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시선을 돌린 건 그다음이었다. 밴드를 만지작거리는 어색한 손가락, 눈치를 보듯 유순해진 눈매, 약간 벌어졌다 닫히는 입술.
‘내가 지금까지 네 버릇 하나 눈치 못 챌 정도로 너한테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당사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만약 문서윤이 그렇게 알고 있으면 존나 섭섭할 것 같네? 우리가 몇 년을 알았는데…….’
되도 않는 새끼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나중에 다시 얘기해. 말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우연재는 자신을 매우 잘 알았다.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가다간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올 게 자명했다.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지레 겁먹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고분고분하게 문서윤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물러 터져 놓고…….”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이 이야기를 꺼내리라 예상하긴 했다. 설마하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지만.
하, 우연재는 헛웃음과 실소가 뒤섞인 숨을 흘려보냈다. 고해성사를 바란 건 아니었다. 재차 부정하길 바랐지.
이번에는 거짓말이 티가 나도 묻어 줬을 것이다. 문서윤과 그렇게 헤어진 이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갑작스레 떨어진 선고가 아닌, 유예 기간이 있는 고백이었다. 어느 정도 머릿속을 정리했으니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문서윤에게 더러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려는 인간들은 늘 그랬듯 제가 적당히 쳐 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문제없는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 나가면 저 역시 안심했을 테다.
‘퇴근 시간 때 들르는 회사원이야.’
우연재는 날카로워진 눈매로 경직된 뺨을 매만졌다.
“회사원이라고.”
문서윤이 아무 교류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리는 없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식는 성격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곁을 내주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다. 사교성 좋기로 소문난 김현승과도 친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하루에 고작 몇 분 마주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것도 남자를.
잇새로 욕설이 짓씹혔다. 남자와 붙어먹는 문서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별 같잖은 새끼들 때문에 그렇게 울어 놓고, 남자를 좋아한다고?
우연재는 별것 아닌 장난질 때문에 눈가가 무를 때까지 엉엉 울던 하얀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둥그런 눈매에서 마찬가지로 동그란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쳤다. 너무 새까만 색이라 정확히 이름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었다.
문서윤은 모나지 않게 살아야 했다. 모나게 살기에는 천성이 물러도 너무 물렀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새끼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보통 그런 놈들은 연약한 상대를 귀신같이 찾아내고는 했다. 문서윤을 발견하는 즉시 말랑하기 짝이 없는 모서리를 억지로 파고들어 통째로 집어삼킬 터였다.
저라는 울타리가 있는데 자진해 가시밭길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렇다 해도 문서윤을 그런 꼴이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이성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별난 짓이었다.
문서윤은 평범하게 살아야 했다. 유별나지 않게.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감정 때문에 쓸데없는 일로 마음고생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겹마음도 아니었다. 짝사랑이니, 한 사람만 파묻으면 그만일 마음이었다.
“하, 씨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욕설까지 막기에는 머릿속이 이미 한계였다. 그래서 도대체 누구지.
문제는 문서윤이 아니었다. 순진한 애를 꼬드겨 연약한 마음에 들어앉은 새끼였지.
우연재는 문서윤이 감정을 묻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역 후라면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감정이었다. ……전역 후에 마주친 상대가 맞는다면.
좀먹히지 않은 이성이 머릿속에서 사이렌을 울려 댔다.
불현듯 그날의 밤이 기억을 헤집었다. 담배 연기가 어떤 맛이었는지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에 익은 감각이라고는 입술 사이로 느껴지던 하얀 물체의 질감뿐이었다. 살짝 젖어 축축한.
“좆같네, 진짜…….”
입에도 대지 않는 담배가 문득 떠오른 건 지금 제 기분이 더럽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재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야, 씨발. 너 절대 밖에서 사람 치지 마라. 빵 간다. 이 새끼는 갈수록 주먹이 매워지냐.”
이진혁이 헤드기어를 벗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를 힐긋 쳐다본 우연재는 말없이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한바탕 몸을 움직인 덕분에 그럭저럭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까득. 병뚜껑을 따는 소리가 다소 사납게 들렸다.
“하여간, 우리 도련님 취미도 고상하셔. 빡돌면 사람 패는 버릇 여전하다?”
“프로가 일반인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냉동실에 넣어 둔 생수는 차가웠다. 우연재는 얼음장처럼 싸늘해진 물을 마시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진혁이 낄낄거리며 배를 문질렀다. 스파링을 하다 맞은 곳인 듯했다.
“또 뭐에 심기가 비틀리셨을까.”
“…….”
“우연재 중딩 때부터 봤는데 설마 내가 너 빡돌았을 때랑 아닐 때랑 구분을 못 하겠냐?”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남자는 프로 복서였다. 우연재의 눈에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형이 아닌 아저씨였고. 동네 아저씨 이미지답게 오지랖이 끝 갈 데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또 그 친구 때문이지?”
우연재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눈꼬리를 찡그렸다.
애초에 이진혁을 만나게 된 것도 ‘그렇게 주먹질을 하고 싶으면 사고 칠 게 아니라 프로한테 해라.’라는 아버지의 명령 아닌 명령 때문이었다.
어린 도련님을 이상한 방식으로 보모 해 주는 대가로 후원을 약속받았으니 이진혁에게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지금 운영 중인 복싱장까지 포함된 거래였다.
우연재가 빡도는 원인에는 대부분 문서윤이 있었으므로, 그 역시 도련님의 오래된 소꿉친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왜? 걔 군필이잖아. 설마 군필자 건드리는 새끼들은 없을 거고. 연애한대?”
짝사랑이라던 고해성사가 떠올랐다. 고백이나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나 모를 일이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이진혁이 휘파람을 불며 글러브를 정리했다.
“한창 좋을 때네. 연애하라고 해. 대학 다닐 때 아니면 언제 풋풋하게 사귀냐.”
상대가 여자였다면 별말 안 했을 것이다. 괜찮은 사람인지는 직접 만나서 판단하면 될 일이었고, 별로라면 문서윤 모르게 쳐 낼 자신도 있었다. 남자라는 게 문제였지.
“하긴, 도련님 사람 보는 눈 존나게 까다롭지. 아니면 주변 사람 소개해 주든가.”
우연재는 단번에 비운 생수병을 가볍게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널뛰는 감정을 간신히 다스리긴 했어도 기분이 좆같기는 매한가지였다. 불쾌한 기색을 읽어 낸 이진혁이 혀를 찼다.
“그게 우정이냐?”
“난 우정이라고 한 적 없는데.”
“얼씨구? 그럼 뭔데.”
“가족애죠.”
단순히 우정이라 칭할 관계는 아니었다. 단순한 우정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연재는 제가 문서윤에게 느끼는 소유욕 비슷한 감정을 가족애라고 정의 내렸다. 어릴 때 만났고,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고, 또 오랜 시간을 알아 왔으니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린아이나 가질 수 있는 천진한 소유욕은 나이를 먹으며 가족애로 편입됐다. 문서윤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고작 친구라고 칭하기에는 그 관계가 너무나도 아까웠다.
“가족애 같은 소리 하네. 누가 들으면 한집에 산 줄 알겠다.”
“걔가 우리 부모님 호적에 들어오면 두 분은 오히려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버지 만나면 물어봐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야. 내가 회장님 만날 일이 뭐가 있냐. 하여간 도련님이라 그런지 유별나.”
이진혁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기에 우연재는 등을 돌렸다. 오후에 헤어진 뒤 자정에 가까운 지금까지 스파링을 했으니 문서윤에게 온 메시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핸드폰을 확인하려는데 뒤따라온 이진혁이 어깨에 팔을 감았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접촉이 불쾌해 우연재는 성가시다는 듯 제게 달라붙은 팔을 거리낌 없이 쳐 냈다. 굳이 땀에 젖은 피부가 아니더라도 남과 닿는 것 자체가 질색이었다.
“도련님. 여자 친구 미대라고 하지 않았어?”
우연재의 성질머리와 결벽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이진혁은 당황하는 대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닌가? 그건 전 여친인가? 그, 왜, 있잖아. 스무 살 때 사귄 여자 친구.”
“걔가 걔예요. 맞아요, 미대.”
“오. 그럼 유럽 미술관도 많이 가 봤겠네?”
“작년에 1년 내내 나가 있던 걸로 아는데. 미술 관심 있었어요?”
“아니, 내 여자 친구가 유럽 여행 가면 미술관 투어하고 싶다는데 미대생 눈에는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궁금해서. 나는 운동만 했는데 뭘 알겠냐.”
새로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우연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화면을 껐다. 물을 마셨는데도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서인지 계속해서 갈증이 일었다.
“전공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나 해서.”
“만나면 물어볼게요.”
이곳을 찾은 목적은 그럭저럭 이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온몸이 찝찝했으나 공용 샤워실을 사용하는 것보단 오피스텔에 가서 제대로 씻는 편이 나았다.
“야, 아무튼.”
낯부끄러운 부탁을 한 게 머쓱했던지 이진혁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번에는 정확히 옷 위였다.
“뭐 때문에 빡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괜한 걱정 하지 마라.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렇지, 일단 문제가 생기잖아? 뭐가 됐든 시간 지나면 어떻게든 해결된다니까?”
근원부터 잘못되었으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고민 상담을 위해 찾은 장소도 아니라 우연재는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그리고 너처럼 무서운 거 없는 새끼가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
무서운 거 없는 새끼.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있는 집 외동아들로 태어났는데 세상 무서운 게 뭐가 있겠냐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문서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섭다는 감각을 모르고 지내 왔으니까.
우연재가 그런 결의 감정을 처음으로 인식한 건 문서윤을 만난 이후였다.
‘우연재. 나, 흣, 이, 제, 흐윽, 어떡해…….’
우는 얼굴을 본 순간, 처음으로 무섭다는 감각이 찾아왔다.