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112화 (11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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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 여전히 두드려지는 현관문을 벌컥 열자 다행스럽게도 경찰은 아니었다. 어느 쪽 사람일까. 가늠하듯 바라본 사내는 조용히 권이강의 곁에 붙었다.

“마침 잘 왔습니다. 최 비서는?”

“금방 올라올 겁니다.”

“됐어요. 일단 내려갑시다.”

여기 있으면 좋은 꼴 못 볼 것 같아서. 사고 현장 조작하는 데 같이 있다간 덤터기 씁니다.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내뱉으며 권이강이 사내의 몸을 돌려세웠다.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를 바로 잡아타고 내려가는 권이강에게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일단 집으로 먼저 가야겠습니다. 내 사람이 충격을 받아서인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권이강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기대고 있는 나를 힐끔 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단번에 내려갔다. 문이 열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권이강에게로 다가왔다.

“아파트로 갑니다.”

“수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빨대 꽂아둔 거 작동합니까?”

“네.”

“계속 보고 받아요. 여기는 사람 붙여두고. 저녁까지는 기다립니다. 호산에서 연락 오는 거 보고 움직입시다.”

사내들이 운전석과 조수석에 오르고, 나는 반쯤 놓은 정신으로 권이강에게 이끌려 뒷좌석에 올랐다. 나직하게 주고받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휙휙 바뀌는 창밖을 응시했다.

∞ ∞ ∞

“수경아.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좀 쉬어야지.”

가까이 다가온 권이강이 등 뒤에 버티고 서서 나를 끌어당겼다. 넓은 품에 몸을 기대면서도 바라보고 있던 사진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서 있었더라.

내 과거를 떠올리며 오늘 내가 한 짓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 있었나, 아니면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미련함을 후회하고 있었나, 그도 아니라면 껍데기가 달라졌다 한들 지금의 나 역시 과거의 나와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하고 있었나.

“거짓말했어.”

“괜찮아. 내가 나쁜 거다. 내가 너 뺏기기 싫어서, 그래서 내가 시킨 거야. 넌 아무 잘못도 없어. 괜찮아.”

“아니,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나는 여전히 겨울 속에 있었고, 여전히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헐벗은 아이였다. 차수경의 몸을 차지하고, 차수경의 부모에게 비호받으며, 차수경의 얼굴로 웃고 있지만 결국엔 민재희였다.

아무렇지 않게 차백주를 밀어버린 그때의 감정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히려 환희를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차수경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한들 차수경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 차수경 아니야.”

“……수경아.”

“차수경이 자살했을 때, 그때 죽었어. 내 몸뚱이도, 차수경의 영혼도. 눈을 떴는데 내가 차수경이 되어있었어. 기억상실이니 다중인격이니 망상이니 정신병이니 했지만, 그냥 내가 차수경이 아니었던 거야.”

나는 아직도 추웠던 저 겨울을 기억하고 있다. 손등을 에일 것처럼 날카롭던 겨울의 바람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차수경으로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기억상실이라고 핑계 대고 호의호식하며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나더라고.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소매치기하다 들켜서 경찰서에 끌려가다 도망치고, 그렇게 도망치다 넘어지고 차에 부딪히면서도 다음 날 또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가끔 구역 문제로 다른 놈들에게 처맞을 때도 있었다.

구걸을 할 때는 수금 문제로 매일 개처럼 맞았다. 만 원을 가져갔을 때는 적다고 맞았고, 오만 원을 가져가도 적다고 맞았다. 만족스러운 금액은 원래부터 없었고, 그냥 돈을 가져다주고 맞는 것이 일과였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어. 부모님 사고의 범인. 그런데 차수경이 죽기 전에 말했어. 알고 있다고. 차수경 몸으로 눈을 떴을 때, 그거 알아내라고 다시 살려준 거라고 생각했어.”

고아원. 며칠 지내지 못했던 그 고아원에서의 생활도 떠오른다. 하필이면 추운 겨울이었다. 보일러도 제대로 돌지 않던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숨죽여 울기만 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 낯선 생활. 그 모든 것들이 낯설고 두려웠다.

“생각해보니까 내 인생이 구질구질했던 거, 그 시작이 부모님 사고였던 거야. 부모님만 살아계셨어도 고아원으로 내몰릴 일이 없었고, 고아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뒷골목으로 팔려가지도 않았을 거고,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몸이 상할 정도로 구르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도 않았을 텐데. 내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어.”

따스했을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 내가 마음껏 웃고 뛰어놀았을 시절,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 시절.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따스했을 시기의 기억만이 희미했다. 고통스러웠던 때의 기억은 이렇게나 선명한데.

“작은놈이 범인이래. 그래서 죽이려고 했어. 근데 죽어버리더라고. 뭐지, 이렇게 죽어버릴 거였으면 나는 왜 살아났을까. 나는 왜 다시 왜 살아났을까. 그랬는데 차백주가 진짜 범인이래. 아, 이래서 살아난 거구나. 확인받는 기분이었어. 내 존재 이유. 내가 다시 살아야 했던 이유.”

“……수경아.”

“미안해.”

몸을 돌려 권이강을 올려다보며 사과했다. 그를 마주하고 내뱉을 말은 미안하다, 네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정말…… 내 인생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다정했어. 그래서 좋았어. 네가 유일하게 과거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고마웠어. 사랑스러웠어.”

추운 겨울의 어린 나를 사진으로 찍어 남겨준 사람. 지금까지 나를 추억해주는 사람.

어릴 때는 네가 준 오만 원에 하루가 배불렀고, 커서는 네가 남겨준 내 흔적에 가슴이 부풀었다. 너는 과거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까 널 붙잡지 못했어. 사람 죽이면 감옥 간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았어. 그냥, 그냥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그게 내가 해야 할 일 같았어. 그렇게라도 내 과거에 보상해주고 싶었어.”

“쉬잇, 괜찮아. 울지 마. 네가 누구라고 해도, 무슨 짓을 했다 해도 나는 아무 상관도 없다. 너는 그냥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이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고,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져.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게 내가 해주고 싶은 일이다.”

젖은 뺨을 손으로 감싸며 권이강은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뺨 위에 내려앉은 입술이 물기를 훔쳤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을 새기며 그는 연신 괜찮아, 하고 속살거렸다.

“나는 차수경이 아닌데. 밑바닥에서 구르고 굴러서 닳고 마모되어버린 쓰레기인데. 이제는 그런 몸뚱이조차 없어서 남의 몸에 기생해서 살아가며 내가 대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는데. 그런 주제에 사람까지 죽였는데. 하나도…… 안 괜찮은데.”

괜찮은 걸 찾으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데, 너는 대체 어느 부분에서 괜찮다고 느끼는 걸까. 나는 이보다 더 괜찮지 않은 상황을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너는 대체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내 앞에 서 있는 너는 쭉 너였잖아. 옛날의 차수경이든 옛날의 쓰레기든 나는 모른다. 난 그냥 쭉 내 앞에 있던 너만 알아. 되바라진 말투에 몸은 순진하고, 항상 외롭고, 다정함에 굶주려있고,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내 앞에 굳건히 서 있는 너. 날 보는 너. 내게 입 맞추는 너. 내 애정을 갈구하는 너. 내게 애정을 돌려주는 너. 그게 내가 아는 너야.”

생각해보면 권이강은 원래의 차수경도 몰랐다. 나를 모르면서도 온전한 나로 바라보는 사람은 권이강이 유일했다. 권이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차수경과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내가 눈앞에 있음에도 나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정말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죽기 전에 만난 차수경이 내 부모님 사고의 진범을 알고 있다는 것도, 하필이면 내가 죽어서 차수경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도, 차수경의 근처에 범인이 있었던 것도, 그걸 내가 알게 된 것도. 너를 만난 것까지.”

“한번 이어진 끈은 쉽게 끊어지지 않지. 너와 내가 만난 것도 인연의 한 부분이었을 거다. 분명히.”

이제 그만 쉬자.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속삭이며 내 등과 무릎 뒤를 받쳐 안은 권이강이 천천히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이었어. 그렇게 큰돈을 준 사람은 한 번도 없었거든. 구걸을 하면 동전 때문에 무거웠어. 지폐는 항상 천 원짜리였어. 그마저도 드물었는데. 만 원짜리 한 장 넣어주면 그 사람이 천사로 보였어. 그런데 네가 오만 원을 준 거야. 내 사진 한 장 찍었다고. 호구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고마웠어. 그날, 너무 춥고 배고팠는데…… 네가 준 돈으로 칼국수를 사 먹었어. 배 속에서 번지는 온기가 칼국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다정함이었나 봐.”

권이강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으며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그때에도 다정한 사람이었나 봐. 그래서 내게도 다정했었나 봐.

잠시 멈칫한 권이강이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방문을 넘어 들어온 침실은 언제나처럼 포근했다. 깨끗하게 세탁된 이불조차 권이강의 다정함을 닮아있었다.

“내 사진…… 보고 놀랐어. 내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 집에 사진으로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과거를 네가 기억해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어. 그때의 난 네 얼굴조차 희미한데. ……이상하지. 그때의 찬바람만큼은 생생해. 너무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또 외롭고…….”

“괜찮아, 수경아. 나 옆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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