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화 (1/139)

1화

“우연재.”

툭.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동시에 새까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떨어졌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서윤은 늘 우연재를 보고 있었으므로.

“이제 그만할게.”

다행히 몇 년간의 마음 앓이가 무색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뜬금없는 대화의 맥락에 우연재가 뺨을 찡그렸다. 슬쩍 올라가는 눈썹에는 뭘,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뭘 그만하는데, 서윤아.”

“알잖아.”

잠깐 정면에 시선을 둔 우연재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섰다. 싸구려 비닐우산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그 움직임을 따라 토독 미끄러지듯 낙하했다.

우산을 나눠 쓰고 있던 만큼 지극히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표정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

우연재의 얼굴에 깃든 감정은 당황스러움 따위가 아니었다. 오롯한 낭패감일 뿐이었다.

문서윤은 비에 젖은 소매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내뱉어도 우연재는 몰랐다며 부정하는 대신 곤란해할 것 같다고.

우연재가 문서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문서윤 역시 우연재를 잘 알았다.

그래서였다. 더는 이 감정을 움켜쥔 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 좋아할게. 여기서 끝내자.”

그렇게 문서윤은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홑마음

문서윤은 도망쳤다.

그만둔 피아노, 오랫동안 끈질긴 시간을 들여 어머니의 생기를 빼앗아 가던 병마, 마침내 그녀에게 떨어진 안온함, 그리고 아버지의 외도.

스무 살의 그는 아버지 곁에 다른 사람이 섰을 때도 이해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4년 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두 사람이 5년이나 만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않았어도 평생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실을 마주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온순한 받아들임에 들뜬 여자가 와인 몇 잔에 취했을 때, 자그마한 실수는 한겨울의 햇살만큼이나 잔잔하게 마음을 갈라놓았다.

‘5년 전에 멀리서 봤을 때는 이만큼밖에 안 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에 담긴 단어 그 어디에서도 두 사람이 5년이나 만났음을 증명하는 바는 없었다. 그러나 직감이란 그렇게 무디지 못했다.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멎던 순간, 문서윤은 아버지의 경직된 눈가를 발견했다.

분위기를 망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어쩌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입으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만났다는 고백을 듣게 될까 봐. 그리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봐.

문서윤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고깃덩어리와 함께 울컥하는 감정을 익숙하게 씹어 삼켰다.

원래대로라면 우연재를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도피처는 오래된 소꿉친구뿐이었다.

‘문, 너 그거 들었냐?’

‘뭐?’

‘우연재 여친 생긴 거.’

‘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우연재에게는 항상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까. 문서윤이 일방적인 외사랑을 시작했을 때도, 그 홑마음을 몇 년째 이어 오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몰랐다는 표정이네?’

‘……걔한테 여자 친구 없는 날 찾는 게 더 빠르잖아. 새삼스럽게.’

표정 관리에 실패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달리 절로 뺨이 경련했다. 아차 싶었으나 김현승은 굳은 표정을 섭섭함으로 받아들인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도 대학 들어와서 사귄 건 처음이잖아. 봄도 아니고 벌써 겨울인데. 우리도 성인이니까 고딩 때 사귀던 거랑은 좀 다르지 않겠냐?’

‘하긴, 그렇겠네.’

문서윤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와는 많은 게 달라질 테다.

머릿속을 휘젓는 익숙하지 않은 그림에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실례라는 자각이 들자마자 자기혐오가 솟구쳐 문서윤은 괜히 손톱을 매만졌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로 우연재가 너한테 먼저 말 안 했지? 그 새끼 지금까지 여친 생기면 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제일 먼저 보고했잖아.’

‘얼굴 보고 말하려나 보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만 아니었다면 곧장 우연재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별것 아닌 일에 위안을 바라는 어린애처럼.

그러나 문서윤은 어느덧 성인이었고, 애인과 있을 친구를 붙들고 제 감정을 쏟아 낼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즐거워하고 있을 친구에게 우울한 감정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나 봤자 죄책감만 느끼겠지. 문서윤은 온갖 핑계를 끄집어 와 제 열망을 꾹꾹 눌러 삼켰다.

기댈 곳이 사라졌으니 남은 건 도망뿐이었다.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가 끝난 후 문서윤은 곧장 입대 신청을 했다. 하늘이 숨 쉴 틈이라도 만들어 주려는지 운 좋게도 빈자리가 났고 그는 망설임 없이 입대를 택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상의도 없이 입대 신청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한 듯했으나, 일순 스쳐 지나간 안도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친구들에게 입대 사실을 털어놓은 날은 훈련소 수료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한 달 넘게 잠수 타더니 훈련소였냐며 섭섭하다는 타박과 함께 미친놈이라는 욕설을 한참 들은 그는 망설임 끝에 마지막으로 우연재의 번호를 눌렀다.

- 으음……. 알았어.

길게 늘인 목소리는 상냥하고 다정했다. 빡돌아 대놓고 짜증을 내거나 가감 없이 속상한 티를 내며 죄책감을 자극할 줄 알았던 터라 문서윤은 내심 당황했다. 그가 알고 있는 우연재라면 둘 중 하나여야 했다.

- 누구야?

낯선 목소리가 연달아 당황함에 기름을 끼얹었다. 문서윤은 재빨리 우연재의 말을 낚아챘다.

“여자 친구랑 있어?”

- 응.

“미안. 끊을게. 휴가 나가면 보자.”

입대 후 하나뿐인 소꿉친구의 목소리를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군대에서 보냈다.

힘들지만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씻어 낼 수는 없어도 희석시킬 정도는 됐던 것 같다. 도망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우연재를 향한 마음뿐이었다. 얼굴을 볼 일이 없으니 자연스레 식으리라 속단했던 마음은 도리어 끝 갈 데를 모르고 커져 가기만 했다. 면회 한 번 오지 않는 친구의 태도에 속이 상하면서도 끝내 전화를 걸지 않는 제 자존심이 우스웠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감정을 내려놓기가 버거웠다. 얼굴을 보지 못하자 도리어 마음이 반발심을 키우는 것만 같았다. 문서윤은 그 반발심마저 익숙하게 내리눌렀다.

그래도 요즘은 제법 괜찮았다. 전역 후에도 반년 가까이 연락하지 않았더니 감정이 조금쯤은 짓무른 것 같기도 했다. 자그마치 2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물러지고 물러져서 결국 썩어 없어지지 않을까. 남는 건 악취뿐이겠지만.

“내가 마무리할게.”

문서윤은 선반에 쌓인 물건을 꺼내느라 낑낑거리는 송주아 뒤에 서서 대신 컵 홀더를 꺼내 들었다.

“헉, 그래도 돼요?”

“응.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진짜 고마워요. 역시 반년 된 내 알바 메이트.”

송주아가 과장된 태도로 콧잔등을 찌푸리며 주먹을 내밀었다. 문서윤은 픽 웃으며 그녀의 손을 툭 건드렸다. 지나치게 사교성 좋은 행동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한 것도 어느새 반년 전 일이었다. 송주아는 그제야 앞치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맞다. 오빠 알바 계속할 거예요? 이번에 복학한다면서요. 2학년이죠?”

“응, 복학. 알바 계속할 거야.”

“차 보면 집 잘사는 것 같은데 왜 알바해요?”

굳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긴 했다. 사립 음대 교수인 아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외가댁이 부유한 편이라 여태 돈 걱정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취준 전에 알바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와, 진짜 재수 없게 들리는 말인 거 알아요?”

문서윤은 또다시 가볍게 웃고 말았다. 송주아와 반년 가까이 일하다 보니 그녀의 성격 역시 잘 알았다. 이 정도 농담은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아, 맞다. 근처에 오피스텔 새로 생겼잖아요. 거기 들어가는 거예요? 아니다, 오빠 차 끌고 다니니까 통학이려나?”

앞치마를 휴게실에 걸어 두고 나온 송주아가 재빨리 롱패딩 지퍼를 채우며 물었다.

“아니. 기숙사 들어가려고.”

“네? 기숙사요? 웬 기숙사? 오오, 서민 체험?”

“뭐? 그런 거 아니야.”

슬쩍 눈가를 찡그리자 송주아가 키득거렸다.

“농담이에요. 그런데 왜 기숙사 들어가요? 자취나 통학이 훨씬 편할 텐데.”

본가는 숨 막혀서, 하고 대답하기가 멋쩍었다. 그럴싸한 대답을 고민하고 있는데 인영 하나가 카페 문 앞을 서성거렸다. 송주아의 남자 친구였다.

“헉, 나가야겠다. 오빠 고마워요! 내일은 제가 마감할게요!”

“잘 가.”

타이밍이 좋았다. 손을 흔들어 준 문서윤은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기계들을 세척하기 시작했다.

지갑 안에는 아버지께 받은 카드가 한 장, 외할아버지께 받은 카드가 한 장, 그리고 매월 용돈이 쌓이는 체크 카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명료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끈적이는 감정에 매몰되기 일쑤였다.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다. 전역하자마자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 역시 복학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개강 이후에는 시간을 조금 줄여야겠지만, 그때는 학교 수업이 남은 시간을 채우며 잡념을 몰아낼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9시네.’

문서윤은 힐긋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군대에 있는 사이 아버지는 결혼식을 올리셨다.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를 원망할지언정 그 옆에 선 사람까지 원망할 생각은 없으나, 그렇다 해도 불편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차가 있는데도 통학 대신 기숙사를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자취는 허락받지 못할 게 뻔하니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기숙사로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문서윤은 코트를 걸치며 괜히 핸드폰을 확인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이렇게 멀어지는 건가. 먼저 연락하면 될 일이었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우연재를 향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감정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니,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어차피 개강하면 마주칠 텐데.”

학년이 달라졌으니 마주칠 일은 적을 테지만, 캠퍼스는 넓은 듯하면서도 좁았다. 게다가 같은 과이니만큼 어떻게든 부딪치게 될 것이다.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샜다.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틈만 나면 우연재가 머릿속을 잠식하고는 했다. 숨을 내쉬는 행위와 무엇이 다른지 모를 만큼 관성적이고 끊임없는 무의식이었다.

그만 생각하자.

문서윤은 작게 고개를 털어 내며 카페를 나섰다. 봄이 오기 전이라 그런지 바람이 아직 매서웠다. 차를 끌고 다녀 가벼운 코트만 걸쳤더니 자연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빨리 가야겠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뒤쪽에서 뻗어 나온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낯선 접촉에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공기 중을 부유하던 향기가 겨울바람에 휩쓸려 밀려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그래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향수 냄새였다.

“서윤아.”

남자의 품 안에서 움찔 어깨를 떤 문서윤은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1년 반도 아니고 2년이나 입 닥치고 기다렸는데…….”

우연재가 서 있었다. 주인에게 혼나 시무룩해진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꽃신 안 줘?”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문서윤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우연재가 대단히 빡쳤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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