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누군데?”
멀거니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자 남태은이 솜씨 좋게 핸드폰을 훔쳐 갔다. 이름을 확인한 그는 개구쟁이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연재? 걔지? 너 울린 사람.”
핸드폰을 돌려주는 손길이 순순했다.
“아니에요.”
“우리 강아지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는데 아니라고? 이름부터 남자 겁나 꼬이겠구먼.”
아무래도 우연재를 여자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굴에서 티가 났나 싶어 문서윤은 괜히 뺨을 문질렀다. 이 와중에도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려 댔다. 기숙사에 홀로 있었다면 받았을 게 분명한 전화였다.
“문서윤아, 끊어라.”
심드렁한 얼굴로 육회를 집어 먹던 남태은이 결국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나랑 술 마실 때는 압수.”
문서윤은 우연재의 이름이 떠 있을 핸드폰을 멀거니 쳐다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 * *
응. 부드러운 목소리 대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기계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우연재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까맣게 변한 액정 위로 표정 없는 얼굴이 비쳤다.
반응 없는 핸드폰을 집요하게 응시하기를 몇 분, 그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끊기기 직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연재야. 오랜만이구나.
문서윤의 아버지인 문 교수였다.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우연재는 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싸늘한 낯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 나야 늘 잘 지내지.
“오랜만에 안부 인사드릴 겸 전화드렸어요.”
- 하하. 고맙구나. 서윤이랑은 잘 지내고 있고?
서늘한 눈가가 이상을 감지한 포식자처럼 가느다랗게 변모했다.
“항상 잘 지내죠. 제 얘기 안 했나 보네요.”
- 그놈이 기숙사 들어간 후에 나올 생각을 해야 말이지.
문서윤이 본가에 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능숙하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우연재는 헛웃음을 내뱉는 대신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 근래에 서윤이 못 보셨나 봐요.”
- 빠르면 다음 주에야 볼 것 같은데……. 같이 식사할까?
“좋죠. 서윤이 통해서 말씀해 주세요.”
- 그래, 그러마.
문 교수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간단했다. 본가에 갔다면 지금쯤 전화가 왔어야 하는데 여태 연락이 없었으니까. 연락은커녕 전화를 씹는 게 이상해 확인해 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본가에 들르지 않았다는 소식뿐이었다.
왜 거짓말을 했지.
“그리고 언제 한번 저희 아버지 모시고 같이 식사하면 좋을 텐데요.”
- 회장님? 그래, 좋지.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 우선 서윤이랑 같이 뵐게요.”
- 그래. 회장님도 바쁘실 텐데 그 얘기는 천천히 하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그럼 들어가세요, 교수님.”
- 다음에 보자꾸나.
우연재는 새까맣게 변한 화면을 내려다보다 느릿하게 시선을 끌어 올렸다.
“왜 자꾸 도망가지, 우리 서윤이가…….”
고층 오피스텔에서 저 멀리 반짝이는 학교 건물을 내다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건성으로 쓸어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년이면 충분했던 것 같은데.”
권태롭게 늘어지는 목소리 위로 짜증스러움이 깃들었다.
* * *
문서윤은 늘 애정이 고팠다.
어머니는 충만한 애정을 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유약한 육체는 미처 그녀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고, 아버지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의 애정이 잠깐 빛을 비출 때는 문서윤이 피아노를 칠 때가 전부였다.
그래서 문서윤은 피아노가 좋았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머니 옆에 앉아 그녀와 함께 건반을 누르던 순간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온 아버지가 뒤에서 두 사람을 껴안으면 서툴게 흐르던 곡조가 뚝 끊기며 웃음소리가 선율을 대신했다. 무척이나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이었다.
“우리 서윤이 태어난 게 피아노 때문인데.”
“어떻게요? 사람은 피아노 때문에 태어나는 거 아닌데……. 사랑 때문에 태어나는 건데.”
여섯 살의 문서윤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제 딴에 똘망똘망한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엄마가 아빠랑 만난 게 피아노 때문이니까? 엄마가 취미로 피아노를 쳤는데, 소개받은 선생님이 아빠였거든.”
“아빠는 피아노 선생님이니까?”
“응. 그때는 선생님. 조금 있으면 교수님.”
꽤 로맨틱한 러브스토리였다. 그들의 만남을 생각해 보면 자식이 피아노를 시작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재능 있어. 우리 아들은 피아니스트로 키우면 좋을 것 같아.”
한밤중에 깨어나 물을 마시려던 아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몸을 숨겼다. 벽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가 왁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가 부모님을 놀라게 할 심산이었다. 장난을 칠 생각에 혼자 키득거리는데 걱정스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애 진로 정한 거야? 난 서윤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자기야. 예체능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돼.”
“애가 흥미 보이는 걸로 충분하잖아. 당신 욕심 충족시키려고 하지 마.”
“재능이 있는데 썩히겠다고?”
딱히 높은 언성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말다툼은 익숙하지 않았다. 냉랭한 공기를 감지한 아이는 벽 바깥으로 튀어 나가는 대신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게 아니라 서윤이가 피아노를 계속하고 싶어 하면 그때 생각해 보자고. 벌써부터 피아니스트니, 뭐니 너무 거창하잖아. 부모 욕심이야.”
“애 재능 살려 주는 것도 부모 역할이야. 당신은 요양에나 힘써. 서윤이 교육은 내가 맡을 테니까. 가뜩이나 몸도 약한 사람이.”
“서윤이 고작 여섯 살이야. 사랑 많이 해 줘도 모자라. 내가 조금 힘들면 어때. 난 당신이랑 서윤이 행복한 것만 봐도 좋아.”
부드럽게 풀린 공기가 느껴졌다. 아이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으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공중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이 꼭 피아노를 치는 모습과 비슷했다.
‘내가 피아노를 계속 치면 엄마도 아빠도 행복하지 않을까?’
진로라느니 재능이라느니 부모님의 대화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면 엄마도, 아빠도 행복하리라 여겼다. 엄마 아빠가 말다툼한 이유가 피아노 때문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문서윤은 마음속 보물 목록에 피아노를 끼워 넣었다.
“서윤아.”
“응?”
“손.”
잡으라는 뜻 같아 문서윤은 덜컥 제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손을 뻗은 사람은 어느새 마음속 보물 목록에 추가된 소꿉친구였다. 매일같이 만나 놀다 보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까먹었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어디 가?”
“뒤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온 덕분에 이제는 눈 감고도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서윤은 우연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졸랑졸랑 걸었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 발자국 정도 앞서가던 우연재가 하늘을 힐긋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려 주변을 살피고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손을 이끌었다.
두 아이는 너른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았다. 커다란 나무와 풍성한 잎사귀들은 약한 빗줄기를 막아 주기에 충분했다.
“비 온다. 하늘 맑은데 왜 비 오지?”
문서윤은 빗물을 받기 위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여우비야.”
“여우비?”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문서윤은 빗물이 고여 축축해진 손을 거두며 옆에 앉은 친구를 바라봤다. 겨울에 태어났는데도 우연재는 저보다 키가 컸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1학년 중에서도 제일 클 것 같았다.
“맑은 날 내리는 소나기를 여우비라고 한대.”
“이름 예쁘다. 연재 너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
“책 읽잖아.”
우연재가 다소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부터 잘 웃는 편은 아니라 문서윤은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연재는 예쁘니까 웃으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똑똑해지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 봐. 난 피아노밖에 칠 줄 모르는데.”
“잘하는 것만 하면 되지. 난 피아노 칠 줄 몰라.”
“우리 집 놀러 오면 쳐 줄게.”
문서윤은 배시시 웃으며 무릎을 한데 끌어모았다. 그 위로 뺨을 기대며 옆에 앉은 친구를 지그시 쳐다보자 우연재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왜?”
왜 뚫어져라 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예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