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8)화 (18/139)

18화

문서윤은 솔직하게 감상을 표현했다. 예쁘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연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보다 진한 색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예쁜 건 네가 예쁜 거지.”

“아니야. 네가 더 예뻐. 우리 반 여자애들도 연재 네가 제일 예쁘대.”

어린애 시선으로 보기에도 우연재는 예뻤다. 지금도 인기 많은데 초등학교 들어가면 더 많아지겠지? 어쩐지 가장 친한 친구를 빼앗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문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초등학교 입학해도 나랑 제일 친하게 지내야 돼.”

“나 친구 문서윤밖에 없는데?”

“그럼 유치원 친구들은 뭐야? 승우랑 재윤이는?”

“걔들은 그냥 아는 애들.”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문서윤은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어린애 특유의 천진한 소유욕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대답이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연재 너랑만 친구 할게.”

“그럼 너 내 거야?”

내 거? 잠깐 고민한 문서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친한 친구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약속해, 그럼.”

우연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문서윤은 저보다 살짝 긴 손가락에 마찬가지로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엉킨 손가락이 아닌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우연재가 갑자기 상체를 기울였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에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왜 오늘은 뺨이 아니라 입술에 하지? 문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입술에 뽀뽀해?”

“내 거에는 이렇게 하는 거래.”

“그래?”

그렇구나. 문서윤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고는 우연재가 한 것처럼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갑자기 뽀뽀를 할 줄 몰랐던지 우연재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뒤로 물러서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왜? 어, 비 그쳤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친 채였다. 문서윤은 놀 생각에 신이 나 우연재의 손을 잡아끌었다.

“연재야. 저기 무지개 떴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푸른 하늘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새겨졌다. 문서윤은 해맑게 웃으며 무지개를 가리켰다. 비가 내린 뒤의 싱그러운 풀 냄새도,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도, 꼭 맞잡은 손도 전부 좋았다.

환한 웃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들었다. 어머니의 병마가 앗아 간 것은 그녀의 생기뿐만이 아니었다.

“서윤아. 연습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정도로는 안 돼.”

피곤한 표정의 아버지가 안경을 벗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마 그를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문서윤은 피아노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규칙적으로 정렬된 하얗고 검은 건반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 때문에 마음 복잡한 건 알겠는데 이럴수록 네가 잘해야 엄마가 기뻐하지. 중앙 콩쿠르 얼마 안 남았어.”

“네. 열심히 할게요.”

재능이 있긴 했을까,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어깨를 두드릴수록 문서윤은 작아지기만 했다.

“그래. 난 우리 아들 믿는다. 내년이면 중학생인데 열심히 해야지. 예중을 보냈어야 하는데……. 후, 회장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은 선생 붙여 줬으니까.”

회장님이라면 우연재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계획과 달리 내로라하는 예술 중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지만, 문서윤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피아노는 애정이 아닌 관성이 된 지 오래였다. 열의와 욕심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버티는 게 부쩍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쳐 볼까?”

문서윤은 습관처럼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연재라는 도피처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야. 문서윤.”

학교가 끝나고 레슨을 받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문서윤은 책가방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친하지 않은 반 친구가 책상에 몸을 기대더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위아래로 흔드는 시늉을 했다. 저게 뭐지.

“너 자위 해 봤냐?”

“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문서윤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너같이 생긴 애도 자위하나 싶어서.”

외모랑 자위가 무슨 상관인데? 의문에 뒤이어 불쾌함이 찾아왔다. 아무리 중2병이 찾아오는 나이라지만, 면전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 진현이는 문서윤 자위 여부가 왜 궁금할까.”

대꾸하기도 전에 책상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 여, 연재야.”

친근함의 표시처럼 어깨 위에 슬쩍 둘린 팔 때문인지, 같은 반 친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재 옆에 서자 꼭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성장기라는 사실을 고려해도 우연재는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컸다.

“문서윤이 씨발, 자위 안 해 봤으면 네가 대딸이라도 쳐 주게?”

“아니, 그게 아니라…….”

“으응. 그게 아니면 뭐어? 쟤가 네 딸감이야?”

“나는 그냥, 악!”

쿠당탕 소리와 함께 책상이 넘어졌다. 우연재가 친,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사고였다.

문서윤은 우연재에게서 사고를 그만 치겠다는 약속을 얻어 냈다.

열여섯.

문서윤은 오랫동안 간직해 온 마음속 보물 목록에서 소꿉친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었다.

“울었어?”

“안 울었어.”

문서윤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노크하는 매너는 잊었는지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온 우연재가 그답지 않게 외출복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 좀 봐.”

“안 울었다니까.”

차라리 누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걸 들킨 바람에 자는 척을 하기도 어려웠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자 우연재가 아무렇지 않게 뺨을 쥐어 얼굴을 확인했다. 시선이 순식간에 뒤엉키며 긴 속눈썹이 당황에 젖어 팔랑거렸다. 문서윤은 창백한 얼굴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울었네.”

곧 커다란 손바닥이 눈두덩이를 덮었다. 시원한 기운이 고여 있던 열을 앗아 갔다.

“차가워.”

“시원한 거겠지.”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에어컨이 공기를 서늘하게 해 준들, 눈두덩이에 고인 열기까지 앗아 가지는 못했다.

우연재가 눈가를 덮은 상태 그대로 힘을 실은 덕분에 문서윤은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커다란 손이 주는 압박감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문서윤 때문에 손에 얼음찜질하고 왔잖아, 나.”

“……진짜야?”

“진짠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연재가 픽, 웃은 것 같았다. 손바닥이 얼굴에 닿아 있어 자그마한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릴 때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바람이 통했는지, 우연재는 이제 곧잘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했다.

“나 아니면 누가 달래 줘.”

“그러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한 달이었다. 그리고 문서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우연재뿐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 앞에서 우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문서윤은 습관처럼 뺨 안쪽을 깨물었다. 우는 모습을 보인 건 장례식장으로 충분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온 우연재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저를 쳐다보다 말없이 품을 내주었다.

“문서윤.”

언제 장난스럽게 굴었냐는 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급작스레 낮아졌다. 미지근해진 손바닥이 순식간에 거둬진 것과 동시였다. 냉랭한 부름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우연재를 마주 봤다.

“맞았어?”

“아…….”

뺨이 얕게 찌푸려졌다. 티가 날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교수님이 너 때려?”

“맞을 만해서 맞은 거야.”

문서윤은 제 뺨을 건드리는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렸다. 붙잡은 손목은 서늘한 손바닥과 달리 뜨끈뜨끈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피아노 그만두겠다고 해서…….”

“그래서 애 뺨을 때렸다고?”

우연재가 대놓고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눈치가 보여 문서윤은 말을 어물거렸다. 뺨이 부었다는 사실에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도 우연재가 화를 내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10년 넘게 쳤는데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까 화나셨겠지. 가뜩이나 엄마 돌아가셔서 신경 예민하신데.”

“피아노 그만둔다고 때릴 게 아니라 애 상태부터 챙기는 게 먼저 같은데.”

문서윤은 여태 아버지께 맞은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맞을 만해서 맞았다고 얘기한 것도 진심이었다. 자식에게 10년 넘게 투자했는데,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면 누구나 화가 날 테다. 그래서 뺨을 맞았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교수님만 신경 예민해? 따지고 보면 네가 더 그럴 텐데. 부부랑 자식이 같은 것도 아니고……. 교수님은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어도 너는…… 씹, 하나뿐인 엄마 잃은 건데.”

그래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슬픈 건 똑같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화를 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와 함께 새삼스레 저를 챙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실감 났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는 차오르는 분노에 외면을 택했고, 외가댁은 깊은 슬픔에 젖어 어머니를 잃은 아이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홀로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제게는 우연재가 있었다.

“우리 집 갈래? 내 침대 넓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