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기를 쓰며 우연재를 피해 도망 다닌다기보다는 굳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예전부터 먼저 연락하는 사람은 우연재였던 걸 생각하면 딱히 모난 일은 아니었다.
“피해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예전이랑 다르면 피해 다니는 거지. 꼭 물리적인 거 말하는 게 아니라 심적인 것도 포함이다.”
“그런가.”
문서윤은 담뱃재를 떨어내며 중얼거렸다. 남태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걔는 몰라? 네가 피해 다니는 거?”
“연락 잘 안 한다는 것도 그냥 제 느낌이에요. 걔 입장에서는 딱히 달라진 거 없을 것 같은데. 모를 걸요, 아마.”
“흐음. 그래?”
남태은이 발끝을 까딱이며 담배를 쥔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인간관계에 눈치 빠른 애들이 있긴 한데.”
우연재가 그런 부류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낙관이 들었다. 티 나게 연락을 피한 적은 없으니 신경 쓰고 있지 않을 테다.
“뭐야.”
담배를 비벼 끄던 남태은이 요란한 진동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매끈한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야, 똥강아지. 다 피웠지?”
“왜요?”
“나 어디 좀 잠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가고 싶은 자리는 아닌지 목소리가 불퉁했다.
“먼저 들어가요. 저 하나 더 피우고 들어갈게요.”
“더 피운다고? 네가?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아니에요.”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대로 들어가도 마음이 어지러울 게 뻔해 담배라도 피우며 머릿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답을 찾아내지 못하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 안에 텁텁함을 쌓다 보면 무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 씨, 내가 나오자고 해 놓고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 자, 대신 이거 준다.”
남태은이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내밀었다. 그의 취향을 알고 있는 문서윤은 뺨을 찡그렸다.
“이거 독한 거 아니에요?”
“씁. 원래 고민 있을 때는 독한 거 피워야 돼.”
엉터리 조언이었으나 문서윤은 그가 내민 담뱃갑을 받아 들었다.
“나 그럼 가 본다. 혹시 안 들어와도 찾으면서 울지 말고.”
“아니, 제가 애예요? 왜 이렇게 다들 애 취급 하지.”
“우리 강아지, 잘 자고 있어?”
남태은이 낄낄거리며 엉덩이를 툭 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문서윤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 벤치에 앉았다. 텅 비어 조용해진 학교와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나름 운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서윤은 남태은이 주고 간 담뱃갑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손이 익숙하게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우고는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짧게 들이마신 숨을 느릿하게 내뱉자 불티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 번 길어진 생각은 끝을 모르고 달려갈 테다. 그러니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만 생각을 이어 나갈 심산이었다.
천천히 들이마신 연기를 그보다 천천히 내뱉으며 손가락을 까딱일 때였다. 기척 없이 다가온 손이 등 뒤에서 담배를 가져갔다.
“아, 형. 뭐예요.”
문서윤은 남태은이 장난치는 거겠거니,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나는…….”
옅게 번지던 웃음이 당황함에 젖어 들었다.
“문서윤이 담배 피우는 줄 몰랐네?”
우연재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느라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이 밤하늘만큼이나 새까맸다.
“담배 가르친 게 그 새끼야?”
하얀 담배가 우연재의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 움직였다. 나긋한 물음에 문서윤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침묵을 오해했는지 우연재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네가 입에 달고 살던 좋은 사람이 아까 그 새끼냐고.”
딱딱하게 굳은 눈매와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문서윤은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새까맣게 물든 나뭇잎 사이를 거칠게 파고든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추운 날씨는 아니라 평한 게 무색하게도 싸늘한 바람이었다.
바짝 다가온 봄은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 * *
근래 들어 기분이 바닥을 쳤다. 우연재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핸드폰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왜 이렇게 전부 재미가 없지. 의미 없는 행동이 오해를 산 듯 김현승이 엉큼한 표정을 지으며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여친 연락 기다리냐?”
“만나고 왔는데.”
우연재는 도르르 눈동자만 움직이며 게으르게 대답했다.
“아, 재수 없는 새끼. 그래도 손님이니까 물은 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승이 냉장고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연재의 시선은 다시 핸드폰을 향해 떨어졌다. 연락 여부를 확인할 생각은 없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그는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발끝을 까딱이고 있자 김현승이 불쑥 컵을 내밀었다. 우연재는 받아 든 컵을 그대로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내 자취방은 웬일로 왔냐? 더러워서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와 달리 편한 차림의 김현승이 배를 긁적이며 옆자리를 꿰찼다. 희한한 일이라며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말투였다.
“심심해서.”
“네가?”
“문서윤 안부도 물을 겸?”
“문 안부를 왜 나한테 찾아?”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김현승은 곧 해괴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얼굴 위로 지긋지긋하다는 글자가 떠올랐다. 또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또 싸웠냐?”
“나는 문서윤이랑 싸운 기억이 없는데.”
“뭐래, 2년 동안 쌩깐 주제에.”
김현승은 허리를 굽혀 소파 밑에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를 주워 들었다. 이어 뻥 소리와 함께 봉지가 터져 나갔다.
“싸운 거 아니면 문 안부를 왜 나한테 물어. 하여간 희한한 새끼라니까.”
“문서윤이랑 연락 잘 되나 봐?”
“문이랑?”
김현승은 깔끔하게 뜯어낸 과자 봉지를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우라는 듯 봉지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과자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가는 모양새가 퍽 익숙해 보였다.
“문서윤 먼저 연락하는 일 드물잖아. 연락 잘 된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 근데 걔 고딩 때부터 그래서……. 새삼스럽게.”
김현승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문서윤은 항상 그랬다. 먼저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연락해 오는 일이 드물었다. 신기한 건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막상 만나면 편하다는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 왔으니 나름 오랫동안 알아 와서 그런가 싶었으나 그보다는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한결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서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저 혼자 불쑥 입대를 택한 뒤 훈련소 수료식 날이 되어서야 근황을 알려 온 바람에 서운해하는 친구들도 여럿이었다. 김현승 역시 서운함을 토로한 인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들 오래지 않아 문서윤답네,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은근히 속을 알기가 어려운 게 딱 문서윤다운 행보였다.
“요즘 묘하게 도망가는 느낌이던데.”
“도망?”
김현승은 두 눈을 끔벅이며 와작와작 감자칩을 먹었다. 우연재가 깔끔하게 먹으라는 듯 한심한 눈길을 보내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결벽증 친구 때문에 제 자취방에서 먹고 싶은 과자 하나 먹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연재야 늘 저러니 이제는 까탈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알았다.”
우연재와 문서윤 사이에 놓인 도망이라는 단어에 김현승은 해답을 찾아냈다.
“뭘.”
“우리 문이 드디어 우 너한테 질렸나 보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김현승은 과자 봉지를 뒤적거리며 제 해답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너 그동안 은근히 문서윤한테 과한 면 있었잖아. 싸고도는 건 좋은데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걔 벌써 군필이다? 나보다 제대도 빨리했고?”
하여튼, 과대 포장이 문제라니까. 바닥에 깔린 과자를 찾느라 우연재의 표정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나는 옆에서 보면서도 와, 우연재 저 새끼 때문에 문서윤 숨 안 막히나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걔는 오죽하겠냐.”
가끔 우연재는 문서윤에게 숨 막히게 굴 때가 있었다. 대놓고 압박한 적은 없어도 미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고는 했다. 지적하기엔 애매한 수위였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문서윤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 그냥 넘어갔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라 어려서 뭘 몰라 그냥 넘어갔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렇게 굴었다면 한마디 했을 테다. 대학 입학 후에는 딱히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 말을 얹지 않았는데 이 기회에 슬쩍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애가 무던하고 순해서 뭘 잘 모르다가 이제야 느꼈나 보지. 아니면 대학 생활 재밌어서 눈 돌린 거거나.”
자고로 제대한 군필자에게는 사소한 하루하루가 재미있는 시기였다. 김현승은 그제야 과자 봉지에 처박은 시선을 떼어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너네 존나 오래 봤잖아. 그래서 질렸나 보지.”
우연재가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맞춰 왔다. 신기할 정도로 새까만 색이라 저도 모르게 움찔, 손을 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