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래도 자기 친구들이랑 처음 보는 자리잖아. 왜, 그때 우리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바람 소리에 섞여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바람 소리 때문이 아닌가. 미약하게나마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불안해졌으나 문서윤은 애써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는 척했다. 그나마 옆에 김현승이 있어 다행이었다. 제게만 말이 쏟아지는 일은 없을 테다.
“나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오는 길인데, 데려다주면 안 돼?”
다정한 대화가 끝났는지 김선주가 우연재의 팔을 붙들며 생글생글 웃었다.
“얼굴도 오랜만에 보잖아.”
눈치가 있으면 여기서 빠지는 게 맞았다. 같은 생각을 한 듯 김현승이 팔을 쳤다. 눈이 마주치며 암묵적인 합의가 오갔다. 김현승이 입을 열려는 찰나 우연재가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으음. 문서윤 데려다줘야 하는데.”
순간 당황한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야. 문만 네 친구냐? 어이없네, 저 새끼.”
“넌 근처에 살잖아.”
“와 씨, 말이라도 못하면.”
펄쩍거리는 김현승의 반응 덕분에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문서윤은 괜히 김선주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우연재와 김현승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이 재밌는지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우연재의 발언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들 저런가. 제가 남자라서, 또 우연재가 남자라서 지레 찔린 모양이었다. 애당초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떳떳할 수 없다지만, 같은 남자를 좋아하다 보니 평범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자꾸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됐다.
문득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짝사랑에서 느끼는 피로가 아닌, 사소한 일에도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저 자신에 대한 피로였다.
“그래서. 여자 친구 혼자 가라고?”
말다툼이 끝나자 김선주가 눈썹 끝을 떨어트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보다는 애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말투에 가까웠다. 짐짓 화가 난 척, 뺨에 힘을 싣느라 옅게 팬 보조개와 둥그런 눈매가 문서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우연재와 함께 있을 때면 문서윤은 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동성의 소꿉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저 미안했다. 그런데 그의 여자 친구까지 마주치자 거뭇거뭇한 감정이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간신히 입술을 떼어 냈다.
“여자 친구 데려다줘야지. 나 현승이랑 조금 더 놀다가 택시 타고 들어갈게.”
급작스레 몰려오는 탈력감에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핑계를 대서라도 깔끔하게 헤어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진짜 가?”
우연재는 문서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주인 허락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자못 순진하게 느껴지는, 무구한 얼굴이었다.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스로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가라니까. 추운데 여자 친구 오래 세워 두지 말고.”
여자 친구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는 입술에 조금 더 힘을 실어야만 했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문서윤은 하얀 코트 위로 허리를 감싸는 팔을 못 본 척했다.
“저희 같은 학교 다니니까 혹시 마주치면 인사해요! 연재 양보해 주셔서 감사해요.”
티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든 김선주가 자연스레 우연재의 팔에 팔짱을 꼈다. 문서윤은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 봐.”
슬쩍 고개만 돌린 우연재가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여자 친구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문서윤이 걸어갔을 방향이었다.
“문, 어디 갈래?”
“어, 가자.”
문서윤은 엉뚱한 대답을 내뱉으며 김현승을 따라 등을 돌렸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이 상황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와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연재 양보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센 바람 소리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음 사이로 발랄한 목소리가 톡 튀어 올랐다. 고요하고 평온한 말버릇을 가진 저와 달리 생기가 흘러넘쳐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양보. 문서윤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무언가를 거절하고 남에게 미루어 준다는 뜻이었다. 적선이 아닌 양보라면 그 무언가는 제가 욕망하는 것일 테다.
‘내가 우연재를…….’
문서윤은 우연재를 양보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 또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더 익숙해져야겠지.’
양보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오리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우연재를 양보하면서, 평생 갖지 못할 짝사랑에 마음 앓이 하느라 스스로를 깎아 먹으면서.
그래도 전부 괜찮았다.
감정이란 언젠가 닳고 닳은 채로 익숙해질 것이다.
* * *
“와. 내일 개강인 거 안 믿겨요.”
송주아가 샷을 뽑으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에 문서윤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복학하는 거 안 믿겨.”
“오빠. 복학생 티 내지 마요. 물론 오빠 얼굴에 성격에 재력이면 뭔들이겠지만.”
“또 이상한 소리.”
미간을 찌푸리자 송주아가 키득거리며 얼음이 가득한 컵 안으로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였다. 카운터에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든 트레이를 놓고 온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불쑥 물음을 건넸다.
“요즘 오빠 친구 잘 안 오시네요?”
“우연재? 바쁜가 봐. 여자 친구 한국 와서 그런가.”
요즘이라고 해 봤자 고작 일주일이었다. 우연재가 카페에서 기다릴 때마다 느꼈던 부담감과 설렘이 미약한 서운함으로 변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였다. 섭섭해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알바가 끝날 때마다 우연재의 부재에 실망하게 되는 건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그 선배 친구보단 애인이구나.”
“넌 아니야?”
괜히 쓸데없는 감정만 되새김질하게 될 것 같아 문서윤은 장난스레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러다 애인이랑 헤어지면 주변에 친구들 안 남는다니까요? 그리고 애인 생기면 거기 올인하는 사람치고 정상인 별로 없어요.”
“잘하고 있네.”
문서윤 역시 오래 남는 관계는 애정보다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참. 오빠 기숙사 들어갔어요? 거기 신축이잖아요. 어때요?”
“괜찮아. 편의점도 바로 밑에 있고 식당도 지하에 있어서. 별거 다 있던데. 넓어서 그런가.”
입주가 가능해지자마자 곧장 짐을 옮긴 참이었다.
기숙사는 괜찮았다. 아직 사람들이 전부 들어오지 않은 덕분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다. 2인실이긴 하나 방이 기숙사치고는 넓은 덕분에 룸메와 불편하게 얼굴을 붉힐 만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욕실과 화장실도 신축이니만큼 깨끗했다.
“룸메는 어때요?”
“아직 얼굴 못 봤어.”
“내일이 개강인데?”
“짐은 두고 갔던데……. 학번 보니까 나보다 선배더라고.”
“월요일 공강인가? 제 친구가 그러는데, 개강 날에 들어오거나 오티 주 끝나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대요.”
송주아가 뜻밖의 정보를 일러 주었다. 기숙사 경험이 없는 데다 가까운 친구들 역시 자취만 해 와 문서윤으로서는 알 수 없던 정보였다. 여태 얼굴을 보지 못해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살다 보면 언젠가 얼굴 보겠지.”
“이상한 사람 걸리면 저한테 욕해도 돼요. 같이 욕해 줄게요.”
“알았어. 고마워.”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샷을 뽑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룸메 때문에 별일이 생길까, 싶었다.
* * *
맞은편 침대 위에 놓인 짐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전공 수업을 가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하던 문서윤은 괜히 캐리어에 눈길을 한 번 던지고는 기숙사를 나섰다.
‘문서윤 룸메 좆같기를 기도할 건데.’
우연재의 목소리가 떠올라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낯선 듯 익숙한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앞쪽도, 뒤쪽도 아닌 딱 중간쯤 위치한 자리였다. 1학년 내내 우연재와 붙어 다니다 보니 그 외에는 친하다고 칭할 만한 동기가 없어 활기찬 강의실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다.
할 일이 없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우연재 향수 냄새랑 비슷하네. 문서윤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별 의미 없이 태블릿을 건드렸다.
“어! 형! 안녕하세요.”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후배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저에게 한 인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문서윤은 시선을 내리깐 채 강의 계획서만 살폈다.
“안녕.”
그가 퍼뜩 고개를 든 건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옆을 돌아보자 뺨이 눌리도록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우연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