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 어떤 날 (17/18)

시간이 많이 늦은 걸 깨닫고 서재에서 나왔더니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집 안에 있을 사람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자러 간 걸까. 말없이 먼저 침대에 들어가는 일은 별로 없지만 굳이 침실로 향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별수 없이 거실로 나와 실내를 눈으로 훑었다. 물건을 잔뜩 들여놔도 휑하기만 한 공간을 적막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이 한정된 공간에서도 이하경은 종종 실종되곤 했다. 이쯤 하면 상황을 인정해야 했다.

“풍작아.”

내 발로 찾으려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비효율적인 데다 되도록 빨리 찾고 싶었다. 날씨가 슬슬 쌀쌀해지고 있었고, 이하경은 추위에 약했으니까.

“풍작아. 이리 와.”

분명 들었을 텐데도 좀처럼 기척이 없어 다시 한번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이 좋아하는 간식을 꺼내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자 겨우 어디선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밥을 넉넉하게 먹인 참이라 조금만 덜어 낸 뒤 나머지를 다시 서랍에 넣고 돌아서자 녀석이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앉아 있었다.

“섭섭하게 이럴래?”

살아도 나랑 더 살았을 녀석이 이하경 껌딱지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좀처럼 내게 오질 않았다. 이렇게 속내를 토로하는 동안에도 녀석은 여전히 내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간식만 보고 있었다. 

야속하다고 느끼긴 해도 녀석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이하경보다 더 함께 살았다고 해도 사고 직후 얼마간뿐이었고, 그마저도 그다지 눈길을 주지 못했으니까. 결국 나는 타박하길 그만두고 녀석의 눈앞에 간식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하경이 어딨어?”

‘하경이’라는 말이 나오자 녀석은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듯이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그래도 밥값은 하는 껌딱지였다. 집 안에선 항상 하경이의 곁에 붙어 있는 풍작이는 이따금 벌어지는 숨바꼭질에 지대한 공을 세우곤 했다.

풍작이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앞장선 곳은 구석에 있는 창고로 쓰는 방이었다. 내가 직접 이하경을 찾아다녔더라면 가장 마지막에 들렀을 곳이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 커다란 상자가 몇 개나 나와 있었다. 풍작이는 상자를 빙 둘러 안쪽으로 들어가 멈췄다. 이하경은 그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풍작이에게 간식을 넘겨주고 나는 이하경의 곁에 몸을 굽혀 앉았다. 태평하게 잠든 얼굴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딱딱한 바닥에서 잠들 수 있었을까. 

정말이지 이하경은 아무 데서나 쉽게 잠들곤 했다. 침대는 물론이고 소파나 바닥, 심지어 욕조에서까지. 머리만 대면, 아니, 눈만 감으면 잠드는 사람이었다. 섬세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성격은 예민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이하경의 그런 성격을 좋아하면서도 가끔은 섭섭했다. 어디서든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내 곁이 아니더라도.

내가 풍작이에게 술래 역할을 시키기까지 얼마나 여러 번 놀랐는지, 그리고 지금도 습관적으로 심장이 덜컥거리는 걸 이하경은 모를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도 갑작스럽게 그를 잃었던 기억은 흉터가 되지 못한 채 여전한 통증을 일으키는 상처였다. 이하경의 옆에 서만 사라지는 기묘한 불면증도 아마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하경아.”

깊게 잠들었는지 이름을 불러도 곱게 감은 눈은 그대로였다. 긴 속눈썹에 맺혔던 시선이 보드라운 볼을 타고 내려가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에 고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스스로를 형이라 칭하며 오늘 밤 좋은 걸 가르쳐 주겠다고 허세를 부리던 입술이었다.

“하경아.”

좋은 걸 가르쳐 주기는커녕 침대 위에선 나를 형이라 불러야 할 판이었지만 그마저 아쉬운 건 나라서 괜히 한 번 더 불러 봤다. 이번엔 어깨를 조금 움찔하더니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동자가 가늘게 드러났다. 그는 꿈인지 생신지 분간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경아. 오늘 좋은 거 하자며.”

어차피 오늘은 그른 걸 알지만 괜히 말을 붙였다.

“으응…. 이따가….”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열심히 대답을 해 주는 게 꽤 재미있어서.

“이따가 언제?”

웅얼웅얼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하경이 대답을 했다.

“응? 이따가 언제?”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재촉하듯 다시 물었더니 이하경이 나름 애쓴 발음으로, “으응, 이따가아….” 하고 대답했다. 자꾸 깨우는 게 싫은지 조금 찌푸린 얼굴이었다. 나는 몸을 바짝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댄 채 속삭이듯 물었다.

“하경아, 지금 키스해도 돼?”

“응….”

신음하듯 대답한 그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정말 깨울 생각은 없어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났더니 이하경은 벌써 좋은 꿈을 꾸는 얼굴이었다. 이대로 차가운 바닥에 계속 눕혀 둘 수는 없어 안아 드는데 바닥에 툭 노트 한 권이 떨어졌다. 영어 공부의 흔적이 빼곡한. 그러고 보니 그가 누웠던 자리 근처에도 영어 학습서가 몇 권 쌓여 있었다. 이걸 찾으러 여기까지 왔었던 모양이었다.

“풍작아, 자러 가자.”

하여간 이런 데엔 욕심도 많지. 나는 이하경이 꺼내 둔 것들을 발로 슬쩍 밀어 두고 침실로 향했다.


***


주말 아침에도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풍작이는 잠든 이하경의 얼굴을 살펴보고 먼저 침대를 나서곤 했다. 그러고는 혼자서 뭘 하는지 온 집 안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지면 다시 침실로 돌아와 멍, 멍, 하고 짖는다. 이하경은 그쯤 겨우 눈을 뜬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이하경은 잠깐 고장 난 기계처럼 굳어 있다가 느릿한 동작으로 눈가를 비볐다. 아무래도 잠이 잘 깨지 않는 모양이었다.

“…밥?”

멍하게 풍작이를 보며 묻던 이하경이 이번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깰 텐데….”

아마도 나를 보고 있을 이하경은 고민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는 풍작이가 침대를 나설 때부터 깨어 있었다. 이하경과 몸을 붙이고 있는 게 좋아서 조금 게으름을 피웠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으음….” 하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 품에 등을 대고 누웠다.

“조금만 더 참으면 안 될까? 이번 주엔 윤성이가 푹 자야 하거든.”

설득인지 다시 눕기 위한 핑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풍작이는 수긍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멍, 멍, 하고 항의하듯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알았어. 가자, 가.”

쉿, 하는 소리로 달래보려던 그는 결국 일어나려는 듯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이하경의 몸에 팔을 둘러 붙잡았다. 다시 침대에 풀썩 엎어지고 나서야 그가 내 얼굴을 봤다.

“어… 깼어?”

그는 깨워서 미안한 얼굴이었다. 내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자 그도 안심한 듯 따라 웃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도 웃는 얼굴은 끝내주게 예쁜 사람. 이하경은 얌전하게 자는 편인데도 아침이면 항상 머리가 엉망이었다.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만져 주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풍작이 밥을 챙기겠다는 소리에 이하경이 따라 몸을 일으켰다. 만져 준 보람도 없이 머리카락은 다시 제멋대로 붕 떠 있었다. 한번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은 물에 닿기 전까진 원래대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씻고 나와. 우리도 아침 먹자.”

그렇게 말하며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해 주자 이하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작아, 가자. 밥 먹으러.”

밥이라는 소리에 이하경 껌딱지 노릇도 미뤄 둔 풍작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밥을 주기 전에 먼저 물그릇을 채워 주었더니 녀석은 실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흘끔 보고는 아쉬운 대로 목을 축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인데도 의사 표현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괜히 재촉을 받는 기분에 녀석을 달래고 꺼내든 사료통은 텅텅 비어 있었다. 채워 둔다는 걸 잊었던 모양이었다. 새 사료가 있던가. 부엌을 정리하는 것도 빈 사료통을 채우는 것도 보통은 가사도우미가 하는 일이라 수납장을 여러 군데 뒤져야 했다. 하지만 부엌에 있는 모든 수납장을 열어도 새 사료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쯤 있을 법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명 얼마 전에 하경이와 장을 보면서 바구니에 새 사료를 하나 담았었다. 그 기억 하나를 믿고 결국 다용도실까지 샅샅이 뒤져 새 사료를 찾아냈다. 우여곡절 끝에 채운 그릇을 내밀자 배가 고팠던 녀석은 허겁지겁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너도 다 컸으니까 사료 정도는 스스로 챙겨야지.”

북슬북슬한 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큰 개였다. 그래서 해 본 핀잔에 마침 씻고 나오던 이하경이 토를 달았다.

“에이, 얘가 어떻게 밥을 챙겨 먹어? 아직 열 살도 안 된 강아진데. 그치?”

그는 풍작이 옆에 주저앉아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풍작이는 식사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강아지?”

“응.”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다시 물었더니 이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큰 강아지네.”

“…왜.”

내가 비웃듯 말하자 그는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어제 이하경 씨가 열 살도 안 된 강아지를 아주 힘겹게 끌고 가던 게 생각나서.”

풍작이는 수컷 골든 레트리버치고도 큰 편이었다. 그리고 최근 이하경은 40kg에 육박하는 개를 번쩍 들 만한 기운이 없었다.

“아니, 어제는….”

그래서 어제는 산책하다 흙투성이가 된 풍작이를 안아 들지 못하고 상체만 겨우 끌어안은 채 욕실로 연행했다. 풍작이는 자의 반, 타의 반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족보행을 하며 끌려갔고 나는 녀석이 두 발로 남긴 발자국을 닦아 내야 했다.

“강아지 목욕시키고 힘들어서 잤지.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어지는 사실 적시에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던지 이하경은 눈을 굴리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그러고는 사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양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잖아.”

위로하듯 하는 말이 오히려 날 더 섭섭하게 하는 건 알까. 나는 손을 뻗어 아직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머리 잘 말려. 나도 씻고 올게.”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하경을 뒤로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지난밤 이하경이 일찍 잠들어서 섭섭한 건 아니었다. 그건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난 금요일, 들뜬 이하경이 허세 가득한 말투로 밤을 책임지겠다느니 할 때부터 대충 예상했던 일이었다.

몇 달 전 이하경은 아버지의 뜻대로 회장 비서실에 입사했다. 어차피 회장님이 직접 꽂은 낙하산이니 일을 못해도 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하경이 내게 태원에 들어오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예상했듯이 그는 무척이나 열심이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거기다 익숙하지 않은 업무 때문에 계속 긴장을 해서 그런지 최근 그는 거의 항상 체력 고갈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제 그런 허세를 부렸던 건 다음 주에 떠날 내 출장 때문이었다.

“근데 너 거기서 잠 못 자면 어떡해?”

뉴욕으로 떠나는, 거의 한 달쯤 되는 긴 출장 일정을 이야기했을 때도 이하경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출국을 이틀 앞둔 오늘도 역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이하경은 공부해야 할 것을 챙겨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거기엔 어제 창고에서 찾아낸 책과 노트도 있었다. 한참 노트를 뚫어지게 보다가 도무지 신경 쓰여 집중할 수가 없다는 듯이 꺼낸 말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자니까.”

방금 내린 따듯한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는 그의 곁에 앉았다. 집 안에는 많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데도 이하경은 굳이 여기에 앉는 걸 좋아했다. 오래전 별장에서 지낼 때부터.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싶은데…?”

그러고 보면 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함께 가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이유는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일도 아니었지만.

“회장님이….”

“아버지가 왜?”

웬일로 오늘은 말할 기분이 들었는지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꾸 너 팔아 버린다고 하시잖아.”

“…나를 팔아?”

뜬금없는 말에 나는 다시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일 제대로 못하면 너 팔아 버린다고 하셨다고.”

“어디에?”

“선 시장에.”

이하경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진담처럼 건네는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신경 쓸 게 뭐 있어. 난 안 팔릴 자신 있는데.”

“아냐, 넌 포장지만 보고도 누가 들고 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잘생겼다는 칭찬을 이렇게 무심한 말투로 하는 사람은 이하경뿐이었다.

“그럼 이름을 써 놔. 이하경 거라고. 매직으로, 크게. 문신으로 하는 건 어때. 이쯤에.”

내가 손가락으로 왼쪽 뺨을 가리켰더니 이하경이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내 걸 회장님 마음대로 갖다 파는 게 싫다고.”

오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하경은 나름대로 아버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게 그에게 힘이나 용기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억지로 그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럼 안 팔려가게 잘 지켜 줘.”

내가 드디어 순순히 물러나자 이하경은 나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저번 출장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며 정말 괜찮겠어?”

이하경의 걱정은 나만을 향해 있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물었다.

“너는?”

너는 괜찮은가 봐.


***


“2813호 쓰시면 됩니다. 저는 바로 옆, 2812호에 있겠습니다.”

윤 비서가 리셉션에서 받아 온 카드 키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의 말대로 카드 위에는 281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익숙한 숫자 조합에 나는 습관처럼 웃었다. 이하경의 생일과 내 생일이자 우리 집 비밀번호와 관련 있는 숫자.

윤 비서의 말대로 2813호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푹 쉬라는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했다.


「잘 자.」


라는 내 메시지는 여전히 화면의 가장 아랫줄을 지키고 있었다. 시차 덕분에 한 달간 떨어져 있는 걸로도 모자라 해님 달님 노릇을 할 예정이었다.

“진짜 잘 자나 보네.”

한동안은 변할 리 없는 화면을 보면서 중얼거린 소리가 새삼스러웠다.

너는 괜찮은가 봐, 하고 물었을 때 이하경은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얼굴을 했다. 그와 떨어져 혼자 출장을 온 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겨울쯤 급히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급하게 떠나야 했고 짧은 일정이라 이하경을 데려갈 생각까지도 못했다. 약을 챙길 생각조차도.

오랜만에 겪은 불면증은 이전보다 괴로웠다. 이하경을 끌어안고 보낸 안락한 밤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2박 3일로 예정되었던 일정이 연장되어 3박 4일을 그렇게 보내고 눈만 뜬 채 겨우 집에 돌아갔다.

피곤하거나 아파도 안색이 잘 변하지 않는 체질 때문에 3박 4일을 꼬박 새우고 왔다는 말을 이하경은 쉽게 믿지 못했다. 거의 하루를 내리 자고 나서야 그는 이 기묘한 불면증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나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없는 순간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허전하길 바랄 뿐이지.

아무리 지켜봐도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욕조로 향했다. 평소보다 오래 몸을 씻고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지금 호텔에 도착했을 시간인가? 잘 도착했어?」


메시지가 온 지는 조금 됐지만 아직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느라 바쁘겠지만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이하경은 어쩐지 얼떨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통화 괜찮아?”

- 어, 어어. 나 준비 다 했어.

말은 그렇게 해도 한창 뭘 하던 중이었는지 허겁지겁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바쁘면 조금 이따 통화해도 괜찮아. 난 한가하거든.”

- 아니야, 옷 갈아입느라. 후, 이제 다 입었어. 넌 도착한 거야? 호텔?

“응.”

- 거긴 어때? 좋아?

“좋을 게 뭐 있어. 그냥 큰 도시지.”

- 큰 도시니까 좋지.

좋은가.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창가로 걸었다. 커다란 전면 창으로 익숙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곳을 떠난 지 채 두 해도 채우지 못했다.

- TV나 영화에서 보면 엄청 멋지던데.

이하경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네. 전엔 몰랐는데.”

네 목소리를 들으며 보니까, 새삼스럽게.

- 전에?

“잠깐 지냈어. 여기서.”

- 언제?

“졸업하고. 한국 돌아가기 전에.”

그 자리로 돌아가길 망설이면서.

- 오, 대단…, 어, 안…, 으악!

준비도 다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더니 계속 뭔가를 하고 있었는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이하경이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아으…, 풍작이 사료통 엎었어. 야, 안 돼, 먹지 마!

풍작이가 달려들었는지 이하경이 다급히 외쳤다. 그는 쏟아진 사료를 치워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전에 가득 채워 둔 걸 엎었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아쉽게 통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익숙한 밤, 익숙한 도시에 낯선 불빛이 무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내 일정에는 변수가 많았고 이하경은 회사에 있는 시간이 긴 탓에 통화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잠깐이라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를 썼지만 그게 서로의 생활에 부담이 되는 걸 깨닫는 것도 금방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연락은 메시지로 주고받으며 기대하던 첫 주말을 맞았다.

- 풍작이 아니었으면 진짜 지각할 뻔했어.

내게는 토요일 저녁, 그에겐 일요일 아침일 시간에 우리는 모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하경은 금요일에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풍작이가 밥을 달라고 열심히 짖어준 덕분에 일어났다고.

- 그래도 밥값은 한다니까.

밥값은 한다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맞아. 밥값은 충분히 하지, 풍작이가.”

이하경에게도 내게도 밥값을 하니 돌아가면 사료를 두 배로 줘야 할까. 하지만 어제 산책을 할 때도 풍작이가 흙탕물에서 뒹굴었다는 말에 결정은 보류됐다. 따지고 보면 지난주 금요일, 이하경이 창고 방구석에서 일찍 잠든 것도 풍작이가 흙탕물에서 뒹구는 바람에 목욕을 시키느라 지쳐서 그랬던 거니까.

- 어젠 어땠어? 좀 잤어?

한참 풍작이 소식을 전하던 이하경이 내내 궁금했던 듯 조심스레 화제를 바꿨다.

“아니, 거의 못 잤어. 아무래도 이하경 씨가 와야 할 것 같아.”

나는 거짓말인 양 일부러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 금요일 휴가 내도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키스나 한번 하고 와야 할 텐데?

14시간 이상을 날아와서 가장 우선할 일이 밥을 먹는 것도 유명한 관광지에 가는 것도 아닌 키스라니. 이하경이 키스를 좋아하는 건 그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키스 상대인 나로서는 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중간쯤에서 볼까. 하와이 어때. 매주 주말.”

- 생각해 볼게.

이하경은 기대는 하지 말라는 듯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통화는 주중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이하경의 목소리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일에 치이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틀 뒤 통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잘 지낸다고만 했다.

- 괜찮아? 버틸 만해?

그리고 두 번째 주말 통화에서 걱정스럽게 내 안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한 덕에 몸이 적응을 한 상태였다.

“응, 괜찮아.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 어제 거실에서 TV 보다 자서…. 아픈 건 아냐. 그냥 목만 잠겼어. 며칠 사이에 여기 엄청 추워졌거든. 강원도 쪽에는 첫눈도 왔나 봐. 거긴 어때?

“여기도. 비슷해.”

으응, 하고 대답을 하며 그는 마른기침을 좀 했다.

“퇴근하면 바로 침대로 들어가. 날씨도 추워졌는데 아무 데서나 잠들지 말고.”

- 안 그래도 오늘부터는 그러려고 했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약도 꼭 먹고.”

-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거기 일이나 열심히 해.

“이렇게 손 많이 가는 형 키우느라 건우가 고생 좀 했겠어?”

- 아니거든?

이하경이 나의 부재를 아쉬워하길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 느끼길 바라진 않았다. 다행히 그의 말대로 목이 잠긴 것뿐이지 어디가 많이 아픈 기색은 아니었다. 푹 쉬라고 당부하고 통화를 짧게 마쳤다.

다음 통화에 조금 나아진 듯했던 그의 목 상태는 또 그 다음번 통화에선 다시 악화되어 있었다. 제대로 침대에 들어가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시킨 대로 잘 지내고 있다고만 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오후, 협력사와의 미팅이 생각보다 금방 끝난 덕에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온 참이었다. 약의 도움으로 조금씩 자고는 있지만 계속되는 수면 부족으로 피곤했다. 넥타이만 풀어 던진 채 소파에 기댄 채 멍하게 천장을 봤다. 

그래도 몇 년 전 이곳에서 생활할 때를 떠올려 보면 훨씬 괜찮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악몽을 꾸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려면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똑똑, 하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었더니 윤 비서가 파일을 하나 든 채 서 있었다.

“내일 만날 H사 자료입니다. 그럼 쉬십시오.”

내민 파일을 받아 들자 그는 정중한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H사에 관한 자료라면 이미 확인한 내용일 확률이 높았다.

“윤 비서님.”

나는 파일 안의 문서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를 불렀다. 윤 비서는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나를 보고 섰다.

“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예상대로 그가 건넨 자료는 이미 확인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파일을 그에게 건네는 대신 다시 접어 손에 쥔 채 물었다.

“요즘 비서실, 많이 바쁜가요.”

눈치가 빠른 그는 내가 뭘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금방 알아챈 얼굴이었다.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하경 씨도요.”

그는 아버지의 비서이자 이하경의 상사였다. 아버지의 비서라고 모두가 이하경과 나의 관계를 아는 건 아니었지만 윤 비서는 아는 사람이었다. 이하경의 존재를 처음 알아내 아버지에게 전한 것도 그였다고 했다.

“목소리가 안 좋던데요.”

그가 먼저 이하경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기에 나도 직접적으로 물었다. 부하 직원의 컨디션을 모두 알고 있을 의무는 없지만 그는 아마 이하경의 소식을 보고받고 있을 것이다.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워낙 열심히 하는 친구다 보니 조금 무리를 해서 피곤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열심히’라는 소리에 나는 대답 없이 웃었다. 이하경이 열심히 하는 건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일하는 만큼만 혼자서도 열심히 지내 줬으면 좋겠는데.

윤 비서의 말대로라면 감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잠을 못 잔 건가. 이하경은 잠이 부족하거나 피곤하면 목이 잠기는 타입이었다.

“그런가 보네요. 소식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항상 전해 듣고 있으니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아, 그리고….”


***


윤 비서는 넌지시 마지막 주의 중요한 일정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 주는 순전히 그 일정을 위해 남아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의 다른 업무는 한국에서 처리해도 상관없었다. 

H사와의 미팅을 끝내고 나왔을 때 윤 비서는 내게 실제로 마지막 주의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전했다. 사실상 모든 일정이 끝난 셈이었다.

윤 비서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갈 수 있는 항공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뒤 집을 지키는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부터 통화가 되지 않은 채, 부재중 전화를 남기면 뒤늦게 바빠서 받지 못했다는 메시지만 오고 있는 상태였다. 좀처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기에 괜한 심술이 일었다. 아니, 사실은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뜻밖의 이른 재회는 분명 그를 더 환하게 웃게 할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이하경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은 채 귀국 길에 올랐다.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땐 컴컴한 밤이었다. 공항에는 본가의 기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이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갔다. 이하경은 발신자 번호 아래 뜨는 국제전화 표시가 없어진 걸 알아챌까. 못 알아채는 편이 조금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조금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 으응.

이번에도 자동응답기가 대답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이하경이 전화를 받았다.

“하경아.”

- 으응, 윤성아.

위화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배시시 웃는 것처럼 풀어진 발음이 아무래도….

“술 마셨어?”

- 어? 티나? 나 하나도 안 취했는데.

마침 집에 들어가는 중이었는지 목소리 뒤로 삑, 삑, 삑, 삑, 하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곧 도어 록 경보음이 울렸다.

- 이거 왜 이러지. 어어…. 우리 집 비밀번호…. 일… 일… 이… 팔… 영….

비밀번호를 공개번호로 만들고 있는 걸 보면 숫자는 기억하는데 손가락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아해하는 목소리 뒤로 다시 경보음이 울렸다. 문앞까지 온 주인이 들어오지 않고 헛짓을 하는 게 답답했던지 멀리서 풍작이가 짖는 소리도 들렸다. 

“하경아, 천천히 눌러 봐. 손끝을 잘 보고.”

- 응…. 일… 일… 이이….

하지만 곧 다시 경보음이 울렸다.

- 씨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하경은 세 번째 실패에 무척 실망한 목소리로 날 탓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 네가 전화하기 전에는 안 취했는데….

술에 취해 놓고 왜 애먼 전화 탓을 하는지. 하지만 그런 소리에도 내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갔다. 나 때문에 요동치는 그의 모든 순간이 좋았다.

“알았어. 내 탓이야. 다시 눌러 봐, 하나씩.”

- 으응. 이일… 일… 이이….

이하경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게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응원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한 듯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후, 거봐, 나 안 취했다니까. 풍작아, 형 왔다아.

폰을 내려놓았는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풀썩 하는 소리, 풍작이 숨소리가 차례대로 들리는 걸 보면 습관처럼 현관에 주저앉아 풍작이와 감동적인 재회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둘의 인사가 끝나길 기다렸지만 이하경의 목소리는 좀처럼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하경아.”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듣고 있긴 한 건지 대답이 없었다.

“하경아. 이하경.”

다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멀리서 으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겨우 핸드폰에 얼굴을 댄 모양이었다.

“누구랑 마셨어?”

이하경이 이 정도로 취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웬만한 주량으로는 상대가 이하경보다 먼저 나가떨어졌을 테니까. 이하경은 쓰러진 상대를 앞에 두고 계속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 음… 성욱 형이랑… 애들… 종민이… 정호….

스피커로 익숙한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그가 일하던 가게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널 그렇게 만들었다고?”

- 아니이. 날 이렇게 만든 건 너고….

졸음이 감긴 목소리였다.

“내가? 무슨 소리야.”

- 네가 이상한 병을 옮겨서….

취해서인지 그는 영문 모를 소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옮겼다고? 뭘? 그제야 이하경은 정말 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잠이 안 와서.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잠이 안 온다고.

- 잘 수가 없어….

이번에는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얼마나, 얼마나 못 잤어?”

- 모르…겠어. …싶어.

왜 그렇게 취할 때까지 마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하경은 취하면 잠이 들곤 했으니까. 아마 그래서 마신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바라던 대로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풍작이가 곁에 있는지 헥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하경아, 너 지금 어디 누워 있어? 현관에 그대로 누운 거 아니지?”

으음,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하경!”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이하경이 늘 하듯이 잠결에도 열심히 대답을 했다.

- 으응, …보고 싶어.

라고.

그러고는 정말 잠들었는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는데도 귓가에 ‘보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가 맴돌았다. 나는 아직 통화 중이라고 떠 있는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미적대며 귀국을 미루고 있었다. 돌아가면 아버지의 회사로 들어가야 했고, 그럼 더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어려울 테니까. 유랑에 집착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엇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호텔을 전전하고 있을 때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잠시 집을 비운다며 지낼 곳을 빌려주었다. 집보다도 사인 하나 필요 없이 얼마간의 돈만 오가는 가벼운 계약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맨해튼의 작은 타운하우스에서 나는 추운 날을 꽤 여럿 보냈다.

그리고 여러 날을 보내는 동안 나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멍하게 천장만 본 채로 또 여러 날. 그러다 문득 허기가 졌다. 사다 놓은 빵에는 곰팡이가 폈고 고기는 상한 지 오래였다. 별수 없이 부엌을 뒤져 아마 집주인이 사다 두었을 코코아를 한 잔 탔는데 향이 꽤 좋아 오랜만에 웃었다.

“보고 싶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가 보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비 오는 어느 날, 울면서 지금 당장 보고 싶다던 누군가의 목소리만 자꾸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그날 그 목소리를 기억해 내지 못했더라면 나는 영영 이 땅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찾고 내가 가장 원망했던 건 날 떠나야 했던 이하경도, 날 속인 가족들도 아니었다. 그때 나를 보고 싶다던 사람을 만나러 가지 않은 내 자신이었다. 서로가 가장 간절했을 순간에 이하경을 알아보지 못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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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정한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문을 열자 현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든 이하경이 보였다. 그 곁에는 밥값 하는 껌딱지가 몸을 바짝 붙인 채 온기를 나눠 주고 있었다.

괜한 병이 옮아 고생을 했는지 안아 든 몸이 기억보다 가벼웠다. 침대에 내려놓고 외투를 벗겨 줄쯤 감겨 있던 눈동자가 가늘게 드러났다. 여느 때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날 찾더니, 그는 의아한 듯 “하와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잠들었다. 생각해 본다더니 정말 많이 생각해 본 모양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이하경은 사실 사랑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이하경은 또 좋은 꿈을 꾸고 있는 얼굴이었다. 눈꼬리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달고.


***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이하경이 고장 난 기계처럼 굳은 채 앉아 있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 자는 척을 하려다가 눈부시게 들이닥치는 햇살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듯 이하경이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어?”

몽롱한 얼굴이었다. 잠이 덜 깼거나 술이 덜 깼거나.

“어제. 이하경 씨 현관에서 잠들고 40분 뒤쯤?”

이하경의 목소리가 끊기고 빨리 가 달라고 기사를 재촉하면서 시계를 수백, 수천 번쯤 확인했으니 아마 꽤 정확할 것이다. 이하경은 자괴감에 쌓인 얼굴로 제멋대로 삐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 오는 줄 알았으면 술 안 마시는 건데. 머리 아파.”

“그러게 전화 좀 받지.”

“목이 너무 잠겨서… 걱정할까 봐.”

이하경은 아직도 피곤한 듯 내 다리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한동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잡은 그는 눈을 감은 채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널 걱정하느라 못 잤는데….”

나른하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문득 다행스러운 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너무….”

내가 없는 순간이 네게 쉽지 않아서.

“네가 너무 보고 싶더라.”

네가 나와 다르지 않아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마른 햇살처럼 웃었다.


겨우 다행스러운 날이었다.

네가 나를 그리워한 날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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