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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6)화 (36/139)

36화

우연재의 시선이 조수석 의자에 떨어진 젤리로 향했다.

“아.”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젤리를 주워 들었다. 제 카디건에서 떨어진 물건이라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갔다. 뭔가 부스럭거리더라니, 이거였구나.

“웬 젤리?”

우연재가 희한한 걸 본다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문을 열기 전이라 곧바로 내리기도 어정쩡해 문서윤은 자세를 바로 했다. 반사적으로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우연재의 시선이 젤리에 고정된 탓이었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떨어진 건 김선주가 준 젤리였다. 먹지 않는 간식이라 그대로 방치해 뒀더니 옷에 든 것도 잊고 있었다.

“이런 거 안 먹잖아?”

젤리를 가져간 우연재가 뒷면을 살펴보며 물었다. 의아함이 깃든 눈동자가 가늘게 접히더니 그 위로 미약한 짜증이 번졌다.

“이딴 거 먹다가 죽을 뻔한 거 기억 안 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과일 맛 젤리가 기도로 넘어가 죽을 뻔한 사건이었다. 옆에 있던 우연재가 곧장 들러붙지 않았다면 정말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혀에 닿은 인공적인 맛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문서윤은 그 이후로 젤리를 먹지 않았다. 자랄 만큼 자랐으니 조그마한 젤리 때문에 기도가 막힐 일은 없겠지만, 트라우마가 됐는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받은 거야.”

눈앞에서 친구가 죽어 나갈 뻔했으니 지금처럼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날카로운 지적이 고마우면서도 민망해 문서윤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누가 줬는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는 설명을 덧붙여야만 했다.

“네 여자 친…….”

“선주?”

서서히 찌푸려지는 미간을 발견한 뒤에야 아차 싶었다. 태은 형이 줬다고 둘러댔어야 했나. 친구가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무언가를 받았다고 하면 대부분은 불쾌해할 테다. 실언했다는 자각에 문서윤은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아니, 알바 끝나고 우연히 마주쳤는데……. 기숙사 가는 길에 미대 있잖아. 야작 하던 중에 잠깐 나왔대서 같이 학교 가는 길에 편의점 들렀거든.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준 거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문서윤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새김질하며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다. 제가 아는 우연재라면 쓸데없는 오해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여자 친구 곁에 선 우연재를 본 적이 많지 않으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제게 있어서 미지수였다.

확실한 건 우연재가 화를 내면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았다.

“먹지도 않는 걸 뭐 하러 받아.”

“주는데 안 받는 것도 좀 그래서. 민망하잖아, 거절하면.”

우연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젤리 봉지가 손가락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만들어 냈다. 역시 다른 핑계 둘러댈 걸 그랬나. 고작 젤리 하나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서윤은 미안하다고 할까, 고민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더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네 여자 친구와 만나서? 먹을 걸 받아서? 그 사실을 이제야 말해서? ……아니면 너를 좋아해서?

“미안.”

생각의 흐름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막기 위해 문서윤은 덜컥 사과를 건넸다. 정작 사과를 들은 당사자는 뜬금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매를 찡그리더니 픽, 하고 웃었다.

“뭐가 미안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정말 뭐가 미안한지 궁금해 묻는 건 아니었다.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네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래도 여자 친구가 준 거니까…….”

“됐어. 이게 뭐 별거라고.”

툭. 우연재가 젤리를 콘솔박스 쪽으로 던져 넣었다. 챙겨야 하는지 그대로 둬야 하는지 몰라 어정쩡하게 굴던 문서윤은 두고 가기로 결정을 내리고는 문을 열었다. 우연재가 저런 간식거리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은 없어도 여자 친구가 산 물건이니 다를지도 몰랐다. 연애를 하면서 제 취향대로만 고집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다.

“서윤아.”

그대로 내려서려던 문서윤은 고개만 돌려 우연재를 응시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받지 마.”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평소의 우연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서윤은 어렵지 않게 그의 기분이 상했음을 눈치챘다.

“나 질투 많은 거 알잖아.”

눈웃음에 가려지는 눈동자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젤리 하나에 질투하는 우연재를 가만히 보고 있기가 버거웠다. 문서윤은 혀끝을 깨물며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선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기숙사로 향했다.

“하…….”

기숙사 로비에 들어선 뒤에야 참았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산소가 부족했는지 눈가로 열이 올랐다. 문서윤은 괜히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화를 내는 우연재보다 사소한 일에 질투를 내비치는 우연재가 더 낯설었다.

* * *

우연재는 무료한 낯으로 유리잔을 매만졌다. 무언가에 골몰한 사람처럼 시선은 투명한 잔에 고정된 채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꺼풀이 스르르 움직인 건 누군가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을 때였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김선주가 미안한 기색으로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괜찮아. 오래 안 기다렸어.”

“점심은 먹었어?”

“교수님이랑.”

“교수님?”

교수님이라는 단어에 김선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연재는 간결하게 정정했다.

“문서윤 아버지.”

“서윤이 아버지? 아아, 맞아. 저번에 교수님이라고 했지. 그럼 서윤이도 같이 먹은 거야? 마지막 시험 같이 쳤잖아.”

“응.”

“부모님이랑 식사할 정도면 진짜 친한가 보네. 둘이 친한 건 알고 있었는데 신기하다.”

남자들도 이렇게 친한 경우가 있구나. 김선주는 뒷말을 이으며 빨대를 휘저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섞여 들었다.

“얼마 전에 문서윤 만났다며.”

“어떻게 알았어? 오늘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김선주는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곧 하얀 얼굴 위로 장난기가 서렸다.

“질투 안 해?”

“질투?”

우연재가 되물었다. 이 상황에 질투라는 단어가 왜 나오지,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뻔히 예상한 반응에 김선주는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팔을 툭 건드렸다.

“자기 은근 질투 없더라? 나 늦게까지 술 마셔도 뭐라고 안 하고. 고등학교 친구들 만난다고 해도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내가 부모님이야? 애인 그런 부분까지 통제하게?”

피식 웃는 얼굴에도 김선주는 부루퉁하게 뺨을 부풀렸다.

“친구들은 나보고 애인이 지나치게 간섭 안 해서 부럽다는데 가끔은 서운하단 말이야. 나한테 관심 없나 싶어서. 원래 누구 좋아하면 막 통제하고 싶고 그러지 않아?”

“지금까지 이상한 새끼들만 만났어?”

“네가 더 이상한 거거든요.”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다. 김선주는 에이드를 빨대로 휘저으며 옆에 앉은 남자 친구를 쳐다봤다.

우연재는 객관적으로 봐도 괜찮은 남자 친구였다. 외적으로도 그랬지만, 성격적으로도 그랬다. 기본적으로 다정한 편인 데다 무엇이든 맞춰 주는 쪽이라 연애하기 편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고는 했다. 가끔 사소한 일로 서운하게 만들 때가 있긴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맞다, 우연재. 누가 여자 친구한테 거짓말하래?”

“김선주한테 거짓말한 적 없는데.”

“오피스텔 아무도 못 들어간다며. 부모님도 안 된다고 했으면서. 서윤이가 자기는 갔다던데?”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문서윤과 단둘이 마주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것저것 물었겠거니 생각은 했으나, 설마하니 오피스텔 얘기까지 나왔을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했길래 오피스텔까지 나왔지.

“나도 가 보면 안 돼? 애인이 하도 깔끔 떨어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진작에 끝낸 얘기였다. 미미한 성가심이 차올라 우연재는 제 여자 친구를 불렀다.

“선주야.”

다정한 목소리였다.

“서로 선 넘지 않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말실수를 했다 싶었는지 김선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 있나 싶어 우연재는 잠시 기다렸다. 그가 말을 이어 나간 건 김선주가 입을 꾹 다물었을 때였다.

“우리가 상대방 사적인 영역에 들어갈 만큼 오래 안 건 아니지 않나?”

상냥한 물음은 무척이나 가벼운 어조였다.

“누가 보면 몇 년은 사귄 줄 알겠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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