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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3)화 (33/139)

33화

저도 모르게 옆을 쳐다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신호등에 걸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교수님 만나기 전에 소화제 마시잖아.”

“어떻게 알았어?”

문서윤은 조그마한 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뭘 어떻게 알아. 내가 너랑 교수님이랑 같이 밥 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오히려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는 말투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저 자신보다 우연재가 문서윤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

사소한 몸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사실상 우연재 쪽이었다.

“고마워. 지금 마셔야겠다.”

우연재가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이상하게 울컥한 감정이 치밀고는 했다. 문서윤은 소화제를 까 입술 사이로 가져다 댔다. 천천히 병을 기울이자 알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는 감정은 맛없는 소화제와 함께 삼켜야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원목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가 나타났다. 몇 번 같이 와 본 적 있다더니,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장소였다. 마지막으로 온 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으나 적어도 2년은 지났을 텐데,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함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우연재는 더 신기했고.

“문서윤이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문서윤은 능숙하게 제 이름을 대는 우연재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프라이빗룸으로 안내해 주려는지 직원이 선두에 섰다. 문을 열면 곧바로 아버지가 보일 듯했다.

미묘한 긴장이 몰려와 문서윤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우연재도 껄끄러웠지만, 아버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진 계기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인지, 그만둔 피아노 때문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가 제게 휘두른 폭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문서윤은 길지 않은 복도가 끝나지 않길 바라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사건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고작 단 한 번의 폭력이 혈연관계를 어색하게 만든다는 건 비약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네요, 교수님.”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일깨웠다. 문서윤은 그제야 문이 열렸음을 깨달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퍼뜩 들어 올리자 앉아 있던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니 그리움과 반가움이 밀려와야 정상이건만, 이상하게 불편하기만 했다.

“오랜만이구나, 연재야. 우리 아들도 오랜만이고.”

“죄송해요. 자주 못 들러서.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문서윤은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목소리로 듣는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 어색했다. 오히려 우연재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던 우리 서윤이가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야 항상 똑같지. 학교는 늘 바쁘다만.”

“그래도 얼굴 좋아지셨네요.”

“하하. 고맙구나.”

우연재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문서윤은 그 옆에 앉으며 티 나지 않게 긴 숨을 내뱉었다.

이 자리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 우연재를 끼워 넣은 걸 후회하던 차였다. 그나마 시험 기간을 핑계로 간신히 피해 다녔는데 꼼짝없이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우연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정갈한 테이블 위에는 침묵만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음식은 미리 주문해 놨는데. 괜찮니?”

“그럼요.”

우연재의 대답에 문 교수의 시선이 대상을 달리했다. 문서윤은 한 박자 늦게야 입을 열었다.

“네, 괜찮아요.”

“연재는 차 가지고 왔고?”

“네. 아쉽지만 술은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서윤이도 데려다줘야 하고.”

“아직도 어릴 때 보는 것 같구나. 연재 네가 서윤이 챙기는 것도 그렇고.”

“문서윤 언제 저 주실 거예요? 이 정도면 교수님 마음에도 드실 것 같은데.”

또 시답잖은 소리였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우연재를 흘겨봤다. 아버지가 아닌 이쪽 반응을 살피고 있었는지 우연재가 눈을 가느다랗게 접으며 웃었다. 반쯤 턱을 괸 손바닥 위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퍽 즐거워 보였다.

“하하, 녀석. 그 말버릇은 원.”

때마침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술을 거절하자 따뜻한 차와 함께 간단하게 입가심할 만한 음식 몇 가지가 개인상 위로 올랐다. 문서윤은 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들기를 기다렸다가 묽어 보이는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고소한 빛의 죽은 달콤한 밤 맛이 났다.

“농담 듣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는구나. 연재 네가 서윤이 손 꼭 잡고 와서 자기 주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그때부터 저희 부모님께서 얘 탐내고 계신데. 모르셨어요?”

문서윤은 우연재가 던지는 농담을 한 귀로 흘리며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소화가 안 돼 고생할 게 뻔했지만, 불편한 공기를 견디며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이 고달픈 편이 나았다.

“아, 그래. 서현이가 그 얘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불쑥 튀어나온 어머니의 이름에 문서윤은 숟가락질을 멈췄다. 이상하게 우연재의 시선이 이쪽에 닿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티가 났나. 아버지까지 동요를 눈치챌까 지레 걱정이 몰려와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을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서윤이가 여자애였으면 둘이 결혼시켰을 거라고 말이야. 회장님도 아쉬워하셨다면서.”

“정확히 말하면 저희가 다른 성별로 태어나면 결혼시킨다고 하셨었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반쯤은 진담, 또 반쯤은 농담으로 할 법한 약속이었다.

“오히려 저희 어머니가 저 태어나고 많이 아쉬워하셨다고 하시던데요. 하필 아들이라 결혼 못 시키겠다면서. 자매 같은 사이셔서 더 아쉬우셨나 봐요.”

우연재의 말 그대로였다. 그의 어머니를 이모라고 부르며 자라 온 것도 두 분이 정말 친자매처럼 지내 왔기 때문이다.

“그래……. 참. 부모님은 잘 계시고?”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레 우연재의 집으로 넘어갔다. 문서윤은 약간의 민망함을 말랑말랑한 새우와 함께 씹어 삼켰다. 아버지가 우연재를 동석시킨 것도 아저씨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 분명했다.

“여전하세요. 오늘 교수님 뵙는다고 말씀드렸더니 서윤이 본가에 데리고 오라고 성화 부리시던데요.”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우연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로 흘러왔지? 갑작스러운 초대에 당황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건너편에 앉은 문 교수가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어른 초대 거절하면 안 되지.”

결국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 주시면 가야지. 아저씨랑 이모 뵌 지 오래되기는 했네.”

진작 말하지 않고 이제야 말을 전하는 이유가 궁금했으나, 의아하게 느껴질 만한 제안은 아니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다 보니 두 분을 불편하게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찾아뵌 지 오래되기는 했다.

“말없이 군대 갔다고 속상하시다던데.”

“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두 분이 저를 얼마나 아들처럼 대해 주시는지 잘 알고 있는 터라 뒤늦게야 죄송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우연재에게는 연락하지 않아도 두 분께는 했어야 하는데 제 불찰이었다.

“미안. 생각 못 했다. 많이 섭섭해하셔?”

“그래도 얼굴 비치면 풀리실걸. 나보다 너 더 좋아하시잖아, 우리 부모님.”

“뭔 소리야. 아무튼 알았어. 언제 한번 찾아뵙는다고 전해 드려.”

대화가 또 다른 방향으로 튀기 시작할 즈음, 새로운 음식이 나왔다. 적당한 때에 직원이 드나들며 음식이 바뀌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어색한 기류를 견디는 것보다는 간간이 환기되는 분위기가 훨씬 나았다. 본가였다면 지금쯤 숨이 막혀 애꿎은 옷자락만 쥐어뜯고 있을 테다.

‘그러고 보니까…….’

문서윤은 뒤늦게야 제 맞은편 자리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우연재가 함께한 자리라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일정 때문인지, 아버지 옆에 앉아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새삼스럽게도 자리 배치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아들인 제가 아니라 우연재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불편한 상대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과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곧바로 눈이 마주치느냐 아니냐는 그만큼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문서윤은 감태에 싸인 생선을 입에 넣으며 힐긋 우연재를 살폈다. 앞서 들어온 사람도, 먼저 아버지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우연재였다. 별생각 없는 착석이 아닌, 철저한 계산하에 만들어 낸 자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순간 소화제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이름을 명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끓었다.

우연재를 잃을 자신이 없는 건 이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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