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156화 (외전) (156/170)

[야스] 히든 바이스 외전

156

Side story

오메가 아버지의 추천과 권이강의 응원을 등에 업고 도자기 공예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영어 수업, 점심 먹고 오후에는 공예 수업. 요즘의 나를 돌아보면 참 여유롭고도 보람찬 생활을 하고 있구나, 이게 세상 사는 즐거움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왔어요?”

“오늘은 뭐 해요, 선생님?”

“수경 씨 하고 싶은 거. 뭐 만들고 싶어요?”

취미로 하는 공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어릴 때 아이들이 색종이로 해봤을 종이접기를 비롯해서 비즈 공예나 양초 공예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여러 물건을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취향에 가장 가깝다고 느껴진 게 도자기 공예였다. 도자기 공예라고 하면 좀 대단해 보이지만, 그냥 흙덩이를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밀가루 반죽하듯 손으로 흙덩이를 주무르고 치대고 문지르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내 안의 화가 사라지고 쌈닭이 잠에 빠져 온순해지는 기분이다.

“항아리요.”

예술품이라고 부잣집에 가면 많이 놓아두잖아. 내 손에서 예술 작품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이왕이면 돈 안 들이고 내 손으로 만들면 더 좋겠지.

“일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처음 왔을 때는 흙덩이만 조물거리고 동그라미 네모 세모 이런 거 만들게 하더니, 조금 익숙해진 뒤로는 동물도 만들고 접시도 만들었다.

흙과 친해지고 손에 익숙해지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는데, 조물조물 찰흙 놀이 하는 기분이라서 딱히 지루하지 않았다.

물레를 사용하는 방법도 한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손으로 흙덩이 치대는 것도 좋지만 물레를 사용해서 만드는 건 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흙이 묻어도 괜찮은 옷으로 갈아입고 앞치마를 두르며 나오자 작업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물레 옆에 흙덩이와 다른 물건들을 준비해두고 계셨다.

공방에서 흘러나오던 요즘 아이돌 노래가 클래식으로 바뀐 것을 들으며, 이제는 누가 봐도 임신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온 배를 문질렀다.

“저도 아이돌 노래 좋아하는데요.”

“태교엔 역시 클래식이죠.”

“선생님, 그런 편협한 시각을 가진 분이셨어요? 아이돌 노래로도 태교할 수 있거든요.”

“수경 씨 남편분이 클래식을 적극 권장하셨어요. 공예도 태교 때문에 하는 거라고 하시던데.”

“태교 때문에 배우는 거 아니에요. 제 취미 생활로 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권이강의 압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태교든 취미 생활이든,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게 최고죠.”

그럼에도 클래식은 여전했다. 심호흡으로 심신의 안정을 유도하며 물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그러면 수경 씨가 원하는 항아리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오늘은 화병을 만들어볼까요. 물론 원통차기 먼저 해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는 판단이 서야겠지만.”

그럴 거면서 뭐 만들고 싶냐고 왜 물어봤어.

물론 배움에도 단계가 있을 거고, 그걸 따라가는 게 수강생의 자세이지만. 조금은 놀림을 당한 기분이다. 시무룩한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선생님이 “뭐 해요?” 하고 재촉했다.

“자, 얼른 시작해봅시다. 기벽 올리는 건 가장 기초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단계예요. 뭘 만들든 이 단계를 생략할 수가 없거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죠? 시작이 어떻게 반이야. 시작은 그냥 시작이지. 근데 도자기 공예는 원통차기만 마스터해도 정말 반은 온 거예요.”

사기꾼을 능가하는 언변이다. 왠지 모르게 그럴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흙덩이를 집어 물레 위에 올렸다.

중심 잡기에만 걸리는 시간이 한나절이다. 거기에 기벽을 올리기 시작하면 없던 집중력도 막 생겨났다.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집중하기도 어려운데, 확실히 심신 수양을 하는 데 이만한 작업이 없다.

“아직도 너무 두꺼워요. 두께 살 빼줘야지. 그걸로 화병 만든다고 생각해봐요. 크기는 1.5리터인데 정작 물은 500미리도 안 들어가면 그게 무슨 화병이야. 살 빼주면서 쭉쭉 올립시다. 쭉쭉.”

옆에서 참견하는 선생님만 조금 조용히 해주면 더 좋을 텐데.

“지금 열심히 올리고 있거든요. 천천히 침착하게 하라던 처음의 선생님은 어디 가셨어요?”

“과할 정도로 천천히 침착하게 하니까 그렇지. 수경 씨 이제 그 수준은 지났잖아요.”

이건 칭찬인지 험담인지 모르겠다. 없던 수전증이 생긴 것처럼 흔들리는 손에 힘을 주고 기벽을 천천히 훑어 올렸다.

컵이나 접시를 만들 때와는 달리 흙덩이의 중량이 늘어난 만큼 원통차기의 난도도 올라갔다. 한순간 삐끗하면 형태를 알 수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림과 동시에 이때껏 들인 노력까지도 날아가기에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확실히 손끝이 야무져. 원통차기는 기본 한 달인데, 수경 씨는 한 이십 일 했나. 도자기 공예 기능사도 도전해보면 어때요? 취미 생활이라고 해도 자격증 있으면 더 좋잖아.”

그렇긴 하지. 취미로 도자기 공예를 한다는 것과 취미지만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분이 다르니까. 왠지 후자가 더 전문성 있게 느껴지지 않는가.

“선생님, ……지금 영업하시는 거예요?”

“수강비 많이 내는 학생이 오래 다닌다고 하면 좋긴 하죠.”

농담처럼 물은 말에 농담과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한데 왠지 백 퍼센트 농담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권이강은 대체 수강비로 얼마를 내고 있는 거야. 물어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데, 오늘 집에 가서 한번 물어봐야겠다.

“자격증이든 뭐든 애 낳고 생각해야겠어요. 이제 슬슬 힘들기도 하고.”

“하긴, 아이 때문에 버겁긴 하겠어요.”

“네, 이제 정말 갈비뼈도 아프고 오래 앉아있는 것도 힘들고.”

초반에는 할 만했는데, 배가 나오니 확실히 몸에 부담이 느껴졌다. 게다가 아이가 얼마나 활발한지, 배 안에서 축구를 하는 것처럼 날뛰었다. 태동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그 태동이 이렇게까지 격한 증상인지를 알지 못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을 정도였다.

태명을 잘못 지은 걸까. 배가 빵빵하다고 권이강이 장난스럽게 지은 빵빵이라는 태명을 아이가 발로 빵빵 차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원통차기 마스터하고, 뭐 하나 만들고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죠.”

“네, 그런 자세 아주 좋아요. 좋은 김에 조금 더 얇게, 쭈욱 올리세요.”

이보다 더 높게 올리다간 쓰러질 것 같은데. 내 염려와 별개로 선생님은 계속 ‘쭈욱, 쭉’을 외쳐댔다.

두껍던 흙벽이 점차 얇아지고 길쭉하게 높아졌다. 안과 밖을 다듬어 벽의 두께를 균일하게 만드는 건 아직까지도 어려운 일이다.

높이 솟은 기벽에 결이 남지 않도록 매끄럽게 다듬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잘했다며 짝짝, 손뼉을 쳤다.

“이제 정말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요? 차 한 잔 마시면서 쉬었다 할까요, 아니면 제가 시범 보여드릴 테니까 앉아서 보면서 쉴래요.”

후자는 쉬는 게 아니지 않나.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 말씀 듣는 건 수업이지, 휴식은 아니잖아.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후자를 택했다.

“물 한 잔만 가져올게요.”

선생님이 자리에 앉아 물레에 흙덩이를 올리고 중심 잡기부터 시작하는 것을 눈으로 살피며 마른 목을 적셨다.

∞ ∞ ∞

“이거 영 어렵네요.”

선생님이 하는 걸 보면 쉽게 될 것 같은데. 언제나 그렇듯 내 손으로 직접 하게 되면 생각처럼 되질 않는다.

조금만 손에 힘을 주어도 모양을 잃고 휘어져버리는 탓에, 어느 한 부분도 허술하게 할 수가 없다. 끙끙거리는 나를 즐거운 얼굴로 지켜보던 선생님이 딸랑, 하고 울리는 풍경 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오셨어요?”

“네. 오늘은 뭐 만들고 있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권이강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화병 만들기 하는 날이에요.”

“수경이가 수업 잘 따라가고 있죠?”

“네, 솜씨가 좋아서요. 자격증도 도전해봤으면 싶더라고요. 차 한잔 드릴까요.”

학교에 상담을 온 학부모가 할 법한 권이강의 질문에 한 소리를 하려다가, 뒤이어 들리는 선생님의 칭찬에 머쓱해져서 모른 척을 했다.

물주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입에 발린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당당하게 들을 만큼 칭찬에 익숙하지도 않은 탓이었다.

“우리 서방님, 이러고 있으니 어엿한 도자기 장인 같은데?”

정장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린 권이강이 내 뒤에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빵빵이는 말썽 안 부리고 잘 있었어?”

“어지간히 활발해야지. 하루 종일 날뛰어서, 배 뚫고 나올까 봐 겁나더라.”

“아빠 힘들게 하는 모양이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천방지축이지?”

분명 질문인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들리는 건 그냥 내 착각일까.

나는 모른 척 기벽을 손으로 훑었고, 권이강은 웃으며 내 배를 훑었다. 둥근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권이강은 드러난 목덜미를 입술로 문질렀다.

“어허.”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지금 누가 이렇게 요망하게 입술을 놀리지?

힐끗, 주변을 훑었지만 눈치 빠른 선생님은 이미 자리를 비켜준 지 오래였다. 공방에서 연애질을 한다고 한 소리가 나왔어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권이강을 대상으로는 말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다.

“아, ……네 목소리 들린다고 또 발로 찬다.”

정말 발로 차는지 아니면 주먹질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배 안쪽에서 툭툭 두드리는 느낌에 신음을 흘렸다.

조심스럽게 배를 문지르며 권이강이 “얌전히 있어야지.” 하고 타박을 했다. 그래봤자 배 안에 있는 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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