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75화 (75/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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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아.”

“의심병 환자 같은 새끼. 넌 결혼 같은 거 하지 마. 너랑 결혼할 사람이 불쌍하다. 의처증, 의부증 새끼야.”

“내 말 좀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자, 나를 따라 선 권이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농담한 거야.”

“농담? 개소리하네. 너 가끔 그런 식으로 사람 떠보듯이 말하는 거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너도 네 아버지랑 똑같아. 너희 집 대단한 재산에 내가 침이라도 발랐을까 봐 걱정이라도 돼? 내가 언제 너한테 뭐 해달라고 했어? 금개구린지 금두꺼빈지도 가져가. 너 같은 거 짜증나.”

기껏해야 개구리, 아니, 두꺼비 세 마리 줘놓고 뭘 이용하려고 접근했다는 거야. 그것도 제 손으로 줘놓고. 금두꺼비는 내 카드, 아니, 아버지 카드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벤츠는 운전도 못 해서 차 키가 책상 서랍에서 굴러다니고, 실물도 기껏해야 권이강의 아파트 주차장 한쪽에 놓여있는 걸 딱 한 번 본 게 전부다. 그가 짓고 있다는 집은 설계도를 본 것이 전부고.

생각해보니까 화나잖아. 어차피 명의도 내 명의가 아니라 자기 명의면서. 팔아먹을 수도 없는데 뭐 얼마나 나한테 보탬이 되었다고.

“진짜 짜증나.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아주 벗겨 먹은 줄 알겠네. 야, 금두꺼비 내가 돌려주고 만다. 책상 서랍에 처박아둔 차 키도 가져가. 집에 가자마자 퀵으로 보낼 거야. 나중에 못 받았다는 딴소리나 하지 마.”

씩씩거리며 옷을 주워 입는데 다가온 권이강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포승줄에 묶인 것처럼 두툼한 팔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세게 몸을 뒤틀자,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침대로 내동댕이치듯이 쓰러뜨렸다.

“야!”

“진정해.”

“진정?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뺨 때려놓고 왜 화내냐고 묻는 것보다 더 어이가 없네. 너 그렇게…… 읏.”

열이 뻗쳐서 와다다다 말을 내뱉는 내 몸 위로 파도처럼 몰아치는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분명 공기와는 다른 묵직한 기운이 몸을 눌렀다. 거센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통제를 잃어버린 몸이 들이치는 자극에 제멋대로 뒤틀렸다.

“아, 아아…….”

피부가 간지럽기도 하고 따끔거리기도 했다. 밀착된 공기가 피부 위에 진득이 들러붙어 겹겹이 쌓여 몸을 누르고 있었다. 늪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너, 흐으…… 일부러…….”

몸을 웅크리며 어렵사리 말을 내뱉었다. 흐느끼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옆에 앉은 권이강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쳐주었다.

“발기했군. 흥분한 건지, 본능적인 반응인지 때로 궁금해져. 수경아, 기분이 어때.”

“기분…… 좆, 같아. 씨발.”

혼미해지는 정신에 입 안쪽의 살을 깨물며 짓씹듯이 말을 뱉어내자, 권이강이 눈을 휘며 웃었다. 벌거벗은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쿠퍼액을 지리고 있는 성기 끝에 닿았다.

“하지…….”

“날 좋아한다고 해봐.”

“흐읏, 으…… 싫어.”

“날 사랑한다고 말해.”

귀두를 살살 문지르던 손가락이 손톱을 세워 요도 구멍을 후볐다. 쾌감인지 통증인지 모를 고통에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 흐으…… 으, 하지 마. 아파…….”

“아파?”

다정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는 달콤하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는 성기를 느리게 훑어 올렸다. 짜릿한 자극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이런 거…… 흐윽, 이거 싫어.”

“왜 싫어. 내 페로몬이 좋다며. 달콤하다며.”

하지만 너무 강제적이잖아. 급작스레 흥분하기를 강요당하는 기분이다. 그럴 마음이나 이유나 분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폭력과도 같은 자극이었다. 나를 누르는 페로몬은 진하고 강렬했고, 그래, 폭력적이었다.

“쉬, 울지 마. 기분 좋으면서 왜 울어.”

덮치듯 내 몸을 끌어안고 권이강이 귓가에 속삭였다. 드러난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쏟아졌지만, 그게 정말 다정함인지 다정함을 꾸민 모습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핥으며 그는 내 몸을 껴안아 쓰다듬었고, 폭력적이던 페로몬이 조금씩 잦아들어 희미해졌다. 공기에 녹아든 향수처럼 은은하게 몸을 휘감아 서서히 마음을 안정시키는 그의 페로몬을 느꼈다.

나는 훌쩍거리면서도 권이강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빨고 핥고 잘근거렸다. 부드럽게 감기는 피부에 몸을 문지르고 단단한 등을 껴안았다.

“개새끼.”

사랑을 담아 욕설을 날려주자, 마주하고 있던 입술 틈으로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강간당하는 기분이야. 기분 좆같아.”

“내 몸을 끌어안고 할 소리는 아니지.”

“너 처음에 그랬어. 페로몬에 휩쓸려 관계 맺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배려해야 한다고. 그건 폭력이고 강간이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말한 주제에 지금 날 페로몬으로 짓눌렀잖아.”

그땐 페로몬이고 발정기고 그냥 같이 흥분해서 떡 쳤으면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싶었는데, 당해보니 알겠다.

이제야 본인이 당해보지도 않고 남을 이해하고 동감한다는 말이 얼마나 개소리인지 알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 내 기분을 이해한다고 말하면, 일단 그 사람의 상황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어주고 느껴보라고 해야겠다.

“그랬군. ……확실히 내가 그랬지.”

“사람 잘못 봤어. 너 안 다정해. 다정하게 웃고 말한다고 다정한 게 아니었어. 너 가끔 사람 정떨어지게 말하고, 지금같이 아닌 척 폭력적으로 굴기도 하고.”

말하다 보니 서러워져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으, 하고 터지는 울음을 힘겹게 삼키자 미안해, 하고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잘못했어.”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또 씨발 속도 없이 그냥 넘어갈 내가 뻔해서 더욱 서러워졌다.

“너 하나도 안 좋아.”

“수경아, 울지 마. 잘못했어. 응?”

마주하려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수그려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뜨거워진 눈가를 단단한 어깨에 문지르며 눈물을 닦자, 그는 땀으로 젖은 내 목덜미와 귓가에 연신 입맞춤을 퍼부었다.

“아직도 몸이 따끔거려. 아파.”

“페로몬 거뒀어. 괜찮아질 거다. 이제 아프지 않지?”

아프다고 방금 말했는데 무슨 개소리야.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저 좋을 대로 지껄이고 있다. 찔끔 눈물을 흘리자 권이강이 뜨겁게 열이 오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앞으로 그거 하지 마.”

“왜…… 내 페로몬이 싫어졌나?”

“몸이 너무 따끔거리고 아파. 정신도 못 차리겠고. 그런 식으로 상황 무마시키는 것도 싫어. 네가 잘못해놓고 내가 화내니까 힘으로 억누르는 거랑 뭐가 달라.”

“그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잘못했어. 그 한마디 내뱉는 것을 어려워하던 남자가 이제는 사랑을 고백하듯이 달콤하게 목을 울리며 말을 한다. 이 새끼 낯짝이 꽤나 두꺼워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온몸에 바늘이 꽂히는 기분이었어. 정신이 아득해져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찔하고.”

“페로몬에 더 예민해진 것 같군.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도 같아. 평소에도 가끔 뭔가 느껴질 때가 있거든. 음식 냄새인지 꽃냄새인지 그 엇비슷한 것들. 희미하긴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나 봐, 페로몬이라는 거.”

코를 훌쩍이면서도 조금 안정이 되어 권이강의 뒷머리를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꼬며 말했다. 방금까지 개새끼, 소 새끼 욕을 해댔는데 이렇게 품에 안겨서 훌쩍거리고 있는 내 꼬라지가 한심했다.

“짜증나.”

“왜.”

“너 때문에. 나 분명히 화내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속도 없이 또 끌어안고 있고. 억울해.”

“미안해.”

“진심이 안 느껴져. 사과에 영혼이 없어.”

몇 분 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 정도 들었더니 권이강의 새로운 입버릇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내 타박에 그가 목을 울려 웃었다.

“말 밉게 한 것도 미안하고, 페로몬 쏟아낸 것도 미안하고, 충분히 화내지 못하게 한 것도 미안하고. 울려서 미안하다.”

이번에는 조금 고민하고 나름 영혼을 담은 사과가 돌아왔다.

“너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람 의심해? 나 만날 때마다 속으로 그런 생각 하고 있었던 거지? 준 건 개뿔도 없으면서. 뭐나 뜯어먹고 그런 의심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끔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결국 네 진심에 의문이 들지. 네 말처럼 의심병인지도 모르고.”

얘 진짜 문제 있나 봐. 과거에 만났던 사람에 대해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궁금해졌다. 진짜 만나는 사람이 없었는지, 혹시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헤어졌던 건 아닌지.

“너희 집 뭐 해? 너희 아버지 뭐 하시는데? 너 회사 어디야? 얼마나 잘난 집안에 얼마나 돈이 많은데 그런 피해 의식 가지고 살아?”

“그걸 네가 모른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내 부모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알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도 기억 못 했을 거야. 네가 무슨 얼굴만 보면 다 아는 유명인이야? 대통령이라도 돼? 기껏해야 부자들 중의 한 명이면서, 너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혼자 잘난 척해?”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얼굴을 알까 말까 하는데, 어느 회사 회장도 아니고 회장 아들내미 얼굴을 내가 어떻게 알아.

“생각해보니 그렇군.”

“생각해보니 그런 게 아니지. 한국 사람 백 명을 뽑아놓고 물어보면 그중 구십구 명은 너 모를 거야. 어쩌면 백 명 다 널 모를 수도 있고. 잘난 척 좀 그만해. 듣는 사람이 더 쪽팔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반성하지.”

전혀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 해. 그땐 진짜 안 봐줘. 준 것도 없는 새끼가 그따위 소리 하는 거 제일 꼴사나워. 그런 의심 하려면 일단 뭐나 주고 말해. 이 아파트라든가, 강남 땅이라든가, 건물이라든가 그런 거 명의부터 내 앞으로 돌려놓고.”

내 지적에 그가 몸을 떨며 웃어댔다. 아아, 하고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그가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짓고 있는 집, 완공되면 네 명의로 돌려놓으려고 했는데. 오래 걸릴 것 같아 안타깝군.”

“그래, 그런 거. 일단 명의부터 바꿔놓고 말해. 그럼 아니꼬워도 한 번은 참아볼 테니까.”

금두꺼비 세 마리로 그딴 소리 하면 화나. 의심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내 능력으로 사지 못하는 걸 안겨주고 해. 내 지적에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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