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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21)화 (21/139)

21화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는 상태로 술까지 마신 여파인지 문서윤은 주말 내내 앓았다. 남태은과 술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쉽게 나을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그와의 술자리가 헤진 마음을 잠시 토닥여 주었을 뿐, 문서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남자가 남자한테 발정하는 게 정상이야?’

벌레라도 씹은 듯 찌푸려진 표정과 더러운 말을 내뱉듯 경멸스러운 목소리가 내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똥강아지. 병원 갈래?”

문서윤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태은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원래 환절기 때 자주 이래요. 어제 술까지 마셔서 그런가 봐요.”

“너 군대 있을 때는 별로 안 아팠잖아.”

“군대 체질인가.”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남태은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럼 약이라도 먹어. 나간 김에 사 왔으니까.”

“괜찮은데…….”

“어허. 이놈 봐라. 나 아프면 아주 모른 척 쌩까겠다?”

괜히 하는 소리였다. 그래도 기분이 조금 풀려 문서윤은 얕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살이 났는지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더불어 온 피부에 멍이라도 든 것처럼 옷감 위로 쓸리는 살이 모조리 아팠다.

간신히 벽에 기대어 앉자 남태은이 뜬금없이 밥상 테이블을 침대 위로 올려 두었다. 기숙사에 왜 이런 게 있지? 아픈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눈을 깜박이게 됐다.

“뭐에요?”

“룸메랑 편하게 술 마시려고 가져왔지. 바닥에서 먹으면 불편해.”

“형 진짜 이상한 사람인 거 알아요?”

“인생 내 좆대로 살자, 서윤아. 약 먹기 전에 죽부터 먹고.”

뜬금없이 왜 밥상 테이블을 올리나 했더니 남태은이 종이 가방에서 죽이 든 용기를 꺼내 들었다. 손자에게 하듯 직접 숟가락을 쥐여 주기까지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죽이 아닌, 죽집에서 파는 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연재가 떠올랐다. 아프다는 걸 알면 곧바로 기숙사로 쳐들어올 터였다. 사람들과 부대껴 살다 보니 아픈 거라며 제 오피스텔로 들어오기를 종용할지도 몰랐다.

“죽도 사 왔어요? 저 지금 좀 감동받은 것 같은데.”

“편의점 죽 맛없잖아. 나 아플 때 비싼 죽 사다 대령해라. 그러라고 사 온 거니까.”

“잘 먹을게요.”

입맛은 없어도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 몇 숟가락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문서윤은 야채가 들어간 죽을 떠 입에 넣었다. 컨디션이 나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데 이상하게 맛있었다.

“아.”

남태은이 맞은편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운을 뗐다.

“어제 너한테 전화 왔었는데.”

“전화요?”

“엉. 이름은 까먹었는데 우…… 뭐였던 것 같은데.”

곧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갔다 오면 연락해.’

연락이 없어 걱정돼 전화한 게 분명했다.

우연재는 제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나면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서윤조차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고등학생에게 집은 잠만 자는 장소일 정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고, 또 그나마 남은 시간도 아버지와 보낼 만큼 친한 부자지간은 아니라 그 사실을 실감할 만한 사건이 전무했다.

불편함을 감지한 건 대학 입학 후 여유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였다. 아버지와 얼굴이 부딪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문서윤은 불현듯 아버지와 단둘이 있으면 어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쁘신 분이라 집 안에서 마주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간혹 둘이서만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상하게 숨통이 죄이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우연재에게 전화를 했으니 그가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친한 친구예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남태은은 우연재가 제 짝사랑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통화를 했다면 그 이름의 주인이 남자라는 사실 역시 알았을 테다.

“걔랑? 진짜 싸가지 없던데.”

통화했구나. 순간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온몸이 창백하게 질렸다.

“……통화하셨어요?”

“엉. 새벽에 전화 오길래 급한 일인가 싶어서 받았지. 근데 나도 취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이름 잊어버렸나? 평온한 반응을 보아하니 전화를 건 당사자가 제 짝사랑 상대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문서윤은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기억 안 난다면서 싸가지 없다는 평가는 또 뭐예요.”

“통화 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하여튼 목소리랑 말투가 재수 없었어.”

“무슨 얘기 했어요?”

“기억 안 난다니까. 나보고 누구냐고 했나? 대답하려고 하니까 핸드폰 꺼지더라.”

“아…….”

문서윤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핸드폰을 힐금 쳐다봤다.

“충전기 못 찾아서 충전 못 시켰어. 지금 해 줄게. 충전기 어디 있냐?”

“서랍에요.”

남태은이 선심 써 준다는 듯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서랍에서 충전기를 꺼내 핸드폰을 연결했다.

“그거 다 먹고 약 먹어라. 나 나갔다 와야 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고마워요는 무슨. 간다.”

이제 보니 외출복 차림새였다. 볼일이 있는데 약을 챙겨 주느라 잠시 들른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방을 나서는 남태은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동으로 켜지기 시작한 화면이 하얀빛을 내다 암전되었다.

“…….”

우연재에게 또 전화가 걸려 왔을지 궁금했으나 확인할 용기가 부족했다.

“일단 약부터 먹고 생각하자.”

문서윤은 꾸역꾸역 죽을 먹기 시작했다. 사다 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자꾸 우연재가 생각났다.

잠결에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약 기운이 돌며 잠이 쏟아지더라니, 저도 모르는 사이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핸드폰을 쥔 그는 다시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가며 전화를 받았다. 열은 조금 내린 것 같은데,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응, 형.”

더듬거린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무거운 눈꺼풀은 올라가지 않았다.

- ……형?

남태은일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붕어처럼 부은 눈두덩이를 애써 들어 올렸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으나 무의식적으로 발신자를 확인하게 됐다.

“아, 우연재.”

- 누군 줄 알았어?

헤어지기 전과 별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다정한 음성에 어쩐지 안심이 밀려와 문서윤은 깊숙하게 이불 안을 파고들었다.

“아니, 형인 줄 알고.”

잠과 열에 취해 발음이 잔뜩 뭉개졌다.

- ……문서윤. 아팠어?

언제 다정하게 물었냐는 듯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들었다. 우연재가 짜증이 났음을 눈치챈 상황에서도 귀신같이 제 상태를 알아차리는 게 신기해 문서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연재 때문에 아픈데 또 우연재 때문에 웃음이 나오다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감기 걸렸나 봐. 원래 이맘때 잘 아프잖아.”

- 갈게, 지금.

핸드폰 너머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없어도 돼.”

언제 움직였냐는 듯 부산스러운 소리가 뚝 멎었다.

“나 약이랑 죽 먹어서 괜찮아. 안 챙겨 줘도 돼.”

문서윤은 미묘한 정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여태 잠기운이 남아 있는 데다 머릿속이 곤죽이라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숙사 들어오려면 사람 지나가는 거 기다려야 되는데 밖에 춥잖아.”

이상하게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전화 끊겼나? 문서윤은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 시간은 여전히 천천히 흘러가는 중이었다.

“연재야.”

무의식적인 부름이 튀어 나갔다.

- ……응.

답은 한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룸메가 챙겨 줬어. 그러니까 안 와도 돼. 번거롭잖아.”

- 문서윤.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 없어도 돼?

우연재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문서윤은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 나 필요 없어?

“무슨 소리야.”

- 아까 나 없어도 된다며.

짧은 찰나 냉랭한 빛을 띠던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처량하게 바뀌었다. 어쩐지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지, 문서윤은 이불 안에서 눈만 깜박였다. 눈두덩이를 지나치게 세게 눌렀는지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내가 그랬어?”

- 응. 이제 없어도 된다며.

“내가 그랬다고? 사실 지금 정신없어서 무슨 소리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 나 자다 일어났어.”

- 아픈 애 상대로 삐질 수도 없고…….

“삐지지 마.”

문서윤은 웅얼거리며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우연재에게 상처를 받을지언정 그를 제 삶에서 떼어 놓기란 불가능했다. 2년간 얼굴을 보지 않은 시기가 있긴 하지만, 그때도 언젠가 마주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있었고 또 그 순간이 오면 원래 관계로 되돌아가리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상대이기 전에 행복한 유년기를 통째로 공유한 친구였다. 우연재마저 저를 외면한다면 문서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가족도, 피아노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소꿉친구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 문서윤 아직도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약한지 모르네.

그러니 이 다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꼭꼭 감춰야만 했다. 상처받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게 한 말이 아니니, 저를 겨냥하고 한 말이 아니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문서윤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욕심만 내지 않으면 모두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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