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이하경 (18/18)

축축하게 젖은 옷에서는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단추를 풀었다. 커피를 들고 걷던 중에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옷이 엉망이 됐다. 장윤성과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부딪친 사람은 미안해했지만, 내가 부주의했던 탓이었다. 하필 컵 뚜껑이 잘 닫혀있지 않아서 잠깐 장윤성의 얼굴에 한눈을 팔았던 것 치고 대가가 컸을 뿐. 뜨겁지 않은 커피였고, 장윤성의 사무실에 여벌 셔츠가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회사로 돌아왔다.

내가 젖은 옷의 단추를 하나씩 푸는 동안 장윤성은 사무실 구석에 두었던 새 셔츠를 꺼냈다. 이제 이사가 되었으니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른다고, 내가 가져다 놓았던 물건이었다. 장윤성을 위해 준비해 준 거였는데 내가 먼저 입게 생겼다.

“물티슈 같은 거 없어? 좀 닦고 입을래.”

셔츠를 벗어도 커피 냄새는 여전했다. 젖은 셔츠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기다리자 장윤성이 물티슈 몇 장을 가지고 다가왔다. 달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제가 하겠다는 듯이 직접 내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

“괜찮아. 어디, 여기?”

말은 퍽 인심 쓰는 척하면서 손등으로 슬쩍 가슴께의 맨살을 문지르며 묻는다.

“아니, 잠깐만….”

괜히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더니 짓궂은 손이 오히려 더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잠깐, 만지… 만지지 말고. 간지러워.”

내가 몸을 돌려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장윤성이 끌어안듯 팔을 감아 왔다. 꼼짝없이 붙들려 끙끙거리는 동안 장윤성은 장난스럽게 내 몸을 더듬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의 팔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문은 잘 잠겨 있었지만 괜히 그 너머가 신경 쓰였다.

“아, 하지… 에, 엣취!”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건만 아직 쌀쌀한 공기 탓에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채기가 나왔다. 그렇게 애써도 떼어 낼 수 없었던 손은 그제야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잠깐 옷을 벗은 걸로 재채기를 하는 게 우스웠는지 장윤성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물티슈를 낚아채 몸을 마저 닦고 새 셔츠를 걸쳐 입었다.

“회사에서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거든요?”

“그럼 집에서 마저 할까?”

“안 해.”

단호하게 말해도 장윤성은 결국 제 뜻대로 될 거라는 양 자신만만한 얼굴로 넥타이를 찾아 왔다. 내가 쓰기에는 비교적 화려한 무늬였지만 커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내가 할게.”

“내가 하는 게 빨라.”

또 매 줄 기세기에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장윤성이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들먹이며 내 목에 넥타이를 둘렀다. 뭐 연습할 기회를 줘야 속도가 늘든 말든 하지. 하지만 역시 내 손을 놀리는 것보다는 편해서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럼 나 올라갈게.”

“셔츠 대여비 주고 가.”

“어휴, 쪼잔하다, 쪼잔해.”

거울에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사무실을 나서려 했더니 장윤성이 손가락으로 제 볼을 가리키면서 셔츠 대여비를 요구했다. 때와 장소를 좀 가리라고 실랑이를 할 시간도 없어서 나는 얼른 그의 볼에 쪽, 입술을 댔다 떼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장윤성의 비서도 아직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는지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윤성이 개인 비서를 둘 수 있는 자리로 승진했지만 나는 여전히 회장 직속 비서실에 속해 있었다. 아직 한참 더 가르칠 게 남았다는 핑계로 회장님이 나를 붙잡은 탓이었지만 배울 게 많은 자리인 것도 사실이라 굳이 토를 달진 않았다. 아직 장윤성도 나도 갈 길이 먼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자리로 돌아와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니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커피로 곤욕을 치른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이것도 중독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게 내 죄지, 커피 죄인가 싶어 결국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안에는 사수인 윤 대리가 먼저 와 있었다.

“어, 커피 마시게?”

“네.”

“내가 하나 해 줄까?”

윤 대리는 단맛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컵에 설탕을 쏟아부으며 물었다.

“어…, 아니요. 제가 할게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난 커피를 쓰게 먹는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이 있어.”

“네에.”

윤 대리는 원래 실없는 농담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웃어넘기고 커피 머신 앞에 섰다.

비서실 사람 중에서도 윤 대리는 넉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런 그와도 처음에는 조금 애를 먹었다. 회장님이 내려 보낸 낙하산인 건 미뤄 두더라도, 장윤성과 가까운 사이인 걸 숨기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장윤성의 절친한 친구이자, 로열패밀리가 보낸 감시역이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다행히 오해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지만.

“아침에도 그렇게 입었었나?”

“아뇨, 아까 커피를 쏟아서 갈아입었어요.”

윤 대리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단내가 풀풀 나는 커피를 들고 옆에 섰다. 그러고는 빤히 내 옷을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 친구분 옷이야?”

윤 대리는 종종 장윤성을 ‘그 친구분’이라고 돌려 부르곤 했다. 그 말에 나는 내 옷을 흘끔 보고 되물었다.

“…이상해요?”

이상할 것 없는 흰색 셔츠인데 사이즈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화려한 넥타이 때문인지 내 옷이 아닌 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형 옷 몰래 입고 나온 동생 같길래.”

“제가 형이에요.”

“이사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던데, 뭐.”

윤 대리는 날 놀리는 게 재미있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한 학년 위 선배에게도 존댓말을 하며 살아왔을 그에게 장윤성과 나의 관계가 퍽 이질적이었던지, 윤 대리는 비슷한 소리를 벌써 몇 번쯤 했다. 그래도 내 앞이라 말을 조심히 고르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장윤성이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욱 형의 가게에서 처음 말을 섞을 때부터 말꼬리를 잘라 먹었으니 아니라고 반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별장에서 지내던 시절, 내가 그보다 한 살 연하라고 우겼을 때도 굳이 연장자 대우를 받으려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장윤성은 원래 한두 살쯤은 신경 쓰지 않는 타입 같았다. 위로든 아래로든.

“넥타이도 이사님 거야?”

그래도 장윤성이 영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고 한마디 덧붙일까 고민하는 사이 윤 대리의 관심은 어느새 넥타이로 옮겨 가 있었다.

“괜찮은데…. 어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내 넥타이에 손을 대던 순간, 똑똑, 하고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하경아.”

하필 넥타이의 주인이 내 이름을 부르며 탕비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양반은 못 되는 호랑이가 등장하자 화들짝 놀란 윤 대리는 자리를 뜨려는 듯 얼른 커피잔을 챙겨 들었다.

“천천히 이야기하고 와. 나 먼저 간다.”

그 와중에도 너그러운 상사 역할은 잊지 않고. 그는 장윤성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탕비실을 나섰다. 장윤성은 윤 대리의 뒷모습을 한 번 돌아보고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나는 반가운 마음을 숨긴 채 괜히 바깥을 살피며 물었다. 우리가 가까운 사이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장윤성이 대놓고 나를 찾아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폰, 두고 갔더라.”

“아….”

장윤성은 이 정도면 그럴만한 사유가 되지 않겠냐는 듯이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옷 갈아입는다고 잠깐 내려놓고는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일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폰 두고 간 것도 모르고.”

장윤성은 지금까지 눈치도 못 챈 게 신기한 듯 물었다.

“좀 바빴어. 이거 가져다주러 일부러 온 거야?”

“그런 건 아니고, 회장님 만나러 왔다가 지나가는 김에.”

“아아.”

오가는 길이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용건이 끝났는데도 장윤성은 탕비실을 눈으로 훑더니 다시 나를 빤히 보고 섰다.

“…커피라도 마실래?”

“괜찮아. 마시고 왔어.”

차 대접이라도 바라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웃고 있지만 딱 봐도 못마땅한 게 있는 얼굴이었다.

“왜 또.”

내가 또 뭐냐고 물었더니 장윤성은 망설임 없이 내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윤 대리가 구경한답시고 넥타이를 만지작거린 게 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야, 잠깐 만진 걸 갖고.”

“그러니까. 이게 아니었으면 잠깐 만질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뭐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 눈에도 콩깍지가 단단히 낀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장윤성을 보고 있자면, 그가 나름 연하라는 게 실감이 나곤 했으니까.

“그럼 이따 봐.”

압수하듯 넥타이를 챙긴 장윤성은 짧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윤성아.”

나는 다급히 장윤성을 불러 세웠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형이라고,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그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일지.


***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 때문에 오히려 조용한 밤이었다. 소파에 엎드려 책을 보다가 크게 하품을 하며 종이를 한 장 넘길 즈음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책을 못 가서 시무룩한 얼굴로 창가를 지키던 풍작이가 놀랐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불안한 듯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풍작아, 이리 와.”

손으로 소파를 두드리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내게 몸을 붙이고 앉았다. 골든 레트리버라는 종이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풍작이는 겁이 꽤 많은 편이었다.

“괜찮아.”

나는 달래듯 녀석을 쓰다듬었다. 요 며칠은 날씨가 꽤 변덕스러웠다. 더웠다가, 쌀쌀했다가, 툭하면 비가 내렸다. 날씨를 확인하지 않고 옷을 고르면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그래도 점점 가벼운 옷을 더 꺼내 입게 되는 걸 보면 어쨌든 계절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르릉, 다시 한번 하늘이 찡그리는 소리가 들려 오자 한층 더 겁먹은 풍작이가 내 몸과 소파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한쪽 팔로 풍작이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책을 펴고 엎드렸다. 하지만 흐름이 끊겨 더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별로 집중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흘끔, 서재 쪽에서 인기척이 나지 않는지 확인했다. 일이 많은지 장윤성은 벌써 몇 시간째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너네 형, 되게 바쁜가 봐.”

결국 나는 책을 덮고 풍작이를 끌어안은 채 누웠다. 풍작이 형, 하니까 뒤늦게 회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한 번만, 형이라고 불러보면 안 되냐고 했을 때, 장윤성은 그저 실없는 소릴 들은 양 피식 웃고는 나가 버렸다. 싫다, 좋다도 아닌 “갈게.”라는 이도 저도 아닌 말을 남기고. 싫다고 했으면 이유라도 물어봤을 텐데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그 얘긴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정말 장윤성의 형인 것도 아니고 제대로 형 행세를 해 볼 생각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나오니 괜히 더 궁금해졌다. 그까짓 형 소리 한번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누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물가물 눈이 감겨왔다. 요 며칠 잠을 적게 자서 그런 것 같았다. 그제야 달칵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쩍 좁아진 시야에 장윤성이 들어왔다.

“하경….”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던지 장윤성은 날 부르려다 말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지만 벌떡 일어나기엔 몸이 무거웠다. 간신히 눈을 뜬 채 안 잔다는 뜻으로 조금 웃어 보이자 장윤성이 내 눈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들어갈래?”

“응….”

“풍작아, 자러 가자.”

어느새 나를 따라 졸고 있던 풍작이도 장윤성의 말에 부스스한 얼굴로 소파를 내려갔다. 안아주려는지 장윤성이 몸을 기울여 오기에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그는 나를 안아 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11시도 안 됐는데 벌써 졸려?”

이제 막 일을 끝내고 나왔는데 내가 잘 기세라 섭섭하다는 투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억울한 건 내 쪽이었다.

“어제도 늦게 잤잖아.”

그게 누구 때문인데. 나는 탓하듯 말하고는 그를 바짝 끌어안은 채 고개를 기댔다. 이제 잠깐 눈을 감고 있으면 금방 푹신한 침대 위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길다 싶은 시간이 지나도 침대에 닿기는커녕 침실문 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살짝 눈을 떠보니 장윤성은 빙빙 돌면서 거실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뭐 해?”

“재우기 싫어서.”

한 번은 버텨 볼 모양이었다.

“안돼. 평일엔 안 하기로 했어.”

그러는 사이 잠이 조금 깨긴 했지만 순순히 장윤성의 뜻대로 되도록 둘 순 없었다.

“언제부터?”

장윤성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오늘부터?”

“내일부터 그러자.”

“어제도 그래 놓고.”

투덜거리듯 대답하자 장윤성은 나를 소파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잘됐다는 듯이 웃었다.

“깼네.”

“아닌데.”

이미 다 들킨 꼴이었지만 이대로 쉽게 넘어갈 순 없었다. 나는 의미 없는 반항이나마 해 보려 소파에 드러누워 자는 시늉을 했다. 장윤성은 말로 대꾸하는 대신 나를 따라 소파 위로 올라온 것 같았다. 손이 겹쳐지나 싶더니 다음은 입술이었다. 반항이 아니라 허락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볍게 맞대고 떨어졌던 입술이 이번엔 조금 더 깊게 맞닿았다. 보드랍고 몰캉한 혀가 채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도록 밀어 내려 했지만 그렇게 혀가 얽힐수록 조금만, 조금만 더, 하는 욕심이 생길 뿐이었다.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길 반복하고, 장윤성의 손이 내 몸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게 맞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르던 순간이었다.

쾅쾅쾅!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살면서는 좀처럼 들어 본 적 없는 소리라 나는 잠시 입술을 떼고 현관 쪽을 봤다.

“왜?”

장윤성은 듣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어? 아니, 방금….”

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지 않았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윤성이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잘못 들었나. 하긴, 벨이 있는데 굳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키스에 열중하려던 때였다.

쾅쾅쾅, 하더니 이번엔 사람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이번엔 분명하게 들었다. 나는 몸을 붙여 오는 장윤성을 밀어 내고 물었다.

“자, 잠깐, 누구 왔나 봐.”

장윤성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현관 쪽을 봤다. 방해를 받아 조금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시간도 시간이었거니와 우리 집엔 애초에 올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버젓이 있는 벨을 무시하고 문을 두드릴 손님은 더더욱.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희미하게 ‘여어엉’하는 어딘가 낯익은 여자 목소리도. 한밤중의 불청객은 문을 두드리며 취한 듯 뭉개진 발음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한… 지여엉?

“…이거, 혜진이 목소리 아니야?”

이 집을 찾아올 만한 사람 중 여자는 장윤성의 가족과 서혜진뿐이었다. 그렇게 범위를 정하고 보니 서혜진이 확실했다. 떼쓰는 듯한 목소리나, 애타게 한지영을 찾는 것까지.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혹시 방금 키스한 티가 날까 봐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고 있자니 장윤성이 한숨을 쉬고는 머리카락 정리를 도왔다. 그의 몰골이 멀쩡한 걸 보면 나도 크게 흐트러지진 않았을 것 같았다.

자러 가자는 장윤성의 말에 침실까지 들어갔었던 풍작이는 어느새 현관에 나와 있었다. 꼬리를 흔들며 발까지 동동 구르는 걸 보면 풍작이도 아는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서혜진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손에는 편의점 로고가 인쇄된, 꽤 큰 비닐봉지를 들고. 술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었다. 왜 취해서 여길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이르케 늦게 열어어! 팔 빠지는 줄 알았네.”

한밤중에 불쑥 남의 집에 찾아온 주제에 적반하장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혀 멀거니 서 있는 내게 서혜진은 뭐가 잔뜩 든 봉지를 내밀었다.

“선물.”

“선물?”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짐을 받아 들었다. 안에는 짜장라면과 술, 그리고 의도를 알 수 없는 물건과 먹을 것이 섞여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온 모양새였다. 옆에서 흘끔 보던 장윤성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굳이 내가 끓여 주는 짜장라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한 번 집에 초대한 이후, 서혜진은 가끔 짜장라면을 사 들고 놀러 오곤 했다. 사실 짜장라면은 핑계고 서혜진은 그냥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걸 좋아했다. 우리와 얘기하는 것도 풍작이랑 노는 것도.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술에 취해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혜진은 현관에 주저앉아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풍작이를 끌어안았다.

“풍작아아. 나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지이?”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서혜진은 앉아서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풀썩 엎어졌다. 얼떨결에 깔린 풍작이는 그제야 서혜진이 평소답지 않은 걸 깨달았는지 그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풍작이가 발버둥을 치거나 말거나 서혜진은 녀석을 깔아뭉갠 채 아무렇게나 주물럭거렸다. 낑낑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겨우 서혜진의 품을 벗어난 녀석은 푸르르 몸을 털고는 거실 구석에 있는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귀찮다는 뜻이었다. 풍작이가 도망가는 걸 망연한 얼굴로 보던 서혜진은 다시 현관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야, 여기 이러고 누우면 어떡해.”

내가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하자 서혜진이 귀찮은 듯 아우우, 하면서 팔을 휘적거렸다.

“그냥 둬, 하경아. 전화해서 바로 데리고 가라고 하게.”

장윤성은 서혜진의 방문이 영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바닥에 둬. 혜진아, 좀 일어나 봐.”

내가 몇 번 더 어르듯 부르고 나서야 서혜진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거실로 향하더니 다시 소파 위에 풀썩 엎어졌다. 물을 가져와 건네자 녀석은 그제야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신 차렸으면 집에 가.”

서혜진이 물을 마시는 걸 보면서 장윤성이 못마땅한 티를 내며 말했다.

“츠암나! 아직 안 차렸거든?”

“취했으면 집에나 가지, 여긴 왜 와서 이래?”

“오빠 보러 온 거 아니야. 지영 언니…, 아니, 짜장라면 요리사…, 아니…, 이름이 왜 이러케 많아여?”

서혜진은 내 이름을 떠올리려 고민하다가, 결국 날 원망스럽게 봤다. 이름이라고 해 봐야 가명과 본명 두 개뿐인데 멋대로 짜장라면 요리사를 추가해 놓고 내 탓을 한다. 꿍얼꿍얼 뭐라고 중얼거리던 서혜진은 드디어 떠오른 듯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맞다, 건우 선배 형!”

건우 선배?

“건우를 알아?”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진지하게 되묻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알 수도 있는 사이였다. 과는 달라도 둘은 동문이었으니까. 서혜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져. 우리 과 애들 다 알아, 다. 의대 얼굴 수석 이건우…. 오빠가 건우 선배 형이라면서여? 하여간 내가 여기 왜 왔냐면….”

내가 건우 형이라는 건 어디서 들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서혜진은 그사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내가 지인짜 어이가 없어 가지구!”

녀석은 기가 막히고 서럽다는 듯이 소파를 치며 말을 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나는 서혜진의 옆에 앉았다. 장윤성도 별수 없이 근처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은 듯 벌써 따분한 얼굴이었다.

“나아는, 어? 나는 막 이르케 연애가 힘든데, 막 둘만 잘 사겨 막.”

한풀이가 시작되자 장윤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괜히 골치가 아파 나도 이마를 짚었다. 진지하게 들어 보려던 내가 바보였다.

“또 왜 싸웠는데.”

서혜진에게는 꽤 잘 어울리는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건 성인이 된 이후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런지 자주 다투는 편이었다.

“싸운 거 아니고 헤어졌거든여?”

“어, 그래, 이번엔 왜 헤어졌는데?”

벌써 헤어졌다 다시 사귄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별 경험으로 치자면 아주 대선배님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뭐 때문에 헤어졌냐는 질문에 서혜진은 가만히 눈을 굴렸다. 취해서인지 아니면 사소해서인지 몰라도 뭐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둘이 싸우는 이유는 대개 남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사소하고 엉뚱했다. 그러고도 매번 다시 만나는 걸 보면 짝을 잘 찾았다고 해야 할까. 미간을 좁히고 잠시 궁리하던 서혜진은 결국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 아무튼 걔랑 더 안 만날 거예요! 이번엔 진짜!”

그러더니 오늘 헤어졌다는 내용의 노래를 서럽게 부르며 양말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양말은 왜 벗어?”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나는 얼른 양말을 주워 와 건넸다. 하지만 서혜진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기껏 주워 온 양말을 다시 던졌다. 성욱 형의 가게를 그만두고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한 지 1년, 또 이런 주정뱅이 손님을 상대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한숨을 쉬고 다시 양말을 주우려는데 이번엔 현관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이번에야말로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경비 아저씨? 서혜진의 차를 여기까지 운전한 기사? 이 주정뱅이가 오는 길에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벼운 추측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내가 나가 볼게.”

“응.”

장윤성이 나가 본다기에 나는 양말을 주워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얼른 다시 신어. 너희 집 외박도 안 된다며.”

“아닌데? 나 엄마한테 허락받고 온 건데?”

서혜진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그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허락을 받았을 리 없었다. 서혜진이 아니라 서기준도 웬만해서는 외박을 하지 않았으니까.

“허락은 무슨….”

“진짜예여! 여기 오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딱! 와서! 내가! 딱! 윤성이 오빠네 집에 간다고 딱…!”

내가 믿지 않자 서혜진이 억울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뭐?”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 말대로라면 허락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집에 연락을 하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장윤성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서혜진!”

그래서 장윤성에게 이 말을 전하려고 몸을 일으키던 순간, 등 뒤에서 서혜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기준이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쳐들어온 건지 장윤성도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야, 이게 무슨 민폐… 어? 하경 씨?”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에 내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 서기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혜진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네…. 하경 씨 이 시간까지 야근… 하나 봐요? 그러게 윤성이네 말고 우리 회사 오라니까….”

평소처럼 넉살 좋게 말을 하곤 있었지만 서기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흘끔 장윤성의 얼굴을 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장윤성과 내가 이곳에서 함께 산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의 친구들에게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비밀이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장윤성은 계속 서기준에게는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거기에 동의했으니까. 다만 장윤성이 승진 이후 부쩍 바빠진 탓에 조금씩 미뤄 왔을 뿐이었다.

덕분에 서기준은 지금까지 내가 그저 장윤성의 도움을 받아 태원에 입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얼마나 순수하게 믿었는지 서기준은 내가 그의 회사가 아니라 태원에 들어간 걸 종종 섭섭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라고 하기엔 옷차림이 되게 편해 보이네요. 하하….”

서기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야, 야, 서혜진. 좋은 말 할 때 일어나라.”

이를 꽉 문 채 서기준은 서혜진을 무릎으로 툭툭 쳤다. 서혜진은 짜증을 내며 일어났지만 여전히 집에 갈 생각이 없는 양 자세를 고쳐 소파에 앉았을 뿐이었다.

“미안하다. 얘가 원래 취하면 친구네 집 순회하는 버릇이 있어서…. 야, 일어나라고. 근데 혜진이가 여기 온 적 있었어? 어떻게 알고 왔지? 나도 처음 와 보는데….”

대강 생각을 정리했는지 서기준이 장윤성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 동생을 나무라듯 말하고는 있어도 우리를 경계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서혜진과 우리가 어떤 기억을 공유하는지 모르는 서기준에게는 여동생과 두 남자가 같이 있는 이 그림이 수상쩍기 그지없을 것이다.

“몇 번 왔었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장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벼운 목소리였다.

“몇 번이나? 왜?”

왜, 라는 말에 장윤성은 조금 귀찮은 얼굴을 했다. 옛 인연부터 설명하려면 꽤 장황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짜장라면 먹으러 왔다, 짜장라면! 으이구, 여기 이분이 짜장라면 요리사라고!”

결국 대답을 한 건 서혜진이었다. 나를 가리키며 짜장라면 요리사라고 하는 서혜진의 주정에 서기준은 더 영문 모르는 얼굴을 했다.

“아, 그래, 하경 씨는 이 시간에 여기 왜 있는 거예요? 나 지금 너무 당황스러운데.”

서기준에게는 언젠간 털어놓을 일이었으니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하며 운을 띄우려는데 다시 장윤성이 끼어들었다.

“우리 같이 살아.”

“우리? 너랑 하경 씨랑?”

장윤성이 말하는 ‘우리’가 퍽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었던지 서기준은 나와 장윤성을 번갈아 보다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아씨, 오빠 바보야? 둘이 사귄다잖아! 보면 몰라? 아빠가 눈치 없는 놈한텐 일 맡기면 안 된댔는데….”

장윤성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서혜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동생한테 바보라는 소리까지 듣고도 서기준은 잠시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놀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서기준은 다시 장윤성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이야?”

“맞아.”

장윤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에 비해 서기준의 표정은 점점 격양되고 있었다.

“너, 이…!”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인상을 쓰며 장윤성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다시 나를 보고는 삼켰다.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사실 서기준이라면 뭐, 축하까지 바라긴 어렵더라도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단정 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혜진, 일어나. 집에 가게.”

서기준은 흐트러트리듯 제 머리를 털고 서혜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서혜진은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서기준은 봐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음에 마저 얘기하자.”

서혜진을 억지로 부축한 채 장윤성을 지나치면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경멸마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장윤성도 제 친구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하진 못했던지 눈매를 날카롭게 벼른 채 서기준의 속내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간다.”

서기준은 서혜진을 둘러맨 채 집을 나섰다. 쏴아아. 다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 무슨 일 있는 것 같은 목소린데.

“일은 무슨…. 피곤해서 그런가 봐.”

나는 정말 피곤 때문인 척 일부러 하암, 소리를 내며 하품을 했다.

- 그래도 얼마나 좋아. 밤에 잘 수도 있고.

“아, 미안.”

레지던트 1년 차, 수면 부족에 시달릴 녀석 앞에서 하품은 너무 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괜히 힘든 녀석을 놀린 꼴이 될까 얼른 사과했더니 건우가 오히려 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런 뜻이 아니라, 형이 늦게까지 일 안 해서 좋다고.

“언제 적 얘기를 아직도 해.”

- 요즘 내가 이러고 사니까 더 생각나서. 형은 옛날에 어떻게 그러고 살았냐.

건우는 힘들 때마다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고 했다. 우리가 얼굴은 별로 닮지 않았어도 이런 점은 닮은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나도 열심히 공부하는 건우를 떠올리며 새벽길을 걷곤 했으니까.

“고생이 많다.”

그때 내가 했던 고생을 건우가 빚처럼 여기는 건 싫었지만, 그게 지금 녀석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라면 굳이 잊으라 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고르고 고르다 한 말은 언뜻 무심해 보이는 말이었다.

- 고생은. 그래서, 형 별일 없는 거 진짜지?

하지만 그 말조차 쑥스러운지 건우는 얼른 받아넘기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응, 별일은 없는데, 그….”

별일은 아니고 걱정거리가 하나 있긴 했다. 말을 꺼낼까 말까 잠깐 망설이는 사이 커다란 털 뭉치가 불쑥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향긋한 샴푸 냄새와 함께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감에 윽, 소리를 내자 휴대폰 너머에서 건우가 놀란 듯 “형?” 하고 나를 불러 왔다.

“풍작아, 하경이 통화 중이잖아.”

장윤성이 핀잔을 주거나 말거나 막 목욕을 끝낸 풍작이는 기분이 좋은지 내 볼을 마구 핥아 대기 시작했다.

- 형?

“아, 풍작이가 갑자기 달려들….”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황을 설명하려 입을 열던 참에 풍작이의 혀가 입술까지 닿고 말았다. 내가 푸풉, 하고 소리를 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건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장윤성은 그제야 풍작이를 내게서 떼어내듯 안아 들었다. 마저 통화해, 하고 작게 말하면서.

- 풍작이는 여전한가 보네. 윤성이 형도 잘 지내지?

“응. 다들 잘 지내.”

- 다행이다. 형, 나 이제 가 봐야 돼.

“그래, 얼른 가 봐. 시간 나면 또 연락하고.”

- 응. 끊을게.

정말 시간이 별로 없었는지 건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매번 쫓기듯 전화를 끊는 게 아쉬워서 나는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봤다.

“끊었어?”

“응.”

장윤성은 내가 통화를 끊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풍작이를 소파 위에 내려 주었다. 그사이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녀석은 얌전히 내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럼 이제 영화 볼까? 메뉴 주문할래?”

“아이스초코, 큰 사이즈로.”

“다른 건?”

“괜찮아.”

장윤성이 음료를 만들러 간 사이 나는 주변을 대강 정리하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주말을 앞둔 밤, 우리는 영화를 볼 예정이었다. 금요일 밤이라고 특별히 긴 산책을 하고 목욕까지 마친 풍작이는 피곤한지 내 다리에 턱을 올려 두고 꿈뻑꿈뻑 졸기 시작했다.

“기준 씨한테는 연락 없어?”

곧 장윤성이 음료를 갖고 돌아오기에 나는 계속 신경 쓰이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밤, 서기준이 그렇게 다녀간 뒤로 나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응, 아직.”

하지만 정작 내게 컵을 건네는 장윤성의 얼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신경 안 쓰여?”

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장윤성은 그제야 빤한 시선을 마주했다.

“글쎄.”

그러더니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내 곁에 앉았다.

“신경이 쓰인다기보다 좀 이상하지.”

“뭐가?”

“왜 화를 냈을까?”

“그야… 친구의 앞날이 걱정스러워서?”

장윤성의 가족들이 처음 내게 그랬듯이. 하지만 장윤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건 아닐 거야. 분명히 나한테 화를 내다가, 널 보고 참았잖아. 그게 걱정 때문이었다면, 기준이는 내가 아니라 널 걱정한 거겠지.”

“…왜?”

서기준의 심경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서기준은커녕 장윤성조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궁리하다가 다시 나를 보고 웃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더 궁금하다는 투로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쥐었다.

“걱정할 거 없어. 보기보다 괜찮은 놈이니까.”

“응.”

장윤성에게 서기준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꽤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괜히 이 일로 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장윤성과 본 영화는 잔혹한 장면이 많은 스릴러였다. 차라리 귀신이 떼로 나오는 공포 영화가 낫지,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영화는 곤욕스러웠다. 장윤성은 내가 그런 영화를 싫어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본 영화 중에 그런 장르는 드물었으니까.

버젓이 19세 미만 관람 불가 딱지가 붙었음에도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라 장윤성은 내심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차마 보지 말자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일단 같이 보다가 중간쯤 먼저 자러 가겠다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윤성을 끌어안고 보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끝나 있었다.

예전에도 건우가 몇 번, 그런 영화를 틀어 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 번도 그런 영화를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매번 중간에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곤 했으니까. 건우가 무서워서 벌벌 떨었더라면 꾹 참고 자리를 지켰을지도 모르겠지만, 건우까지 무서워했다면 우리 집에서 그런 영화를 틀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장윤성의 뭐가 날 그런 끔찍한 영화를 다 보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어쩐지 처음 그에게 기댔던 날이 생각났다. 아마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밤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그날은 너무 고단했고 장윤성의 체온이 생각보다 따듯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기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닿아 있는 게 생각보다 좋았다. 그 기억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 같다. 내가 생각보다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영화를 다 본 건 역시 후회가 됐다. 잔인한 장면이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지 나는 밤새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다 겨우 눈을 떴을 땐 장윤성뿐 아니라 풍작이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앓는 소리를 심하게 냈다고 했다.

북슬북슬한 풍작이의 털을 쓰다듬고, 장윤성의 굿나잇 키스를 한 번 더 받고 다시 잠이 들었지만, 우습게도 악몽을 이어서 꿨다. 장윤성이 깨워 준 덕에 다시 악몽을 탈출했지만 도저히 다시 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윤성과 풍작이의 위로를 마냥 바라기에는 너무 컴컴한 새벽이었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장윤성도 잘 것 같지가 않아서 일단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다시 불을 끄고 장윤성이 곁에 누운 뒤에야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심장이 아직도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면 또 그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날이 밝을 때까지 눈을 뜨고 있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졸음은 다시 몰려왔다. 잠들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려 했을 때, 따듯한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못 자겠어?”

눈꺼풀이 움찔하는 걸 느꼈는지, 아니면 잠들지 못한 걸 원래 알고 있었는지 장윤성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응….”

별수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불을 켰다. 주변이 환해지자 풍작이도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괜히 봤네, 영화.”

“나도 이럴 줄 몰랐어. 애도 아니고.”

자극적인 영화를 봤다고 잠자리까지 사나울 일인가. 나는 괜히 민망해져 몸을 웅크렸다.

“악몽은 누구나 꿔.”

장윤성은 위로하듯 말했지만 나는 허하게 웃었다. 장윤성이야말로 길고 긴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나를 보며 모로 누워 물었다.

“무슨 꿈 꿨는데?”

“말로 하기도 싫은 꿈….”

다시 상상하기도 싫은 꿈이었다. 장윤성이 위험에 처하는 꿈….

“그래, 그럼 하지 마. 오늘은 그만 자고 얘기나 할까? 졸리면 낮에 잠깐 자면 되잖아.”

내 생각을 대충 눈치챘는지 장윤성은 쉽게 질문을 물리고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괜찮아? 넌 안 졸려?”

“이하경 씨가 괜찮은데 몇 개월이나마 젊은 내가 안 괜찮겠어?”

“이럴 때만…. 그럴 거면 형이라고 부르든가.”

“그건 싫어.”

바로 어제, 아니 이제는 그저께가 된 날, 피식 웃고 돌아서던 장윤성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더니 이번에는 단호하게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아까워서.”

“뭐가 아까운데?”

“네 이름.”

장윤성은 내 손을 찾아 쥐고 반지를 끼는 손가락에 짧게 키스했다.

“이름 석 자로 사람 속을 어지간히 썩였어야지.”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숨겼을까. 장윤성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 털어놓겠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잡고 말을 이었다.

“별장에서 지낼 때, 네 진짜 이름 정말 불러 보고 싶었어. 가끔 멀리서 지영아, 하고 널 부르면, 네 이름이 아니라서 그런지 돌아보질 않더라고. 그때마다 뭐라고 부르면 네가 돌아볼까, 애가 타서.”

아득한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내던 장윤성은 재미있는 기억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혜진이 보내고 했던 고백을 후회하기도 하고.”

“후회?”

“내가 그랬잖아. 네가 이름을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응.”

“그날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도 이름 정도는 들어 둘 걸 그랬나, 혹시 날 좋아하게 됐는데 촌스럽거나 창피한 이름이라 말 못 하고 미루면 어떡하나…, 하는.”

그렇게 씁쓸했던 고백의 뒷이야기가 예상치 못하게 귀여워서 나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기억 돌아오고 나니까 조금 배신감 들더라고. 이름이 예뻐서.”

“그런 소리는 못 들어 봤어.”

여자 이름 같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장윤성은 조금 눈을 굴리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네 이름이 정말 이풍작이었어도 예쁘다고 생각했을 것 같긴 해.”

풍작이라는 소리에 등 뒤에서 풍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녀석도 우리가 떠드는 통에 못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풍작아, 이리 와.”

나와 장윤성 사이의 공간을 툭툭 두드리자 녀석은 냉큼 넘어와 자리를 잡았다. 말만 할 수 있었다면 풍작이도 이름에 대해 한마디 보탰을 텐데. 내가 풍작이를 쓰다듬자 장윤성도 노란 털 위에 손을 얹었다.

“하경아.”

“응?”

문득 부르기에 그의 얼굴을 보자, 장윤성은 그냥 불러 봤다는 듯이 웃었다. 별수 없이 나도 웃었다. 이름 부르는 것만으로도 좋다는데, 그거면 됐다 싶어서.

이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어떤 이야기는 이미 숱하게 했던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또 하고, 또 웃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도 한참, 침대 위를 뒹굴다가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꿈을 꾸지 않고 자다가 휴대폰 벨 소리에 눈을 떴다. 장윤성도 자다 깼는지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어, 건우야.”

졸려서 좀 더 자려고 이불을 끌어 덮던 중에 건우의 이름이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건우야? 하고 물으니 장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아, 하경이 자다가 방금 깼는데. …지금? 어, 알았어. 그래, 와.”

용건이 간단했던지 통화는 비교적 짧게 끝났다.

“건우 온대?”

“지금 1층에서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다는데?”

“벌써?”

건우는 원래 불쑥 찾아오곤 했다. 자기도 시간이 언제 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집에 사람이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니까, 출발하기 바로 전이라도 연락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급한 일이 있었나 했더니 거실에 둔 내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여럿 찍혀 있었다. 내가 받질 않으니 집 앞까지 와서 장윤성에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형,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를 안 받았다고 타박했다.

“폰이 거실에 있었어. 넌 아침부터 웬일이야?”

“어제 형 목소리가 안 좋아 보여서. 정말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왜 그래?”

안색? 당장 내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손으로 볼을 더듬어 봤더니 조금 푸석한 것 같았다.

“아… 잠을 좀 못 자서.”

“왜?”

“그게….”

사정을 대강 설명하려는데 풍작이가 침착한 동작으로 건우에게 다가왔다. 꼬리는 성의껏 흔들고 있지만 펄쩍펄쩍 뛰며 오두방정을 뛰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풍작이는 왜 이래? 어디 아파?”

건우는 풍작이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걔도 잠을 좀 못 자서, 피곤한가 봐.”

“뭐야, 무슨 일이기에 다들 잠을 못 자? 윤성이 형은?”

“왔어?”

아무리 봐도 양반은 아닌지, 장윤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그새 급히 씻었는지 채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면서.

“안녕하세요. 형은… 안 초췌하시네요.”

셋이 함께 사는데 장윤성만 멀끔한 게 신기했던지 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장윤성은 웬만큼 못 자도 얼굴에 티가 나지 않는 축복받은 체질이었다.

“나도 못 잤어. 일단 들어와. 누구 때문에 못 잤는지 말해 줄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윤성은 이미 시선으로 나를 지목한 채 앞장섰다. 건우는 여전히 영문 모를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건우가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기로 했다. 장윤성이 토스터에 빵을 굽겠다기에 나는 그 틈을 타 고양이 세수라도 하려 욕실로 향했다.

손님이 남도 아니고 건우라서 대강 물만 묻히려고 했는데 거울을 보니 그럴 꼴이 아니었다. 머리를 감고 대강 말린 뒤 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 준비는 끝난 듯 말소리만 두런두런 들려오고 있었다.

“형이랑 그걸 봤다고요?”

건우가 조금 놀란 듯이 외쳤다. 장윤성이 기어코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형 분명 야식 사러 나갔을 건데….”

“야식?”

이번엔 장윤성이 궁금한 듯 물었다.

“형 그런 영화 볼 땐 꼭 뭐 먹고 싶다고 하거든요. 사러 간다고 핑계 대고 도망가려고.”

하여간, 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꼭 이런 식이라니까.

“내가 언제.”

나는 시치미를 떼며 다가갔다. 물론 그런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야식을 먹고 싶었던 것도 반쯤은 진심이었다. 거기다 이 이상 장윤성에게 우스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덧붙였다.

“몇 번 그래서 그다음부턴 형 있을 땐 그런 영화 안 봐요.”

“어제는 보기는 잘 봤어.”

악몽을 꾼 게 문제였지. 나도 지지 않고 덧붙였지만 건우는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눈 뜨고 기절한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맞아. 어제 하경이 보기는 잘 봤어.”

계속 우기는 게 안쓰러웠던지 장윤성이 이제야 한마디를 거들어 줬다.

“형, 이러기예요?”

건우는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투덜댔다. 장윤성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대신 미안한 듯 빵이 담긴 접시를 건우의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 말에 건우는 마지못해 빵을 하나 들어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나도 장윤성의 옆자리에 앉아 사과를 한 조각 집어 들었다. 그사이 과일도 깎고 달걀프라이도 한 모양이었다.

내 컵에 주스를 따라 주고 장윤성도 뭔가를 먹으려 포크를 쥐었을 때였다. 익숙한 휴대폰 벨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장윤성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

“아침부터 인기가 넘치네.”

“그러게.”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장윤성은 자기도 의아하다는 듯이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으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화 좀 하고 올게.”

“누군데? 회사 일이야?”

“아니, 기준이.”

“그래, 통화하고 와.”

“먹고 있어.”

장윤성은 휴대폰을 챙겨 들고 거실로 향했다.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건우는 장윤성이 멀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형, 근데 정말 별일 없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일이 있긴 한데 진짜 별일 아니야.”

눈치가 귀신 같은 녀석이라 더 우겨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나는 굳이 숨기지 않기로 했다.

“진짜 별일이 아닌 거야, 나한테 말할 일이 아닌 거야?”

“음… 둘 다?”

장윤성과 서기준 사이의 일이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했고, 건우에게 섣불리 털어놓을 일도 못 됐다.

“윤성이 형은 알고?”

“응.”

“그럼 난 더 안 물을게.”

장윤성이 알고 있다는 소리에 녀석은 의외로 선뜻 물러섰다.

“너 윤성이 되게 믿는다?”

“믿으니까 형 여기에 맡겼지.”

“내가 애냐. 맡기게. 이것도 먹어.”

말하는 중에도 건우가 빵만 꾸역꾸역 먹고 있기에 나는 내 앞의 과일과 주스를 밀어 주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녀석도 나처럼 챙겨 주지 않으면 손에 닿는 대로 먹는 습관이 있었다. 건우가 그러고 있는 걸 보면 장윤성이 왜 매번 내 입에 뭘 못 넣어 줘서 안달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경아.”

건우가 오렌지를 입에 넣고 씹는 둥 마는 둥 삼키고 있을 때 통화를 하러 나갔던 장윤성이 돌아왔다.

“응?”

“기준이가 오늘 저녁에 좀 보자는데, 괜찮아?”

“오늘? 어, 괜찮아.”

건우는 어차피 오래 못 있는다고 못을 박아 둔 상태였다. 저녁쯤이면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더니 장윤성은 알았다는 듯이 눈짓하고 다시 거실로 나섰다. 어, 하경이도 괜찮대, 하고 언뜻 들린 목소리가 다행히 여느 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


진짜배기 무리는 여전히 성욱 형의 가게에 자주 들른다고 했다. 이쯤 하면 서기준도 한결같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장윤성과 그의 친구들이 이곳에서 모일 때마다 나도 따라오곤 했었지만 그마저도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였다. 최근엔 장윤성이 너무 바빠서 도통 나올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 얼굴 까먹겠어요.”

오랜만에 방문한 성욱 형의 가게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반겨 준 건 막내 종민이였다.

“잘 있었어?”

“똑같죠, 뭐. 사장님 창고에 계실 거예요.”

종민이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성욱 형이 있다는 창고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안 보인다고? 이렇게 큰 얼룩이? 야, 내가 시력이 마이너스야, 마이너스. 지금 네 얼굴도 안 보이는데 여기 이 얼룩은 겁나 선명하게 보인다고. 너 같으면, 어? 이런 컵에 한 잔에 몇만 원 하는 술 마시겠냐?”

바 안쪽에서 정호가 유리잔에 얼룩이 남았다고 누군가를 혼내고 있었다. 상대는 모르는 얼굴이지만 유니폼을 입은 걸 보면 새로 들어온 직원인 모양이었다.

“쟤 왜 저래?”

뺀질거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이 저러고 있는 게 우스워서 물었더니 종민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번에 사장님이 2호점 열면 점장 시켜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 뒤로 저래요. 약간 회까닥한 거 같아요.”

“2호점?”

“그냥 회식 때 술 마시다 잠깐 나온 얘기라 잘 모르겠어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정호 형은 좀 진지한 거 같아요.”

종민이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 안쪽 창고 문이 열리더니 성욱 형이 옷을 털며 나왔다.

“형, 저 왔어요.”

내 인사에 뒤늦게 나를 발견한 성욱 형은 반가운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오우, 이 비서님 오셨냐? 잘 지내? 아직 퇴사 예정은 없고?”

“네, 아직은요.”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너 그만둔 이후로 타격이 큰데.”

성욱 형은 매번 내가 없어서 매출이 떨어졌다는 말로 아쉬움을 표현하곤 했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보기엔 여전한 핫 플레이스였다.

“그렇게 비행기 태우셔도 전 아무것도 못 해 드려요.”

“에이.”

성욱 형은 실망한 척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봐서 좋은 눈치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그냥 따라온 거야?”

“아뇨. 기준 씨랑 셋이 보기로 해서요. 가 봐야 해요.”

“그래, 그럼 가서 앉아 있어. 과일이랑 치즈 갖다 줄게.”

“고마워요, 형.”

“오냐.”

가게 식구들과 대강 인사를 나누고 나는 서기준과 장윤성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들은 홀 한구석의 그나마 한갓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어서 와요, 하경 씨.”

서기준은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어딜 봐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자리를 잡자 그는 일단 한잔하자며 테이블 위의 잔 세 개를 채웠다. 서기준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몇 마디 나누고 또 아무렇지 않게 술을 몇 잔 마신 뒤에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혜진이한테 이야기 들었어.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서기준은 장윤성에게 사과했다. 장윤성의 말대로 내게 화를 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뭘 오해했는데?”

장윤성은 화를 내지도, 사과를 받지도 않은 채 그저 궁금한 듯 물었다. 서기준은 다시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리던 그는 잠시간의 고민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하경 씨가 누구 닮아서 그러는 건 줄 알고.”

“아….”

그제야 나는 서기준이 왜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장윤성을 여기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내가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닮았다고 했었으니까. 장윤성이 전 여자 친구와 닮은 얼굴 때문에 나와 사귀는 거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하경 씨.”

그는 내게도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다른 것 때문에 그런 줄 알고.”

그런 이유였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이었다. 지레짐작으로 그를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 뻔한 셈이었다. 서기준은 내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고, 바른 사람이었다. 내가 민망해서 손사래를 치자 서기준은 궁금한 듯 물었다.

“다른 거요? 아, 하경 씨가 남자인 거?”

하지만 알만 하다는 투였다. 그는 스스로도 이상하긴 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놀라긴 했지만… 글쎄요, 그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그보다는 좀, 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네?”

“그날 내가 거기 안 갔으면 계속 말 안 했을 거 아니에요. 둘이 사귄 지 벌써 한참 됐다던데, 혜진이가.”

서기준은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말은 가볍게 하지만 아마 정말 섭섭했을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짠’을 한 번 더 하자며 술잔을 들었다.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다. 서기준이 술병을 들어 장윤성의 잔을 다시 채우면서 말했다.

“이 뻔뻔한 놈이 숨기자고 했을 것 같진 않고.”

장윤성의 잔을 적당히 채운 뒤, 내 잔을 채우는 서기준은 조금 짓궂은 표정이었다.

“하경 씨가 숨기자고 한 거 맞죠? 나는 그래도 우리가 많이 친해진 줄 알았는데… 섭섭하더라고요.”

“그게….”

그런 말이 오가는 사이 술은 잔을 가득 채워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벌주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였다. 주량으로는 비서실 에이스가 된 나도 이 둘의 페이스를 따라가며 마시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이 한 잔으로 끝날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서기준은 내 잔이 비자마자 채워 줄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고 있었지만 마다하기가 어려웠다. 내 손이 잔을 쥐려던 때였다. 불쑥 시야에 들어온 손이 내 잔을 거두어 갔다.

“하경이도 전부터 말하자고 했는데, 내가 바빠져서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장윤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져간 잔을 쉽게 비웠다. 장윤성이 나를 두둔하자 서기준은 얼이 빠진 얼굴로 나와 장윤성을 번갈아 봤다.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리던 서기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렇게 우리는 꽤 빠른 속도로 술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장윤성도 서기준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는지 우리는 자정이 되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장윤성이나 서기준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나는 죽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아마 내가 죽을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한참을 더 마셨을 것이다.

장윤성이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 먼저 계단을 올랐다. 가게 입구에 등을 기대도 세상이 핑핑 돌아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주르륵 미끄러져 앉자 뒤따라 나오던 서기준이 놀란 듯 다가왔다.

“하경 씨, 괜찮아요?”

“네….”

나도 어디 가서 술 못 마신다는 소린 듣지 않는데 장윤성이고 서기준이고 간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서기준이 나를 일으키려는 듯 물었다.

“아뇨…. 윤성이 나올 때까지만 이러고 있을게요.”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서기준이 눈높이를 맞추듯 마주 앉았다.

“신기하네요.”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날 보는데, 정말 신기한 걸 보는 얼굴이었다.

“뭐가요?”

“윤성이가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만 생각했다는 거 말이에요.”

나도 가끔 그게 신기할 때가 있었다. 기억이 있든 없든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장윤성이 그렇게 한결같이 바라본 사람이 나라는 게.

“하경 씨는 어때요?”

“네?”

“하경 씨도, 윤성이 그만큼 좋아해요?”

서기준은 결국 장윤성의 친구였다. 장윤성이 나쁜 마음으로 내게 접근했을까 봐 화를 낸 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걸 막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그럼요. 엄청…, 엄청, 많이…. 아마 제가 더 많이 좋아할 걸요?”

하지만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진 탓인지 기껏 나오는 말이 ‘엄청 많이’뿐이었다. 표현이 지나치게 유치했는지 서기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뒤늦게 민망해져서 얼굴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내가 뱉은 말이 멋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순순히 장윤성을 그만큼이나 좋아한다고, 장윤성이 아닌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하경 씨 이런 성격이었구나.”

서기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내 몸 어디에서 그렇게 뜨거운 열을 만드는 건지 이제는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하경 씨 얼굴 빨개지는 거 처음 봐요.”

그야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놀리는 건 아니고요…. 하경 씨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내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빤히 보자 서기준은 뒤늦게 미안한 듯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그는 제 성에 찰 만큼 웃고 난 뒤였다.

“그래도 잘됐네요. 결국 다시 만나게 돼서.”

“뭐 해?”

서기준이 퍽 따듯한 말을 하던 때였다. 볼일을 마친 장윤성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장윤성이 다가오자 서기준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그쯤 때맞춰 도착한 대리 기사가 주변을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아, 기사님 오셨네. 나 먼저 간다.”

“그래.”

“하경 씨도 다음에 봐요.”

서기준이 내게도 인사를 건넸지만 아직 입을 열 엄두가 나질 않아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서기준이 먼저 출발한 뒤 나는 장윤성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장윤성이 놀란 듯 물었다.

“속 많이 안 좋아? …얼굴이 왜 그래?”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봐. 우리도 가자.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술을 많이 마셔서 얼굴이 빨개졌다는 건 장윤성이 속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과음을 한 건 사실이라 어지러운 척을 하자 장윤성은 일단 넘어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은 고요했다. 장윤성은 내내 궁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기던 풍작이는 킁킁거리며 술 냄새를 맡더니 기겁을 하고 멀찍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며칠 전에 서혜진에게 당한 기억이 아직 선명한 모양이었다.

“풍작아, 이리와.”

똑똑한 녀석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만으로 인사를 마치고 제가 놀던 곳으로 돌아갔다.

“쟤 사춘긴가 봐. 형이랑 뽀뽀도 안 해 주고.”

나는 현관에 걸터앉은 채 투덜댔다. 장윤성은 말없이 채 벗지 못한 내 신발을 벗겨 주고 나를 안아 들었다. 욕실에 데려다주려는 건가 했는데 덜컥 도착한 곳은 침대 위였다.

“아까 기준이랑 무슨 얘기 했어?”

그는 내 어깨를 밀어 나를 침대에 눕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로 가두고 내내 거슬렸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얘길 했길래 얼굴이 그래.”

장윤성이 괜히 그 일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얼굴에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가 장윤성을 좋아하냐는 말 한마디에 속내를 줄줄 뱉어내는 사람이 된 걸까.

“…했다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웅얼 대답했다. 어차피 장윤성이 한 번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응? 하경아, 잘 안 들려.”

장윤성은 내 손등에 볼을 댄 채 다시 물었다. 달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층 진지해져 있었다. 나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버럭 외쳤다.

“내가, 너 어어어어엄청 많이 좋아한다고, 서기준한테 말 해 버렸다고!”

어차피 서기준이라면 장윤성한테 구구절절 전할 게 뻔했다. 하경 씨가 너 엄청, 엄청 많이 좋아한다더라? 하면서. 형편없는 자백에 장윤성도 당황했는지 손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당황한 게 아니라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을 기준이한테 했다고? 네가?”

“말 시키지 마.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니까.”

“하경아, 일단 내 얼굴 좀 봐 봐.”

그는 천천히 내 손을 떼어 내고 눈을 마주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윤성의 손이 내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또 뜨거워졌네.”

그게 별수 없이 우스웠는지 장윤성은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솔직해졌을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을 맞춰 왔다. 바본가. 취했으니까 그렇지. 취하지만 않았더라면 서기준에게 그런 말을 쉽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요즘들어 감정을 숨기는 게 종종 어려웠다. 전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사람들을 대할 때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도 이제는 힘들고 불편한 일이 됐다. 이유는 뻔했다. 장윤성이 만들어 준 일상이 내 단단한 껍데기를 녹여 버린 게 틀림없었다.

“오늘은 좋은 거 가르쳐 줄 생각 없어?”

부드럽게 맞물렸던 입술을 떼고, 장윤성이 뭔가를 기대하듯 물어 왔다. 내가 취하거나 기분이 좋았을 때 가끔 했던 소리를 기억했다가 이렇게 저 좋을 때 쓰곤 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조건을 붙였다.

“형이라고 불러 주면.”

“일단 배워 보고. 마음에 들면 한 번 불러 줄게.”

그는 내 이마에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싫다더니 장윤성도 술김에 인심 쓸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한 번쯤 불러 줄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은 걸 가르쳐 주겠다고 말로만 떠들어 댄 지도 벌써 2년, 이제는 정말 뭐라고 해야 할 때였다. 나는 장윤성을 침대에 앉혀 두고 그 앞에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장윤성은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다려 봐, 오늘은 정말 좋은 거 가르쳐 줄 테니까.”

“기대할게.”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리가 휘청거리는 바람에 바지를 다 벗지도 못한 채 그의 품에 털썩 안기고 말았다.

“불안한데.”

“잠깐 어지러워서 그런 거야.”

내가 투덜거리자 장윤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옷을 벗는 걸 도왔다. 간신히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지고 나는 장윤성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았다. 내가 그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대자 장윤성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괜찮겠어?”

그는 벌써 내가 뭘 하려는지 아는 것 같았다. 셀 수 없이 그와 몸을 섞었지만 나는 아직 입에 그의 것을 넣어 본 적이 없었다. 장윤성처럼 잘해 줄 자신도 없었고, 그의 것을 제대로 마주하기도 어려웠으니까. 그 크기를 직시하면 도저히 몸에 넣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기야 어떻든 그게 내 몸을 숱하게 드나들었던 것을 보면, 입에도 넣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 있게 그의 속옷을 끌어 내리고 대답했다.

“어… 아니.”

당연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막상 드러난 물건이 기억보다 흉흉했다. 나는 아연하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장윤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안 해도.”

“아니야, 해 볼게.”

나는 손으로 그의 것을 잡고 조심스럽게 핥다가 용기를 내 입에 물었다. 아직 완전히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입안이 여유롭진 않았다. 모양을 따라 혀를 움직이다가 조금 더 깊게 그의 것을 삼켰지만 반도 채 들어가지 못한 것 같았다. 별수 없이 입에 넣지 못한 부분을 손에 쥐고 문지르면서 혀를 움직여 보려 애썼다. 하지만 기껏 입안에 넣은 부분마저 부피를 더하는 통에 그마저도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혀를 움직이기는커녕 이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좋은 거고 뭐고 내가 얼마나 엉성한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역시 괜한 일을 한 걸까, 하고 장윤성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장윤성은 묘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는 게 괜히 부끄러워져서 나는 얼른 다시 시선을 내렸다. 느끼는 건가. 느낌이 있는 건가. 나는 어쩐지 조마조마해진 기분으로 다시 혀로 그의 것을 조금씩 핥았다. 이것도 영 감질나는 것 같아 다시 귀두를 쪽쪽 소리 내어 빨았더니 장윤성이 손으로 제 허벅지를 꽉 쥐는 게 보였다. 아, 이건가 봐. 나는 용기를 내서 더 깊이 그의 것을 머금고 혀에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 장윤성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머뭇거리듯 잠시 배회하던 손에 힘이 실렸을 때, 간신히 물고 있던 단단한 살덩이가 목 안쪽 깊숙한 곳을 푹 찔렀다.

“읍…!”

짧게 목이 턱 막히는 소리가 나고, 기침이 켈룩켈룩 터졌다. 장윤성은 놀란 듯 그제야 제 것을 빼냈다. 생각보다 세게 찔렸는지 기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장윤성은 내 팔을 당겨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축축한 턱을 손으로 닦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 아. 나 할 수 있….”

놀라긴 했지만 많이 아픈 것도, 무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기침이 멎으면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에 장윤성은 나를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래.”

그는 한쪽 팔로 내 등을 단단히 받치고 가슴께에 입술을 묻었다.

“아, 잠….”

이제 겨우 기침이 멈췄는데 장윤성은 갑자기 뭐가 그리 급해졌는지 막무가내로 내 몸을 만지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제 다리 위로 올라오라는 듯이 내 한쪽 다리를 당기면서. 나는 못이기는 척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으….”

분명 잇자국이 났을 곳을 혀가 스쳤다. 이제는 몸이 이런 아릿한 통증을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듯 곧 몸이 축축하게 녹는 것 같았다.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진 손이 성급하게 안으로 들어가려 들었다. 아무래도 그 서툰 애무에 장윤성은 제대로 흥분한 것 같았다. 내가 겁을 먹고 허리를 바짝 당기자 장윤성은 심술이 난 듯 옆구리를 깨물었다.

“아, 아파….”

아프다는 소리에 장윤성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도 없이 그저 뭐에 홀린 얼굴이었다.

“자, 잠깐…. 내, 내가 할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아주 약간의 고통이라도 줄이고자 나는 몸을 돌려 장윤성의 품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직접 뒤를 푸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내 손가락을 한 번 입에 넣었다가 어색하게 아래쪽으로 갖다 댔다. 장윤성도 내가 어떻게 할지 궁금한 듯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빤히 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 고맙게도 아래가 활짝 벌어지도록 허벅지를 잡아 주었다.

“으….”

손가락은 생각보다 더 힘을 주고 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내 손가락을 내 안으로 밀어 넣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묘했다. 안은 생각보다 축축했고, 또 좁았다. 이런 곳에 어떻게 저런 걸 넣었지. 나는 등에 닿는 딱딱한 무언가의 크기를 애써 외면하며 장윤성이 했던 대로 손가락을 놀리려 애썼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빤히 보고 있던 장윤성은 또 골이 났는지 어깨에 꾹, 이를 박았다.

“아니, 너는 갑자기…, 으, 뭐에 꽂혀서… 이러, 읏.”

“불은 네가 질러 놓고 왜 내 탓을 해?”

“아… 그럼, 나 잘… 했어?”

조금은 괜찮았나 싶어 묻는 말에 장윤성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그는 아닌 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타입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더라도 못하는 걸 잘한다고 얘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그동안 했던 그 달콤한 말들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소리일 테니까.

“아, 잠깐….”

미적미적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답답했던지 장윤성이 제 손을 내 손등 위로 겹쳐 왔다.

“이대로는 밤새 기다려야할 것 같아서.”

“아, 아니, 아직, 읏, 아직인 거….”

아직이라고 이야기하는데도 장윤성은 입구 주변을 만지작대더니 제 손가락 하나를 굳이 밀어 넣었다.

“아… 읏.”

분명 아플 것 같아서 입술을 미리 깨물었지만 다행히 그저 빠듯한 정도였다. 내 몸이지만 이제는 장윤성이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내 손가락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는데 장윤성의 손가락까지 들어오니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였다. 장윤성의 손가락은 내 손가락을 가르치듯 과감하게 움직였다. 고작 끝마디쯤이나 걸치고 있던 내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가도록 밀었다가, 다시 얕은 곳으로 빠져나와 둥글게 움직였다.

“…흣.”

나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이다 숨소리가 새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아, 잠…, 으.”

세 개나 되는 손가락이 팽팽하게 벌어진 곳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장윤성은 어느새 바짝 서 있는 내 페니스를 쥐고 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선단에는 이미 맑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직접 한다더니, 어디까지 혼자 하려고?”

놀리듯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손가락을 빼지 못하도록 손을 단단히 붙인 건 장윤성이었다.

“으, 아… 네가…, 읏.”

그는 부추기듯 내 페니스를 쥔 손을 움직였다.

“자, 잠깐…. 아, 아직… 하기…, 싫, 으응.”

사정을 하고 나면 몸이 더 민감해지고, 또 그만큼 힘들어지기 마련이었다. 장윤성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래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응하는 몸뚱이가 제멋대로 움찔거리더니, 배 위로 새하얀 액체가 흩뿌려졌다.

“…흐아.”

“이제 좋은 거 할까?”

“어?”

아직 사정감에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지만 장윤성은 숨 고를 틈도 주지 않고 침대에 날 눕혔다.

“좋은 거 가르쳐 준다며.”

어느샌가 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장윤성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으….”

뜨겁고 단단한 게 엉덩이에 닿는 것 같더니 아래가 다시 빠듯하게 벌어졌다.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갔어도 넉넉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만져 보니까, 읏, 어때?”

숨을 참고 묵직한 이물감을 견디는데 장윤성이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뭐, 뭐… 가?”

“여기.”

그는 제 것이 들어간 곳을 가리키듯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흐으… 이상… 이상해…. 축축… 읏, 축축하… 고.”

“난 좋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좁고 축축한 점막이었을 뿐인데 장윤성은 내 소감이 아쉽다는 투였다. 안을 가득 채우던 게 조금 물러나나 싶더니 좀 전보다 더 깊게 들어왔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장윤성이 조금씩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배 속이 그의 것을 삼키려는 듯이 꿀떡거렸다. 배 속이 요동치는 걸 보면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장윤성은 다시 크게 물러났다가 한 번에 깊은 곳까지 불쑥 들어왔다.

“아, 윽…!”

“이렇게 깊게 들어갈 수도 있고.”

아무래도 입으로 했던 게 짜증 날 정도로 감질났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다음부터는 절대 안 할 생각이었다.

내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윤성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덜 풀렸는지 그의 것을 꽉 문 살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밀려들었다가 끌려나가길 반복했다. 조금씩 움직임의 폭이 커지는 것 같았다.

“으… 읏, 으응… 흣!”

이윽고 완전히 몸에서 빠져나간 페니스가 다시 내벽을 긁으며 들어왔다. 매번 방향을 바꿔 찌르듯 들어오는 탓에 배 속 여기저기에 멍이 들 것 같았다. 가끔 지나칠 정도로 세게 부딪쳐 오면 뱃가죽이 그의 페니스 모양대로 불쑥 솟을까 봐 겁이 났다.

“하… 으, 흡.”

찔꺽, 찔꺽 울리던 소리가 점점 빠르게 반복되기 시작했다. 장윤성은 내 골반을 쥐고 제 몸을 바짝 붙였다.

“읏!”

그렇게 바짝 맞붙으면 항상 배 안쪽 어딘가를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윤성은 안쪽의 깊이를 가늠하듯 제 것을 뿌리 끝까지 밀어 넣다가 다시 크게 물러났다. 그러더니 길이라도 만들어 둔 것처럼 빠르게 점막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앗, 아, 아읏, 으, 윽!”

몸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신음으로 흩어졌다.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지고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자꾸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 아, 아으, 흣, 아, 아…! 자, 잠…, 나, 나, 으응…!”

다시 사정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발버둥 쳤지만 허리를 단단히 잡힌 탓에 그저 허우적거리는 꼴밖엔 되지 않았다. 먼저 손을 떼어 내야 할 것 같아 장윤성의 손에 내 손을 얹었지만 떼어 내기는커녕 꽉 쥘 힘조차 없었다.

“으, 자, 잠…, 으, 읏, 으응….”

엉겁결에 손톱을 박아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는 사이 쾌감을 이기지 못한 허리가 높게 들떴다. 사정을 하고 있는데도 장윤성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아, 아, 흣, 나…, 하고, 하, 하고, 읏, 있 으, 읏, 아…!”

잠깐만 멈춰 달라고 애원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 사정이 끝나자 근육이 전부 풀려 버린 것처럼 몸이 흐물거렸다. 팔이 후들거려서 젖은 눈가를 닦을 수조차 없었다. 느껴지는 감각이라고는 장윤성이 멋대로 쑤셔 대고 있는 곳뿐이었다. 빤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움직이던 장윤성이 천천히 몸을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틈을 타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바람에 벌어진 틈으로 뜨듯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장윤성은 다정한 손길로 나를 끌어안으며 채 다 빠지지 않은 그의 것을 다시 꽉 차게 밀어 넣었다.

“조, 조금만 쉬고….”

나는 후들거리는 팔을 그의 어깨에 둘렀다. 힘들긴 해도 관계가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럼. 이렇게 조금만 있다가….”

그는 나를 달래듯 따듯한 손으로 등을 쓸어 주고는 속삭였다.

“좋은 거 더 해요, 형.”


***


입을 열 때마다 앓는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장윤성은 안쓰러운 듯이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먹여 주었다. 나는 지금 아이스크림 스푼을 들 기운조차 없었다. 내일 회사는 갈 수 있을까. 아니 눈은 뜰 수 있을까. 그깟 형 소리 한 번에 수명이 한 10년씩은 빠진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그냥 못 하겠다고 하지.”

싫다는 소리도 못 하게 형, 형 하면서 사람을 구슬린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발뺌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더니 장윤성이 냉큼 아이스크림을 물려 줬다. 그래도 단 게 들어가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아서 나는 일단 아이스크림을 녹여 삼켰다.

“왜 그렇게 형 소리를 듣고 싶어 해?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 주는 동생도 있는데.”

그깟 형 소리 때문에 이 정도로 무리하는 게 이상하긴 했던지 장윤성이 궁금한 듯 물었다. 글쎄, 왜 그랬을까. 나는 멍하게 천장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냥, 들어나 보려고.”

장윤성은 설명이 더 필요한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 악몽 꿨을 때, 그 꿈속에서 네가 날 지키려고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거야. 그러고 나서 눈을 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어. 내 꿈인데 왜 내가 아닌 네가 위험을 자처했을까.”

그는 여전히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다. 현실에서도 몇 번이나 겪은 상황인데 꿈에서라고 다르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 무의식까지 그렇게 생각할 만큼 어느새 내가 너한테 그렇게나 의지하고 있었나 싶더라고.”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장윤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협탁에 올려놓고 내 옆에 모로 누웠다. 악몽을 꾸고 심장이 쿵쾅거리던 그 날처럼. 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너도 나한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번쯤 듣고 싶었나 봐. 형, 하면 왠지 의지가 되는 사람 같잖아.”

의지가 되는 사람. 그건 내가 가장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그리고 또 건우에게. 그래서 은연중에 장윤성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그리고 또 건우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였다. 그리고 장윤성에게도 마찬가지로.

“하경아.”

장윤성은 여전히 보란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네 이름이 그래. 의지가 되고, 내가 사랑하고 싶어지는 이름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아.”

사실은 장윤성이 내 이름을 어떤 마음으로 부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나에게 그렇듯 내 이름은 그에게 특별한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욕심이 났다. 지금보다 더,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싶어서. 하지만 그게 부질없는 일인 것도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을 달리하지 않아도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매 순간 더 뜨겁고 더 간절해졌으니까.

“윤성아.”

나 역시 매 순간 더 짙어진 마음으로 그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이름 그대로의 사람이다.


장윤성.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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