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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바이스-17화 (1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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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내 말에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이경진은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걸려있는 옷을 손으로 착착착 넘기던 이경진이 빠르게 와이셔츠와 정장 한 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떤 자리인지 잘 몰라, 가장 무난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따로 언질 받은 드레스 코드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냥 정장 입고 가라는 소리만. 아무튼 고마워요. 나 타이도 골라줘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훌렁훌렁 옷을 벗고 와이셔츠를 걸쳤다. 이경진이 급하게 뒤를 돌아 넥타이를 찾아 헤맸다.

“타이는 옆 칸 서랍에 있더라고요.”

옷장이 좀 복잡하긴 하지. 나도 어제 하루 종일 뒤져보고서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와이셔츠를 쑤셔 넣어 바지를 입고, 발가락이 허전해서 꼼지락거리다 양말도 주섬주섬 신었다. 정장 재킷을 입고 타이를 매야 하나, 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남색 타이를 꺼내 온 이경진이 그것을 내게 건넸다.

“떙큐, 감사.”

타이를 목에 걸고 길게 내려온 것을 잡아 빙빙 어지럽게 돌리고 있다가 문득 넥타이를 매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반 포기 조로 이경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넥타이의 양 끝을 붙잡아 몇 번 이리저리 돌리더니 훌륭한 매듭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붙잡고 목 아래까지 쭉 올리자 이경진의 넥타이와 같은 모양새가 나왔다.

“제가 매무새를 좀 봐드려도 되겠습니까?”

“와, 네. 제발 봐주세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경진이 바지 안으로 넣은 와이셔츠와 입느라 구겨진 바짓단,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잠가 정리해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이경진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거였는데, 괜히 시간만 보냈다.

“머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머리 뭐 해야 돼요? 나 그냥 이대로 갈 건데.”

차수경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힘이 없는 데다 길이도 살짝 길어서 제멋대로 나풀거렸다. 예전에 만난 차수경은 이런 꼴이 아니었는데, 내가 뭔가 잘못했는지 이리저리 뻗쳐 도련님이 한순간 노숙자 꼴이 되었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삽살개의 개털 같았다.

이걸 뭐 어떻게 해.

치장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는 거나 해봤지 내 손으로 직접 손질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되나? 자꾸 보니까 이것도 자연스럽고 나쁘지 않은데.

내 생각이 전해졌는지 이경진이 방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뭔가를 찾아왔다. 그것을 손에 덜어 살살 비비고는 부스스한 내 머리에 찹찹 발랐다. 이리저리 뻗쳐있던 머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본격적으로 머리를 만지기엔 시간이 늦은 것 같으니, 차분하게만 손봤습니다.”

이 사람,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가지고 싶은 손이야.

눈을 반짝거리며 쳐다보는데 이경진이 정장 재킷을 입혀주고 나서 한숨을 내보냈다. 이제 한시름 놓았구나, 하는 속마음이 전해졌다.

“이제 출발하시죠.”

그래, 이제 가야지. 나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정장 재킷의 밑단을 탁탁 쓸어내렸고, 이경진을 앞세워 일 층으로 내려갔다.

“도련님!”

집을 나서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고용인이 앞을 막아섰다. 이 사람은 다른 고용인들과 좀 다른 게, 집안 내부의 일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다른 고용인들이나 심지어 가족들도 이 사람에게 ‘실장’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렀다. 차림도 회사원처럼 항상 단정한 정장이었고 말투도 깍듯해서 왠지 대하기가 아버지들만큼이나 어려웠다.

“네?”

“저녁 약을 안 드셨습니다. 나가기 전에 드시고 가시죠.”

차 실장은 하얀 접시 위에 놓인 몇 알의 약과 물컵을 내밀었다. 나는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고 약을 집어 입에 넣었다.

“큰 도련님은 곧장 모임 장소로 출발하셨답니다. 위치는 이 기사에게 전달해뒀으니 곧장 가시면 됩니다.”

“어,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빈 그릇과 물컵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가는 차 실장을 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섰다.

이경진은 차를 준비하려 주차장으로 내려갔고, 나는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가며 입 안쪽에 넣어두었던 약을 퉤, 하고 뱉어냈다.

그제 집에 온 뒤부터 아침저녁으로 먹으라고 주는 약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처음 약을 받고 뭐냐고 물었더니 항상 드시던 약이라는 답이 돌아와, 항상 먹던 약이 뭐냐고 물을 수 없어 받아먹는 시늉을 했다.

대충 짐작은 되었다. 차수경이 본인 입으로 먹는 약이 있다고도 했고,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우울증이 치료되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으니 고용인으로서는 평소처럼 약을 챙겨주었을 거다.

그럼 더 먹을 필요가 없는 약이지. 조만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약 복용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정신과에 다시 가서 우울증이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아오든지 해야겠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나서자, 발 빠르게 움직인 이경진이 대문 바로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서비스 아주 칭찬해. 역시 마음은 불편하지만 몸만은 최상으로 편하다니까.

나는 뒷좌석에 올라 푹신푹신한 쿠션을 느끼며 이게 바로 부의 장점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 ∞ ∞

“저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문을 열어주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향해 이경진이 말했다.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건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진짜 못 할 짓이 아닌가.

“됐어요. 오늘은 그만 퇴근하세요.”

“아닙니다. 도련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야 오늘 할 일이 끝납니다.”

“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주차장에서 주야장천 기다리고 있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럼 근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겠습니다.”

“됐어요, 됐어. 진짜 괜찮다니까. 나는 택시 타고 가도 되니까 퇴근하세요.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아래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게 놀겠어요?”

물론 마음 편하게 넥타이 풀고 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경진을 퇴근시키려면 이 정도의 변명은 필요했다.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경진은 잠시 고민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한테는 말 안 할 거니까, 제발 퇴근 좀 하세요. 앞으로 계속 같이 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빡빡하게 굴면 서로 피곤하잖아. 무슨 규칙 같은 거 있어요? 나 엄청 자유분방한 사람이라 규칙 따라가려면 이 기사님이 피곤할 텐데.”

“그럼 오늘은 기다리고, 차차 도련님에게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냐, 그거 아니야. 오늘은 퇴근하고 차차 맞춰가도록 해요. 나 늦은 것 같은데 우리 계속 이렇게 말씨름하고 있을까요?”

내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이경진이 결국 손을 들고 항복을 했다.

이 사람도 고집이 엄청나네. 아버지는 대체 이런 사람들을 어디서 데리고 오는지 모르겠다. 사설 경호업체는 들어봤는데, 무슨 수행원 회사 같은 것도 있나.

“그럼 올라가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아닌데, 난 이 기사님 가는 거 보고 갈 건데.”

“들어가시는 것만 보고 정말 가겠습니다.”

“나 진짜 늦겠다. 우리 그냥 여기 있다가 집에 가겠는데요?”

시간을 확인하며 늦었다는 것을 어필하자 이경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차에 올랐다.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고요. 퇴근하고 잘 쉬었다가 내일 만나요. 오늘 준비 도와줘서 고마웠고.”

“너무 늦으실 것 같으면 연락 주십시오.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늦으면 더더욱 택시 타야지. 집에 있는 사람 불러내면 일찍 퇴근시킨 의미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뻘짓이야.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얼른 가기나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이경진이 차를 몰아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모임 장소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호텔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어마어마한 건물의 위용에 감탄하고, 호텔 내부의 돈지랄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성같이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 모임이 열린다는 층 버튼을 눌렀다. 구겨진 옷을 정리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약간의 긴장과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임 장소로 향하는데 문 앞을 지키는 직원이 나를 막아 세웠다.

뭐 출입증 같은 거 필요한가. 눈을 대록대록 굴리고 있자 직원이 이름을 요구했다.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던 직원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성함이 누락되신 것 같은데…….”

“여기 무슨 회원 전용이에요? 나 오라고 해서 왔는데.”

“어느 분 초대로 오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차백주. 우리 큰형인데. 전화해볼까요? 내가 조금 늦어서 먼저 도착했을 것 같은데.”

차백주가 전화를 받으려나. 문 앞에 세워두는 망신을 주려고 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설마 전화를 안 받지는 않겠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직원을 올려다보며 묻자, 명단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내 안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인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그래도 문 앞에서 기다리는 망신은 겪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직원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한 복도와는 다르게 문을 열자 조금 큰 음악이 들려왔다. 디스코는 아니고 클래식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음악인지를 모르겠다. 시작부터 나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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