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38)화 (38/139)

38화

반응이 어색하지 않았는지 송주아가 캐리어에 음료를 담아 내밀었다.

“마셔 보고 괜찮은지 사장님한테 말해 주세요.”

“알았어. 형 음료만 아니면 도와주다 갔을 텐데 미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어휴, 이 오빠 이렇게 착해 빠져서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지.”

카운터 밖으로 나온 송주아가 등을 떠밀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일할 생각 하지 말고 좀 놀아요.”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 문서윤은 황급히 캐리어를 들어 보였다.

“고마워, 주아야. 갈게. 월요일에 봐.”

“잘 가요. 어서 오세요!”

경쾌한 인사를 뒤로하고 카페를 빠져나오자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고작 봄바람이 모자를 날릴 리 없는데도 문서윤은 괜히 모자를 깊이 눌러쓴 뒤 기숙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던 혼잣말이 그 위를 깨무는 잇새에 먹혀들었다. 연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마음은 갑작스레 흘러넘치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겨워했다.

또 잡념에 질식될 것 같아 문서윤은 걷는 속도를 높였다. 걸음이 빨라지자 자연스레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시선이 절로 내리깔렸다. 노란색 레모네이드 옆에는 병에 담긴 밀크티가 놓여 있었다.

“…….”

제가 지닌 감정의 색채는 이런 빛일 테다. 불순물을 걸러 내고 또 걸러 내도 결국은 흙탕물일.

안으로 들어가자 목에 수건을 걸친 남태은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채였다.

“왔냐, 똥강아지.”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형.”

모자를 눌러쓴 덕에 표정을 들킬 일은 없을 텐데도 목소리에서 티가 났는지 남태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너 목소리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저 좀…….”

문서윤에게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우연재를 제외하면.

“도와주세요.”

그러나 지금은 우연재를 제외한 사람이 절실했다.

허물어짐의 원인이 우연재였으므로.

문서윤은 침대와 침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 다리를 구긴 채로 앉았다. 고개를 숙이자 모자챙이 무릎 위로 닿았다.

“아오, 담배 말리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굴던 남태은이 깊은 한숨과 함께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 다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 다리를 한껏 당겨야만 했다.

“야, 똥강아지. 너 걔 때문에 그러지? 짝사랑.”

입술을 달싹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톡 튀어나온 도움 요청에 말실수를 했다 싶어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던 참이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도 굳이 좁은 공간에 구겨 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마음이 좋지 않으면 피아노 아래에 쪼그리고 앉던 버릇 때문인지 문서윤은 종종 좁은 공간을 찾아 몸을 구기고는 했다.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말고는 너 힘들게 할 만한 일이 없으니까. 네가 돈이 없냐, 시험을 죽 쑤냐, 연애를 하냐?”

남태은이 툴툴거리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인마, 모자 써도 표정 대충 보이지. 입만 봐도 알겠더만.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한 다음에 입술 깨문 거 다 봤다. 너 지금 말실수했다고 생각하잖아.”

고작 1년 남짓이었는데도 가까이 지낸 시간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남태은이 불시에 모자를 벗겨 침대 뒤로 휙 던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뺨 위로 차가운 감각이 닿았다.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레모네이드였다.

“문서윤아. 남자가 짝사랑 때문에 우는 거 아니다.”

“안 울었어요.”

“울 것 같은데. 거울 보여 줘?”

문서윤은 뺨에 달라붙은 테이크아웃 잔을 떼어 내며 눈을 피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어깨를 으쓱인 남태은이 잔을 거두어 가며 운을 뗐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생각은 없는지 빨대를 꽂아 음료를 마시기까지 했다.

“살다 살다 문서윤한테 도와 달라는 얘기를 다 듣네.”

“그냥 말실수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말실수 같은 소리 하네. 혼자서 썩히다가 곪아 터진 게 튀어나온 거겠지.”

빨대로 얼음을 휘젓자 차가운 굴곡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야, 똥강아지. 형아 못 믿냐?”

문서윤은 남태은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진 뒤에야 그를 마주 봤다. 축축하게 젖은 노란색 머리카락과 목에 건 수건 때문에 그리 진지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표정만큼은 단단했다.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앞에 두고 입을 다물고만 있기도 뭣했다. 심지어 도움을 요청한 건 이쪽이었다. 문서윤은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겨우 목소리를 끌어냈다.

“그게 아니라……. 사실 답이 없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형한테 어리광 부린 것 같아서 미안해서 한 말이에요. 도와줄 수 없는 일인데 도와 달라고 한 거니까.”

“일단 얘기부터 들어 보자. 왜 갑자기 멘탈 깨졌는데?”

남태은의 어깨 너머로 밀크티가 든 병이 눈에 띄었다. 뚜껑을 열어 쏟아붓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단단한 벽 안에 고여 있을 테다. 해묵은 제 감정처럼.

“어제 만났는데…….”

“만났는데.”

“걔가 저한테 질투했거든요.”

“너한테? 왜?”

“제가 걔 애인한테 뭘 받았는데 그거 보고 질투하더라고요. 이런 거 받지 말라고.”

“으음, 그건 그럴 수 있지.”

역시 그럴 수 있구나. 하긴, 우연재도 평범한 사람이니 질투심이 있을 테다.

“그런데 저는 걔가 질투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마음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단순히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한 단어로는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아까 카페 갔을 때 어제 그 친구 왔었다는 얘기 들었거든요. 여…… 아니, 애인이랑.”

“엉.”

“사귀는 사이니까 데이트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괜히 형한테 그 소리 한 거예요. 걔한테 애인 생겼다는 소식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기분 이상하더라고요.”

문서윤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때는 걔가 애인이랑 있는 걸 막연하게만 상상했었는데, 지금은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아니까 그런가 봐요.”

말을 꺼내고 보니 참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별것도 아닌 일에 흔들려 도와 달라는 말을 꺼냈다는 사실이 창피해졌다. 문서윤은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뺨을 문질렀다.

“그게 다야?”

남태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역시 너무 구질구질했나.

“다른 이유가 있어야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보기엔 본질적인 문제가 따로 있고 네가 그것 때문에 더 상처받은 것 같거든.”

본질적인 문제. 문서윤은 단번에 말뜻을 이해했다. 저도, 우연재도 남자라는 게 문제였다.

만약 이성이었다면 고백했을지도 몰랐다. 친구 사이에 흔히 품을 수 있는 감정이었고, 또 저만 마음을 버린다면 원래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저도 우연재도 남자인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삶을 같이해 온 친구를 고작 좋아하는 감정 하나 때문에 잃고 싶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 안쪽의 여린 살만 깨물었다. 남태은이 함부로 말을 옮기고 다닐 사람은 아니어도 선뜻 말하기는 어려운 주제였다.

“똥강아지.”

“네?”

“하…….”

남태은이 정면의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침묵 끝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린 그는 마침내 문서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걔 남자지?”

“……네?”

“네 소꿉친구.”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당황함이 하얗게 질린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남태은이 다리를 툭 건드렸다.

“야, 놀라지 마. 나 편견 없으니까. 혹시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이딴 오해도 안 한다. 씹새끼들이 동성애자면 다 지들 좋아하는 줄 알어.”

“아,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금방 긍정할 생각은 없었는데, 절로 물음이 튀어 나갔다. 남태은의 별것 아니라는 표정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우연…… 지? 재? 아, 우연재. 학교에서 존나 유명하더만.”

남태은이 레모네이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서윤아. 일단 나 그렇게 입 싼 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전에 과방 갔더니 애들이 경영 우연재 얘기하고 있더라고. 경영학과라고 하니까 너 생각나더라.”

“아…….”

“근데 네 얘기도 같이 나오데? 친한 사이라며, 너네 둘이. 그래서 설마설마했는데……. 왜, 우리 긱사에서 처음 만나서 술 마신 날. 그날 네 친구한테 전화 왔었다고 했잖아.”

“네.”

“내가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목소리는 기억나거든? 분명 남자 새끼였단 말이지.”

문서윤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우연재의 한마디에 상처받았고, 볼품없이 울었고, 그 꼴을 다른 이에게 고스란히 들킨 날이었다.

“근데 네가 오늘 또 이러고 들어오니까 단순히 친구는 아니겠구나 싶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남태은이 빨대를 입술 사이로 물며 눈치를 살폈다. 제가 불안해하거나 당황스러워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살면서 우연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마음의 동요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아마 상대가 남태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날 티 나 보이긴 해도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우연재가 모르는 사람이라 안심이 됐다.

“너 당황스러울까 봐 말하는 건데 나도 뭐, 주변에 비슷한 사람 있고……. 아무튼 어디 가서 소문내고 다닐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걱정 안 해요. 제가 형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제야 안심했는지 남태은이 씨익 웃으며 다시 침대에 등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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