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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4)화 (14/139)

14화

결국 문서윤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애초에 우연재의 전화를 무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응.”

- 말해.

짧은 어절에 장난기가 가득 섞여 있었다. 문서윤은 이불 안에서 꿈틀거리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뭘.”

- 그 정도로는 안 취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너 잘났다.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전화했어?”

불퉁하게 대답하자 우연재가 나지막하게 소리 내서 웃었다.

- 응.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고마워. 됐어?”

- 성의 없네?

“감사하다고 해 줘?”

문서윤은 태연하게 굴기 위해 죄 없는 베개 끄트머리를 쥐었다 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연재와 처음 통화하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자마자 목소리를 듣고 있어서인지 기분이 묘했다. 옆에 룸메라도 있으면 덜할 것 같은데 방에 혼자 남아 있다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

꼭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아버지한테 네가 아빠 노릇 한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하다.”

- 아, 이번에는 진짜 문서윤 달라고 해야지. 고이 키우겠다고.

“내가 애야?”

문서윤은 이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망상에서 빠져나오려면 몸을 움직이는 게 가장 좋았다.

- 뭐, 다를 것도 없지 않나……. 그나저나 오늘은 겹치는 강의 없네?

“다음 주부터는 수업 안 겹치는 날도 지나다니다 마주칠 것 같은데. 너 거의 경영대에서 살 거잖아.”

공교롭게도 격일 간격으로 같은 전공을 듣게 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전공이 틈틈이 들어찬 시간표였으나,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우연재를 볼 테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3학년인 그가 2학년 전공을 듣는다는 소식에 당황한 게 고작 어제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손바닥 뒤집히듯 바뀐 마음이 조금 우스웠다.

- 하긴. 이제 마음만 먹으면 문서윤 얼굴 볼 수 있겠네. 학교라 도망도 못 갈 테고.

순간 당황한 문서윤은 입술만 지르물었다. 당황하라고 한 말인지 우연재가 또다시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내일 봐, 그럼.

“……끊는다.”

문서윤은 핸드폰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뒤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우연재와 연애라니, 애인까지 있는 사람을 상대로 상상하기에는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 * *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더니 어느덧 금요일이었다. 문서윤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캐리어 위치를 확인하며 침대를 지나쳤다. 이번 주까지 오리엔테이션 기간이니 룸메이트는 다음 주에 입주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쯤 되자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다음 주면 얼굴 보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기숙사를 나섰다.

세 시간을 꽉 채운 오리엔테이션은 이번 학기 들어서 처음이었다. 확실히 오랜만에 강의실에 앉아 있으려니까 쉽지가 않았다. 이래서 공부는 어떻게 하지, 시답잖은 고민을 할 때였다.

“서윤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우연재가 힐긋 시선을 보내왔다. 문서윤은 뭐냐는 듯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다.

“저녁 먹고 들어갈래?”

“이 시간에?”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이른 시간이었다.

“선주가 너랑 밥 먹고 싶다는데.”

선주라는 이름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우연재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으니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히 예상해 왔으나 그렇다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문서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그럴싸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음 주부터 저녁에 알바 간다며.”

“아, 그렇지.”

“알바는 언제까지 할 거야? 나랑 놀아 주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우연재가 섭섭하다는 듯 뺨을 찡그렸다. 언뜻 뚱해 보이는 시선은 장난기가 섞인 채였다.

“계속할 거라니까. ……가자, 그럼.”

문서윤은 목구멍에서 턱 걸리려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어차피 김선주와의 만남을 영영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약속을 미루는 것도 언젠가는 한계에 도달할 테다.

오래된 소꿉친구이자 제일 친한 친구라는 이름표가 그녀의 관심을 잡아챘을 게 분명했다. 같은 과도 아니고 계속해서 얼굴을 부딪칠 사이도 아니니, 차라리 빨리 만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매는 빨리 맞는 편이 나았다.

“서윤이는 뭐 좋아해?”

조수석에 앉은 김선주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창밖을 응시하던 문서윤은 퍼뜩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난 딱히 가리는 거 없어.”

“그래? 이왕이면 너 좋아하는 거 먹고 싶은데. 뭐 먹지? 시간이 이래서 애매하네.”

“문서윤 해산물 좋아해.”

“그럼 우리 초밥 먹으러 갈까? 서윤아. 괜찮아?”

우연재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 그녀가 의사를 확인하듯 또다시 눈길을 보내왔다.

“괜찮아.”

“좋아. 그럼 초밥으로 결정. 어디 갈까? 우리 저번에 간 데 갈까? 깔끔하고 맛있던데.”

김선주는 첫인상만큼이나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문서윤은 만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와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 공간에서 숨이 막힐 듯한 어색함에 짓눌린 건 저뿐인 듯했다.

“갑자기 밥 먹자고 해서 미안해. 내가 야작이 많아서 이번 주 아니면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더라고. 근데 연재랑 친하다길래 솔직히 궁금해서.”

우연재가 운전을 시작하자 김선주가 살짝 몸을 틀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녀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거절할 수 있는데도 꾸역꾸역 나온 건 문서윤 자신이었다.

“아냐. 나도 궁금했어. 우연재 대학 와서 여자 친구 사귄 건 처음이라.”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잔가시처럼 돌변해 꺼끌꺼끌 목을 찔러 댔다. 문서윤은 손톱 끝으로 죄 없는 여린 살을 짓누르며 간신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야작이면 미대야?”

“뭐야. 우연재 너 내 얘기 하나도 안 했어? 미대 맞아. 서양화과. 작년엔 휴학해서 실컷 놀았는데, 올해는 놀 시간도 없는 거 있지.”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김선주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젤과 캔버스, 그리고 물감이 사랑스러운 이미지에 제격이었다.

불현듯 우연재가 내뱉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문서윤이 미대 간다고 우겼으면 그때부터 미대 입시 했을 텐데.’

그래서 미대 얘기 꺼냈나. 문서윤은 씁쓸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재의 차 안에서,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무섭도록 낯설게 느껴졌다.

도착한 장소는 월요일에도 왔던 초밥집이었다. 무난한 대화 주제 몇 개가 화두에 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대화에 집중하며 표정을 관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꼬리 근육이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직원이 가져다준 음식 덕분에 문서윤은 간신히 시선을 내리깔 수 있었다.

여자 친구와 나란히 앉아 있는 우연재를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역이었다.

“업계에서 유명해. 게이만 아니었어도 다가가는 여자들 많았을 텐데.”

어색함과 고역을 견뎌 내며 식사에 몰두하기 위해 애쓴 지도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대화 도중 튀어나온 게이라는 단어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우뚝 젓가락질을 멈췄다. 의식할 새도 없이 우연재의 표정을 살피게 됐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우연재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선주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서윤은 직감했다.

“게이니 뭐니…….”

서로를 알아 온 지 자그마치 15년이 넘었다.

“그딴 얘기를 왜 해.”

혐오스러운 것을 마주한 순간 우연재의 눈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콧잔등이 얼마나 찡그려지는지, 입술이 어떤 식으로 비틀리는지, 모르지 않았다.

문서윤은 단두대에 목을 내놓은 사람처럼 고요하게 숨을 삼켰다.

“밥맛 떨어지게.”

보잘것없는 마음을 방어하기에는 지나치게 나약한 수단이었다.

“밥맛이 왜 떨어져. 자기 은근 보수적이더라? 경영이라 그런가? 내 주변은 오픈 게이도 꽤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김선주가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장난스레 우연재를 흘겨봤다. 덕분에 문서윤은 그 틈을 타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살았다.

머릿속을 잠식한 생각은 살았다는 안도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홑사랑 상대의 짝이 만들어 준 틈 덕분에 간신히 숨을 고를 수가 있었다.

김선주의 목소리가 아닌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면 들켰을 게 분명했다. 우연재라면 상대가 자신이라는 건 몰라도,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딱딱하게 굴었을 테니까.

“더럽잖아.”

혐오 발언을 내뱉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나긋한 목소리가 평온하게 이어졌다.

“남자가 남자한테 발정하는 게 정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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