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20)화 (20/139)

20화

“문서윤 순정남이었네.”

남태은이 하나도 취하지 않은 얼굴로 맥주잔을 흔들며 놀려 댔다.

“저 이 얘기 하는 거 형이 처음인데 그만 놀려요.”

“딱 들어 보니까 꼬꼬마 때부터 좋아했구먼. 뽀뽀에 뭐에 난리도 아니네. 그 정도면 걔도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진짜 친구예요.”

“응. 아니야. 다른 친구들한테 너네 어떤 관계로 보이는지 물어봐.”

완벽한 부정에도 남태은은 못 믿는 눈치였다. 중간중간 각색했다 해도 우연재를 여자로 오해하고 있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문서윤은 차가운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7년간 차곡차곡 쌓아 둔 감정은 이제 너무 무거워져 홀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렇다고 툭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연재를 제외하면 가장 친한 친구는 김현승인데, 김현승에게 마음 앓이를 털어놓으면 어떻게든 우연재가 알게 되는 상황이 올 터였다.

그리고 문서윤은 우연재에게 짝사랑 상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마음의 한쪽 끄트머리를 들킬까 무서웠다.

그러니 차라리 남태은에게라도 털어놓으면 괜찮지 않을까. 제 인맥 중 거의 유일하게 우연재와 접점이 없으며 비밀을 털어놓아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 가깝고 무엇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술을 핑계로 문서윤은 마음을 썩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친구라니까……. 걔 스무 살부터 사귄 애인도 있어요.”

“컥! 콜록, 콜록.”

한참 기침을 내뱉은 남태은은 물 대신 소주로 사레를 삼키고는 손등으로 쓱 입술을 닦아 냈다. 둘 곳 없이 방황하는 시선이 눈치를 보듯 잠깐 허공을 긁었다.

“스무 살이면 햇수로 4년?”

“저 입대하기 직전에 사귀었고 지금 봄이니까 따지고 보면 2년이긴 한데……. 그래도 길긴 하죠.”

문서윤은 맥주잔 위로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건드리며 대꾸했다. 말을 하고 보니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기억 속에는 우연재가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우연재를 보지 않은 2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그의 여자 친구에게 흘러들어 간 느낌이었다.

“으음, 2년이 짧지는 않지. 미안하다, 야. 아니, 걔가 너한테 우리 서윤이 하면서 내 거 어쩌고 한다길래 둘이 삽질하는 줄 알았지.”

“형도 저 놀릴 때 우리 강아지라고 하잖아요. 우리 서윤이도 걔 말버릇이에요. 다른 애들도 그렇게 부르고. 그리고 내 거라고 하는 것도 진짜 어릴 때부터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도 말버릇인 거 다 알아요.”

남태은은 소주를 맥주 마시듯 꿀꺽꿀꺽 삼키며 잠자코 문서윤의 말을 들었다. 어릴 때야 친구를 향한 소유욕이 강하니 그럴 수 있다지만, 10대 내내 문서윤 내 거 염불을 외웠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일반적인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 썸 탄다는 얘기 분명 나왔을 것 같은데. 남자끼리면 또 몰라.

“걔 혹시 네가 좋아하는 거 알고 그러는 거 아냐?”

술기운과 함께 의심스러움이 올라와 남태은은 슬쩍 운을 뗐다. 그가 아는 문서윤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지만, 아무리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해도 감정이 섞이면 시야가 가려지는 법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혼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란 불가능했다.

“아니에요. 걔 성격을 제가 아는데. 알면서 질질 끌 성격은 못 돼요.”

문서윤은 육회 대신 배를 씹으며 단언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남태은의 속도에 맞추느라 빈속에 연거푸 소주를 부어 넣었더니 어지러웠다.

머릿속이 몽글몽글 뒤엉키는 와중에도 우연재가 알고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제 감정을 알았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쯤 어떻게든 결론이 나 있어야 했다.

‘접어, 서윤아.’

우연재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동성의 소꿉친구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리고 역겨움을 억누르고서라도 친구 관계를 유지해야겠다 결정했을 때.

그게 아니라면 진작 쌩까는 사이가 되었을 테다.

우연재는 인간관계에 절실하지 않은 만큼 사람을 정리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가차 없는 성격이었다. 그가 제 마음을 모른다고 확신하는 건 그래서였다.

게다가 자그마치 7년을 혼자 앓아 온 외사랑이었다. 문서윤은 제 짝사랑을 그렇게 쉽게 들킬 정도로 우연재를 모르지도, 마음이 무르지도 않았다. 남태은에게 들킨 것 역시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연재의 혐오 발언 때문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꼭꼭 숨겼을 테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건데……. 그럼 다행이지만. 아니, 너한테 다행이라고 하면 안 되나?”

남태은이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쓸어 넘기자 잘생긴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모습을 감췄다.

“아오,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윤아, 너 그거 아냐?”

“뭘요.”

“사람 속도 모르면서 그렇게 플러팅 해 대는 것도 죄다, 죄. 엉? 너는 아무 잘못 없다고. 줄 생각도 없으면서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잘못한 거지.”

남태은이 또다시 꼴꼴꼴꼴 소주를 채워 넣었다. 알코올이 제어 기능을 앗아 갔는지, 문서윤은 평소처럼 거절하는 대신 끝까지 채워지는 잔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일단 마셔. 그래야 실연의 아픔을 잊지.”

“딱히 실연은…….”

실연당한 게 아니라고 정정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저한테 한 얘기는 아니라 해도 남자가 남자에게 발정하는 게 정상이냐는 말을 들었으니 실연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르겠다.

“짠.”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남태은이 살갑게 잔을 내밀었다. 문서윤은 그가 내민 맥주잔에 잔을 톡, 붙였다 뗀 뒤 그대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와 씨. 얘는 무슨 소주 두 병에 취하냐.”

남태은은 문서윤을 침대에 눕힌 뒤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제아무리 힘 좀 쓴다 한들 술에 취해 늘어진 성인 남자를 업고 오기란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시기가 시기인지라 택시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기숙사까지 문서윤을 업고 온 참이었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체력이 달리지. 하…….”

숨을 고른 뒤 나름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 준 그는 맞은편에 놓인 제 침대를 확인했다.

“짐 정리는 언제 하냐.”

캐리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선 문밖에 둔 택배부터 가져와 푼 뒤 침구부터 골라내야 할 것 같았다. 멋모르는 스무 살도 아니고, 난방이 돌아가도 이불 없이 자기에는 추운 날씨였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압수라는 명목하에 걷어 둔 문서윤의 핸드폰이었다. 남의 물건을 그대로 주머니에 둘 수는 없어 남태은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연재

화면에 비친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까 전화 온 걔랑 이름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닌가?”

이름 위로 자정을 넘어선 시간이 보였다. 이 시간에 전화라면 급한 일이라는 소리인데, 핸드폰의 주인은 자고 있으니 받기가 망설여졌다. 고민하는 사이 진동이 뚝 끊겼다. 차라리 잘됐다 싶어 문서윤의 머리맡에 돌려놓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음을 울렸다.

“으음.”

결국 남태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상적인 일로 건 전화였다면 이 시간에 두 번이나 연락하지는 않았을 테다. 급한 일이면 문서윤 깨워야지, 뭐.

“여보세요.”

- ……누구?

짧은 침묵 뒤로 나지막한 물음이 들려왔다. 묘하게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남태은은 슬쩍 콧잔등을 찌푸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술기운이 돌자 세상이 다소 삐딱하게 보였다.

“서윤이 친한 형인데.”

무엇보다 툭 내뱉어진 반말이 불쾌했다.

- 하.

맞은편에서 헛웃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에서도 상대를 향한 같잖음이 묻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남태은은 그 순간 처음 깨달았다.

- 문서윤 바꿔.

뭐야, 이 새끼. 싸늘한 명령조에 남태은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떼어 놓고 화면을 응시했다. 술집에서 본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머릿속에는 흐릿한 글자의 잔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좋아한다던 게 이 새끼는 아니겠지?

남태은은 이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인 건 둘째 치더라도 문서윤이 이렇게 싸가지 말아먹은 새끼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옆에서 자고 있으니까 전화하지 마라.”

취기가 오르는 듯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남태은은 눈두덩이를 꾸욱 누르며 떠오르는 말을 줄줄 내뱉었다.

- 씨발, 진짜…….

그때 핸드폰 너머로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왔다.

- 그래서 그쪽이 누군데…….

목소리가 지나치게 나긋해 욕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인지할 정도였다.

- 문서윤이 네 옆에서 자고 있냐고.

늘어지던 말투가 짓씹듯이 사납게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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