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뭐가 부족해서 이 남자는 애인이 없었지? 회사에 다닌다니 직업도 있고, 외제 차를 끌고 다닐 정도로 재산도 있고, 얼굴도 이 정도면 최상급이고, 게다가 성격까지 좋지 않은가.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그리 생각하다 어쩌면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너무 완벽하다는 걸 아니까 눈에 차는 상대가 없었던 거야. 연애 상대를 고르는 눈이 엄청 까다로운 거지. ……그건 좀 재수 없네.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는 말은 하지 마. 재수 없을 것 같아.”
“그래, 능력이 부족해서 연애를 못 했지.”
“개소리. 부족한 거 하나 없는 놈이 그런 소리 하니까, 그것도 재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날 좋아해주는 사람은 내가 끌리지 않았고. 큰 이유는 아니지.”
왠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이 완벽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지. 아니, 좋아해주는 사람은 끌리지 않았다고 했잖아. 역시 마음에 차는 상대가 없었던 거야. 눈만 오지게 높은 새끼. 과연 이 새끼의 눈에 나는 괜찮게 보이고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아, 됐어. 됐고, 괜찮은 호칭부터 말해봐. 뭐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나이 차가 있으니까 넌 그냥 내 이름 부르면 될 것 같은데, 나는 널 뭐라고 부르지?”
뭐가 있을까. 뭐가 좋을까.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빠져있자 권이강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남은 머리 빠지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팔자 좋게 웃고 있다니 괘씸했다.
“내가 말할 테니까 골라봐. 형, 형씨, 형님, 아저씨, 실장님.”
“아저씨는 제외하고. 실장님은 뭐지? 아는 실장 놈이라도 있는 건가?”
“드라마에서 실장님이라고 많이 부르던데. 실장 아니야? 그럼 뭔데? 사장님? 부장님? 전무님?”
“회사 사람도 아닌데 직함을 따를 필요는 없지.”
그렇긴 하지. 그럼 실장님은 빼고, 아저씨도 싫다니까 그것도 빼주고.
“더 있어. 이건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나온 거야. 허니, 달링, 베이비, 여봉, 자기, 애기야. 아니면 무난하게 이강 씨, 이거 어때?”
입에 붙지는 않지만. 내 말에 권이강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웃으면 화낸다. 나 지금 매우 진지해.”
“……자기.”
얼마나 애를 쓰는지 권이강의 다문 턱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는 한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서야 입을 열어 답했다.
“자기가 취향이었구나.”
“선택지가 하나같이 훌륭해서 어찌나 고르기 힘들던지. 특히나 여봉이 끌리더군.”
“비웃음이나 지우고 말해.”
싸늘한 내 지적에도 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웃고 나서야 진정이 된 권이강이 힐끗 내 눈치를 살폈다.
“수경아, 화났어?”
“아니, 우.리.자.기. 웃는 게 너무 멋있어서 그거 보고 있었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하자 권이강이 급하게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부르니 귀여운데?”
“됐거든요.”
“화내지 말고.”
곧게 뻗은 손이 부드럽게 내 뒷덜미를 감싸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끄러운 손길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 마. 나 지금 헝클어질까 봐 머리도 기대지 못하고 앉아있는 거 안 보여?”
“편히 앉지, 왜?”
“오기 전에 숍에 들러 돈 내고 만든 머리야. 힘 빡 주고 온다고 했잖아.”
“그 정도였어? 어쩐지 헤어스타일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타이밍 늦었어. 처음 봤을 때 칭찬했어야지.”
어디 타이밍을 주워 먹으려 들어. 권이강의 손을 밀어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튼 나 완전무장하고 왔으니까, 넌 나만 믿으면 돼.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든, 나를 이길 수는 없어.”
난 우리 할아버지도 혈압 오르게 만든 사람이야. 물론 오늘은 그런 전투적인 자리가 아니라 차분하고 진지하고 좋은 관계로 이어질 자리가 되어야겠지만.
“다 좋은데 뒤로 넘어가지만 않게 해줬으면 좋겠군.”
딱히 뒤로 넘어가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왜 안 된다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왜? 미리 받아야 할 재산이라도 있어?”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귀찮은 일이 죄다 내게 넘어오거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
“지금보다 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버지가 일을 하나씩 넘기려고 타이밍을 재고 계시거든. 자기가 벌려놓고 자식에게 떠맡기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렇지?”
“남들은 어떻게든 부모가 가진 거 서로 받으려고 난리인데. 이래서 외동이란.”
지금 우리 집만 봐도 그깟 병원 하나 때문에 형제간 분위기가 장난이 아닌데. 이쪽은 넘겨준다고 해도 싫단다. 배가 불렀다니까.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좀 자제하도록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알지? 나는 착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착하게, 친절한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못된 사람에게는 못되게. 내가 받은 대로 돌려준다는 거.”
“그래서 걱정이라는 거지. 우리 아버지 성격이 만만치 않거든. 그리고……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 그냥 그런 양반이구나 하고 무시해.”
만만한 성격의 어른은 없지. 언제나 나이와 가진 것을 내세우며 누르려고 하거든. 어느 정도는 감내할 마음도 있다. 괜히 언성 높이고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은 내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볼게.”
“그렇다고 너무 참지는 말고. 네가 시무룩한 건 싫으니까.”
“우리 자기가 또 그렇게 말해주면, 나 진짜 들이받는다?”
“적당히 해줘, 적당히.”
권이강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매끄럽게 핸들을 돌렸다. 서울에서 외곽으로 빠져 경기도로 들어섰던 차가 어느새 한적해진 부지로 들어섰다. 빽빽한 주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곧게 뻗은 도로를 천천히 달려 도착한 곳은 어마어마한 대문 앞이었다.
“여기야?”
대문 앞에 대충 정차하자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담 너머로 옛날 기와집 같은 지붕 끝이 보였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정장 무리가 우르르 다가와 권이강에게 인사를 했다. 곁에 서 있던 내가 움찔하자 권이강이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으리으리한 한옥 건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위로 층을 올리지 않으니 옆으로 거대해진다. 가뜩이나 땅덩이도 좁은 한국에 과하게 비효율적인 건물이 아닌가 싶지만, 우리 집 부지를 떠올려보면 도긴개긴이긴 했다. 역시 부자들이 문제야.
“자기 아버지는 무슨 양반이야? 청학동에서 살던 분이셔?”
“안은 다 리모델링해서 신식이다. 그냥 한옥 외양을 좋아하시는 것뿐이지.”
“다행이네. 혹시 화장실도 막 구덩이 파놓고 싸는 재래식인가 해서 걱정했잖아.”
앞서 걸으며 안내하던 남자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엄청 외딴곳에 사시네. 혼자 사시는 거야? 집 엄청 넓은데 다 쓰시기는 해? 비효율적인데. 노인네들은 집 욕심이 있는 것 같긴 하더라. 우리 할아버지도 혼자 사는데 엄청 넓은 곳에서 살아. 성격까지 비슷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권이강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앞에 가는 남자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뭔가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회장님, 도련님 오셨습니다.”
고풍스러운 나무 문 앞에 당도한 남자가 조금 큰 목소리로 안쪽을 향해 말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이 들리자 그가 신발을 벗고 올라서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시죠.”
그 과정에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권이강을 따라 신발을 벗고 나무 마루에 올라섰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 옛날 집처럼 꾸미긴 했지만 그의 말처럼 소파와 테이블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로.”
권이강이 나를 안내해 먼저 소파에 앉게 했다. 옆에 바짝 붙어 앉는 그의 존재를 느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잠시. 이야기는 차가 나온 후에 하도록 하세.”
확실히 권이강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닮아있었다. 권이강도 늙으면 저런 얼굴일까. 아버지보다 잘생긴 것 같으니, 늙으면 저보다 더 낫겠지. 늙어도 권이강의 얼굴은 꽤나 볼만할 것 같다.
빤히 쳐다보자 남자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보다 노려보는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고 정장의 사내가 차를 들여왔다. 취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내온 차를 앞에 두고서야 대화의 문이 열렸다.
“제가 인사시키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제 둘이 이야기를 나눌 테니, 너는 빠져있거라. 예상하고 데려온 것이 아니냐.”
“살살하세요, 살살.”
“살살할 것도 없다. 책잡힐 것이 없는 이라면 무엇이 걱정일까.”
왠지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쓸면서 허허, 하고 웃을 것 같은 말투다. 신기하신 분이네.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며 남자가 물었다.
“그래, 내 아들이랑 요즘 만나고 있다지?”
“네.”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고?”
“한 달쯤 됐나. 아마 그쯤 되었을걸요.”
저번 발정기에 만났고, 아직 다음 발정기가 오지 않았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꽤 많이 만났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고개를 끄덕이는데 조금 못마땅한 신음이 들려왔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듣고, 내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내가 몇 가지 질문을 좀 해도 되겠는가.”
“네,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