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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9)화 (39/139)

39화

“아무튼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이유도 이제 이해되네. 엄청 친한 친구인데 걔가 헤테로면 고민할 만하지. 고백할 생각은 없고?”

“없어요. 형 만난 날 울었던 것도 걔가 남자 좋아하는 거 ……더럽다고 해서 그런 거예요.”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불쾌해할까 봐 조심스레 말했는데도 남태은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심한 표정은 오히려 제 고민에 골몰하느라 바빠 보였다.

“으음. 고백했다가 평생 친구 날아갈 수도 있겠네.”

“네. 근데…….”

문서윤은 입술을 짓씹었다.

“제가 남자 좋아하는 거 눈치챘더라고요.”

“엉?”

마지막 남은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이던 남태은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저도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눈치챘어요.”

“그래서 뭐라는데?”

“아니라고 둘러대긴 했는데 거짓말하는 거 모를 줄 아냐면서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렇게 넘어갔다고?”

“넘어간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예요. 걔 성격상 제가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릴 거고.”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설명하자 남태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게이 더럽다고 하는 것치고는 반응 유한 것 같은데.”

그건 우연재와 제가 소꿉친구라 그럴 테다. 어쨌거나 가장 오래 봐 온 사이였으니까.

문서윤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마음을 들키지 않는 이상 관계가 끊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저희 소꿉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빨리 손절 할 관계 아니에요.”

“걔가 눈치 깐 지 얼마나 됐는데.”

“몇 주 된 것 같은데……. 중간고사도 끝나서 제가 이야기 꺼내는 거 기다리고 있을걸요.”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우연재가 잊어버릴 때까지 버틴다는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잊어버릴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직접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어떻게든 확언을 듣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문서윤은 눈만 깜박였다.

“걔를 그만 좋아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걔를 좋아한다는 걸 들키기 싫은 거야.”

그만 좋아한다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이었다. 우연재를 그만 좋아하는 게 가능한가? 마음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없을 텐데.

2년이라는 시간을 목소리도 듣지 않은 채 교류 없이 보냈다. 그랬는데도 접지 못한 마음이었다. 우연재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그것도 제가 남자를 좋아한단 사실을 모르기 전에 내뱉은 한마디에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만 좋아하고 싶은 거냐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과 그만 좋아하고 싶은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전자는 무의식이지만 후자는 마음을 떼어 내기 위한 노력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연재를 그만 좋아하고 싶은 건가. 문서윤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이 나왔다. 꽉꽉 숨긴 이 홑마음이 벅찰지언정 그만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우연재를 좋아한다는 건 일상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답은 명료했다. 여태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기에 더욱 선명한 답이었다. 한 번도 가정하지 않았다는 건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들키기 싫어요.”

남태은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길을 보내올 뿐이었다.

“야, 문서윤아. 솔직하게 말할까.”

진지한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하게 변했다. 그에게서 나올 말이 예상돼 문서윤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네가 마음 접는 거야.”

조심스러운 충고는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 말이 해답일 것이다.

“걔 여자 친구 있다며? 오래 사귀었고.”

“2년은 넘었으니까…….”

“나는 솔직히 네가 마음 접는 게 맞다고 보거든? 오지랖인 거 아는데, 나 너 많이 아끼고, 그래서 네가 애먼 새끼 때문에 상처받는 거 별로라 하는 말이야. 네 감정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남태은이 마음을 접으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결국 상처받는 건 제가 될 테니까. 하지만…….

‘모르겠다.’

어떤 게 옳은 방향인지,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음을 접으면 편해지리라는 건 자명했다. 우연재 옆에 다른 사람이 설 때마다 괴로워할 일도,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일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접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면 진작 날려 보내고도 남았다.

“근데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남태은이 투명한 빨대를 질겅질겅 씹어 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치미는 흡연 욕구를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우연재에게 비밀을 들킨 날이었다.

‘너……. 씹, 남자 좋아해?’

담뱃재 덕분에 생긴 물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그마한 상처 하나에 간신히 얻어 낸 유예 기간이었다.

“그래서 걔한테 뭐라고 할 건데.”

“뭐가요.”

“걔가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안다며. 그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며. 다시 얘기할 때 뭐라고 할 거냐고.”

말이 혀끝에서 걸렸다. 문서윤은 머릿속에서 흘러 다니던 형체 없는 그림들을 꾸역꾸역 짜맞추기 시작했다.

“남자 좋아하는 건…… 일단 그렇다고 해야죠. 또 거짓말해 봤자 확신만 주는 꼴이니까.”

“좋아하는 사람 물어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핑계 대려고?”

“그러고 싶은데……. 제 주변 사람 중에 걔가 모르는 인맥이 거의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친한 사람들 좀 만들어 둘 걸 그랬나, 조금 후회스러워졌다.

물론 이제 와 후회한다 한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더라도 우연재가 모르는 친한 친구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초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그와 붙어 다녔으니 새로운 사람을 사귈 만한 틈이 없었다. 1년의 대학 생활 후 곧바로 입대해 버리기도 했고.

“환장하겠네, 진짜.”

한숨을 내뱉은 남태은이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깐만. 너 알바하잖아.”

“네.”

“카페 단골이라고 구라 쳐.”

“카페 단골이요?”

“엉. 걔가 너 알바하는 거 내내 지켜본 것도 아니잖아. 단골이라고 하면 알 게 뭐야. 이왕이면…… 어, 그래. 회사원이 좋겠네.”

거짓말이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너 요즘 알바 저녁 타임이잖아, 평일이고. 복학 전에는 몇 시에 했는데?”

“거의 오후부터 마감까지요.”

“딱 좋네. 회사원들 출퇴근 시간에 카페 자주 다니니까.”

“근데 대학가잖아요. 회사원들 있기는 해도 많지는 않은데…….”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놈이 어디 있냐. 그리고 네가 그렇다는데 자기가 뭐 어쩔 건데.”

그런가. 남태은의 화술 때문인지, 예상치도 못하게 생긴 핑곗거리 때문인지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르바이트 시간이 저녁 타임이었고, 실제로 출퇴근 시간에 들르는 회사원들도 적지는 않으니 적당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끝내야 될 얘기라며. 이왕 거짓말할 거 그럴싸하게 해야지.”

남태은이 질겅거리던 빨대를 테이크아웃 잔으로 툭 던져 놓았다. 담배꽁초를 버리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어차피 얘기할 거면 최대한 빨리 끝내라. 걔가 다시 얘기 꺼내기 전에 네가 먼저 꺼내.”

“…….”

“얘기 안 해서 속 곪는 사람은 걔가 아니라 너니까.”

문서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태은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우연재가 다시 묻기 전에 선수 치는 게 낫지 않을까, 줄곧 생각해 오던 차였다. 불시에 찔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대비를 한 후 찔리는 게 덜 아플 테다.

“야, 똥강아지.”

굽히고 앉은 다리 위로 차가워진 손이 닿았다.

“걔한테 절대 들키지 마라. 상처받기 싫으면.”

문서윤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할 자신은 없지만, 제 마음을 끄트머리만큼도 들키고 싶지 않으니 어떻게든 노력해야 했다.

* * *

이야기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전에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해도 나름 시간이 넉넉했는데, 조별 과제가 몰아닥치자 근래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숨 돌릴 틈을 만들었을 때는 어느덧 금요일이었다.

“바빠?”

문서윤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강의실을 나서던 길이었다.

“문서윤보다는 안 바쁘지.”

눈동자가 느릿하게 닿아 오더니 이내 가느스름하게 휘어졌다.

“친구들 생겼다고 소꿉친구 막 버리네…….”

“무슨 친구들이야. 후배들이지. 그리고 과제 한 거라니까.”

“작년에 한 거 보여 준다니까 거절한 사람 누구더라.”

평소처럼 대화하고 있자니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잔뜩 힘을 싣고 있던 손이 점차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찾아갔다.

“누가 조별 과제를 다른 사람 거 보고 해.”

“내 자료 구하기 힘든데.”

“장담하는데 교수님 네가 한 거 기억하고 계실걸.”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선의는 고마웠으나 친구의 자료를 가져다 쓸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나란히 걸으며 티 나지 않게 우연재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속에 준비해 둔 말 때문인지 얼굴을 전처럼 바라보기 어려웠다. 질투가 많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시간 돼?”

“선주 만나기로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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