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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런 이야기를 듣자고 비싼 밥 먹고 달려왔네.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했지만요.”
“수경아. 네 편이 있다는 건 중요한 거다. 나는 네 생각을 해서 말해주는 건데, 그런 식의 태도는 실망스럽구나. 네 아버지도 좋아하지 않으실…….”
“내 아버지 걱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고요. 내 편은 원래부터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이 모양이지. 언제는 내 편이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
차수경의 편이 없었기에 걔가 죽은 거야.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고. 가족 중의 누구 하나라도 걔를 돌아봐 줬으면 걔가 그렇게 죽었을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차수경의 편인 척하는 건 사양이다.
단호한 내 태도에 큰형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큰형의 옆에 달라붙어 있던 여자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더니 슬쩍 자리를 비웠다가 나타났다.
“분위기 왜 이래요? 술도 한 잔씩 하고, 좋은 거도 하고. 재미있게 놀자고요. 릴렉스, 릴렉스.”
“…….”
참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다.
널찍한 쟁반에 하얀 가루를 쏟아낸 여자가 보란 듯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금 그거 꺼낼 타이밍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거 진짜 좋은 건데.”
“끼어들지 말고 닥치고 있어.”
형이 큰손으로 여자의 머리통을 밀었다. 장난스럽게 밀었다고 하기엔 철썩 소리를 내며 여자의 몸이 휘청거렸지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기만 했다.
“매제, 편하게 술 좀 마셔. 그러자고 부른 거니까. 수경이는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여기서 하시죠.”
“아직 가족도 아닌데 집안 이야기를 풀어낼 수야 있나.”
“방금 전까지도 매제라면서?”
“그래도 동생과 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는 법이지. 매제는 잠시 기다려줄 수 있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형이 권이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권이강이 그런 큰형을 빤히 올려다보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끝내고 올게.”
“그렇다고 한 방에 끝내지는 말고. 시시하니까.”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자, 권이강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무조건 내 편을 들라고 했더니 거기에 더해 예쁜 말까지 한다. 초반에는 속 긁는 소리도 몇 번 한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연애하면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는데. 아니, 우리도 몇 번 싸우기는 했지. 그러면서 점점 더 발전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발전하는 기미가 없고 권이강만 발전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연인 관계에서도 싸움이 무조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싸우면서 단단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오케이. 저 여자랑 너무 가까이 있지 말고.”
“널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권이강이 코웃음을 쳤다. 의심의 ‘의’ 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권이강과 바람, 외도 같은 단어는 결단코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큰형과는 다르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또 기가 막히거든.
바짝 붙여 문지르던 뺨을 떼어내고 입술에 꾹 입을 맞췄다. 그 꼴을 보고 있던 큰형이 혀를 찼지만, 애인 사이에 이런 스킨십 정도야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평범한 사람보다 더 뻔뻔하기도 했고, 결혼을 해놓고 바람을 피우는 큰형이 혀를 찰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와.”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며 형이 재촉을 했다. 그가 할 말이란 뻔해서 나는 설렁설렁 걸음을 옮겨 뒤를 따랐다. 베란다 문을 닫으며 돌아본 거실에는 카드로 예쁘게 가루를 빻아서 코를 가져다 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나라에 약쟁이 진짜 많구나.”
얼마나 약에 쩔어있으면 손님 앞에서 저러고 있어. 아니면 큰놈이나 작은놈이 이런 면에서만 나를 형제라고 인식해서 가드가 풀어지는 건가. 번갈아가며 못 볼 꼴을 잘도 보여준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흔한 일이 아닌데, 이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인가보다. 한국은 마약 단속이 그렇게 심하지 않은가. 가끔 마약으로 잡혀 들어가는 연예인에 관한 뉴스를 본 것도 같은데, 그건 연예인 한정인가 보다. 재벌가 단속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럼 잡혀 들어갈 놈들이 수두룩할 텐데.
야외 정원처럼 가꾸어진 베란다에는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곳에 털썩 주저앉은 큰형이 맞은편 의자를 손짓했다.
“원하는 게 뭐냐.”
“네?”
들려오는 질문에 내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뭘 원하냐고 물은 거야? 그걸 물을 사람은 오히려 나인데. 여기로 부른 것도 큰형이고,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것도 큰형일 텐데 어째서 그걸 나한테 묻는 걸까.
“왜 그렇게 비협조적이냐고 묻는 거다.”
“아아. 난 또 내 귀가 비정상인가 했네. 언제 내가 협조적인 거 봤어요? 새삼스럽긴.”
“그래, 새삼스럽지는 않다만 그래도 네 편이 되어주겠다는데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굴 필요가 있냐.”
주머니에서 은색 케이스를 꺼낸 큰형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케이스를 내게 내밀었다.
“됐어요.”
가벼운 거절에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물고 있던 것에 불을 붙였다. 담배 냄새와는 달리 특유의 꼬리꼬리한 냄새에 그가 피우고 있는 게 담배가 아닌 대마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에 있는 여자 욕할 게 아니었네.
“조심해요. 그러다 골로 가. 작은형 죽은 거로는 경각심이 안 생기나 봐요?”
“알고 있었냐.”
“큰형도 아는 걸 내가 모를까 봐.”
이 집구석에서 작은놈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건 고용인과 오메가 아버지뿐일 거다. 물론 사고 현장에 없었더라면 나도 모르고 넘어갔겠지만.
“누가 알려줬지?”
“큰형은 누가 알려줬는데요.”
내 물음에 그는 비식 웃기만 했다. 이놈도 꿍꿍이가 참 시커멓다. 작은놈에게 꼬리를 붙여놨나. 그럼 내가 사고 현장에 있었음을 알 텐데, 아무 소리도 없는 걸 보면 그냥 배 실장 쪽으로 사람을 심어뒀을 가능성이 컸다. 그의 수행원이 소식을 물어다 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버지가 큰형에게만 이야기를 해줬을 가능성도.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모르겠다만, 성질 죽여라. 너도 네 뒤에 호산이 있어서 그렇게 까부는 거 아니냐. 결혼하면 집안 배경이 힘이야. 호산 이름값으로 사람들이 널 우습게 보지 않는 거고, 저놈도 너와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오는 거지.”
“호산이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큰 병원? 수두룩해요. 서울에 병원이 몇 개야. 아무리 자기 집안이라도 객관성은 좀 갖죠. 황성 아들내미가 뭐 득 볼 게 있다고 호산 배경 보고 결혼하자고 달라붙겠어요.”
호산 병원과 황성 그룹. 길거리 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웃음만 나올 소리다. 그걸 호산 병원의 차 씨들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권이강은 내가 호산 병원 자식이 아니라 그냥 개인 병원 아들이었어도 나 좋다고 했을 놈이야. 쟤한테는 호산 같은 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괜히 대등한 척 엮어서 득 볼 생각은 하지 마시죠.”
호산 배경이 어쩌고 어째? 권이강 입장에서 호산은 오히려 치를 떨며 짓밟고 싶은 배경일 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짓을 떠올리면, 호산 이름만 들어도 침을 뱉지 않는 게 용하다.
“우리 집안을 깎아내려서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러는 거냐. 알파 놈한테 눈이 돌아가서 집안 망신시키는 것도 정도가 있지.”
“깎아내리긴요. 그냥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데.”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꼴랑 병원 하나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가시를 세워봤자 너 역시 호산 병원 자식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아. 저놈과 결혼을 하겠다면 결국 호산과 황성은 엮이게 되어있다.”
그리고 큰형은 그게 못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내가 권이강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결국 좋든 싫든 사돈 가로 얽히게 되어있다고 그는 배짱을 부렸다.
그렇게 호산 병원이 대단하면 호산 병원 하나 가지고 세상을 휘둘러보지, 왜 악착같이 황성이랑 엮이려고 애를 쓰나 모르겠다.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멍청이처럼.
“이럴 때만 호산 병원 자식 취급을 해주시네. 평소에도 좀 그러지 그러셨어요. 그럼 내가 고마워서라도 권이강에게 큰형이랑 잘 지내보라고 몇 마디 했을 텐데. 또 알아요? 부스러기가 아니라 빵을 통째로 던져줬을지.”
물론 그럴 일은 없었을 거지만, 행복회로라도 돌리라고 던진 당근이었다.
“대단하신 병원장님은 죽어도 결혼 승낙 같은 거 안 해요. 할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 난리 날 거고. 어차피 승낙을 하든 안 하든 나는 권이강이랑 같이 살 거지만. 잘하면 호적도 파이겠네.”
“……왜지?”
“그렇게 궁금하면 그쪽 아버지한테 여쭤보시든가. 아까 했던 말도 겸사겸사 같이 해보시죠? 우리 결혼 찬성한다고. 아, 그건 못 하려나. 병원장 자리 안 주면 어떻게 해. 작은형 죽어서 이젠 자기 것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데, 그거 날아가면 무슨 쪽이래요? 그거 무서워서라도 큰형은 입 다물고 있어야지.”
“내가 차동후 눈치를 봤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차피 내 것인데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다. 내가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았지. 그걸 동후 녀석만 인정하지 못했고. 그 자식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놈이었어. 애초에 그 자식이 넘볼 자리가 아니었다.”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며 깊이 들이마셨던 연기를 뿜으며 큰형이 웃었다. 히죽이는 웃음이 길어지는 것을 보면 약 효과를 제대로 받고 있는 모양이다.
“사고만 치고 다니던 놈,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앞세우던 놈, 심약하고 겁만 많던 놈. 그놈이 망가지는 꼴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지. 작은 희망이라도 남아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제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날뛰던 꼴이라니.”
“와, 그래도 죽은 동생인데 좀 좋게 말해주지. 고인이 들으면 섭섭하겠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몰려다니며 약이나 빠는 게 전부인 놈인데, 제 능력보다 더 큰 것에 욕심이 나서 어떻게든 나를 넘어서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이 안쓰럽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약을 찾고, 분별력이 사라지고, 또 약을 찾고. 도돌이표나 마찬가지였지.”
“약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죠, 뭐.”
그래, 예고된 결말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불안해서 쫓아간 거였다. 그럼에도 한발 늦어버렸지만. 다시 떠오르는 안타까움에 반사적으로 주먹 쥔 손에 힘을 빼며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