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91화 (91/170)

91

“일어나.”

침대와 한 몸이 된 듯 눌어붙은 내 머리 위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차수경.”

쨍한 목소리에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본드로 붙여둔 것처럼 달라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째 누워있었다고 들었다. 식사 자리에도 안 나오고, 말도 없이 수업도 빠지고, ……끼니도 거른 것 같구나.”

협탁 위에 떡이 된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희미한 시야에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약간의 어지러움 뒤에 겨우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엔…… 둘째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요.”

“마음이 안 좋은 건 아니고?”

꿰뚫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면 저 사람이 뭔가를 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아무 감정 없는 눈동자는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투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할 말 없니.”

“무슨 말이요?”

“글쎄, 네가 감추고 있는 것?”

“너무 많아서 뭔지를 모르겠네.”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과하게 누워있었더니 몸이 균형 잡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비틀거리다 털썩, 침대에 주저앉자 아버지가 다시 혀를 찼다.

“씻고 나오렴. 가야 할 곳이 있다만, 먼저 식사부터 해야겠구나.”

텅 빈 위장이 들러붙어 꼬르륵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온몸의 장기가 수분을 빼앗겨 바짝 말라 있었다.

멍하게 앉은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가 내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서 씻고 나오라는 재촉이다. 귀찮은데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

“어딜 가야 하는데요.”

“씻고 내려오렴.”

꼭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답은 제대로 안 해주지. 쌩하니 나가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떡 진 머리를 감고 쉰내가 나는 몸을 씻고 양치도 하고. 그러고 나니 굳어있던 몸에서 천천히 혈액이 순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밥을 먹기가 껄끄러웠는데 다행히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죽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간은 대충 열 시. 가족들은 출근을 했는지 조용했다. 오메가 아버지가 출근도 미루고 나를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이 되지 않아 조금 두려워졌다.

“먹으렴.”

여유롭게 커피를 손에 든 아버지가 죽을 가리켰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자리에 앉아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음식이 들어가자 뒤늦게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냈다.

“그래서, 어디 간다고요?”

“몸이 안 좋은 거면 병원부터 가고.”

“좀 쉬었더니 몸은 괜찮아졌어요.”

내 변명에 아버지는 코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임을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몸이 안 좋았다는 변명을 거두지 않았다.

“마사지를 받으러 갈 거란다. 피부 관리도 받아야겠고, 머리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다 필요하겠구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찬찬히 훑어본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체적으로’에 강세를 두어 말했다.

“웬 마사지? 우리가 같이 마사지 받으러 다니는 친한 부자 관계였어요?”

남자 둘이 나란히 손잡고 마사지 받으러 가는 모습을 떠올리자 닭살부터 돋았다. 이게 나름 편견이라는 거 알지만, 편견이 엄청 나쁜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너무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잖아.

“이번 주 토요일로 잡혔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관리를 받기엔 빠듯하지만 어쩔 수 없지.”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을 더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대충 흘려 넘기기에는 뭔가 찝찝한 아버지의 말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뱉어내고 입을 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뭐가 잡혀요?”

“네 선.”

아, 내 선. 내가 나가야 하는 선 자리. 그게 나랑 상의도 없이 잡혀서 불과 이틀 전에 이렇게 통보를 해주시는구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고용인이 가져온 죽을 후루룩후루룩 급하게 비워내고 물로 입을 헹궜다.

“난 진짜…… 이 집구석에는 도통 적응이 안 되네요.”

“입조심!”

“아니, 그렇잖아요. 나랑 상의도 없이,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통보할 일은 아니잖아요? 정말 내 의견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잖아.”

“그래도 나는 네가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하루빨리 이곳을 나가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넌 이곳을 좋아하지도 않잖니.”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도피성 결혼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이상한 건 둘째 치고 말이 안 되지. 그럴 거면 그냥 독립을 하겠죠.”

돈이 없는 집구석도 아니고. 자식 전셋집 하나 마련해줄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 어려우면 내가 골드바를 팔아서 돈을 좀 마련해보고. 권이강이 준 금두꺼비를 쓸 일이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것까지 보태면 서울에 전세 하나 못 얻을까.

“네 아버지가 그걸 허락하실 것 같니?”

“허락 못 하면요? 내 인생인데, 내가 독립하는 걸 왜 아버지가 허락해요? 필요하면 내가 하는 거지. 아무튼 독립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 잡혔다는 선 자리. 그거 나 안 나가요.”

“수경아.”

“그렇게 부르셔도 안 나가요.”

두어 달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해놓고 이런 식으로 통보하면 누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나? 내 성격 뻔히 알고 겪을 만큼 겪어본 사람이 잘도 통보할 생각을 했다.

약속을 잡아놨든 아니든 나는 나갈 생각도 없었고, 내 멱살을 잡아서 끌고 나간다고 해도 거기서 선선히 웃으며 맞선을 볼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들 참 이상하셔. 이렇게 통보해놓으면 제가 나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내 성격에? 내가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자식이었나?”

“언젠가는 선을 보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게 두어 달 뒤라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니.”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두어 달 뒤로 미뤄도 달라지지 않을 거 왜 당장 못 시켜서 안달인데요? 정말 나 치워버리고 싶은 거예요?”

“네 아버지는 여러 이유로 서두르시는 것 같고,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란다.”

주변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을 하면 뭐해? 정작 당사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당사자의 생각이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뺨을 문지르는데 며칠 폐인처럼 살았다고 손끝에 닿는 피부가 거칠거칠했다.

“피부가 거지 같기는 하네. 일단 마사지는 받으러 가죠. 피부 관리인지 뭔지도 받아보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받아보자고요.”

물론 그러고 선 자리에 나가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뒷말은 깔끔하게 날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마사지 같은 거 받아보겠어. 내 발로 걸어서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이 기회에 아버지 따라서 한번 가보면 좋지.

선 자리가 잡혔다는 말에 불퉁거리던 내가 금세 선선히 마사지를 받으러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 차림으로 가실 거예요? 전 옷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보세요?”

“네가 선선히 따라나서겠다니 이상해서 그렇구나.”

“뭘 또 이상해. 하라는 거 하겠다는 것도 이상하다시네. 옷이나 입고 내려올게요.”

내가 파악하기 쉬운 인간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예민한 감을 가지고 계신 건지. 내 구린 속내를 짐작한다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옷장에서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꺼내 입고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찾아 버튼을 눌렀는데 액정이 까맸다. 며칠 던져두었다고 배터리가 닳아 꺼진 모양이다. 가는 길에라도 충전해야겠다.

죽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계단을 뛰듯이 내려왔다.

∞ ∞ ∞

역시 돈이 좋긴 좋아.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버석버석하던 피부는 물이 올라 탱글탱글해졌고, 거칠하던 얼굴도 매끄러워졌다. 손가락으로 뺨을 가볍게 쥐었다 놓으며 관리받기 전과 관리받은 후의 급격한 변화를 재차 확인했다.

“와, 씨. 이래서 돈을 처바르나 봐요.”

생각해보니까 아까 무슨 꿀에 금가루 섞어서 발라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단어 그대로 돈을 처발랐던 거다. 샤워하면서 다 씻겨 나갔을 금가루가 아까워졌다.

뭔가를 치덕치덕 바르고 둘둘 싸맸던 머리카락도 씻고 말리고 손질을 받자 귓가에서 찰랑거렸다. 두피는 대패로 밀어낸 것처럼 가볍고 시원했으며 머리카락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안 감아서 개기름이 흐르는 머리카락과는 차원이 다른 윤기였다.

마지막으로 보습을 위해 온몸에 뭔가를 발라줬는데 끈적거림이 없이 기분 좋은 향만 남겼고, 손톱과 발톱마저도 타인의 손으로 잘리고 다듬어져 매끈매끈했다.

진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관리였다.

이 정도면 돈 낼 만하지. 내 돈 내고 받고 싶지는 않지만.

“만족스러운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자주 오시나 봐요?”

“그리 자주는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단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돈을 처발랐던 모양이다. 본판도 중요하지만, 역시 돈의 힘도 중요한 거였다.

“마사지 받았더니 몸도 풀어지는 것 같고. 확실히 좋긴 좋네요.”

“나쁘지 않았다면 됐다. 예약 걸어둘 테니 내일은 혼자 오도록 하고. 원한다면 회원권을 끊어주마.”

“네, 뭐든 해주시면 좋죠.”

내 돈 내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남이 해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다. 데스크에서 뭔가를 말하며 시원하게 카드를 긁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