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내일이면 주말이니 당연히 주말에 만나지 않을까, 지레짐작한 게 우스웠다.
“왜?”
문서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려야 할지, 아니면 욕심을 내야 할지 고민했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우연재를 양보했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빨리 그와 저 사이에 묻어 둔 문제를 끝내 버리고 싶었다.
“내일 주말이잖아. 주말에 안 만나?”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는 거지.”
우연재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 때나 볼 수 있구나. 시간이 되냐고 묻는 것조차 여자 친구의 영역을 침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어?”
“이제야 나랑 놀아 줄 마음 생겼어?”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문제를 조금 더 묻어 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나 할 말 있는데.”
그러나 언제까지고 미뤄 둘 수는 없는 문제였다. 또렷하게 내뱉는 말에 우연재의 시선이 천천히 굴러왔다. 할 말의 주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눈치챈 표정이었다.
“아, 할 말.”
“…….”
“으음, 알았어.”
시선이 핸드폰으로 비껴가더니 기다란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 나 때문에 여자 친구도 못 만나는구나. 김선주를 향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여자 친구 안 만나도 돼?”
결국 문서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자 친구 때문에 소꿉친구 내팽개치면 안 되지.”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듯 우연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모호하게 들렸다.
“애인 생기면 나 내팽개칠 건가 보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우연재와 비슷한 표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벌써 내팽개쳤으면서.”
웃음기가 잔뜩 섞인 뒷말은 농담처럼 가벼웠다.
“그래서.”
다정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이어졌다.
“어디 갈래.”
차가 멈춰 선 곳은 널찍한 공터였다. 주변에 한적한 공원이 껴 있어서인지 군데군데 주차된 차들이 보였다. 다들 봄바람을 쐬러 나갔을 테니 대부분은 빈 차일 테다.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해.’
‘아. 조용한 데까지 가야 돼?’
우연재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차를 이곳까지 끌고 왔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장소였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는 게 편했다.
표정 관리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지만, 대화 주제를 돌리기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할 말 있다며. 해.”
“우리 저번에 하다가 만 얘기 있잖아.”
밤새 몇 번이나 상상하고 대비했는데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문서윤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긴장한 티가 나더라도 이 정도 습관은 괜찮을 듯했다. 친구에게 동성을 좋아한다고 밝히는 순간은 누구나 다 긴장할 테니까.
거짓말만 들키지 말자.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한테…… 남자 좋아하냐고 물어본 거.”
“응.”
문서윤은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우연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연재는 핸들에 팔을 올려 두고는 그 위로 머리를 기댄 자세였다.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맞아.”
“뭐가 맞는데.”
집요한 물음에 문서윤은 규칙적으로 눈을 깜박이기 위해 노력했다.
“남자…… 만 좋아하는지는 모르겠고.”
한 자 한 자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아직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남자야.”
“하…….”
긴 한숨을 내뱉은 우연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옆으로 흘러갔다 느릿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게 누군데.”
“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문서윤은 잠깐 시선을 떨어트렸다. 절대 들키지 말라던 남태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모르는 사람.”
다행히도 다음 말을 이어 갈 때는 우연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으며 사방에 고요한 침묵이 깔렸다.
“…….”
우연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막한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핸들을 두드리는 미약한 소음이 전부였다.
제 귀에만 크게 들리고 있을 심장 박동을 절묘하게 가려 주던 그 자그마한 소음은 머지않아 뚝 하고 멎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누군데.”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거세게 달음박질치던 심장이 단번에 떨어졌다. 차라리 남자를 좋아하냐 묻던 격양된 목소리가 더 나을 것만 같았다.
“내가, 씹……. 널 몰라? 내가 모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싸늘한 입술 사이로 친구들의 이름이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곤란했다. 마지막 종착지는 우연재가 될 것이다.
문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2년 만에 만났잖아. 네가 모르는 사람 생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거짓말은 아니니, 거짓말을 내뱉을 때의 습관은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하.”
생략된 뒷말을 알아들으리라는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우연재가 짤막하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아래로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말투만큼이나 평온하게 제자리를 찾자 시커먼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새끼길래 문서윤을 홀려 놨냐고.”
그제야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우연재는 화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편이었다.
목소리와 행동이 정적으로 변한다는 의미였지, 사나운 기색까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걸린 미소가 자취를 감추자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우연재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버거울 뿐이었다.
“나는…… 네가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
말을 고르고 또 골라야 했다. 혹시나 우연재가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습관을 읽어 낼까 봐 무서웠다.
“문서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화낸 적 있어?”
문서윤은 아니, 라는 대답을 삼키며 혀끝을 깨물었다.
애초에 우연재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웃는 낯으로 빈정거리는 편이라 티가 잘 나지 않기도 했지만, 날것의 감정을 드러낸 것도 문서윤이 기억하기로는 중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렇다 해도 17년 동안 봐 온 사이이니 한 번쯤은 제게 화가 나는 상황이 있었을 텐데도 우연재는 단 한 번도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대개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답 안 하네. 내가 지금…… 하, 너한테 화내는 것 같아?”
“너랑 있는 사람은 나잖아.”
“응. 문서윤이랑 있는 사람 나잖아.”
너른 어깨 너머로 살랑거리는 봄 풍경이 스쳤으나 문서윤은 그 풍경을 눈에 담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우연재가 아닌 그 외의 것들이 보일 텐데, 그 조금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제 와 눈을 피하기에는 직시하는 시선이 너무나도 집요했다.
“근데 왜.”
우연재가 나지막하게 욕을 짓씹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문서윤은 잠깐 시선이 엇나간 틈을 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너무 긴장해 몸을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 지금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네가 좋아한다던 그 새끼한테 화나는 거지.”
“그러니까 왜 그 사람한테, 네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나지막하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슬그머니 시선을 끌어 올렸다. 핸들에 팔을 올린 우연재가 눈썹을 찡그린 채 실소하고 있었다.
“왜겠어, 서윤아.”
“…….”
“네가 남자를 좋아해?”
숨소리 사이로 헛웃음이 섞여 들었다.
“치근덕거리는 새끼들 때문에 소리도 못 내고 울 때는 언제고…….”
어릴 때 이야기였다.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과거이기도 했다.
외모나 피아노에서 파생된 소문 때문에 적잖이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다들 어렸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휩쓸리고, 치기 어리게 행동하는 철부지 어린애들이었을 뿐이다. 우연재 앞에서 서럽게 울던 기억도 이제는 희미했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야.”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정말이지 조금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우연재를 좋아하는 감정과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의 일들은. 분명한 감정이었기에 거짓말을 끼워 넣을 필요도 없었다.
집요하게 얼굴을 훑어 내리던 우연재가 하, 짧게 헛숨을 내뱉었다.
“단단히도 홀려 놨나 보네?”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는 뾰족하기만 했다. 얄팍하게 비틀린 입매를 보고 있자니 김현승의 말버릇이 떠올랐다.
‘우연재 저 새끼 분명 전생에 구미호였을걸. 속 존나 시커메 가지고. 근데 와꾸 하나로 사람들 홀려서 간 쏙쏙 빼먹었겠지.’
정말 홀렸을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 쏟아지던 빗소리가, 비를 뚫고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늘 제 자리였던 피아노에 대신해서 앉은 우연재가 너무나도 예뻐서. 그리고 그 다정함이 하릴없이 좋아서.
간을 빼 줄 수는 없으니 마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냐고. 네가 넘어갈 정도면 작정하고 꼬셨겠지. 아니야?”
때로는 작정하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나쁠 때도 있었다.
“남자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라며. 그럼 네가 씨발, 어디 허튼 데 다녔을 리도 없고……. 가만히 있는 애 꼬실 정도면 몸 달아서 발정 난 새끼라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꼬신 거 아니…… 하, 어차피 말해도 모르잖아, 너.”
“말해도 모르는데 왜 말을 안 해 주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새끼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