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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6)화 (16/139)

16화

눈물샘이 고장 난 도자기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던 문서윤은 낯선 소리를 감지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팔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눈물을 훔쳐 내는 것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먼저였다.

“어……. 저기, 괜찮으세요?”

당황스러운 기색 뒤로 따뜻한 손이 등을 건드렸다.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 미안함과 창피함이 몰려왔다. 문서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세면대 물을 잠그고는 눈가를 대충 훔쳐 내며 몸을 돌렸다. 우선 처음 본 룸메이트에게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 아뇨. 괜찮으신가 해서요. 혹시 제가 뭐 도울 거라도…….”

“괜찮…….”

잔뜩 젖은 손을 바지에 닦아 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자 상대 역시 헛것을 본 사람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문서윤?”

“태은, 형?”

“뭐야. 내 룸메가 너였어? 아니, 근데 너 왜 울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문서윤은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 위로 떨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자그마치 1년 6개월을 함께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군대에서도 문서윤 우는 꼴을 못 봤는데 깜짝 놀랐네.”

문서윤은 불쑥 내밀어진 생수병을 받아 눈가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감각이 열 오른 눈두덩이를 식히자 얕게 헐떡이던 호흡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우리 강아지 어떤 개새끼가 울렸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침대 옆에 주저앉은 남자가 손자를 어르는 할아버지처럼 호통을 쳐 댔다. 날 티 나는 외모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문서윤은 찬 기운이 맴도는 생수병으로 왼쪽 눈두덩이를 누르며 간신히 뜬 오른쪽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만 놀려요.”

“놀리는 거 아닌데? 개새끼 죽여 놓으려고 그러지. 그런데 지금 그 눈빛은 무슨 의미지?”

“형은 진짜 한결같구나 싶어서요.”

“사람이 반년 만에 변하면 그건 죽는다는 신호야.”

씨익 웃은 남자는 문서윤의 군 동기 중 한 명인 남태은이었다. 생활관에서 바로 옆자리를 쓰며 친해진 사이였다. 군 생활을 하며 만난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괜찮은 사람이었다.

“저 형 죽은 줄 알았어요. 제대하자마자 연락 안 되던데.”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덜 머쓱했으려나. 친한 형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자 뺨으로 민망함이 스몄다. 그것도 제대 후 처음 보는 자리였다. 문서윤은 어색한 공기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남태은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하, 그 미친 새끼가……. 아무튼 핸드폰 박살 나서 그랬어. 하필 메신저 탈퇴한 상태라서 연락처도 다 날아갔고.”

남태은이 진절머리를 치며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같은 학교라 지나다니면서 마주치지 않을까 싶긴 했어요.”

“나도 그 생각 하긴 했는데 설마하니 네가 룸메일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왜 울었냐니까? 학교 폭력, 뭐 이런 거 아니지?”

“형. 저 스물세 살이에요.”

“야. 대학은 뭐 그런 거 없는 줄 아냐? 일진 놀이 하는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요즘도 정신 빠진 새끼들 많다.”

나흘 전 있었던 일이 떠올라 문서윤은 옅게 웃고 말았다.

생수통에 파묻은 눈두덩이가 미지근해져 갔다. 오랜만에 울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옆에 있어서인지 눈물은 멈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헤집어진 상처는 계속해서 아귀를 벌렸다.

“서윤아.”

잠깐의 침묵 후 남태은이 입을 열었다. 문서윤은 생수병을 아래로 내려 두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태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담배를 가르친 장본인이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문가를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문서윤이 담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처음 담배를 문 날은 아버지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새삼스레 그의 재혼에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했을 뿐이다.

때마침 남태은이 담배를 피우러 가던 길이었고 문서윤은 그렇게 담배를 시작했다. 사실 시작한다는 단어도 거창했다. 그렇게 자주 피우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정말 가끔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불필요한 안부 연락 따위가 오거나 혹은 우연재가 생각나는 날이거나.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후자가 압도적이기는 했다.

“와, 개 춥다.”

흡연 구역은 기숙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 패딩을 입은 남태은이 호들갑을 떨며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자세히 보니 운동화도 아닌 맨발에 슬리퍼 차림새였다. 탈색한 머리카락과 대중없는 옷차림이 속된 말로 양아치처럼 보였다. 어쩐지 패딩 안에는 문신이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누가 이런 날씨에 슬리퍼 신고 다녀요.”

우연재에게 영향을 받아 문서윤은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중요시하는 편이었다. 꼭 버릇 때문이 아니더라도 초봄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어쭈. 이게 어디서 잔소리지? 형님 담배에 불이나 붙여 봐라.”

어허, 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웃겼다. 문서윤은 픽 웃으며 남태은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짧게 연기를 들이마신 남자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서윤은 첫 한 모금을 제외하고는 빨아들이지 않아 홀로 타들어 가는 담배를 멀거니 응시했다.

“앉아.”

남태은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문서윤은 말없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학교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 울었는데.”

안부를 묻기라도 하듯 평온한 어조에 문서윤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소꿉친구를 좋아하는데 걔가 남자고, 오늘 걔한테 게이는 더럽다는 말을 들어서요, 하고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자그마한 달싹임을 망설임으로 해석했는지 남태은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군대에서 한 번도 안 운 새끼가 너랑 나야.”

남태은의 말대로 생활관을 함께 쓴 동기 중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수많은 동기 중에서도 남태은과 유독 친하게 지낸 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도 이상한 유대감이 있었다.

“보통은 가족들한테 처음 편지 오면 처울거든? 너 그때도 안 울었어. 뭐, 콩가루 집안이면 다들 안 울긴 하겠지만.”

감성에 빠지기에는 군대란 지나치게 적절한 도피처였다. 오히려 간혹 아버지에게서 오는 연락이 더 스트레스였다. 허울 좋은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머리를 차지해 하루 종일 속이 울렁거렸다.

‘편지 보낸 게 우연재였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울었으려나. 모르겠다.

“형은…….”

“뭐.”

“그때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요? 군대에 있었을 때.”

남태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옅게 팬 볼 때문에 반항적인 인상이 한층 강해졌다.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가도 날 티 나는 태도에 다들 도망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 운 거 좋아하는 사람 때문이지?”

기습적인 물음에 문서윤은 담배를 입술 사이로 물며 고개를 돌렸다. 남태은이 알 만하다는 듯 담배를 쥔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내 푸욱, 짙은 한숨이 뒤이어졌다.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겪은 사람처럼 온갖 풍파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문서윤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제 감정이 정말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감정인지 궁금해졌다.

“아닌 것 같은데…….”

“뭐?”

무심코 튀어나온 혼잣말을 남태은이 되물었다.

“아니에요.”

문서윤은 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군 생활을 하며 볼꼴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인 데다 겉모습과 달리 속이 깊은 사람인 걸 알지만 무턱대고 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야, 똥강아지.”

자리에서 일어선 남태은이 담배를 비벼 끄며 어깨를 움츠렸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먹자고.”

문서윤은 남태은을 따라 얼떨결에 담배부터 껐다. 오랜만에 입에 댔는데도 몇 모금 피우지 않아서인지 별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잖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자.”

씨익 웃는 미소가 어딘가 얄궂어 보였다.

* * *

개강 시즌의 금요일 밤. 술집은 어딜 가든 만석이었다. 남태은은 요령 좋게 문서윤을 조용한 술집으로 이끌었다. 대학생들은 발도 들여놓지 않을 만한 낡은 술집이었다.

“여기 안주 끝내줘.”

작고 허름한 건물 안에는 테이블 몇 개가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가정집 조명처럼 환한 백열등 덕분에 술집 특유의 분위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술집 같지 않은 술집이었다.

“사장님. 육회 하나랑 새우튀김 하나, 우동 하나요. 소주 네 병도요.”

“네 병이요?”

문서윤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나 두 병, 너 두 병.”

“저 소주 두 병 다 못 마셔요.”

“어허. 군필자가 소주 두 병도 못 마시면 되냐.”

남태은이 인과관계라고는 조금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말대답해 봤자 한 소리 들을 게 뻔해 문서윤은 잠자코 그가 내미는 젓가락만 받아 들었다. 먹은 걸 죄다 게워 낸 터라 딱히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받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테이블이 듬성듬성 차기 시작했다. 나이 대를 보니 죄다 사오십 대의 중장년층이었다. 이런 술집에 와 보기는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여기 육회랑 튀김, 우동 하나. 그리고 소주 네 병. 맞지?”

“감사합니다.”

우연재는 절대 안 오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금세 안주가 나왔다. 맛있다는 남태은의 말대로 예상보다 훨씬 그럴싸한 비주얼이었다.

“먹어.”

남태은이 소주 뚜껑을 까며 새우튀김을 향해 고갯짓했다. 곧 맥주잔 안으로 투명한 액체가 꼴꼴 소리를 내며 차츰차츰 채워졌다. 맥주잔에 소주라니. 질색하며 거절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진동음을 알렸다. 문서윤은 옆에 둔 코트를 뒤져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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