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22)화 (22/139)

22화

우연재는 팔짱을 낀 채 기숙사 입구를 응시했다.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 간혹 안을 들여다보다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익숙한 일이라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힐긋 시선을 내렸다. 손목시계 분침이 문서윤이 나올 만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업 30분 전에 움직이는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슬슬 밖으로 나올 테다.

무료함에 팔짱을 풀고 왼손으로 툭툭 핸들을 두드리는데 익숙한 인영이 입구를 나섰다. 곧바로 차에서 내리려던 그는 올무에 걸린 사람처럼 뚝 움직임을 멈췄다.

“…….”

처음 보는 남자가 문서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퍽 친근해 보이는 태도였다.

누구지. 누구인지 굳이 머릿속을 뒤져 볼 필요도 없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의 인맥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사실상 문서윤과 친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제 주변인 중 하나였으므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누구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건 모르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흡이 고요하게 정지했다.

‘너 없어도 돼.’

그 순간처럼.

“하…….”

우연재는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차에서 내리려던 그를 막아 세운 건 아주 오래전,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이었다.

사납게 돌변하려던 움직임은 간신히 억제했으나 낯선 남자에게 못 박힌 신경질적인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우리 서윤이가 어디서 저딴 양아치 새끼를 알아 왔지.”

남자는 한눈에 봐도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탈색한 머리카락과 날 티 나는 외모가 단정한 차림의 문서윤과는 조금도 어우러지지 못했다.

룸메인가. 우연재는 머릿속을 짧게 스쳐 지나간 생각을 곧바로 철회했다. 문서윤은 곁을 내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어릴 때는 낯선 사람들과 쉽게 말을 하고 쉽게 친해지고 쉽게 친구가 되는 성격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벽을 세웠다. 그러니 단순 룸메는 아닐 테다.

우연재는 어쩔까, 고민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리는 속도는 싸늘한 얼굴과 달리 느긋하기만 했다.

여기서 망치면 안 되겠지. 인내심을 끌어모아 기다리기로 결정한 순간, 문서윤의 어깨에 팔을 걸친 남자가 하얀 뺨을 덥석 쥐더니 저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핸들에서 흘러나오던 소음이 또다시 뚝 멎었다. 동시에 어떠한 직감이 그를 덮쳤다. 문서윤을 봐 온 게 자그마치 17년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모르는 얼굴이라면.

“아, 오랜만에 기분 좆같네.”

제가 유일하게 모르는 문서윤의 1년 6개월을 알고 있는 새끼가 분명했다.

우연재는 곧장 차에서 내려섰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닌데 땅을 밟았을 때는 문서윤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지. 새까만 눈동자가 주변을 살피듯 스르르 움직였다. 기숙사 자동문이 닫히는 걸 보니 안으로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굳이 걸음을 옮기는 대신 문서윤을 기다리기를 택했다. 일부러 경영대로 향하는 길목에 차를 세웠으니,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레 이쪽으로 올 터였다.

점차 가까워지는 인영을 보고 있자니 서슴없는 스킨십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던 모습이 겹쳐졌다. 문득 문서윤이 얌전히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제 탓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소한 스킨십을 일상처럼 느끼게끔 만든 건 우연재 자신이었다. 어디까지나 문서윤에게 치댈 사람이 저뿐이었기 때문이지, 남의 손까지 타라고 들인 습관은 아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다른 새끼 손까지 타고 있을 줄이야.

“주의시켰어야 하는데.”

드물게도 과거의 행동에 대한 미미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핸드폰을 보는 대신 바른 자세로 걸어오던 문서윤이 마침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완만한 곡선의 눈매가 조금 더 둥그렇게 변했다.

“우연재?”

강의실도 아닌, 기숙사 앞에서 마주친 우연재의 존재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잘못 본 줄 알았다. 같은 수업을 들으니 강의실에서 마주칠 건 각오했지만, 설마하니 기숙사 앞에서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얘가 왜 여기까지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왜 여기까지 왔어?”

“일찍 나온 김에 같이 가려고.”

“강의실 가면 보잖아.”

“걸어가려면 춥잖아. 타.”

우연재가 까딱 고갯짓하며 먼저 차에 올랐다. 주춤하던 문서윤은 결국 문을 열었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있었으나 주말 내내 앓은 바람에 어떤 얼굴로 우연재를 봐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더 주어졌어도 결론 내지 못했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당혹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 안은 따뜻했다. 우연재는 시동을 거는 대신 컵 홀더에 놓여 있던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든 문서윤은 무의식적으로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름 모를 차 티백이 담겨 있었다.

“아픈 건.”

“이제 괜찮아. 약 먹고 주말 내내 잤더니……. 나 마시라고 사 왔어?”

“문서윤 마시라고 사 오지 누구 마시라고 사 와. 커피 사다가 같이 샀어.”

“고마워. 잘 마실게.”

아플 때마다 우연재가 자잘하게 챙겨 주고는 했던 터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만큼 익숙한 일인데도 조각만 한 다정함이 주어질 때마다 기꺼워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을 따름이다. 문서윤은 마음을 숨기듯 조심스레 차를 마셨다.

“얼음 넣었어?”

카페에서 사 온 차치고는 미지근했다. 차 내부에 커피 향이 가득한 걸 보면 식어서 미지근해진 건 아닌 듯했다.

“누가 고양이 혀라 얼음 넣어 달라고 했어.”

우연재는 시동을 거는 대신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대답에 문서윤은 컵을 쥔 손끝에 힘을 실었다. 적당히 식은 차에서 우연재가 저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문서윤.”

평온한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지레 찔린 문서윤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본가 이야기를 꺼내거나 잠결에 한 통화 내용을 캐물을 줄 알았더니, 뜬금없는 대화 주제였다. 누구냐니. 무슨 소리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시선이 절로 우연재를 향했다.

“누구?”

“기숙사에서 같이 나오던데.”

“아…….”

남태은을 묻는 말이라는 걸 뒤늦게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운 좋게 타이밍이 맞은 줄 알았더니, 기숙사에서 나오는 걸 봤을 정도면 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룸메. 금요일에 들어왔더라고.”

딱히 숨길 이유가 없어 문서윤은 가볍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문서윤이 만난 지 나흘 된 사람이랑 그렇게 친하게 굴었지.”

“뭔 소리야.”

불쑥 다가온 손이 뺨을 눌렀다. 뭐가 묻었나 싶어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손등을 가져다 댔다. 우연재가 손가락을 떼어 냈더라면 뺨에 묻은 걸 떨어내기 위해 그대로 손등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들러붙은 손은 물러날 줄을 몰랐다. 덕분에 굵기가 다른 손가락들이 스치며 열기가 피부를 타고 옮겨 다녔다. 문서윤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어색하게 팔을 내렸다.

“왜? 뭐 묻었어? 그만 눌러. 아파.”

“대답 안 하네.”

우연재가 눈을 가느다랗게 접었다. 풀이 죽은 것처럼 처량하게 내려간 눈썹과 달리 언뜻 사나운 빛이 번지는 눈동자였다. 뺨을 누르는 손가락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물러났다.

“뭐가.”

“그냥 룸메 아닌 것 같은데. 언제부터 만난 지 며칠 안 된 사람이랑 어깨동무하고 다녔어?”

어깨동무를 한 게 아니라 남태은이 제멋대로 팔을 두른 것에 가까웠다. 붕어눈 좀 보자며 뺨을 쥐고 폭소를 터뜨린 게 그다음이었고. 그러더니 불현듯 핸드폰을 두고 왔다며 기숙사 안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구구절절 해명하는 것도 그림이 웃겼다. 남태은에 대해 말해 주면 끝날 일이라 문서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원래 친한 형이라 그래.”

“……형?”

“우리보다 나이 많아. 아, 군 동기야. 생활관 바로 옆자리였고. 그래서 친해졌어.”

“나 말고 친한 사람 있는 줄 몰랐는데. 얘기도 안 해 주고 사람 존나 서운하게…….”

원래 친한 사람이 생기면 다른 친구한테 소개해 줘야 하는 건가? 지인들이 죄다 우연재와 겹치는 인맥들이라 보통의 경우 어떻게 하는지 몰라 순간 잘못한 일인가 싶어져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다.

“나도 너랑 친한 사람들 다 아는 거 아니잖아.”

“나 문서윤밖에 없는데.”

뺨을 압박하던 손이 그제야 물러갔다. 늘어지는 말꼬리와 샐샐 휘어지는 눈매가 장난기를 담고 있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