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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앞의 남자와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서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몇 있었지만, 이게 집문서라는 건 확실했다.
“진짜요?”
“네, 그렇습니다.”
서류 작업을 도와주려고 왔다는 남자는 변호사였다.
앞으로 살게 될 집의 명의를 내 앞으로 해두라는 영감님의 말이 있었다는데. 며칠 전에 같이 밥을 먹고 돌아갈 때까지 화를 버럭버럭 냈던 영감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권이강의 입김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이거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럴 일 없습니다.”
내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권이강이 웃음을 흘렸고, 변호사는 정색을 했다.
“권이강이 끌고 온 거죠?”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영감님이 나에게 다이렉트로 주는 것보다 영감님이 권이강에게 주려는 걸 권이강이 내게 넘긴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권이강과 변호사라는 양반이 지금 무지 신빙성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영감님이 권이강 주라고 한 게 아니라, ……진짜 나한테 주라고 했다고요?”
“네.”
“왜 이렇게 믿음이 부족하지?”
몇 번이나 물었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내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권이강이 핀잔을 했다.
내가 권이강 아버지를 안 만나본 것도 아니고, 만나서 대판 싸워보기까지 했으니 이러는 거다. 권이강 아버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 같은 의심을 할 거라고.
“너 변호사한테 돈 먹였어?”
“…….”
내 물음에 권이강은 끅끅거리며 터지는 웃음을 삼켰고, 변호사는 못마땅함을 드러내듯 헛기침을 했다.
“말했잖아. 아버지가 네게 선물 주고 싶다 하셨다고.”
“며칠 전에 같이 밥 먹는 자리에서 네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너도 뻔히 봐놓고 그런 소리를 하냐. 그게 어딜 봐서 선물 주고 싶어 하던 사람의 행동이야? 아주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시더만.”
“그건 네가 귀여우니까 아버지가 자꾸 골리시는 거고.”
권이강이 자꾸 기억을 미화시키려 했다. 한 십 년쯤 지난 일이었으면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보다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기에 단호히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영감님 어디 아프시대요? 죽을병 걸리셨나? 삶을 돌아보고 후회하는 그런 시간이라도 가지신 거예요?”
“……회장님께서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그것참 안타까운 소식이네. 쯧, 혀를 차자 변호사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얼른 서류 작업을 끝내고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속내가 절절히 전해졌으나, 쉽게 도장을 찍어줄 수는 없지!
“진짜 영감님이 나한테 주기로 한 거 맞죠?”
“네.”
“이거 받고 나서 나중에 이거 빌미로 딴소리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당사자도 아닌데 너무 확답하는 거 아닌가.”
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물어본 것부터 잘못되긴 했지만. 너무 쉽게 나온 대답이 의심을 한층 강화했다.
“나중에 주말마다 불러서 청소시키고, 커튼 손빨래시키고, 잔디 뽑으라고 시키고, 냉장고 청소하라고 시키고, 운전시키고 이런 일 절대 없다 이거죠?”
“……네. 그런 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변호사님이 세상 물정 모르시네. 일할 사람이 없어서 불러다 일 시키는 줄 아나. 그냥 엿 먹으라고 그러는 거지.
“먼저 주겠다고 해서 받는 거니까, 나중에라도 집안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느니 재산 빼돌렸다느니 하는 말도 없을 거고요?”
“네.”
“각서 써주실래요?”
“……네?”
“말로 호언장담을 해봤자, 서류로 남기는 거랑은 믿음의 차이가 크잖아요.”
영감님 멱살 잡고 각서를 쓰게 만들 수는 없으니, 장담을 하는 변호사의 각서라도 대신 받아두고 싶다.
나중에 영감님이 말 바꾸고 구박하고 그러면, 영감님을 고소해야 할까 변호사를 고소해야 할까. 이것도 변호사에게 슬쩍 물어봐야겠다.
“우리 수경이 참 철저해. 어디 가서 사기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군.”
“그치? 누가 나한테 뭘 공짜로 준다고 할 땐 의심부터 해야 하거든. 도장 막 찍어주는 거 아니랬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고, 사람이 타인에게 친절할 때는 다 꿍꿍이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안 그러던 사람이 호의적일 때는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법이지.
“회장님께서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으시고, 그냥 결혼 선물로 드리려는 겁니다. 얼른 서류 작업 마무리하시죠.”
“그래. 이건 정말 별다른 뜻 없이 너 선물 주시려는 거니까, 이제 그만 철저하고 도장 찍자.”
권이강까지 이렇게 말을 하니 눈 딱 감고 받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마음은 남아있지만.
“집 준다고 해서 받는 거예요. 제가 달라고 해서 주신 게 아니라. 이거 확실하게 말씀드리세요. 나중에라도 막 집 줬다고 생색내고 구박하고 그러면 집 팔아먹을 거라고.”
“네,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변호사는 반쯤 포기 조로 대꾸했다. 얼른 서류 작업이나 끝내자는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못 이기는 척 변호사가 내미는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변호사는 누가 붙잡지도 않는데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후다닥 자리를 떴다. 누가 보면 내가 엄청 괴롭힌 줄 알겠네. 나는 그냥 상황이 의심스러우니 확실히 확인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우리 수경이, 이제 나보다 더 좋은 집 가지게 됐네?”
“그러게. 내 부모한테도 받아본 적 없는 걸 영감님한테 받았네. 진짜 받아도 되는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네 아버지, 무슨 함정 같은 거 판 거 아냐?”
“함정 같은 소리 한다. 어떻게 봐도 너 예뻐서 주는 선물인데.”
어떻게 봐도 나 예뻐서 주는 선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어서 물어본 건데. 권이강의 시력이 안 좋아졌거나,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졌거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네 아버지 정말 무슨 생각이시래? 그렇게 화를 내고 가시더니.”
“화는 무슨. 그냥 표현이 서투르신 거지.”
“아냐, 그냥 날 싫어하시는 거야.”
아무리 포장을 해봤자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권이강 아버지는 그냥 내가 싫은 거다. 여전히 내가 싫고 못마땅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억지로 받아주려는 거다.
그 모종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나의 의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내가 임신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권이강이 나 모르게 영감님과 어떤 거래 같은 걸 했을 수도 있고, 영감님이 아무리 반대를 해봤자 결혼은 할 듯 보이니 허락하는 척하면서 나중에라도 헤어지게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영감님 의도에 순순히 끌려다닐 생각은 없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나중에 네 아버지랑 통화할 때 고맙다고 전해드려.”
의심스러운 건 의심스러운 거고, 일단 받았으니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새치름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말하자, 권이강이 내 정수리를 토닥토닥 쓸어주었다.
“직접 연락해보지. 좋아하실 텐데.”
“아냐.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아버지랑 나는 안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얼굴 마주하는 순간부터 서로 복장 터져.”
내 복장은 괜찮을 것 같은데, 영감님 복장을 장담할 수 없어서. 나이도 많은 양반인데 혈압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시 회사 나갈 거야?”
“그래야지.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지 않나.”
이제 겨우 세 시니까 회사 들어가 보긴 해야겠지. 농땡이도 좀 피우고 하면 좋을 텐데, 권이강은 너무 성실했다.
물론 오늘처럼 내게 일이 생기거나 내가 병원에 갈 때 동행하고자 회사에서 빠져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볼일이 끝나면 바로 회사로 돌아간다. 이 정도면 회장 아들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성실한 거지.
내가 회장 아들이었으면 자택 근무를 했을 거다. 아니면 명예직처럼 이름 올려놓고 월급만 받는다거나.
“나 졸려.”
작게 하품을 하며 권이강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숨 자. 자고 일어나면 퇴근해있을 거다.”
“나 자는 거 보고 가.”
“그래.”
나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간 권이강이 침대 위에 나를 눕혔다.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 옆자리를 톡톡 손으로 두드렸다.
“나 잠들 때까지 옆에 누워있어.”
“어리광만 늘어서는.”
핀잔을 하면서도 권이강은 선선히 내 옆에 몸을 뉘었다. 팔베개를 해주고 어서 잠들라며 토닥토닥 가슴 위를 두드려준다. 모로 누워 권이강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가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어허.”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권이강이 혼을 내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왜에.”
“졸리다며. 얌전히 자야지.”
“졸린데 잠이 안 와. 몸이 너무 편해서 그런가 봐. 떡 한 번 치고 나면 푹 잘 것 같은데.”
“안 돼. 얌전히 자라.”
움직이지 못하게 내 손을 붙잡아 가슴 위에 올려놓고, 그 상태에서 다시 토닥토닥을 한다. 잠이 오기는커녕 부아가 치밀었다.
“나랑 떡 치기 싫어?”
“…….”
“딴 데서 물 빼고 오냐? 이럴 거면 왜 나랑 결혼해? 나랑 떡 치는 것도 싫으면서!”
“차수경.”
“너 짜증나.”
권이강의 몸을 밀어내고 반대로 돌아누웠다.
낮 시간인 데다 금방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고 입고 있는 정장이 구겨지면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거부할 수는 있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데 권이강이 싫다고 해서 짜증이 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잠자리 거부가 이번 한 번이 아니라는 거다. 은근슬쩍 몸을 빼내거나 말을 돌리는 탓에 끌어안고 잠드는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 기억하잖아. 잠자리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금 있으면 안정기 들어선다니까, 그때까지만 참자.”
“격하게만 안 하면 된다잖아. 슬렁슬렁하면 되잖아.”
“자제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조금만 참자. 응?”
“웃기지 마. 아이 잘못될까 봐 시도조차 안 하는 거 다 알거든!”
“아이도 아이지만, 네 몸에 무리가 될까 봐 그런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굳이 널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진짜 나 때문이야?”
“다른 이유가 있을까. 너만 괜찮으면 벌써 몇 번은 발라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