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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화 (9/139)

9화

“문서윤 이제 나 못 알아보네. 전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알더니.”

“너 왜 여기 있어?”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우연재가 2학년 전공 수업에 들어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긴. 전공 들으러 왔지.”

“그러니까 네가 이 전공을 왜 듣냐고. 2학년 때 뭐 했어?”

우연재가 웃듯이 입술을 늘렸다. 더불어 손바닥에 눌린 뺨이 폭 솟아올랐다.

“일부러 안 들었는데.”

느릿느릿 움직이는 입술이 예상치도 못한 이유를 들먹였다.

“문서윤 내가 책임져야지.”

책임? 문서윤은 이번에는 뺨을 찡그렸다.

“무슨 책임?”

“내가 경영 오자고 꼬셔서 여기 왔잖아.”

그제야 우연재가 책임 운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원서를 썼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연재가 대학 생활을 같이하자며 꼬시지 않았어도, 문서윤은 그를 따라 전공을 택했을 것이다.

대학에서도 우연재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문서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연재 곁에 있으면 더 힘들어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 많은 게 달라질 테니까.

우연재에게는 조금 더 내밀한 관계의 여자 친구가 생길 테고, 언젠가 결혼을 할지도 몰랐다. 당장 몇 년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같은 과를 택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다 할 목표랄 게 없었다.

열여섯의 여름, 문서윤은 피아노를 그만뒀다. 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건반을 치는 순간일 정도로 오랜 시간을 피아노포르테와 엉켜 왔다. 그만큼 해묵은 시간의 흔적 때문일까, 고작 3년 만에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기란 쉽지 않았다.

피아노를 그만둔 이후 삶의 방향성은 빗물에 떠밀려 가는 물방울 한 조각에 불과했다. 명확한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우연재가 그를 떠미는 물길이었을 뿐이다.

전역 이후 다른 과에 가는 게 좋았을까, 하는 가벼운 후회를 한 적도 있으나 어쨌든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문서윤 자신의 몫이었다.

“그게 무슨 네 책임이야. 원서는 내가 썼는데. 아버지 말씀도 있고 어차피 여기 왔을걸.”

문서윤은 뺨에 눌려 살짝 찌그러진 눈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책임을 지웠다. 하늘에서 불현듯 떨어지는 물방울은 물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물길이 없다면 햇빛에 바짝 말라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운명이었다.

“내가 사대 간다고 했으면 사대 갔을 거면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우연재가 살살 눈웃음을 쳐 댔다. 문서윤은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우연재가 사범대 진학을 희망했다면, 저 역시 원서에 사범대학교를 써넣었을지도 몰랐다. 미국 유학을 포기한 후 우연재의 목표는 하나뿐이었으니 부질없는 가정이기는 했다.

“하긴. 문서윤은 선생님이 더 어울리긴 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우연재가 놀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나 때문 아니라고 하는 건 존나 서운하네…….”

“…….”

“난 문서윤이 미대 간다고 우겼으면 그때부터 미대 입시 했을 텐데.”

“죽을래?”

미술에 젬병인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발끈해 인상을 찌푸리자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같은 수업 듣는 거 왜 말 안 했어? 저번에 현승이 만났을 때 시간표 얘기했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같이 듣겠다고 굳이 2학년 전공을 빼먹은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얘기를 진작 하지 않은 것도 황당했다. 이야기할 시간과 타이밍은 충분했는데 왜 이제 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프라이즈 재밌잖아.”

“네가 언제부터 서프라이즈 좋아했다고.”

문서윤이 기억하는 우연재는 다분히 계획적인 인간이었다. 무엇이든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고 흐릿하게 생각하는 저와 달리 철저하게 본인이 세워 둔 그림 아래에서 움직이길 선호했다. 사람 성향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는데 의아했다.

‘아. 설마…….’

순간 여자 친구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잘은 몰라도 애인 사이에서는 서프라이즈가 드문 일도 아닐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그것도 일주일에 세 시간을 차지하는 수업에서 갑작스레 애인을 마주치면 기쁘지 않을까. 기실 연인들 사이에서 세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겠지만, 문서윤에게는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2년이라는 연애 기간은 많은 것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제가 모르는 우연재가 옆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저번에 너 알바하는 카페 찾아갔을 때 생각나서.”

“뭔 소리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우연재가 가늘게 웃었다. 문서윤은 매끄러운 웃음을 보고 나서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달 정도 지났을까, 2년 만에 만난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으니 손부터 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지 못한 건 상대가 우연재라는 사실을 곧바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저를 그런 식으로 친근하게 끌어안을 사람은 우연재밖에 없거니와 무엇보다 바람결에 실려 온 향수 냄새가 익숙했다.

“빡돈 상태였는데 얼굴 보자마자 화 풀렸잖아.”

“……네가 왜 빡돌아?”

내가 빡돌아야지. 순간적으로 대꾸하려던 문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수료식 이후 연락하지 않은 건 저 역시 마찬가지니, 그 문제로 화를 내는 것도 이상했다. 애인도 아닌 친구 사이에 고작 면회 하나 따위로 섭섭해하는 것도 이상했고.

“아직도 모르네.”

우연재가 말꼬리를 질질 끌며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꽃신 주면 알려 줄게. 언제 줄 거야?”

샐샐거리는 웃음과 가벼운 말투에서 장난기가 묻어 나왔다. 문서윤은 그를 따라 하듯 픽 웃고 말았다.

“생일 때 준다니까. 골라 놔.”

아무래도 군대에 다녀온 후라 일부러 꽃신 운운하는 모양이었다. 꽃신 꽃신 하지만 결국 생일 선물 이야기였다. 생일에 신발을 주고받는 건 열다섯 살부터 시작된 암묵적인 합의였다.

“다들 들어왔습니까?”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붕 떠 있던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문서윤은 곧바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연재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교수의 수업 스타일을 바꾸기에는 2년이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문서윤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난 오리엔테이션의 내용을 곱씹으며 강의 계획서를 대충 가방에 집어넣었다. 조별 과제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그때 누군가가 책상 근처로 다가왔다. 우연재를 향해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안녕.”

“진짜 2학년 전공 들으시네요? 오빠 이 수업 듣는다고 난리 났어요.”

“3학년이 전공 끼어드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 친구랑 같이 들으려고.”

친구라는 단어에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문서윤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문서윤 선배님이시죠? 이번에 복학하신. 저 서지은이에요. 2학년 과대.”

“아……. 단톡 초대해 주신 분 맞으시죠?”

“네, 저 맞아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저 스물한 살이거든요.”

“으음, 알았어. 어제 초대해 줘서 고마워.”

바로 어제 초대된 2학년 단톡방이 떠올랐다. 번호는 과 사무실에서 받았을 테고, 과대라고 하니 초대한 사람 역시 그녀일 터였다. 쏟아지는 대화창이 정신없어 대강 확인만 하고 내버려 둔 터라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저쪽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제가 문서윤이라는 걸 알아본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니에요. 원래 과대가 하는 일인데요, 뭐.”

서지은이 양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두 분 다 개총 오실 거죠?”

“귀찮은데.”

건성으로 대답한 우연재가 느릿느릿 눈동자를 옮겨 왔다. 의사를 묻는 표현에 문서윤은 잠깐 고민하다 서지은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개총은 가야지.”

학과 행사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1학년 때도 필참이 붙은 행사만 참여하다시피 했고,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동기들과 두루두루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쓸데없는 술자리 역시 피하는 편이었다. 술자리 특유의 들뜬 분위기가 불편하기도 했고, 우연재도 종종 빠지곤 해 덩달아 불참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개총도 불참하고 싶었으나 이제 막 복학했으니 동기들 얼굴을 어느 정도 익혀 둬야 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 소꿉친구만 붙들어 맬 수는 없었다.

“하……. 진짜 감사해요, 선배님. 불참 많아지면 제가 혼나거든요.”

“문서윤 가면 나도 갈래.”

우연재가 게으른 말투로 끼어들었다. 우연재가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서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확인에 나섰다.

“오신다고요?”

“문서윤 잘 부탁한다고 얼굴 좀 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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