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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7)화 (7/139)

7화

두 친구가 함께 시야에 담겨서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 사람이 우연재가 아닌 김현승이었다면 고백했을지도 모르겠다. 성격이 달라서가 아니라, 저와의 관계에서 도드라지는 차이점 때문이었다.

김현승은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친한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제 모든 걸 아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엄하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의 재혼 소식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연재는 제 모든 걸 아는 사람이었다. 살아온 시간을 함께 지켜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다 보니 서로에 관해 저절로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 이상으로 우연재와 저 사이에는 유대감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 교류가 있었다.

문서윤은 그러한 감정의 등가 교환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좋은 친구를 짝사랑했다면, 고백한 후 훌훌 털어 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절교를 당한 후 마음고생하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괜찮아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우연재는 아니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홑마음을 꼭꼭 숨겨야만 했다.

우연재를 잃는다는 건 문서윤에게 있어서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밑에 편의점도 있고 뭐 많더만. 룸메만 잘 걸리면 괜찮을 듯?”

한창 기숙사의 장점을 설명하던 김현승은 거의 다 비어 가는 불판을 확인한 뒤 손을 들었다.

“여기 볶음밥 두 개요!”

직원이 다가와 곧바로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문서윤은 여기저기 뒤섞이는 재료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래의 형체를 잃고 잔뜩 뒤엉키는 모양새가 꼭 사람의 마음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져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계속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지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연재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던 손길 그대로 고개만 살짝 기울이며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나랑 살래?”

순간 문서윤은 제가 술에 취했나 고민해야만 했다.

“나랑 살자.”

잘못 들었겠지,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우연재가 재차 쐐기를 박았다.

“또 무슨 헛소리야.”

문서윤은 거세게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괜히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나치게 간질간질한 목소리 때문인지 연애 도중 동거하자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친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는 제안이었고, 우연재 역시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텐데도 저절로 들뜨는 기분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왜애.”

우연재가 말꼬리를 늘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피스텔 넓은데. 내 침대도 넓고.”

문서윤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침대가 얼마나 넓었는지 또한 모르지 않았다.

“와, 이 새끼 사람 차별 쩌네? 나는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거면서.”

“우리 현승이는 더럽잖아.”

우연재가 딱 잘라 말했다. 김현승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방 상태와 잠버릇을 알고 있는 문서윤으로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우연재가 김현승의 출입을 막는 것도 침대에서 과자를 까먹거나, 옷을 아무 데나 벗어 놓는 버릇 때문이지 별달리 특별한 이유는 없을 테다.

“뭐래. 남자들 다 나 같거든? 우연재 네가 깔끔 떠는 거지. 야, 문. 거절해. 이 새끼랑 살면 청소 노이로제 걸릴걸.”

애초에 같이 살겠다는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우연재와 한 공간에서 지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처럼 고작 몇 시간 얼굴을 볼 때도 혹 마음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데 제겐 버거운 일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거나 그 뒤에 따라오는 생리 현상을 들키면 죽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문서윤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취미가 없었다. 우연재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또 함께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설렘도 잠시였다. 머지않아 그 설렘에 잠식되어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괴롭게 말라 죽을 바에야 차라리 본가에서 지내며 스트레스를 받는 쪽이 나았다.

“그리고 이 새끼 여자 친구 있잖아. 문 네가 존나 불편할걸?”

김현승이 볶음밥을 퍼먹으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터라 문서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부터 생각 없었어. 말이라도 고마워.”

대답은 한숨을 숨기며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귀걸이 침이 명치에 틀어박힌 것처럼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자못 아무렇지 않은 척 김현승을 따라 볶음밥을 먹으며 거절의 뜻을 건넸다. 이렇게라도 속을 갑갑하게 짓뭉갠 감정을 눌러 삼키고 싶었다.

“나랑 산다고 말씀드리면 교수님도 허락하실 텐데.”

우연재가 잔 위로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을 건성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유리잔 위로 올망졸망 앉아 있던 물방울들이 그의 손가락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흐트러졌다.

“얼굴도 모르는 남보다는 내가 편하지 않아?”

“당연히 네가 편하지. 그렇다고 평생 너랑만 놀 수는 없으니까……. 룸메랑 안 맞아서 힘들면 그때 얘기할게.”

최악의 룸메를 만나더라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문서윤은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던 우연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아무튼 말만이라도 고마워.”

“문서윤 룸메 좆같기를 기도할 건데.”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입술이 농담처럼 가볍게 곡선을 그렸다. 결국 문서윤은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 * *

어느덧 11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음식점에서 나오자 언제 훈훈한 열기가 주위를 맴돌았냐는 듯, 새파란 바람이 뺨을 덮쳐 왔다. 주차장까지 가려면 조금 걸어야 했다.

곧 있을 개강에 대해 이야기하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눈길을 돌렸다.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때마침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뛰듯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연재!”

긴 머리카락에 하얀색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시선이 자연스레 이름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우연재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옆에 선 김현승이 저 얼굴 좀 보라는 듯, 팔을 툭 건드렸다.

“우연재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나.”

문서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답삭 안기듯 거리낌 없이 우연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햇살처럼 웃는 얼굴이 제게 끌어안긴 남자를 향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토끼처럼 동그란 눈매와 폭 패는 보조개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일찍 왔네.”

우연재가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덕분에 문서윤은 하얀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너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진주 귀걸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나 친구들이랑 있는데.”

“응?”

뒤늦게야 이쪽을 쳐다본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떨어져 나갔다. 우연재에게 동행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처럼 웃는 얼굴에는 자그마한 민망함이 끼얹어진 채였다.

“여기서 볼 줄 몰라서 너밖에 안 보였나 봐. 친구들?”

“응. 문서윤, 김현승.”

“안녕하세요.”

우연재 옆에 선 여자가 조금 머쓱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동갑인데 무슨 안녕하세요, 야.”

그런 모습이 귀여웠던지 우연재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그녀를 놀려 댔다. 하얀 코트 위로 팔을 둘러 끌어당기는 움직임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꼭 연약한 토끼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모양새였다.

“여자 친구. 김선주.”

“얼굴 보는 건 처음이네요.”

넉살 좋은 김현승이 능글맞게 인사를 건넸다. 예기치도 못하게 맞닥뜨린 우연재의 여자 친구에 문서윤은 바짝 얼어 있다가 겨우 고개를 숙였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목소리라도 떨리면 꼴불견이었다.

“저 연재 친한 친구들 처음 봐요.”

“쟤는 안 친해. 문서윤이랑만 친한데?”

“맞아요. 저희 별로 안 친해요. 저도 문서윤이랑만 친해요.”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이름이 튀어나오자 김선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문서윤에게로 향했다. 호기심 넘치는 눈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문서윤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고 말았다. 성격 자체가 원체 차분한 편인 데다, 김현승처럼 넉살이 좋은 것도 아니라 말을 얹는 것보다 웃음으로 무마하는 게 나았다. 처음 본 사이이니만큼, 다소 어색하게 굴어도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저 서윤 씨 이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우연재 입에서 자기 얘기 잘 안 나오는 편이라 신기했거든요.”

“무슨 서윤 씨야. 동갑이라니까?”

낯간지러운 호칭이 웃기다는 듯 우연재가 피식 웃으며 김선주의 정수리 위로 제 턱을 올렸다. 키가 워낙 크다 보니 김선주가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한 품에 쏙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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