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는 너는 왜 면회도 안 왔는데, 묻고 싶었으나 문서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어 말을 삼켰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구차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우연재라 더 그랬다.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답을 들으면 오히려 상처를 받을까 봐 겁이 났다.
“누가 군대에서 괴롭혔어?”
말없이 와인만 마시는 게 이상했는지 우연재가 뜬금없는 물음을 건넸다. 주름진 미간은 계산이 엇나간 사람처럼 퍽 짜증스러워 보였다.
“뭐?”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문서윤은 약간 당황했다. 괴롭힘당하면서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웬 괴롭힘? 문득 중학교 때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처럼 나한테 악감정 품을 만한 사람은 없는데.’
폐쇄된 집단이고, 잊을 만하면 사건 사고가 터지다 보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해가 없도록 부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나 군대 생활 편하게 했어.”
몸은 조금 힘들었어도 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어서 좋았다. 보통은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한 것들, 그리고 우연재에 관한 것들이었다.
“말수가 줄었는데. 아니면 아직도 어색해? 우리가 몇 년을 알았는데 왜 자꾸 낯가리지?”
“어색한 거 진즉에 풀렸어. 오랜만에 너랑 술 마시니까 옛날 생각나서 그래.”
우연재가 진심을 가늠하듯 또다시 턱을 괴며 가늘게 눈가를 접었다. 어색함이 물러선 것과는 별개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긴장감이 들이닥쳤다. 와인바 특유의 어둑한 조명과 지나치게 고요한 공기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티 나게 눈을 피하는 것도 이상할 게 뻔해 대놓고 시선을 떼어 내기도 어려웠다. 문서윤은 또다시 와인 잔을 손에 쥐었다. 자연스레 눈꺼풀이 내리깔렸다. 지금은 제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유리 스템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특유의 찬 기운이 금세 체온에 잠식당했다.
“진짜 그대로네.”
쥐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자 우연재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뭐가.”
“얼굴도 그대론데 입맛도 그대로다 싶어서. 우리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신 와인이잖아, 그거. 너 잘 마시길래 일부러 그걸로 부탁드렸는데.”
“그래?”
문서윤은 잔을 내려 두며 와인병의 라벨을 확인했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 우연재는 거의 안 마셨던 것 같은데. 퍼뜩 떠오른 기억에 맞은편 잔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붉은 액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너 이거 달다고 싫어하지 않았어?”
“별로.”
싫어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말뜻을 해석하려던 문서윤은 빠르게 포기했다. 달긴 해도 도수가 높은 와인이라 취기가 도는지 머릿속이 살짝 몽롱해졌다.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찰나 우연재가 와인병을 들더니 잔 안으로 붉은 액체를 콸콸 쏟아부었다.
“뭐 해? 와인을 누가 이렇게 마셔.”
문서윤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와인 잔을 툭 건드렸다. 연이어 술을 마셔서인지 자꾸만 의미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긴장이 삽시간에 풀려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에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천천히 풀어졌다.
우연재 만나서 기분 좋은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많이 마시라고. 2년 동안 못 먹인 거 먹여야지.”
“고맙다고 해야 돼?”
“응.”
뻔뻔한 표정을 보아하니 장난을 치는 게 뻔했다. 그냥 받아 주자 싶어 문서윤은 잔을 들었다. 보울 아래쪽으로 차 있어야 할 술이 반절 넘게 담겨 있어 얇은 유리잔이 제법 무거웠다.
“군대에 있는 동안 교수님 결혼하셨다며.”
“……들었어?”
대충 입술을 축인 문서윤은 잔을 내려 두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결혼 소식이 귀에 들어갔으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애초에 우연재와 친구가 된 것도 부모님들끼리 얽혀 있기 때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을 때 안심했던 건 우연재 때문도 있었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마주치면 표정 관리가 안 될 것만 같았다. 전해 들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 보니 다행히 그 역시 결혼식에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집에 들어왔고?”
“결혼했으니까.”
“교수님도 참 특이해? 아들은 군대 보내 놓고 자기는 결혼식까지 올리고.”
빈정거리는 어조에도 문서윤은 말없이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제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우연재뿐이었다.
“그동안 우리 서윤이는 좆빠지게 고생했을 텐데.”
“괜찮았다니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좋은 사람?”
무척이나 가볍게 묻는 어조와 함께 새까만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왔다. 톡, 톡 와인 잔의 베이스를 규칙적으로 건드리던 소리가 뚝 멎은 것과 동시였다.
“누군데.”
“말해도 모르지, 너는.”
“하긴, 말해도 나는 모르지…….”
말꼬리가 길게 늘어났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다 힐긋 훔쳐보는 시선을 보냈다. 언제 이쪽을 쳐다봤냐는 듯, 눈꺼풀을 반쯤 내리깐 채 마시지도 않는 와인을 물끄러미 내려보는 얼굴이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사귀던 여자 친구와 아직도 사귀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문서윤은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다른 향수 냄새 운운했던 걸 보면 상대가 같든 아니든 애인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낯선 향수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순전히 우연재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일 테다.
문서윤은 울렁거리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다시 술을 마셨다. 물어 봤자 하등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 * *
‘나한테 제일 먼저 ……했어야지, 서윤아.’
문서윤은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어렴풋이 우연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다 잠들긴 오랜만이라 꿈인지 현실이었는지 모든 게 불분명했다.
눈이 부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조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가 씻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어 느릿하게 눈만 깜박이던 그는 이내 제가 누워 있는 침대가 우연재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새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있는 걸 보면 본가는 아닐 터였다.
“하…….”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술이 달더라니, 아무래도 와인을 마시다 취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외박을 했으니 아버지께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다.
끙끙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은 문서윤은 핸드폰을 찾기 위해 서랍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몇 번 근처를 더듬자 당연히 잡히리라 생각한 핸드폰 대신 날카로운 물체가 손톱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예리한 통증에 화들짝 고개를 들고 나서야 손가락을 찔러 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손톱 아래의 연약한 살을 파고든 건 덩그러니 남겨진 귀걸이 한 짝이었다. 딱 봐도 여자들이 쓸 법한, 진주 귀걸이.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음이 쿵 소리를 내며 진창에 처박혔다.
동시에 물소리가 끊겼다. 집주인이 곧 나오리라는 생각에 문서윤은 허겁지겁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 묻은 귀걸이가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어났어?”
주워서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찰나 우연재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트레이닝복 바지 위로 상체는 헐벗은 차림새였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데다 오랫동안 운동을 한 덕분에 눈에 띄는 체격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근은 물론 전신의 근육이 발걸음을 따라 꿈틀거렸다. 문서윤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며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방금. 나 어제 많이 취했어?”
“기억 안 나나 보네.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진짜야?”
추태를 부렸다는 말에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상태로 눈이 마주치자 우연재가 눈꼬리를 접으며 실실 웃었다.
“구란데. 이제야 얼굴 보네.”
재미없는 농담에 인상을 찡그리자 덩달아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우연재가 머리를 털던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다가왔다. 일어나자마자 헐벗은 몸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문서윤은 은근슬쩍 서랍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귀걸이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내 핸드폰 어디 갔어?”
“자정에 교수님한테 전화 오던데. 문서윤이 신데렐라도 아니고…….”
예상했던 일을 전해 듣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서윤은 마른세수를 했다. 벌써 정신이 너덜거리는 기분이었다.
“나 만나서 내 침대에서 재운다고 말씀드렸어.”
“아……. 고마워. 아버지 네 말이면 껌벅 죽는데 다행이다.”
미약한 안도가 몰려왔다. 우연재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그의 말 한마디면 제가 무슨 잘못을 하든 넘어가 주곤 했다. 물론 잘못이라고 해 봤자 가족 약속이나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 따위가 전부였다.
‘좋은 친구.’
자식이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친구로서가 아닌 다른 의미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해졌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미래에 문서윤은 습관적으로 손톱을 세워 검지를 꾹 눌렀다. 평소와 달리 뭉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쳤어?”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우연재가 팔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