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28)화 (28/139)

28화

“아니, 우연재. 잠깐만.”

문서윤은 누가 봐도 당황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굳어서인지 그나마 잔잔히 밀려오던 당황스러움은 정신을 차린 순간 일순 해일처럼 불어났다. 담배를 피운 탓인지, 아니면 예기치도 못하게 나타난 우연재의 존재 때문인지, 순식간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기다려? 응. 문서윤이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야지.”

유순한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우연재가 대놓고 빡친 티를 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낸 것도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이라, 지금껏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문서윤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우두커니 우연재를 응시하기만 했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흐릿한 연기 사이로 싸늘한 낯이 보였다. 우연재와는 일말도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 것과 동시였다. 문서윤은 그제야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담배가 우연재의 손가락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박자 뒤늦은 인지였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불쑥 튀어나온 손이 담배를 앗아 간 것도 잊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줘?”

우연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별것 아닌 일에 토라진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지만, 화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제 짝사랑 상대를 모르지 않았다.

“담배부터 줘.”

“담배는 왜.”

“너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끄고 얘기해.”

되돌려 받기 위한 손짓은 무위로 돌아갔다. 우연재가 팔을 들어 대놓고 피한 것이다.

“대답이 먼저 같은데.”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문서윤은 또다시 담배를 채 가려 시도하는 대신 기억을 더듬었다. 너무 놀라기도 했고, 갑자기 나타난 우연재의 존재에 머리가 얼어붙어 그가 무슨 질문을 던졌는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미안. 뭐라고 물어봤어?”

기다란 눈매가 가느다랗게 접히며 뺨이 찡그려졌다. 말을 흘려들은 건 이쪽이라, 문서윤은 궁색하게 둘러댔다.

“놀라서 제대로 못 들었어.”

“응. 나도 놀랐어.”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성인이니 담배를 피우지 못할 이유도 없건만, 교복 차림으로 피우다 걸려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우연재가 저를 추궁한 게 아닌데도 그랬다.

“하나는 담배 가르친 게 그 새끼였냐는 거고.”

작아지는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재가 손끝을 까딱였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담배가 덩달아 흔들리며 회색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다른 하나는 그 새끼가 네가 말한 좋은 사람이냐고.”

남태은이 또다시 그분에서 새끼로 격하된 일에 대해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뜻 모를 단어가 튀어나왔다.

“좋은 사람은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한 얘기 말하는 거야?”

뒤늦게야 와인을 마신 날이 떠올랐다. 그날 술에 취해 좋은 사람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기억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때 얘기한 거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우연재는 얄팍하게 웃으며 엄지로 담배 필터를 건드렸다. 잔뜩 취해 헤실헤실 웃으면서 좋은 사람이라느니, 괜찮은 사람이라느니 제가 모르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신경을 자극할 때는 언제고 문서윤은 정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근데 왜 나는 그게 더 기분 나쁘지.”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더 짜증스러웠다.

“술 취해서 말할 정도면 본심이라는 거잖아. 그치.”

“…….”

“내가 그 새끼냐고 물었는데도 곧바로 연결 못 시키는 거 보면 무의식이거나……. 아니면 나한테 말해 줄 마음 없어서 꼭꼭 숨기겠다는 거고.”

언제부터 이렇게 나한테 선을 그었지. 담배 냄새 때문에 불쾌한 줄 알았더니, 극렬한 불쾌함의 원인은 고작 담배 따위가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하얀 담배는 그저 문서윤이 그어 놓은 선의 일부였을 뿐이다.

가장 가까운 상대가 미묘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도망간다는 감상이 들었다. 단순히 연락을 피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문서윤이 비밀을 만든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우연재는 문서윤이 만드는 비밀이 더할 나위 없이 불쾌했다.

“그게 아니라…….”

문서윤은 당황한 낯을 가리기 위해 뺨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옛날얘기를 하며 남태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생활관 동기들이 많았으니 꼭 그에게 한정된 얘기는 아닐 테지만, 만일 특정한 누군가를 이야기했다면 남태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태은 형 얘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담배는 형한테 배운 거 맞아.”

시선이 저절로 우연재의 손가락으로 떨어졌다. 아주 가끔, 밤에, 그것도 학교 흡연 구역에서만 피워 왔는데 이렇게 손쉽게 들킬 줄은 몰랐다.

“미안.”

우연재가 담배를 질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저절로 사과의 말을 건네게 됐다.

“뭐가 미안해.”

“담배 피워서.”

“그게 나한테 미안해할 일인지 모르겠네.”

어처구니없다는 듯 우연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친구에게 사과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테다. 상대가 환자나 임산부 혹은 어린애라면 또 모를까, 우연재는 건강한 성인 남자였다. 그가 아무리 담배를 싫어한다 한들, 그게 사과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심지어 싫다는 사람을 세워 둔 채 그 면전에서 피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들켰을 뿐이다.

“너 담배 싫어하잖아.”

하지만 마음은 늘 이성적인 범주를 벗어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그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짝사랑이었다. 우연재에게 사과를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가 싫어하는 짓을 했으니까,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다. 우연재에게는 하등 쓸모도 의미도 없는 사과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할 거야?”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 굳이 할 필요 없잖아.”

궁색한 변명이었다. 문서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너라서 안 할 거라는 진심은 입에 담기가 버거웠다.

우연재가 시선이 비껴가도록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의 망막에 맺히는 장면은 제 곤란한 얼굴이 아닌, 텅 빈 밤하늘일 듯했다.

“…….”

짧은 침묵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시선이 뒤엉킨 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새끼랑 지내지 말고 오피스텔로 들어오라고 하면 말 들을 거고?”

갑자기 대화 주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싫어하는 걸 안 한단 말과 오피스텔의 상관관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물으면 수세에 몰리는 건 문서윤 저 자신이었다. 제가 아는 우연재라면 말 잘 듣겠다며, 그래서 오피스텔로 들어올 거냐고 묻는 거잖아, 하고 대답할 게 분명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릴 수는 없어 문서윤은 주제를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새끼라고 안 하면 안 돼? 태은 형 좋은 사람이야. 너도 만나 보면 알게 될…….”

“언제부터 좋은 사람이 애한테 담배를 가르쳤지.”

아무리 기호품이라 해도 몸에 해로운 건 사실이라 아니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문서윤은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실직고하기를 택했다.

“내가 가르쳐 달라고 한 거야.”

“왜.”

“그날 아버지 결혼식이었는데……. 그냥 기분 이상해서. 태은 형이 담배 피우러 가던 중이라 형한테 가르쳐 달라고 조른 거야.”

우연재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가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해도 제 입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재혼을 창피한 일이라 여겨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는 사별한 사람도 다른 인연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재는 오랜 시간 저를 알아 왔고, 어머니의 생기 있는 시간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가족 이야기를 직접 꺼내기가 껄끄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우연재가 아버지의 외도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군대 있을 때네, 그럼.”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담배 냄새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교수님 때문에 시작한 거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우연재 탓이 훨씬 컸을 것이다. 차마 당사자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어 문서윤은 또다시 고개만 주억거렸다. 거짓말이 살집을 불렸다.

“그럼 나는 문서윤한테 배워야겠네?”

우연재가 담배를 든 손가락을 까딱이며 빈정거렸다. 목적어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무엇을 배우겠다는 소리인지는 명백했다.

“배워서 뭐 하게.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갑자기 담배를 배우겠다는 친구를 이해하기에는 마음이 지나치게 어지러웠다.

“왜.”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묻는 목소리는 도리어 제 만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모르잖아.”

우연재가 가볍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지금 기분 좆같은데…….”

천천히 움직이는 커다란 손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너한테 배우면 괜찮아질지.”

곧 타액에 젖은 담배가 우연재의 입술 사이로 물렸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