니야. 우리 내일 할 일이 많아….”
아득해지는 의식 저편에서 장윤성이 뭐라고 대답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다시 깨고 싶진 않았다. 내일은 정말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오늘 다 하지 못한 축하도 마저 해야 하고, 선물도 건네야 하고, 또 장현성이 내게 했던, 회사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상의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언제든, 누구 앞에서든 네 곁에 있어도 된다면, 나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사실 그날 장현성과 만나고 나올 때부터 욕심이 났었다. 장현성이 자신의 책상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봤던 것처럼, 장윤성이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걸 곁에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다시 한 번 의식이 아득해지더니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새카만 어둠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장윤성이 했던 말이 홀연히 떠올라서.
‘네가 나한테 뭘 해 주냐면….’
너는 나를 행복하게 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