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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5)화 (15/139)

15화

단두대에 내놓은 목이 여태까지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우연재의 말이 끝을 맺을 때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 보면. 날이 무딘 건지, 아니면 마음이 질긴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문서윤은 간신히 초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 음식이 있을 때는 말을 하지 않는 버릇을 우연재 역시 알고 있으니, 쓸데없이 말을 시키지 않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너……. 아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 욕먹어.”

“애초에 남자들은 그런 얘기 안 해. 봐, 애 놀랐잖아.”

갑작스러운 호명에 지레 찔린 문서윤은 약하게 기침을 내뱉으며 물을 마셨다. 김선주가 금세 동이 난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 내렸다.

“미안. 친구 여자 친구랑 처음 보는 자리인데 이런 주제는 불편했겠다. 하마터면 연재랑 싸우는 꼴까지 보여 줄 뻔했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도리어 죄책감을 자극했다.

“아냐. 괜찮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 역시 불편한 대화 주제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 창백해졌는데.”

문서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우연재를 마주 봤다. 찌푸려진 눈가가 익숙했다. 언제 불쾌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으레 걱정할 때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살았다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들키지 않은 게 확실했다.

“괜찮다니까. 아까 사레 걸려서 그래.”

살았다는 생각에 뒤이어 미약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말에 갈기갈기 찢긴 마음은 언제나 그랬듯 뒤편으로 밀려났다. 문서윤은 상처받은 마음을 못 본 척 외면했다.

“둘이 몇 살 때부터 친구였어?”

갑작스레 끊겨 버린 대화에 책임감을 느꼈는지 김선주가 자연스레 주제를 돌렸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이었던 것 같은데.”

차라리 말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화를 들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보다 입술 전체를 움직이는 편이 수월했다.

“여섯 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 내리던 우연재는 짧은 단어로 문서윤의 헷갈림을 정정했다.

“여섯 살? 와, 그럼 17년이야?”

“아, 맞아. 여섯 살이다. 17년이라고 하니까 길게 느껴지긴 하네.”

17년. 문서윤은 새삼스럽게 시간의 퇴적을 곱씹었다. 말을 하고 있는 덕에 입가의 근육이 풀렸는지, 어느 정도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럼 학교도 같이 나온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응. 사립이라.”

“괜히 연재가 너랑 제일 친하다고 한 게 아니었구나. 우연재 어릴 때도 지금 같았어?”

“지금 같은 게 어떤 의미인데.”

우연재가 김선주 앞에 놓인 그릇을 가져가며 피식 웃었다. 문서윤은 그리로 시선을 보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의 우연재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어릴 때도 지금처럼 깔끔 떨었어? 자기 얘기도 잘 안 하고?”

“……지금이 더 나아진 편인 것 같은데.”

우연재가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건 문서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제가 우연재에게만 털어놓는 이야기가 있듯이, 우연재 역시 저에게만 말하는 시답잖은 부분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 친구의 면전에 대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문서윤은 말을 대충 뭉뚱그렸다.

‘나도 웃기네.’

어쩌면 김선주를 향한 기만일지도 몰랐다. 우연재의 조그마한 부분이나마 혼자 알고 싶다는 욕심에서 기인한, 그런 기만이었다. 문서윤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진짜? 지금이 더 나아진 편이야? 얘처럼 깔끔 떠는 남자 처음 봤어.”

“나 씹고 싶어서 쟤 불렀어?”

“응. 앞으로도 너 씹고 싶을 때 서윤이한테 연락해야겠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김선주의 그릇에는 붉은색 초밥이 여럿 올라와 있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우연재가 그녀의 그릇을 가져간 이유를 깨달았다. 초밥을 바꿔 주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타인과 젓가락이 섞이는 게 싫어 한사람 몫의 음식이 따로 나오는 식당을 선호하는 우연재가.

간신히 씹어 넘긴 초밥이 위에서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서윤아. 너는 여자 친구 없어?”

선홍색 연어 초밥을 집은 김선주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문서윤은 그녀를 따라 억지로 초밥을 먹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 않으면 상대가 불편해할 것 같았다. 제 취향을 따라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음식이 입에 든 걸 핑계 삼아 그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불편한 대화 주제였으나 김선주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다.

“왜? 예뻐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아, 남자한테 이런 말은 실례인가. 아무튼 내 친구 소개해 줄까?”

“괜찮아. 그런 자리 조금 불편해서.”

“아쉽다. 마음 바뀌면 말해 줘. 나 친구들 많아.”

김선주는 강권하지 않았다. 우연재가 옆에서 말을 얹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목소리만 인식할 수 있을 뿐, 제대로 된 의미는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대화로 신경을 분산시키며 괜찮은 척 구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꾸역꾸역 못 본 척 미뤄 둔 상처가 기어코 온 신경을 헤집기 시작했다.

‘더럽잖아. 남자가 남자한테 발정하는 게 정상이야?’

우연재가 그렇게까지 역겨워할 줄은 몰랐다. 딱히 호모포빅한 발언을 한 적이 없어 무관심한 줄로만 알았더니 순전히 제 착각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관심하리란 것 역시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과 함께 목 안쪽이 홧홧해지며 열이 올랐다. 자칫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꼴사납게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목구멍으로 역류하려는 감정을 욱여넣기 위해 체할 게 분명한 초밥을 억지로 삼켰다.

비늘과 껍질이 완전히 해체된 채 여린 속살만 드러낸 음식이 악의 없는 목소리에 완벽히 난자당한 마음과 겹쳐 보였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꼭꼭 씹어 감춰야만 했다. 우연재가 보지 못하도록.

끝내 소화하지 못한 마음이 저를 괴롭힐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아버지에게서 온 메시지가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저녁 안 먹었으면 집에 들르렴.]

커피를 마시자는 김선주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차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그녀에게 맞춰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녀보다 우연재를 마주 보는 게 더 힘들었다.

“미안. 아버지 연락 와서 본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교수님?”

“응. 기숙사 들어가고 한 번도 안 갔더니 문자 보내셨네.”

“아쉽다. 지금 들어가야 돼? 한 시간만 있다가 가는 것도 힘들어?”

“얘네 아버지 엄해서 안 돼.”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우연재가 곤란한 제안을 깔끔하게 쳐 냈다.

“아, 그래? 많이 엄하신가 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봐, 서윤아.”

“미안해.”

“아냐. 갑자기 만나자고 했는데, 내가 더 미안하지.”

여기서 헤어지려는데 우연재가 차를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타. 태워 줄게.”

“택시 타고 가면 돼.”

대답이 지나치게 빨랐던 모양이다. 우연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수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네 차 알잖아. 혹시나 마주치면 들어왔다 가라고 하실 수도 있고. 선주도 있는데 택시 타고 갈게.”

“……알았어. 갔다 오면 연락해.”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고 나면 늘 우연재에게 연락하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발언이었다.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차 김선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 볼게. 연재랑 데이트 잘하고.”

“잘 가. 다음에 시간 되면 또 봐.”

두 사람은 곧 익숙한 차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문서윤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뒤따라온 택시를 잡아탔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인상 좋은 택시 기사가 미소와 함께 그를 반겼다.

“한국 대학교 기숙사요.”

순식간에 탈력감이 찾아왔다. 문서윤은 간신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목적지를 읊어 내려갔다. 뒤이어 겨우 움직인 손가락이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냈다.

[죄송해요. 몸이 안 좋아서 다음 주에 갈게요.]

고작 두 시간 사이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완전히 낡아 버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기숙사까지 들어왔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곧장 화장실로 달려간 문서윤은 먹은 걸 모조리 게워 냈다. 소꿉친구를 향한 음침하고 역겨운 감정이 한데 뒤섞여 오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

버리지도 못할 마음을 버리려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물을 내린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가까스로 세면대 앞에 선 문서윤은 입부터 헹군 뒤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손바닥은 물론 뺨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멍한 눈동자가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고 끊임없이 차오르는 물을 멀거니 응시했다. 머리카락과 턱 끝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들은 그 기세에 휩쓸려 금세 자취를 감췄다.

“…….”

얼굴은 물론 반쯤 젖은 머리카락이 마를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발걸음을 떼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두 손을 놓는 순간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세면대에 고정된 시선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졌다. 수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제외하면 떨어질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장소에서 뚝뚝 낙하하는 물방울은 멈출 줄을 몰랐다. 문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흐느낌도 내놓지 못해 여태 자각하지 못했다.

삑삑삑삑.

그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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