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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병원장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얌전히 기다려주십시오.”
“들었죠, 경찰관 아저씨들? 이 모든 걸 사주한 게 아버지라고 합니다. 참고로 제 아버지는 호산 병원 원장입니다. 같이 잡아가주세요.”
괜히 한마디 내뱉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경호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등 뒤에서 대문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터벅터벅 돌계단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권이강이 벌써 도착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굳은 얼굴로 올라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 마주치려고 했는데 타이밍 참 안 좋다.
“너 뭐 하고 있는 거냐.”
배 실장을 뒤에 달고 계단을 올라온 아버지가 내 앞에 서서 물었다.
“납치 및 감금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요. 증거는 남겨야죠.”
“이 또라이 같은 놈이.”
“자식한테 또라이가 뭡니까, 또라이가. 교양 넘치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믿기질 않네요.”
“당장 들어가.”
“저는 나갈 건데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얼른 하세요. 듣고 나가게.”
지금 이 자리에서 300자 정도로 요약해서 말을 하면 들어줄 용의는 있다. 그런 뜻으로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내 캐리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짐 싸 들고 집이라도 나갈 생각이냐.”
“우리 아버지 눈치도 빠르셔. 한 번 겪어본 일이라 익숙하신가. 어때요. ……삼십오 년 전의 일이 떠오르세요?”
“너! 기어코 그놈이 네게 말을 한 모양이구나!”
“참 창피한 일이죠.”
당연히 내가 창피한 일은 아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창피할 일이지. 그보다 죄책감을 먼저 느껴야 하겠지만, 죄책감을 느낄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걸 듣고도 그놈을 따라가겠다고?”
“덕분에 호적 깨끗하잖아요. 걸릴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이, 이, 이 미친놈이…….”
손을 들어 때리려는 걸 뒷걸음질 쳐 피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손버릇 참 나쁘셔.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막 손 올리고 그러면 안 돼요. 요즘 어떤 시대인데 자식이라고 막 때립니까? 참고로 저번에 때리신 거 사진으로 남겨뒀어요. 시간 지나니까 멍까지 올라오더라고요. 이거 보이시죠?”
광대 위에 희미하게 남은 멍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저 이 집에서 안 나오면 신고하라고 권이강한테 사진 보내뒀어요. 가정폭력에 감금. 그렇게 맞고 나갔는데 제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기어들어왔다고 생각하세요?”
대체 자식을 얼마나 물로 보고 있는 거야. 때리면 얌전히 맞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요즘 애완동물도 그렇게는 안 키운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하물며 자식새끼를 자기 마음대로 키울 생각을 하다니, 인생 참 편하게 사셨네.
“하실 말씀 없으신 것 같은데, 전 그만 가볼게요. 딱히 용건도 없으면서 왜 사람 붙잡고 계세요.”
시간이 금이라는 말도 모르시나. 투덜거리며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당기는데 아버지가 캐리어를 발로 걷어찼다. 손에서 빠져나간 캐리어가 기울어져 바닥으로 넘어졌다.
“낳아서 이제껏 먹이고 입히고 키워놨더니, 부모한테 뭐? 폭행에 감금? 고작 그깟 놈한테 홀려서 가족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냐?”
“누가 들으면 가족애가 엄청난 줄 알겠네. 초상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은 자식 급하게 팔아먹으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제일 비싸게 사 갈 놈으로 골라왔잖아요. 대체 뭘 더 바라시는 거예요? 적당히 좀 하시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네가 지금껏 누리고 살던 것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냐. 누릴 거 다 누리고 한다는 말이, 뭐?”
이런 말 나올 줄 뻔히 알긴 했지만, 나도 억울한 게 나는 겨우 서너 달 누린 것밖에 없어요. 이십 년 가까이 먹이고 입히고 키운 차수경은 진즉에 죽었다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말 잘 듣는 자식으로 살아드렸잖아요. 뭐가 더 필요하세요? 나 키우는 데 들어간 돈을 토해내기라도 해요?”
“나갈 거면 몸뚱이만 나가라. 네가 누리는 것, 네가 입고 있는 옷, 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 어느 것 하나 네 돈 들어간 것이 있긴 한 줄 알아?”
와, 치사하게 나오시네. 그럼 오메가 아버지 돈 들어간 건 따로 빼야 하지 않아? 끝까지 치사하게 나가볼까 하다가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포기했다.
“참 쪼잔하게 구시네. 네, 안 가져갑니다. 안 가져가요. 이 캐리어도 놓고 갈 거고. 또 뭐요. 입고 있는 옷? 벗고 갑니다.”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보란 듯이 코트를 벗었다. 재킷도 벗고, 셔츠도 벗고, 안에 입고 있던 얇은 티마저 벗어 던졌다. 훌러덩 내보이는 반라에 아버지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아, 이 가방은 제가 며칠 전에 내 아버지 카드로 긁은 거니까 챙겨 갑니다. 지갑은 누구 카드로 샀는지 모르겠네.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 내 아버지 카드랑 신분증만 있으면 되지.”
신분증과 오메가 아버지 카드만 빼서 가방에 챙겨 넣고, 지갑째로 알파 아버지의 발밑에 던졌다.
“나머지도 아버지가 사주신 거예요? 신발? 놓고 갈게요. 양말도 벗고 가고. 바지에 허리띠도 놓고 갑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양말도 벗었다. 맨발로 정원에 서서 허리띠를 풀자 아버지의 미간은 더욱 찡그려졌다. 어디까지 가나 보고 싶으신 모양인데, 나 같은 놈은 완전 끝까지 갈 놈이거든.
지퍼를 내리고 바지마저 훌러덩 벗어 던졌다. 휑한 몸뚱이에 서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아버지. 내 빤스도 사주셨어요?”
속옷 하나만 입고 서 있는 내 모습에 아버지가 입을 쩍 벌렸다. 기가 막혀서 소리도 나오지 않는지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입술을 닫고 침음을 흘린다.
“사주셨어요, 안 사주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말이 없어서, 결국 보란 듯이 속옷을 아래로 내렸다.
“그만!”
터져 나오는 외침에 속옷이 엉덩이 아래에 살짝 걸쳤다.
“집안 망신을 시키는구나.”
“벗고 가라고 한 건 아버지셨는데요.”
“뭐가 어째?”
“자꾸 억지 부리지 마세요. 사람 피곤하게 만드시네. 이거 벗고 시원하게 가겠습니다.”
아버지에게나 이 집 경호원들에게나 내 이미지는 이미 망나니고, 여기서 끝도 없이 말싸움을 벌이느니 그냥 속 시원히 벗고 나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가방을 들어 중요 부위를 가리고 속옷을 쑥 끌어 내렸다. 허공으로 훌쩍 떠오른 속옷이 아버지 근처에 풀썩 떨어졌다.
“참 좋은 경험 했네요. 경호원분들도 어디 가서 못 볼 구경하셨네. 아주 두고두고 회자되시겠어요, 아버지.”
이제 정말 용건이 끝난 터라 가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휑한 엉덩이가 아버지의 시야에 훤히 보이겠지만, 이미 벗은 몸뚱이를 가릴 방법은 없었다.
“뭐 하고 있어! 저 미친놈 안 붙잡고.”
“잡기만 해봐. 내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봤으면, 조심하는 게 좋지 않아요? 지금 나 붙잡으면 성추행까지 합쳐서 고소할 겁니다.”
머리채를 붙잡지 않는 이상, 어디를 붙잡든 맨살이다. 머리채를 잡으면 폭행으로 신고할 거고, 피부에 닿으면 성추행으로 신고할 거다.
나는 당당하게 어깨와 허리를 펴고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보면 당당한 어깨보다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시야를 더럽히겠지만.
열불이 나는지 알파 아버지는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 배 실장이 초조하게 내 근처를 배회했지만 섣불리 내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도련님.”
“배 실장님. 내 꼬추 보고 싶어서 지금 서성이는 거예요? 가방 내려줘요?”
같은 남자의 꼬추 따위 보고 싶지 않겠지. 내 말에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배 실장을 보며 낄낄거렸다.
모쪼록 권이강이 와 있기를 바라며 당당하게 대문을 열어젖히자, 마음이 통한 것처럼 떡하니 차를 대놓고 기다리던 권이강이 내 꼴을 보고 얼어붙었다.
“너, 지금 그게…….”
“일단 출발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이 골목은 행인이 뜸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이 꼴을 볼지도 몰라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나도 수치를 아는 사람이니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지적하지 말고 일단 차에 탔으면 좋겠다. 급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데 배 실장이 내 팔을 잡아 붙들었다.
“도련님!”
“아 좀 놔요. 남의 예민한 살은 왜 만지고 그래. 왜 막 남의 살을 더듬어요? 배 실장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집으로 들어가시죠.”
“싫다니까. 얼른 놔요. 내 꼬추 만지지 말라고.”
“제가 언제 만졌…….”
크게 소리를 지르자 배 실장이 덩달아 놀란 얼굴을 했다. 다가온 권이강이 배 실장의 손을 떼어내 강하게 떠밀었다.
“어서 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타려고 했다. 냅다 조수석에 올라 힘차게 문을 닫았다.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배 실장의 모습이 보였지만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너 그게 무슨 꼴이야.”
“내 돈으로 산 거 하나도 없다고 다 놓고 가라잖아. 그래서 다 벗어주고 나왔지.”
운전석에 탄 권이강이 차를 출발시키며 조금 화가 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어쨌거나 당당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나왔는데. 나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담요나 그런 거 없어? 이 차 선팅되어있던가? 밖에서 다 보이는 거 아니지?”
“일단 이거 두르고 있어. 가는 길에 뭐라도 사야겠다.”
정장 재킷을 벗어 내게 던져준 권이강이 빠르게 차를 몰았다. 알몸에 정장 재킷만 걸치고 있으니 변태가 된 기분이다.
새삼스럽게 별스러운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알몸으로 활보하는 건 민재희일 때도 안 했던 짓인데. 어째 차수경으로 더 막장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