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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님, 고마워요.”
“아닙니다.”
차에 오르며 인사하자 이경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앞뒤로 줄 서 있는 경호 차량이 조금 부담스러운 얼굴이라 웃음을 터뜨렸다.
“권이강이 너무 걱정이 많아요. 한번 외출할 때마다 나도 엄청 부담스러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나쁘지 않습니다.”
저번에 권이강 아버지에게 끌려갔을 때를 떠올리는지 이경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미리 행선지를 말해두었는지 앞에 있던 차들이 빠져나가고, 이경진이 그 뒤를 따라 차를 몰았다. 뒤에 서 있던 차들도 줄줄이 따라 달리는 것을 힐끔 확인하고 시트에 편히 몸을 기댔다.
“이 기사님 이제 그만 사표 내지 그래요.”
“……네?”
“나 곧 결혼하고 이사도 하고 그럴 거니까. 이 기사님도 거기서 괜히 눈칫밥 먹지 말고 내 쪽으로 완전히 옮겨오는 게 좋잖아요.”
“아아, 그 말씀이셨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 기사님 그만두라고 하는 줄 알았어요?”
나를 어떻게 보고. 우리가 그렇게 매정한 사이였나.
권이강이랑 결혼하면 단칸방에서 라면만 먹고 살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었는데, 아무래도 권이강 아버지가 권이강을 안 쫓아내려나 보다.
별다른 말 없이 열심히 회사에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얼마 전에는 이사하라고 내 앞으로 집 명의까지 바꿔준 것을 보면 알거지로 쫓아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권이강도 이 기사님 이쪽으로 옮겨오라고 저번에 명함 줬잖아요. 나도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좋고. 이 기사님은 나 싫어요?”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나저나 아직까지 이 기사님 월급 주고 있었다는 건 좀 신기하네. 아버지 성격이면 잘라도 이미 잘랐을 텐데.”
“시끄러운 일이 계속 터져서 잠시 생각을 못 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내가 말 안 꺼냈으면 그냥 얌전히 잘리려고 했어요?”
답답한 양반이네. 곧 백수가 될 예정인데 입 꼭 닫고 있었다니.
“잘됐어요. 권이강한테 내가 말해둘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이 기사님이 내 심부름 다 해주는데 나야말로 고맙지.”
오늘만 해도 내가 알아봐달라는 것도 알아오고, 데려가 달라는 곳도 데려가 주고. 여러모로 고맙지만,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나 고마웠다.
“결혼 준비는 잘하고 계십니까.”
“권이강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난 신경 안 써도 된대요. 근데 권이강도 자기가 준비하진 않을걸요. 사람 시키겠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십니까.”
“발리 무슨 섬이라고 하던데. 어디 붙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행기가 알아서 태우고 가겠지. 바다 본 적 없다고 했더니, 바다 실컷 보라던데요.”
“발리. 좋으시겠습니다.”
“여행은 처음이라 어딜 가든 좋을 것 같아요.”
민재희일 때 암으로 죽기 전에 여행이나 다녀왔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바다 한번 본 적이 없어서, 죽기 전에 바다나 보고 죽으면 좋겠다고. 결국 바다는커녕 계곡 구경도 못 해보고 죽었지만.
첫 여행을 해외로, 심지어 신혼여행으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튼 권이강을 만나서 별짓을 다 해본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암 선고를 받았을 때는 죽는 것까지도 구질구질하구나 싶은 반면 더는 고생 안 해도 되겠다며 기껍기도 했었는데.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차수경의 몸으로 눈을 떠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내가 원하던 일도, 원하지 않았던 일도, 생각지 못하던 일도 겪으면서 보다 넓은 세상과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 기대를 한다는 것도 참 좋고.”
“그분도 기뻐하실 겁니다.”
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여 부드럽게 정차했다. 운전석에서 내려 내가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며 이경진이 말했다.
“도련님께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걸 보게 된다면, 도련님을 살려주신 분도 보람을 느끼실 겁니다.”
칭찬인지 위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경진의 말에 쉽사리 긍정하기는 어려웠다.
차수경 살리려다 죽은 장본인으로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저승에서 보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보람은커녕 쌍욕을 했을 것 같거든.
차수경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울증 때문에 자살을 하려고 했고 그래서 결국 죽어버렸다고는 해도, 자기 몸에 내 영혼이 들어가 대신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오묘하겠지.
나 대신 잘 살아줘서 고마워,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까. 자기 인생은 갑갑하고 구질구질했는데, 나는 망나니처럼 다 때려 부수고 집안 시끄럽게 하고 잘난 알파 낚아서 희희낙락 사는 꼴을 보면 심경이 복잡하지 않을까.
“여기래요?”
“네, 저기 유택동산에서 산골을 했다고 합니다.”
“고마워요.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천천히 갔다 올게요.”
알아보느라 수고했다며 인사를 하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경호 차량에서 내린 사내들이 주변을 살피고, 이경진은 열댓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내 뒤를 따랐다.
그냥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저 사람들도 이게 일이니까 어쩔 수 없겠구나 싶었다.
근처에서 내린 덕에 헤맬 일은 없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서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고, 무슨 일로 왔냐며 물어보는 직원도 없었다. 나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러 온 남겨진 자에 불과했다.
유택동산이라고 하기에 작은 산이나 언덕에 산골을 하나 했는데, 그냥 외부에 만들어진 제단이었다. 눈비를 피할 수 있게 투명 패널로 벽과 천장을 만들어, 겉에서 보기엔 흔한 쉼터나 흡연 부스와도 비슷해 보였다.
유택동산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이경진이 밖을 지켰다. 덤덤히 걸음을 옮겨 제단을 마주하고 섰다.
이곳에는 딱히 차수경이나 민재희를 떠올릴 만한 것이 없었다. 묘지도, 묘비도, 위패나 사진 한 장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공동 무덤이었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분골 중 하나일 거고, 그렇게 모아져 어쩌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은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확인하려는 뜻은 아니었고, 그저 내 안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아니, 차수경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끝난 것은 아니니 쉼표라고 하면 좋을 듯싶다.
구질구질하게 살았던 쓰레기더미 속 민재희는 죽었고, 차수경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민재희 인생의 복수도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과거와 복수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 인생을 살아보는 것. 그 첫걸음을 떼고자 이 자리에 섰다.
“왜 여길 혼자 왔어.”
익숙한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내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어지간히도 따라다녀. 너 스토커야?”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모르나. 한마음 한 몸이니, 너 가는 곳에 내가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지.”
아무튼 말이나 못 하면.
내가 경호 인력을 이끌고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는 순간, 권이강의 귀로 내 행선지가 들어갔겠지. 한순간 홀로 보내는 것조차 참지 못하고 바로 쪼르르 달려왔을 것이 뻔했다.
허리를 감싸 안는 팔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뒤로 젖혀 권이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뾰족한 턱선이 오늘따라 섹시했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거 믿어?”
“글쎄, 애매하군.”
“나도. 내가 차수경 몸으로 깨어난 걸 보면, 육체와 혼은 확실히 다른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더라.”
내 혼이 차수경의 몸에 있다면, 차수경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지. 민재희의 몸뚱이는 화장되어 사라졌는데, 차수경의 영혼은 어디로 향했을지.
죽고 싶다는 소원이 이뤄졌다며 성불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몸으로 살아난 나를 내려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수도 있고.
“여기 오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아니. 그냥…… 전환점 같아서.”
“무슨 전환점?”
“내 과거를 털어내고 얽매여있던 것에서 벗어나, 미래를 그려나가기 위한 시점이랄까.”
엉망으로 낙서된 벽을 지우고, 새롭게 그 벽을 칠해나가기 위해 서 있는 기분이다.
처절하게 가혹하고 고통스럽고 배고프고 억울하던 민재희의 구질구질한 벽을 가장 처음으로 더럽혔던 차백주라는 얼룩까지 말끔하게 지워냈다. 파이고 생채기 난 흠집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하얗게 덧칠한 벽에 새로운 그림은 그려나갈 수 있을 거다.
“여기가 민재희로 있던 마지막 장소라는 거잖아. 그동안 복수니 뭐니 복잡한 가정사에 휩쓸려서 그거 정리하느라 힘 빼고 시간 쏟았으니까. 이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지.”
마음가짐이라고 해도 좋고, 각오라고 불러도 좋다. 무엇이라 부르든 좋으니,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싶었다. 새롭게 한 발을 내디디고 싶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살아보고 싶었다.
더 이상 어두운 과거 속 민재희가 아니라 내 곁에 선 권이강과 태어날 아이와 함께 차수경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민재희로서.
“네가 누구든, 누구로 살아가든, 무엇에서 벗어나고 무엇을 그려나가든…… 항상 내가 옆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당연한 소리를 하네. 내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 너인데.”
권이강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은 아닐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내 인생에 권이강은 내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자.”
권이강이 들고 있던 국화를 내밀었다. 각자 한 송이씩 놓고 가려고 사 왔는지 두 송이였지만, 나는 둘 모두를 가져왔다.
하나는 죽어버린 내 몸뚱이를 위해, 그리고 하나는 죽어버린 차수경의 영혼을 위해.
혹시라도 미련을 가지고 내 주변을 떠돌지는 말아달라는 얄팍한 이기심을 감추며. 제단 위에 정중히 국화를 내려놓고 차수경의 안식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