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거의 2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우연재의 감정을 읽어 내려면 그의 표정이 아닌 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은 기억하고 있었다. 처량하게 내려간 눈썹과 섭섭하다는 듯 부루퉁한 목소리와 달리 새까만 눈동자는 지극히도 홧홧했다.
뜻하지도 않은 갑작스러운 재회에 얼이 빠져 있던 문서윤은 황급히 몸을 돌려 저를 껴안은 상대를 밀어냈다. 대학가 근처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가 같은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테다.
“아.”
덩치도 그렇고 워낙 단단하게 서 있던 상대 덕에 밀려난 사람은 도리어 문서윤이었다. 그런데도 우연재는 아프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었다. 아기들의 가짜 울음처럼 의도가 뻔히 보이는 칭얼거림이었다.
“서윤아. 이제 내외해?”
우연재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문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떨떨한 상태로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혹시라도 연락이 왔을까 기대한 게 고작 몇 분 전이었는데, 막상 기다리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니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진짜 우연재였다. 2년 만에 보는 우연재.
“예전에는 잘만 안기더니…….”
문서윤은 입술만 달싹였다. 우연재가 말하는 예전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아마 교복을 입던 때였을 것이다. 아니, 스무 살에도 그랬나? 너무 당황해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실 남아 있는 기억이라고는 마음을 졸이던 순간들뿐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제게 기댄, 혹은 저를 껴안은 친구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하게 숨을 고르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다른 향수 냄새 나서 그래?”
다른 향수 냄새?
우연재에게 다른 향수 냄새가 섞여 있다면 출처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그제야 차게 느껴졌다.
“……우연재.”
문서윤은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오랜만이네.”
제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들리기만을 바라면서.
* * *
글라스에 담긴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문서윤은 와인 잔의 스템을 만지작거리며 하릴없이 그 안에 담긴 액체만 응시했다. 개방된 공간이면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하필 프라이빗 룸으로 끌려 온 바람에 속이 답답했다.
“문서윤. 내외하냐고.”
문서윤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올렸다. 턱을 괸 우연재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화가 풀린 얼굴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어색해서.”
“어색?”
“2년 만이잖아.”
“나는 어색한 거 모르겠는데. 우리 서윤이 혼자 낯가리네?”
문서윤은 슬쩍 웃으며 얼버무리듯 와인을 마셨다.
우연재의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문서윤은 그저 노력했을 뿐이다. 익숙한 향수 냄새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미친 듯이 뛰어 대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해야만 했다. 썩어 가는 과일처럼 물러졌다 생각한 감정이 온전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훔쳐보듯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접히는 눈꼬리를 보니 확실히 카페 앞에서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조용하게 감정을 갈무리하는 건 우연재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차를 운전하는 내내 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며 화를 누그러트렸을 것이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문서윤은 괜히 포크로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찍으며 화제를 돌렸다. 소음과 비위생적인 장소를 질색하는 우연재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싶을 때 가끔 찾고는 하던 와인바였다. 문서윤 역시 우연재를 따라 이곳에 들르곤 했었다.
스무 살이 갖기에는 다소 고상한 취향이었으나 문서윤의 취향은 우연재의 취향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게. 다른 새끼들이 데려가 달라는 거 다 거절하고 문서윤이랑만 왔었는데.”
아직 기분 덜 풀렸구나.
우연재는 저 때문에 짜증이 날 때면 꼭 너라는 지칭 대신 이름을 부르고는 했었다. 변함없는 습관이 변함없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 같아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남은 와인을 마셨다. 2년의 공백에도 서로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서인지 혀끝에 닿은 액체가 달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난 2년간 연락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우연재를 계속 피해 다니려던 건 아니었다. 나서서 연락하지 않았을 뿐, 친구 관계에서까지 도망치려던 건 아니었으니 피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테다.
‘그냥 연락 안 하는 동안 감정 죽이려고 노력한 거지. 잘 안 됐다는 게 문제지만.’
자그마치 2년 만의 만남이었으나 대화 몇 마디에 어색함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오래된 친구라면 다들 이럴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처럼 그리고 예전처럼 허물없는 친구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문서윤은 친구라는 관계에 만족했다. 짝사랑을 고백할 생각도, 친구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이를 탐내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감정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아서는 아니었다. 자그마치 2년이나 접점 없이 살아왔는데도 여태 놓지 못한 걸 보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는 건 오히려 그래서였다. 어차피 계속될 마음인데 쓸데없이 내보여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 2년간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제 딴에는 최선의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결국은 접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만큼 커다란 감정이니, 외사랑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이제야 웃네.”
“이름 부르는 거 보니까 나한테 화났구나 싶어서. 예전이랑 달라진 거 없는 거 실감 나서 웃기기도 하고.”
“누구처럼 군대 갔다 온 것도 아닌데 변할 게 뭐가 있지.”
어쩐지 마음이 찔려 와 문서윤은 또다시 와인을 홀짝였다.
지금 와서 아버지의 외도 사실에 충격을 받아 군대로 도망갔다고 털어놓기는 어려웠다. 2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자 친구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지나치게 의식하는 티를 내서 좋을 게 없으니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멋쩍음이 몰려와 손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문서윤은 조금 전처럼 유리 스템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자연스레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그러나 딴짓도 잠시였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문서윤은 마지못해 눈을 맞췄다.
스무 살 때와 분위기가 살짝 달라지긴 했으나 우연재는 그대로였다. 염색 한 번 하지 않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잘생긴 이마를 덮고 있었고, 머리와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는 가로로 길게 트인 눈매에 자리한 채였다. 미묘하게 올라간 눈꼬리를 보고 있으면 ‘우연재 저 새끼는 천년 묵은 구미호처럼 생겨서 사람 존나 홀린다니까?’라고 말하던 김현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확실히 화려한 미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가만히 눈을 마주쳐 오는 게 만족스러웠던지 무표정일 때도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이 느지막이 열렸다.
“그나저나 군대 갔다 와도 하얗네.”
“전역한 지 오래됐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는 탔어.”
문서윤은 와인 잔에서 손을 떼어 내며 드러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우연재 역시 남자치고는 하얀 편이었으나 제 피부는 눈에 띌 정도라 그가 저런 말을 꺼내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나는 우리 서윤이가 언제 연락할지 존나 기다렸는데.”
“너한테만 연락 안 한 거 아니야.”
할 말이 없어지자 구차한 핑계가 튀어 나갔다. 정말로 우연재에게만 연락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역 후에도 정신이 없었다. 적응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군인 신분을 벗은 데서 오는 적응보다는 바뀐 생활 환경에 대한 적응이었다.
아버지가 결혼식을 올린 건 입대 후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문서윤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부러 불참한 건 아니었다. 휴가를 맞추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어쨌든 아버지가 결혼했다는 건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문서윤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살림을 봐 주던 아주머니께서 일을 그만두신 건 아니었기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어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의 외도 상대였으니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렇게 새로운 구성원이 생긴 집에 적응하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왜 다른 애들은 네가 카페에서 알바하는 거 다 알고 있을까.”
“김현승이랑 우연히 마주쳐서 그런 거겠지. 너한테도 연락하려고 했어.”
“그런데 안 했고.”
“그건…….”
“나는 문서윤한테 꽃신 받으려고 사고도 안 치고 얌전하게 기다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