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34)화 (34/139)

34화

‘너……. 씹, 남자 좋아해?’

‘내가 지금까지 네 버릇 하나 눈치 못 챌 정도로 너한테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들켰어도 상대가 우연재라는 사실만큼은 절대 들키지 말아야 했다.

‘남자가 남자한테 발정하는 게 정상이야?’

그런 반응을 보이고도 제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걸 보면 관계를 끊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 자리에 참석하지도, 본가에 오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니 짝사랑 상대만 들키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서윤아.”

문서윤은 다소 엄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의 시선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아, 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아무래도 대화를 놓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공부한다고 며칠 무리했더니 피곤했나 봐요.”

문서윤은 구차한 핑계를 댔다. 우연재와의 문제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이 피곤하면 알바는 그만두는 게 어떻겠니. 젊을 때는 사서 고생한다지만, 나는 그 말 동의 못 한다. 굳이 고생할 필요 없어.”

“생각해 볼게요.”

“흠, 그래. 우리 아들은 알아서 잘하니까.”

부자가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대화였다. 문서윤은 제게 달라붙은 시선이 비껴 난 뒤에야 긴장한 숨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기회 되면 다음에는 회장님도 같이 식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좋죠.”

우연재의 대답은 저와 달리 매끄럽기만 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 돌릴 겸, 물을 삼킬 때였다.

“저희 아버지까지 같이 만나면 상견례 하는 기분일 것 같은데.”

“콜록, 콜록!”

실없는 농담에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가 걸려 기침이 튀어나왔다. 문서윤은 등을 두드리는 손길도 느끼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죄, 죄송…….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같이 가 줘?”

“아냐, 괜찮아. 먹고 있어.”

문서윤이 자리를 벗어나자 룸 안에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문 교수가 멋쩍은 웃음을 내뱉을 즈음, 직원이 식사를 내왔다. 조용하게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그리고 음식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길 몇 분, 직원의 퇴장과 함께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음식을 훑어 내리던 우연재는 무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나지막한 감탄사와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문 교수의 눈길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결혼 축하드려요, 교수님.”

다정한 목소리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만나자마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봬서 깜박했네요.”

“하하. 이 나이 먹고 민망하구나.”

“민망하실 게 뭐가 있어요.”

우연재는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오래 만나셨던데.”

오래라는 단어에 미묘한 방점이 들어가며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서윤이한테만 들키지 마세요.”

입술 사이로 무척이나 평온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한참 연장자에게 명령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나긋한 목소리였다. 시선은 대화 상대가 아닌, 문서윤 자리의 식기에 고정된 채였다. 마치 대화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며 부탁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아직도 문서윤 식성 모르시나. 우연재는 문서윤이 남길 게 뻔한 음식을 느릿하게 훑어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애가 그딴 별 같잖은 일로 상처받으면…….”

길게 늘어져 있던 속눈썹이 살랑, 올라가며 정면을 향했다.

“제 기분도 별로일 것 같아서.”

살포시 접히는 눈꼬리가 상냥하게 느껴졌다.

“들어가세요.”

“그래. 집에도 자주 좀 오고. 아무리 바빠도 아들 얼굴은 보고 살아야지 않겠니.”

커다란 손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문서윤은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하며 가까스로 네, 하고 대답했다.

“연재도 또 보자꾸나.”

“그럼요. 다음에는 상견례 해야죠.”

“녀석도, 농담은. 먼저 들어가 보마.”

문서윤은 아버지의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린 건 검은색 세단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덜어 내며 짧게 한숨을 내쉬는데 익숙한 팔이 허리를 감싸 왔다.

무방비 상태에서의 스킨십에 저도 모르게 파드득 몸이 튀어 올랐다. 문서윤은 한 발자국 뒤로 도망쳤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대놓고 피할 줄 몰랐다는 듯 우연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입술과 달리 눈썹 앞머리는 미세하게 구겨진 채였다. 누군가를 감싸 안기 위해 뻗어진 팔이 천천히 물러섰다.

뒤늦게야 과민 반응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우연재의 오랜 습관이 아니더라도 친구 사이의 사소한 접촉에 이렇게까지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까 위에서도 그렇고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

문서윤은 손을 피하려던 게 아니라 마주 보기 위해 움직인 양, 아닌 척 슬며시 몸을 틀며 말을 돌렸다. 때마침 우연재에게 툭, 던지듯 할 말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소리?”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간단한 단어임에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상견례.”

알아서 해답을 찾아낸 듯 우연재가 가볍게 말했다.

허리를 끌어안는 자잘한 스킨십이면 몰라도 어른 앞에서 상견례 운운하는 건 지나친 농담이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의 반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더 걱정스러웠다.

기침처럼 터져 나온 사레를 수습하느라 화장실을 다녀오는 바람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 후 미묘하게 경직된 아버지를 생각하면 과한 농담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럴 분이 아니시긴 한데.’

사실 아버지는 핑계에 불과했다. 안경 너머의 경직된 눈가 역시 제 기분 탓일 테다.

우연재가 내뱉은 상견례라는 단어에 지레 놀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순간적으로나마 상상한 스스로가 우스워서, 그러나 우연재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서, 괜히 아버지를 핑곗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부끄러움이 쏟아졌다.

“뭘 그렇게까지 신경 써.”

그러나 우연재는 별일 아닌 것처럼 피식 웃었다.

“교수님이 어릴 때 결혼 약속 얘기하시길래 가볍게 농담 던진 건데.”

장난치듯 문서윤의 허리를 건드린 그는 가까이 주차된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엉겁결에 우연재에게 낚아채인 문서윤은 미미한 온기가 떨어지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팔이 제 허리에 달라붙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만큼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그치.”

어느새 운전석 쪽으로 간 우연재가 차를 사이에 두고 눈을 접었다.

“그럼 진짜 상견례 해서 결혼했을지도 모르잖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문서윤은 결국 우연재를 내버려 둔 채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버거웠다. 반대편에서 달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실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우연재가 핸들을 잡으며 능청을 떨어 댔다.

“문서윤은 싫은가 보네.”

왜 자꾸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 문서윤은 혀를 짓씹었다. 우연재의 말버릇에 관한 고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왜 말을 그렇게 하냐고 캐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너한테만 이렇게 구는 건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직접 듣지 않아도 우연재가 어떤 말을 내뱉을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을 것이다. 자신은 17년 지기 소꿉친구의 습관을 새삼스레 지적하는 사람이 될 테고.

“어린애도 아니고……. 어차피 우리 둘 다 남자인데 그런 가정 해서 뭐 해.”

둘 다 남자라는 말을 내뱉을 때는 목이 까끌거렸다.

문서윤은 손에 힘을 실어 애꿎은 가방을 붙잡았다. 제 짝사랑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을 우연재가 눈치챈 상황에서, 그러나 제 입으로 사실 관계를 듣기 위해 모르는 척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내뱉기에는 퍽 뻔뻔한 소리였으나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 얘기하니까 생각나서 하는 말이지. 우리 유치원 다닐 때 소꿉장난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문서윤 출근하면 나는 요리하고.”

혹시 빨리 고해성사하라고 압박하는 건가. 제풀에 찔린 생각은 우연재가 장난스레 내뱉은 말에 희석되어 사라졌다.

조심스레 운전석을 살피자 우연재의 옆얼굴에는 미미한 장난기가 번진 채였다. 정말 옛날 생각이 나 꺼낸 말인 듯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갓난아기 때도 아니고 기억 못 할 건 또 뭐야.”

문서윤 역시 우연재와 보낸 어린 시절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했다. 소꿉놀이에 대한 기억은 흐릿했으나 집 뒤뜰에서 풀과 나무 열매 따위를 가져다 놀던 기억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둘뿐인데도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던 것 같다.

“너희 집에서 놀다가 손에 풀물 들었던 거 생각난다. 아니, 열매 때문에 그랬나.”

아무 걱정 없던 시절을 떠올리자 머릿속을 헤집던 잡념들이 금세 휘발되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편하게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나름 요리하는 흉내 낸다고 돌로 짓이기다 그런 것 같은데.”

“맞아. 빨간색 열매도 있었고……. 아직도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손에 물들었던 거 기억나. 우연재 네 손에서 피 나는 줄 알고 엄청 놀랐는데.”

“울었잖아, 너.”

“그랬나?”

설핏 기억나는 걸 보면 정말 울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울 만큼 충격적이었으니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을 테다. 기억 속의 저는 우연재의 손을 꼬옥 붙잡은 채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린애가 꼼꼼하면 얼마나 꼼꼼하겠냐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행동이었다.

이리저리 뒤섞이는 기억에 문서윤은 옅게 미간을 좁혔다.

“진짜 피 난 적도 있지 않아? 아닌가?”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