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갑작스러운 접촉에 깜짝 놀라 그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저보다 훤칠한 남자의 악력을 당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탄탄함을 넘어서서 누가 봐도 위압적인 덩치의 우연재와 달리 문서윤은 늘씬하게 마른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 온 덕분에 바른 자세가 몸에 붙어 전체적인 선 역시 곧고 단정한 축에 속했다. 키도 평균보다 큰 데다 비율이 좋아 남들은 실제 키보다 더 크게 보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연재 옆에 서면 그의 턱에 머리 꼭대기가 스칠 듯 말 듯 한 정도였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꽉 붙든 손을 쉽게 떨쳐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뭐에 찔린 상처 같은데.”
우연재가 곧게 뻗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피가 묻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문서윤은 멍청한 얼굴로 제 손가락을 감싼 입술을 쳐다봤다. 뒤늦게야 말캉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야. 뭐 해?”
기겁하며 손을 물리자 황급히 빠져나가는 손톱이 입꼬리를 스쳤는지 우연재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뭘 뭐 해? 네가 갑자기 손가락 빨았잖아.”
“피 나는데 어떡해. 원래 피 나면 이렇게 하는 거라며.”
“언제 적 얘기야.”
문서윤은 꼬꼬마 시절을 떠올리며 괜스레 타액이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쓸어내렸다. 혀가 닿은 피부부터 시작해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피부가 하얘 뺨이 달아오르면 금방 티가 나는 편이라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졌다.
“왜. 나는 너랑 했던 건 다 기억하는데. 그나저나 뭐에 찔렸어?”
“아……. 귀걸이.”
문서윤은 그제야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귀걸이를 주워 들었다.
“귀걸이? 아, 선주 거.”
눈매를 찡그리던 우연재가 이내 낯선 이름을 내뱉었다.
“여자 친구 이름이 선주야?”
문서윤은 귀걸이를 건네며 물었다.
“응.”
아무리 날카롭게 깎였다 한들 손바닥에 상처를 낼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귀걸이를 쥐고 있던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귀걸이를 받아 든 우연재가 또다시 손목을 낚아챘다.
“심하게 찔렸네. 여기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소독약 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슨 소독이야. 됐어. 귀걸이부터 씻어야지. 피 묻었어.”
그러나 우연재는 귀걸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깊게 찔린 상처를 살피기에 바빴다. 짧게 깎인 손톱이 피가 비치는 손톱 아래를 조심스레 건드렸다. 단순히 상처를 확인하기 위한 접촉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이 정도의 접촉도 고역이었다. 결국 문서윤은 슬쩍 손을 빼내며 말을 돌렸다.
“괜찮다니까. 피 묻은 거 내가 씻을게. 넌 옷이나 입어. 안 춥냐.”
“네 몸이나 챙겨.”
“아니, 그래도 네 여자 친구…….”
“어쩌라고 서윤아.”
우연재가 말을 잘랐다.
“그깟 귀걸이보다 네가 더 중요해.”
문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였다. 우연재를 향한 외사랑을 놓지 못하는 건.
“뭐야? 네가 했어?”
그럴싸한 아침 식사가 식탁 위에 차려진 채였다. 잡곡밥과 북엇국을 힐긋 내려다본 문서윤은 우연재를 쳐다보며 물었다. 티셔츠를 주워 입은 덕분에 이제는 그럭저럭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설마.”
피식 웃은 우연재가 먼저 식탁에 앉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본가에서 반찬이랑 뭐랑 갖다줘. 오늘 아침은 내가 부탁드렸고. 너 이거 좋아하잖아. 계란 들어간 거.”
“잘 먹을게.”
그제야 북어포 아래 숨겨진 계란 덩어리가 보였다. 완전히 익힌 건 아닌지 젓가락으로 쿡 찌르면 노른자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문서윤은 국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숙취라 부를 만한 증상은 없었어도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어제 많이 마셨어?”
“한 병 다 비웠어.”
“혼자? 미쳤네.”
중간에 긴장이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분명 긴장감에 술을 더 많이 마셨을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숟가락을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멎었다.
“나 뭐 말실수한 거 없지?”
“말실수?”
우리 사이에 말실수할 게 뭐가 있는데,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우연재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끝을 길게 잡아 끌었다.
“아아.”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뺨 안쪽을 깨물었다. 고백 같은 걸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면 지금 우연재의 집에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우연재에게서 호모포빅한 발언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동성애에 관해 호의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그 반응을 모른다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 듯했다. 아마 무관심하지 않을까. 자기한테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터였다.
하지만 정말 혹시라도 말실수를 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모르는 사람 얘기 존나 많이 하던데.”
다행히 큰 말실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문서윤은 안도의 기색을 감추며 되물었다.
“누구?”
“좋다고 말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억도 안 나.”
군 생활 이야기를 했나 싶어졌다. 동기들이 막 제대한 군필자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술만 취하면 군대 얘기를 해서 그렇다던데, 제가 딱 그 꼴이라 민망해졌다.
“미안.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질투 나게.”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밥상머리에서 턱을 괴고 있던 우연재가 오해를 살 법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끝이 처진 눈썹과 손바닥에 짓눌려 살짝 튀어나온 뺨이 샘이 난 어린아이처럼 새침한 표정이었다. 문서윤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너 친구 많잖아. 질투 날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친구가 어디 있어. 너밖에 없는데.”
“무슨 말이 그래.”
예쁜 척, 내숭 떠는 말인 걸 잘 알고 있기에 문서윤은 피식 웃었다.
“김현승도 따지고 보면 네 친구잖아.”
문서윤의 가까운 인맥은 대부분 우연재를 통해 형성된 관계였다. 우연재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고 문서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아 왔으니 그의 친구가 제 친구가 되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무리 사이에서 누가 먼저 친구였느냐를 따지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거나 우연재에게 친구가 없다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네 친구? 문서윤 선 긋네. 사람 존나 섭섭하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알았어. 네가 나랑 제일 친해. 됐어?”
“농담한 거 아닌데. 너 없는 2년 동안 심심해서 매일 밤마다 잠도 못 자고 울었어.”
우연재가 울다니. 꼬꼬마 시절부터 알아 왔지만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약한 척을 하면 무슨 실수를 해도 넘어가 줬더니, 그 버릇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약한 척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한편으로는 심심했다는 말을 듣고 나자 문득 전역 후 김현승과 우연히 마주친 날이 떠올랐다. 아르바이트 중인 카페에 그가 손님으로 오면서 성사된 만남이었다.
‘우연재는 잘 지내?’
‘뭐야. 너 연재 새끼한테도 연락 안 했어?’
‘아무한테도 연락 안 했다니까.’
‘와 씨. 독한 새끼.’
문서윤은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의 뜻으로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건넸다. 저보다 몇 개월 늦게 전역한 친구는 아직도 머리가 밤톨 같았다.
야무지게 쌈까지 싼 김현승은 입 안에 가득 든 음식을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 새끼도 얼굴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잘 살아 있겠지. 우연재가 어디 가서 굶어 죽을 놈은 아니잖냐.’
‘하긴.’
‘걔 걱정할 게 뭐가 있냐? 미국 놈이라 우리 다 군대 갈 때 군대도 안 갔잖아. 아, 맞다. 너 군대 가고 나서…… 다음 학기에 아예 안 보이던데.’
‘우연재? 휴학했어?’
‘엉. 연락해 보니까 학교 지겨워서 여행 갔다고 하던데. 영국이랬나.’
진짜 심심했나.
문서윤은 힐금 우연재를 살폈다. 지난 2년간 심심했다는 말이 진심인 것 같기도 했고, 농담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현승이가 나 군대 가고 나서 너 휴학했다던데.”
“응.”
“왜?”
“너 없어서.”
당연하다는 듯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연재가 이런 식으로 별것 아닌 애정을 드러낼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친구라는 관계에서 비롯된 애정인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문서윤은 차마 ‘여자 친구 있잖아.’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질투하는 스스로의 꼴이 같잖았고, 친구 사이에서 내뱉어도 되는 말인지 조심스러웠다. 우연재 앞에서만큼은 무슨 말을 하든 검열을 거치고 또 거쳐야 했다.
“내가 무슨 상관이야…….”
문서윤은 어물거리며 괜히 북엇국 속 계란을 툭 건드렸다.
“왜.”
우연재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턱을 괸 자세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난 문서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밥이나 먹어.”
예쁘게 접힌 눈매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문서윤은 앞에 놓인 그릇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뭉그러져 흐물흐물 흘러나온 노른자가 꼭 제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