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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5)화 (35/139)

35화

“놀다가 다쳤나 보지. 원래 어릴 때는 천방지축이잖아.”

“그건 그래.”

우연재의 본가는 성인이 된 지금도 크게 느껴졌다. 하물며 조그마한 시절에는 널따란 정원이 거대한 정글처럼 보였을 테다. 활기 넘치는 남자애 둘이 붙어 다녔으니 넘어지고 깨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옛날이야기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는지 우연재가 짧게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봉숭아 물도 들였었던 것 같은데.”

“아……. 맞아, 그랬지. 엄마가 해 준 거 기억나. 너희 집에서 했잖아.”

문서윤은 희게 웃으며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와의 빛바랜 추억을 떠올리는데도 텅 빈 공허가 느껴지지 않는 건 그 순간을 공유한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물들어 있을 거라고 하셔서 안 자고 버티려다가 늦잠 잤고.”

“어, 그것도 기억난다. 그날 찍힌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이모가 찍으셨나?”

“다음에 우리 집 가면 찾아봐.”

“그래야겠다.”

주황 물이 든 손톱을 보며 신기해 방방 뛰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녀의 새끼손톱에 반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마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거 지워지기 전에 첫눈 오면 첫사랑이 이뤄지는 거야.’

‘첫사랑이 뭔데요?’

‘으음. 우리 서윤이랑 연재가 제일 먼저 좋아하는 사람?’

‘와아, 첫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자그맣게 물든 노을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눈이 왔었나. 오래된 기억은 너무나도 단편적이라 그 순간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그때 눈이 언제 왔지…….”

봉숭아에 관한 로맨틱한 이야기를 믿는 건 아니지만,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어차피 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눈?”

무의식적인 혼잣말을 들었는지 우연재가 반문했다.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문서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그런 얘기 있잖아. 첫눈 오기 전까지 봉숭아 물 남아 있으면 첫사랑 이뤄진다고.”

“김다정 만났어?”

손가락만 까딱여 가볍게 핸들을 두드리던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처음 듣는 이름을 내뱉었다.

“김다정? 그게 누군데?”

“햇님반 김다정. 문서윤 첫사랑 상대.”

“햇님반 김다정?”

햇님반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유치원에서나 사용할 법한 이름이었다. 그런 친구가 있었나? 문서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나 보네.”

우연재의 손길을 따라 차가 매끄럽게 방향을 바꿨다.

“어떻게 기억을 못 하지.”

“우리랑 친했어?”

문서윤은 자연스레 저와 우연재를 묶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붙어 다녔으니, 우연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셋이 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럼?”

“너랑만 친했는데.”

“나랑 친했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응. 그래서 문서윤 나랑 안 놀아 주고 여자 친구랑만 놀았잖아.”

“……심지어 여자 친구였어?”

오전에 생긴 여자 친구가 오후에는 그냥 친구가 되어 버리는 시기였다. 유치원생에게 여자 친구라니. 문서윤은 의아한 얼굴로 우연재가 하는 말만 되물었다.

“소꿉놀이하는데 걔가 내 자리 뺏어 간 거 기억 안 나나 보네. 문서윤 와이프는 자기가 할 거라면서.”

“진짜야?”

놀리는 말인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알 수 없어 문서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우연재를 응시했다. 표정을 보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농담이겠지, 하는 예상과 달리 우연재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못 믿네?”

“하나도 기억 안 나.”

“나중에 우리 집 가면 앨범 뒤져 봐. 사진 나올걸.”

“사진까지 있다고? 진짜 기억 안 나는데.”

우연재의 기억력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딱 그 정도라 그래.”

가볍게 핸들을 두드리던 소리가 멎었다. 동시에 우연재가 느른한 어조로 말꼬리를 늘였다.

“그러니까, 서윤아.”

옆으로 스르르 떨어진 눈동자와 시선이 뒤엉켰다.

“그딴 거에 연연하지 마.”

문서윤은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맥락상 ‘그딴 거’라면 첫사랑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첫사랑에 연연하지 말라니. 다른 이도 아닌 첫사랑 상대에게서 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말이었다.

더럽다는 일갈처럼 날카로운 말도, 같은 남자에게 발정하는 게 정상이냐 물을 때처럼 역겨움에 젖은 빈정거림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의 우연재였을 뿐이다. 내뱉는 단어도, 말투도, 목소리도 평소의 우연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이 저렸다.

“첫사랑 같은 거…….”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소꿉친구에게, 7년간 좋아해 온 상대에게, 그냥 우연재라는 사람에게 감정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저 혼자 간직한 마음인데도 그랬다.

“좆도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감정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괜스레 손톱을 매만지던 문서윤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저들끼리 부산스레 굴던 손가락들이 그대로 카디건 주머니 안쪽을 향해 몸을 숨겼다. 계속해서 손을 만지작거리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몰랐다.

“……연연했어. 너랑 옛날얘기 하다 보니까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이지.”

운전 중이라 굳이 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소한 움직임에도 어쩔 수 없이 제동이 걸렸다. 거짓말을 들킨 게 습관 때문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서였다. 문서윤은 아직까지도 우연재가 제 어떤 모습을 보고 거짓말을 눈치챘는지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나마 습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새까만 눈동자가 짧게 닿아 왔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 기억도 안 나.”

우연재가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문서윤은 또 한 번 부정했다.

우연재가 제 첫사랑 상대라 착각하는 이에 관한 부정이지, 감정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떳떳하지 않은 감정이라는 걸 새삼스레 자각한 순간 같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 친구를 향해 느끼기에는, 그것도 같은 남자를 향해 느끼기에는 추잡하고 혼탁한 감정이었다. 떳떳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이 구렁텅이로 내몰렸다.

어느덧 기숙사 앞에 도착한 차가 매끄럽게 멈춰 섰다.

“원래…….”

핸들에 팔을 얹은 우연재가 그 위로 머리를 기댔다. 시선은 문서윤을 향한 채였다.

“그런 건 상처받은 사람만 기억하잖아.”

가지런하게 뻗은 눈썹이 축 늘어졌다.

“어린 마음에도 존나 슬펐는데.”

끄트머리가 올라간 입술이 삐죽이듯 서운함을 토로했다.

“걔가 나 밀어내는데도 문서윤이 가만히 있어서.”

“…….”

“나 삐졌는데 본 척도 안 하고.”

문서윤은 눈만 깜박였다. 김다정이라는 친구도, 그 친구가 소꿉놀이를 하던 도중 우연재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제가 가만히 있어 우연재가 토라진 것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모든 걸 기억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다.

물론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긴 했다. 대부분이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이었다. 당시의 가족에 관해서든, 우연재에 관해서든. 특히 우연재와는 손을 잡고 놀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지 상처받은 기억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와 달리 어린 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친구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문서윤은 어설프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넌 나 없어도 놀 친구 많았잖아. 그때도 나보다 더 친구들 많았던 것 같은데.”

우연재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얄팍하게 웃으며 상체를 바로 했다.

“진짜 하나도 기억 못 하네……. 그러니까 첫사랑 같은 거 연연하지 마. 어차피 잊어버릴 거.”

“알았다니까.”

문서윤은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 표정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일 듯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신 수긍해야 하는 상황에 속이 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연재가 부러웠다.

첫사랑을 별것 아닌 감정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일 테다. 자신은 도무지 이 홑마음을 별것 아닌 감정처럼 대할 수가 없는데, 누군가에게는 그 마음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그 누군가가 다른 이도 아닌 우연재라 더 그랬다.

우연재한테 첫사랑이 아무 의미 없으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나. 문서윤은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기숙사에 도착했으니 내려야 했다.

“간다.”

손을 빼 드는 순간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크기의 포장지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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