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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리는 손으로 신용카드를 내밀었고, 가게 주인은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다. 한껏 긴장하여 목에 힘을 주고 있던 나는 정상적으로 결제 처리되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고객님이 아주 시원하시네. 이렇게 한 번에 깔끔하게 거래하는 건 또 오랜만이에요. 사실 킬로당 구매는 우리도 공장에서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어서, 팔 때도 저렴하게 드리고 있거든요. 다른 곳이랑 비교해봐도 우리보다 싸게 파는 곳은 없을 거야. 구매하시기 전에 이런 말을 안 하는 건 싸게 해준다고 해도 거짓말을 하네, 물건에 이상이 있네 없네 시끄럽게 말이 나와서. 아무튼 오늘 구매 잘하신 거예요.”
정말 싸게 해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일 킬로짜리 골드바를 구매했다는 것에 일단 만족했다. 두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나는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다음 달에도 또 만나면 좋겠네요.”
“다음 달에는 뭘 사시려고?”
가게 주인의 물음에 나는 일 킬로짜리 골드바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손가락질했다. 가게 주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나는 쇼핑백을 들고 총총 가게를 나왔다.
용건이 끝났음을 안 이경진이 주차해놓은 차를 가져왔고, 뒷좌석에 오른 뒤에야 나는 하아, 하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신용카드로 이걸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한도 걸릴까 봐 진짜 불안했는데. 내 카드 한도가 대체 얼마일까요.”
“도련님의 카드 한도는 모르겠지만, 다른 도련님들의 카드에는 한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뭐야, 농담하지 말고.”
“농담은 아니었습니다만, 이제 집으로 가십니까?”
“……한도 없는 카드도 있어요? 진짜? 그럼 내 것도?”
“그렇다고 골드바를 한 번에 사 가시면, 집안 어른들께서 뭔가 조치를 취하시지 않을까요.”
이경진이 슬슬 내 속내를 파악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흥분으로 올라간 어깨를 늘어뜨리고 차분하게 등을 기댔다.
“이 기사님.”
“네.”
“오늘 일 아버지한테 말할 거예요?”
“…….”
“그럼 말할 때, 내가 하나 갖고 싶어서 산 것 같다고 말해줄래요? 아니, 왜 사냐고 물었는데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달에 사실 때는 제가 뭐라고 답해야 좋겠습니까?”
“그때는…… 나한테 금 모으는 취미가 생긴 것 같다고? 뭐 그렇게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수억의 인구 중에서 금 모으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게 그런 취미가 생겼을 수도 있고, 그것의 진위는 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거고.
“진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거 아까 말했었는데. 나중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현금 대신 모아두려고요. 지금은 막 쓸 수 있는 신용카드가 있지만, 이건 내 카드 아니잖아요. 아버지들이 정지시키면 내가 쓸 수 없고, 혹시라도 아버지들이 망하면 나는 먹고살 방도가 없고. 그렇다고 내가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련님이 그 금을 팔아서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경진은 작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내가 막냇동생처럼 마냥 귀엽게만 보이겠지만, 속에 들어와 있는 게 뒷골목을 전전하던 민재희임을 알게 되면 그 생각은 단번에 바뀔 것이다.
민재희의 눈에는 지금 사는 집과 손에 쥔 신용카드가 모래성처럼 보였다. 언제 파도와 바닷바람에 쓸려 사라져버릴지 모를 모래성. 그래서 손에 쥘 수 있는, 실재하는 것이 필요했다. 내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이.
∞ ∞ ∞
“도련님.”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에 이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사람들은 노크도 얼마나 정중한지 모른다. 왠지 모르게 일어서서 맞아야 할 성싶은 기분이 든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차 실장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단정한 옷차림에 단정한 머리, 그리고 차분한 얼굴이다. 그녀는 들고 온 쟁반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약 안 드셨지요? 퇴원하신 후에 여러모로 익숙하지 않으시겠지만, 약은 꼭 챙겨 드셔야죠.”
음, 그 약은 까먹은 게 아니라 필요 없어서 안 먹은 건데.
차 실장이 매번 이렇게 챙겨줄 때마다 먹는 척을 하고 나중에 뱉는 것도 꽤나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차 실장님. 저 약 이제 그만 먹어도 돼요. 그래서 안 먹었어요.”
“약 먹은 후에 기분이 안 좋은 건 이해해요, 도련님. 몸도 늘어지고 머리도 멍하고 그렇죠? 그래도 약은 드셔야 해요. 그때 며칠 괜찮다고 약을 안 드시고서 그런 사고를……. 제가 잘 챙겨 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러니 안 먹는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 안 먹어도 되는데…….”
하지만 차 실장에게는 내 모든 말이 변명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하긴, 며칠 약을 안 먹은 차수경이 자살 소동을 일으켰으니 신뢰가 없을 만도 했다.
“이건 병원에 있을 때 아버지와도 했던 얘기인데. 그럼 제가 아버지께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차 실장님께도 말씀드릴게요. 제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약 먹을 필요가 없어서 그래요. 저 이제 멀쩡하거든요.”
“일단 오늘 약은 드시고, 내일 말씀드려보는 게 어떨까요?”
지금은 기필코 약을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하긴, 이만한 고집은 있어야 이 이상한 집구석에서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집이었다.
“그럼 제가 지금 가서 허락받고 올게요. 얼른 갔다 올게요.”
나는 차 실장을 남겨두고 빠르게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냥 먹는 척하고 뱉을 걸 그랬나. 계단을 통해 일 층으로 내려가며 내 선택을 잠시 후회했다.
저녁 식사 후 뿔뿔이 흩어진 집안 식구들은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혀서 조용했다. 두 아버지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 계시려나, 서재에 계시려나. 어지러운 집 구조를 천천히 떠올리며 아버지들의 침실을 찾아 헤맸다.
덩굴이 조각된 나무 문 앞에 당도하여 옷차림을 점검했다. 흐트러진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꼭 한 번씩 잔소리를 듣는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굳이 한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탈탈 옷자락을 털어서 펴고 노크를 하려는데 문 안쪽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 분 다 침실에 계셨나 보다.
“하지 말아요. 봐야 할 서류가 몇 개 남았어요.”
“잠시 안고만 있자는 건데, 그것도 안 돼? 몇 개 남은 서류는 내일 처리해도 되잖아.”
“그럼 또 일이 밀리잖아요. 더 피곤해져요.”
“요즘 거의 하지도 못했잖아. 한 번만 하자, 응? 한 번만. 고집 피우지 말고.”
“다음에 해요.”
“다음에 언제. 요즘 계속 핑계 대면서 미루기만 하잖아. 수경이 사고 이후로 신경 쓴다고 미루고. 이제는 또다시 일 때문이야? 그럴 거면 미술관 그만둬. 돈은 내가 벌어다 주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미안, 내가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했네. 여보, 화났어? 내가 정말 미안해. 많이 피곤해? 내가 안마 좀 해줄까? 이리 누워봐.”
나름 정중하게 노크를 하려 했는데, 대화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이거 노크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들은 언제나 무뚝뚝한 모습만 보이고, 모임에서 들었던 이사장 할아버지가 오메가 아버지와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에 조금 걱정도 했는데 의외로 아버지들의 관계는 좋은가 보다. 더욱이 예상외였던 건 알파 아버지가 오메가 아버지에게 더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게 오메가 아버지를 좋아하면서 왜 내 병문안은 한번 와보지를 않아. 마누라랑 자식은 별개다 이거냐? 왠지 모르게 불만이 생겼다.
“당신 요즘에 좀 차가워진 것 같아.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전 똑같아요. 당신 기분 탓이에요.”
“정말이야? 요즘 계속 까칠하게 굴고, 잠자리도 계속 피하고 있는데 이것도 기분 탓인가?”
“요즘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있었잖아요. 그건 내가 미안하게 생각해요. 미술관 일 좀 한가해지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는 하룻밤도 양보하지 못하겠다고? 내가 지금 돈 주고 밤 상대 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린 부부잖아!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타인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 타인이 내 부모라는 것에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보지 말아야 할 도색잡지를 훔쳐본 기분이다.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등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데 안에서 딱딱해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해요.”
“너…… 다른 알파라도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뒤로 딴 놈이랑 붙어먹는 거 아니냐고! 미술관 드나드는 놈이 있는 거지? 어? 아니면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없잖아. 똑바로 말해, 누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아니면 이렇게 나를 거부할 리가 없잖아.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원하는 건 다 줬는데 네가 나를 거부해?”
부부관계 거절했다가 살인이라도 나겠다. 저러다 주먹이 오가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르게 불안해져 나도 모르게 쾅쾅, 하고 문을 두드렸다. 정중한 노크 따위는 마음먹은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잊혀져버렸다.
“뭐, 뭐야.”
“아버지, 저예요. 수경이. 들어가도 될까요?”
“내일…….”
“들어오렴.”
격양된 알파 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오메가 아버지의 허락이 들려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침실 안에 어색하게 서 있는 두 아버지를 보았다.
“이 밤에 무슨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